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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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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1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현재 한일 외교 관계는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하여, 최근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교 갈등 국면이 이어지는 한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일 간의 외교 문제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숙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 진실 규명을 위한 한일 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할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지난 2019년 6월 5일 좌담회를 진행했다. 본 좌담회는 지금의 한일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 전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의 이슈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국제적 맥락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이슈죠. 하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은 따라가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용어가 많고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사건과 맥락을 웹진 <결>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기정 90년대 초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한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해서 외무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하여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어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을 했고, 그 입장을 정리한 결과가 1993년의 고노담화입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죠. 이어서 일본 정부는 민간기금의 형식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법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이는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결 노력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민의 성의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죠. 그래서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해결과 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양상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협의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줄곧 제기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원 트랙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치워야 하는 현안이었죠. 그 결과 우리로서는 굉장히 미흡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이하 12.28 합의)가 나오게 된 거죠. *편집자 주 원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하나의 외교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방식 투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하여 대응하는 방식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결정과 2015년의 12.28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본격적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고요. 외교적, 법적 문제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정부의 방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외교적 현안을 이해할 때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양현 12.28 합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각 정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 대체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어요. 물론, 이명박 정부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보다는 한일 신뢰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방침도 있기는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문제에 있어서 (고노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세를 취했는데요, 2006년 아베 정부가 들어오면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부인 등 고노담화를 재검증하려고 하는 듯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역사수정주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약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한일 양국의)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을 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개인의 이념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대법원의 결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방침을 실질적으로 변경시킨 효과가 있었어요.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일본과 실리위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고 과거사에 관한 것은 외교부의 아젠다로 삼지 않겠다고 표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 결정이 나오니까 입장을 바꿉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공식 외교 아젠다로 제기합니다. 2011년 12월 교토회담이 이렇게 이루어지죠. 약 1시간 정도의 회담 내용 중 약 80%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였다고 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민관공동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냈지만, 일본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자칫 이 문제가 묻히기 쉬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 이러한 흐름을 역전시키는 모멘텀이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사법판단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초기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자 간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한국은 배상·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침략과 관련된 진실 규명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됩니다만,)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의 일환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과거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현재 살아있는 이슈가 되는 거죠. 국제 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시현 2004년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 작년이죠. 2018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을 명하는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했습니다. 강제동원피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증언 직후 당시 UN인권위원회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다뤄지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이 가입한 각종 인권 조약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인권 상황을 심의하는 절차들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자유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등 UN차원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권고들이 지속적, 주기적으로 채택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자체에 대해서도 UN의 각종 인권 보장 기구들이 이런저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뚜렷한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소녀상 설립운동을 펼치기도 했고요. 이런 국제적인 흐름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죠.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의 배경과 쟁점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결정은 국민이 가장 의미 있다고 뽑은 헌재 결정이기도 하죠. 조양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떤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시현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가해는 국제법상 범죄이고 일본의 국가책임이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민간법정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죠. 한국에서는 국회 법률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는 생활안정지원법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의 대응이고, 더군다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인도적인 지원금일 뿐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들이 있긴 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현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시민사회 측에서 나오게 됩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이다, 국민을 위해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재판이 굉장히 오래 걸렸죠. 판결이 5년 만에 나왔는데, 다행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협정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한국 정부는 그러한 분쟁을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질책하는 결정이 나온 거죠. 