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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4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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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씨가"나는 일본군의'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나는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아, 역시" 하고 탄식했다. 약 이십 년 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이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전쟁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전장에서 여자나 아이들을 발견하면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필요 없어지면 연못이나 하천에 내버린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학순 씨의 증언이 있고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던 1994년 5월 4일, 일본의 나가노 시케토 법무대신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는 고노담화를 뒤엎는 발언을 했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5명과 그 가족들이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나는 일본을 찾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김학순 씨가 1994년 10월 초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인은 입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한 입으로 사죄하면서도 다른 입으로는 '위안부는 돈을 벌러 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나라다" "일본이 경제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와보니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원내 집회 당시, 의원회관 앞에 버티고 앉은 작은 몸집의 김학순 씨는 의연했고, 그 모습에서는 고상함마저 느껴졌다. 그 후로도 나는 학순 씨에게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알려 드리기도 했다. 1997년 1월 1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7명의 피해자에게 비공개로 아시아여성기금이 지급됐다. 국민기금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찬반이 분분했고, 나는 그 정도 결과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시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후 이용수 씨가 "김학순 씨가 화가 났으니 만나러 오라"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다. 나는 3월쯤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함께 병문안을 위해 김학순 씨 댁을 방문했다. 그러자 학순 씨는 첫 마디부터 "왜 양측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느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정말 그렇네요. 죄송합니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학순 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보세요. 문옥주가 죽고, 강덕경이 죽고, 다음은 나일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말씀 마세요. 100살, 200살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라고 답했다. 나는 카스텔라, 네슬레의 골드 블렌드, 매실장아찌를 선물로 들고 갔다. 학순 씨는"나는 커피는 안 마시지만, 매실장아찌는 좋아해"하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학순 씨, 김복선 씨, 이용수 씨 등 총 다섯 명이 학순 씨 댁에서 떠들썩하게 저녁 식사를 요리해 먹었다. 학순 씨와 복선 씨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같이 등걸잠을 잤고, 다음날 학순 씨의 배웅을 받으며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나는 돌아왔다. 이후 6월에 한국에 갔을 때, 학순 씨가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김복선 씨와 함께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학순 씨가 매실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해서 가다랑어포 맛, 차조기 맛 등의 매실장아찌를 가져갔다. 학순 씨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걸 하고 있으면 편하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간 매실장아찌를 몇 개나 드셨을까……. 8월에 한국에 갔을 때 김복선 씨와 다시 한번 병문안을 하러 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교회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병세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한국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12월 16일, 학순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항공권을 구해 한국으로 갔다. 당일에는 김복선 씨 집으로 갔고, 다음날 김복선 씨, 문필기, 김윤심, 김은례 할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인 아산병원으로 갔다. 이미 와 계신 할머니들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려서 울고 계셨다. 할머니들께 학순 씨는 의지할 수 있는 리더, 언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할머니들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이 끝나고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집회에 들러 화장장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학순 씨가 사용하던 수첩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노부카와가 왔다'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헷갈리셨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걸까'하고 생각했다. 뼈가 되어버린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으로 향했다. 학순 씨는 생전에 미리 마련해 놓은 묘지에 묻혔다.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을 담아 삽으로 흙을 뿌렸다. 저녁을 먹고 다시 서울로 버스가 향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와 이용수 씨는 약간 번화한 거리에 내려서 저렴한 숙소를 찾아 함께 묵었다. 학순 씨와 작별한 기나긴 3일이었다. 그 후, 도쿄에서도 추모회가 열려 김순덕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순 씨의 용기와 다정함을 그리워했다. 1년 뒤에도 망향의 동산에서 1주기 행사가 열려 일본에서 온 참석자들도 학순 씨를 회상했다.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많은 자매와 함께 있어 시끌벅적하겠지요. 옆에는 황금주 씨도 계시고, 친하게 지내셨던 김복선 씨도 계시고, 강순애 씨가 계시고, 배족간 씨도 계시고, 박복순 씨도 계셔서…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날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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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1 - 김학순 할머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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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김학순 할머니와 나 김학순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지 22년째, 또다시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새벽, 74세 나이에 한 많은 삶을 영원히 마감하셨다. 