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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할머니의 내일 -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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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만들어진 <나눔의 집>은 1992년 개소 이래 ‘위안부’ 문제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총 스무 분.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는 여섯 분. 안타깝지만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지 않은 날을 준비해야만 한다. <나눔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나눔의 집>이 앞으로도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앞장서는 기관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눔의 집> 김대월 학예실장은 젊은 연구자임과 동시에 활동가다. 그를 만나 일을 통해 만났던 할머니들의 일상과 연구자 및 활동가로서 개인적인 목표, 그리고 <나눔의 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보았다. 고대사 전공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눔의 집에서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대월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전시 총괄, 할머니들 유품 보존관리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 기획 총괄을 맡고 있고요,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Q. 나눔의 집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전공은 고대사예요. 고대사를 주제로 석사까지 마치고 학원 쪽 일을 했었어요. 학원에서 7, 8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공부하려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었지, 깊이 알지는 못했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니 박사 논문 주제를 여성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정말 우연히 <나눔의 집> 채용공고를 본 거예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넣어봤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 하더라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이렇게 됐어요. Q. <나눔의 집>은 활동의 성격이 강한 곳이잖아요. 김대월 선생님 같은 연구자가 <나눔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저도 합격하고 되게 의아했어요. 이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들어와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나눔의 집>에 있으면 돈을 쓸 일이 없어요.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어요. 차가 없으면 출퇴근도 어렵죠. 그리고 <나눔의 집> 특성상 주말에 일해야 해요. 월급은 적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굳이 오려고 하지 않죠. 면접 봤을 때 제 역량에 관한 질문보다 주말에 일을 할 수 있는지, 출퇴근은 잘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방 하나 얻겠다고 했죠. (웃음) Q.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는데 비교적 쉽게 생각하셨네요? 저한텐 전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사는 것도 좋아하고 낚시도 좋아하고 그래서요. <할머니의 내일 展> ‘퇴근’ 후 할머니의 일상을 보여주다 Q. <나눔의 집>에 입사하신 지 1년 남짓 만에 학예실장이 되어 전시총괄을 맡게 되셨는데요, 일하실 때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전시와 진열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시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시지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펼쳐놓는 것은 진열에 불과하죠. 기존 <나눔의 집>은 진열 위주였어요. 그래서 여러 번 건의를 했더니, ‘그럼 네가 해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둘 맡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요. Q. 전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나요? 할머니를 피해자로만 보지 말자는 거예요. 인터넷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이름을 검색하면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나온 모습, 힘차게 팔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할머니에게 망언했던 사람들… 그런 이미지들만 나와요. ‘출근’하셨을 때의 모습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주로 ‘퇴근’했을 때의 모습을 보거든요. 제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과 언론에 나오는 모습이 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퇴근’했을 때의 할머니 모습도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보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봐달라는 거죠. 지금 전시하고 있는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이런 점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게 전시의 모토예요. Q. 할머니들의 활동을 ‘출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그렇게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수요집회를 나가시고, 인터뷰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인권활동가라는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출근’이라면, 그 밖의 모든 활동은 ‘퇴근’ 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세요. ‘출근’했을 때의 모습은 보통 할머니의 24시간 중에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근’했을 때의 모습만 보고 ‘퇴근’ 후의 모습은 보지 않죠. ‘퇴근’ 후의 할머니들의 일상은 다른 보통 할머니들과 똑같아요. 평소에는 저랑 고스톱도 치시고요, 과자 선물이 들어오면 서로 시샘도 하고 그래요. 어떤 할머니는 커스터드가 먹고 싶은데, 다른 할머니에게 드리면 화도 내시고 그러죠. 자기는 왜 안 주냐면서요. (웃음) ‘월’ 자 발음을 잘 못 하셔서 저를 “대열이~” 이렇게 부르시는데, 찾아가면 “아이스크림 좀 먹자” 그래요. 그럼 저는 “그래? 할머니, 그러면 한두 시쯤 나갈까?” 하고요. 저는 할머니들과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출근’하는 모습만 본 사람들이 <나눔의 집>에 방문하면, ‘할머니 어떻게 그런 고생을 버티셨어요’ 하면서 펑펑 울고 가세요. 그러면 할머니도 의아해하죠. ‘쟤는 왜 울지?’ Q. <할머니의 내일 展>에서는 주로 ‘퇴근’ 후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만 기억되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나의 이웃으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어요. 다행히도 서울에서 전시했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전시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기억해서 죄송해요’ 이런 말들이 쓰여 있더라고요. 블로그에도 전시 내용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올라왔어요. Q. 현재 독일에서도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를 하고 있어요. 코리아협의회라고 <나눔의 집>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의 시민단체가 있어요. 그 단체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국내 전시 내용과는 조금 달라요. 독일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방향으로 전시를 구성했죠. 나치와는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지를 보여주고, 할머니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그런 것들이요. 작은 전시장이라 사람이 별로 안 올 줄 알았는데 오프닝 때 100명 가까이 오셨어요. 전시장이 꽉 차서 밖에 줄을 설 정도였어요. 독일 사람들이 인권에 참 관심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없듯이 ‘내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를 통해 오늘을 보며 내일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의 내일>을 통해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할머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들은 항상 피해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이 노출되어왔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할머니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기억될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눈물을 보이며, 작은 일에도 토라지고 샘을 내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넘게 할머니들이 생활해 오신 <나눔의 집>에는 할머니의 喜怒哀樂(희로애락)과 수많은 추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나눔의 집>에서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할머니의 내일 展> 리플렛 내용 중 피해자로 박제될 수 없는 보통의 일상 Q.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평소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아침 식사하시고 직원들이랑 좀 노시고 프로그램도 하시고요. 외출 프로그램 있으신 할머니들은 외출하시고 병원 가실 할머니들은 병원 가시고 그래요. 점심시간 때 할머니 방에 가면 민원이 많으세요. 남대문시장에 가야 한다, 옷을 사야 한다, 그러면 체크해놨다가 스케줄 봐서 모시고 가요. 저는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꽃꽂이, 마늘 까기, 멸치 똥 따기, 이런 소소한 활동들이 할머니들의 활력을 더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이옥선 할머니는 김치도 직접 담그셨어요. 93세이신데요. 배추를 배차라고 하시는데, ‘배차를 소금에 절여라.’ 해서 소금에 절여드렸더니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고추가루 사다 드리고. ‘기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참기름, 들기름 사다 드리고. 할머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저는 그걸 기록하는 일을 해요. 할머니가 남대문시장에 가면 옷 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기록해서 서버에다가 ‘201X년 OO 할머니 남대문시장 나들이’ 폴더를 만들어서 저장하죠. 이런 일상의 모습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해놨다가 이번 <할머니의 내일 展> 전시에서 썼습니다. Q. 지적해주셨듯 할머니들은 증언 이후 줄곧 ‘출근’의 모습만 언론에 비춰짐으로써 그들 또한 보통의 사람이란 사실이 가려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리는 것을 내려놓으신 것 같기도 해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이옥선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면 그다음 날에 컨디션이 좋아지세요. 