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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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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오혜진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고 비평하는 데 무엇이 핵심이어야 할까요? 강간 장면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했는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았는가? ‘위안부’인 존재에 ‘빙의’해야만 진정성 있는 고통을 재현할 수 있는가? ‘위안부’ 역사와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는 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빙의’의 상상력은 ‘내가 만약 '위안부'였다면’, 즉 ‘나’를 역사의 피해자로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의 ‘역사’를 사유한다는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음’을 주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지배의 체제와 정서 구조에서 그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거죠. 그렇게 보면, ‘나도 피해자일 수 있었다’라는 가정에 머물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역사적 폭력의 연원인 ‘식민지 가부장제’라는 역사와 시스템을 사유해야겠죠. 그렇게 사유의 초점을 이동하면, ‘식민지 가부장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잔존하며, 현재의 나 역시 그 체제의 효과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공동주최한 전시 <이웃하지 않은 이웃─홀로코스트 ‘집시’ 희생자와 타자의 초상>(KF 갤러리, 2019. 1. 24~2019. 2. 28)의 소개말은 흥미로웠어요. 나치 시대에 억압당했던 ‘집시’들의 모습이 담긴 독일인 한스 벨첼의 사진을 전시한 것인데요. 한스 벨첼은 ‘집시’를 ‘매력적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결국 그 ‘집시’ 친구들을 홀로코스트로 보내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서문은 ‘우리도 언제든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었던 우리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역사적 성찰의 초점을 바꿔보기를 요청해요. 가해자에 이입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선량한 이웃’은 역사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사유하자는 것이죠. 권은선 그와 관련해서, 저는 미약하게나마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긴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귀향> 같은 경우에는 정말 ‘고통의 전이’의 관객성을 구축합니다, 즉 관객이 정민의 몸을 빌려서, 완전히 그 몸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고통의 현장으로 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정민이라는 몸이 동일시-몸이 됩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통의 재현과 대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주된 장치는 플래시백이죠. 그런데 최근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면 플래시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플래시백이 나오고,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전혀 없어요. <허스토리>는 주인공 시점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대신, 지금은 폐허가 된 위안소 터를 찾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장을 바라보는, 증인의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치시키는, 다큐멘터리 관습을 차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통과 트라우마를 둘러싼 재현에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변화된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귀향>이 나왔을 때, “이 이미지, 이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한없이 너의 무기력함을 받아들여라.”- 이런 비평적 태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러한 비평적 태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무력한 위치로 관객의 위치를 한정시켜야 하느냐는 것이죠. <눈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내포 청자’의 위치입니다. 내포 독자가 아니라요. 영화 서사 장치 안에 ‘헬조선’의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후속세대의 좋은 청자(good listener)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관객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줍니다. <귀향>이 피해자에게 ‘빙의-되기’를 통한 죄책감의 정치였다면, 잘 듣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청자-되기’는 책임감의 정치를 촉구합니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어떤 조바심이 보입니다.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등록된 피해생존자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응으로요, <22> 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있듯이요. 제가 아까 일본군 ‘위안부’들 간, 그리고 할머니와 후속 세대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을 이야기했는데요, 거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어요. 꼭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한 명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어가는 것,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망각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잃어버리면, 잊으면 안 돼”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재현에 있어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는데,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오혜진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유사 가족’의 형태를 빌어온 것, 그리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요. <허스토리>는 사실 장점이 될 만한 요소들을 많이 내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위안부' 운동을 떠올릴 때, 소녀상, 나눔의 집, 광화문과 같은 공간적 특성을 떠올린다는 거죠. 그런데 <허스토리>는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요. 그리고 ‘법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법적 책임 vs.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든지, 그런 배상과 책임을 둘러싼 (국제)법, 법리적인 것들이요. 오혜진 제가 아까 소개한 ‘감방 죄수의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는,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고 역사적 성찰을 방기하는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어요.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김숨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제가 깨달은 것은, ‘위안부’ 피해생존자가 ‘말하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 다시 한번 물신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소설은 마치 보고서처럼 300여 개의 각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들은 ‘위안부’가 당한 폭력을 서술하는 서술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돼요. 그 ‘폭력 묘사’의 내용은 <귀향>과 이전 ‘위안부’ 서사들이 즐겨 한 자극적인 묘사와 거의 같습니다. ‘강간’을 비롯한 폭력이 매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서술되는데요. 여기 달린 각주들은 ‘이건 서술자가 일부러 그 고통을 외설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한 말이니 ‘재현의 윤리’ 따위로 문제 삼지 말라’라는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거죠. ‘위안부’의 역사적 맥락을 사상시킨 채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한 것인데, 그 ‘증언’을 다시 한번 물화하는 것이 대중서사의 강력한 전략이 됐다는 건 문제적이죠. 김청강 초반에 진실성의 문제가 굉장히 큰 이슈였잖아요. 말하자면 일본에서 역사적 부인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는 사실로 증명을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 내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계속 사실이었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그게 단순히 증언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는 말 때문에 자료를 통해서 증빙해야 하고. 이런 강박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역사를 부인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약간 그런 제로섬 게임 안에서는 거기서 더 나갈 수가 없는 방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쪽에서 부인하면 '아니야,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까 그 이전의 재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1990년대 이전에 재현의 방식에서 성인 여성으로 주로 나타났다는 그런 측면이 현재는 사라진 건데, 그 의미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 부분이 삭제되느냐, 피해를 입었던 기간보다 한국에 돌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한국에서 숨죽이고 견뎌왔던 세월이 굉장히 많이 삭제되는 거거든요. 물론, 최근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시각들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소녀와 할머니로 재현되었을 때 그 사이에서 쭉 견뎌온 세월과 그사이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굉장히 많이 삭제되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1990년대 이후의 서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는데, 사실 이전의 맥락들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이게 단순히 일본의 폭력으로만 회수되지 않을 지점들을, 우리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부분들을 조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위안부'를 그동안 잊어왔는가. 이전의 디테일한 방식들에 대해서 조금 더 성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조금 듭니다. 허윤 '위안부'가 항상 늘 대중 소설의 장르 속에 등장하는 성애화된 성인 여성이었죠. 김성종 소설도 그렇고요. 저는 재현의 기점이 바뀌게 된 것은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승연 씨가 모바일 미디어 산업과 결합한 성인 화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화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분노했었죠. 