이명박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일본 정부에 협의요청을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헌재 결정이 났고 9월 15일 일본 정부에 대해 협의요청을 했으니까 보름 만에 행동을 취한 거죠. 어쨌든 아베 1차 내각의 설립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부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헌법 소원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헌법 재판의 결과는 2012년 한국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즉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첫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논리가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강제동원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지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협정 바깥에 있는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 즉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외교적 보호권이 살아있다는 논리가 사실은 같은 이야기예요. 남기정 2005년도 한국대법원의 입장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라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었어요.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요. 청구권협정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여기서 처음 내렸다고 하는 것이죠. 1965년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던 외교적 보호권도 있지만, 우리가 발휘하지 않은 외교적 보호권도 있다는거죠.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조시현 외교적 보호권이 요구하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뜻합니다. 외교적 보호권의 대상이 되는 사항들은 대게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권이 문제가 되고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본국이 개입해서 권리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는 것이죠.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협의 요청, 즉 대화입니다. 외교적 교섭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와 같은 국제재판을 통해서 해결안이 모색될 수도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외교적 보호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해온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을 한 거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결정 25선을 만화로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다. 25선 중에는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https://www.ccourt.go.kr/cckhome/kor/ccourt/maindecision/maindecision.do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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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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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2부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2015년 12.28 한일 합의의 배경과 쟁점 Q. 박근혜 정부 때 맺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12.28 합의)는 당시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았습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했다는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2.28 합의는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게 된 걸까요? 조양현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 이명박 정부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노다 정부, 민주당 집권의 마지막 정부였어요. 비교적 리버럴한 정부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생각보다 더 완고했어요.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2012년은 특사파견, 사사에 안(案), 3점 세트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올 때인데, 그게 봄에 다 파탄이 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해 여름에 독도를 가지요.* 그러다 보니까 한일관계는 경색되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이 납니다. *편집자 주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독도 방문: 2012년 8월 10일, 광복절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독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내보였으며, 당시 한-일 관계 악화의 계기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현안이라는 입장을 취했어요. 그래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정상회담도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요. 아베 그리고 박근혜 정부 둘 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과거사에 대해 양보하지 않으려는 구도가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2014년 5월에 헤이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오바마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아베 총리가 미대사관 공관에서 만납니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오바마, 아베의 삼자회동이 핵안보정상회의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도가 되었죠. 그러면서 우리가 그 당시 요구했던 외교부 국장급 회의도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국장급 회의를 10여 회 하고 결과적으로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의 12월 28일, 서울에서 양국의 외교장관이 합의를 발표하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12.28 한일 합의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완전히 해결되었는가. 일본이 우리가 요구했던 법적 책임, 사과, 배상 내지는 보상을 이행했다면 법적으로 해결이 되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치적인 해결이었고, 정권이 이룬 합의일 뿐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두 번째,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의사로 합의한 것인가. 이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를 했다는 것은 마치 50년 전 국교정상화 교섭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방불케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양국이 조금씩 양보한 애매한 결과가 나온 거죠. 한국의 승리도, 일본의 승리도 아니기 때문에, 양쪽 모두 편의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합의가 된 거죠. 세 번째는 구속력이 있느냐 입니다. 협정이 아닌 합의문을 발표했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다음 정부에서 정치적 입장 승계를 거부할 수 있는 특성을 가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기정 2012년도 노다 정부 말기에 나왔던 사사에 안(案)이 있었죠. 일본의 내각 총리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편지로 사과를 하고,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사과, 그리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인도적 조치의 자금 지원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의 입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가의 법적 책임에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사사에 안(案)+α’를 내놓았지만, 일본 정부는 역으로 ‘사사에 안-α’를 주장했어요. 결국 당시에는 유예되었고, 정권 교체가 되면서 일본 안에서도 동력을 잃으며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사사에 안(案)이 기초가 된 12.28 합의에서는 ‘도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지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이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나이브하게 보자면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요구해온 3점 세트, 즉 ‘책임 인정, 사죄, 예산상의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을 실질적인 배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과 이에 따른 예산 조치’가 이루어진 부분에서는 예전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사사에 안(案)은 일본의 민주당이었던 노다 정부가 가져온 제안이었지만, 2015년의 12.28 합의는 역사수정주의를 공공연하게 천명했던 아베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합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즉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가 포함되고, 소녀상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더 이상 국제무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비난, 비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서 합의가 결국 엎어진 거죠.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Q. 말씀하신 대로 12.28 합의는 국내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시민단체 측에서 이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세 분이 생각하시기에 이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남기정 양국의 외교장관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국민과 국가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우리의 평가와 관계 없이 UN에서는 일단 합의를 환영하는 멘트가 나왔고요.