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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다-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서
    2019년 에세이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다-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서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다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수십 년간 떠나온 채, 지금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고향 충청남도 신예원(新禮院). 일본인 기자가 함께 가자고 권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도 미군기지가 있잖아”  6세 때 일가가 뿔뿔이 흩어져 식모살이하다가 결혼과 재혼 후에도 남편이 일하지 않아 집을 나온 배봉기 할머니는 29세 때 함경남도 흥남에서 “입을 벌리고 자다 보면 바나나가 떨어져서 입에 들어온다”는 “여자 소개인”의 말에 속아 1944년에 오키나와(沖縄) 도카시키 섬(渡嘉敷島)으로 연행되었다. '아키코'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다른 6명의 조선 여성과 함께 일본군의 성노예를 강요당했고, 미군에 의한 공습과 함포사격이 거듭되는 가운데 굶주림에 허덕이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1945년 8월 일본군의 무장해제 후에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혔지만, 거기에서 탈출하여 오키나와를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가운데 취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야채 장사, 빈 병 수집 등을 하면서 “어디에 가도 편하지가 않다”며 일본군이 작업할 때 신던 신발을 손에 들고 오키나와 전체를 맨발로 헤매다녔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이하 조선총련) 오키나와 현 본부 전임 활동가였던 김현옥(金賢玉) 씨, 김수섭(金洙燮) 씨 부부가 1975년에 배봉기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주 “우군(일본군)이 져서 분하다”고 말했다. 전쟁 당시보다도 전후에 혼자서 살았던 것이 “훨씬 괴로웠다.”어려서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 것도,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도, 이국땅에서 고독하게 산 것도 모두 자신의 '팔자'라는 말을 했다. 그런 배봉기 할머니에게 김 씨 부부는, 할머니의 경험은 팔자 탓이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해서 많은 조선 여성을 군대의 '위안부'로 삼은 일본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인한테도 조선인한테도 끊임없이 속아왔던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조선말도 조선 음식도 잊은 채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 고즈넉이 놓인 창고에서 살았던 그녀는 전쟁의 후유증을 앓아 타인을 심하게 기피했다. '위안부'였던 과거가 알려져서 근처 아이들에게 돌을 맞자, 나하(那覇) 여기저기를 헤매면서 “나는 조선사람이다”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방안에서는 냄비를 식칼로 두드리며 마구 소리쳤고, 두통을 억누르기 위해 고약을 가위로 잘라 붙이다가 그 가위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모두가 배봉기 할머니를 기껏해야 몇 차례 찾아가서는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거절당해 더 방문하지 않게 되었지만, 김 씨 부부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렇게 배봉기 할머니를 만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김 씨 부부는 배봉기 할머니와 처음으로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오키나와 바다나 하늘을 처음으로 '관광'한 배봉기 할머니는 “고향 사람이 좋다”고 기쁜 듯이 말하면서 오키나와 국수를 맛있게 드셨다. 그 후 배봉기 할머니는 먼저 김 씨 부부에게 외출하자며 부르게 되어 조금씩 자신의 과거도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배봉기 할머니는 1977년 4월에 조선신보사의 취재를 받아들일 결의를 하고 자신의 피해를 조선총련의 기관지인 <조선신보(朝鮮新報)>에 처음으로 상세히 고백했다. “지옥이요, 이 세상의 지옥이었소”라고 하면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던 조선인 군속에 대한 기억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배봉기 할머니와 김 씨 부부는 매달 함께 조선 요리나 불고기를 먹으면서 부모·자식처럼 지냈고, 어느새 그녀는 “역시 조선사람은 조선 것을 먹어야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김 씨 부부와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과도 교류하며 조선전쟁(한국전쟁)에 관한 것이나 그때 오키나와에서 미군기가 출격했던 것, 그 가해자성을 인식하고 한미군사훈련이나 조선반도의 분단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등을 천천히 인식해 갔다. 그리고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알고 지낸 일본인 기자가 배봉기 할머니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자, 조선반도 지도에 있는 고향을 가리키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어난 고향보다도 오래 살아온 오키나와에는 거대한 미군기지가 있다. 자신의 고향에도 미군기지가 있고 조선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된 채, 돌아가 봤자 어쩔 수도 없다. 조선이 통일되고 외국 군대가 나가면 돌아가겠다고. “통일될 거야. 통일돼서 함께 돌아가면 되지.”라고 김수섭 씨가 말하자, 배봉기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눈물을 그쳤다.       배봉기 할머니는 1989년에 세계청년학생소년축전 참가를 위해 임수경 씨가 평양의 비행장에 내려서는 모습을 TV로 보고 “너무 기쁘네”라며 눈물을 흘렸고, 쇼와(昭和) 천황 히로히토 사망 보도를 접했을 때는 히로히토가 “사죄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조선어로 “원수를 갚아달라”고 거듭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북일 관계가 개선된 것을 무엇보다 기뻐했다. “통일되면 셋이서 함께 돌아가자”고 김 씨 부부와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1991년 10월에 배봉기 할머니는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기 49일 전의 일이었다.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는 '4.23 액션' 내가 김현옥 씨한테서 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피해 증언이나 관련 서적을 통해 배봉기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그녀의 인간적인 에피소드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또한 그러한 배봉기 할머니 곁에서 마음으로 교류해 온 사람들이 김현옥 씨 같은 조선총련의 전임 활동가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김현옥 씨는 당시 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배봉기 할머니는 만년에는 이미 조선이 왜 식민지가 되었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는지, 자신의 인생은 팔자 탓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한 것이며, 나라를 빼앗긴 백성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정확히 받아들이고 몸으로 이해한 것 같아요. 배봉기 할머니 자신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이나 견문을 통해 인권을 스스로 되찾았어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배봉기 할머니와 지낸 나날은 조금도 자랑스레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배봉기 할머니가 '위안부'여서가 아니라 동포였기 때문에 함께 지낸 것입니다.”     인터뷰를 끝냈을 때 나는 어느새 흐느껴 울고 있었다. “우군이 져서 분하다”는 말을 내뱉게 할 정도로 배봉기 할머니를 '황국신민'화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폭력, “전후가 훨씬 괴로웠다”는 말을 하고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라며 울게 만든 동아시아의 냉전과 조선반도의 분단. 미군기지의 지속적 주둔이 보여주는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폭력. 그러나 이 구조적 폭력에 맞서, 김 씨 부부와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고발하며 “사죄하길 바란다.” “통일되면 돌아가자”고 하며 히로히토의 사죄와 조선반도의 통일을 희구하기에 이른 배봉기 할머니. 그리고 깊은 동포애를 가지고 그녀와 함께 살았던 김 씨 부부. 그 모든 것을 모른 채 살아온 나 자신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 후 내가 전임 활동가로 속해 있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인권협회)'의 회보인 <인권과 생활(人権と生活)>에 김현옥 씨한테서 들은 내용을 거의 모두 반영한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배봉기 할머니의 반생을 간접적으로 청취한 자의 책임을 다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더 많은 사람이 특히 배봉기 할머니와 같은 재일조선인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고 기억하고 그 유지를 이어가지 않으면 그녀의 존재는 또 다시 어둠에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또한 그 무렵에는 제2차 아베 내각이 발족하여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부정하고 생존자의 존엄을 짓밟는 발언들이 일본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배봉기 할머니의 존재를 더욱 널리 알리고 일본군 성노예제의 국가책임 부정 논조가 휘몰아치는 일본의 상황에 저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조선신보>에 게재된 4월 23일을 기념하여 일본군 성노예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 사죄나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치 않는 4.23 액션: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하며'라는 이름으로 2015년 4월 23일에 일본의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배봉기 할머니, 김학순 할머니, 박영심 할머니, 리계월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 송신도 할머니 등 6명의 증언을 낭독하며 일본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4.23 액션'의 주최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포함한 성이나 민족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학습회를 개최해 온 인권협회의 '성차별 철폐 부회'로 했다. 