반면에 속리산 할머니[1](대구 이옥선, 이하 ‘속리산 할머니’)같은 경우에는 나가서 쇼핑하셔야 힘이 나는 분이시고요. Q. 일상에서의 말투나 화법이 언론에서 인터뷰할 때와 차이가 있을까요? 똑같은 할머니도 있고요. 다른 할머니도 있고요. 이옥선 할머니가 두 분이 계시잖아요. 부산 출신 이옥선 할머니는 언론이 오면 좀 정제된 말투나 언어를 쓰시는데, 속리산 할머니는 평소랑 똑같이 말씀하세요. Q. 최근에 한일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잖아요. 최근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알고 계세요. 뉴스를 보니까요. 평상시에 뉴스를 보면서 부산 이옥선 할머니는 아베 집안의 역사가 안 좋다고 말을 하세요. 12.28 합의를 한 박근혜 대통령도 안 좋아하시고요. 속리산 할머니는 일본은 안 될 나라라고 하세요. 전쟁이 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갖가지 못된 방법으로 죽였다면서요. 그래서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곧 망할 거다, 이런 식의 인식을 보이세요. Q. 최근에 소녀상을 테러한 한국 청년들이 <나눔의 집> 와서 반성도 하고 사죄도 하고 그랬는데,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그때 영상공개를 아주 일부분만 했거든요. 속리산 할머니가 너무 화를 내셔서요.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면 되지,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막상 그 사람들이 오니까 소리 지르시면서, “일본한테 돈 받고 하는 거냐, 돈도 안 받으면서 거기서 천왕 만세까지 외치냐. 이놈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팡이 집어 던지시고 엄청 화를 내시더라고요. 부산 이옥선 할머니도 화가 많이 나셨어요. Q. 사과하러 왔던 사람들이 반성하긴 했나요? 네. 울기도 하고 자기도 할머니랑 자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펑펑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중에 한 명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시래요. 그러니까 더 속상해하시면서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이라며 싹싹 빌었죠. 사과하러 오기 전에 확인 차원에서 제가 그 사람들을 따로 만났어요. 할머니들한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 사람들도 사회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 인식이라든지 좀 달라요. 어느 사회에서도 자기들을 받아주지 않는 거죠. 친구도 많지 않고요. 그런데 극우 집회에 가면 자기들을 대우해 준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가 투사가 되는 것 같고. 그곳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인정받기 위해서 더 극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본인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의 2차 피해를 기록하고 싶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머니들이 한국 사회로부터 당한 2차 피해를 기록해보고 싶어요. 증언집에는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이 적어요. 아무래도 증언의 내용이 당시의 피해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아쉬운 부분이죠. 한국 사회 내에서 할머니들에게 가해진 2차 피해도 심각했는데 말이에요. 속리산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살아 돌아왔더래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왜 너만 살아서 돌아왔나, 내 딸은 어디 갔냐’ 물어보면서 매일 괴롭히더래요.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인데 6개월 만에 고향을 떠나셨어요.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요. 걸어서 속리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나눔의 집>에 오셨어요. 할머니가 어렸을 적 국악을 배우신 적이 있었는데, 속리산에 관광객이 오면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대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버니까, 그때 스님이 그랬대요.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저렇게 돈을 버냐’면서요. 저는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논문 쓰려고 하는 주제도 한국 사회의 2차 가해예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잖아요. 1946년까지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해요. 그런데 1990년에 윤정옥 교수님이 한겨레 신문에 ‘위안부’에 관한 글[2]을 쓰기 전까지 약 45년 동안 일본군‘위안부’를 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없었어요. 그럼 약 45년 동안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몰랐냐는 거죠. ‘위안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말했던 그 스님도 ‘위안부’를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모른 척을 했다는 거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에 증언을 하고 난 후에서야 갑자기 몰랐던 사실을 알았던 냥 되게 들끓었잖아요. 알고 있었으면서 침묵했다는 것도 2차 가해라고 생각해요. 1991년 이후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할머니들이 젊으셨을 때니까 심리치료 등을 통해 피해자들을 신경 쓰고 살폈어야 했는데, 정부는 계속 돈 문제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에서의 외교적 카드로만 이용하고요. 이렇게 할머니들은 개인이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만 대상화된 거죠. 이외에도 수많은 2차 가해가 있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 사회의 내부 비판이 되어버려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Q. <할머니의 내일 展>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획된 거군요. 네, 맞아요. 학교 폭력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등을 피해자로서만 대상화해서 바라보면 안 되잖아요. 이런 인식들이 할머니들의 문제로 인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피해자들도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Q.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좀 더 성숙해지시길 바라시는 거군요. 뭐랄까. 한국에서 피해자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통해 성숙한 인권 의식을 바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거죠. 만약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이 충분히 성숙했다면, 애초에 <나눔의 집>은 필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 모여 살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계셨겠죠. Q. 언젠가는 <나눔의 집>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을 때가 찾아올 텐데요. 앞으로 <나눔의 집>은 어떤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로 <나눔의 퓨집>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셔도 계속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눔의 집>은 단순 요양 시설이 아니니까요. 현재 할머니들이 생활하시고 있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에요. 할머니들 사진, 소품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게 제 주장이에요. 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이 공동생활하는 사례도 유례가 없을 뿐더러 그분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없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각주 ^ 편집자 주 : 나눔의 집에서는 두 분의 이옥선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부산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와 비교적 언론 노출이 적은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다. 대구 출신의 이옥선 할머니는 본인을 속리산 할머니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본 인터뷰에서는 할머니의 희망에 따라 속리산 할머니로 표기했다. ^ 한겨례신문 1990년 1월 4일자.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10400289113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1-04&officeId=00028&pageNo=13&printNo=507&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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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왜 구술 증언록은 소설로 다시 쓰여야 했는가 - 김숨의 『한 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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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보학보』(2019)에 실린 『목격-증언하는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과 2019년 예테보리 국제도서전 프로그램 북에 실린 “When Literature Inquires the Gender of Labor”의 일부를 요약하고, 지난 8월 22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콜로키엄(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 김숨의 소설을 중심으로)에서의 논의 내용을 참조하여 수정한 글이다. 유익한 질문을 해주신 토론자 권김현영 선생님과 콜로키엄에 참여했던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재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15년 한일 ‘불가역적’ 합의 이후 지난 몇 년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은 크게 증가했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인 『한 명』(현대문학, 2016)과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함께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도 그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출간물이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화적 재현물의 관심은 대체로 전시 성폭력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집중하며 본격화되었다. 사건이 삶에 드리운 영향은 대체로 지워진 채로 다루어졌고, 일본군‘위안부’는 소녀나 할머니로 등장하거나[1] 분절된 시간을 단절적으로 사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단 한 명의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남은 상황을 가정하는 소설 『한 명』과 중국의 위안소 풍경을 당대의 시간 속에서 다룬 소설 『흐르는 편지』에서도 일본군‘위안부’는 분절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로 등장한다. 