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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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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주로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웹진 <결>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중적 논의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재미있는 대담을 기획했다. 첫 번째 대담자인 정영환 교수는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난 '조선적 재일동포 3세'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음과 동시에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이다. 현재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재일동포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대표 저작인 2016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정영환, 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2016)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해 논란을 빚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이, 2013)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대담자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 한국 국적의 신분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보다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교수를 모신 대담은 시간적,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DAY 1> 정영환, 박노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입니다. 두 분을 모시고 온라인 대담을 진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 대담 위키는 두 대담자가 물리적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온라인 상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온라인 대담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되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주제의 위키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본 위키에 접속해서, 새로 개설된 주제의 위키에 각자의 의견을 직접 적어주시면 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글은 기간 내에 언제든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첫째 날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 사이에서도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한국 외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Q1.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대한민국(남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주로 남한 피해자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Q2. 더불어 대한민국(남한)에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선 어떤 논의와 과정이 필요할까요? Q3. 앞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할까요? 박노자 A1.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의 틀 안에서 처음에는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는 '우리' - 즉 남성 본위의 국가/국민 공동체 - 의 여성들에 대한 일제의 유린이라는 방식으로 많이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통 '대한민국' 국경으로 확정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거니까 다양한 거주지, 국적, 민족에 속하는 다른 피해자들이 잘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박근혜 씨의 시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프레이밍해서, 일본 국가와의 '타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기초부터 잘못된 접근이죠. 물론 '한일관계'와 유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양한 피해자에 대한 전시 성폭력의 문제, 즉 인권 문제이자 젠더 문제, 그리고 식민지적 폭력의 문제입니다. A2. 남한에도 북한에도 '위안부' 성노예 제도의 피해자 분들이 거주하십니다. 이북에서 거주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본적이 남한인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사실상 광의의 '이산가족' 범위에 속하시기도 하죠. '위안부' 문제가 논의될 때에 남이든 북이든 해외든 어디에 거주하시든 모든 피해자들이 이 논의에 포함돼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선구적으로 언급하고 활동해온 총련 등 해외 동포 단체들의 노력도 남한에서도 분단의 벽을 넘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A3.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던 피해가 특히 컸다는 사실도 당연히 있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위안소'란 다양한 지역, 민족, 국가 출신의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전시 성폭력, 성노예화 국가 범죄입니다. 이 차원에서 본다면 '한-일 프리즘'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의 일차적 본질은 일본 국가와 군대의 젠더적 폭력 행위지만, 동시에는 계급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빈농, 빈민의 딸들이야말로 일군의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곤 했습니다. 이 범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일본 국가와 군대에 있으며, 반인륜 범죄인 만큼 공소시효가 원칙상 없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공소장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연합국(특히 미국)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책임 유기에 대해서도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당국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정영환 A1. 이 문제를 검토할 때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위한 시민운동과 일반 여론이나 언론, 정치권의 동향은 구별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시작한 시민운동은 비교적 일찍이 '남한'이란 틀을 넘어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중국, 동남아, 유럽,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이루어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이렇게 볼 때 애초부터 남한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국경을 넘은 여성들의 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북측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1990년대에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의 도달점이 2000년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1980년대 이래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치열하면서도 창조적인 투쟁이 있었고, 특히 이 운동이 탈분단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지역적,공간적으로 남한의 틀을 넘어 일본군의 성폭력 피해를 받은 각 지역의 당사자나 지원자, 활동가들과의 인연을 맺고 경험을 교환하며 함께 일본군의 책임을 추궁할 뿐 아니라,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나 콩고 내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이루고 있어, 시간적인 제한을 넘어서 보편적인 전시성폭력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의 큰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런 해결운동이 이룩한 국가적인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성과가 남한의 대중적인 매체나 정치권에서 재현될 때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시각으로 전환되어버리는 데 있겠지요. 저는 일본에 거주하고 남한에서 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알기는 어려운데, TV나 신문, 잡지에서 다루어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질문하신 대로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발생한 원인으로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의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역사적인 단계를 구분해서 검토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948년이래의 반공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직접 작용한 결과뿐만이 아니라-물론 반공주의를 제외하고 한국의 '분단적 시각'의 문제를 파악하지는 못합니다만--1987년의 민주화이후의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제한성과 문제점—1987년체제가 갖는 '분단적 시각'—을 도마 위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Q2와 관련이 있기에 차후에 재론하겠습니다. A2. '탈분단적 시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을 정리/공유하면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웹진 <결> 편집팀 측에서는 '분단적 시각'을 북측이나 재외동포의 존재를 외면하여 한국의 피해자 중심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정의를 한다고 저로서는 받아들였습니다. 이 개념을 전제로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앞서 남한과 일본의 관계에 제한된 인식의 틀이 형성된 배경에는 내셔널리즘이 작동하였을 뿐만 아니라—저는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제2차세계대전 후의 전후세계질서,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의 심대한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전쟁/식민지지배 책임문제를 연합군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형사적인 책임(동경재판)도 민사적인 책임(배상청구권)도 남북은 부정당했습니다. 