급히 꾸린 액션이었지만, 약 80명의 참가자 중에 10~20대 재일조선인 학생이 다수를 점했다. 김 씨 부부나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당시)에서도 연대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예전에 오키나와 땅에서 배봉기 할머니와 교류가 있었던 국회의원 이토카즈 게이코(糸数慶子) 씨도 참가하여 발언했다. 참가자 전원이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에게 사죄하라!”, “일본군 성노예제 부정을 용서치 마라!” “조선 민족의 존엄을 지키자!” “역사 부정 절대 반대!” “공식 사죄! 법적 배상!” 등의 구호를 조선어와 일본어로 외쳤다. 아울러 이 '4.23 액션' 취재가 계기가 되어 <한겨레신문>은 2015년 8월 8일 1면에 크게 배봉기 할머니의 사진을 게재하여 특집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를 게재했다.     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 그 후에도 성차별 철폐 부회는 4월 23일을 기념하여 배봉기 할머니만이 아닌 일본군 성노예제의 피해를 본 모든 사람을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을 향한 행사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2016년에는 도이 도시쿠니(土井敏邦) 감독이 '나눔의 집'에 계신 생존자들의 일상을 기록한 영화 «'기억'과 살다(“記憶”と生きる)»의 상영회를 개최했고, 2017년에는 나와 리행리(李杏理) 씨,  김미혜(金美恵) 씨가 발표자로 참가하여 한일 '합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배봉기 할머니에 초점을 맞춘 심포지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조선반도의 분단: 비가시화되는 피해자를 응시하며(日本軍『慰安婦』問題と朝鮮半島の分断~不可視化される被害者を見つめて)»를 개최했다. 2018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테마로 한 조선학교 학생들의 예술전, 양징자(梁澄子) 씨의 토크, Gisaeng 씨와 김성수(金成樹) 씨의 미니 라이브, 김기강 씨와 홍미옥(洪美玉) 씨의 연극 «캐러멜(キャラメル)»을 섞은 복합 이벤트 «지금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마주보다: 피해자의 목소리×예술»을 이틀간 개최하여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한국의 참가자가 연 400명 이상 방문했다. 올해는 '4.23 액션' 개최 5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군 성노예 문제: 조선반도의 분단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유곽과 위안소를 테마로 한 이야기를 김영(金栄) 씨한테서 들을 예정이다. 또한 조선반도의 탈분단을 향한 기운이 여느 때보다 높아지는 상황을 수용하여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과 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적은 종이 나비를 세계에서 모아 조선반도의 지도 위에 붙여 커다란 통일기를 만드는 퍼포먼스도 예정되어 있다. 남북조선에서 많은 나비들이 도착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배봉기 할머니가 아직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어받아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극복과 조선반도의 평화통일을 향해 앞으로도 열심히 전력을 다하고자 한다.   번역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박김우기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1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1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하면 일본군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잔혹한 폭행을 당한 무구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피해가 빈번히 일어난 곳 중 하나는 당시 전쟁터였던 중국이다. 일본군은 전쟁 중 중국 여성에 대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공연하게 여성을 끌고 가 성적 유린을 자행했다.   지금까지 발표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라는 분이 있다. 허우둥어는 가이산시(蓋山西)로 유명한데, 가이산시는 산시성(山西省)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다. 그녀에 대해서는 단행본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와 있는데, 잔혹하게 피해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여주는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그녀는 중국에서 최초로 일본 정부를 제소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허우둥어를 비롯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몇 명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허우둥어(侯冬娥), 류멘환(劉面換) 완아이화(万愛花)   1938~1939년 사이에 산시성 위현(盂縣) 주변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허우둥어가 살던 지역까지 점령되었던 것은 1941년 가을 경이었다. 1942년 여름 무렵, 일본군이 촌장의 딸을 끌고 가려고 하자 촌장은 일본군에게 딸 대신 당시 미인으로 이름 높았던 가이산시(허우둥어)를 데려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끌려간 허우둥어는 일본군의 모진 폭력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지게 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끌려갔던 어린 여성을 대신하여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주었다는 다른 피해자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당찬 여성이었다. 일본군에 끌려가기 전 그녀는 마을 최초로 공산당원이 된 여성이었으며, 부인 구국회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중국에서 벌어진 잦은 정치 운동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간 사실이 문제가 되어 당원자격을 박탈당했다. 허우둥어는 그 충격으로 자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4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과거 피해를 함께 입었던 분을 찾아가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몇 번씩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 15세 때 한간이 된 마을 사람이 무장한 일본군 3명을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쳐 어딘가로 끌려갔다. 모진 성폭력을 당한 후 부모님이 마련한 재물을 괴뢰정부( 유지회)에 바치고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풀려난 후에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괴로워했으며, 결혼 후 자녀들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일본군은 내 일생의 재난을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피해자인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는 14살이었던 1942년에 공산당원이 되어 항일사업, 선전과 군화 만들기 등 공산당 아동 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던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약 4년에 걸쳐 한간과 일본군에 의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장소에 끌려가 심한 고문과 성폭력의 수난을 겪게 된다. 그녀의 입에서 공산당원의 이름이 나오게 하는 것이 고문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완아이화는 일본군으로부터 풀려난 후 양녀를 얻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녀는 허우둥어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였으며, 2000년 11월에 도쿄지방재판소 소송에서 본인 심문을 받았다.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난얼푸(南二僕), 위안주린(袁竹林) 린야진(林亞金)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는 1942년 봄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들에 의해 일본군 거점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대장에게 1년 8개월 정도 지속해서 폭력을 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일본군과 오래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풀려난 후에도 낙인은 사라지지 않아 사회적 압력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살아있을 적 그녀는 항상 ‘일본 놈’들의 악행에 관해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사람인데, 세탁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고 있었지만, 아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여성이었다. 1940년 봄, 장슈잉(張秀英)이라는 여자가 여관의 청소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집에 응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관우 사당을 ‘위안소’로 개조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마사코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배분받은 7평 정도의 그녀의 방 앞엔 일본식 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렸다. 