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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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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주제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대면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2019년 12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이 뮤지션 30여 명의 참여로 발매됐다.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던 송은지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2012년에 황보령을 포함한 여성 인디 뮤지션들의 참여로 첫 앨범을 발매했고, 2013년에 <이야기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이 나왔다. 작년 발매된 3집에서는 송은지뿐 아니라 황보령도 앨범 전체의 콘셉트를 잡는 기획팀으로 활동했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논의할 때면 기획팀 서상혁이 자리를 마련했고, 이후 실제 앨범 발매를 앞두고는 저작권 업무를 비롯한 앨범 발매 관련 실무를 이윤혁이 맡아 진행했다. 이들은 이번 앨범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직시하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시도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보다는 좋은 음악으로’ 이야기를 건네길 원한다. 2012년에 시작한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는지, 세 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었는지를 직접 듣기 위해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기획팀을 만났다. 음악으로 ‘위안부’ 문제와 여성을 이야기하다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 <결> 독자분들께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말씀해주세요. 송은지 : 저희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가 여성의 신체에 부여하는 기능이 시효를 다했을 때 여성이 소외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위안부’ 할머니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할머니에서 출발한 씨앗이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진 거죠.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2006년 무렵에는 시각을 확장하고 싶어 뮤지션들끼리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릴리스의 시선’이라는 모임이었는데, 함께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 모임에 있던 멤버들이 1집에 많이 참여했죠. 모임 멤버들에게 여성 뮤지션들의 시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노래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이후에 2집까지 발매하자 수익금이 조금 발생했는데요, 이번 3집은 수익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결정이기도 했어요. 물론 ‘돈을 기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몇 년 동안 했죠. 1, 2집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에너지의 측면에서 부작용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업은 결국엔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 그 여정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었어요. 혼자가 아니라 되도록 함께 이 마음을 나누는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획팀을 꾸리게 됐어요. Q.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무렵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금은 ‘홍대 여신’이라는 말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종의 혐오 표현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지요. 그런데 1집 때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 참여한 뮤지션들을 ‘홍대 여신들’이라고 표현한 기사들이 많더라고요. 송은지 : 당시의 ‘홍대 여신’ 트렌드가 너무 화가 나고 싫었어요. 활동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야기해주세요> 1집을 발매했을 때 ‘홍대 여신이 모였다’ 이런 식으로 보도가 되는 거예요. 여성의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칭찬이랍시고 ‘홍대 여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니 화가 났죠. 그런데 앨범 홍보를 해주는 기사에 대고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황보령 : “좋은 뜻인데 왜 싫어하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별걸 가지고 다 기분 나빠한다’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송은지 : 사실 앨범을 기획한 의도와도 중요하게 닿아있는 부분이잖아요. ‘여신’이라고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홍대 인디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여성 뮤지션들의 이미지가 뭉뚱그려 포장되고 소비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멋진 작업을 하는 여성 뮤지션들이 함께 마음을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황보령 : 저는 정말 억울했어요. 전 언제나 장군, 칼잡이 같은 이미지였는데 여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화를 내고 다녔죠. (웃음) 경계를 넘어, 음악인으로서 ‘위안부’ 문제 사유하기 Q. 송은지 님이 다른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라고 하면 떠오르는 관습적이거나 구태의연한 요소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습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송은지 : 제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여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거의 30년 동안 한결같은 방식으로 시위가 계속되고 있잖아요. 현장에는 매번 ‘바위처럼’ 같은 민중가요가 나오고요.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위에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이 마이크를 들고 “사과하라! 배상하라!” 외치는 모습으로만 기억된다면, 사람들이 점점 더 거리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죠.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같은 에너지로 공감하고 분노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누군가는 지겨워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피하고 싶어질 수도 있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할머님들에게 힘을 실어드릴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시위가 아닌 다른 경로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일본군‘위안부’ 이슈가 역사 속에 박제된, 피해 당사자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1집 때는 <이야기해주세요>가 뮤지션 각자의 경험을 담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작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참여 뮤지션들에게 ‘결과물 자체가 하나의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이제서야 말하지만 이런 모호한 제안을 다들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이윤혁 : 예전에 송은지 씨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사람들이 피로해하는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관습적인 요소를 환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3집에는 남성 뮤지션들도 프로젝트에 참여하셨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젠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남성의 관점에서 이 사안을 바라보는 지점이 여성과는 다를 것 같거든요. 남성으로 태어나 자의든 타의든 젠더 권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성 멤버들의 참여가 조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상혁 : 전 사실 역사를 바라볼 때 존재 대 존재의 관점에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인들도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정된 입장에서 벗어나 상황과 맥락을 알게 되면 다른 방식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보령 : 저도 전쟁에 관해서는 모두가 피해자라고 주장해요. 국가와 성별의 경계에서 벗어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송은지 : 사실 1집 때도 남성분들이 참여를 안 하신 게 아니에요. 