1948년의 분단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일강화에 틀에서 배제되었고 한국은 또한 강화회의에 참가를 못 한 채 미국 패권하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한일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1948년, 1952년 체제). 그래서 식민지 배상문제는 애초에 '청구권문제'로 환골탈태되어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재산의 반환'이란 틀에서만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이 결과 한일기본조약과 각 협정이 맺어지게 됩니다. 즉 1965년체제의 형성입니다. 1965년 체제는 두 가지의 논의를 '봉인'한 체제였습니다. 첫째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피해논의의 '봉인', 둘째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봉인'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일본이란 쐐기를 식민지기 피해자와 정부, 그리고 남북 간에 박았던 체제이지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여전히 '분단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배경에는 이렇게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다층적으로 얽힌 체제—1948, 1952, 1965년 체제가 남한에서 식민지의 피해문제를 바라보는데 인식의 틀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문제는 남한의 대내적인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문제이면서도 위계적인 국제관계로서의 전후체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1965년 체제에 대한 재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1948년 체제는 공고합니다. 2018년 10월 30일의 신일철주금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획기적인 손해배상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1965년 체제에 대한 귀한 토전이었던 반면에 원고중에는 전시 말기에 청진의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식민지지배하의 피해에 보상에 관한 쟁점은, 이건 대한민국 헌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논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후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 필요한 논의로서 한 가지 올리자면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와 여성주의적 시각의 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재일조선인사 연구로부터 시작했는데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둘러싼 논의에 개입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특히 일본에서의 주류 여성주의 시각에서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탈민족주의/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한국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녀상 비판과 『제국의 위안부』 옹호에 합류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반식민주의는 민족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오해될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가져오는 억압은 피지배자를 민족적으로 배제함과 동시에 개급, 젠더적인 차원에서의 분단을 이용하여 증복시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런 근대세계가 낳은 부의 측면을 근면하게 습득하여 그 폭력성이 전면적으로 틀어난 된 제도가 일본군성노예제도였던 만큼 저희들의 시각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식민주의에 대한 검토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성인권의 보편성이란 가치는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결부할 때 처음으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A3.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 처럼 그간의 해결운동은 이미 '탈분단적 시각'에 입각하여 많은 실천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강조를 하게 됩니다만, 이미 운동은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실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일동포들도 그렇습니다. 그 실천에 배우면서 '외교적'차원에 해소되지 않는 당사자와 활동가, 연구자의 경험과 연구를 축적하며 역사화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법정에서 배우면서 일본군의 만행과 책임을 더욱 체계적으로 밝히고 남북의 교류를 통해 이북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의 증언수집과 경험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또한 세계의 식민주의하의 전시성폭력의 진상규명을 위해 실천하는 활동가나 연구자를 맺는 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DAY 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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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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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첫 번째 날 두 분의 답변을 들어보니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남한의 '분단적 시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단체 등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연구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남한의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내에서 출판되는 혐한서적에서 '위안부'는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의 단골 소재입니다. 일본과 맥락은 다르지만, 남한 역시도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남한의 언론에서는 누군가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거나 책임을 물을 때, 주로 ''위안부'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예시로 들곤 합니다. 헤이트스피치와는 상당히 다른 결이지만, 어떤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선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운동 혹은 연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한에서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차원에서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란 요원하기만 합니다. Q1. 그렇다면,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운동적 측면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수요집회나, 소녀상 프로젝트 등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대중적 캠페인이 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담기 위해선 어떤 부분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Q2. 서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입니다. 본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정영환 선생님께서 박노자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선생님께서 정영환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박노자 A1. 네, 정영환 선생님께서 훌륭하게 지적하신 대로 사실 굳이 운동 진영에는 이렇다 할만한 '주문'을 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초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운동가들은 이미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 문제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보기에 귀중한 것은, 최근에 별세하신 김복동 할머니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과 손을 잡고 연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콩고 등지에서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 위에서 정영환 선생님께서 지작하셨듯이 - 참 귀중한 성과죠. 문제는, 정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무엇보다 매체와 교육체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권입니다. 매체들은 예컨대 중국이나 필리핀, 아니면 파푸아뉴기니 여성들이 납치, 감금당하고 성노예화 당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자주 합니까? 아마도 다수의 한국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 네덜란드와 인도, 파푸아뉴기니 출신의 여성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전쟁 범죄의 국제적 성격이나 세계적 규모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돼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 정치권은 베트남 전쟁 시절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대통령, 국회 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을 하고, 교과서에 한국 전쟁 시절의 한국군 범죄상을 정확히 기술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등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성해야 할 것인가를 나서서 행동적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정영환 A1.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나 활동을 하는 저에게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획일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일본 리버럴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혐한과 반일,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등가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위안부'문제에 대해 지속적이며 대중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 자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다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유보하면서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남한에서의 대중적 캠페인이 국내용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애초에 증언을 하셨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본문제입니다. 