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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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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자연스레 들어선 인권 변호사의 길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 독자를 위해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1973년에 변호사가 되었고, 인권 의식이 높았던 고(故) 카시와기 히로시(柏木博) 변호사 밑으로 들어가 많은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다른 분야에는 그리 의욕이 생기지 않았는데, 동기 변호사에게 스몬병 소송을 소개받고는 대규모의 약물 피해자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로 정신병원에서의 자의적 구금이나 학대 사건에 몰두했죠. 인권 변호사가 된 것은 받아온 교육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릿쿄대학이라는 미션스쿨 부속 중학교에 입학해서 쭉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대학은 이학부 물리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동기들은 주로 원자력 산업으로 진출했는데, 저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깨닫고 그 분야를 떠나면서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어버렸어요. 이후 인공지능 공학을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는데, 영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차선책으로 심리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가 밤에 영어 공부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쳐버렸죠. 그래서 취업 문제도 있고, 법학부 출신인 아버지께서 권하기도 해서 결국 법학부에 편입했습니다. 이후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발령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을 치렀습니다. 합격한 것은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984년 8월에 제네바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처음으로 참가했습니다. 유엔 경험이 있던 선배 변호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단법인 자유인권협회(JCLU)를 거쳐 국제인권연맹(ILHR) 대표로 참가할 수 있었죠. 인권변호사가 되고 한동안은 정신의료 관련 인권 활동에 몰두했는데, 1987년 정신보건법이 성립되어 시행되는 것을 보고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활동하면서 거의 ‘번아웃’ 상태가 되었거든요. 영국에서는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대학원(LLM 코스)에서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본 내의 인권 보장을 위해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알게 된 ‘위안부’ 문제 Q. 1992년에 유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셨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개인통보제도 관련 협약 비준 등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일본에 도입하려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와 관련된 유엔 인권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도입해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1992년 2월 17일, 비정부기구인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하여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s)”라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유엔에 조정을 요청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노예 금지 위반 뿐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강제근로협약 위반에 관한 조사를 요구한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되셨나요? 고(故)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 의원과 협력 관계가 있었는데, 1990년 경부터 모토오카 의원이 ‘위안부’ 문제에 힘을 쏟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관계 문헌을 많이 읽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조언을 해드리거나 모토오카 의원의 국회 질문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렬했던 반향, 반발이 더 큰 동기가 되다 Q. 유엔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당시의 반응은 어땠나요? 1992년 인권위원회(CHR)에서의 ‘성노예’ 발언은 제가 그때까지 유엔에서 했던 발언 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 정부가 먼저 환영의 발언을 해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 정부의 세자키 카쓰미(瀬崎克己) 대사가 이제까지 없었던 신중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발언 전 회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며 정보를 구하더군요. “제가 합니다”라고 답하니 굉장히 놀라워 했습니다. 발언자가 한국 측에서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모양입니다. 제 발언에 대한 당시의 응답은 최근의 일본 정부와는 완전히 달리, 성실했습니다. 세 번째로, 발언 직후 가장 유력한 유엔 NGO 중 하나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스태프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여성지위위원회나 인권소위원회의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 쪽에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웠던 반응은 마이니치 신문을 제외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이 보인 감정적인 반발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인 특파원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렇게 극단적이고 심한 반응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도 이상해서 요즘의 넷 우익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법률가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는 “나도 자격을 갖춘 변호사”라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연구해서 법적 논쟁을 해보자고! 어느 쪽이 법적으로 옳은지 유엔이 판단해 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이후 제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고, 유엔 활동을 일회성의 발언으로 끝낼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1994년 마침내 ICJ 보고서가 나왔을 때에는 ‘나도 법률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얼마 후, 모토오카 의원을 통해 재일조선인 단체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고, WCC(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한국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부터도 지원 요청을 받았습니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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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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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의 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제 해결에 다가가기 위해, 냉정하게 매진한 법률 연구 Q. 유엔에서 문제를 제기하실 때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성노예’라는 용어가 어떤 면에서 중요한가요? 유엔에서는 ‘국내법 위반’이나 ‘피해자가 걱정된다’ 등의 이유로는 발언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유엔 헌장이나 세계인권선언 등의 국제법 위반을 주장해야 합니다. 저는 할머니들의 체험담을 듣고 ‘내가 피해자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노예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성노예’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겁니다. 국제법에서 노예제가 일찍이 금지되었던 것은 법률가로서는 상식인데요, 많은 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까지 감수하며 노예제와 싸웠던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1926년 국제연맹이 노예금지협약을 채택했을 때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 제국은 비준을 약속했지만, 전쟁으로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금지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국제관습법이었다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입니다. 일본 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메이지 초기, 당시 일본 정부가 노예무역 금지를 이유로 페루 선박에 실려 가던 중국인 쿨리를 구출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이제 와서 노예제 금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유엔 국제인권위원회, 인권소위원회, 국제사법재판소,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UNAI), 특별보고관도 결국 같은 판단을 내렸죠. Q.