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심문보고서,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황병주

  • 게시일2019.09.25
  • 최종수정일2023.12.0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연합군은 다양한 부대에서 일본군 포로심문 보고서를 남겼다. 영국군이 주도하던 동남아시아 총사령부(SEAC) 산하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 미국의 전시정보국(OWI) 등과 함께 맥아더가 사령관으로 있던 남서태평양 총사령부 산하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등이 대표적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문서 중 포로 심문보고서는 노획문서와 함께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은 군사 정보 획득을 위해 일본군 포로에 대해 자세한 심문기록을 남겼다. 주로 군사 관련 내용이었으나 병사들의 삶 전체를 심문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병영 생활 정보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는 군사적 중요도는 크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병영 생활과 관련해 종종 나타나는 문제였다.

특히 연합군이 심리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흔적이 엿보인다. 앞서 소개한 120번 조사보고서와 마찬가지로, 포로 심문보고서 역시 일본군 병사들의 병영 생활 전체를 조감하면서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고 보인다.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일본에서 1997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만든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전 5권) 에도 일부 포함되었고 정진성 편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자료』(전 3권, 선인, 2018)에 2건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심문보고서는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일본군 전쟁범죄 ‘위안부’ 자료집』(1~3)에 실려 있다. 특히 이 자료집은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되는 일부분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심문보고서 전체를 완역했기에 다른 자료집들과 차별화된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총 783건이었으며 이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모두 45건이다. 즉 783건 중 45건에서 위안소와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비율로 보면 약 5.7%에 해당한다. 45건에 나온 일본군 병사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해보면, 직업에 있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각각 절반이고 교육에서는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고루 분포해 있다. 이는 일본의 사회적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문 보고서는 1942년 12월 31일부터 1945년 5월 21일까지 3년 5개월여에 걸쳐 기록됐다.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된 지역은 다양하다. 뉴기니 인근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이 19번, 마닐라, 다바오, 타클로반 등 필리핀이 7번, 벨라완, 암본, 마랑, 아마하이 등이 포함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5번, 상하이 광저우 등의 중국이 4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각각 1번씩 언급되었다. 지역명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12번이다. 

 

남서 태평양 사령부 관할 지역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심문보고서임에도 버마와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체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여러 지역의 위안소를 경험한 병사들이 많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라바울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포로 대부분이 남방 전선에 투입된 병력이었다는 것과 라바울이 남방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라바울은 사실 남방 최전선에 해당하는 지역의 일본군 중심지였다. 위치상으로 뉴기니 바로 옆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은 일본군이 뉴기니와 호주 침공을 위해 10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전략 거점이었다. 그런데도 라바울은 일본 패전 시까지 연합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바울의 위안소가 병사들에게 자주 목격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는 1943년 7월과 11월 사이 심문보고서 형식(Interrogation Report Proforma)을 체계화했다. 심문보고서의 전체 형식은 먼저 포로의 성명, 번호, 계급, 소속 부대, 생포 장소와 시점, 신장과 체중, 연령, 주소 및 직업 등의 기초 정보를 기술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본문은 대체로 1. 서언, 2. 이력, 3. 생포, 4. 부대 또는 전력, 5. 식별, 6, 인물, 7. 취역 함정, 8. 적의 장비, 9. 적의 방식(enemy method), 10. 통신, 11. 방어, 12. 적의 보급, 13. 사기와 선전, 14. 적의 의도, 15. 손실 또는 사상자, 16. 화학전, 17. 지형(지역), 18. 의무, 19. 연합군, 20. 특별 첩보, 21. 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서언에서는 포로의 태도나 지능 등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내려졌고 이력은 입대 후 생포되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으며 이하 대부분은 군사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본 자료집과 직접 관련되는 위안소,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은 특별 첩보, 사기와 선전 등의 항목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사기와 선전’ 항목 중에서도 전투 복무의 상황(Conditions in Fighting Services)이라는 소항목에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이상을 통해 보건대 연합군에게 위안소와 ‘위안부’는 애초 특이한 정보로 인식되었다가 점차 선전전의 소재로 의미가 있다고 파악되었던 듯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보고서의 배포선이다. 보고서의 배포선은 애초 9곳이었는데, 1944년 9월 무렵에는 무려 39개까지 증가하였다. 이 단계에서 배포선은 남태평양 전구를 넘어 중국·버마·인도 전구는 물론 미 전쟁 부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들어서는 배포선이 총 88개소 273부로 확대된다. 남서 태평양 총사령부 참모부서에서부터 거의 모든 단위부대, 심지어는 연대급 전투부대에도 배포되었고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연합군 정보부대와 미 전략첩보국까지 배포망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배포선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연합군 내에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통제했다는 증거