위안주린은 일본군의 성적 유린을 견뎌야만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위안주린은 어머니와 함께 우한 근처의 산간마을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마을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딸이 일본인에게 강간을 당한 비참한 경력을 이야기한 것이 그들의 생활에 큰 화를 불러왔다. 사회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오지로 쫓겨가 오랜 시간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는 “나의 고통은 일본인이 돈으로 배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결백과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은 하이난성(海南省) 바오팅현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군이 바오팅현 인접 지역인 산야를 점령하였다. 1940년 산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파견대가 바오팅현에 침입해 병영을 세웠다. 1943년 10월경 린야진은 여성 4명과 함께 벼를 베고 있다가 무장한 일본군들에 의해 거점으로 끌려갔다. 그녀들은 ‘이상한 건물’에 갇혔는데, 대문으로 들어가 각각 작은 방에 갇혔다고 한다. 매번 유린을 당한 후 규정에 따라 반드시 하반신을 씻어야 했다. 일본인은 그녀들에게 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약은 흰색과 빨간색으로 납작하고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크기였다. 평소 건물 대문은 항상 일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함께 붙잡힌 4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가족들이 음식물을 보내고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모진 폭력으로 3명 모두 사망하였으나 린야진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린야진은 문화대혁명 시기 ‘일본 창녀’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린야진은 “나는 일본인을 증오한다. 꼭 일본인이 사죄하고 배상하도록 하겠다. 지금 나는 늙어 일도 못 하고 있다. 아직도 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작은 소리로 말하곤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피해를 입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대표하는 수즈량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위안부’를 충당한 방식에 대해서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개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을 끌고 간 경우. 두 번째, 여종업원과 세탁부를 구한다는 명목의 속임수. 세 번째, 점령지의 형세가 안정되면 유지회(괴뢰정부)를 통해 모집. 네 번째, 여성 포로로 잡힌 여성을 활용. 마지막으로 대도시에서 일본군과 괴뢰정권이 기존 창기를 활용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을 이 범주에 굳이 맞추어 본다면, 첫 번째 방식에 허우둥어, 류멘환, 린야진, 난얼푸가 해당되고, 두 번째 업자(장슈잉)의 속임수로 인한 피해자가 위안주린, 그리고 네 번째, 여성 포로에 해당하는 경우가 완아이화이다. 창기에서 피해자가 되었다는 분은 일본인 피해자 중에는 존재하지만, 아직 중국인 피해자 구술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창기였다가 피해자가 된 분이 피해를 밝히고 나오기는 어디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유지회, 한간 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들의 피해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피해자들의 구술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피해자들의 피해 실태를 무례를 무릅쓰고 정리하다 보면 일본군이 침략을 자행해가는 과정에서 행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어떤 양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을 군인들에게 ‘위안품’으로 제공하여 ‘위안소’(강간 캠프)에서 지속적으로 폭력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가 일단락되고 유지회(괴뢰정부)가 들어서면 ‘위안품=여성’의 공급을 그들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안주린의 경우처럼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가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군이 업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산시는 치열한 전쟁터가 된 지역이었기에 전시 강간과 유사한 피해자가 많다. 위안주린은 우한이라는 도회지와 가까운 곳에서 취업 사기로 피해자가 되었다. 중국의 전시 강간 피해자 중에는 ‘위안소’에서 조선 여성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조선 여성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끌려가 중국의 피해 여성들과 조우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이 문제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일본군은 군대의 이동에 ‘위안소’를 대동했는데, 전시 강간 억제가 이러한 조치 요인의 하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 피해자들의 상황을 보면 전시 강간과 ‘위안소’의 경계를 가르기 쉽지 않다. 단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 군인들에게 여성을 ‘위안품’으로 제공한다(받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작동하는 권력의 차이에 따라서 폭력의 양상을 달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상업적’ 조건을 갖추면 면책될 수 있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빈곤한가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국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피해의 내용을 너무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먼 곳으로 끌려가 피해를 입은 조선의 피해자들과는 또 다른 2차 피해를 겪었다는 것을 피해자들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창기 해방사업을 통해 실제로 성매매시장을 없앴다. 성매매시장은 사라졌지만, 창기에 대한 ‘오욕’은 온존하였다. 더구나 피해자들에 대한 적의 유린이 창기로 뒤바뀌어 그 오욕이 더욱더 깊게 새겨졌다. 위에 소개한 피해자들은 모두 전후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 운동 속에서 ‘일본 창녀’, ‘역사적 반혁명’, ‘마을의 창피’라는 비난과 질시를 견뎌야 했다.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이 전후 처한 상황을 시야에 넣게 되면 이 문제를 사유하는 것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전쟁과 그 전쟁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 즉 가해와 피해로 전선을 나누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라는 요구가 도출된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후 피해자들이 처한 위치를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읽으면 사회적 약자의 싸움이 얼마나 지난한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문제를 통한 사유의 사정거리는 어디까지일까? 그것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Lee Sun-yi

  • 15번지들
    2019년 에세이 15번지들

    1. 15번지가 있다. 이곳엔 여러 사람들이 산다. 낮은 다세대주택이라고 불러도 좋다. 방음이 잘 된 아파트는 아니지만, 낯익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낯모르는 사람들도 모여살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층간 소음이 워낙 익숙해서 인지 주민들끼리 우글우글 왁자지껄하지만, 울고 웃고 외치고 하소연해도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신고하거나 악다구니로 다투지는 않는다. 아니, 이들 이웃들은 옆집이나 위 아랫집의 소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는커녕, 같이 울거나 등을 쓸어주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이고, 어떤 경우엔 거리로 함께 나서주거나 응어리를 풀기 위해 한 손을 보태기도 한다.   2. 그러나 15번지에서 새어 나오는 말은 좀체 잘 들리지 않고 잡음과 뒤섞여 말꼬리를 놓쳐 버리기 일쑤다. 김숨은 『한 명』(현대문학, 2016)에서 이런 상황을 정직하게 포착한 바 있다. 그렇잖아도 엊그제 그녀는 옷수선 가게 여자로부터 이상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15번지 일대 재개발 방식을 두고 시와 구가 합의를 보지 못해 개발 사업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7년을 넘게 끌어온 개발 사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자 토지주들이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해 민영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평택 조카가 노리고 있던 임대 아파트 입주권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싶어 그녀는 잠을 설쳤다. 양옥집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던 사내가 묻는다. “이 집에 할머니 혼자 사세요?” “아니오……조카가 살아요.” 그녀는 평택 조카가 단단히 이른 대로 말한다. “조카요?” “조카 부부가……나는 이 집에 안 살아요.”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194쪽   이 소설은 공식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 미래적 시간을 다룬다. 소설의 화자는 공식적인 '등록'을 하지 않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공식적으로 마지막 피해자 여성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만나러 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예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곁에 두는 방식이며 동시에 생존과 지속을 위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도래할 시간은 이미 현재에 '잠재'하고 있는 시간이다. 