이후에 성인 여성으로 재현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필름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사죄를 했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 혹은 어떻게 이런 작업을 생각할 수 있었는가를 더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도 제작자는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일본군이 주둔했던 팔라우까지 가서 화보를 찍은 것인데, 그런 화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던 데 대해서 한국 사회는 심문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혜진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다기보다는, 그 이전까지 ‘위안부’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던 방식의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일이죠. 식민지의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로서 간주되어온 전통. 다만 이승연 씨의 화보 사건은 그것을 ‘모바일 화보’라는 형식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맞은 거죠. 그 이전에도 이미 스포츠신문 연재소설 등에서 ‘성애화된 여성 섹슈얼리티’로서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된 방식으로 소비해온 구조와 역사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위안부’ 여성이 성애화되는 건 ‘위안부’를 ‘성인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그걸 피하고자 손쉽게 ‘어리고 순결한’(그럴 것이라고 상상되는) ‘소녀’ 형상을 택한 게 최근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귀향>이나 ‘소녀상’에 대한 성희롱에서 보듯 ‘소녀’ 역시 성애화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소녀’ 역시 섹슈얼리티의 주체니까요. 김청강 저는 소녀상이 사실은 굉장히 좋은 재현의 방식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어떤 커다란 동상을 세운 게 아니고, 굉장히 작고... 제가 영화에서 성인 여성들이 착취되는 어떤 그런 모습들을 쭉 보다가 소녀상을 봤을 때, 이게 당시에는 상당한 대항성을 가지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가서 만져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우산도 씌워 주고, 눈이 오면 모자도 씌워 줄 수 있는, 이런 만질 수 있고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재현했던 게 좋았는데, 지금은 사실은 소녀상이 굉장히 너무 과공급되면서 그 의미가 탈색됐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대항적인 부분이 사라졌을 때, 어떤 식의 대안을 가지고 재현을 할 것인가. 이제 소녀로만 얘기하기도, 성인 여성으로만 얘기하기도,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얘기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은선 돌이켜 보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 '위안부'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상상이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으로 계속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위안부' 재현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1995년에 등장합니다. 이런 이미지들과 담론들이 경합하는 와중에서, 이미지 생산을 둘러싼 미디어 자본이 결합하면서 나온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이승연 씨 화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잔여적인 이미지 형식이 <귀향>에서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죠. 김청강 <귀향>을 보고 저는 이게 왠지 성인 여성에서 소녀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성폭력 피해 여성과 겹쳐지는 공감의 부분을 넣긴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은선 ‘소녀상’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소녀상의 무한증식으로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를 과점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일차적으로 ‘훼손당한 민족’을 순수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이미지 재현이 소녀이기 때문이죠. <귀향>을 분석하면서 얻은 생각은, 이러한 순수한 민족적 피해자 소녀의 고통 재현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를 추상화하고 종교화하고 신성화하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즉 무력한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리고 그러한 감각을 강화하는 것은 이 <귀향>이 만들어진 크라우드 펀딩, 그리고 소녀상 만들기 모금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이미지(동상)를 만든다”라는 주인의식이 과도한 죄책감의 공동체, 공통감각-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일종의 ‘국민 프로듀스’ 감각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가 프로듀서”, 마치 버라이어티 쇼의 대국민 투표에 참여하듯이, 내가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이 역사적 성찰에 필요한 이미지에 대한 거리감이라든지, 유효한 정치적인 전략을 구성하는 데 저해가 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성찰과 비평적 담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청강 중요한 부분을 권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 같은데요. 국민 프로듀스가 된다는 그런 감각?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민의식 같은 거. 그러니까 굉장히 시민의식을 갖는 손쉬운 방법으로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여기에 적은 돈이지만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손쉬운 시민의식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허윤 지금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물이나 상품,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죠. 오혜진 100피트 운동부터 <귀향> 보기 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시민참여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걸 ‘자본주의에 침윤된 소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쟁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든 성애화되기 십상이니, ‘위안부’를 ‘소녀’, ‘성인여성’, ‘할머니’ 중 무엇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결국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역사화하면서 우리가 얻은 ‘성찰’을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재현의 윤리’에 대한 두 가지 경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지대한 고통은 ‘재현하지 않는 것’이 곧 윤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죠. 어떤 고통은 ‘재현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곧 ‘재현의 폭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쇼아[1]는 재현될 수 없다’라는, 재현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재현 서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성)폭력이 등장하는 재현물 자체를 금지와 말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까지 있죠. 하지만 ‘재현 없는 사유’가 가능할까요? 문제는 폭력을 ‘재현’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폭력을 재현하는가의 문제겠죠. 어떤 대상이 절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거나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물신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재현된 이미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불가변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거죠.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특정 시대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입니다. 특정 대상을 ‘재현 불가’의 영역에 두는 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에 가까워요. 오히려 재현된 결과물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죠. 이건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모든 재현은 용납돼야 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향은, 특정 대상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 등을 문제 삼는 것을 매우 전통적이고 엘리트적인 작품론에 속한다고 보는 의견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귀향>을 비평할 때, ‘재현의 윤리’를 문제 삼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수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정치에 개입하는, 작품 자체보다 ‘더 큰’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간과하는 고식적인 비평으로 간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도한 재현 전략을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영화를 둘러싼 수용의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지 않아요. 둘 다 필요하죠. ‘재현의 윤리’는 작품을 창작한 개인의 정치적・미학적 수준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재현이 대중적 공감을 얻고 선호되는 건 그 자체로 그 주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식과 이해의 문제고,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죠. 여기서 잠깐 영화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5)과 관련된 논쟁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이끌고 시체를 처리하는 또 다른 유대인 수용자들인 ‘존더코만도’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 일원 중 한 명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어두운 소각로에서 몰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찍은 사진 4장이 이 영화의 기반이 된 거죠. 저는 이 영화 초반부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정말 나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영화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주인공의 어깨 뒤에 위치합니다. 딱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거죠. 아주 한정된 시야로 현재 주인공이 있는 위치를 조망하기 때문에 관객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마치 광장에서 키 큰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 광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야 할 때의 답답함처럼요. 이런 촬영기법들이 저한테 일종의 임장감(臨場感)이랄까요, 내가 정말 그곳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리고 또 영화는 바로 그 한정된 시야를 통해, 떼 지어 기차에 오르는 유대인들이나, 벌거벗은 수용자들의 시체더미 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은 마치 포커스 아웃, 혹은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나와요. 이런 연출을 통해 관객은 아우슈비츠의 시스템 전모를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는 수용자들의 표정이나 정동 같은 것도 결코 포착할 수 없죠. 