피해자의 출신지역은 다양하고 피해의 양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모든 피해자들이 일본군, 정확히 말하면 천황의 군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성노예제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들의 치유와 경험의 공유나 다양한 문화적 재현 등, 남한의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는 귀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는가, 이후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자신들 나라의 과거의 만행을 직시하여 기억하는가, 이것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쟁점이 됩니다. 아울러 Q1의 전제가 된 부분에 관해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총련을 포함한 재일동포단체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주된 운동과제가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총련 내부의 문화도 젠더 평등,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재일조선인 운동 내부의 젠더 불평등을 극복하려고 하는-주로 여성의-활동가들이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자진해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에 입각한 실천을 시작하고 있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근 매해 4월 23일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기념하여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다양한 액션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날은 1977년에 배봉기 할머니 증언을 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처음으로 보도한 날입니다. 남한에 국한된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 분단과 대립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남한에서 이런 증언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공유할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단과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남한 사회가 외면해왔던 해방후의 역사를 다시 묻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 온라인 대담은 팀과 커뮤니티를 위한 민주주의 플랫폼 '빠띠'에서 이루어졌다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은, 일본 사회에서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일반인들이 식민주의와 전쟁의 사실을 과연 어디까지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 일본인들의 상당수가 아예 조선과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조차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는데,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 '앎'의 형태와 지형에 대해서 한 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답하다 박노자 선생님,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고 또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젊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관해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원래 수험의 관계상 비중이 높지 않는 근현대사는 수업에서 안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과서의 내용도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서 가해의 사실을 학교교육에서 가르쳐야한다는 기운이 한때 있기는 했는데 1997년이후 극우파의 역공의 결과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가해사실의 서술은 대폭 줄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서 주로 1, 2학년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역시 식민지배나 침략전쟁의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지식이 거의 없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서점이나 인터넷 상에는 '혐한', '혐중' 서적들이 넘쳐 청년들이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도 처음 접하는 정보가 이런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대중역사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애초부터 '혐한'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본의 가해 사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기는 한데 그런 관심을 품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통로가 너무나 좁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층을 포함한 일본 대중들의 '앎'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만, 그와 더불어 사실을 인식하는 틀이나 프레임을 매체들이 어떤 형식으로 제공하는지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TV 등의 대중매체는 기본적으로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대외관계를 해석하는 메시지를 거듭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문화, 혹은 일본인이 외국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고 있는지 일본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주로 구미권출신자)이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소위 일본 '스고이(대단하다)'의 대합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침략이나 가해사실을 적시하는 비판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일본을 '혐오'하는 '반일'로 표상이 됩니다. 작년 2018년 10월의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응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사회의 전쟁 범죄 문제에 관한 인식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비판에 대한 반발이 우세합니다. 대법원판결 직후 아베총리는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는데 주류 언론들은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한국이 이 약속을 어겼고, 이 판결은 한일관계의 악화를 초래한다는 분석이 TV나 신문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일' 한국 때문에 외교관계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친일/반일'프레임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주류언론의 인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그래서 '일부 매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하게 됩니다. 즉 이 프레임 자체를 의심하고 일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제 관점에서 볼 때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게 지금 일본의 현실입니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이번 대담에서는 주로 '분단/탈분단'이 주제가 되었는데 저는 박노자 선생님께 좀더 다른 각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한국자본주의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남한의 주류사회의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계급적 관점의 부재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족' 담론의 틀 내에서 '위안부'문제를 재현할 때 젠더적 관점과 함께 계급적 관점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자본주의하의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성착취 구조나 성매매'문화'와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방식에는 연관성이 있을 것인데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분석을 하십니까?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A.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상당수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가 문제'라고 재단하지만, 사실 '민족주의'라는 관념은 하도 다의적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정확히 "어떤" 민족주의가 "어떻게" 문제되는지를 명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식민지라는 트라우마를 지니는 것도 '민족주의'와 이렇게저렇게 엮일 수 있는 부분인데, 식민지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식민 모국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제대로 지지 않은데다가 한국의 지배층이 오랫동안 식민지적 습성들을 그대로 간직해온 부분들이 커서, 그런 트라우마가 크다는 건 그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되는 민족주의의 종류는 바로 자국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국가주의적 태도, 소위 '국익주의'나 '대한민국주의' 같은 현상들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또 한국 자본이 침투하고 있는 지역들, 특히 동남아에 대한 불량하고 우월주의적 태도와도 불가분의 연관을 가집니다. 세계체제라는 먹이사슬에서 한국 자본들은 이미 준핵심부와 같은 위치에 올라 있습니다. 구미권 자본들이 한국의 금융권 등을 좌우하는 동시에 한국 자본들이 동남아 등지에서 저임금 노동 착취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한국 언론들이 '국익'을 위한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합니다. '진보언론'들마저도 미얀마 등지에서의 한국 토건 자본들의 이권 챙기기 등을 반기고 있죠. 한국 자본과 함께 각종의 섹스관광 등의 국내의 가부장적 추태들이 대량 수출되고, 한국 언론매체에서 한국인 가족의 '며느리' 역할과 한국 남성들의 성적 욕구들을 '해결'해주는 동남아 여성상이 계속 등장됩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와 같은 현수막들을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류 제국주의라고 할만한 분위기 속에서는 동남아나 파푸아뉴기니 등지의 성노예들의 비극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지죠. 