이승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마 한 맺힌 억울함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떠나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일본 정부의 사죄가 지금도 그대로인데 저승에서나마 마음 편하게 계시겠는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변해도 아주 나쁘게 변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보다 더 많이 우경화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2015년 12월 28일 그 사건이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발표가 나온 것을 보셨다면 할머니는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일본 정부는 우리들이 다 죽기 바라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분노에 찬 모습, 그 쟁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때리 듯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많은 젊은이들과 시민에게 일본군'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며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호소를 쉼 없이 하셨을 것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김학순 할머니가 생각나면 나는 천안 망향의 동산을 찾곤 한다. 거기에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잠들어 계시는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김학순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나 죽어도 무덤 찾아 줄 핏줄 하나 없어 쓸쓸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때 우리 강제동원 유족들은 약속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떠나시면 저희가 딸 대신 아들 대신 매년 찾아뵙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며 우리 유족들은 해마다 12월 16일 망향의 동산을 찾는다. 가끔 일본 시민들도 함께 김학순 할머니 묘소를 참배하며 눈물로 사죄의 절을 올리기도 한다. 올해는 더욱 김학순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최고위층의 정치인들이 식민지배로 저지른 범죄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우리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현실이 자꾸만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8월 14일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날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 일본군'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평생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 이모와 같은 연배셨던 할머니. 나는 내 어머니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들고 깨달았지만 내 어머니 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우리 고모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도, 우리 이모도 그 때 처녀들은 누구나 다 겪을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991년 내가 몸담고 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준비중이던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에 합류하셨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만났다. 처음 만난 김학순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집에도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할 수 있으면 언제나 혼자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이 만들어낸 모습인 것 같았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의 관료라는 작자들이 '위안부'는 없었다며 여러 차례 망언을 해댔다. 뉴스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김학순 할머니는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싶어 분노했다. 결국 그녀는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활동에 김학순 할머니는 적극 나섰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뒤이어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나섰다. 그해 6월 김학순 할머니의 행동에 용기를 얻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점령한 곳에는 여지없이 위안소가 세워졌기에,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피해자 포함) 등 각지에 퍼져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 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학계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시민들은 지원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과 진상규명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 정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93년 7월 일본정부는 정부대표파견단을 한국에 보내 5일 동안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했다. 또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강제징병·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경주에 내려가 회담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이날 김학순 할머니도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사과만 반복할 뿐, 제대로 책임질 생각도 제대로 보상할 생각도 없는 일본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였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가 법적으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라는 민간단체를 통해 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는 '조건부 사과' 원칙을 밝혔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분노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일본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국가의 자존심이나 명분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조건을 다는 모습이 또다시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 법정에 소송을 낸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민간인에게 기금을 모아 보상을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구걸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식이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기금 측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를 또 하나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기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6월 김학순 할머니는 도쿄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일본정부 측과의 대질신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했다. 이 자리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였던 내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 일본정부"라고 비판했다. 할머니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라고 강조했다. 