아우슈비츠라는 장소나 피해자들의 모습이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혹자는 이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매우 충실하다고 평했죠. 하지만, 피해자나 시체를 ‘희미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장되는 윤리? 그렇다면 그 블러 처리가 조금 덜 희미했다면 덜 윤리적인 재현이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영화에 재현의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교하게 기획된 촬영기법에 있다기보다는 그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바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주인공인 한 존더코만도 ‘사울’이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서, 가스실에서 죽은 한 소년을 제대로 ‘매장’하고 애도하기 위한 분투를 서사화하거든요. 심지어 그 소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재일지라도, 바로 그 분투를 함으로써만 겨우 스스로 감지하는 ‘존엄’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소년의 매장을 위해 분투하듯,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사유하려는 영화의 ‘기투’ 자체에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면, ‘위안부’의 역사를 비롯한 고통의 재현을 생각할 때 ‘재현의 윤리’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가 고착되는 상황은 염려스럽습니다. 권은선 공감합니다. 사실 ‘재현의 윤리’ 혹은 ‘재현의 도덕’이라는 논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고착되고 사유되고 있어서,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촬영 기법 같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화의 장치라는 것을 통해서만 그 어떤 이미지의 의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는 시각화 장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쇼아>부터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되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것을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재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방식이죠. 폭력의 재현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나쁘다면 그것이 폭력의 속성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향>의 재현을 옹호한 언설 중의 하나가 실제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그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재현의 윤리에 관해 어떤 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 나쁜 것은, 그것이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것이죠. <사울의 아들> 같은 경우에는 초점 심도를 낮추는 촬영 방식 등을 주도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질 수 없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에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감시자의 시선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귀항>에서 정말 문제적인 ‘지옥도’의 재현을 예를 들면, 그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극 부감의 시점으로 전체를 조망합니다. <귀향>에서 성폭력이 남성 중심적인 가해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시자, 전체주의자의 시선을 채택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이 탈각된 ‘스위트 홈’ 고향의 이미지가 놓여 있고요. <귀향>에서처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마치 지옥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종교적으로 만들고, 추상화하고 신성화하는, 그런 탈역사적 재현 장치를 문제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혜진 아까 그 존더코만도가 찍은 사진 4장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2004년에 쓴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역, 레베카, 2017)을 읽어봤어요. 그 사진들에는 화장 구덩이들과 숲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호송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몰래 찍은 것이기 때문에 초점도 맞지 않고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이가 있는 장소도 함께 찍혔죠. 예컨대 화장 구덩이와 그곳에서 일을 지시하는 나치들만 찍히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제 5소각로 가스실의 ‘어둠’이 시커멓게 찍혔습니다. 화장 구덩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던 공간의 열린 문을 통해 간신히 보이는 장면이죠. 이 사진들에 대해 가장 빈번하게 시도된 조작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아우슈비츠는 어떻게 생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이기 때문에, 사진 속 시커멓게 나온 ‘어둠’은 자르고 화장 구덩이들만 클로즈업하는 식이죠. 시커먼 부분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서 삭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디디-위베르만은 그 시커먼 부분 역시 아우슈비츠의 이미지임을 강조합니다. 그 까만 부분은 그 사진들이 어떤 상황을 ‘무릅쓰고’ 탄생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그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증언/재현이 가능한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히 <귀향>의 소위 그 ‘지옥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위안소’ 전체를 ‘조감’하는 시선은 어떤 자리에서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그건 권은선 선생님 말씀대로 감시자 혹은 신의 시점이죠. 결국 우리는 왜 증언/재현을 물신화할 뿐, 그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가. ‘위안부’의 고통을 존중한다면서, 왜 ‘위안부’의 고통을 재현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가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김청강 디디 위베르만 책에서 보니 여성 가슴도 조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위로 처진 가슴을 올리는 식으로요.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어떤 우리가 보고 싶은 이미지, 그러니까 초점을 두는 부분에 대한 조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금 굉장히 재현이 많이 있지만, 다 너무 초점이 그 목적에 맞게 그 재현들이 너무 클리어하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최근에 경향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극화된 것이 많다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숙고해서 재현했던 방식과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방식이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극영화로 만들었을 때 너무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초점이 너무 클리어해지는 거죠. 대중적 소통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고, 대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다음에 그러기 위해서 동원해야 하는 수단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이슈 자체를 너무 단순화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의도는 좋잖아요. 이 이슈를 알리고 사람들이 책임감과 모든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건 좋지만, 사실 대중적 재현을 따랐을 때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구도, 굉장히 클리어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쭉 스토리를 끌어나가야 하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서사 안에서 더 많이 재현된다는 건 사실 더 큰 우려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히려 정말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주 ^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라는 뜻.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영화 <쇼아>(1985)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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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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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허윤 <허스토리>가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 지점을 낳았죠. 다큐멘터리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 안에 포함하고, 살짝살짝 비틀면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다 소거하고,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2009)에서 여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송신도 님은 일본어로 노래 부르는데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실제 상황이라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영화적 연출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재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그런 이미지들을 가져와서 유통하는지 모르게 되고요. 김청강 지금은 다큐멘터리 푸티지나 사진, 이미지가 많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어떤 사실로서의 증명처럼 중간중간 넣어주는 방식.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극화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그래요. 요즘에 보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극화된 서사에 사실로서의 이미지를 던져주면서 이게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재현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는 좀 나쁜 의미에서 충격적이었어요. 김희애 씨를 띄우는 것 외에 이 영화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는……. 김청강 김희애가 사투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처럼. (웃음) 허윤 너무 못 쓰지 않아요? 부산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하던데. (웃음) 오혜진 그 영화에서 여성단체의 역할이 재현된 방식도 매우 제한적이었고요. '증언하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에는 '배정길(김해숙 분)'과 다른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비중이 너무 작았죠. 무엇보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한일 연대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재일조선인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외에는 일본 시민운동의 동향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한일 연대 법정투쟁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는 많은 것들이 삭제됐고,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서사에서 충분히 의미화되지는 않은 듯해요. 