당시 모금 공연에도 남성 뮤지션들이 참여를 해주셨어요. 다만, 제가 앨범이라는 형태에 집착하는 옛날 사람이다 보니, 앨범을 여성 뮤지션의 가시적인 결과물로 구성하고 싶다는 고집이 있었던 거죠. 이번 3집에서는 1집 모금 공연에 참여해주셨던 남성 뮤지션분들에게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이윤혁 : <이야기해주세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 결과물이에요. 저희는 어쨌든 음악이라는 예술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고 기록해서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위안부’에 대해서 논해봐!’라고 하면 딱딱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있기 쉬운데, 우리가 이 문제를 음악으로 다뤘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잘 모르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사유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이죠.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해주세요>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뮤지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각자의 언어로 만드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보거든요. 특히 음악이라는 장르 특성상 3~4분 이내의 시간에 그 사유의 과정과 감정을 압축해 전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창작의 고통이 있었을 것 같아요. 황보령 : 맞아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원래 작업하던 록, 트랜스, 테크노 장르로 전형적인 ‘슬픔’의 분위기를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앨범 전체의 맥락을 생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개인 앨범에 수록했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을 편곡해서 실었어요. 울지 않고 공연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감정적인 곡인데, 가사나 메시지가 할머님들의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희망찬 느낌으로 편곡했죠. 송은지 : ‘포기한다고 몇 번 전화하려고 했었다’고 말씀하신 뮤지션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곡을 써야 할지 다들 굉장히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그래도 결국에는 완성을 해주셨고, 그럴 때마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이윤혁 : 저희 앨범이 ‘위안부’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죠. 그런데도 기획자로서 뿌듯한 것은 곡들의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하고 뮤지션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표현한 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점이에요. Q. 말씀하신 대로 다른 장르와 성격을 가진 뮤지션들이 참여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 것이 이번 앨범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칫하면 다양한 메시지들이 섞여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기획팀의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서상혁 : 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참여하는 뮤지션들에게 이 문제를 시작으로 평화와 연대에 관한 상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주시길 요청했죠. (이번 앨범은 CD1, CD2 두 장의 CD로 나눠서 발매됐다. 직접적으로 일본군‘위안부’를 소재로 한 노래는 CD1에, ‘평화와 공존’이라는 확장된 주제의 노래는 CD2에 담았다. -편집자) 송은지 : 3집 기획에서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수록곡들의 주제가 소수자 이슈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참여 뮤지션들에게 이렇게 요청을 드렸지만, 많은 분이 이슈를 확장하기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해 고민하기를 선택하셨더라고요. 그게 각자에게 당면한 어떤 과제처럼 느껴진 것 같아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행해주신 결과물이 앨범에 담긴 거고요. 이윤혁 : 저는 개인적으로 결과물이 오히려 더 모호하고 흐릿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꾸로 표현하면 구호보다 음악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음악을 우연히 듣고 나서 ‘이 음악이 어떻게 생긴 거지?’ 하며 궁금해지는 게 음악 팬의 마음이고, 음악의 존재 목적이기도 하잖아요. 노래가 좋으면 이 앨범이 만들어진 계기와 과정을 찾게 되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까지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상혁 :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을 환기하고 감정을 느끼는데, 그 감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잖아요. 음악 자체가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빛이 통과하는 대상에 따라 산란하는 방식이 달라지듯, 이 음악들을 듣고 청자들은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할 수 있겠죠. 단지 좋은 음악으로 기억되길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뮤지션들의 사유가 담긴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시나요? 송은지 : 간단해요.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다음에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감사한 일이죠. 1집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썼고 개인적인 욕망과 닿아 있던 부분은 ‘여성 음악인들의 결과물을 담고 싶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어보자’라는 거였어요. 그것이 3집에서는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로 발전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서상혁 : 코로나 19가 전 세계적으로 일상을 멈추게 한 지금 상황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만 잘한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주체가 협력하고 연대해야 하는 상황이죠. 마찬가지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 것으로 가져와 당면하는 것, 실제로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황보령 : 음악이 먼저고, 구호는 나중이에요. 그게 저희가 말하고 싶은 것과 딱 맞는 것 같아요. 이윤혁 : 음악을 잘 들어주세요. 앨범에 16곡이나 실려있으니 이 중에 자기 취향에 맞는 곡이 한 곡 정도는 있을 거예요. (웃음)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와 관련해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서상혁 : 이걸 계기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야외에서 공연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 뮤지션들과 기획 공연을 가볍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송은지 :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무엇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인지 대화를 나누는 공연이나 모임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 앨범에 담긴 음악들도 할머님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잖아요.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정말 음악은 사랑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Credit 기획/진행 : 현승인 인터뷰/글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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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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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에 수록된 이들은 누구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과제로 국내에서 논의된 시점은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1988년)부터입니다.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되었고(1990년), 1991년 8월 14일엔 김학순의 증언 등이 이어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의 장이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연구주제도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양한 연구주제 중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에서 여러 명의 연구자가 명부 이야기를 다룬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을 출판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위의 책을 참고해 주십시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부(名簿)와 명단(名單)이란 용어입니다. 