쉽게 이야기하면 한국 자본이 구미권과 일본 자본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는 상황에서는 국내인들의 "제3세계"와의 연대 의식 등이 계속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단히 국내 여론 공간에서 문제 제기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DAY 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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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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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온라인 대담의 마지막 날입니다. 편집팀의 부족한 진행에도 불구하고 두 분께서 매우 훌륭하게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답을 하는 날입니다. 어제 정영환 선생님께서는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본래 주제에서 더욱 확장하여 박노자 선생님께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이와 같이 오늘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서로에게 폭넓은 질문을 드리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합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 저로서 한 가지 큰 고민이 되는 부분을 공유하면서 같이 생각해보실 것을 제안드립니다. 일본군 성노예 제도 문제와 한국이라는 국가가 70여 년간 범해온 각종 국가적 성범죄, 성폭력들을 우리가 어떻게 같이 묶어서 분석해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일본군과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가적 성범죄의 관련성에 대해 운동사회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위안부'라는 명칭을 한국 '국군'이 한국전쟁 때도 계속 사용해왔습니다. 그때 주로 미군과 '국군'을 상대로 해온 '위안소'들은 수십 개 있었고, 그 여성 피해자들 중에서는 예컨대 한국군에 의해 납치, 감금당한 북조선 측 여성 활동가 등도 있었지만, 피해자 구성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기존의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상당수를 이루는 걸로 이해합니다. 그 뒤로는 기지촌 성매매에 대해 한국 국가는 일종의 거대한 '포주' 노릇을 해왔고 그 성매매를 국가적으로 관리해왔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성노예 제도에 대한 일본군과 일본국가의 책임을 상대화해서는 안 되고 물타서는 안 되지만, 성폭력,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의 한국이라는 국가의 범죄성을 일본 국가/군대 범죄성과 같이 연동시켜 분석할 수 있는 틀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 부분에 대한 고견을 여쭈어보려 합니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부역해온 조선인 엘리트, 그리고 식민지적 통치기구 등 상당 부분을 그대로 살리고 계승한 '대한민국'을 일제의 사실상의 하나의 후계 국가체로 파악한다면, 성폭력/성매매 문제에 있어서의 그 범죄성과 일제의 범죄성 사이의 연관관계도 논리적으로 더욱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동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이와 같은 역사적 성격 등을 감안해서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정의 구현 운동은 되도록이면 좀 초국가적인, 그야말로 세계시민적인 기조로 나아가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라는 부분은 제 생각인데 어떻게 보시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의 질문에 답하다 오늘 제기해주신 질문에 답장을 드립니다. 저도 한국과 일본 국가의 범죄성을 연동시켜서 분석할 틀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일본군 성노예제도와 한국의 국가적 성범죄를 묶어서 분석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저도 많이 고민을 합니다. 일본의 수정주의자들은 일본군의 가해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한국군의 만행, 특히 베트남 전쟁시의 민간인 학살이나 성폭력 사실을 자주 거론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당시 일본 정부도 북폭을 비롯한 미군의 베트남 정책을 적극적으로, 누구보다도 빨리 지지하여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967년에 이루어진 베트남에서의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법정, 소위 러셀법정은 미국의 베트남 침략의 죄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공범성을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했던 것입니다. 수정주의자는 가해책임의 상살을 위한 '비교'에만 집중하고 베트남 전쟁시 한미일의 '관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는데 저는 이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관계라고 할 때 저는 시간적인/통시적인 관계와 공간적인/동시대적인 관계의 두 측면을 통합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전쟁시 한국군'위안소'는 일본군, 만주국군 장교의 계보가 국군으로 계승되었던 사실을 제외해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일본군/한국군의 인적 연속성으로 인해 일본군국주의의 제도화 성폭력이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재현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측면이 파시즘과 반공주의에 유래되는 것인지, 혹은 근대의 군대에 공통된 일반적 특징인지를 검토하는 것-사회주의국가의 사례도 보면서-이 다음 단계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만 저로서는 역사연구자로서 이런 폭력의 사실들을 발굴하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폭력을 고발하여 왔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배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절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러셀법정이나 Q1에서 거론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의 경험은 더욱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관련해서 박노자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주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일본의 과거사청산과 현재 천황의 역할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난 2월10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천황이 사과해야 한다는 취지를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본 언론은 일제히 보도를 해서 반발하였는데 이 문제는 좀 더 다각적으로 검토를 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선대 천황이었던 히로히토에게 분명히 전쟁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황이란 지위를 계승한 현 천황은 이와 관련한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문희상 의장의 발언 중의 '전쟁범죄 주범 아들'인 현재 천황이 사과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공감합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혹시 천황 방한이 실현되면-퇴위 후에 갈 수도 있는데-이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화해'의 쇼로 연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일본에서 천황이 맡은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천황은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여 전쟁의 '희생자'를 '위로'합니다. 이런 행동을 천황은 책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책임이나 권리/의무 관계를 넘어선 그야말로 초연한 위치에서 수행하면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며 '국민 통합'의 환상을 연출합니다. 현재 천황은 아마 의식적으로 이런 기능을 맡아왔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였다고 봅니다. 일본 NHK의 여론조사 결과 79%의 일본국민이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이미지를 '전쟁이 없고 평화로웠던 시대'라고 본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실은 1989년이후의 헤이세이 시대는 헌법제9조가 금지한 해외파병을 일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기지국가'로부터 '파병국가'로 전환을 했던 새로운 전쟁의 시대였는데 말입니다. 천황은 2001년의 9.11사건 직후에 주일미국대사에 조의를 전하거나 2004년에는 당시 체이니 미 부통령에게 자위대가 이라 사람들의 행복에 공헌할 것을 원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하며 미국주도하의 일련의 '파병국가'로서의 일본의 군사행동을 지지 장식하여 왔습니다.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도 이런 천황의 기능을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천황을 아베 총리와 대항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의 이데올러기적 '통합'기능은 패전 후의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천황의 방한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지배의 최고 책임자였던 천황의 범죄를 면제할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박노자 선생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박노자가 정영환의 질문에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시사점들을 던지는 질문입니다. 일단 히로히토가 전범이라는 점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히로히토의 유명한 평전을 쓴 Herbert P. Bix 선생과 같은 원로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기도 하고, 전쟁 직후에 미군 쪽에서도 다수가 사실상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 면탈은 어디까지나 오로지 정치적 판단 (일본 보수 세력과의 새로운 유착의 시초)에 불과했으며 법률적인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 주범의 아들'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고 그저 팩트에 불과합니다. 