마지막 장면은 '위안부' 역사기념관의 전시물들을 비추며 끝나는데, 마치 '위안부' 문제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하는 완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김청강 그러니까 그거는 성찰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권은선 그런데 어떤 것은 흥미로워요. <아이 캔 스피크>랑 <허스토리> 같은 경우에 보면 타이틀이 공통점이 있잖아요. 소문자 i에서 대문자 I로 바뀌고.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로 바뀌고. 어떤 담론을 대중적인 문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자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는 부분이, 뻔하기는 한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안경 쓴 여자'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만 안경 쓴 여자가 등장하느냐.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변신하기 이전 단계에서만 안경을 쓰고 등장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여행사 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오죠. 분명 이런 부분은 여성주의적 재현을 의식했습니다. 오혜진 <허스토리>에서 '허(her)'는 누굴까요? 문정숙? 권은선 이 영화의 시선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재현 방식과는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김희애 씨가 옷 갈아입는 장면부터 기존의 재현 방식이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전혀 관음증적이지 않고요.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잡는 풀샷이 되게 많아요. 지금까지는 두 '위안부' 간의 관계가 주로 프레임 됐었다면, <허스토리>에서는 나름대로 집단으로서의 '위안부' 전체를 담아내는 쇼트를 자의식적으로 많이 넣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허스토리>가 단점들이 좀 있죠. 장르 영화로서 재미가 좀 없지요. 법정 드라마로 볼 때.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귀향>만큼, 혹은 <아이 캔 스피크>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은 이게, 한 명의 영웅 이야기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요. 오혜진 선생님이 아까 김희애 씨가 약간 너무 영웅 같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아서, 배제적 동일시 지점을 만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오혜진 저는 너무 심한 영웅주의라고 생각했어요. 헤아려보니 한 신 빼고 모든 신에 김희애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한 신이 뭐냐면, 법정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끝나고, 배정길이 아들과 대기실에서 화해하는 장면. 그때 문정숙이 '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 하며 자리를 마련해주죠. 권은선 그럼 영웅 맞네요. (웃음) 오혜진 게다가 법정에서 문정숙은 변호사, 통역사, 증언자, 목격자 등 모든 역할을 하며 원맨쇼를 구사하죠. <허스토리>는 명백하게 '위안부' 피해생존자보다 그들을 돕는 존재에게 재현의 초점이 이동한 사례라 흥미로운데, 이건 '위안부'의 증언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서사에서 '위안부'의 자리를 빼앗는 수준이었달까요? <아이 캔 스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권은선 그렇죠.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 씨가 맡은 주인공이 완전한 영웅이었죠. 문정숙 캐릭터는 사실은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죠. 허윤 이왕 재판을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 권은선 '나 돈 있어' 같은 식으로 너무나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묘사되는 게 재밌더라고요. 오혜진 실제로 GV에서 김희애 씨가 돈 뿌리는 기계로 지폐를 뿌리는 장면이 화제였어요. 허윤 팬덤이 붙은 거예요. 이 영화로. 근데 이 영화는 관객이 30만밖에 안 들었거든요. 오혜진 '문정숙'이 영화에서 모순적인 존재로 묘사되죠. 자기 여행사가 기생관광으로 돈을 벌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그걸로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을 보여주기도 하고, '위안소'에서 '엄마'라고 불리며 일종의 '중간관리인' 역할을 한 여성을 타자화하다가 곧 그녀 역시 피해자임을 깨닫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여주죠. 그런 반성의 제스쳐와 거대한 자본력으로 인해 문정숙은 '위안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가진 이로서 서사적으로 승인됩니다. 특히 문정숙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주체로서 여성파워의 상징이 된다는 게 흥미로워요. '위안부' 운동을 논할 때 가장 강고한 프레임은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론, 여성주의였는데,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로 내세우죠. 허윤 첫 장면에서 돈 얘기하면서 시작하잖아요. 문정숙(김희애)이 부산여성경제인 연합에서 이제 여자들이 나서서 회장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혜진 문정숙이 '부자'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재현돼요. '위안부' 시민운동에 있어서 '경제력'을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내세우는 건 어떤 '위안부' 서사도 하지 않은 거죠. 그런 점에서 참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최근 '위안부' 관련 학술대회가 휘황찬란한 규모로 열리는 걸 볼 때,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이 '위안부' 역사를 사유하는 데 점점 강력한 벡터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호화로운 학술대회 장소의 대형화면에는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는지를 호소하는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정작 학술대회는 대규모의 물량을 동원해 화려하기 그지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어서 '영어 논문'으로 작성해서 전 세계적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올 때, (그 중요성을 모를 바 아니지만) 조금 위화감을 느꼈어요. 제게 '위안부'의 역사는 탈식민의 문제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식민화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허윤 그 지점이 <허스토리>가 실패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분위기는 1980년대고 실제 배경은 1990년대고, 담론은 2000년대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재현하는 일본은 2000년대 일본인 거예요. 관부재판이나 송신도 님의 재판이 벌어졌던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다르기도 한데, 영화에서 일본은 굉장히 평면적이죠. 재판을 배척하고,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갖다 비추느라고 거기서 일본사람들이 계속 악마화하잖아요. 그래서 여관에서도 못 자게 하고, 식당에 테러하고 이런 식의 그런 장면들이 사실상 2000년대에 벌어진 일인 거죠. 제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제일 놀라웠던 부분이 1990년대 일본 사회 분위기였어요. 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일본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해 증언을 하잖아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중고등 학생들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질의응답을 하는 장면들이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던 거예요. 제가 담론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투쟁이 한일의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실제 사회에서 적용되는가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랬는데 그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이 피해생존자들이 계속 일본에서 재판이나 시위를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영화가 되면서 그 부분들을 완전히 다 소거시키고, 일본인 지원단체도 배경으로 처리하는 식으로 위치성을 다 제거하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을 뜯어내고 사진만 보여주는 방식이죠. <허스토리>가 트위터나 SNS에서 여성영화로서 굉장히 호평 일색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여성들의 임파워링을 도와주는 새로운 시대의 '위안부' 영화처럼 프레임이 됐었는데, 누구의 임파워링인가를 계속 되묻게 되더라고요. 김청강 영화에 재일 동포가 주로 도와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일본 사회에 있었던 움직임을 살짝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진짜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 거잖아요. '위안부' 문제가 처음 막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에 역사 왜곡 문제가 나오면서, 그 당시에는 정신대 문제로 나왔었고. 그런데 그랬을 때 그 충격이 사실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고, 일본 사회에도 굉장한 충격을 줬고, 일본 사회에서 지식층들이 분노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테츠오, 1979)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당시의 맥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일본을 단순화하는 그런 측면들도 굉장히 문제가 되는 것이죠. <허스토리>처럼 가지고 오면 그 맥락을 상실해버리는 거죠. 일본에서 있었던 맥락들이 오히려 우리 스토리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저는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일본 쪽에서 있었던 운동의 맥락과 그 운동이 지속해왔던 세월도 보여주고요. 허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실 여러 명의 피해생존자가 직접 일본에 가서 투쟁했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침묵>은 그 부분을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죠. 오혜진 허윤 선생님 말씀대로 <허스토리>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가 엉클어져 있고, 한국 사회는 '위안부'가 '증언의 주체'로 나설 만큼 변화했는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정체된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건 '위안부' 역사뿐 아니라 '위안부'의 역사를 재역사화해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허스토리>나 <귀향>은 결국 역사적 주제를 탈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룬 거죠. '위안부' 역사에 대한 재현이 시작된 게 1950년대, 김학순 님의 증언이 1991년, '위안부' 증언자들의 법정투쟁이 2000년. 즉 '위안부' 문제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프레임들을 이동하며 논의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고 있죠. 같은 '위안부'라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 조선인 부모나 다른 이들에 의한 인신매매 혹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고, '창기'의 신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다는 것. 