이 두 용어는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명단은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표'이고, 명부는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 주소, 직업 따위를 적어 놓은 장부'를 뜻합니다. 명단이 다소 개별적이고 단순한 이름표라면 명부는 이보다 더 체계적이고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입니다. 이 글에서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건 작성자들이 '위안부' 명부라는 표현을 일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이 발굴한 명부 중에서 '위안부' 명부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문건은 제한적입니다. 현재 발굴된 명부 중에 '위안부'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부가 작성된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명부에 기록된 모든 여성을 '위안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의 패전후 조선으로 귀환할 당시에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 명부에는 귀환자 전원의 명단이 수록되었기에, 치밀한 검토과정 없이 이를 '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작성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명부를 '위안부' 관련 명부로 보고 소개합니다. '위안부' 관련 명부들은 일련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의도와 필요가 각기 달랐기에 명부의 명칭은 작성 주체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아래 표는 이 글에서 소개할 명부를 작성 주체와 장소, 그리고 시기를 중심으로 구분해 정리한 것입니다. 시기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작성된 명부와 일본 패전 뒤에 작성된 명부의 목적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고 : 연도를 기록한 명부(명단)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패전 전후에 만들어진 명단. 전쟁 중 지역별 전세 차이가 있어 버마, 필리핀 등지 명부는 공식적인 일본 항복 이전에 만들어짐. 1. 주더란 편(朱德蘭 編), 『대만 ‘위안부’ 조사와 연구 자료집(臺灣慰安婦調査と硏究資料集)』, 타이페이 중앙 연구원 종산 인문사회과학연구원(臺北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1999. 56쪽(수록자료는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된 타이완척식주식회사자료군에서 발굴한 자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편,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최종길 논문, 284쪽). 2.『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쑤즈량·천리페이, 윤명숙 논문)과 박정애 논문(「중국 저장성(折江省) 진화(金華)의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 『페미니즘연구』, 2017.4. 3. 민족문제연구소 사본 소장. 중국 상하이 명부에서는 피해자 한 명만 확인되었다 4. 위와 동일 5. 오키나와현립 도서관 소장자료. 강정숙,「일제 말기 오키나와 다이토(大東)제도의 조선인 군 위안부들」, 『한국민족운동사연구』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6.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자료. RG 313 Entry 1352 Box 1967 7. 일로일로 환자요양소, [성병 검사 성적의 건 통보],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編),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 3권, 69쪽 8. 연합군작성 포로명부(NARA 소장자료, 한국 국가기록원 복사본 소장.) 9. 타이의 연합군 및 타이군에 의해 작성된 수용소 명부(타이국립기록원 소장) 10. 버마 미치나 인도 레도 수용소. 정진성편, 『일본군'위안부'관계미국자료』3, 127쪽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명부해제집 1』 231, 242-3. 원자료는 NARA 소장자료, 국사편찬위원회에 복사본 소장 12.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2009, 31쪽, 40쪽 13. 남방조선출신자명부 : 위 책, 44쪽 명부가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 산야(三亞)방면행 특요원 명부<그림 1>[1]는 1939년 5월 일본 정부 국책회사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가 생산한 보고서[2] 자료 중의 일부입니다. 특요원은 바로 '위안부'를 지칭합니다. 특요원 명부를 통해 이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가 대부분 대만인, 일본인, 조선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부와 함께 나온 자료에선 도항자(渡航者, 배나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이동하는 자-편집자) 명부, 인명표라는 명칭도 쓰고 있습니다. 특요원 명부가 포함되어 있는 희귀한 도항자 명부인 셈이지요. 특요원 명부와 함께 발굴된 자료는 특히 중요한데 일본 해군과 총독부, 타이완척식, 타이완척식의 자회사인 후다이(福大)공사 등이 군 위안소 건축과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일본 해군은 총독부를 거쳐 타이완척식에 중국 하이난도(海南島)의 해군 위안소 건축과 군 '위안부' 동원을 요청합니다. 타이완척식은 자회사인 후다이공사를 통해 위안소 건축 완료 후 해군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로 하고 '위안부'로 삼을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게다가 이 자료 더미 속에는 당시 동원된 여성 수십 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파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도 위안소 경영을 위한 비용은 일본군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임시군사비'에서 나왔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오키나와 다이토 제도(大東諸島) 4중대 진중일지 <그림 2>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의 수는 적지만, 이 명단이 기록된 진중일지에는 다이토 제도에 배치된 '위안부'들의 이름, 다이토 제도로 오기까지의 이동 경로, 그리고 '위안부'들이 전쟁 중에 처한 상황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진중일지는 패전이 임박하자 관련 기록물 소각을 명한 일본군 상부의 지시사항까지 적힌 상태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당시 기록물 소각 명령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4중대 중대장의 결단 덕분이죠. 일본군이 이와 같은 기록물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진중일지와 유사한 명부들을 발굴해 '위안부' 피해 실태를 비롯한 더 많은 사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일본군은 '위안부' 명부를 작성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 도항자 명부, 진중일지 외에도 여성들이 위안소 소재지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 일본군이 작성하거나 위안소 업자가 작성해 일본군에게 제출한 '위안부' 명부들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군정감부가 낸 「군정 규정집」 제3호[3](1943.11.11.)에는 '지방장관은 위안시설 및 여관영업자 명부와 가업부(稼業婦, '위안부'를 지칭-필자) 명부를 비치하고 이동이 있을 때마다 정리할 것', '가업부는 취업과 폐업 시에도 관할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위안부' 명부의 작성과 관리를 중시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군 기밀 보안 등의 이유로 전쟁터에서 일본군 관련 시설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본군이 여성들을 전쟁터에 동원한 목적은 군인의 성병 예방과 성욕 해결 등이었으므로 '위안부'로 동원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 검사를 하고 관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파나이섬 성병 검사 결과를 보고한 성병 검사 성적(검미성적)에 관한 건 통보(1942.6) <그림 3>라는 공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파나이섬의 환자요양소나 군정 의료기관에서는 지역 내 위안소 여성 수십 명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마다 성병 유무를 진단하여 그 결과를 한 명 한 명 정리해 상부 기관에 보고했습니다. 