네, 정영환 선생님의 우려를, 저도 공유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천황의 보수적 '국민 통합' 기능은 여전히 강하고, 거기에다가 한국에서 정치적 '한일 화해 쇼'를 연출하려 하는 정객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있다는 겁니다. 일본과 약간 다르지만, 한국의 지배층은 외교 문제에 대해 상당한 분열상을 보입니다. 지금 집권 중인 자유주의자들은 남북 화해, 협력에 집중하면서 과거 오바마 정권이 강조했던 '미-일-한 삼각 동맹 관계"에는 다소 소극적입니다. 동맹이라면 한-미 동맹 정도만 생각하고 '삼각' 동맹까지는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듯합니다. '삼각' 동맹이 남북화해 사업에 핵심적 역할을 할 중국에 그다지 반갑지 않기도 하고, 또 자유주의자들에게 투표하는 사람들의 상당수에게 그 이미지가 전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정계의 한 분파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자한당 등이 대표하는 극우적 경향의 여러 계파들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특히 군대나 특수국가기관(첩보기관 등)에서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도 극우들의 의중을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극우파가 절대 반대하는 이석기 전 의원의 사면 등을, 자유주의 정권은 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극우파 같은 경우에는 미-일-한 삼각 동맹의 지지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하거나, 레임덕에 빠진 자유주의 정권이 극우파의 눈치를 심하게 보게 되면 '천황 반한' 쇼와 거기에 따르는 '화해' 쇼를 얼마든지 연출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쇼는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입니다. 아직 배상도, 제대로 된 국가적 레벨의 사과도, 재발 방지 보장도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화해' 쇼는 그제 서경식 선생님의 표현대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불과합니다. 이러 가능성을 한국 사회 운동 진영이 염두에 두고, 미리 그 반대에 대한 확연한 의사를 정계와 사회에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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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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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한국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 미결 과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전망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간에 극적으로 타결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12.28 합의)가,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거쳐 사실상 무용화(無用化)되었다. 이제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재협상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이어 강제동원피해배상문제로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 한국 정부가 어떠한 방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대두된 1991년부터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취해온 제반 조치들과 12.28 합의 및 합의에 대한 국내의 비판 내용을 사실관계 위주로 정리해보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2.28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의 조치사항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그 이전까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일본군‘위안부’ 피해문제가 한·일 양국에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같은 해 12월 김학순 등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2004년 12월 일본최고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확정) 이 문제는 한·일 외교당국간의 실무 회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결국 정상회담의 의제에도 포함되었다. 한국 정부는 1992년 1월부터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강구해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자체진상조사를 거쳐 7월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993년 3월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스스로 구제한다는 방침에 따라 피해자 1인당 500만 원을 지원하였다. 그해 6월에는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매월 일정액의 생활안정지원금과 의료비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과 1993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이하 고노담화)를 통해 구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담화내용에 피해자 배상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입장이었다.[1]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 총리에 취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나타내는 조치로서 민간 기금을 통한 ‘위로금’(償い金, 한국에서는 통상 위로금으로 번역하나 기금의 홈페이지 한글판에는 ‘사과금(atonement money)’으로 되어 있음) 지급 구상이 담긴 「평화우호교류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95년 6월 14일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広三) 관방장관의 사업내용 발표에 이어,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약칭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었다. 기금은 1년 간 모금활동을 펼친 후 1996년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에게 일본 총리의 사과서한과 1인당 위로금 200만엔 및 300만엔 범위내의 의료·복지 지원금(일본 정부 예산)을 전달하는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측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이 제안에 대해, “당사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2]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강력한 반발과 뒤이은 국내 언론들의 비판으로 곧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대협과 다수의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책임자 처벌 ▲정부 배상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외교부는 일본 외무성에 한국의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화를 통해 이들의 요구가 수용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1998년 3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기금 방식의 문제해결을 고집하자 앞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피해자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 측이 제시한 위로금(200만엔)보다 많은 액수의 지원금을 자체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외교부는 정대협과의 협의를 거쳐 피해자들이 기금의 위로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토록 한 뒤, 그 해 5월 피해자들에게 1인당 3,800만원을 지급하였다. 3,800만원은 정부예산 3,150만원과 정대협 모금 650만원이 합쳐진 금액이다. 기금 측 돈을 이미 받았거나(7명) 돈을 받기 위해 각서 제출을 거부한(4명) 피해자들은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추후 일본의 기금 측 인사는 총 61명의 한국 측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이중 1명은 ‘배달사고’로 돈을 수령하지 못해 실제로는 60명에게 전달), 이를 확인할 방도는 없다).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체지원이 이루어진 후에도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였으나,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반복하면서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2005년 8월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하였다.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 논의를 위한 민관공동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 국무총리, 이용훈 변호사)가 개최되었으며, 위원회는 회의 종료 후 배포된 보도 자료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청구권협정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자, 2006년 7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109명은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피해자의 배상청구권 소멸 여부와 관련해 외교통상부장관이 청구권 협정상의 양국 간 분쟁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되었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외교통상부장관의 행정 부작위가 위배된다는 결정(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을 내림(2006헌마788)으로써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헌재 판결 후 외교부는 2011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외무성에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상의 분쟁해결을 위한 외교협의를 요청하였다. 일본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접견 석상에서, “이웃나라인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가 있어야 한다”면서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하였다.