끌려간 소녀들 열에 아홉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그녀들은 식모살이를 하거나 병들거나 망가진 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운동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거나 조력자로 시선을 돌리는 식 혹은 담론 자체를 논평하는 식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비하면 김숨의 소설은 소재적 차원에서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에 여전히 집중하는 편이다. 김숨 소설의 성취와 한계는 소설의 재현이 보여주는 표면적 특질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위안부’의 표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는 문화적 재현물의 차원에서 정당하지만, 문학적 재현물이라는 차원에서 좀 더 섬세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문화적 재현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 갈라지는 지점, 즉 김숨의 ‘위안부’ 서사가 갖는 문학적 의의를 검토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부족한 논의를 보충하고자 한다. 재현의 원리와 재현된 표상을 구분하면서, 소녀와 할머니로 다루어진 표상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왜 김숨 소설이 소녀와 할머니를 등장시키는지, 그 효과가 무엇인지를 문학적 논의 지평 위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향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학적 성취의 진전을 위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지점이다. 재현물은 언제나 시대가 허용하는 재현의 한계 안에서만 구현된다. 문학적 재현물은 시대적 한계 인식의 리트머스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재현물의 성취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자 했느냐는 질문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누락되기 쉽지만, 최근의 문화적 재현물은 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론적 차원의 관심을 공유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로 압축되는 방법론에 대한 공통의 관심은 시대의 인식적 한계의 최저선을 보여주려는 시도로써 다루어져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현재화하려는 방법론적 시도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한 명』을 중심으로 보자면 김숨 소설의 의미는 ‘위안부’의 문학적 재현을 재개했다는 사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롭게 열린 한국문학의 논의 지평과 만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재화하려는 김숨의 방법론적 고민은 트라우마적 폭력과 고통의 재현의 불/가능성론에 회피 없이 대결하는 방식으로 깊어지고 있다.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소설로 쓴 구술 증언록 개별 희생자로서의 ‘위안부’뿐 아니라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김숨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에서 시작된 일본군‘위안부’의 증언(“내가 피해자요”)을 각주 형식으로 소설 안의 말로 옮기고 그 말을 이어받은 수많은 다른 증언들(“나도 피해자요”)을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해낸다. 김숨은 트라우마적 사건의 현재적 지속성, 그 분절 없는 고통의 감각에 좀 더 충실하면서, 민족과 젠더 그리고 인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얽혀 있는 ‘위안부’ 서사를 통해 시민-작가로서의 윤리를 실천한다. 김숨의 ‘위안부’ 서사는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재현 방식을 피하면서도 갖가지 폭력이 새겨진 신체를 통해 제국과 전쟁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위안부’의 몸, 폭력과 억압이 새겨진 소녀의 몸,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허기와 고통, 헤어날 수 없는 죽은 이들에 대한 꿈과 살아 돌아온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전한다. “만주 위안소 이름을 모르지만, 자기 피와 아편을 먹고 죽은 기숙 언니의 이빨이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것을, “삿쿠에 엉겨 있던 분비물에서 나던 시큼하고 비릿하던 냄새”와 “검은깨를 뿌린 듯 주먹밥에 촘촘 박혀 있던 바구미의 개수까지”(『한 명』, 151쪽), 고통의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 『한 명』이 ‘증언에 나서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자를 내세운 ‘위안부’ 서사라는 사실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증언록의 말들은 소설 내에서 증언이 이루어지기 이전 기억의 형식으로 불려 온다. 작가는 공적인 발화가 이루어지기 전, 증언 이전의 침묵을 들여다보고 그 침묵이 말을 찾지 못한 ‘증언 이전의 증언’임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리하여 피해 생존자를 만나러 나선 (그녀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라는 것을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자 “살아 있”는 사람(『한 명』, 143쪽)인 ‘다른’ 생존자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증언이 될 터인데)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소설 전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술 증언록을 이루게 된다. 증언의 기록은 구술된 목소리를 문자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증언자의 목소리가 기록자의 문자로 변환되는 바로 그 과정은 증언의 기록에 기록자의 관점과 입장이 새겨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미 일본군‘위안부’의 증언 채록 과정은 증언자의 사투리가 표준어 문자로 기록되거나 입말이 문어체로 기록되는 변형 혹은 정반대로 ‘~했다’ 체의 기록이 점차 입말을 살리는 쪽으로 바뀌었다[2]. 이러한 변화는 단지 표현의 변화만이 아니라, 증언자의 ‘교차적이고 중층적인’ 역사성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채록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3] 『한 명』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재현적 시도를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의 의미, 즉 발화 주체의 위치 설정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따지자면 그 고민은『한 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한 명』을 출간하던 시기에 발표된 단편소설 「녹음기와 두 여자」(2016)에서 소설 내 채록자로 등장하는 조윤주가 ‘위안부’의 증언과 채록에 대해 갖게 되는 태도에서 방법론을 둘러싼 좀 더 직접적 고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을 하는 그녀의 기억만큼이나, 증언을 받아 기록하는 내 기억도 중요하다. 나는 녹음기로 녹음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옷차림을, 안색을,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눈동자의 흔들림을, 시선에 담긴 감정을, 몸짓 하나하나를. 손으로 아무리 밀어도 꿈쩍 않는 바위덩어리 같은 침묵을. 기억해두었다가 녹취를 글로 풀 때 함께 풀어 넣어야 한다. 괄호 속 설명으로든, 말줄임표로든, 느낌표로든, 행간으로든, 각주로든. (「녹음기와 두 여자」, 69쪽.) 그녀는 어쩌면 매순간 증언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 어떤 기척으로, 침묵으로……. 탄식, 비명, 흐느낌, 발광, 침묵도 증언의 한 방식이므로. (「녹음기와 두 여자」, 75쪽.) 글자를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억과 어떻게 다른가. 자기 자신을 잊고 과거의 경험을 모두 지운 사람의 기억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가. 녹음기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 목소리 사이를 채웠던 몸짓, 표정, 침묵은 과연 복원될 수 있는가. 증언과 채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녹음기와 두 여자」는 이러한 질문과 성찰 속에서 증언자와 채록자의 자리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없으며 모두가 증언자-채록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증언자를 인터뷰하면서 증언자가 되어간다.”(「녹음기와 두 여자」, 72쪽) 그러나 증언과 구술이 갖는 특성에 대한 이러한 환기는 해석자에 의한 증언의 변형과 왜곡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아니다. 어떤 증언에도 그것으로 다 소진되지 않는 증언자의 삶이 남는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다섯 번에 이르는 방문마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한 정 할머니가 유일하게 했던 “다 잊었다”(76쪽)는 말은 채록자에게 “다 기억하고 있다”(76쪽)는 말로 들린다. 다 잊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며, 사실 “기억하는 것이 망각하는 것”이고 “역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수치스러운 기억, 소름 끼치는 기억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 할머니는 “그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76쪽)고 조심스럽게 확신한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다. 다변이었던 문 할머니의 부음을 알리는 아들의 전화로 채록자에게 증언의 의미는 다시 되새겨진다. 함경도 출신 혈혈단신으로 알고 있던 문 할머니로부터 의붓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없으나, 아들은 할머니가 자신의 얘기를 채록자에게 여러 번 했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채록자를 기다렸다는 아들의 말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못했던 채록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잇고 이어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육하원칙과 기승전결에 집착”했던 당시의 자신에게 문 할머니의 기억은 논리적이지 못한 데다 일관성이 없는 말들로 들렸고, 결국 할머니의 녹취된 구술은 증언록에 실리지 못했다. 매번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던, “아무에게도, 친정어머니에게도 못했다면서 들려주었던” 반복된 이야기들은 끝내 녹음기에 저장된 채로 미완의 증언 원고로 남겨졌을 뿐이다. 텅 빈 도로에 서늘한 정적이 감돈다.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얘기해줄게, 내가 다……. 이중창을 부르듯 문 할머니의 목소리에 정 할머니의 목소리가 겹쳐 도로 위를 떠돈다. (「녹음기와 두 여자」, 98쪽, 강조: 김숨) 다섯 번의 만남 동안 침묵으로 증언을 완강히 거부한 할머니와 “내가 다 얘기해줄게” “하나도 안 잊었어”(94쪽)[4].라는 말을 증언 사이에 추임새처럼 넣으며 매번 기억을 각색한 할머니, 채록자가 맡았던 두 구술자 사이에서 침묵과 증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녹음기 앞에서의 침묵은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서의 침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기억들을 말로 하지 않는 사이에, 무엇을 말하지 않기 위해 다른 무엇을 말하는 사이에, 말들 사이에 남겨진 공백으로서의 침묵은, 어쩌면 구술이 “침묵을 덮는 과정”에 다름 아닐 수 있음을 환기한다.