성병 검사 상태 보고가 목적이므로 이름, (나이), 병 상태 정도만 적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지역 관할 군 혹은 군정에서는 이를 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문은 파나이섬에서만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림3>은 발굴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본 측이 원본의 이름 부분을 검게 지워 지금으로서는 조선인 여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부의 발굴을 통해 이 지역 외에도 각지에서 성병 검사와 관련한 명부들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부 분석을 통해 영웅으로 둔갑한 위안소 업자를 밝혀내다 중국에서 발굴된 저장성의 진화계림회 명부는 일본군에게 점령된 중국 진화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회가 만든 명부입니다. 이 명부는 1945년 1월에 진화현의 한 관리가 쟝이밍(將一嗚) 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패전 이전의 기록이어서 당시 저장성 지역 상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화계림회 명부와 관련하여 제가 언급하고 싶은 지점은 '위안부'보다 위안소 업자들의 직종 변경이나 장소이동이 상당히 잦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귀환하는 조선인 남성들의 경력을 다룬 명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인력이용 방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위안소 업자였던 남성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사례입니다. 중국 상하이 한국부녀공제회 회장이었던 공돈은 '위안부' 들을 구제한 영웅으로 신문에 등장합니다(「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여성들이 상해 동포들에게 구제」, 『서울신문』, 1946.5.12.). 하지만 그는 1942년에는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였음이 명부(1942, 『재지반도인인명록』[4])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앞으로의 명부 연구가 만들어낼 가능성 필리핀·축제도(Chuuk Islands, 통칭 트럭섬)·일본 오키나와·버마·타이의 연합군이 작성한 명부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 명부<그림4>는 비교적 자세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 신상만이 아니라 수용소 간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에 비해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축제도 명부, 일본 오키나와 명부는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버마, 타이 명부에는 이름만 있을 뿐 주소도 없고, 이름도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적인 명부를 도대체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구명줄이 있습니다. 바로 이미 발간된 피해자들의 증언집입니다. 한국정신대연구회(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지역단체 등에서 만든 증언집만 10권 이상입니다. 북측에서 만든 증언집도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집의 내용에 기초하여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과거 점에 불과하던 명부 속 피해자들의 존재가 선과 면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존재로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강화해야 단순하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다면성을 이해하고 해결 방향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명부를 주로 한국인 생존자를 찾고, 당시 일본군의 책임을 묻는 용도에 국한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자료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명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국내외에 발굴되어 있기 때문이죠.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을 토대로 ▲명부를 작성한 일본군, ▲연합군, ▲명부 작성에 관여한 현지인의 다양한 역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민족별 대응 방식의 차이, ▲위안소 내 힘의 관계,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명부 연구에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책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19)에서 좀더 자세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조선인 여성들의 정보가 기록된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에 대해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교정/교열 : 금혜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타이완에서 하이난도(海南島)으로 건너간 여성명단 중 일부.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78쪽(최종길, 도항자 인명표)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2019, 75~76쪽.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자 보고서는 “해군무관실이 귀국(타이완총독부-인용자)을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2. 특요원(싼야 방면행) ㈎ 10인 1조(5월 23일 金令丸로 출항 예정) ㈏15인 1조(현재 수배 중)”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타이완척식의 자료에는 '위안부' 관련 명부가 4개 존재한다. ^ 마라이군정감(馬來軍政監部), 군정규정집(軍政規定集) 3호: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 정부조사(政府調査)「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3』, 龍溪書舍, 1997, 25쪽. ^ 백천수남(白川秀男) 편, 『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백천야행(白川洋行), 1941, 1942. 황선익, 「해방 후 중국 上海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집단수용과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54, 2016.5,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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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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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소녀상과 함께 함께 만난 사람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작가 김세진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75개의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2018년엔 책으로 엮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출판했어요. Q. 처음 소녀상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기 전에 ‘소녀상 농성 대학생 공동행동’에서 소녀상 지킴이를 했어요. 어느 날 어떤 분이 저에게 ‘전국의 소녀상이 몇 개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저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다른 지역에는 어느 곳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 조사해봤어요. 그런데 소녀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더라고요. 그림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전국을 다니며 소녀상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어요. 소녀상의 의미를 알리자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단지 어디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Q. 전국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면서 겪었던 일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청주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스케치는 겨우 끝났고 채색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거예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죠. 카페 안에서 그림을 마저 그리고 있는데, 카페 사장님이 제 그림에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는 작업에 관해 설명해 드렸죠.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저더러 오늘 잠은 어디에서 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지금 저렇게 비가 많이 오니까 찜질방을 가야겠죠?” 말하니까 그러면 자신이 카페 열쇠를 줄 테니 여기서 자고 가라는 거예요. 여기서 씻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만큼 그리다가 자고 가라고요. 실제로 제게 가게 열쇠를 맡기고 퇴근하셨어요. 그게 엄청나게 감동이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열쇠를 맡긴다는 게 대단한 거잖아요. 남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갔는데, 그곳 사장님도 저더러 뭘 그리냐고 물어보시더니, 또 어디서 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마 노숙을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니, 열쇠를 줄 테니 가게 소파에서 자라는 거예요. (웃음) Q. 