물론 그 시간을 현실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외려 그 시간이 현실화될 수 없도록 치밀하게 차단해온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용문에 확인할 수 있듯, “15번지”는 어떤 장소이자 시간으로 '8월 15일'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이 시공간은 국가의 재개발 대상지이지만, 여전히 '합의'되지 않는 시공간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해방은 실현된 것이 아니라 잠재하는 것, 발명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국가기구(간)[역사적 피해에 대한 국가 사이]의 합의가 불가능한 것일 때, 가능한 방식은 그것을 소유한 “토지주”에 의해서만 가능하겠지만, 토지주(시민)가 이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5번지로서 8월 15일은 이미 있었던 시간이지만, 여전히 찾아와야 할 얼마 남지 않은 '긴급한 시간', '상실될 시간'으로 던져져 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8월 15일에 대한 탐색의 촛점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여성으로 두는 것이 절실한 것은 그녀들의 목소리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위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관공서 공무원이 거주자 실태 파악을 하러 와서 묻는 “혼자 사”냐는 질문에 “나는 이 집에 안 살아요”라고 대답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면,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새기는 일만큼, 요컨대 거주지=그녀들로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겠는가. 달리 말해 소설에서 보이듯이, 관공서 문서의 기록이 그녀를 또 다시 부재하도록 만드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면, 또 그 과정을 통해서만 재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또 15번지와 연관된 숱한 일들이 그래왔다면, 15번지와 관련 없어 보이는 15번지에 해당하는 헤아리기 힘든 존재와 세계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부재처리 되었다면, 15번지는 발명되어야만 하는 과제로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3.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집결지와 비장소>라는 섹션을 기획하면서 처음 떠올린 것도 이 15번지였다. 즉, (비록 일시적이지만) 15번지를 구성할 수 있을 때, 그 속에서 관람객들이 일으킬 일정한 정동적 변화가 내게는 훨씬 중요했으니, 그러한 존재와 세계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일시적인 조건들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했다. 15번지를 어떻게 조형할 것인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전시공간의 연출에 대해 물어보면, '카타콤'이나 '돔', '무덤'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저 상실된 대상들을 기리거나 애도하기 위해 혹은 안치소에 박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또 특정한 사안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동시대 내에서 주어진 숱한 15번지들이 함께 거주하도록 하는 일이 고려되어야 했다(한편으로는 '전시'라는 형식 자체가 대체로 화이트큐브 속에서 변주와 변형을 이루어내는 것이어서 항상 발명을 거듭해야만 하는 속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게 15번지에 대한 감각은 '광주'로부터 먼저 왔다.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광주에 대한 혐오담론이나 은밀하게 이야기되는 광주나 광주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광주에서 그저 살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 정도로는 안 되고 공부하는 일이 필요했다. '광주학'에 관련된 저작들을 모으고 읽어야 했고 광주 미술 전시의 역사에 관련된 리서치와 정리는 물론이고 계림동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해야만 했다. 광주의 문화, 예술 기관에 대한 이해와 지역을 살뜰하게 가꾸어나가는 작가들이나 연구자들, 원로들께 귀동냥을 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2018년 은 전전긍긍하며 광주를 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기획자들이 외지에서 와서 지역을 수탈하고 떠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주요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진행된 연구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1관에서 2관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관객들이 이동하는 과정부터 관객들의 느낌을 전시장에서 전시장으로가 아니라,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디자인하게끔 이끌었다. 즉, 광주에서도 광주에 있다는 것이 특이한 경험이 되기 위해선, 관객들의 이동 과정이 경계의 부대낌이나 넘나듦이라는 느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했다. 박세희 작가는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적임자였다. 원래대로라면, 1관에서 2관으로 올라오도록 만들어진 에스컬레이터에 스텐레스를 이용해 반 돔 형식으로 제작하고 관객들이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할 때 공항의 트랜짓라운지나 검색대를 통과하는 느낌을 주도록 기획했지만 여러 사정 탓에 2관 입구로 축소해 제작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박세희 작가에 따르면 15번지는 이 세계에 있거나 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들어가는 입구이자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접촉지대를 구성했던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2관에 진입하는 관객들이 작업과 호흡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한편, 계림동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자료들 가운데, < 안티 광주비엔날레-통일미술제> 도록은 비엔날레의 역사와 당시 분위기 그리고 망월동에 설치되었던 작업들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주었다. 실제로 1995년 당시에 걸렸던 1,000여장에 가까운 '만장'을 하나하나 펼쳐 읽어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만장에 기록되고 그려진 이미지들 가운데 여전히 의미있는 메시지들은 동시대 내에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5.18에 관련된 진술과 이미지는 물론이고 핵폐기장,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통일담론과 문화정책, 세계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만장들을 전시장 내로 가져오는데 무리가 없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보낸 만장이었는데, '민간모금( 아시아여성기금)'에 반대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는 한일합의를 통해 일본정부의 기금을 받아들인 박근혜 정부의 행보와 겹쳐 읽게 만들었다. 요컨대 지난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일본정부로부터 받아온 기금은 1991년 이후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에 대한 무지이거나 무관심이 초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1991년 이후 이루어진 역사는 다시 15번지가 되었다고나 할까. 광주 충장로 일대를 답사하면서 '광주미문화원' 자리에 들어선 '황금주차빌딩'(이곳은 황금동으로 불렸고 금은방 상점들이 많이 들어선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몇몇 가게가 남아 있다)은 광주의 역사 내에서 보듬어야 할 대목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원래 이 일대는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100여 년간 유지되었던 이른 바 '황금동 콜박스'가 있던 곳이었다. 상무대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집결지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상무대가 옮겨가면서 사라진 곳이었다. 정유승 작가에 따르면 5. 18 당시 기록을 검토하면서 황금동 콜박스의 여성들 역시 당시에 헌혈을 하거나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음식을 나누었다고 쓰인 저작들이 있지만, 그 속에서조차 그녀들은 언제나 3인칭으로만 서술되어 있다고 말해주었다(정유승 작가는 5.18 상징을 네온으로 만들어 유리관에 전시함으로써,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을 기억/기념하고자 했다). 또 정유승 작가는 광주 <언니네>와 함께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만난 성매매 여성들 자신의 이야기를  『시선의 반납』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공동구매영수증 공동구매를 하면 공동구매영수증이 생긴다. 예를 들어, 업주가 방 꾸밈비로 캐노피를 구매하도록 지시한다. 성매매여성에게 주어진 방 자체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방이자 손님의 방이다. 개인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손님의 욕구에 맞게끔 꾸미도록 하는데 이를 공동으로 구매하게 하며 색깔정도만 고를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방을 꾸미는 물건들이 색깔만 다를 뿐 형태는 일률적으로 동일하다. 방을 꾸미는 물건들 말고도 젤, 물티슈, 음료수, 가글, 매트, 봉투, 방석, 신발 등을 공동 구매한다. 