할머니는 법원 출석 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증언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피해자·유족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다. 그 후에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한 소송에 참여하고, 각종 집회에 나가 증언하고,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을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참석을 하곤 하셨다. 증언을 하고 나면 보통 사례비로 2~30만원을 받으셨는데, 할머니는 5만원씩 봉투에 담아 주변의 '위안부' 할머니에게 나눠주기도 하셨다. 누가 돈이라도 조금 드리고 가면 혼자 쓰지 않고 할머니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셨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가 자주 만난 할머니는 황금주, 김상희, 강순애 할머니 등이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강덕경 할머니였다. 강덕경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오시길 바랐는데, 김학순 할머니는 가고 싶어 하시면서도 서울의 지인들이나 동대문교회의 지인들, 신앙 문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지 못하신 또 다른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공동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하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7년 2월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때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다녀오신 것이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많이 우셨고, 많이 괴로워 하셨다. 장례식장까지 다녀오신 후 할머니도 지병이 악화되어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과 목동병원을 오가는 중환자 신세가 되셨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싸웠다. 할머니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난생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만큼 두렵고 힘든 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그 길을 걸어 나갔다. 할머니의 옆에서 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알았다. 30년을 싸웠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2015년 12월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적당히 덮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기만적인 합의였다. '일본 정부가 갖은 망언과 망발로 사실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과연 한일 양국의 '12.28합의'를 보고 어떤 심정이 어떠셨을까.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왔지만 어느 순간 또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견고한 세상에 냈던 조그만 파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다. 진실의 힘은 강하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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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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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소.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종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김학순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임을 폭로했다. 아직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 울렁하다”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만천하에 알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그때의 아픈 기억을 얘기할 때면 스스로 진정하느라 한참씩 말을 멈추곤 하던 김학순.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나서 그동안 파렴치하게 발뺌해 온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수수방관해 온 한국 정부를 준엄히 비판한 김학순. 그녀의 이 용기 있는 증언으로 그때까지 뜬소문에 불과했던 일본군‘위안부’는 비로소 실체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사실인정과 공식사죄를 주장한 김학순. 그녀는 누구인가? 증언에 따르면,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짐을 싸 만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활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두 살 된 어린 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에도 의탁할 수 없었던 학순의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학순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의붓아버지와의 동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학순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겉돌았고 어머니와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기생집의 수양딸로 팔려간 김학순은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2년 정도 춤과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 권번을 졸업하고 17세가 된 김학순은 기생 영업을 위해 1941년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도착한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 군인들에 의해 군용트럭에 강제로 실려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밤새워 달려 도착한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그녀는 일본군 중위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몇 차례 도망쳐도 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모진 구타를 당해야 했다. 4개월 남짓 지났을까 군인들이 전투 나간 어느 날 빈틈을 타고 불쑥 찾아온 조선인 은전장수 덕분에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위안소를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김학순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이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며 중국을 떠돌다 1946년 6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콜레라에 어린 딸을 잃었고, 곧이어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 김학순은 남의 집 식모살이며 날품팔이 등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반세기가 다되도록 침묵하던 그녀는 어떻게 용감하게 나서서 증언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해 놓고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잡아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 속에 머물렀을 수도, 그리하여 ‘위안부’문제는 역사 저편의 먼지 속에 감춰지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증언 이전에도 ‘처녀공출’이니 ‘정신대’니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해방직후 미군정 하에서 한국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 명사들이 그 대응책으로 일본군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버젓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의 성을 언제든지 남성의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 