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당시 정부도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합의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합의의 재해석 등을 통해 제3의 해법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양국 정부간 ‘위안부’ 협상에 절차적, 내용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며,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 아래 후속조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며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시현 여기에 관해선 할 말이 많아요. 글도 많이 있고요. 그동안 안 했던 이야기를 조금 하면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권리 주장 요구가 양국 정부에 의해서 어떻게 다뤄져왔냐는 거예요. 이게 이 문제의 역사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이 패전하자 해외의 전쟁터에서 군인, 군속, 노무자, 또 ‘위안부’ 피해자들이 귀환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선인연맹을 설립해서 귀환 활동과 생활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 단체들이 권익옹호활동을 한다는 게 실효적이진 않았을 거예요.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인연맹 등 귀환자 단체들이 미군정 당국과 교섭을 한 흔적이 있고, 임금 등 미수금 문제, 가혹행위 등의 부분에 대해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분들이 귀환해서도 미군정 당국, 그리고 이승만 정부를 상대로 계속 권리주장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1949년 이후에 정부가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되었고, 1951년 대일평화조약 체결 후 정식으로 시작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회담을 거쳐 1965년 협정 타결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피해자들은 사실 ‘노무자’이고, 프롤레타리아예요.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이었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배제되는 과정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그들의 권리가 억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입증을 해야겠죠.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서도 이런 긴 흐름 속에서 해방 이후 일본, 또는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일 과거사 피해자 문제를 다뤄왔는지가 연결되는데요. 1965년 당시 우리는 독재 정부하에 있었습니다.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이 격심했으나 결국 관철되었어요. 그런데 남은 문제들 중에서 유골 문제가 1965년 이후에 한일 사이에서 협의가 돼요. 이건 뭐냐, 협정으로 다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는 거죠. 일본 입장에서는 청구권협정 바깥, 즉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정책의 기본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80년대 후반 노태우 방일을 계기로 원폭피해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약간의 지원이 있었는데, 역시 근거는 인도적인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기금 역시 법적 해결이 아니라 청구권 협정과 무관한 인도적 차원이라고 저는 바라보는데,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특히 도덕적 책임론을 강변합니다. 법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다 끝났지만 우리는 그 외에 추가적으로 국민기금을 통해 도덕적인 책임을 다 했다는 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이자 선전 내용이기도 한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합의를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법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안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법적 성격도 묻지 않았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법적인 책임을 아주 탈색시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2015년 12.28 합의는 공식적인 합의문이 없는 가운데 양국 외교장관들의 발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양국정상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그 내용을 추인하는 형식이었죠. 전부 다 구두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구두합의인 셈입니다. 물론 정부 간, 또는 국가 간에 구두합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국제조약으로 바라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합의, 즉 조약이라는 것은 국제법상의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합의가 되자마자 논란이 제기되었고, 정치권에서는 국회비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합의가 법적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구속력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합의에 대한 국제반응 역시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초기 반기문 사무총장과 미국 정부의 환영 멘트를 포함한 국제반응과는 달리, 이후 합의의 문제점이 UN의 각종 인권보장기구에서 제기됩니다. 피해자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합의가 부족하다는 지적들이 나왔죠. 개정하라는 권고도 있고요. 남기정 저는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해요. 그러나 우리 운동단체가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인용하는 UN 산하 인권기구들에서의 문제제기나 권고도,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합의’의 개정을 권고하는 등 일단 합의가 성립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개정을 하라는 것이지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돼요. 합의가 피해자 인권과 충돌한다는 문제제기를 인정하지만, 합의 그 자체는 있다고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인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시현 구속력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조약이 아니면 국가를 구속하지 않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조약이라고 하더라도 뭐 바꿀 수 있는 거예요. 한번 맺은 조약은 영원불멸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의 과도한 발언들이 보도가 되고 있는데, 조약은 바뀝니다. 역사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고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식 조약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핵심적인 것은 청구권 협정과의 관계예요. 이것이 조약이 되어버리면 청구권 협정을 수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는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과 모순이 되는 거예요. 청구권협정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조약의 형태로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정부로서는 ‘한일 합의가 조약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조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본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법적 효력은 없는 것이 되고요. 만약에 법적 효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장관 간의 합의, 즉 정부 간의 합의인지 또 대통령과 내각총리대신 사이의 합의, 국가 원수 간의 합의인지도 불분명해요. 이것을 국가 간의 합의가 아니고 정부 간의 합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시 박근혜정부, 아베 정부에게는 구속력이 있을 수 있겠죠. 정치적인 합의의 성격이라는 것은 합의한 정부의 운명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위안부’에 대한 정책은 역대 정부에 따라 쭉 바뀌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책을 형성할 수 있고, 이를 수정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약속과 정의라고 할까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가치가 있는 반면, 정의의 차원에서는 바른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체계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한국에 붙이는 ‘약속한 것을 바꾸는 나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낙인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의 절차적인 부적절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국민 정서, 피해자들의 이해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담합이었다는 거죠. 탄핵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국민의 관심은 정의가 과연 실현되는가이고, 이는 문재인 정부에게 대단히 큰 부담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계승을 위한 정치적 비용이 상당히 컸고, 결국은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요.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계승하지는 못하겠다고 발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대안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 할지요. 한국은 일본에 적극적이고 성의 있는 대응을 주문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합의를 깬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서 뒤로 빠지고 있죠. 12.28 합의 후 키시다 대신은 돌아가자마자 언론에 대놓고 “일본이 잃는 것은 10억 엔 외에는 없다”고 했어요. 우리 국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하고 아베 수상은 국회에서 한국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겐 합의를 지키라고 하면서 일본 쪽에서는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던 거죠. 