작가님의 작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까 환대를 해주셨던 거겠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주 많은 분을 만나셨을 것 같아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분들하고 계속 연락이 닿고 있어요. 자기 지역에서 함께 전시회를 열자고 문의도 들어오고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 또 있어요. 저는 막연하게 전국 각 곳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 네트워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없더라고요. 네트워크가 없으니 소녀상 건립에 대한 노하우 역시 공유되고 있지 않은 거예요.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똑같이 겪고 있었죠. 본의 아니게 제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된 곳도 있어요. 각 지역의 추진위끼리 연결을 해주기도 하고, 소녀상을 건립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알려드리기도 했어요.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면서 느낀 보람 중에 하나죠. Q.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가끔 스스로 물어봐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요. 글쎄요. 일단은 시작했고, 사람들이 의미가 있다고 말을 해주니까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소녀상을 그림으로써 소녀상은 먼 곳이 아닌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소녀상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우리 동네에도 있고, 옆 동네에도 있어요. 수요시위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소녀상은 가까운 곳에 언제나 늘 있어요. 누군가 제 작업을 보고 ‘어, 우리 동네에도 소녀상이 있었네?’ 하는 반응을 보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그걸 알리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75개의 유일무이한 소녀상들을 마주하다 Q. 소녀상 이미지에 관한 비판 중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를 소녀로 고정한다는 비판이 있어요.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녀상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이겠죠. 우리가 소녀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의 소녀상은 두 작가님이 만든 작품이니까요. 저는 소녀상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은 현대미술로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두 작가님은 소녀라는 이미지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피해자들을 기리고 싶었던 거예요.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다수가 피해 당시 어린 소녀였던 것도 사실이고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고, 인권운동가라는 의견이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모든 ‘위안부’ 피해자가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고요, 그중 몇 분이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 역시 피해 이후의 일이죠.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대 형성과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소녀상은 현대미술 작품 중 하나고요.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소녀상을 보면 무섭대요. 소녀상이 마치 계속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대요. 소녀상을 볼 때 내면에 있는 자신의 시각이 비추어져서 그런 거겠죠. 그런데 우리는 소녀상을 보면서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죠. 재밌는 건 소녀상의 표정은 언제나 무표정이라는 거예요. 무표정한 표정에 감정을 씌우는 건 소녀상을 보는 우리 자신이죠. 이게 현대미술의 역할이고요. Q. 소녀의 이미지가 계속 복제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요. 김세진 작가님은 직접 다양한 곳의 소녀상을 보셨잖아요. 실제로는 어떤가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김학순 할머니를 모델로 한 소녀상도 있어요. 말하자면 소녀상이 아니라 할머니상이죠. 또 소녀가 아닌 젊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소녀상도 있어요. 많은 작가님이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물론, 가장 많은 것은 두 작가의 소녀상이죠. 지역에서 소녀상 건립을 추진할 때 여러 작품이 후보로 올라오는데요, 대다수의 지역에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작품이 투표를 통해 선정되곤 해요.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소녀상의 이미지는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에요. 오죽하면 지역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을 제치고 예의상 후보로 올려놓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이 선정되는 일도 있었겠어요. 심지어 두 작가님의 소녀상이 진짜 소녀상이고, 나머지는 가짜 소녀상이라는 말을 하는 분도 계세요. 두 작가님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계세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본인들의 작품으로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본인들 외에 다른 작가가 만든 소녀상 중에도 좋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도 하시고요. Q. 혹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외에 인상 깊게 보았던 소녀상이 있나요? 부천 소녀상 같은 경우에는 뒷모습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요.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돌아가서 앞모습을 보면 얼굴이 있는 자리에 동판 거울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어요. 제가 본 동상의 뒷모습은 다름 아닌 나의 뒷모습이었던 거예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굉장히 멋진 작품이죠. 그리고 이화여대 입구 대현문화공원에 있는 소녀상은 파란색 나비 날개를 가지고 있어요. 전국의 대학생들이 참여한 이 소녀상의 파란 나비 날개는 환생·희망·자유·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대요. 중구 프란체스코 회관 앞에는 전국 고등학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해서 만든 소녀상이 있어요. 고등학생들이 참여해서 그런지 왠지 학생의 느낌이 있어요. 부산 소녀상의 경우에는 굉장히 당당한 표정을 띠고 있고요. 화정 소녀상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각 지역의 소녀상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어요.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잖아요? 상주 평화의 소녀상 뒤에는 조그맣게 곶감이 조각되어 있어요. 깨알 같죠. 소녀상이 왜 이리 한결같냐고 비판하기 전에 다양한 모습의 소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소녀상은 문제 해결을 바라는 시민의 염원이다 Q. 처음에는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셔서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작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소녀상의 의미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슬펐어요. 이전에 다른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정도였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날 또 다른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했고요. 하루에 두 분이 돌아가신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날 느꼈던 감정이 이전과는 달랐어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확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전혀 안 보여요. 이제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을 준비해야 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을 향한 움직임이 우리 다음 세대에도 또 그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녀상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언젠가는 늙고, 우리 아래 세대도 지금의 우리 나이가 되고 또 할머니의 나이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현재 우리와 함께 있는 소녀상은 누군가 철거하고 부수지 않는 한 미래에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소녀상을 매개로 진실과 정의를 향한 의지가 계속 이어질 수 있어요. 