광주 대인동의 경우 성매매여성들이 한 명 씩 돌아가면서 단체주문을 하거나 한 달에 50만원씩 업소에 돈을 내고 그 돈으로 공동구매를 한다. ―정유승, 「공동구매영수증」, <2003년 3월 23일>   이 뿐만 아니라 전시장 내에 성매매집결지에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착취되고 수탈되는지를 실제로 그곳에서 사용된 물건들을 배치하고 그 물건들의 내력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사용했던 물건을 가져와서 그런지 처음 설치를 진행했을 때는 멀리까지 냄새가 퍼져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설치 기간 중에 정유승 작가는 탈성매매 여성 한 분을 초대해 전시장 한 자리에 시를 한 편 남기주기를 요청했다. (이 시는 전시장에 기록된 상태로 경험하는 것이 좋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 자체로 만날 길이 없어, 기록해 둔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외람되지만 나는 이연주의 시 「마지막 페이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에서도 “가슴을 탕탕”친다는 표현이 나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시집은 공교롭게도 김학순의 증언 이후에 출간된 시집이기도 하다.)   김이 팍 새는 하루를 보낸 후에 항상 찾아오는 허무함이 비집고 나오는 목의 긴장감을 풀면 서론도 본론도 없는 욕이 튀어나온다. 가슴을 탕탕 치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냐 악다구니도 써보고... 그리움에 사무쳤던 그녀를 탓해보아도 얼굴 한가득 눈물범벅인 채― 까만 내 앞날은 밝아지지 않는다. ―까막벌레, 「술 취한 밤엔」 전문     4. 15번지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키라 츠보이 작가가 이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작가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직장을 노인들을 돌보는 복지사로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할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 내에 편재하고 있는 집단화의 문제와 폭력들에 충격을 받는다. 이 경험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는 한편,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대응을 하도록 촉발한 사건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홀로 꾸준히 해오던 드로잉은 인간의 먹거리로만 존재하게 된 '동물'에 대한 회화적 표현으로, 그리고 비판적 '기록'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동일본 대진재로부터 촉발된 이른 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문제였다. 일본의 대중미디어가 극도로 통제하고 있는 '후쿠시마'에 대한 정보와 주민들에 대한 차별, 그리고 후쿠시마 지역을 '처리'하기 위해 투입되는 노동자의 문제의 은폐 등에 관한 문제를 베니어 합판에 그려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시리즈가 '무주물'(주인이 없는 물건) 연작이다. 무주물이라는 표현은 2011년 8월 후쿠시마현 니혼마쓰 시에 있는 '썬필드 골프장'이 도쿄 전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가처분 신청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도쿄 전력 측 변호사의 반론에 등장한 것이다.   “방사능 물질은 이미 골프 코스 잔디밭과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상태로 존재한다. 불가분한 상태로 일체화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골프장의 방사능은 소유자가 없는 물건, 즉 '무주물' 이다.” ―아키라 츠보이, 「포트폴리오」에서 인용   아키라 츠보이는 '무주물 연작'을 갤러리에 전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알리기보다 거리 위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민들에게 직접 소개하고 알리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방식은 일본의 동시대 예술의 경향에서는 낯선 것이었는데, 오히려 한국의 민중미술의 흐름에 그의 작업이 더 마침맞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일본의 동시대 미술보다는 한국의 민중미술이 가졌던 '서사적 성격'과 더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가 미술 엘리트 교육으로부터 그리기를 시작한  게 아니어서 가능한 항의의 방식이자, 작업일지도 모른다. 광주의 <지구발전 오라>(당시 디렉터 김영희, 큐레이터 김탁현)의 후의로 레지던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작가는 한국의 원전 문제를 동시에 사고하면서도 한국의 역사적 문제를 작업으로 조성하기 시작한다. <일본군 성노예 연작>은 이런 조건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요컨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원전 문제에 대한 부인은 아키라 츠보이 작가로 하여금 역사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작업의 영역으로 가져오게 한 동력이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자행된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성적 폭력의 문제를 베니어 합판 위에 아크릴 작업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데, 앞선 연작과 달리 베니어 합판을 세로로 세워 작업을 한다. 즉 이 연작은 파노라마의 형식이 아니라, 각 베니어 합판에 그려진 인물들이 독립되어 있되 서로가 기대어 있는 육면체 형식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아시아 각 지역에서 자행된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착취에 관련된 증언들을 수집하고 이를 통해 '아직 얼굴을 갖지 않은' 피해자 여성들의 형상을 부여해, 증언과 형상 사이를 복합적으로 연결한다. 달리 말해, 어떤 증언이 그려진 형상에 부착해 있다고 하더라도 증언과 형상은 1:1 대응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부착된 증언들과 그려진 형상들은 서로 뒤섞인다. 여러 개의 증언과 여러 개의 형상은 각각 하나로 주어지지만 서로를 지탱하고 지지하도록 엮여 있다는 것이다(권명아, 「홀로-여럿의 몸을 서로-여럿의 몸이 되도록 하는, 시적인 것의 자리」.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현대문학, 2018). 작가가 배치한 서로의 등을 지지하고 버티는 육면체 설치 방식이 동시대와 연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육면체 가운데 보이지 않는 형상의 자리에는 관객의 자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작업은 역사적 문제가 동시대의 문제와 겹쳐져 있다는 것을 시사함으로써 이 문제가 여전히 애도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형상들이 불에 그을린 증언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이들이 겪은 고통은 여전히 희석될 수 없음에도, 증언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전쟁에 불탄 삶과 그 삶에 대한 증언조차도 불에 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역사적 기억이 유실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아키라 츠보이가 힘겹게 조성한 15번지가 재로 화하기 전에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작업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하는 몫이 남겨져 있는 것이겠다.       5. 나는 <집결지와 비장소> 섹션에 모셔온 작가와 작품들이 '2관=15번지 광주'에서 각기 독립적이되 동시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관람객과 조우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방정아 작가의 <12개의 돔>과 손몽주 작가의 <광광타령>이 겹쳐지고, <광광타령>과 아키라 츠보이 작가의 <일본군 성노예 연작>이, <일본군 성노예 연작>과 여상희 작가의 <검은 대지>가, <검은 대지>와 박세희 작가의 <Passenger>가, <Passenger>와 아키라 츠보이의 <무주물 연작>이, <무주물 연작>과 이응로의 <군상 연작>이, <군상 연작>과 방정아의 <뒷모습> 연작이 섞이고 결속되도록 했다. 또 여상희, 아키라 츠보이의 작업들이 조형섭 작가의 <Exitopia>와 일련의 연작들, 변재규 작가의 <에폭시 필름>, <Somewhere over the rainbow>와 접속하되 각자로 존립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뿐만 아니라 정유승 작가의 <랜드마크, 랜드마켓>, <집결지의 낮과 밤> 외 작업들과 박화연 작가의 <실마리를 찾아서>, <당신의 할머니 김정복>,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여상희 작가의 <Ground of POW> 아카이브 연작과 결속될 수 있다고 보았고 안옥현 작가의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가 저류에서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3층에 설치된 김경화의 <숨은 노동>은 이러한 구도 위에서 이들 모두와 만나고 맞은편에 설치된 만장과 마주보도록 했다. 물론 이 작업들 사이의 긴장이 헐겁거나 너무 긴밀해 작업들 사이의 분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기획자의 역량이 모자란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2관 전체의 조도를 낮추고 천장에 일렁이는 그림자나 또 설치 작업들의 그림자들이(혹은 빛) 다른 작업들 사이로 들어가도록 함으로써 이들 전체가 하나의 작업으로, 15번지로 감각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작업들이 한 몸이되 여럿으로, 여럿이되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조성한다면, 작업들이 품어내는 메시지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관객들과 상호적으로 호응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실제로 폐막 하루 전, 두 달의 빠듯한 기간 동안 협의를 진행한 안태은 작가의 <A Pot> 퍼포먼스가 정유승 작가의 <황금동 여성들>과 <광주 미술전시의 역사 1980>이 전시되는 영역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한 것은 2관에 설치된 작업들이 전시라는 폐쇄된 맥락 안에 고착되지 않고 외부에 의해 증식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태은 작가의 작업 역시 이 분위기 속에서 변용되고 전환되었던 것도 분명했다. 아니, 더 이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관에 살 수 없게 된 작업들은 이제 막 15번지를 구축하고, 해방의 기획을 다시 구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관객들과 더불어 말이다.    