그런 맥락에서 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무엇이었는지가 아쉬웠던 부분이거든요. 합의에서 이 부분은 절차적인 부족함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고치자, 이런 구체적인 대안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재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는데, 이에 대한 정부 입장은 무엇인지 애매하고요. 그렇게 봤을 때 그 당시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부분보다는 정부의 대안에 대해 우리가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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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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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3부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Q. 2018년 1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명예·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절차에 돌입했지만, 12.28 합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합의를 둘러싼 한일 간의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요. 조시현 문재인 정부가 12.28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일합의의 존재는 인정하되, 이것이 효력이 없도록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는 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채, 합의의 결과물을 해체하는 것에 불과했어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요. 조양현 가장 이상적인 안을 실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시는 동안 수준을 조정해서 해결하자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차상으로나 일본의 무성의함 등으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하는 건데, 이 부분이 아쉽거든요. 일본의 협력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우리 스스로 도덕적인 이념을 가지고 우리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김영삼 정부 때의 방식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 물론, 문제는 많이 있지만, 방침을 그렇게 보여주면 ‘아, 이게 정부의 입장이구나’ 하고 와닿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그림이 좀 애매해요. 12.28 합의를 부정한다면 대안은 무엇이냐는 비판이 나오는 거죠. 조시현 대안 부분과 관련해서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주는 함의, 영향 정도는 국제 인권의 메커니즘에서 다뤄지고 있는데요. 국제인권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의 권리에 관한 기준이 잘 정립되어 있고, 또 과거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특별보고관이나 기구들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피해자들이 권리를 갖는데,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배상을 받을 권리, 재발방지에 관한 권리,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문제야말로, 문제 발생 처음부터 UN에서 논의돼왔고 그 이후 전 세계 인권상황에 보편타당하게 적용이 가능한 기준으로 확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UN의 기준에 따라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설득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기정 논의를 좀 확장하자면, 제3의 방법으로 합의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합의가 나오긴 했지만, 미완성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도 사실 합의 안에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의 권리를 말씀하셨는데, 합의에 보면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라는 말이 나와요. 그것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이 나오고요. 그래서 저는 문건을 우리가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일본에 계속 요구해야 합니다. 10억 엔밖에 잃은 것이 없다는 식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냐고 계속 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발언은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나 상처치유를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 계속 합의의 완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합의를 의미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합의를 제대로 된 합의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까 조시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이 지점이 청구권 협정을 깨는 지점이거든요. 저는 이 지점을 이용해서 청구권 협정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가 전적으로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깨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되거든요. 합의는 이 작업에 지렛대로 삼을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내용을 합의에 포함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공로가 아니고요, 그동안 원칙을 견지하며 줄곧 운동을 해왔던 피해자 할머니들과 운동단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쓸데없는 것들을 뒤에 붙인 게 잘못된 것이지, 앞에 부분은 우리 시민운동 단체가 여태까지 만들어낸 부분이기 때문에 이걸 우리는 확인하고 이후 운동의 발판으로 삼자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조양현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언론은 ‘위안부’ 합의에 부족한 부분,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한국 내부에) 문제 제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신중한 톤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이념성향을 떠나서 국익 대 국익 싸움이라는 외교적 접근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이 문제를 (내부적인) 정치 쟁점으로 삼으면서 일본이 느끼는 압력이 약해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어지길 조시현 ‘따고 배짱, 딴 놈이 배짱을 부린다’라는 말이 있어요. 일본은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불가능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해결이라는 것은 운동 차원에서 해결을 위한 행동의 요구이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결은 ‘과정’입니다. 100년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불가능한 것을 해결했다고 한 합의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일본 정부는 피해자를 대변하는 (한국) 정부의 입에서 ‘끝났다’ 라는 말을 끌어냈기 때문에 이 유리한 입장을 쉽게 포기하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합니다. 함부로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평생 국가가 구속당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요. 아베 정부에서는 한국을 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악담을 퍼붓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좀 더 적극적인 변론을 펼쳐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응하지 않으니 그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식으로 외교를 유연하게 가져갈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국제 기준, 원칙에 입각하면서 끈기 있게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합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두 나라가 공동의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문제의 인식이 일치해야 하는데 지금 과연 그런가. 한국, 일본 꿍꿍이가 다른데, 청구권 협정 자체도 그랬고요. 각자 입맛에 맞게 해석해 왔고 국민을 호도해온 측면이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12.28 ‘위안부’ 합의도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한일 간의 인식 차이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시급히 재개되어야 합니다. 남기정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죠.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지만 실수할 때가 있어요. 지도자를 제대로 못 뽑을 때가 있죠. 그런데 민주주의를 이 정도로 성숙하게 만든 국가라면 시스템으로 지탱할 수 있고, 지도자와 정부가 실수할 때 국민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이 정부에서, 과거의 잘못된 합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연히 ‘해결’이 안 되죠. 운동이 있는 한, 새로운 문제 제기는 늘 있고,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문제가 여전히 미결인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려는 정치가 있는 한 해결의 수위는 조금씩이라도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여 해결의 수위를 확인하고 유지하게 되지만, 그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부족한 내용이 되고, 그래서 다시 운동이 전개되고, 정치가 이를 수용해 문제의 해결을 끌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합의를 통해 해결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짚어주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합의 내용에서 ‘위안부’ 문제란 당시 ‘일본군의 관여 하’에 발생한 일이라는 규정이 나와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군의 관여 이상의 많은 문제를 담고 있거든요. 