나아가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은 오히려 몸이 더럽혀진 죄인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듣는 ‘귀’가 생기기까지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성장한 여성운동의 줄기찬 노력이 있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온 한국 여성운동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가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게임을 준비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을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아직도 기생관광으로 성적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라는 울분 속에서 교회여성단체는 기생관광을 ‘현대판 정신대’라고 규정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성 침탈의 역사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신은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끌려갔던” 그 기억으로부터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윤정옥 등은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발족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드디어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이 문제를 풀 결정적 고리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시 일본 총리에게 전시 강제연행자의 명부를 만드는 데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위안소는 민간업자의 단순한 상행위이며 군 위안부는 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대응하면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전면 부인했다.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의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최초로 대중 앞에 나섰던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반세기 만에 피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한국의 대중들 앞에서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진실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하여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증언 이후 김학순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나서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인권운동가로서 남은 생을 이어갔다. 8월 14일 김학순의 용기 있는 증언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증언 이후 같은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200명 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증언의 연쇄는 해외로까지 이어졌다.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아시아 피해 국가들에서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폭로가 잇달아 나왔다. 이로써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김학순의 증언에 탄력을 받은 진상규명운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과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의 연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또, 피해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김학순의 생생한 증언과 잇따른 움직임 속에서 더 이상 발뺌이 어려워진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군과 관헌의 관여와 동원에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반적인 책임은 민간업자에게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할 뿐, 법적 책임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거부해 왔다. 그나마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고노담화조차 부정하며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다. ‘김학순들’의 처절한 증언을 듣고서도 아베 정권과 일본의 우익들은 피해자들의 말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전시회에서 소녀상이 철거되자, ‘내가 소녀상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은 지 30년, 그녀의 용기에 의해 피해자의 말에 공감하는 열린 ‘귀’들이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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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힘없는 사람의 역사가 기억되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 사회정의교육재단 손성숙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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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사-사회과학 교과과정 지침에 2015년 한일합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합의에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 뒤에는 일본 정부의 열성적인 로비 활동이 있었다. 역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에 맞서 올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약자와 피해자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뛰고 있는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의 손성숙 대표를 만나 미국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응, 그리고 ‘위안부’ 역사 교육의 현황을 들어보았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 발의안부터 교재 개발, 교사 워크숍까지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웹진 결 독자 여러분께 사회정의교육재단을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희는 과거 부당하게 외면당한 역사를 교육을 통해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비영리 교육단체이고요, 2017년 다인종 멤버로 구성된 활동가와 현직교사들이 함께 모여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저희가 다루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주제이고요, 이외에 731부대 문제와 같은 의학 잔혹행위, 아시아인들의 초기 미국 이민 역사와 같이 크게 3개의 주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어요. 모두 식민지 역사와 연결된 문제들이죠. Q. 2017년에 재단을 설립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교육에는 항상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전직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이중언어 교사거든요.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 교사로 한글 이중언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죠. 교육에 대한 관심이 ‘위안부’ 이슈로 연결된 계기는 세 가지예요. 우선 저희 할머니께서 김학순 할머니보다 2년 전에 태어나셨어요. 어려서 ‘위안부’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 우리 할머니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공감과 채무감을 항상 느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2015년에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정확한 ‘위안부’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실감했어요. 