물론 정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현재의 진실은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래의 진실은 우리가 이 문제를 여전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걸 소녀상이 알려주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소녀상을 과하게 신성시하거나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죠. 본질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니까요. Q. 관리 문제에 있어 소녀상을 현충 시설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현충 시설까지는 아니지만, 공공조형물 지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니까요. 하나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데에는 매우 많은 시민의 염원과 노력이 필요해요. 소녀상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염원이 있다는 거고, 지자체는 시민들의 염원을 이어받아 소녀상을 지속해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그러나 건립과 관리의 책임을 모두 지자체에 떠넘겨 버리면 소녀상이 무분별하게 난립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소녀상은 여러 시민이 함께 참여해서 민주적인 절차로 추진될 때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거잖아요. 시민 참여 없이 지자체 혼자 덩그러니 세워버리거나, 지역 정치인들의 훈장이 돼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는 거죠. 시민들의 염원이 반영되지 않은 소녀상은 결국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겠죠. 이런 문제들을 막기 위해 소녀상 건립은 반드시 시민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하고, 관리 감독은 지자체가 하되, 관리 운영을 잘 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별거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들 Q. 최근에는 소녀상을 만든 작가님들을 인터뷰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네. 전국의 소녀상 건립을 추진한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어요. 실제로 제작을 했던 작가님들을 만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에요. 현재는 실험하는 정도이지만, 조만간 본격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공공예술에 참여한 예술가는 쉽게 잊히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매우 큰 ‘위안부’ 피해자 추모비가 있는데요, 거기에 여성가족부 장관 이름은 크게 있지만, 작가 이름은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했지만,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알리고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어요. Q. 다른 방식으로 소녀상을 기록하는 일을 하시는 거네요. 소녀상을 그리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하실 계획이세요? 해야죠. 소녀상은 지금도 계속 건립되고 있으니까요. 점점 할 일이 늘어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출판사 쪽에서 4~50개 정도의 소녀상을 더 그려서 개정판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그리고 준비 중인 전시도 있고요. Q. 혹시 김세진 작가님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예술 작업을 하려고 하거나 혹은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저는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내일 어떤 커피를 마시면 좋을지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눈앞에 소녀상이 있었기에 소녀상을 그린 것뿐이에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냥 눈앞에 있는 간단한 것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대단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요. 저희같이 별거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거죠. 별거 아닌 사람들이 땅바닥에 뿌려져 있는 조각을 주워서 퍼즐을 맞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부터 시작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Credit 인터뷰 : 금혜지 글/편집 : 현승인 그림 : 김세진 일시 : 2020년 5월 23일 토요일 장소 : 서울시 은평구 불광역 청춘 스터디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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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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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약 2주간 소녀상을 관찰하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을까?' 에세이 기고 제안을 받았을 당시 해보고 싶은 마음과 무겁고 걱정되는 마음이 함께 올라왔다. 사랑, 감정, 경험, 관계, 일 등 다양한 소재로 에세이를 써왔지만 모두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 글이었다. 소녀상을 바라보며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렸고 가슴도 아팠지만 그건 나의 삶이 아니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소녀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시도해본다는 생각 속에 생계 활동의 일환을 이유로 작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나는 이 작업을 몇 번이고 포기할 뻔했다. 몇 년 전 동료와 함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일본대사관 맞은편 소녀상을 지키며 함께 싸웠다. 오랜 기간 연극을 해 온 나는 무작정 퍼포먼스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거리 공연을 했다. 많은 사람에게 상황을 알리고 싶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되어 울분에 차 소리치고 분노했다. 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아픔에 마주하며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시간은 흘러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소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십리광장의 평화의 소녀상 약 2주간의 기간을 두고 소녀상을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소녀상은 서울 왕십리역에 있는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이다. 왕십리역은 여러 호선이 겹치는 역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소녀를 스쳐 간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14~16세 때 모습을 재현해 만들었다.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 회복뿐 아니라 미래세대인 청소년이 아픈 과거를 잊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지역 내 초·중·고교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뜻을 함께한 학부모들이 모여 성동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건립 모금 바자회, 소녀상 배지 제작 등을 통해 두 달 만에 학생, 구민 등 1,000여 명으로부터 6,000만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금했고 그해 6월 10일 왕십리광장에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광장에는 네 개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인도 맞은편에는 뜯긴 듯한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왼 어깨 위에 새가 앉아있다.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있다. 오른편에는 비둘기를 한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소녀가 서 있다. 금방이라도 함께 날아오를 듯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와 비둘기를 들어 올린 소녀 사이에 측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소녀가 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길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뒷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동상은 소녀가 아닌 할머니의 모습이다. 광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김학순 할머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국내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왕십리광장에 있는 김학순 할머니 동상 옆에는 할머니의 사진과 글이 함께 세워져 있다. 잊어서 미안해요 성동구에 4년째 살고 있는 나는 왕십리광장을 수십 번도 넘게 지나쳤다. 