[5] 증언이 침묵과 말들 사이에 놓인 어떤 것이자 침묵들과 목소리들을 겹쳐 듣는 채록자의 자리에서나 사후적이고 구성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라면, 녹음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할머니의 일관된 침묵은 증언인가 아닌가. 채록자의 녹음기에만 남겨져 있으며 증언 원고로 완성되지 못한 할머니의 말들은 또 구술 증언인가 아닌가. 발화 주체의 위치설정을 둘러싼 성찰이기도 한 이러한 인식은 결국 증언자나 증언의 말을 대상화할 수 없으며, 채록이란 ‘이미 언제나’ 구술 혹은 침묵에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의 수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자리가 바로 증언의 영역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지적처럼[6], 「녹음기와 두 여자」를 통해 김숨은 채록자 혹은 작가의 자리가 대상화도, 대신 말하는 방식도 아닌 채로, 죽은 자들과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어주는 방식 속에서 확보된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이 목격-증인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 바로 기억되지 않는 기억의 귀환을 시작하고자 하는 김숨 소설의 출발지이다. 침묵을 증언하고 기억을 복수화하는, 귀환의 서사 물론 그 증언이 현재의 삶을 잠식한 과거 경험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포착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완강하게 증언을 거부한 정 할머니를 두고 짚었던 작가의 말처럼, “그녀가 위안부 시절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시절 일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기억의 주체는, 그녀가 아니라 위안부 시절 경험들”(「녹음기와 두 여자」, 77쪽)이다. 그리하여 김숨 소설은 ‘대신 말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침묵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침묵으로 남겨진 참혹한 경험에 소설의 공간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명』은 여성으로서 겪은 전쟁의 기록, 전쟁을 겪으면서 폭행이나 질병으로 죽은 이들, 전쟁이 끝나자 버려지거나 학살당한 이들, 수효를 확인할 수 없으며 생사를 확인할 수 없고 그리하여 망각도 애도도 할 수 없는 이들과 그 삶을 서사 안쪽으로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 한마디를 평생 기다렸다는 이가 그녀는 아무래도 군자 같다. 침묵하던 그이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벗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미주 6)면서. 맨몸뚱이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이는 블라우스 안에 입은 속옷마저 훌렁 벗더니 배 한복판에 녹슨 지퍼처럼 박힌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애기만 긁어냈으면 내가 애기 낳고 살잖아. 그런데 애기보까지 싹 들어냈지 뭐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기 낳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잖아. 절에 가 공양도 하고, 삼신령께 빌기도 하고 그랬잖아, 굿도 하고.”(미주 7) 그곳에서 열여섯 살이던 군자가 애를 가져 배가 불러오자 그들은 말했다. 저년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더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라.(미주 8) 미주 6) 김영숙(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이토 다카시, 뉴스타파 『목격자들』 제공 미주 7) 김복동(1927년생),『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미주 8) 리경생(1927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북녘 할머니의 증언> 『한 명』 14~5쪽, 259쪽) -『한 명』의 미주 중 ‘위안부’의 증언을 인용하는 방식은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영화 <귀향>(조정래, 201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영화 <귀향>과는 달리 소설 내에서 미주의 형식으로 출처를 표시할 뿐 아니라 글자 모양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증언의 말에 새겨져 있는 본래의 자리를 지우지 않는다. 증언들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지만 이어붙인 자리를 표식처럼 남겨둔다. 소설 내부에 인용 흔적을 남겨놓는 증언의 재구성 방식은 소설 내부에 구술 증언의 목소리‘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플래시백 기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인과관계로 연결 지어버리는 방식이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영혼의 애도로 해소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불운으로 다룰 위험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상 재현물과 언어 재현물의 차별적 지점은 뚜렷해진다고 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로 발화됨으로써 증언의 복수성이 지워지는 <귀향>의 방식과 달리, 『한 명』에서 목소리‘들’은 한 인물의 전쟁 기억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반대로 각기 다른 기억이 미주를 통해 화합될 수 없는 불규칙적 단층을 이뤄 복수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허윤의 지적처럼 “300여 개의 각주는 잔인한 성폭력과 끔찍한 트라우마를 묘사하면서 이것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팩트’로 사용”된다[7]. 이 섹슈얼리티 재현의 폭력성을 전면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기억의 복수화의 효과로 『한 명』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인해 과거로 이끌려 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기록으로만 남은 존재들, 기록에도 남지 못한 존재들, 어딘가로 사라진 존재들[8]을 복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와 복원될 수 없는 폭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생존자를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를 복원한다는 오해를 가로지르며 국가폭력이자 젠더 폭력의 피해를 폭로하고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귀환 자리를 마련해주는 매개자를 통해, 그녀들의 삶의 비극성과 귀환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재적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9] 그렇게 김숨의 소설로 완성된 증언록은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지금 이곳에 ‘위안부’의 자리를 마련하는 귀환의 서사가 된다. 2019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제2차 콜로키움 포스터 2019년 8월 22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해당 주제로 콜로키엄이 열렸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제 2차 콜로키움 [목격-증언의 자리와 공진하는 '위안부'의 몸] 후기 각주 ^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허윤의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성성의 곤경-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여성과역사』, 2018)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고혜정·서은경·신영숙·여순주·조최혜란, ^ 양현아, ^ 김숨, ^ 정지영, ^ 冨山一郞(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94~96쪽 ^ 허윤, ^ 정진성, ^ 권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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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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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일본에는 ‘미투’가 없다? 작년 미투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일본학을 배우는 학생들한테 몇 번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왜 미투 운동이 안 나와요? 언론에 잘 나오지 않는데요?” 이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에서 미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와 사회적 공감이라는 점에서 한국과의 온도 차는 부정할 수 없었다. 왜 그들은 비가시화되는가. 그 배경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가.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는 2015년 당시 TBS 방송국 워싱턴 지국장이던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를 준강간 용의로 고발하였고 2016년 불기소처분을 내린 검찰에 이의신청을 했다. 2017년 5월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야마구치에 의한 강간 피해를 세상에 알렸고, 그 후 책을 간행하여 성폭력 피해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의 2차 가해와 사법제도의 문제점 등을 고발했다. 이토의 고발은 일본 미투 운동의 선구적 사례로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졌지만, 한편에서는 세련된 외모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전형적인 ‘피해자성’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일본 사회에서 비난과 협박의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영국에서 살기 시작한 이토는 BBC의 특집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등 해외에서 인지도를 높였고,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에 대처하는 선진국의 법 제도나 지원체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이토가 야마구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야마구치가 반소(反訴)하는 등 그의 투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토의 뒤를 이어 모델 카오리(KaoRi)가 사진가 아라키 노부요시(荒木経惟)의 ‘사적인 사진(私写真)’이라는 작업이 모델 여성에 대한 성 착취를 통해 이뤄져 왔음을 고발했다. 어느 여성 기자는 재무성 사무관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의 저열한 성희롱을 밝혀 그의 사임을 이끌었다. 인권 저널리스트 히로카와 류이치(広河隆一)의 권력을 남용한 상습적 성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8명이 넘는 제자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2018년 8월에는 도쿄 의과대학이 “결혼, 출산 등으로 장시간 근무가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로서의 가동력이 저하된다”라는 이유로 여학생들의 입시 합격률을 조작해왔던 사실이 밝혀졌다.