가령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과거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확실해진다면 이 합의의 전제는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령 ‘위안부’ 문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데 혹시라도 연합국의 관여가 확인된다면, 이 또한 합의의 전제를 흔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해결의 수위도 또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구하고 진실을 규명해내서 ‘위안부’ 문제가 더 큰 틀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아간 해법이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과 연구가 필요한 겁니다. 조양현 방금 이야기를 받아서 의견을 나누어 본다면 대단히 아플 겁니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외교부가 담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든요. 정부 각 부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성격이 다양하니까요. 또 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 판단도 있는 것이고, NGO단체, 피해자, 국민 정서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서 외교부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일 외교 앞에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가 무겁게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이슈가 쉽게 진전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거죠. 한국 외교에서 대일외교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각 주체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인데, 만약 제가 외교부 장관이어도 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12.28 ‘위안부’ 합의가 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않았다면,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앞으로의 대일정책, 일본 인식의 차원에서 확실한 입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 때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이야기가 인용되고 그럽니다만, 그때 상황과 지금이 다른 부분은, 외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했죠. 그 관계를 잘 다지면서 대북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거사는 그 일환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체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절되어 있어요. 과거사는 과거사 분야에서만 보고, 북한 문제는 북한 문제에서만 보고, 미국과 중국 문제도 그 안에서만 보고 있고요. 이게 모두 연결되어있는데도요. 이런 문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앞으로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야 한다고 봅니다. 이웃 국가잖아요. 그리고 당장 안보와 경제를 이야기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아쉬워요. 일본도 아쉽고, 우리도 아쉬워요. 특수 관계라고 하는 부분에는 변화가 없거든요.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사에 대해 과도기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판단이 있어야 외교 실무단이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너무 센 비판일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되면 한 발 더 못 나간다고 생각해요. 남기정 한일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양자 관계죠.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일 관계라는 것을 상상하고 구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안보 문제만 가지고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이 생겼다는 거죠. 이른바 한미일 안보 삼각형의 하위 동맹으로서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고 개선한다, 또는 회복한다는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이후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개시되었고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상 그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서 목표로 설정할 것은 한일 관계 개선이 아닌 한일 관계 재건축인데, 이른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이어진 남북 관계에 일본을 넣어서 남북일이라는 평화 삼각형을 만들고, 이를 지탱할 밑변으로서 한일 관계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 트랙일 땐 앞에 역사 문제가 딱 가로막으니까 뒤에 있는 열차가 못 가지 않습니까. 역사 트랙과 미래 트랙은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과거처럼 역사를 팔아서 안보를 사는 한일 관계가 아니고, 평화를 만들고 평화 위에 역사를 싣는 외교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 관계를 정전상태에서 평화로 이끌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한일 사이에서 역사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한일 관계 재구축을 동기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Q.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해서 우리 정부에게 아쉬운 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사실 더 갑갑한 것은 일본 정부잖아요. 현재 아베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의 노선을 밟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 내에는 아베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요, 일본 안에서 대안적 흐름이 펼쳐질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남기정 저는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정밀해졌으면 좋겠어요. 현재 일본을 움직이는 세력으로 평화주의 세력과 이른바 전통적 국가주의(자)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평화주의에서 전통적 국가주의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밑에는 자유주의적인 질서를 원하는 사람들과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 있어요. 사실은 이들의 길항 작용을 통해 일본의 주류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은 헌법개정을 통해 권력정치의 세계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 싶어 하지만, 평화헌법 때문에 앞으로 못 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 지형에서는 여전히 리버럴, 또는 제가 말하는 제도적 자유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일정한 힘을 유지하고 있어요.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력을 배경으로 일방주의적인 외교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도와 레짐 같은 걸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는 건데, 이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규칙이나 약속을 중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후에 일본이 처한 국제적 지위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위안부’ 문제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위안부’ 그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축과 ‘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할 것이가 하는 축, 이렇게 두 개의 축을 가지고 매트릭스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우리에게는 (1)‘위안부’ 문제는 존재하고,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시민그룹과, (2)‘위안부’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의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그룹, 이 두 그룹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이 두 그룹도 일본 안에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진짜 일본을 움직여 나가는 그룹은 (3)‘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국이 하라고도 하고, 한국이 완강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한미일 안보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단 합의를 해주자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아베나 이 주변 사람들인 거죠. 속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때문에 계속 딴소리를 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4)‘위안부’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의를 발휘해서 합의를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게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합의가 있으니까 좀 지켰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합의를 파기한다고 하면 이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이에 반발해서, 오히려 아베를 편들어 주는 결과가 됩니다. 저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쉽고, 이러한 일본의 지형을 고려한 외교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일본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퇴행적이다는 진단은 맞는 것 같아요. 아베의 장기집권이 지속되면서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굉장히 침식되고 있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 정부의 프레임에 대항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가치’ 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의 ‘가치동맹’을 바탕으로 중국을 비난해왔거든요. 중국은 전체적인 사회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라면서요.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가치는 자유, 인권, 평화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거죠. 프레임 전쟁에서 우리가 유리한 구도로 가려면,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동맹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기정 조금 보완하자면, 저는 일본에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봐요. 