중국에서 '위안부'를 경험한 이들도 있고, 오키나와 혹은 미얀마나 다른 '남양군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이들도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고 조선(북한/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 '위안부'의 역사가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논해지다가, 여성주의, 전시 성폭력 등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법정투쟁 등이 중요해진 과정 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딜레마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를 남성화된 민족 서사에서 구출해 가부장제 일반의 문제로 말할 때 식민지배의 문제가 사상될 수도 있다는 점,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표준화해 전 세계적으로 논의 가능한 '보편적 문제'로 만들고자 할 때, 그 '보편성'의 언어와 논리로 '위안부'의 문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경들. 그런데 이제 꽤 많은 '위안부' 재현물들이 축적됐는데도, 이 같은 '위안부' 역사와 운동에 대한 여러 초점과 전략의 역사적 변화들이 대중에게 충분히 학습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위안부' 이야기, 할머니들의 고통, 연대의 중요성' 같은 뭉툭하고 당위적인 주제들만 반복되기 때문이죠. 이 화소들로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구성하니, 일종의 '지체'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위안부'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쭉 살았던 사람, 즉 일본 시민들과 협동해 '일본어'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하는 '위안부' 모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영화도 <허스토리>처럼 설날 특집으로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까요? 김청강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허윤 TV 드라마 같은 데서 일본어가 많이 나오면 시청자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올 거예요. 김청강 충격을 받겠죠. 사실은 굉장히 그게 재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했던 부분들이 재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2000년대 도쿄 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때도 중국은 '위안부' 보낼 때 원래 직업이 매춘부였던 사람은 삭제하고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어떤 피해자 상만이 우리 사회에서 얘기될 수 있다는 것을, 삭제했던 역사의 과정들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재현에서도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허윤 오늘 굉장히 여러 가지 고민과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논의해볼 만한 좋은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선생님들께 추천을 받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 웹진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이,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보란 말이냐!"라는 질문을 하실 듯해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텍스트, 영화 소설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도씩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청강 근데 이게 사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선별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를 보여줘도 사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조금 너무 약한 거죠. 추천해주기에. 허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의 격차라는 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중 운동의 폭은 넓어졌는데 대중 담론은 여전히 여러 '결'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얘기하셔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혜진 저는 1999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는 『척하는 삶』(정영목 역, 알에이치코리아, 20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소설은 꼭 '위안부'를 재현한 소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위안부'를 비롯해 식민의 유산의 문제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서사화한 작품입니다. 자신을 일본계로 알고 있는 미국인 남성 엘리트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자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조선인의 후예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 지배자에게 동일시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것에 거리 두려는 욕망, 자신을 미국 주류 사회에 동일시할 수 있는 성공한 아시아 남성 엘리트로 정체화하려는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후기 식민국가'의 일원으로서 겪는 역사적 경험임을 인상적으로 설득해냅니다. 두껍지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청강 사실은 저는 극영화는 추천하고 싶은 게 없고요.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 아까 말씀드렸던. '위안부' 문제의 운동적인 측면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 같고. 사실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래도 훨씬 낫고, 그리고 저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낮은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한 20번도 더 봤을 거예요. 저는 1995년도에 캠퍼스 상영할 때 처음 봤었는데, 그 당시에 마지막 그 시퀀스가 너무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침묵 가운데 할머니의 그 배가 보이는 장면이, 저 개인적으로 너무 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만큼의 재현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낮은 목소리>를 추천합니다. 권은선 저는 앞으로의 '재현의 향방'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최근에 관심을 좀 가지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계속 말하는 주체를 강조했잖아요.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부터.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에게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영화 안에서의 동일시의 자리, 아까 얘기했던 좋은 청자의 자리, 누굴 향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의 자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잖아요. 등록된 생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이 최근 영화에 드러난다고 했을 때, 듣는 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통한 상속'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귀향>처럼 거리감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상속에 필요한 어떤 성찰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추천 작품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박은미 역, 밀알, 1997)를 너무 오래전 어렸을 때 읽은 텍스트라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흥미로운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다시 꼼꼼히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텍스트를 추천하자면 저 역시 <낮은 목소리>입니다. 마치 김학순 님의 증언 순간처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모멘트였습니다. 허윤 저도 『척하는 삶』과 짝으로 『종군위안부』를 읽으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 친구들이랑 그 소설을 읽었었는데, 조금 어렵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저는 송신도 님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도 종종 공동체 상영을 하는 작품인데요,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인 송신도 님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송신도 '할머니'가 양징자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김청강 어떻게 보면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창작물로서의 공급과잉이 너무 심한 것에 비해서 거기에 대한 비평 자체가 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이 더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나올 재현물도 조금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허윤 지금까지 긴 시간 다양하고, 흥미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중매체로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재현'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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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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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외쳤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3여년 간의 국내외 상황은 한일 정부 간의 양자 합의라는 틀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과연 얼마나 적절한 접근이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위안부’ 생존자가 등록된 한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 같은 중대한 인권문제에 피해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할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은 석연찮은 비밀협상으로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둘러 문제를 종결하는 데에 역점을 둔 합의를 해버렸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위안부’ 문제 해결의 협상에서 여성인권과 성폭력, 그리고 피해국 정부의 역할은 과연 어느 정도 고려되었을까? 한일합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스스로 생존자이며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존자들도 몇 분 되지 않는 2019년 봄,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합의의 역풍으로 인해 오히려 지금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참여자가 늘어나고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도 ‘위안부’ 문제에 더 공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우리들에게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책임의 인정과 같은 가해자의 반성을 통한 “해결”의 틀을 넘어 이 문제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와 한일관계라는 국가 및 국익 중심의 인식적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이라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해 왔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최대 피해국인 한국을 넘어, 일본이 전쟁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인도네시아 주재의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 빈번했던 민족분쟁에서 전쟁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성폭력을 범죄화하는 국제여성인권규범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20세기에 발생한 국가에 의한 여성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었고,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집단적 기억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인류의 공동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성격을 가지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논하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초국가적이고 글로벌한 성격을 검토한다. 1.