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여성차별에 경악하고 분노한 여성들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매스미디어와 의료 관계자들의 냉담한 반응은 오히려 이것이 빙산에 일각이라는 현실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일본에서 미투 고발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그 차별과 폭력의 강도가 약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지지와 공감이 확산되지 못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현실을 단지 일본 미투운동의 실패나 불가능으로 보기 전에, 탈냉전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맥락과 그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일본의 미투 운동을 둘러싼 상대적으로 냉담한 반응은 포스트 냉전기 페미니즘을 비롯한 인권운동의 제도화와 그들의 인정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백래시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부정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젠더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의 결합 일본 페미니즘 운동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1970년대 우먼리브 운동의 시작, 1980년대 여성학의 창설, 1990년대 젠더 연구의 성립 등으로 특징된다. 제도적으로는 1985년 여성차별철폐조약 비준을 계기로 국적법 개정(1984)과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하 균등법) 제정(1985)이 실현되었고, 1990년대는 베이징세계여성회의(1995)에서 제시된 행동강령이 남녀공동참획사회기본법 제정(1999)으로 결실을 보았다. 물론 이와 같은 정리는 너무나 일면적이다. 페미니스트들이 1985년을 ‘여성빈곤 원년’ 혹은 ‘여성분단 원년’이라 부른 것처럼 균등법 제정은 한편에서 고용 규제 완화를 촉진하는 노동자파견법, 그리고 여성의 낮은 임금을 장려하는 새로운 연금제도의 도입과 함께 여성들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했다. 즉,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개혁과정에서 여성들이 간편한 노동력으로 재편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부추긴 새로운 보수 세력은 이제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사회진출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할 수 있는 '유연한(flexible)' 노동력이 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남녀공동참획'이라는 아젠다 아래 정부와 지방행정 내부에도 여성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각 지자체에서 남녀공동참획 센터와 젠더 관련 조례가 만들어졌고, 학술‧교육 분야에서도 젠더론 강의나 시민 강좌, 젠더 관련 출판물 등이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각지의 여성단체가 발간하는 간행물이나 교육용 소책자에는 '젠더프리'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였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젠더프리'를 "프리섹스를 장려하는 과격한 성교육"으로 호도하고 공격하는 백래시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백래시의 대표적 논자인 심리학자 하야시 미치요시(林道義)는 1990년대 후반부터 부성과 모성, 주부의 복권을 제창하기 시작했고, 기본법이 제정된 1999년 이후 페미니즘을 "정권의 중심을 차지하여 가족을 파괴하는 해악"으로 보고 반격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때 '젠더프리' 담론과 함께 백래시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 1990년대 후반은 일본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나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 『전쟁론』 등 역사수정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며, 그 주된 논객들이 젠더 백래시에도 가담하고 있었다. 예컨대 역사를 "과학이 아닌" "민족의 로망"이라 부른 새역모 회장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및 핵심멤버인 다카하시 시로(高橋史郎), 야기 히데츠쿠(八木秀次) 등은 일본군‘위안부’의 교과서 기술을 부정하는 한편에서 젠더 백래시의 주역으로도 활약했다. 그들은 '모성의 복권'을 내걸고 여성들의 자율적 영역을 부정하며 ‘위안부’를 매춘부로 불러 피해자들과 성 노동자들을 동시에 모욕하는 담론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왔다. 90년대 후반 이후 젠더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는 세력을 키웠고, 그들 동력의 핵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다. ‘위안부’ 부정을 동력으로 삼은 두 보수 세력 90년대 역사수정주의 담론은 2000년대에 들어 차원이 다른 두 보수 세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하나는 보수 정치인들과의 연합을 통해 형성된 광범위한 극우세력이다. 그들은 '일본회의'와 '신토정치연맹' 등 일본 최대급의 극우 정치‧종교단체를 기반으로 삼았고 『산케이신문(産経新聞)』, 『세이론(正論)』, 『쇼쿤(諸君!)』, 『SAPIO』 등의 보수언론을 주요 무대로 활약했다. 이들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젠더프리 교육'은 애국심과 전통적 질서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2005년 5월에는 당시 내각 관방장관이던 아베신조(安倍晋三)를 좌장으로 내세운 '과격한 성교육‧젠더프리교육 실태조사 프로젝트팀'을 발족했던 것처럼 젠더 백래시는 시민사회 내 반페미니즘 운동이라는 한 파트를 벗어나, 자민당 극우정치인들 스스로가 견인하는 대보수연합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광범위한 넷우익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급성장한 넷우익의 존재는 '혐한류' '재일 특권' 등의 담론을 거쳐 '행동하는 보수'를 자임하는 '재특회(재일 코리안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의 헤이트 스피치로까지 발전했다. 이들은 기존 리버럴 세력과 재일조선인, 페미니스트 등을 '반일'이라는 잣대로 공격함으로써 일본 시민사회의 대항 담론을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 속에 가둬놓았다. 2002년 '2채널'에 생긴 '페미나치를 감시하는 게시판'은 2016년에 '페미‧반일책동을 감시하는 게시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오늘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광범위한 '혐오 비즈니스'로 확대되었다. 시리아 난민을 조롱하는 일러스트를 그린 만화가 하스미 도시코(はすみとしこ)는 그 후 재일조선인, 페미니스트, 오키나와 등 대상을 바꿔가면서 그가 '위장 약자'로 부르는 사람들을 공격해왔다. 미투 이후 그가 "증거는 없어도 내 몸이 기억한다"는 문구와 함께 이토 시오리와 '위안부' 피해자의 일러스트를 나란히 배치해 조롱한 것은 이 흐름의 핵심을 보여준다.[1] 이처럼 1990년대 반페미・역사수정주의자들은 대연합을 형성하여 한국보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백래시의 물결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다. 즉 새역모가 일본인의 긍지와 애국심을 훼손하는 '자학적' 역사 교과서를 비난할 때도, 또 재특회가 거리에서 혐한시위를 벌일 때도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과 비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수정주의의 대중화가 가져온 현재 상황은 역사적 전문성보다는 만화가, 유튜버, 연예인과 같은 비전문가들의 실감을 바탕으로 한 반지성주의 현상으로 이는 일본 사회 소수자나 피해자에 대한 전체적인 백래시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들이 만든 ‘위안부’ 문제에 여성들이 나선다"?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은 ‘위안부’ 부정론과 반페미니즘 활동을 여성 정치인과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01년 9월에는 '일본회의' 계열의 '일본여성모임'이 결성되어 젠더 백래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끝장내기 위해" 2011년에 설립한 나데시코 액션(なでしこアクション)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 의견과 다른 결의안을 낸 지방의회에 대한 항의, 해외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항의 등 국내외 반일활동 저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다. 단체대표 야마모토 유미코(山本優美子)는 원래 재특회에 운영진으로 참여하다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데시코 액션을 결성했다. 그는 자민당 극우정치인 스기타 미오(杉田水脈)와 함께 유엔에서 ‘위안부’가 역사 왜곡임을 주장하였고, "남자들이 만든 ‘위안부’ 문제에 여성들이 나선다"는 문구와 함께 『여성이니까 해결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공저도 출간했다. 소위 '아베 칠드런'으로 정치권에 들어간 스기타는 페미니즘만이 아니라 LGBT, 난민, 재일조선인 등 모든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해 자극적인 혐오 발언을 통해 넷우익들의 인기를 얻은 정치인인데, 특히 유엔에서의 로비활동과 세계 각지에서의 소녀상 건립반대 운동 등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역사전'에 앞장서고 있다. 남녀평등을 '반도덕적'이라고 말하는 스기타가 미투를 '현대의 마녀사냥'으로 불러 공격한 것은 안티페미니즘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그들의 민낯은 영화 〈주전장〉(미키 데자키, 2019)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토에게 고발당한 야마구치 또한 아베의 인물 평전을 낼 정도로 현 정권과의 유착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토는 저서 『Black Box』에서 성폭행 후 야마구치의 태도, 약물 혼입의 가능성, 야마구치를 기소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찰과 검찰의 2차 가해, 그리고 예정된 체포의 갑작스러운 취소 등 악몽같은 경험을 자세하게 적었다. 이토는 수사과정에서 "고소하면 저널리스트로서의 인생은 끝난다"는 협박을 들었고 결과적으로 야마구치의 체포는 돌연 취소되었다. 여기서 사건 직전에 야마구치가 썼던 기사가 "한국군에 베트남인 위안부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기사 내용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보수언론 내부에서도 날조와 가로채기 의혹이 제기되어 TBS 내부에서 징계처분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결과적으로 TBS가 철회한 기사를 독자적으로 보수잡지 『주간분슌(週刊文春)』에 발표한 것을 이유로 워싱턴 지국장에서 해임되었다. 기사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아베 정권 측근과의 소통이 있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전제로 할 때 역시 일본 미투 운동에는 개개인의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그것은 90년대부터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백래시와 무관하지 않다. 2부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을 드러낼 것이다. 각주 ^ 하스미토시코의 트위터 계정, https://twitter.com/hasumi29430098/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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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 심문회보 제2호, 기존 보고서에 근거한 2차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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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기존 포로심문보고서에 근거한 2차 보고서 이 자료는 1944년 11월 30일 생산된 문서로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 선전 효과, 포로 수기, 포로의 군인신문 평가, 악명 높은 마루야마 대좌, 일본군 장교들의 사병 복지 문제 무시, 병력 증강 상의 고충, 버마 지역 일본군 보충 병력의 평균 연령, 일본군 내 반전주의자, 일본군 전방지역 위안소 등 총 9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13쪽 분량의 문서이다. 