사실 그 합의 직전 10월에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 ‘위안부’ 역사를 공립학교 10학년 과정에서 가르칠 것을 제안하는 발의안이 상정되고 통과됐잖아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두 달 뒤에 말도 안 되는 그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잘못하면 이번에도 묻히는 게 아닌가 싶어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그리고 이게 재단 설립을 서두른 이유가 될 텐데요. 2016년 12월에 일본 지바 시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에서 학생 미술전이 있었어요. 학생 출품 작품 중에 2015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작품이 두 개 있었는데요. 그걸 구마가이 지바 시장이 보고 이듬해 봄에 그 학교의 시 보조금을 삭감해버렸죠. 이 사건을 보고 지바 조선학교를 조금이라도 빨리 돕고 싶었어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한 두 학생에게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지지하고 싶었고, 그 두 학생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한 지바 조선학교에게 혹시라도 미안해할까 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2017년에 조금 급하게 재단을 설립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바 조선학교에 작은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Q. ‘위안부’ 역사 교육을 위한 교재까지 직접 만드셨죠. 2015년 10월에 발의안이 통과되긴 했지만,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샌프란시스코 교육시스템 안에서 실천이 되려면 부모님들의 지지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2016년 1월에 학부모님들과 캠페인을 했어요. ‘발의안을 지지한다. 빨리 교실에서 가르쳐달라’는 내용으로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 편지를 보낸거죠.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샌프란시스코 통합교육구에서 ‘가르치겠다, 그런데 관련 자료가 너무 없으니 좀 구해달라’고 요청을 해왔죠. 그래서 저 나름대로 모아서 2016년 말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점검해서 학습안을 만들고 커리큘럼을 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는지 2017년 봄학기가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통합교육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위안부’ 역사를 같이 가르치라고 제안했는데, 보통 샌프란시스코 교육 커리큘럼에서는 그걸 봄학기에 많이 가르치거든요. 발의안이 2015년에 통과되었는데 2016년 봄학기도 넘기고 2017년 봄학기까지 넘기게 되다 보니, 그냥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7년 말부터 자료를 모아서 만들기 시작해서 2018년 3월에 교재를 출간하게 된 거죠. Q. 교재는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교사용과 학생용이 있어요. 교사용 지침서는 세 부분인데, 첫 부분은 ‘위안부’ 역사의 배경이에요. 한국에서 시작해서 다른 나라로 퍼져간 ‘위안부’ 운동사와 기림비 건립 및 제작 과정을 다룹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사료, ‘위안부’ 관련 1차 문서를 소개하고, 세 번째 부분에 학습안과 활동지를 담았어요. 학습안은 샌프란시스코 현직 교사들이 직접 만들었고, 활동지는 학부모님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학생용 교재에는 교사가 보는 학습안 부분만 빠져있습니다. Q. 교재에 대한 현지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해요. 참 좋아요. 작년 4월에 교육구에 교재를 가지고 가니, 담당자가 직접 샌프란시스코 18개 공립 고등학교에 전부 배포했어요. 지금은 고등학교, 대학교 특강과 워크숍 등에 활용되면서 교재가 다른 여러 도시로 퍼지고 있습니다. 두 달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그 수업의 교수님이 저희 교재가 아주 잘 만들어졌다며 앞으로도 수업 시간에 활용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고무적인 반응이죠. Q. 직접 워크숍도 열고 계시죠? 네, 캘리포니아의 교육제도는 교사들의 자율 영역이 굉장히 커서, 중앙에서 무엇을 가르치라고 해도 교사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제안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위에서 아래로 전달은 됐으니, 이제 재단이 밑에서 위로도 일을 해야죠. 그래서 저희가 만든 교재로 직접 워크숍을 합니다. 교재를 그냥 드리는 것보다 워크숍을 하면서 몇 쪽에는 어떤 내용이 있고 몇 쪽에는 무슨 문서가 있다고 얘기하면, 교사분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잖아요. 직접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도 하는데, 워크숍에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교사들도 많이 오세요. 난관과 도움, 잊을 수 없던 순간들 Q.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설립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재단의 활동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움직임은 없나요? 저를, 저희 재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엽서는 받아요.(웃음) 확실히 미국에 있는 일부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손 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최근에는 어떤 단체가 프린스턴 대학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Princeton Institute for Asian Studies 라는 이름을 내걸고 ‘위안부’ 자료를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써서 캘리포니아 전역에 배포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저희가 할 일이 더 많아졌구나,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참 역설적인 게 뭐냐면요, 일본 수정주의자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점 더 커져요. 물론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들이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오사카 시장이 샌프란시스코 시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지는 것을 적극 반대하더니 작년에 결국 1957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오사카 자매 도시 결연을 파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죠. 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음으로 양으로 다들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반대를 해도 결국은 도움이 되고, 도와주시는 것도 도움이 되는 거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워크숍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재미난 에피소드는 아니고, 좀 마음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작년 가을이었죠. 한 일본인 교사가 워크숍이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하시는 말씀이, 본인이 일본 사람이라 약간 걱정을 하셨대요. 일본의 전범 책임이라든가 일본인 혐오라든가 한일 양국의 대립 같은 것이 언급될까 걱정했는데, 막상 와서 들어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육을 통해서 인권을 보장하고 전쟁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우리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자리여서 너무 좋았다고요. ‘위안부’ 문제를 좀 더 폭 넓게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본인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Q. 