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국가의 공통의 전쟁피해이다. 먼저 ‘위안부’ 문제의 피해상황을 보자. ‘위안부’ 문제는 한국(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광범위하고 공통된 전쟁피해이다. 위안소 분포지도에서 보듯 그간 연구에 의해 밝혀진 위안소만해도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수백개가 넘는다. 일본, 조선, 대만의 ‘위안부’는 주로 군의 관여하에 강제 모집되고 운영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여성들을 모집하거나 납치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거나, 현지여성을 납치나 폭력으로 제압하여 가두고 강간하였다. 이렇게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위안소의 ‘위안부’ 또는 전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해를 숨기고 살아오다가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그 일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아시아 미해결의 아시아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2.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여성인권규범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의 증언으로 가시화된 이후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곧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어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세계여성인권규범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0년에 한국여성들이 처음으로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정식 제기했을 때 일본 정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책임을 부인하였다. 그러자 지원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엔 인권기구에 문제제기를 하기로 하였다. 1992년에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일본 시민단체도 같은 해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그리고 5월에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당시 인권소위원회의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 특별보고관 테오도르 반 보벤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2월에는 국제인권기구의 전문가들이 동경에서 한국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당시 유엔에 한국 측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던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일본 관련 다른 어떠한 인권 문제들도 그만한 주목을 받은 예가 없었을 만큼 ‘위안부’ 문제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한다. 여성 폭력문제를 다루던 글로벌 여성인권 네트워크의 반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1993년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에 큰 분기점이었는데 ‘위안부’ 생존자들은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직접 증언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탈냉전 이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인권 문제에 기존의 인권 레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기 위해 개최된 만큼, 이 회의에서 세계여성단체들은 기존 인권 레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를 내걸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그해 12월에는 유엔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 선언(Declaration of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의 최종 결의사항에는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반영해 유엔 인권위원회(UNCHR)에 여성에 대한 폭력실태를 조사하는 특별보고관 제도(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를 신설할 것이 포함되었다. 1994년에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가 그 첫 번째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녀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여성폭력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최초의 유엔기구의 보고서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글로벌 인권 문제로 이슈화되었다. 1995년에는 베이징에서 제4차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열려 여성폭력 문제의 근절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었으며 ‘위안부’ 문제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졌다. 1990년대 초는 특히 보스니아 전쟁 및 르완다 내전과 같은 민족분쟁에서 집단 강간 및 강간소와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두 전쟁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를 재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은 전쟁을 위해 계획된 수단임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계획된 성폭력은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국제상설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1998년 로마조약에서 강간, 성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과 불임, 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정의하고 국제법사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1990년대는 여성인권과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국제규범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많은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1996년에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에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채택된 맥두걸 보고서, ILO 보고서, 인권고등판무관 연례보고서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로, 위안소는 강간소(rape center)로 개념화되었다. 특히 맥두걸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의 문제를 다루고 범죄 책임자 처벌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에 기반하여 지금까지 많은 국제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수많은 권고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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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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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3.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연대회의」를 비롯한 국제적 시민연대가 주체가 되어 해결을 요구해왔다. ‘위안부’ 문제의 피해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여성·시민단체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 국가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부상했을 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의 시민들이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한국 및 아시아 각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초기부터 가장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알 수 없던 1990년대 초부터 아시아 각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수많은 생존자 증언회 개최를 비롯하여, 특히 각국의 생존자들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시작하자 재판 지원을 위해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각국단체들과 생존자들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여성들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재일조선인 생존자를 지원하고 한일단체의 가교 역할도 하였다.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은 생존자에 대한 정보공유와 공동의 활동을 위해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공동행동을 취해 왔다. 1992년 서울에서 제1차 회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는 2000년의 도쿄여성법정의 개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책임 인정과 생존자 구제에 대한 요구가 계속적으로 묵살되자 시민들의 손으로 민중법정을 연 것이었다. 이 도쿄여성법정에는 1990년대 초 구 유고 및 르완다 내전을 재판한 국제전범법정에서 활약했던 국제법과 전시 성폭력 전문가 및 재판관들이 참여하여 3일간에 걸친 재판을 진행했다. 아시아 국가와 네덜란드 등 9개국에서 64명의 피해자가 원고로 참여하여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책임자들을 기소하였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이 겪은 다양한 피해 상황이 상세히 드러났고, 여성법정은 이러한 증언들을 사실로 인정하여 국제법에 따라 기소된 책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가해자 처벌만이 정의를 회복하는 수단은 아니지만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재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대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루면서 형성된 국제규범이었다. 사실 인정, 사죄,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도사업, 책임자 처벌과 같이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및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이 제시한 해결 조건은 그와 같은 인권규범의 축적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이후에도 일본 정부에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특히 2014년 5월 31일에서 6월3일까지 동경에서 열린 제12차 회의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후퇴를 막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생존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가는 와중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이 이미 일본 정부가 인정한 고노담화마저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는 데 대한 대처를 강구한 것이다. 