이 중 ‘위안부’와 관련된 부분은 4번의 악명높은 마루아마 대좌, 9번의 일본군의 전방 지역 위안소 등 두 개 항목이다. 이 문서를 생산한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는 남서태평양 사령부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와 유사한 조직이다. 즉 연합군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명칭의 심리전, 포로심문 전담 조직을 만들어 활용했다. SEATIC 문서 중 ‘위안부’ 관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심문회보 제2호이다. 무엇보다 이 문서를 생산한 주체는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의 심리전팀이다. 심리전팀의 기본적 목적은 심리전을 위한 각종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기에 이 문서의 목표 역시 포로 심문자료에 근거해 심리전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직접 포로 심문을 한 기록은 아니다. 즉 이미 확보된 포로심문 보고서에 근거해 작성된 2차 보고서의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미 전시정보국(OWI)가 작성한 49번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직접 심문해 작성된 문서라면,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2호는 49번 보고서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종합해 만들어진 문서다. 이 문서가 생산된 기본 맥락은 미치나 전투로부터 나온다. 버마 전선은 크게 보아 임팔 전투가 가장 중요했지만, 북부의 미치나 전투도 상당히 중요했다. 1943년 3월부터 시작된 임팔 전투에서 일본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반격이 본격화된다. 영국은 버마 북부로의 전선 확대를 반대했지만, 미군의 스틸웰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theater)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웰은 연합국의 중국 지원을 위해 미치나 지역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미치나 전투는 중국군과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미국은 미군 특수부대의 원조로 꼽히는 ‘메릴의 약탈자들’(Merill's Marauders)을 투입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요컨대 영국이 주도하던 버마 전선에서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던 전투는 사실상 미치나 전투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는 버마지역에서 자신들이 참여한 전투의 경험과 정보를 종합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심리전에 활용하고자 했다. 뉴델리에 본부를 둔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는 영국이 주도하는 조직이었지만,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기도 하는 등 일종의 연합조직이기도 했다. 버마 전선은 미군 심리전 부대의 역할이 상당히 크게 나타난다. 미군은 일본어에 능통한 일본인 2세(Nisei)들을 대거 확보할 수 있기도 했고 영국군과 비교해 전투병력이 별로 없었기에 심리전에 집중하는 측면도 강했다. 어쨌든 미치나 전투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심문회보 제2호가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자료가 주목되는 것은 ‘위안부’와 위안소 관련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흥미로운 부분도 제법 있다. 바로 조선인 군속 관련 내용이다. M.494로 표기된 이 조선인 군속은 영어와 우르두어 임시 통역사로 일본군 15사단 사령부에 배속된 사람이었다. 그는 영어가 능통해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진술서 내용을 보면 일본군에 대한 선전에 있어 특별히 강조해야 할 점을 전방과 후방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전방지역에서는 연합군의 공세와 유리한 전황 관련 소식을 강조할 것이며 독일의 패배가 시간문제이니 일본은 홀로 남아 싸우게 될 것이란 사실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연합군은 절대 포로를 죽이지 않으며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으니 헛된 죽음을 피하라는 내용을 주문했다. 후방 지역과 일본 본토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80년간 일본에 항해술, 조선술, 철도, 화학산업 등 과학기술을 전수해주었음을 상기시킬 것을 강조했다. 이어 전쟁이 전적으로 일본의 책임이며 천황 대신 군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군부에 대한 그의 반감은 “쇼와 막부”를 타도하고 “쇼와 유신”(Showa Restoration)을 이룩해야 한다는 서술에 잘 나타난다.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연합국은 일본을 과학기술 면에서 압도하고 있으며 단합되어 있기에 절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전망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또한 선전에 있어 피해야 할 점도 적시했다. 천황과 일본의 영웅으로 취급받는 도고 제독, 노기 장군 등에 대한 비판, 일본의 국체, 관습과 종교 그리고 여성에 대한 비판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연합군이 심리전을 위해 일본군에게 살포하던 군인신문 내용에 대한 코멘트도 포함된다. 한자를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 그것은 신문 제작을 중국인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연합군과 협력하고 있는 일본인이 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쉬운 한자를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마루야마 대좌에 관한 ‘위안부'들의 증언 마루야마(丸山房安) 대좌는 미치나의 일본군 수비대장이었다. 그래서 미치나 위안소 역시 그의 통제 속에 있었다. 마루야마 대좌는 1943년 3월 27일 자로 버마 미치나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8사단 예하 114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시작된 연합군의 미치나 작전 당시 소수 병력을 이끌고 간신히 탈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루야마 대좌는 일본군 포로들로부터 한결같이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 문서에서도 악명 높은 마루야마 대좌(The notorious Col. MARUYAMA)라는 독립 항목으로 다룰 정도로 그는 악명이 자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시로 부하들을 구타했고 심지어 장교들조차 부하들 앞에서 마루야마로부터 뺨을 맞는 등 구타에 시달렸다. 또한 골짜기의 두꺼비라는 뜻의 ‘타니와쿠도’로 불릴 정도로 비겁한 행동을 반복하여 부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부하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홀로 호의호식하는 모습도 보였고 위안소의 단골이기도 했다.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마루야마 대좌는 술주정뱅이로 유명했다. 마루야마 대좌는 병사들의 식량 배급을 늘려달라는 부하 장교들의 요구는 무시하면서도, ‘위안부’들에게 음식과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대피할 때에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위안부’를 항상 대동하여 대피소에서 몇 시간이고 함께 지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꼈다고 알려진 조선인 ‘위안부’ 가와하라 스미코(하돈예)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아끼는 ‘위안부’에게 각종 편의를 봐주었지만, 전체적으로 마루야마는 위안소 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위안소 요금을 깎았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가 받는 수익 할당률을 60%에서 50%로 삭감했다. ‘위안부’들은 마루야마의 부하들처럼 그를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설명했고 스미코조차 술주정뱅이에다 호색한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루야마 대좌에 대한 포로들이나 ‘위안부’들의 진술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루야마가 위안소와 ‘위안부’들에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 흔적도 나타난다. 위에 언급한 사실들 말고도 위안소 업주였던 기타무라가 포로가 될 당시 입고 있었던 바지가 마루야마의 승마바지였다는 진술도 나온다. 또한 스미코 역시 마루야마의 검대를 허리띠 대신으로 착용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 마루야마 대좌가 어떠한 인물이었고 또 위안소 운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위안부’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섣부를 것이다. 좀 더 많은 자료를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자료가 마루야마에 대한 가장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위안소 운영과 일본군 부대장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9번 보고서만으로는 알 수 없던 정보들 ‘위안부’ 관련으로 이 자료의 핵심은 9번 항목의 전방의 일본군 위안소이다. 이 항목의 서술은 전적으로 두 개의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위안소 업주였으며 M. 739로 지칭된 기타무라 에이분(Kitamura Eibun)의 심문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번에 소개했던 미 전시정보국(OWI)의 유명한 49번 보고서이다. 49번 보고서야 널리 알려졌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기타무라의 심문보고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보 출처를 밝히고 있는 서두의 서술내용을 보면 M.739의 포로 심문은 영국군의 합동집중심문센터(CSDIC, Combined Services Detailed Interrogation Centre)에서 진행되었다고 밝힌 점이다. 즉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은 인도-버마 접경 지역의 레도(Ledo) 기지였음에 반해 기타무라의 심문은 뉴델리에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합동집중심문센터는 영국에 본부가 있고 인도에는 그 지부격인 CSDIC(I)가 설치되었다. 문서 맨 마지막에는 이 자료가 CSDIC(I)에서 SEATIC을 위해 준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CSDIC(I)가 SEATIC의 요청으로 자료를 작성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시점도 흥미로운데 49번 보고서는 9월 21일 보고되었지만, 이 자료는 11월 30일 생산되어 12월 7일 통상적 배포를 위해 준비된 것으로 나타난다. 8월에 포로가 되어 9월에 보고서가 나왔음에도 두 달가량 뒤에 다시 한번 기타무라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었고 심문회보 2호가 작성된 것이다. 이는 그만큼 미치나 전투와 그 결과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가 연합군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문서의 미치나 위안소 관련 서술은 큰 틀에서 49번 보고서와 다르지 않다. 