    김영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2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2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1편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가 말문을 열기 시작한 1992년부터 20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허우둥어를 포함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을 접하게 되면, 중일전쟁시기(1937년~1945년) 일본군이 자행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중국 작가 딩링(丁玲)의 작품과 작품에 대한 중국사회의 반향을 떠올리게 된다. 전쟁터의 성폭력과 재현, 그에 대한 전후 중국사회의 대응과 증언의 등장, 각 사안은 서로 연동되어있으며 그곳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함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딩링은 1927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후 1942년 정치 운동에서 비판받기까지 여성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지닌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다. 딩링은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등 도회지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옌안(延安)으로 간다. 딩링은 화북(華北)의 전쟁터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일본군의 성폭력 문제를 다룬 작품을 몇 편 썼다. 1937년 작 『재회』, 1939년과 1941년에 쓴 『새로운 신념』과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새로운 신념 세 개의 작품은 딩링이 전쟁과 성을 직접적인 테마로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우선 1939년 『새로운 신념』의 내용을 살펴보자. 주인공 천 할머니는 마을에 온 일본군에게 손자들과 함께 잡혀서 강간당하고 ‘경로회’로 보내져 세탁 등의 잡일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일본군들 앞에서 중국인과의 성행위를 강제당하는 등의 치욕을 경험한다. 함께 잡힌 손자는 살해되고 손녀는 강간당한 후 ‘위안부’로 어디론가 보내졌다. 천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마을로 돌아왔지만, 줄곧 혼수상태가 이어진다. 천 할머니 아들은 일본군에 의해 엄마와 고향 마을, 산시, 중국이 유린당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사람들에게 항일을 위해 떨쳐 일어나도록 고무한다. 천 할머니는 의식이 돌아오면서 일본군이 자신에게 범한 강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일본군의 잔혹성을 고발한다. 그리고 아들을 홍군에 보내 항일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한편 천 할머니의 손녀 진구는 할머니의 곁에서 강간으로 깊게 상처 입은 여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와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의 양녀들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서로 따뜻한 교감을 나누었는데, 천 할머니와 진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 딩링은 『새로운 신념』을 발표한 지 3년이 지난 후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쓴다. 이 작품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지만 전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새로운 신념』은 일본군의 ‘강간’을 유린당한 ‘민족’이라는 담론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한다면 항일전쟁을 위한 전의 고양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중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는 강간을 ‘치욕’이라 여기는 인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딩링은 1937년에 『재회』라는 희곡을 발표하였다. 희곡 속 주인공 지식인 여성 바이란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후 위장 투항해서 스파이가 될 것을 요청받는다. 이를 받아들인 바이란과 포로로 잡힌 옛 동료가 마주치면서 생기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무력한 ‘개인(여자)’이 어떻게 전쟁의 도구가 되어가는지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1941년에 쓴『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와 함께 읽으면 『재회』에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문제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은 마을에 들어온 일본군들에게 강간당한 후 끌려가 일본군 장교의 ‘위안부’가 된다. 그리고 당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 아래서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그 후 성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마을로 돌아온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고 잔인하다. 딩링은 우선, 전전을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강간을 제멋대로 행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를 여성의 치욕으로 삼는 일상 의식을 문제 삼는다. 둘째, 전전의 연인 샤다바오에 대해서 “동정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는 다른 연민을 지니고 그녀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셋째, 전전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젊은이들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묘사한다. 본래 적의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지켜야 하는 존재(혁명 측)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강간을 인내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전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찾아 떠나가는 것을 응원한다.   딩링이 만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딩링은 혁명 근거지에서의 경험을 쌓고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피해 여성들의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작가 딩링은 현실을 목격한 후 이 문제의 중층적인 면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1편에서 소개한 6명의 구술내용은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의 주인공 전전의 피해와 거의 겹친다. 물론 딩링이라는 작가가 피해자 전전의 삶에 현실을 함축하고,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를 향한 희망을 담았다는 차이는 있다. 전전에게 일본군의 폭력을 견디며 스파이로 복무하라고 했던 공산당원은 허우둥어의 두 번째 피해에 협력했던 공산당 촌장 리부인으로 실재했다. 그는 ‘마을을 위해서’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달라고 허우둥어에게 애원한다.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 자신의 피해를 ‘체면이 손상될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남자친구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전전의 남자친구 샤다바오는 전전에게 결혼하자고 하지만 그의 결혼하자는 말의 저변 인식과 류멘환의 남자친구 인식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완아이화는 고문과 폭력을 겪은 후 류링웨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서 가까스로 삶을 유지한다. 그리고 1992년 일본 법정에 제소하기까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전이 마을을 떠나 영위한 새로운 삶은 완아이화보다 덜 고통스러웠을까? 난얼푸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폭력을 당한 끝에 임신과 출산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심각한 고초를 겪다가 자살했다. 허우둥어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 운동 속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였다. 류멘환도 정치투쟁에서 비판받고 자기비판을 해야 했으며 과거사로 인해 자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과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 역시도 50년대 후반 정치투쟁 속에서 비판받고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렸다. 대부분의 중국 피해자들은 일본군의 폭력이 자행된 장소가 자신들의 마을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주위의 냉대와 멸시는 한층 더 심각하였으며,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을 겪으며 살아내야 했다. 딩링은 홍군의 사기를 고양하는 ‘서북전지복무단’의 단장이 되어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화북지역의 다양한 피해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 거기서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를 써서 일본군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말하였다. 그녀는 전전의 모델이 된 소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전선에서 돌아온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딩링은 전전의 모델이 된 인물에 대한 사회의 일상 의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대단히 동정했다. 전쟁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도 겪어서는 안 될 많은 고난을 겪었다. 운명 속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일을 잘 모르고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능욕당했다고 하는 이유로 그녀를 경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피해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나온 피해자들의 구술 자료집을 읽다 보면 현실은 딩링의 작품 내용보다 훨씬 더 가혹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역사적 반혁명’이라는 딱지가 붙어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딩링도 비슷한 시기에 사상 비판을 혹독하게 당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反右派闘争)에서 문학평론가 저우양은 딩링이 『내가 노을 마을에 있었을 때』에서 전전을 “일본 침략자에 의해서 창부가 된 여성을 여신과 같은 존재로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을 거쳐 딩링은 정치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춥고 헐벗은 땅으로 떠나야 했다.     딩링은 피해자 전전을 통해서 피해자 여성의 언어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리라. 일본 정부를 최초로 제소한 허우둥어가 조사자 장솽빙과 10년간 교류하면서도 자신의 피해에 관해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던 상황은 많은 사실을 말해준다. 장솽빙의 끈기 있는 설득에 고통스럽게 입을 떼면서 “중일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을 때도 이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국교까지 수립된 지금 가능하겠는가”라는 속내를 내비쳤다. 나는 여기서 피해 여성 시점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 수 없었던 역사를 읽는다. 중국의 피해자들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의 김학순 여사의 공식 발언이 없었다면 훨씬 더 늦추어졌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자 중국 민간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해 여성들의 구술과 딩링의 꿈의 좌절을 통해서 지금 일본제국의 성폭력을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의 구조와 일본군과 일본 국가의 책임을 묻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이 물어져서는 근원적 해결로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주 깊고 고통스러운 사유가 될 것이며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우리의 사유가 이어질 때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쓰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Lee Sun-yi