연대회의 참석자들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사죄는 누가 어떻게 가해행위를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식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이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국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표명하고 그러한 사죄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수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과 책임인정 및 해결책을 요구하였다. 1) 사실과 책임을 인정. -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이 군 시설로 위안소를 입안, 설치하고 관리, 통제했다는 점 -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성노예’가 되었고, 위안소 등에서 강제적인 상황에 놓였었다는 점 -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식민지, 점령지, 일본 여성들의 피해는 각각 다른 양태이며, 그 피해가 막대했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 -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점 2) 위의 인정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 -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죄: 사죄의 증거로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 진상규명: 일본 정부의 보유자료를 전면공개하고 일본 국내외에서의 새로운 자료조사, 국내외의 피해자와 관계자의 증언조사를 실시할 것. - 재발방지 조치: 의무교육 과정의 교과서 기술을 포함한 학교교육, 사회교육, 추모사업 실시. 잘못된 역사인식에 근거한 공인의 발언금지 및 공인의 발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공식적으로 반박할 것 등.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가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했던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죄는 2015년 한일합의에서 ‘위안부’ 문제의 합의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역이용되고 말았다. 4. ‘위안부’ 문제는 국제기구의 권고 및 다국적 의회의 결의안을 통해 국제적인 승인을 확대하였다. 일본은 다양한 국제인권조약의 체약국이다. 예를 들면, 1985년에 여성차별철폐조약에 가입하여 체약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체약국의 의무인 조약이행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왔다. 여성차별철폐조약 이외에도 인종차별철폐조약, 자유권규약, 사회권규약, 고문금지조약, 아동권리조약, 장애인권리조약, 강제실종자조약을 비준했다. ‘위안부’ 문제가 대두한 이래, 여성단체들은 이들 인권조약위원회에 ‘위안부’ 문제를 개진했다. 조약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심사보고서에서 거의 모두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권고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 중에서도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및 한국의 단체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활동한 위원회로, 1994년 1월의 2,3차 통합심사 소견에서 가장 먼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국제인권조약위원회들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조치를 촉구하는 권고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 직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영구적인 해결을 선언한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국제인권기구들은 이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다만, 1990년대의 탈냉전기에 유엔 기구와 인권규범에 대해 기대했던 역할은 사실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기구는 특히 일본과 같은 선진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강제력과 규범적 정당성이 없어 아직도 일본 정부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인권기구의 지속적인 권고로 인해 2000년대 후반에는 캐나다, 미국 및 유럽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사회의 인식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5. ‘위안부’ 문제는 기림비 건립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자발적 지역운동으로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생존자가 돌아가심에 따라 “해결”에서 “기억”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현 일본 정부는 생존자에 대한 해결에는 소극적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활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소녀상 철거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국면이 오히려 시민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역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세를 교육하고 기억하는 일이 중대인권침해의 재발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기림비와 박물관은 기억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최초의 기림비인 평화비(일명 소녀상)는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제작되어 서울주재 일본대사관의 맞은 편에 설치되었다. 이 소녀상은 「수요집회」라는 상징적인 시민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의 제약성을 무한정으로 확대하였다. 평화비는 이를 보는 개인들 각자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어 지역주민들이 건립한 새로운 기림비가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 크기도 형태도 다양하여 그 지역이나 설립자에 따라 지역화된 기림비가 건립되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나비형태나 다양한 모습의 여성은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이 로컬화(지역화)된 형태이다. 처음 서울에 평화비가 건립되었을 때만 해도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특정 이미지로 고정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이나 “‘위안부’ 문제” 그 자체가 지역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시민들은 각자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그 의미를 재사유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주체, 기억하는 방식, 그 기억의 내용은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6.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미투시대에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확대하였다. 2017년 말부터 미투운동(MeToo·성폭력 고발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 한번 새롭게 사유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강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성폭력의 사회적 구조를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쟁 후에도 수십 년간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생존자들이 침묵시켰던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수많은 일상적 성폭력을 재생산하면서 아직도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미투에서 드러난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피해자 비난, 그리고 여성의 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젠더 권력 구조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지원해 온 이들이 ‘위안부’ 생존자들이야말로 최초의 미투운동가라고 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투의 상징적 존재인 이토 시오리(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녀 자신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힘들게 진행하면서도 전세계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기록하여 성폭력의 실태와 구제방안, 그리고 생존자들의 용기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삶과 투쟁은 이토와 같이 미투를 외친 21세기의 생존자들에게도 용기와 위안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이제 생존자들의 피해와 해결로 축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종결을 선언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여성인권의 세계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처음부터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그들을 지원한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세계화되었다. 이제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들을 수십 년간 지원해 온 시민들은 기억과 교육을 위해 또 다른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유네스코 인류기억 유산 제정을 위한 국제연대의 노력이나 한국에서 뒤늦게 발족한 정부지원의 연구소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세계 시민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창조적이고 로컬화된 기억과 교육활동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그러한 자발적인 지역활동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앞으로도 유지되고 계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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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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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남과 북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 만나는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가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여성가족부 지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최로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에서 열렸다.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에서는 북측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리경생(1917~2004)을 비롯하여 김대일(1916~2005), 곽금녀(1924~2007) 등 14명과 김복동(1926~2019), 황금주(1922~2013), 윤두리(1928~2009) 등 남측 피해자 10명의 사진과 증언이 전시되었다. 일본의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伊藤孝司)가 북측을, 다큐멘타리 감독 안해룡이 남측 피해 생존자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학순이 기자회견에서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증언한 이래 남과 북의 ‘위안부’ 피해자를 기록한 사진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북측 피해자 사진이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최초이다. 