[3] 그러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반복함으로써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 일본 외무성은 2014년 2월~6월에 걸쳐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고, 6월 20일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고, 고노 담화는 한·일 간 정치협상의 산물이었다”는 검증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피해자들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대통령 취임 이후 1년이 넘도록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양국 외교당국은 경색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닌 다른 현안도 함께 다루는 ‘국장급 실무협의’를 개최키로 의견을 모았다. 2014년 4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총 12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실무협의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방안에 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게 되자,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보국장 간 고위급 협상이 개최되었다. 수차례 협상 끝에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2015년 12월 28일 양국 외교장관이 「일본군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에 관한 합의」를 발표하게 되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해온 일본 정부를 상대로 마침내 한국 정부가 새로운 해결책을 도출해낸 것이다. 12.28 합의, 화해·치유재단 및 그에 대한 비판 12.28 합의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마음 표명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추후 10억 엔으로 결정)을 거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 시행 ▲앞의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전제하에 양국 정부는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 ▲한국 정부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 한국 국내에서는 정대협 등 피해자 지원단체를 중심으로 비판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다수의 언론도 비판에 동참하였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협상주체가 되어야 할 피해자가 협상과정에서 배제된 점 ▲그간 피해자들이 계속 요구해온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점 ▲일본 정부가 거출한 금액이 너무 적다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합의에 따라 2016년 7월 28일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였고, 일본 정부는 8월 31일 10억 엔(약 108억 원)을 재단에 송금하였다. 재단은 피해자 치유 사업으로 2017년 12월말까지 생존 피해자 47명 중 34명에게 각각 1억원, 사망자 199명 중 58명의 유가족에게 2,000만 원을 지급하였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에도 12.28 합의와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같은 해 7월 31일 외교부에 12.28 합의를 검토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이하 ‘위안부’ T/F)가 설치되었다. ‘위안부’ T/F는 5개월여의 검토 작업 끝에 12월 27일, ▲12.28 합의는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 사죄, 금전적 조치 등 면에서 과거보다 진전된 내용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발표로 이루어진 합의의 형식과 성격, 일본 측 구도대로 합의가 이루어진 점, ‘최종적·불가역적’ 표현, 소녀상 관련 언급 등이 한국 내에서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합의에 따라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 및 비판 자제 등)를 피해자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돈의 액수에 관해서도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하였다는 비판적 결론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T/F의 검토결과에 대한 후속조치로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위안부합의 처리 방향에 관한 정부입장」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 엔은 전액 한국 정부 예산으로 충당 ▲‘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 방안 모색 ▲생존자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2015년 ‘위안부’ 합의로는 진정한 문제 해결 곤란 ▲그러나 일본 정부에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방침 ▲과거사 문제의 지혜로운 해결과 한·일 미래지향적 협력, 노력, 병행 등의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9월 25일 뉴욕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혜롭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함으로써, 정상 차원에서 재단을 정리하겠다는 입장을 일본 측에 전달하였다. 외교부의 2018년 1월 발표에 대한 후속조치로 여성가족부는 같은 해 11월 21일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통해 재단사업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2018년 10월 말 기준으로 57.8억원이 남은 재단의 잔여기금은 7월 양성평등기금 사업비에서 마련된 103억원(일본이 재단에 송금한 10억 엔에 해당되는 금액)과 함께 일본군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합리적인 처리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9년 1월 21일 재단에 대한 허가가 취소되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이 12.28 합의를 착실히 이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재단 해산은 한·일 합의에 비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하였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선택지 2018년 1월 강경화 장관이 천명한 대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재협상을 배제한 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능한 선택지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일본을 압박하여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토록 하거나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들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국내적 조치를 성의껏 이행해 나가는 방안 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경화 장관은 지난 2월 25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인권이사회(UNHCR)에서의 연설을 통해,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에 관한 소식을 전한 뒤 “전쟁 수단으로 벌어지는 성폭력을 철폐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피해자, 생존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며 이들이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강 장관의 연설은 일본 정부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일본의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菅義偉) 관방장관은 2월 26일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한 한·일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책임을 가지고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으로도 유사한 공방이 계속될 것이다.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한·일 관계와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정치상황 등을 고려할 때, 국제사회의 여론 환기를 통해 일본이 스스로 새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토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성사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일본이 이처럼 반발하더라도 현재 일본 정부의 로비로 ‘대화를 전제로 한 보류’라는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는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계속해서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전시 하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인권침해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을 국제 사회가 공유토록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정부의 공개적인 지원 하에 추진되었던 이 사업은 12.28 합의 이후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민간사업의 성격으로 전환되었으나, 12.28 합의가 무용화된 만큼 외교부, 여가부 등 관련 부처가 다시금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국내적인 조치이다. 피해자들이나 지원단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일본 측의 성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결방안 가운데 국내적으로 가능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의 예산이건 일본 측이 제공한 돈이건 그간 상당한 금액이 피해자들에게 지원되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금전적인 지원은 피해자들도 원치 않을 것이며, 사회적으로도 지지를 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전적 지원보다도 피해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겠지만, 정부가 피해자와 지원단체를 만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해 피해자들이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협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시민모임 등 5곳의 시민단체와 몇몇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립 일본군“위안부”역사관(가칭) 설립을 위한 전국행동’을 결성하였다. 국립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에 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혼재되어 있는 만큼[4],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스물 한 분 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면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그저 우리의 아픈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에 천착해 왔다. 이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역사적 교훈으로 기려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각과 접근 방식을 서서히 바꾸어 나갈 때가 되었다. 