소녀상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에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네 개의 평화의 소녀상이 한 곳에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 모두들 한 번쯤은 쳐다보고 지나치게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소녀상 지킴이를 하고 있는 청소년은 소녀에게 겨울엔 모자와 목도리를, 크리스마스엔 예쁜 머리띠를 해준다.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느 소녀같이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어여쁜 꽃 마스크를 쓰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첫날은 동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소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잊어서 미안해요.' 속으로 말을 건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곁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평생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제대로 된 사과와 치유를 받지 못한 채 살아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김학순 할머니 동상을 보면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작년 1월,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다. 과거의 상처는 끈질기게 일상을 가로막고 나를 절벽 아래로 끌어내렸다. 누구도 만날 수 없었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길 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시절 마음에 생겨버린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살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은 더 두려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하며 내면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아팠던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많이도 울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상처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사건들. 이제는 괜찮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납덩이 같은 감정들.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게 뭉쳐있을까. 소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아픈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소녀에게 투사되었다. '보고 싶지 않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어', '그냥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왜',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고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안은 채 거리를 두고 소녀를 찾아갔다.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기록했다. 동상에 꽃이 놓여있거나 동상의 발뒤꿈치가 들려있는 모습을 본 것 등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깊게 느껴지려고 하면 차단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녀상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선 사람들도 있었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늦은 밤 소녀를 찾았다. 그날따라 기운이 없어서 차가운 돌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동상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에서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소녀의 아픔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한 것이었다. 순간 울컥하고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구나. 함께 공감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길 바랐구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랐구나. 마음에 쌓인 울분을 참을 대로 참아 결국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구나.' 자신의 깊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목소리를 내는 행동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 나는 지금도 용기가 없다. 고작 여섯 살 정도였던 아이의 성기를 더러운 손으로 만지던 아빠의 지인, 어린아이가 울자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던 삼촌,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코피가 날 정도로 뺨을 때리던 남교사, 그 밖에 일일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차가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이지 않게 묻어두려 해도 한 번 깊이 파인 상처는 남아있는 것이었다. 덮을수록 곪아서 결국엔 터지고 마는. 상처를 다시 꺼내어 투쟁하는 삶이란 마치 매일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내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소녀는 친구였다 소녀상을 관찰하던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마치 관찰카메라 프로그램 피디가 된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한 행인이 멈춰 서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려간 소녀의 마스크를 다시 묶어주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관심 어린 손길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 한 장면은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걸어오다가 소녀상을 향해 나비처럼 날듯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아이는 밝게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안녕~”하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픔을 투사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외면하고 안쓰러워할 존재도 아니었다. 순수한 아이에게 소녀는 친구였다. 마음에 새겨진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존재를 기억하고 사랑하면 좋겠다. 누군가는 공감하며 아파하고 누군가는 묵묵하게 곁에 있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투쟁하고 누군가는 아이같이 반갑게 인사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동하면 좋겠다. 포기할 뻔했던 집필을 마치며 그 자리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소녀에게 고맙다. 소녀상 나는 본다. 그날의 기억을. 나는 본다. 상대의 두 눈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마음으로. 나는 본다.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뜨거운 눈물을 두 눈 가득 담고서 나는 본다. Credit 글/사진 : 어효은 편집 : 현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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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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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김목인 할머니의 산책 Q. <할머니의 산책>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요? 안녕하세요,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입니다. 어느 날 길을 잃어버린 할머니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할머니의 따님이 오실 때까지 잠시 할머니 곁에 있게 되었어요. 따님을 기다리는 동안 분위기가 어색해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봤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왠지 이 할머니로부터 곡 작업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시간을 뺏을까 걱정하시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묘하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상황과 겹쳐 보였어요. <할머니의 산책>은 그렇게 출발하게 된 노래입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싱어송라이터는 보통 자신의 이야기, 혹은 관심사 안에서 촉발된 이야기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해주세요>와 같이 특정 주제를 다루는 컴필레이션 앨범의 곡 작업을 할 때는 평소 하던 방식과 달라서 어려움이 있어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시작을 하긴 했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까 더 어려웠어요. 