평화주의적인 발전 측면에서 전후 일본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평화헌법도 있고, 1998년도 공동선언도 있고요. 그래서 ‘평화적인 측면에서 일본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문제를 같이 풀자고 제안할 수도 있죠. 조양현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아베 정부의 프레임은 굉장히 이중적이에요. 북한에는 인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얼마나 이중적인 이야기예요. 일관된 논리로 인권 이야기를 하려면,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죠. 그런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기가 쓰고 싶은 가치 체계를 바꾸고 있어요.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을 때 대단히 취약한 구도거든요. 한국과 일본이 가치 체계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일본이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요? 동남아입니까? 인도입니까? 아니잖아요. 결국은 일본이 한국만큼 가치체계를 가깝게 공유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를 거론하면서 민주주의, 인권, 평화, 경제 부분에서 아베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조시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할수록 일본은 우경화하고 있어요. 역설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두 분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더욱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더 세밀한 힘의 관계를 분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시민단체와 가까워서 그런 부분들은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두 분께서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한국과 일본 내의 시민단체가 더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야겠죠. 그리고 양국 정부는 그 힘을 받아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하고요. 그래야 한일 관계가 갈등을 넘어서 진전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 두 시간 동안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기정 수고하셨습니다. 조양현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시현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자리가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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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 - 태국에도 일본군'위안소'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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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도 일본군'위안소'는 존재했다 대다수의 태국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이었으며 태국과는 관계가 없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이 때문에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동원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동맹을 맺고 전쟁 수행을 지원한 국가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태국의 전역에 위안소를 설립하고 아시아의 많은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하였다. 본 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국이 수행한 역할과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최근 관련 문서와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태국과 일본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태국은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추축국이 연합국에 승리하자, 일본의 영향력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더 확대될 것이라 확신한 태국 정부는 점차 일본 쪽으로 입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21일, 태국은 일본과 ‘침략 및 방어에 관한 우호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으로 태국과 일본은 주권과 독립문제에 관해 상호존중하고 나아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상호지원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또한, 다른 국가들과 전쟁할 경우 태국과 일본 양국은 단독으로 정전 혹은 평화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에 동의했다. 이로써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긴밀한 동맹을 맺은 나라가 된 것이다. 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었지만, 그것은 모든 태국인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지하의 반일 저항단체였던 자유태국운동(Free Thai Movement) 등은 연합국에 협조하기도 하였으며, 다수의 태국인은 일본이 전쟁에 패할 기미가 보이자 태국이 추축국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44년, 정세가 결정적으로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자,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태국의 군부독재는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새로 수립된 민간정권은 태국이 일본의 자발적인 협력국이 아니었음을 공표하고, 전범국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태국 국민들이 일본과의 동맹과 '위안부'동원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 태국은 일본과 '위대한 동맹'[1] 관계를 맺었지만, 태국 최고사령부는 일본군과 관련된 기밀문서를 작성했다. 태국의 정부 기구에서 주최한 모든 접대 모임과 연회에서 일본인들이 외국인들과 나눈 대화와 동태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때문에, 태국 최고사령부의 문서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에 주둔했던 일본군에 관한 정보가 많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은 현재 태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일곱 개 시리즈로 나뉜다. (1) 태국 최고 총 사령부의 업무, (2) 동맹국 조정부(The Department of Ally Coordination), (3) 평화운영부 (The Peace Administration Department), (4) 태국 육군 참모총장, (5) 국방부 참모총장, (6) 국방부 법률 고문, (7) 기타.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는 총 472개 상자 분량이며 247,309장에 달한다. 이 최고사령부의 문서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그 전후(前後)의 태국군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동원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는 회의록, 명령서, 태국 관리와 일본군 관계자 간의 대화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양한 영역에서 일본군의 움직임 및 행태에 관한 보고서, 태국 여성들에 가해진 폭력 사건을 기록한 문서, 그리고 태국 여성 위안부, 아시아 여성 위안부, 태국에 있는 위안소 등과 관련한 신빙성 있는 정보들이 담겨있다. 2.6.5/97번 문서를 보면 일본군이 시 프라야에 위치한 주택을 군 위안소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주택은 일본군의 감독하에 태국인에 의해 운영된 위안소였다. (1945년 11월 15일) 태국 최고 사령부 기밀문서에는 이 밖에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발생한 사건 기록이 있다. 이 사건들은 주로 종전 후 송환을 기다리고 있던 수용소의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출신 군인과 민간인에 관한 것이다. 문서에는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태국에 연합군이 주둔하는 기간 중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3.6/58번 문서에 따르면, 전후인 1946년 3월 9일에 태국 주둔 영국군 사령관이 아유타야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인 전쟁포로의 수를 확인하고자 부대를 보냈다. 이때 영국군은 조선인들을 남녀로 구분하여 이름을 기록하고자 했다. 3.7/33번 문서에 등장하는 아유타야 수용소의 민간인 명단에는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출신의 남자, 여자, 아동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1946년 4월 22~27일).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지만, 아직 이 문서들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연구에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위안소의 증거가 되는 건물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은 태국 전역 및 이웃 국가에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주둔했다. 이에 따라 방콕, 송클라, 칸차나부리, 라차 부리, 푸켓, 나콩 시 탐마랏, 라농, 춘뽄, 매흥손, 치앙마이 등 여러 지역에 위안소가 설립되었다. 도시 지역에서부터 태국-버마 국경의 최전선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가 있었다.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에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군이 실제로 머무르거나 주둔했던 지역들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 군 부대의 수와 주둔 기간, 그리고 일본 군의 이동 및 활동과 관련된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위안소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 역시 수록되어 있다. 1.13/60번 문서는 칸차나부리 주에 있는 세 곳의 군 위안소를 포함한 일본 군 시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2.8/137번 문서에서는 위안소 한 곳이 대학 시설 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1.13/69번 문서는 랏차부리, 반퐁, 그리고 푸켓의 군 위안소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전후 오랫동안 방치되긴 했지만, 이들 문서에 기록된 주소들을 찾아가 보면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칸차나부리나 푸켓 등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증언들 물리적 증거가 되는 건물들과 함께 당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훌륭한 증인으로 남아 있다. 