그 때 정말 보람이 크셨겠네요. 이 일을 하면서 감사와 보람을 느낄 때가 참 많아요. 지난 6월 19일에 세계 전시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정의기억연대에서 주최한 교사워크숍과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그곳에 콩고, 우간다 그리고 코소보 성폭력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오셨어요. 저희 발제가 끝난 다음에 그분들이 오셔서 교재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귀국해서 지침서처럼 쓰시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교재를 쓰신 교사 중에 크리스티나 탱이라는 분이 계신데요. 탱 선생님은 고등학생 때 우연히 ‘위안부’ 역사에 대해 알게 돼서, 만약 나중에 교사가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자신과 약속하셨대요. 그런데 진짜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되셔서, 그 약속을 지키고 계셨어요. 제가 만나기 몇 년 전부터. 이런 분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정말 감동을 많이 받고 큰 힘을 얻습니다. 가부장제, 전시 성폭력, 미투 운동 -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현실이다 Q. 미국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낯설 듯도 한데, 수업 후의 반응은 어떤가요? 고등학교 수업에 가서 직접 강의를 해보면, 아이들이 굉장히 세심하게 잘 들어요. ‘위안부’ 피해자들의 당시 연령이 학생들과 비슷해서 더 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아요. 수업에서 현재 벌어지는 여러 전시 성폭력 문제도 함께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정치에 국한된 문제로 학생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는 연결되는 주제가 많은 것 같아요. 가부장제라든가, 식민지라든가, 제국주의라든가, 여성혐오라든가.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 나라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보니, 우간다나 콩고에서는 전시 성폭력 문제에 접목을 시킬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나라에서도 현재의 문제에 ‘위안부’ 문제를 접목시켜서 교육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가르치라고 제안하죠.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가르치도록 제안하고요. 실제로 둘 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막상 저희에게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요새는 미투 운동 그리고 성폭력, 그 다음에 샌프란시스코의 ‘위안부’ 운동 역사, 이런 것이 제일 많아요. 그러면 저희도 그분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이슈부터 시작해서, ‘위안부’ 문제 관련 사료처럼 기본적인 부분까지 함께 알려드리고 있죠. Q. 미국 내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과 같은 맥락에서 할머니들의 피해생존자로서의 증언, 고발과 그 이후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에 관심을 두고 있군요. 맞아요. 저는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90년대에는 미투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지만, 피해자 할머님들을 미투 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해요. 너무나도 불행하게 1990년대에도 고발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고발을 해야 하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분발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죠.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겪은 성폭력,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하고요. 미국은 다인종이 모인 나라이다 보니, 다른 나라 피해자들도 얘기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요. 자칫하면 한국 피해자한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 인권에는 관심이 없는 걸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피해자가 스스로 바로잡아가는 역사, 그 어마어마한 움직임과 함께 Q.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힘을 어디서 얻으시나요? 원동력이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면서 느끼는 보람, 감동이라고 할까요. 2017년 말에 갑자기 교재를 쓰게 되었는데, 너무나 많은 분들이 열정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건립 발의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킨 에릭 마 시의원, 기림비 작가 스티븐 화이트, 엘렌 위슨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고를 해주셨고, 교재 디자인해주신 분들은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개선점을 찾아 작업해주시기까지 했어요.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저희가 비영리단체이다 보니 사례금을 아주 작게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 두 분이 함께 학습안을 쓰셨어요. 나중에 이분들께 작은 사례를 하는데 정말 안 받으시려는 걸 우겨서 드렸어요. 많은 분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교육을 위해서 열성적으로 동참해 주셨어요. 저희 홈페이지에도 교재 안에 있는 나비 그림이 있는데요. 학습안을 쓰신 페이 콴이라는 교사분이 직접 그려주신 거예요. 정말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집단의 노력이에요. 저는 협업의 중요성을 진짜 믿습니다. Q. 앞으로 교육 이외의 활동도 더 확대하실 계획인가요? 저는 교육이면 돼요. 다른 것은 많이 부족하고요. 교육은 해왔던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거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교사들과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인데, 미국 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지식이 좀 협소한 것 같아요. 교사뿐만이 아니겠죠, 일본에 의해 강점당한 것, 한국전쟁이 있었던 것. 요 두 가지로만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나라가 굉장히 멋진 나라인데 말이죠.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 역사, 문화, 사회,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그런 것도 교사들한테 같이 알리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시겠어요. 우선, 저희를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중언어교사였고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모든 언어가 동등하게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듯이 모든 사람들의 역사는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기억되어서, 가진 자들만의 역사가 아닌 모든 이들의 역사가 교육될 수 있게,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저희 재단은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위안부’ 운동 역사는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그게 운동사의 맥락에서 보면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죠.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 이슈에서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주도해서 가해자 중심으로 서술되는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게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 사는 교포로서 이 움직임이 한국에서 시작되고 한국에서 이끌고 있다는 걸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고, 참 뿌듯합니다. 