솔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느 지점에 서서 노래를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렇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더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예전 같았으면 뉴스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나왔을 때 그저 사회의 복잡한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라고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고 나면 주변에서 부담스러운 작업을 하는 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것처럼 많은 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잖아요. 저처럼 음악을 통해서 참여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작업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주거나 참여한 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거예요. 언젠가 공연을 통해 <할머니의 산책>을 들려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집에 오는 길 안개비가 내리던 날 우산도 없이 산책을 나온 할머니 이곳 주소가 어떻게 되오? 우리 딸이 데리러 온다는데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네 뉴스에는 93세로 떠난 한 많았던 인생이 남긴 긴 이야기들 하나의 아픔이 영원해지고 하나의 인생이 결국 지나가도록 열리지 않는 입들에 대해 가만히 서서 곰곰이 생각할 때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딸 "아니 바쁜데 이래도 되오?" "아니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주소가 없었던 이들을 생각하네 백정현, 김율희 무정세월 Q. 간단한 자기소개와 노래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소리꾼 김율희라고 합니다. 전통 창작 국악팀 ‘바라지’, 그리고 레게밴드 ‘소울소스 meets 김율희’에서 판소리 보컬로 활동하고 있어요. 백정현 : 백정현이라고 합니다. 작곡과 프로듀싱을 하고 건반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Beck&Fontenot 이라는 이름의 팀으로 활동하고 있고, 싱잉볼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6년간은 제주도에서 요가를 하며 지냈어요. 지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무정세월>은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연습실에서 즉흥으로 맞춰봤던 곡이에요. 서로 어떻게 해달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 합이 나왔죠. 김율희 : 노래 가사 중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 내 청춘이 아차 한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는 단가 <사철가>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제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만약 ‘내가 그때의 할머니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고 더듬고 아파하며 쓴 부분이에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율희 :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가진 상태이기는 했어요. 하지만 당사자의 슬픔에는 전부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감히 이렇게 접근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소리꾼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웃길 수도, 울릴 수도 있잖아요. ‘소리꾼 김율희’로서 이 주제를 어떻게 노래에 담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서 시작하기 전까지도 확신이 없었어요. 백정현 : 맞아요. 우리가 진짜 이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상태에서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있었죠.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 아예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Q. <이야기해주세요> 앨범에 참여하고 느낀 점을 말씀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이전보다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마음과 관심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판소리를 해오면서 전통 소리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작업한 일이 드물었죠. 이번 작업을 통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명확해진 것 같아요. 할머니들께서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더는 아프지 않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더 이상 그분들을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백정현 : 앨범 제목이 <이야기해주세요>인 것이 참 좋아요. 어렵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이 음악을 만든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할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치유해주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걸 같이 느껴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헤아려보는 기회들이 계속되면 좋겠어요.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면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전부 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회의 어딘가가 아픈 상태라면 모두가 힘을 합쳐 여길 어루만지고 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내 청춘이 아차 한 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 한받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Q. 독특한 곡 제목과 곡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저는 한받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립음악가입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서울 중구 만리동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제가 참여한 곡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봤어>는 제목과 스타일 모두 독특한 곡이죠. 예전에 실험적인 거리극을 다원 예술 퍼포먼스로 연출한 적이 있어요. 이 거리극에 <이야기해주세요> 기획팀 송은지 님이 출연진으로 함께 했거든요. 은지 님이 거리극에 사용한 배경음악을 모티브로 <이야기해주세요> 수록곡을 작업해보자고 제안하셔서 그 음악을 편곡한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음악에서 계속 반복되는 멜로디는 철거 예정인 지역의 지도에 있는 선들을 음계로 표현한 것이에요. 재개발로 철거민들이 쫓겨난 동네들을 선율로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이걸 듣고 송은지 님이 다시 멜로디 라인을 만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부르면서 새로운 곡이 되었죠. 노래에 가사가 없기 때문에, 제목에서 하나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목은 리우데자네이루에 갔던 꿈 속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어요. 휘황찬란한 풍경과 빈민들의 뒷골목이 공존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언덕에서 바다와 하늘을 바라봤던 꿈이요. 그 꿈 속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이들의 감정을 떠올렸어요. 상실을 음악에 담아낼 때 정말 우울하고 처절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풀어내고 싶었어요. 아이들의 멜로디와 스캣 선율처럼 가사 이외의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Q.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곡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음악가들보다는 간접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 원곡의 모티브인데,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수요시위에서 공연하기 위한 곡 작업이었다면 분명히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만들었을 거예요. 시위 현장에서는 연대의 퍼포먼스로 ‘야마가타 트윅스터’ 스타일의 음악을 했을 거예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나요? <이야기해주세요> 곡 작업을 하면서 제가 남자로서 누려왔던 일상적인 권위에 대해 반성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곡은 저의 기존 작업과는 다른, 이질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만든 곡입니다. 음악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는 점이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요. 베렛떼 뿌다부바 베렛빠바 데렛데 라라랄랄라 라랄랄랄라 랄랄라 음- 나난나나나 나난난나나 나나나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