각주 ^ 외교부, 『일본개황』, 152쪽, 2015 ^ 朝日新聞, 1995.6.15. 朝刊, “當事者の要求ある程度反映, 韓國外務省が評價” ^ 세계일보 인터넷판, 2013.2.26., “朴대통령 '日, 역사직시하며 과거상처 치유 노력해야'” ^ 『여성신문』, 2019.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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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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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필리핀에서 일본 점령기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필리핀 국민들의 인식 속에 그다지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 필리핀의 언론들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나 요구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2017년 12월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진 필리핀 ‘위안부’ 동상을 방문했을 때에도 주위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동상의 의미를 물었더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92년 핸슨(Maria Rosa Henson)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최초로 대중 앞에서 증언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증언 이후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어두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에는 약 1,000여 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그들 중 174명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공식적으로 증언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사망했고 일부 생존자들은 두 개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그 맥락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경험과 일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인권 유린과 전시 성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의 무게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위안부’ 피해 사실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피해자들의 다양한 인터뷰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고, 또한 좀 더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과 재현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핸슨의 증언과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Comfort Woman: Slave of Destiny』, 1996)일 것이다. 핸슨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출생부터 성장배경, 그리고 ‘위안부’ 경험과 그 후의 생활 등 험난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필리핀 ‘위안부’ 문제의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 한다. 소녀 마리아의 ‘위안부’ 이야기 핸슨의 엄마인 줄리아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14살 어린 나이로 지주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줄리아가 지주로부터 겁탈을 당해 낳은 아이가 바로 핸슨인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출생은 지주의 집에는 비밀이었으며, 지주인 마리아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남몰래 돈을 보내 마리아와 그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마리아는 가족을 위해 자기의 삶을 희생한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엄마 또한 마리아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다. 마리아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라도 돈을 보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며 총명한 소녀로 자랐다. 마리아의 학창시절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웃에 있는 병원의 의사이자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그 모델이었다. 그 의사는 마리아를 볼 때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니 꼭 의사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마리아의 삶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14살이었던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닐라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마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 시골 한 동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동굴 생활의 어려움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본군의 점령지가 된 마닐라로 다시 돌아왔다. 마리아의 삼촌들은 생계를 위해 인근에 있는 과거 미군기지에서 땔감을 모아다가 파는 일을 했다. 1942년 2월 마리아는 일을 나서는 삼촌들을 쫓아 땔감을 모으러 나갔다. 미군기지 인근에 도달하여 땔감을 줍던 마리아는 일본군 병사 2명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마리아를 겁탈하려 했고, 마리아는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때 일본군 장교 한 명이 나타나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꾸짖었다. 마리아는 그 장교가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마리아를 겁탈한 후 두 병사에게 넘겨주었다. 두 병사는 차례로 마리아를 겁탈한 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떠났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던 인근에 사는 농부가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다. 이틀 후 회복된 마리아는 철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얘기하니 엄마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2주가 지나고 마리아는 엄마의 허락도 없이 다시 이웃들을 쫓아 땔감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마리아는 함께 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땔감 줍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또다시 일본군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일전에 마리아를 최초로 겁탈한 장교도 있었다. 그는 다시 마리아를 붙들어 일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탈하고 떠났다. 그 일을 알게 된 마리아의 엄마는 자신의 고향으로 마리아를 데리고 떠났다. 마리아가 새로이 머물게 된 곳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팜팡가 지역 앙겔레스 인근 숲속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마리아는 엄마와 함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삼촌은 비밀리에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조직(Hukbalahap, 항일국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 집에서는 게릴라 대원들의 회의가 자주 열렸다. 자신을 겁탈한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이 컸던 마리아는 곧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주로 마을로부터 게릴라 대원들이 쓸 음식과 약 그리고 옷가지 등을 모아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그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함께 부르던 게릴라 대원들의 노래 가사 중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고, 우리의 여자들을 겁탈한다”라는 대목이 나올 때면 마리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1942년 4월 미군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호주로 철수한 후, 필리핀 사회는 일본군과 마카필리(Makapili)라고 불리던 일본군 앞잡이들의 횡포로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게릴라 조직의 연락책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4월 어느 날 마리아는 다른 게릴라 대원과 함께 보급품을 숨긴 수레를 끌고 일본군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수레를 수색한 일본군 초병은 마리아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일행을 다시 불러 세워 마리아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보냈다. 그들은 마리아를 일본군이 거주하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그 막사는 과거 마을의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건물 2층으로 데려가 문도 없이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방에 넣었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일본군 막사에는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여섯 명의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날부터 오후 2시경부터 저녁 10시경까지 줄지어 들어오는 일본군 병사들의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12명씩 짝을 지어 오는 병사들을 상대하고 나면 30분씩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성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상대 여자에게 폭력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매일 마리아는 20~30명의 일본군 병사를 상대해야 했다. 병사들이 오지 않는 오전에는 칸막이도 없는 막사 한쪽 물가에서 병사들이 훔쳐보는 가운데 몸을 씻고 빨래를 해야 했다. 매주 수요일에는 검진을 위해 의사가 방문하는데 대부분 일본인 의사였고, 가끔 필리핀 의사도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생리하는 며칠 동안 쉴 수 있었지만,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마리아는 그런 휴식도 없었다. 