아래의 인터뷰는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와 관련하여 전시 전 안해룡 감독과 이토 타카시 작가가 이메일로 나눈 서면 인터뷰로, 이토 타카시 작가가 어떻게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있다. 안해룡 조선인의 강제동원이나 군인, 군속,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서는 어떻게 취재하기 시작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저는 처음에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처음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본인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다가 조선인도 피폭을 당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갔었지만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문제는 반드시 취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원폭피해자를 처음에 취재했고, 한국에 가서도 원폭피해자를 만났습니다. 이 취재 때문에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안해룡 그러면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후에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힘든 고통을 겪은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을 취재하고, 이후 이런 인연으로 강제동원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에도 자주 가게 되었지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1991년 10월에 처음으로 실명으로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실명으로 증언한 김학순 씨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91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안해룡 북한까지 방문해서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을 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군인 군속,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취재했고, 한국 이외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돌며 일본에 의한 전쟁 피해자들을 취재했습니다. 그런 곳도 취재를 해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계속해서 전부 다 취재했어요. 유일하게 가지 못했던 곳이 북한이었어요. 1991년에 신청을 해서 이듬해인 1992년에 강제연행 등을 조사하는 그룹이 북한에 간다고 해서, 거기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갔어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명 정도를 만났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밖에는 취재를 할 수가 없어서 저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취재를 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단독으로 간 것이 1998년이에요. 안해룡 두 번째 방북을 해서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평양과 원산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그리고 강제동원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군인 군속으로 전선에 끌려간 사람들, 종교탄압을 받은 불교도, 기독교들을 취재했어요. 안해룡 취재 때 가장 인상에 남은 사람이나 장소는 어딘가요? 이토 다카시 그때 가장 많이 만난 것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인데요. 그녀들도 해방 후에 일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몇 십 년 만에 만난 일본인인 저에 대해서 자신의 원한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을 심하게 추궁했는데요. 남성인 저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듣다 보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취재를 했지만 굉장히 괴로운 취재였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 관계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피해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던 북한 정부기관 관계들이 통역을 해주었는데요. 가끔 여성이 통역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할머니들의 비참한 경험을 듣고 저에게 통역을 해주면서도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저에게 전해졌어요. 통역자 본인의 감정도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피해자 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 여성들도 그것에 대해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안해룡 북한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한국의 피해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북한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 지역이 한국과 북한의 피해자들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북한의 피해자들은 만주나 중국 대륙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국의 피해자들은 대만이나 미얀마 등 남쪽으로 끌려간 경우가 많지요. 안해룡 북한에서 만났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가운데 인상이 남는 분이 계신가요? 이토 다카시 1998년에 만난 정옥순 할머니입니다. 처음에 만난 그녀는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어요. 굉장히 멋쟁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머리에 있는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어요. 일본군이 그녀의 몸 전체에 문신을 새겼어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들켜서 군인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 거예요. 가슴과 배, 그리고 입 안까지 아이가 낙서를 한 것 같은, 무얼 새겼는지 알 수 없는 문신이었어요.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혹독한 경험을 내게 남김 없이 털어놓았어요. 들으면서 말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일본인인 저를 향해서 자신의 원한을 풀듯이 이야기를 했고, 중간에 일어서서 저에게 다가왔어요. 저로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제 눈앞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의 고통이 정말 절실히 전해져왔습니다. 정말 괴로운 취재였어요. 그녀들이 얼마나 참혹한 경험을 했는지 정말 가슴속에 새겨졌다고 할까요? 그런 취재가 되었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피해를 당했지만, 이 가운데 할머니들이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아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매우 비인도적이고 잔인했다는 것이 그녀들이 받은 피해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몇 분을 만나셨나요? 이토 다카시 1992년에 처음으로 4분의 할머니들을 만났고 그 후 모두 14명의 할머니들을 만났어요. 안해룡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할머니들이 있나요? 이토 다카시 2017년에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만날 수 없을까 요청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났던 14명 중 13명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고, 나머지 한 분도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안해룡 여러 차례 한국과 북한에 가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해오셨는데, 오랜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이나 북한의 피해 할머니들이 처음에 저를 대할 때 굉장히 경계를 했어요. 이는 일본인 남자가 인터뷰를 하러 왔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물건을 던진 할머니도 있었고, 저에게 역으로 질문한 할머니도 있었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서,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인터뷰를 당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 몇 번이나 만나서 얘기를 하는 가운데 신뢰관계가 생겨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어요. 저도 그녀들과 진심으로 마주 대하고 인간끼리 정면으로 부딪쳐서 서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이 있지만 사람 사이에서 정말 마음을 서로 나눈 것 같았어요. 이분들이 잇달아 돌아가시고 있는 것이 괴롭습니다.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토 다카시 역시 그녀들, 할머니들이 당한 피해는 너무나 심각했어요. 예를 들어 전후 해방 후에 육체적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한 경우에도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경우도 있어서 계속 과거의 경험을 숨겨왔다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실제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국교가 단절되어서 국교정상화 회담을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북일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예요. 저는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저질러진 매우 중대한 일본의 범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이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이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는 한, 이 피해를 당한 사람, 가족,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계속 비판할 것이고, 이는 다음 세대까지 계승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일본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취재를 이렇게까지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토 다카시 일본 내에서도 저처럼 이렇게 일본의 과거의 가해를 계속 기록하는 것이 지극히 보기 드문 존재가 되었어요. 일본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의 피폭자와 처음 만난 뒤 계속 이 문제를 취재를 해왔는데요. 그 만남이 없었다면 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하나의 운명과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 내에서 저 혼자일지라도 일본의 가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확실하게 기록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어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도 있구요. 이렇게 취재한 것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서 한국이나 북한, 아시아에서 피해를 당한 나라의 사람들과 제가 취재한 내용이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번역 안해룡 행사개요 제목 사진전 <남과 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일시 2019년 3월 6일(수)~3월 11일(월) 장소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 아시아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