분량은 심문회보 2호가 4쪽가량이고, 49번 보고서는 6쪽이다. 차이가 있는 부분을 보면 먼저 심문회보 2호에는 위안소별 ‘위안부’ 숫자와 국적이 포함된다. 교에이 위안소에는 조선인 22명, 긴수이에는 조선인 20명이었고 모모야에는 중국인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는 49번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중국인 ‘위안부’들이 광둥 지역에서 팔려 왔으며 일본인 ‘위안부’는 전방에는 전혀 없었고 후방지역에만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정보 역시 49번 보고서에 없는 것들인데, 업주인 기타무라에게서 나온 진술로 보인다. ‘위안부’만 심문한 49번 보고서에 이러한 정보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위안부’들이 인근 지역 위안소에 대한 소식과 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위안부’들의 귀국에 대한 서술에서 차이가 난다. 49번 보고서는 1943년 후반 군의 명령으로 일부 ‘위안부’들이 귀향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심문회보 2호에서는 선불금을 다 갚으면 돌아갈 수 있기는 하지만 전쟁상황으로 인해 M.739가 운영하고 있던 위안소에서 실제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1943년 6월 일본군 15군 사령부가 귀향을 허락하는 명령을 내려 조건이 충족된 ‘위안부’ 한 명이 돌아가고자 했으나 남으라는 설득에 쉽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기타무라 심문으로부터 나온 정보가 포함되어 있기에 위안소 운영상황이 좀더 자세한데, 114연대가 위안소를 통제했고 담당 장교 이름도 확인된다. 연대 본보 마가수에(Magasue) 대위가 담당자였으며 위안소 이용자도 엄격하게 통제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2명이 연대본부로부터 파견되어 위안소의 출입자를 통제했는데, 다른 부대 병사도 114연대 병사를 동행하면 출입할 수 있었다. 하루 이용자는 하사관 및 사병이 8~90명, 장교가 10~15명 선이었다고 한다. 또한 헌병이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싸움 등의 불상사를 통제했다. 49번 보고서에 없는 또 다른 정보는 성병 관련 내용이다. 기타무라에 따르면 그가 위안소를 운영하는 1년 반 동안 성병 감염 사례는 단 6건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불만 사항에 대한 기술도 있는데, 주로 장교들에 대한 불만과 보급 부족 그리고 향수병이 주원인이었다. 후퇴와 포로가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는 중국인 ‘위안부’들 20명이 중국군에 자수했다는 사실과 후퇴 과정에 피해를 입은 ‘위안부’ 상황도 나온다. 63명의 ‘위안부’ 중 4명이 이동 중 사망했고 2명은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다고 한다. 49번 보고서와 비교해 이 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작성자의 주관적 평가나 편견이 섞인 서술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서는 기타무라의 진술 내용과 49번 보고서 내용 중에서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부분만 추려서 비교적 건조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대부분 낮은 직급으로 직접 심문을 담당했던 일본계 미군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를 통해 작성자에 따라 서술내용이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음이 확인된다. 예컨대 선불금을 갚는 등 조건이 충족되면 귀환 자격이 부여된다는 규정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현지에서 어떻게 운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임이 확인된다. 49호 보고서에서는 일부 ‘위안부’가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지만 기타무라는 자신의 위안소에서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20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다른 위안소 상황에 대해 들은 내용을 진술한 것인지는 몰라도 기타무라가 운영하던 위안소에서는 한 명도 없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문서는 그 자체로도 귀중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또한 49번 보고서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M.739로 표기된 기타무라를 직접 심문한 보고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타무라 심문 보고서가 발견된다면 49호 보고서와 심문회보 제2호와 비교 대조하여 더욱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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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이 투영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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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의 특이성 이 보고서는 미 전시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 심리전 팀이 생산한 심문 보고서로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의 제120호 조사보고서와 함께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보고서는 버마(현재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Myitkyina)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 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연합군 측에서도 최일선 전장에서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 20명이 포로로 잡힌 상황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따라서 전담 심문관을 배치하여 20여 일에 걸쳐 자세한 심문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 문서가 유명해진 이유는 문서 자체의 희귀성과 특이함에만 있지 않다. 이 문서는 ‘위안부’들의 삶과 존재에 대해 주관성이 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위안부’들에 대해 ‘일본인과 백인의 관점에서 예쁘지 않다’고 한다거나 ‘유치하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등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대목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또한, ‘위안부’들의 삶이 비교적 풍족했고 버마 다른 지역에 비해 사치스러울 정도(near-luxury)였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적대적인 세력과 개인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자료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 문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내용만 피상적으로 검토해서는 이 문서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문서를 생산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생산자, 즉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심문한 인물의 특성 등을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는 다른 여타 심문 보고서와 달리 문서 작성자의 주관적 편견과 느낌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건조한 문투로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이 문서는 굳이 심문자의 느낌이나 견해가 곳곳에 들어가 있어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 그렇기에 논란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토 등을 통한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이 문서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뒤틀리게 이해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맞서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해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49번 보고서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이유 이 문서는 버마 미치나 지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20명이 포로가 된 것을 계기로 생산됐다. 1944년 8월 10일 미치나 인근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미치나 비행장에 임시로 수용되었다가 8월 15일에 인도 레도(Ledo) 기지로 이송되었다. 본격적 포로 심문은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20여 일 간 진행되었다. 그런데 보고서가 완성된 날짜는 10월 1일이었다. 이는 심문이 끝난 다음에도 20일가량 추가적인 조사나 심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40일 정도가 전체 조사 기간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긴 심문과 조사 기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심문관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부대원들이 매우 바쁜 와중에도 ‘위안부’ 심문 담당자는 20명의 여성만을 전담하고 있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즉 당시 레도 기지의 미군 심리전 팀은 ‘위안부’ 심문과 조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준다. 49번 보고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문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문서는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발언과 증언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형식이 아니라 문서 작성자가 20명의 심문기록을 종합해 별도의 보고서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심문보고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명의 포로를 집중적으로 심문하여 기록한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 사람의 심문기록을 종합하여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한다. 어쨌든 포로들의 발언과 증언이 그대로 보고서에 실리는 경우는 드물다. 필요에 따라 직접 인용되는 문구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고서는 심문관이나 문서 작성자의 분석과 판단을 거쳐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다.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2차대전 시기 미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이주민들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 루스벨트 정권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계 이주민을 강제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동부의 독일과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는 이주 기간도 오래되었고 동일한 코카시안 계열이라 분리해내기도 쉽지 않아 수용정책은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서부지역 일본인 이주민은 대대적으로 강제 수용되었고 그 피해가 상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칭 니세이(Nisei)로 불리는 일본 이주민 2세들이 미군에 대규모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가족들이 강제수용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시민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곧 군인이 되어 참전하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는 니세이만으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참전하여 상당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독립적인 전투부대 편성은 없었다. 