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활동하시면서, 가장 주목하거나 집중하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연구에 가장 집중했습니다.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법을 가르치셨던 로잘린 히긴스(Rosalyn Higgins) 선생님은 여성 최초로 국제법률가협회(ICJ,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소장이 되셨는데요, 제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법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를 만났군요!’ 하시고는 도서관에 가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조언은 이제까지 받았던 가르침 중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실제로 도서관에 가서 연구에 몰두했는데요.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것은 1) 범죄성(1936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판결 문서의 발견) 2) 젠더 문제(성 문제와 생활의 문제는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1]) 3) 화해의 본질(사실을 인정하고 성실한 사죄를 할 수 있다면 중대한 범죄도 용서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일본은 친구를 얻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국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Q.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 필리핀, 대만 등에서도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학순 씨는 국민기금의 대표와 만날 때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유엔에서 함께 활동한 황금주 씨와 강덕경 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 훌륭한 여성 활동가 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일본의 남성 신문기자 대부분은 반면교사였지만, 개중에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도 있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의 이토 요시아키(伊藤芳明)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 씨는 아사히 신문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제게 질타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런던정경대(LSE) 대학원에서 만났던 박원순(2019년 기준, 현 서울시장) 씨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공부한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를 생각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Q.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주장은 오류라는 의견서를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제출했습니다. ‘2015년 한일 합의에서 양국 간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은 정부 간의 합의에 지나지 않으며 피해자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총리가 성의 있는 사죄는 커녕 ‘성노예’ 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밀 협의를 요청했다는 것인데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한일 합의는 무효(대세적 의무의 위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타 쓰토무(羽田孜) 총리가 할머니와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2]를 떠올려보면, 어떤 사죄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겁니다. Q. ‘위안부’ 문제가 양국 간의 합의를 통해 종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 혹은 국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제가 여러 번 화해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만, 일본의 주류 정치인들은 모두 거부해 버렸습니다. 화해할 기회가 있었지만 도망친 겁니다. 한국 측과 타이밍이 어긋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인들, 특히 정치인들은 일본의 가해 사실을 알기 위해 더욱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제가 무지했다는 사실, 남성 중심 사회에 푹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위안부’ 문제를 통해 배우고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Q. 최근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계십니까?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관한 논의는 일본에서 금기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인식의 부족이나 역사 왜곡을 낳았고, 일본과 한국의 화해를 가로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변호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법률가들 역시 정보가 부족해 역사 인식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난 7년 간의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과 북한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한국·북한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동시에 스스로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도 매우 어렵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각주 ^ 도쓰카 에쓰로, 『ILO와 젠더(ILOとジェンダ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 참조 ^ 山下英愛「金学順―半世紀の沈黙を破る」『ひとびとの精神史〈第8巻〉バブル崩壊―1990年代』2016年、岩波書店、19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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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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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상감영길,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있다. 192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의 형태의 외관, 문 옆에는 “NO 아베” 네 글자가 작지만 선명하게 걸려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과 유산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완성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이다. 대구·경북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단법인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부설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전시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라는 형태가 되면 고민은 더 깊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도 문옥주와 심달연과 김순악의 제각기 달랐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와 전 세계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현실인 이 문제를 계속해서 ‘전시’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서늘한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희움역사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백선행 팀장을 만났다. 희움역사관이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의 삶과 고민까지 이야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대학생 자원활동가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책임지는 상근활동가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결> 독자 여러분께 짧은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는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백선행입니다. Q. 대학생 때부터 시민모임에서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계기는 정말 사소한데요, 한·중·일 청년이 모여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어요. 중국어 전공이거든요. 근데 가서 보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와 함께 하는 평화 인권 캠프였어요. 2007년에 시민모임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중국 청년은 한 명도 없는 게 반전이었죠. (웃음)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17살 때 도서관에 갔다가 『천황의 군대와 성노예』(미네기시 겐타로, 박옥순 옮김, 당대, 2001)라는 책을 봤어요. 제목이 자극적이잖아요. 그걸 읽고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또렷이 나요. 학교에서‘위안부’ 문제를 배우긴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이것이 제도적,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러고 나서 잊고 살다가 캠프로 시민모임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자원 활동을 쭉 하고, 아르바이트 시작하면서 후원도 시작하고, 졸업하고 다른 일 조금 하다가 다시 일을 찾을 때 여기서 활동 제안을 해주셔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Q. 