사회정의교육재단(Education for Social Justice Foundation, ESJF)은, 미국 학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등한시되고 있는 소수의 역사를, 교육을 통해 학생∙교사∙교수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탄생한 비영리 교육단체이다. 손성숙 대표는 15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1.5세대로, 언어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샌프란시스코 교육구에서 한글 이중언어 교육프로그램을 최초로 실시했다. 범아시아계 ‘위안부정의연대’(CWJC·2015년 10월 결성) 교육위 공동의장으로 ‘위안부’ 교육 교재 만들기를 주도했고, 아시아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수의 역사’, ‘잊혀진 역사’를 다시 써 나가고자 사회정의교육재단을 출범시켰다. 사회정의교육재단 홈페이지 http://www.e4sj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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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에세이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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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가 소개하는 얀 루프-오헤른,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 지난 8월 19일, 이 책의 저자 얀 루프-오헤른 여사께서 향년 96세로 영면하셨다. 굴곡진 인생을 용감하고 멋지게 살아낸 저자는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 글을 통해 루프-오헤른과 그녀의 책을 소개하려 한다. 루프-오헤른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네덜란드령이었던 자바섬을 점령한 뒤, 그곳에 살던 네덜란드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1944년 2월 26일, 수용소에서 17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여러 일본군 ‘위안소’들로 끌고 갔다. 19세였던 저자는 그 중 ‘칠해정’이라는 일본군 ‘위안소’로 이송되었다. 정확한 날짜를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저자가 손수건에 날짜와 동료들의 이름을 적어 보관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손수건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저자를 비롯해 일곱 명의 네덜란드 젊은 여성들은 약 석 달 동안 ‘칠해정’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저자가 당시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70세를 두어 달 앞둔 1992년이었다. 거의 50년 만에 입을 연 것이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50년 동안의 침묵: 어느 전쟁 강간 생존자의 특별한 회고록(Fifty Years of Silence: The Extraordinary memoir of a war rape survivor)』이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에는 수용소와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과정과 그 안에서의 일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일본군이 강제로 여성들을 데려가 ‘위안부’로 삼은 일은 없었다는 일본 정치인들의 주장 사이에서 이 책은 역사를 밝히는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경험을 공개한 뒤, 그는 같은 경험을 했던 네덜란드 친구들과 반세기 만에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 네 기사를 보고, 나는 회피하고 싶었어. ... 하지만 곧 너에게 감탄했어. 나는 아직도 자녀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단다. ... 나도 너처럼 당시 일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도 이전에 너처럼 내 경험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 그러나 혼자 이야기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나도 돕겠다고 결심했어.” 저자는 50년 만에 자바섬을 찾아, 자신이 다녔던 가톨릭계 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의 교사였고,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던 수녀님을 만나기도 했다. 그 수녀님은 수용소에 강제로 징발된 어린 여성들의 숫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자의 이런 만남은 활자뿐만 아니라 영상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저자가 일본군 ‘위안부’의 유일한 유럽인 증인은 아니다. 그가 나서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증인들이 등장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노령의 일본군 출신들과 만남이다. 일본군 ‘위안소’에 대해 당시에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냐고 그녀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군 시스템 일부였지요. 우리는 위안소가 군대의 사기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들었어요. 위안소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었지요. 그게 바로 전쟁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성은 전쟁에서 강간을 당하게 되어 있고, 강간은 우리의 권리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대답을 한 사람은 “들었다”고 하는 표현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은근히 회피하는 비겁한 화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병사들을 교육했던 일본군 지도부가 여성을 어떻게 여겼고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기도 하다. 일본군 출신에게서 이런 발언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저자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창녀였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창녀란, 혹은 성매매 여성이란 “금전적 대가를 얻기 위해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며 자신의 몸을 기꺼이 팔지만, 원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싫다’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1] 루프-오헤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들은 강제로 여성들을 끌고 갔다. 당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인신을 납치했고, 일본군 ‘위안부’는 납치 감금되어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전쟁 상황이지만 개인의 신체에 대한 이런 잔혹한 폭력은 엄연한 중범죄이다. 저자는 50년의 침묵을 깨고 나서게 된 배경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의 활동을 접하면서 우러나온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나는 ... 그들에게 팔을 뻗어 포옹하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나는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들을 유럽 여성들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네덜란드 소녀들도 겪었다. 유럽 여성이 나서게 되면, 일본이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두 번째 배경은 1990년대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이었다. 그녀는 그 전쟁에 관한 기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전쟁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강간 사건은 늘 가벼이 여겨진다. 내가 당했던 일이 과거사인 것만은 아니다.” 