  •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2019년 좌담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발행을 앞두고 10인의 편집위원이 모여 웹진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9년 1월 31일, 2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편집위원 좌담회는 지금껏 '위안부' 문제가 논의되어온 방식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웹진 <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자리였다. 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 소현숙  본 좌담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웹진이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우선 웹진 편집위원님들께서 각자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문제의식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 먼저 저부터 이야기하자면, 2000년대 초반 석사과정 때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증언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접하기 시작했다. 저는 여성/젠더사 전공자로서 어떻게 이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역사 속에 기재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다. 사실 식민지시기 여성의 삶을 말할 때, '위안부' 경험이란 것은 일반 여성들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는 그런 경계를 허물고 식민지하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과 위안소로 동원된 여성들의 경험, 평시와 전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극단적인 경험에 녹아 있는 평범함이라 할까, 또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져 있는 극단성이랄까, 그런 연결성에 관심이 있다. 식민지하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전반적인 차별과 억압의 맥락 속에서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을 역사적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허윤 저는 여성 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민족 문학 담론의 젠더를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다. 민족 문학 속에서 주체가 되는 여성은 주로 피해자로서의 여성인 경우가 많다. '위안부' 서사 역시 (마찬가지 목적으로) 동원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저의 세대적 경험상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위안부'의 표상은 <여명의 눈동자>였던 것 같다. 뭔가 가련하고 비장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의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박사 논문을 쓰면서부터다. 1950년대 한국문학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정신대'를 기억하는 사람, 소문으로 들어본 사람이 오히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정신대' 여자들을 재현하지 않았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하면 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시기였는데, 미군 '위안부'를 타락한 여자로 재현하면서 "저런 여자들이 민족을 더럽히고 있다"라는 방식으로 담론을 재생산하곤 했다. 일본군'위안부'가 부재한 기억 장에 관심을 가졌던 셈이다. 이선이 '위안부'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딩링이라고 하는 중국 문학가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딩링이 1941년에 쓴 『내가 노을마을에 있었을 때』는 일본군'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중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일본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고 '위안부'가 되어, 이후 공산당에 의해 스파이로 활용된다. 그런데 그 여성을 바라보는 중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위화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딩링의 작품을 접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 구술집을 통해 중국의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딩링이 문제를 제기 했던 방식처럼 지금의 내가 '피해자'의 시점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용숙 서양 현대사, 독일사 연구자다. '위안부' 문제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뭔가 복잡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주제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는 한국 사회의 어떤 필요나 요청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2015년에 열린 여성 인권과 전시 성폭력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해외 사례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지식도 인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유럽 사례를 가지고 발표를 했고, 이후 내용을 더 보강하여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의 전시 성폭력과 독일군과 친위대가 기획하고 실행한 강제성매매에 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반세기 넘게 침묵 되었고, 그 기억 자체가 억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된 피해자 인정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서 서양에서 전시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동아시아와 비교할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주 한국 정신대연구소 활동을 20년 넘게 했다. 주로 증언집 작업을 해왔다.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뿐 아니라 중국 등에 계시는 할머니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최근에 과거에 진행했던 피해자의 구술 인터뷰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고 녹취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관련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입장에서 반성을 많이 했다. 어떤 경우에는 연구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면서 준비라 너무 부족해서 인터뷰 내용에 지장을 주기까지 했더라. 할머니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서 똑같은 질문을 만날 때마다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연구자라는 사람들의 준비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윤명숙 일본 유학생 시절, 대학원 석사 때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님께서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하셨고, 그 직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일본군'위안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이 문제가 계급문제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석사과정 연구 주제도 여성사회주의자 독립운동에서 '위안소·조선인 위안부 실태'로 바꾸었다. 이때는 '위안부'는 군인이 총검을 앞세워서 처녀의 머리채를 잡아채 트럭에 싣고 끌고간다는 식의 강제연행 문제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위안부' 동원을 계급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으로 처음 발표했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시각으로 박사논문도 썼는데, '여성주의 시각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여성차별 문제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위안부' 문제가 식민 정책에 의한 일상적 폭력이나 계급차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족차별 문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여성주의 시각과 관련해서는 최근 공부중인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천착하다보면 국가라는 것을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힘든 주제이긴 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김헌주 7년 전부터 한국사연구소에서 '위안부'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 및 해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래 기존의 연구 분야는 근대사회사 쪽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위안부'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자료는 엉뚱하게도 아주 일상적이고 건조한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장교는 '위안소'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고, 사병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활용하는지, 그리고 각 계급마다 돈을 얼마를 내는지, 위생검사는 어떻게 하는지 등이 적혀있는 문서들이 많았다. 이 건조한 문서들을 보면서 약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상대했던 사람은 그냥 평범한 일본(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인이지만 동시에 전쟁터에 나와서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 보내면서 눈물 흘렸던 일본인들이었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떠오른 대목이었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제 '위안부' 문제를 기존에 논의되었던 민족주의적인 문제의식과 방식을 넘어 그 수준과 범위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임경화  일본학 전공자로 전공은 달라도, 연구대상으로서의 일본을 생각할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나에게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전개되어 온 논의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년 동안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수정주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에 논박하고 대중적으로 설득하는 작업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고 있기만 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그 이유는 일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일본학계에 지나치게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적인 논리를 내면화한 '일본학'이 존재하지만, 그에 맞서는 학문으로서의 다른 '일본학'을 구상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 고민하고 행동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경희 일본의 식민주의와 근대성, 통치성 등에 관심이 많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해서도 쓰거나 강의를 해왔다. 90년대 초중반에 재일조선인 대학생들끼리 민족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당시는 강제연행) 문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다. 공부 모임도 했고 당시 헌책방에서 센다 가코 책을 찾아서 읽었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2000년에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되었고, 정치압력에 의한 NHK의 영상개편 문제가 있었다. 히로히토의 유죄를 선고한 법정은 확실히 천황제 국가 일본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너무나 노골적인 억압이 일어났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우파진영에서는 일본군'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가 시작했었고 리버럴 진영에서도 국민기금을 통한 민간협상을 시도하는 등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늘 일본 사회의 반동적 움직임의 중심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오지 않았다는 점에 늘 부채의식이 있다. 열심히 활동하는 재일 선배 연구자들을 보면서 “내가 아니어도…”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권명아 전시동원체제의 연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고민해왔다. 