일본군이 수년간 주둔했던 지역의 75세 이상 주민들은 여전히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군이 머물렀던 장소, 일본군의 행태,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건물 등을 기억해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일본군과 함께 이동했던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증언 대부분이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의 기록들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푸켓에 사는 한 남성은 예전에 살던 탈랑 사거리의 3층집이 위안소로 사용된 바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어릴 때 그 집에서 살았는데 2, 3층이 작은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방마다 침대와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기억은 푸켓 지역의 군 위안소를 다루고 있는 1.13/69번 문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더욱 깊이 있게 조사되어야 할 문제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와 증언들은 앞으로 더 깊이 있게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태국과 일본군의 관계를 이해하고, 전쟁 중에 이루어진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동원 실태를 더욱 폭넓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태국 전역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소 방콕 파톰 완 지구, 일본군’위안소’ “Tru Ri Ya” 1. 일본군'위안소' <Tru Ri Ya> - 방콕, 파톰 완 지구 Military brothel “Tru Ri Ya”, Wirelesss Road, Pathum Wan District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6.5/23과 2.6.5/97에서는 “Tru Ri Ya”라고 불리우던 일본군’위안소’가 현재 스위스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콕 파톰 완 지구, House No. 730 2. Phaya Thai Road House. No. 730 - 방콕, 파톰 완 지구 House No. 730, Phaya Thai Road, a Military Brothel located inside the Chulalongkorn University campus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8/137과 2.6.5/97에서는 일본군’위안소’였던 house No. 703이 현재 방콕의 출라롱콘 대학교 캠퍼스 내에 자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콕 방 락 지구 , Trocadero 호텔 3. Trocadero 호텔 - 방콕, 방 락 지구 Trocadero, Surawong Road, Bang Rak District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7/234와 지역 주민들은 일본군이 이용했던 Trocadero 호텔이 방 락 거리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호텔 1층에 있었던 나이트클럽에는 아시아 여성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소, 칸차나부리 주, 무앙 칸차나부리 4. 일본군 위안소 - 칸차나부리 주, 무앙 칸차나부리 n.45 Pak Phraek Road, Ban Nuea, Muang Kachanaburi, Kachanaburi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1.13/60에 따르면 이 집은 일본군’위안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이 집은 재건축되었는데, 현재의 주인과 친척들은 이 집이 예전에 군 사무소와 숙박시설로 이용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라농 주 크라 부리 일본군 주둔지 5. 일본군 주둔지 - 라농 주, 크라 부리 Jampanes Military Unit, Kra Isthmuss, Kra Buri, Ranong 라농 주의 지역 주민들은 라농 주 크라 부리에 위치했던 일본군 주둔지에 아시아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태국 최고사령부문서 1.12/261과 2.5.2/9 문서에서도 철도를 깔기 위한 일본군이 이 위치에 주둔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푸켓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 일본해군클럽 6. 일본해군클럽 - 푸켓,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 A Japanese Navy Club. Krabi Road, Muang Phuket, Phuket 태국 최고사령부문서 2.5/7에는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에 있는 three-story 호텔이 일본해군클럽으로 이용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현재 소유자와 그의 가족은 약 1949년 즈음 이 건물의 2층과 3층이 침대가 있는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Hall'이라 불리우는 일본군'위안소'로 이용되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사진제공 : 팟폰 푸통(Patporn Phoothong) 사진과 지도 자료는 2017년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보고서를 토대로 재정리하였습니다. 각주 ^ 편집자 주 : 당시 군부정권의 독재자였던 피분송크람은 “영국은 태국의 영토를 탈취해간 나라인 반면, 일본은 영토를 되찾아주는 나라이므로 태국의 진정한 ‘위대한 친구’”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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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포로 심문보고서,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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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연합군은 다양한 부대에서 일본군 포로심문 보고서를 남겼다. 영국군이 주도하던 동남아시아 총사령부(SEAC) 산하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 미국의 전시정보국(OWI) 등과 함께 맥아더가 사령관으로 있던 남서태평양 총사령부 산하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등이 대표적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문서 중 포로 심문보고서는 노획문서와 함께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은 군사 정보 획득을 위해 일본군 포로에 대해 자세한 심문기록을 남겼다. 주로 군사 관련 내용이었으나 병사들의 삶 전체를 심문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병영 생활 정보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는 군사적 중요도는 크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병영 생활과 관련해 종종 나타나는 문제였다. 특히 연합군이 심리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흔적이 엿보인다. 앞서 소개한 120번 조사보고서와 마찬가지로, 포로 심문보고서 역시 일본군 병사들의 병영 생활 전체를 조감하면서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고 보인다.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일본에서 1997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만든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전 5권) 에도 일부 포함되었고 정진성 편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자료』(전 3권, 선인, 2018)에 2건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심문보고서는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일본군 전쟁범죄 ‘위안부’ 자료집』(1~3)에 실려 있다. 특히 이 자료집은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되는 일부분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심문보고서 전체를 완역했기에 다른 자료집들과 차별화된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총 783건이었으며 이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모두 45건이다. 즉 783건 중 45건에서 위안소와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비율로 보면 약 5.7%에 해당한다. 45건에 나온 일본군 병사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해보면, 직업에 있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각각 절반이고 교육에서는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고루 분포해 있다. 이는 일본의 사회적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문 보고서는 1942년 12월 31일부터 1945년 5월 21일까지 3년 5개월여에 걸쳐 기록됐다.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된 지역은 다양하다. 뉴기니 인근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이 19번, 마닐라, 다바오, 타클로반 등 필리핀이 7번, 벨라완, 암본, 마랑, 아마하이 등이 포함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5번, 상하이 광저우 등의 중국이 4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각각 1번씩 언급되었다. 지역명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12번이다. 남서 태평양 사령부 관할 지역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심문보고서임에도 버마와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체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여러 지역의 위안소를 경험한 병사들이 많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라바울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포로 대부분이 남방 전선에 투입된 병력이었다는 것과 라바울이 남방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라바울은 사실 남방 최전선에 해당하는 지역의 일본군 중심지였다. 위치상으로 뉴기니 바로 옆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은 일본군이 뉴기니와 호주 침공을 위해 10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전략 거점이었다. 그런데도 라바울은 일본 패전 시까지 연합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바울의 위안소가 병사들에게 자주 목격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는 1943년 7월과 11월 사이 심문보고서 형식(Interrogation Report Proforma)을 체계화했다. 