자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또래 자원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할머니들 재가방문도 함께 하고, 행사나 집회도 같이하면서 친밀해지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와닿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재가방문도 열심히 즐겁게 다녔지만, 생존자를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시민모임에서 하는 조직사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Q. 상근활동가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고민은 많았어요. 이쪽을 커리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인연이 닿아서 시작하게 됐는데,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제 몸에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2015년 7월 말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관 개관 직전이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하게 됐죠. 전시를 만들고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역사관의 모든 활동이 내 일이구나,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쭉 역사관 업무를 맡고 있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Q. 지금 기획전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희는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존자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고, 이 부분이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났던 생존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2년에 한 번씩 진행할 계획으로 2016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1 옥주씨,>전을 했는데, 2019년이 되어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열게 됐어요. 왜 김순악인가, 많이들 물어보세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 근현대를 조망하는 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 온 대구 경북 할매들 중에서 김순악이라는 사람의 삶이 일본군‘위안부’, 여순 항쟁, 기지촌, 한국전쟁, 베트남전까지 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적이 없더라고요. 전체 기획은 올해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서 했던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 총괄하신 문호경 님이 맡아 주셨는데, 저희는 김순악의 그 파란만장하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하지 않은 일생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일대기 『일본군 ‘위안부’ 김순악 :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김선님, 일일사, 2008)도 발간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김순악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자,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고 기획했어요. 설령 그게 관람객에게는 가닥이 안 잡히고 난해하게 느껴지더라도요. Q. 전시장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벽에 꽃무늬도 있고요. 시민모임이 찾아갔던 김순악의 방이에요.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알코올 중독 같은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영구임대 아파트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처음 입주했을 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누우셨대요. 이런 네모반듯하고 따뜻한 방을 생전 처음 가져봤다면서. 그 방 그대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그 벽지와 김순악이 남긴 물건들, 남긴 말이 있고 멀리서 김순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죠. Q. 전시는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우째 살았는가 싶으고> 파트는 김순악이 그의 방에서 저희 활동가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그래서 피해 당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가 가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심정,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들부터 시작돼요. 두 번째 섹션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해방 이후 복잡하고 험난했던 귀향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사람과 만나서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분은 굳이 또 재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전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악할매 어떻게 지내세요> 섹션은 김순악이 시민모임을 만난 이후, 시민모임의 활동가, 회원들이 할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김순악의 공적 활동들을 엮었어요. Q. 전시 해설을 직접 하고 계시죠.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고, 최근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르신 팀들도 오고 계세요. 10인 이상 단체는 누구나 해설을 신청하실 수 있는데요, 해설을 듣고 관람하는 분들이랑 그냥 보시는 분들이랑 확실히 반응은 조금 달라요. 아무래도 저희가 전문 학예 팀이 갖춰지지 않아서 객관성이나 전문성 같은 것들은 신경 쓰여요. 그래도 이곳의 전시는 해결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할머니를 직접 만나 왔고 문제를 늘 고민하는 활동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그저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그나마 속이 조금 시원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감도 함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展> 전시 소개 문구 중 부족하더라도,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Q. 기획전시는 계속 새롭게 준비하실 계획인가요? 지금 두 가지 시리즈를 가져가고 있어요. 하나는 대구 경북 생존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서 그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 또 하나는 2017년 동티모르로 시작한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이에요. 교대로 하고 있는데요, 둘 다 이야기하고픈 것은 인식의 확장이에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로 많이 인식되고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 각국에 피해자가 있고, 양상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해결 운동은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아시아> 시리즈에서 하고 싶어요. <당신> 시리즈에서는 생존자 한 분 한 분이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저희가 만나왔던 ‘당신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삶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겪었던 문제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Q. 1층에서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함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역시 외부에서 아트 디렉터와 큐레이터 팀을 모셔서 기획했고, 개관을 세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고민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시민모임의 소장자료를 통해 전시가 만들어지는데, 객관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가진 역사, 생존자를 만나면서 남긴 고유한 기록도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저희 소장자료 중 “돌격 1번[1]” 을 전시할지 말지,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결국 전시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고,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 전시품이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품 자체로 분명히 의미가 있더라도 충분히 잘 해석해서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전시하지 않는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 방향에 대한 평가는 나뉠 수 있을 거예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피해 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달라는 피드백도 계속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게 가장 진정성 있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라는 걸 전시를 준비하고 관람객을 만나면서 저희도 깨닫게 됐거든요. 준비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되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자료가 부족할 때도 많고 디자인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습니다. 준비할 때 고민은 많지만, 막상 펼쳐 놓으면 전시를 채워주시는 건 관람객이더라고요. 