마리아는 병원 건물 막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정미소로 사용되던 건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는 장교 몇 명이 찾아와서 여자들을 데리고 지주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겁탈한 후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거듭하던 마리아는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하루는 하혈을 많이 해서 의사에게 검진을 받으니 태아를 유산한 것이라고 했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이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의사의 말을 마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매일 밤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우연히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마리아의 집이 있는 마을이 게릴라 근거지로 밝혀져 일본군이 습격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리아는 막사 인근을 지나던 사람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마을에 전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이미 모두가 떠난 것을 알았고, 마리아가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마리아는 모진 구타를 당해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인근 마을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들이 마리아가 있던 일본군 막사를 습격했다. 그들은 탈진해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데리고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길가 어두운 곳에 남겨두고 달아났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마리아를 인근에 살고 있던 마리아의 이모가 알아보고 엄마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도록 했다. 그때가 1944년 1월이었다. 그 날은 마리아가 일본군에 붙들려 ‘위안부’ 생활을 한 지 9개월 만에 자유를 얻게 된 날이었다. 상처받은 삶, 무거운 기억 돌아온 마리아는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2달 만에 정신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겁탈과 폭력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머리가 모두 빠져 마리아는 언제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말을 더듬고 또한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증상은 지속되었다. 마리아의 엄마는 세탁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빨랫감을 가져오던 도밍고라는 남자가 자주 들렀다. 엄마는 남자에게 공포심이 있는 마리아가 도밍고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리아를 설득하여 서로 사귀도록 했다. 마리아는 도밍고에게 자신이 일본군으로부터 겁탈을 당했다고 고백했지만, 차마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일은 오직 마리아와 엄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마리아는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도밍고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 도밍고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반정부 게릴라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둘과 아들 하나는 오로지 마리아의 책임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근 담배회사에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마리아는 1990년 6월 6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에서 일했다. 1992년 6월 어느 날 핸슨 할머니는 라디오에서 일본군 점령 시기에 있었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송 끝에 피해 당사자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그 광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점차 그동안 마음속 깊이 쌓아 놓았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핸슨은 방송국에서 알려준 주소로 연락해 1992년 9월 10일 ‘위안부’ 대책위원회 관계자를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대책위원회 관계자의 설득과 또한 자신처럼 무거운 기억을 짐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9월 18일 핸슨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폭로했다. 그 후 핸슨은 국내외적으로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활동에 용기를 얻은 다수의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1995년 말 핸슨은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을 필리핀 한 언론 기관(PCIJ)에 가지고 갔다. 그녀의 기록이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판단한 그 기관에서 이를 편집하여 1996년에 핸슨의 자서전으로 출판했다. 자서전 말미에 핸슨은 “내가 죽기 전에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핸슨은 자신이 부르짖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97년 8월 18일 69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기억의 소환과 재현 그리고 역사 핸슨의 증언과 자서전은 필리핀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소환하여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필리핀 ‘위안부’ 문제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외침과 함께 영화나 기념비 등으로 재생산되어 대중들의 인식 속에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 기억에 대한 소환과 재현은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94년에 필리핀에서 개봉된 영화 <‘위안부’ : 정의를 위한 외침>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최초의 영화였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게릴라의 활동이 특히 부각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게릴라 조직이 일본군을 응징하고 ‘위안부’를 구출해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주제가 ‘위안부’에 관한 것이지만 그 초점을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시 폭력과 인권 유린의 진실보다는 일본군에 대한 집단적 저항과 해방에 두고 있다. 2000년에 개봉된 또 다른 영화 <마르코바: 게이 ‘위안부’>는 마르코바라는 한 게이의 고백을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에 게이라는 다소 드라마틱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필리핀의 유명 배우 부자(父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대중적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다수 수상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마르코바가 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역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일본군 점령기에 클럽 무용수로 일하다가 동료 게이들과 일본군에게 겪게 되는 수모를 다루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는 핸슨의 자서전을 떠오르게 하는 정미소, 저택, 그리고 저항과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필리핀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들의 증언 전반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 이어질 여지를 남겼다. 필자가 필리핀 사람들과 ‘위안부’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 일부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라는 무거운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필리핀에서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들은 기억의 소환과 재현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필리핀 사회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와 보상을 위한 외침이 그다지 대중적 공감을 사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2017년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의 작가와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동상 제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때야 비로소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느끼고 동상에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은 “비탄”(grief)이었다. 즉 피해자들의 슬픔, 고통 그리고 실망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동상의 얼굴에 묘사했다고 했다. 그러한 감정은 단지 가해자인 일본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과거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오늘날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그들의 정의를 위한 외침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상에 표현했다고 했다. 마닐라만 산책로에 세워졌던 필리핀 ‘위안부’ 동상은 2018년 4월 27일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철거되었다. 필리핀 언론에서는 ‘위안부’ 동상의 제작 배경과 일본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력,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필리핀 정부의 태도 등, 다양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위안부’ 동상 제작을 의뢰한 단체는 중국계 필리핀 사업가가 만든 뚤라이 재단이며, 이는 필리핀보다 ‘위안부’ 문제가 더 심각한 중국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재현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역사 쓰기의 과정이다. 파편적 기억들이 소환되어 모아지고, 또한 기념비와 동상 그리고 책이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나 현재를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비록 복잡한 국제관계와 국익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외침에 울림이 적을지라도 ‘위안부’ 문제가 잊혀지지 않고 후세에 기억되기 위한 올바른 역사 쓰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