심문보고서의 전체 형식은 먼저 포로의 성명, 번호, 계급, 소속 부대, 생포 장소와 시점, 신장과 체중, 연령, 주소 및 직업 등의 기초 정보를 기술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본문은 대체로 1. 서언, 2. 이력, 3. 생포, 4. 부대 또는 전력, 5. 식별, 6, 인물, 7. 취역 함정, 8. 적의 장비, 9. 적의 방식(enemy method), 10. 통신, 11. 방어, 12. 적의 보급, 13. 사기와 선전, 14. 적의 의도, 15. 손실 또는 사상자, 16. 화학전, 17. 지형(지역), 18. 의무, 19. 연합군, 20. 특별 첩보, 21. 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서언에서는 포로의 태도나 지능 등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내려졌고 이력은 입대 후 생포되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으며 이하 대부분은 군사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본 자료집과 직접 관련되는 위안소,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은 특별 첩보, 사기와 선전 등의 항목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사기와 선전’ 항목 중에서도 전투 복무의 상황(Conditions in Fighting Services)이라는 소항목에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이상을 통해 보건대 연합군에게 위안소와 ‘위안부’는 애초 특이한 정보로 인식되었다가 점차 선전전의 소재로 의미가 있다고 파악되었던 듯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보고서의 배포선이다. 보고서의 배포선은 애초 9곳이었는데, 1944년 9월 무렵에는 무려 39개까지 증가하였다. 이 단계에서 배포선은 남태평양 전구를 넘어 중국·버마·인도 전구는 물론 미 전쟁 부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들어서는 배포선이 총 88개소 273부로 확대된다. 남서 태평양 총사령부 참모부서에서부터 거의 모든 단위부대, 심지어는 연대급 전투부대에도 배포되었고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연합군 정보부대와 미 전략첩보국까지 배포망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배포선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연합군 내에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통제했다는 증거 군사적 부분을 제외하고 포로 심문보고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둘째, 전쟁범죄와 관련될 수 있는 잔혹 행위. 셋째, 일본군의 군대 생활 및 의식이 그것이다. 첫째와 관련된 보고서 내용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로 총 24개이다. 둘째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일본과 중국인이나 현지인 ‘위안부’를 언급하는 보고서이다. 총 11개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위안소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인데 총 10개가 된다. 45개의 제한된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가 제일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보고서 진술 내용은 상당히 소략하다. 대체로 특정 지역의 위안소 설치 여부, ‘위안부’ 인원과 국적, 요금 등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위안소의 소유와 운영에 대해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지만, 군의 통제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일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즉, 사설이건 군 직영이건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도 위안소가 군의 직접적 통제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바울에는 이미 1942년부터 위안소가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 병사의 심문 보고서는 1943년 1월 라바울에는 두 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합쳐 1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1943년 2월에 생산된 제45호 포로심문보고서는 필리핀 지역의 위안소 중 일부는 군 내부에 설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위안소는 일부 일본군 병사들에게조차 추잡한 것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다. 1943년 4월 14일 자 포로심문보고서 제54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 도쿄 제대 출신의 해군 경리장교 이나가키 리이치(Inagaki, Riichi)는 육군과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매우 추잡한 것이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he asserted that the subject was an ugly one, abhorrent to him.”) 일본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도쿄 제대 출신의 장교가 보기에도 일본군의 위안소는 용납되기 곤란한 것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성격의 포로 심문보고서도 있다.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들의 제676호 심문보고서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기에 상징적 의미로 독일 잠수함이 바타비아의 일본 해군기지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 잠수함이 미군 공격으로 싱가포르 근해에서 침몰당했고 승조원들은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를 남기게 된다. 독일군 장교들은 동맹 관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소였다. 독일군들은 자신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고 일본군 장교만 출입하는 위안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네덜란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추축국 동맹 관계에 있었음에도 위안소는 오직 일본군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안소의 의미와 관련해 상당한 시사를 준다고 보인다. 이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본군의 독점적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적 병영 생활과 인종주의 연합군번역통역부의 포로 심문보고서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일본군의 군대 생활과 의식 및 전시기 일본의 내부상황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일본제국의 군대라고 한다면, 일본군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포로들은 전반적으로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와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제59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심문 과정에서 천황이 언급될 때마다 바로 기립해 차렷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제63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전쟁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었고 제60호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을 도와주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심문보고서는 또한 일본군의 병영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계급과 함께 연공서열로 구축된 일본군의 내부 규율이 매우 가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규율화는 폭력의 만연과 밀접히 관련된다. 제664호의 포로는 입대 첫해를 선임병들에게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따귀를 맞으며 생활한 것으로 기억했다. 군대 내부의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추축국 동맹 간의 균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 심문보고서는 일본군과 독일군 관계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 두 국가는 동맹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심각한 갈등관계였다고 보인다. 독일군 포로의 진술은 일관되게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일본군 포로들 역시 독일에 대한 태도를 묻는 말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독일의 원조를 묻는 말에 모든 일본군 포로들은 한결같이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했고 히틀러와 천황의 비교에 대해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동맹 속의 적대감은 특히 인종주의와 깊이 관련된다. 심문관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군 대부분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다. 즉 바타비아의 독일군 포로들이 보기에 일본군은 백인종 대 황인종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고 일본군 사병들은 독일군이 일본군 지휘부를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 포로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의 인종적 우수성과 일본의 열등함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인종주의 구도는 다른 한편으로 황인종 내부의 차별과 억압을 내장한 것이었다. 제30호 심문보고서의 포로는 중국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인종주의의 피해 대상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근대 서구와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아시아의 또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상쇄하고자 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인종주의와 관련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일본군 위안소의 요금 제도는 인종별로 차등화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유럽 여성들은 특별히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고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 등의 순서가 보통이었다. 인종주의에 오염된 일본군의 실태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인종 간 전쟁을 위해 동원된 ‘황인종’이자 일본 제국 내부의 최하위 사회적 약자인 식민지 여성들이었다. 일본군은 사회적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복수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듯이 ‘위안부’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나와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