증언 문제뿐 아니라 좁게는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건 전시동원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뗄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전시동원체제를 젠더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사와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젠더 연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기존의 지배적인 학문 체제와는 다른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그룹화되어 있거나, 혹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전시동원체제 역사상을 젠더적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또 전쟁과 폭력의 경험과 증언, 국가 주도 기념의 한계와 대안적인 기념 정치 등의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적 접근은 왜 보완이 필요하나 이선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삶을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민족주의'가 피해자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삶의 터전인 국가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장소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명숙 그렇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만으로 바라보게 되면 일본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했는가와 같은, 민족 차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민족 차별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차별, 성(性) 문제, 계급의 문제, 식민 지배 청산 등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슈다. 특히,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던 경향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면이 있다. 김헌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전시체제의 강제동원이라는 구조, 즉 민족문제가 우선으로 거론되지만,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된ᅠ맥락에는ᅠ조선ᅠ사회ᅠ내부의 가부장제도ᅠ한몫했다. '위안부' 동원에 조선인ᅠ업자들이ᅠ개입한ᅠ부분, 한국전쟁기의 위안소 운영,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같은 민족의 불편한 시선 등 다양한 측면들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려지는 면이 많았다. 윤명숙 1990년대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은 민족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해갔다. 동시에 수용되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이 대결 구도로 이야기되었다. 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ᅠ해결ᅠ운동이ᅠ처음ᅠ불 붙었을ᅠ때는 식민지ᅠ문제와ᅠ강력하게 결부되어ᅠ있었기ᅠ때문에ᅠ민족주의ᅠ색채가ᅠ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정도로 점화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조경희  현재는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만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극복이ᅠ되었다고ᅠ생각한다. 실제로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의 문제, 전시 성폭력의 문제 등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고자 하는 담론이 많이 형성되었다. '민족주의 시각으로만ᅠ바라보면ᅠ안ᅠ된다'는 비판 자체가 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담론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네 딸이나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라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보면 보편적인 여성주의 시각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현숙  최근에 민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 한국의 가부장성이라던가, 피해자들의 해방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의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해방 직후 미군정시기, 열차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 여성의 성추행이 일어났다. 이례적으로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적 명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거기서 한다는 이야기가 '미군들의 성욕이라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처럼 위안소를 만드는 게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한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사료들은 그동안 역사적 사료로서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생기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새로 발굴되기 시작한 거다.  윤명숙  실제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민족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강하거나 강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국내 미디어가 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중심으로 뉴스나 이슈를 전하게 되고, 이때 대중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기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여전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김학순의 공개증언이 있은 지 28년이나 지났다. 우리 사회도 해결 운동과는 별도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우리들, 즉 바로 나의 문제로 더 많이 사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윤명숙 한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면, 우리가 '위안부'ᅠ문제ᅠ해결이라고ᅠ얘기했을ᅠ때ᅠ'해결'을ᅠ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사실은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바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속 커밍아웃을 했고, 약 28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얘기들을 하셨는데, 이 사회는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해결'인지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권명아  할머니들의 '사과를 원한다'라는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는 “할머니들은 왜 사과를 요구할까. 그럼 사과는 누가 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당시 지도자? 일본군? 일본 국민? 한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억총참회(一億総懺悔)[1] 설처럼 일본 전 국민이 사과를 하면 되는 일일까?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나?”라는 말들을 한다. 물론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백만 번을 사과하고, 일본의 일억 총 인구가 참회를 한다고 해도 과거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사과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의미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안부' 문제 관련하여 시민사회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어쩌다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거의 공통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순간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니까 개인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잘못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임경화  해결이라고ᅠ했을ᅠ때,ᅠ공식 사죄, 피해배상, 추모와 기념, 역사교육, 재발 방지와 같이 큰 틀 안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들은 있다. 이렇게 공유되어있는 틀 말고, 우리가 해결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것만이 해결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해결의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관점을 웹진에서 제시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선이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ᅠ제기된 이후,ᅠ일본ᅠ사회의ᅠ많은ᅠ양심적인ᅠ지식인들이ᅠ이 문제를 통해 일본 사회를ᅠ바꾸려는ᅠ노력을ᅠ함께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ᅠ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엄청난 시간, 노력, 비용이라는 자원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이 논의가 한국 사회를 그만큼 성숙시키고, 한국 사회의 (여성)인권이 성장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한 지렛대로 이문제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지점이다. 소현숙  한국 사회가 아예 진전이ᅠ없었다고ᅠ생각하지는ᅠ않는다.ᅠ예를ᅠ들면ᅠ2014년 미군ᅠ‘위안부’,ᅠ기지촌ᅠ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ᅠ제기했다.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한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만 승소하는 다소 미흡한 판결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던 과정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운동과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한다. 이선이  지난 편집회의 때 임경화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까 김헌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건조한 문서로부터 보이는 악의 평범성)도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가져가는 사유가 되는 것 같다. 웹진 안에서 '위안부' 문제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계속 물을 수 있다면, 이 문제가 일본제국의 전쟁범죄를 넘어서 보다 더 확장된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헌주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화한 유흥문화는 일반적이며, 남성들은 그 문화의 소비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제쳐둔 채로, '위안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차원에서 건조하게 이용하는 일본군 남성의 모습과 평범한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 사이에 괴리라는 게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ᅠ군대ᅠ문화에서ᅠ'위안부' 문화의ᅠ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현숙 선생님께서 관련된 사례를 잠깐ᅠ말씀하셨지만, 한국전쟁기 특수 위안대가 설치될 당시에 그 목적이 군의 사기 증진이었다. 일본군'위안부'를 만든 맥락과 똑같은 것이다. 또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휴가를 나와서 귀향해 있는 장병들을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해주기 위해 각 지역마다 위안소를 만들어서 장병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연장선상에서 1960~70년대의 양공주 문제 즉 미군 ‘위안부’ 동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45년 8월 28일 기자 회견에서 패전 처리 내각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수상이 ‘1억 국민이 모두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발언. 전쟁의 책임을 일왕에게만 물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리.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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