루프-오헤른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강간이 전쟁범죄임을 분명히 알리는 활동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나에게 가해졌던 잔혹 행위들이 더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내 입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전쟁 중에 군인이 자행한 강간도 범죄라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이 칠십에, 그녀는 새로운 소명을 가진 삶을 시작한다. 이후 그녀는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일본 당국이 일본군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운영했던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책을 쓰고, 인터뷰하고, 세계 곳곳에서 연설도 했다. 그 과정에서 큰 상도 많이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국민훈장을 받았고, 영국 여왕과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그녀가 살면서 거쳐 갔던 서구의 나라들은 그녀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을 주었다. 가톨릭 교황으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이 큰 상들은 그녀가 당했던 고통에 온 나라가, 온 교인이 함께 아파하고 슬퍼한다는 의미였다. 반세기 동안 아픔을 숨기며 지내왔던 그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손녀에게 오래된 사진첩을 보여주며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자바섬에서 4대째 정착해 살던 네덜란드계 집안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산과 강을 쏘다니며 자란 이야기, 할아버지와 부모님과 집안일을 돌봐주는 인도네시아인 일손들로부터 받은 큰 사랑과 잘못했을 경우 받은 따끔하고 엄격한 가르침에 대해 재미나게 들려준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살던 귀한 여성들을 일본군들이 물건처럼 짓밟았다고 말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루프-오헤른은 위안소에서 풀려난 직후, 한 영국 군인과 연애하며 다친 몸과 마음을 조금씩 달랠 수 있었다. 연인에게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연인은 그녀에게 “사랑해, 얀. 너는 아름다워”라고 했는데, 당시 그녀에게는 그 말이 너무 중요하고 필요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만난 지 두 달 만에 약혼했고, 영국으로 가서 결혼했다. 영국에서 14년을 산 뒤, 부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 거기에는 여러 사연이 있었지만, 이주하면서 “네덜란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 비밀을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도 있었다고 한다. “강간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전히 수치심으로 떠안고” 살았던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해주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비단 일본군 성노예였던 3개월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50년간 침묵해야 했던 상황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매일 저녁 어두워질 무렵이면 엄습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떨었고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온전히 평온하게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결혼 후 두 딸을 얻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겉보기에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그 시절의 고통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평생을 통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이 공통으로 토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들뿐 아니라, 전쟁을 겪으며 신체적 정서적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평생을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필자의 집안 어른 중에는 전쟁 기억의 고통을 평생 홀로 견디시다가 임종 즈음 병상에서야 비로소 말씀하신 분들이 계셨다. 공식기록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마무리되지만, 저자와 같은 피해자들에게 몸과 마음의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사신 분들의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 휴전협정이나 평화조약을 통해 문서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전쟁이 마무리될 수는 있겠지만, 각 개인에게 남은 상처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이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미래에 평화가 확고하게 자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거슬렸던 부분은 저자의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서술 중 몇 부분이다. 저자가 가까이 접했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주로 가사를 위해 고용되었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가족과 같이 생각했고, 책에서도 깊은 애정과 호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선량한 어린 네덜란드인의 관점에서 가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인 입장에서는 네덜란드인을 마냥 호의적으로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인도네시아 상황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인도네시아인은 네덜란드 지배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 내내 일본인이 했던 반네덜란드 선전에 고무된 인도네시아인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했고, 심지어 우리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인도네시아인이 네덜란드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일본인의 선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시절을 “두 문화가 나란히, 또 조화롭게 공존”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런 저자의 생각에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어느 책도 완벽할 수 없다. 독자가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한계를 노출하는 진솔한 서술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기 시대의 한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세련되게 포장하기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표현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제국주의가 가진 다양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18년에 이 책을 내면서, 역자 후기에서 저자가 “살아계시는 동안 이 책의 한국어판도 내놓게 되어 기쁘다”라고 했다. 일 년 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저자가 한국을 방문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회한이 든다. 저자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분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 8월 21일에 열렸던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저자는 영정 사진으로나마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분들과 함께했다. 용기를 내서 진실을 이야기해주신 얀 루프-오헤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얀 루프-오헤른님의 명복을 빕니다. 각주 ^ 수 로이드 로버츠, 『여자 전쟁』, 출판사 클, 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