대신 니세이들은 심리전, 포로심문 등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알렉스 요리치는 이러한 니세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매우 복잡했다. 자신의 모국과 현 거주국 사이의 전쟁으로 가족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고 자신들은 모국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심문관들의 정체성을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 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사이의 식민-피식민 관계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은 분명치 않다. 코카시안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위안부’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건대, 요리치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도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요리치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요리치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위안부’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음은 보고서 내용이 잘 보여준다. 요리치의 태도는 레도 기지 심리전 팀의 또 다른 아시아계 요원이었던 원 로이 챈(Won Loy Chan)과도 대비된다. 챈은 중국계 미군 대위로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그가 쓴『Burma: The Untold Story』에는 자신이 만났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잘 드러나 있다. 원 로이 챈과 니세이들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원 로이 챈은 장교였고 니세이들은 대부분 사병이었다. 요리치는 나중에 장교가 되어 소령으로 전역하였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사병이었다. 이러한 계급 차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라는 모국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군 속의 중국계와 일본계의 차이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인다. 49번 보고서의 내용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보고서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제였다. 즉 요리치는 일본어와 영어는 가능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고 ‘위안부’들은 일본어에 서툴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19세에서 31세 사이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지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의 한국 이름이 영어로 채록되어 있는데,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위안부’들의 일본어가 유창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심문은 마마상, 파파상으로 불렸던 위안소 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타무라(Kitamura, 北村) 부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업주였는데, 이들이 통역 겸 대변인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위안소 업주가 ‘위안부’들을 대변했다면 그 내용이 업주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심문관과 심문 과정의 특이성을 잘 이해하고 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에 대한 주관적 편견이 가득한 보고서 49번 보고서는 서문, 모집(recruiting), 성격(Personality), 생활 및 노동조건, 요금체계, 이용 일정, 보수와 생활 조건, 일본군에 대한 반응, 군인의 반응, 군사 상황에 관한 대응, 후퇴와 포획, 선전, 요청 등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위안부’ 20명의 한국 성명 명단과 위안소 업주 부부의 이름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본문 6쪽과 부록 1쪽을 합쳐 총 7쪽 분량이다. 보고서 서문에서는 ‘위안부’를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배속된 창기(prostitute)라고 단정했다. 모집 부분에서는 1942년 5월 초, 일본인 업자들이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위안 서비스"(comfort service)를 위해 조선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음을 설명했다. 업자들이 사용한 방식은 일종의 사기술에 가까웠다. 즉 업무는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로 둘러댔고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여성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무학이라고 했으며 몇몇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전체 규모는 대략 800여명 정도였고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중 네 그룹이 미치나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가 그것이었다. 일부 편견과 주관적 평가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 자료는 위안소 운영과 ‘위안부’들의 삶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위안소 운영 시간과 요금체계는 물론이고 ‘위안부’들의 수입에 대한 구체적 정보도 있다. 물론 ‘위안부’들의 수입은 업자와 분할해야 했고 자신들의 몫은 50~60% 정도였다. 위안소를 이용하는 일본군들의 반응도 나타난다. 일본군 중에는 줄 서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것에 수치감을 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작성자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의 편견과 문제점은 다음에 소개할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회보 제2호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사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기에 다양한 문서들에서 다루어졌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와 달리 SEATIC 심문회보 2호는 사실관계 중심으로 건조하게 서술되었다. 어쨌든 요리치 보고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무학이며, 유치하고 이기적”임을 강조했는가 하면 “자기중심적”이며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고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심문관 요리치의 편견과 주관적 평가가 두드러진 대목이다. 편견은 ‘생활 및 노동조건’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요리치는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다른 곳에 비해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고 했다. 특히 2년째 생활이 그러했다고 강조했다. 물건을 구매할 충분한 돈이 있었고 위문대를 받은 병사들로부터 선물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위안부’들이 체육대회나 각종 소풍, 오락, 사교 행사 등에 참가하여 즐겼다는 기록도 남겼다. 이러한 진술이 ‘위안부’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위안소 업자들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요리치가 보기에 ‘위안부’들의 삶이 빈곤과 물자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수준은 아니었음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파악이다. 일본군의 버마 점령 초기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미치나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역의 모든 물자와 설비를 매우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학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위안소로 사용된 학교는 애초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던 미션 스쿨이었으며 심지어 목사 사택까지 위안소로 사용하였다. 미션 스쿨을 징발해 위안소로 이용할 정도로 일본군의 위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위안부’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재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1944년 중반부터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위안부’들의 삶과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후퇴하면서 ‘위안부’들은 3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군을 따라갈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와중에 전투에 휘말려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고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특히 ‘위안부’들은 포로가 된 이후 자신들이 생포된 사실을 일본군에 알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다른 부대의 ‘위안부’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항복과 생포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따라서 전투원이 아닌 ‘위안부’들조차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우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위안부’들이 일정 기간 물질적으로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거나 일본군의 각종 모임에 참여했다는 점 등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들이다. 주인의 재산인 노예들도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를 위해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었다. 즉 더 큰 이익과 욕망을 위해 노예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주인에게는 바람직했다.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위안소와 ‘위안부’들 역시 일본군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위안부’들이 항상적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소 제도의 비인간성과 ‘위안부’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