군사적 부분을 제외하고 포로 심문보고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둘째, 전쟁범죄와 관련될 수 있는 잔혹 행위. 셋째, 일본군의 군대 생활 및 의식이 그것이다. 첫째와 관련된 보고서 내용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로 총 24개이다. 둘째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일본과 중국인이나 현지인 ‘위안부’를 언급하는 보고서이다. 총 11개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위안소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인데 총 10개가 된다. 45개의 제한된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가 제일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보고서 진술 내용은 상당히 소략하다. 대체로 특정 지역의 위안소 설치 여부, ‘위안부’ 인원과 국적, 요금 등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위안소의 소유와 운영에 대해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지만, 군의 통제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일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즉, 사설이건 군 직영이건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도 위안소가 군의 직접적 통제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바울에는 이미 1942년부터 위안소가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 병사의 심문 보고서는 1943년 1월 라바울에는 두 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합쳐 1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1943년 2월에 생산된 제45호 포로심문보고서는 필리핀 지역의 위안소 중 일부는 군 내부에 설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위안소는 일부 일본군 병사들에게조차 추잡한 것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다. 1943년 4월 14일 자 포로심문보고서 제54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 도쿄 제대 출신의 해군 경리장교 이나가키 리이치(Inagaki, Riichi)는 육군과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매우 추잡한 것이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he asserted that the subject was an ugly one, abhorrent to him.”) 일본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도쿄 제대 출신의 장교가 보기에도 일본군의 위안소는 용납되기 곤란한 것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성격의 포로 심문보고서도 있다.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들의 제676호 심문보고서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기에 상징적 의미로 독일 잠수함이 바타비아의 일본 해군기지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 잠수함이 미군 공격으로 싱가포르 근해에서 침몰당했고 승조원들은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를 남기게 된다. 

독일군 장교들은 동맹 관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소였다. 독일군들은 자신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고 일본군 장교만 출입하는 위안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네덜란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추축국 동맹 관계에 있었음에도 위안소는 오직 일본군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안소의 의미와 관련해 상당한 시사를 준다고 보인다. 이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본군의 독점적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적 병영 생활과
인종주의

연합군번역통역부의 포로 심문보고서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일본군의 군대 생활과 의식 및 전시기 일본의 내부상황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일본제국의 군대라고 한다면, 일본군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포로들은 전반적으로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와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제59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심문 과정에서 천황이 언급될 때마다 바로 기립해 차렷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제63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전쟁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었고 제60호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을 도와주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심문보고서는 또한 일본군의 병영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계급과 함께 연공서열로 구축된 일본군의 내부 규율이 매우 가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규율화는 폭력의 만연과 밀접히 관련된다. 제664호의 포로는 입대 첫해를 선임병들에게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따귀를 맞으며 생활한 것으로 기억했다. 

군대 내부의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추축국 동맹 간의 균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 심문보고서는 일본군과 독일군 관계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 두 국가는 동맹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심각한 갈등관계였다고 보인다. 독일군 포로의 진술은 일관되게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일본군 포로들 역시 독일에 대한 태도를 묻는 말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독일의 원조를 묻는 말에 모든 일본군 포로들은 한결같이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했고 히틀러와 천황의 비교에 대해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동맹 속의 적대감은 특히 인종주의와 깊이 관련된다. 심문관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군 대부분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다. 즉 바타비아의 독일군 포로들이 보기에 일본군은 백인종 대 황인종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고 일본군 사병들은 독일군이 일본군 지휘부를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 포로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의 인종적 우수성과 일본의 열등함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인종주의 구도는 다른 한편으로 황인종 내부의 차별과 억압을 내장한 것이었다. 제30호 심문보고서의 포로는 중국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인종주의의 피해 대상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근대 서구와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아시아의 또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상쇄하고자 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인종주의와 관련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일본군 위안소의 요금 제도는 인종별로 차등화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유럽 여성들은 특별히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고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 등의 순서가 보통이었다. 인종주의에 오염된 일본군의 실태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인종 간 전쟁을 위해 동원된 ‘황인종’이자 일본 제국 내부의 최하위 사회적 약자인 식민지 여성들이었다. 일본군은 사회적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복수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듯이 ‘위안부’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나와야 했을 것이다. 

 

 

연결되는 글

글쓴이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국의 근대적 변화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관련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aviantibj@gmail.com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