예상 못 한 반응도 많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몇 번의 전시 후에 ‘결국 모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건 관람객 여러분이구나, 자신감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해 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관람객 Q. 이곳에서 전시를 관람한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다시 찾아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관람하시지만, 적극적으로 해결 운동에 참여하시는 팀들도 꽤 있어요. 준비를 많이 하는 팀들은 사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귀향>(조정래, 2016), <허스토리>(민규동, 2018)나 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등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여기 오셔서 관람하면서 해설 듣고, 외부 강연까지 요청하셔서 듣고, 그리고 희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해 가셔서 다시 판매하거나, 아예 직접 물품을 제작해서 판매 수익을 모아 여기에 기부금 전달식까지 하러 오세요. 청소년들이 해결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에 저희는 교육 공간으로 끼워져 있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예전에는 문제 해결 운동이 단체 주도였다면, 최근에는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시민이 주체가 되었고, 지금은 더 나아가서 청소년이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해요. 그 가운데서 이제 저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Q. 유독 마음에 남았던 사례가 있나요? 사실 여러 팀이 기억나서, 한 팀만 언급하기 어렵네요. 전교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플리마켓을 열어서 스스로 기부금을 모으고 저희한테 와서 그동안의 활동을 다 설명해 주더라고요. 동전으로 한가득이었는데 다 세어서 기부금 영수증을 드렸었죠. 고등학생들이 기금을 모아오는 경우는 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어서 놀랐어요.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6학년이 다섯 개 반인데 다 같이 오겠다고 신청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어느 반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하고 『꽃할머니』 책을 같이 읽었는데,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희움역사관 견학을 하러 가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허락을 받았대요. 그 소식을 다른 반 학생이 듣고 서로서로 ‘우리도 가자’ 해서 결국 학년 전체가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현장에서는 좀 힘들긴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새삼 깨달아요. Q. 시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서 전시해설 할 때 항상 ‘희망‘을 얘기해요. 아직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공감과 분노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해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은 희망이라고요. 성폭력 문제에서 희망을 얘기하면 되게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것처럼 묘사된 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해보면 전쟁과 성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잖아요.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증언자고, 인권 운동가고, 어떤 분들은 예술가가 되셨고요. 해결 운동도 당사자가 힘있게 앞서서 견인해왔기 때문에 시민들도 함께 해 온 거고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큰 희망이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동참해 달라고 이야기해요. 여기 이름도 ‘희움‘, ‘희망을 모아 피움‘이잖아요. 제발 분노로 그치지 말아 달라고요. 연민이나 동정, 분노도 타자화잖아요. 같이 주체로 행동해 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이미 주체가 된 분들도 많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민족의 딸들이 당한 고난과 수치‘로 묘사되는 것에 매우 큰 의문을 품고 있어요. 이걸 현재화하려면 결국 여성 인권, 여성 폭력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사관이 관람객에게 이 문제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래서 이곳의 재현 방식도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분노에 갇히지 말고, 너무 비관에 젖지 않게,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밝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이런 합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관람객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Q. 외국인 관람객도 계신가요? 몇 달 전부터 통계를 내 보고 있는데 7~8% 정도로 계속 오고 계세요. 절반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시고,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해요. 일본어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해결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해 오던 분들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지금 외국어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그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적극적인 분들은 검색해 가면서 보고 질문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는 아주 아쉬운 부분이죠. Q. 외국인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문화권, 언어권별로 인식의 토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사실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 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를 쓰시는 분들은 문제 인식의 기반이 분명히 달라요. 일본 분들은 스스로 가해 역사라고 인정하거나, 긴가민가하지만 보면서 물어보시는 편이고 다른 언어권 분들은 인식이 명백하게 인권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손성숙 선생님도 인터뷰에서 미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딱 그게 느껴져요. 또 중국 내륙에서 온 관람객과 대만에서 온 관람객의 결이 달라요. 중국에서 온 분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 국가 관계에서 바라보시다가 중일 관계로 연결하면서 화를 내시기도 해요.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바로가기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 단체관람 신청하기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 이후를 고민하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사실 어떤 시민사회 이슈보다도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이슈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게 정말 대단한 것 같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견인해 오셨기 때문에 이 운동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점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온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저희가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후에 ‘포스트 당사자’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활동가이고 연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시콜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록의 역할이 뭔지, 사람들이 뭘 기대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일하는 게 몸에 맞는 느낌이라고 하셨지만 고민도 많으시네요. 생존자가 없을 때에도 이 운동이 이전만큼 주목받을 수 있을까, 지금만큼의 물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재현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금만큼 많을지… 지금이 ‘위안부’ 운동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커요. 또 현실적으로 활동가들은 항상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데, 역량 강화의 기회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도 있고요. Q. 앞으로 어떤 활동가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사실 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 현장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매일 느껴요.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실 수도 있고… 다만 기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까,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달리다가 소진될 때 같이 공감하고 고민하는 활동가들, 연구소처럼 이 분야에 매진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면 보람을 느끼면서 또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힘을 내게 돼요. 지금 나의 문제로, 순악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Q. 저희 웹진 <결>에 기대하시는 점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도 궁금합니다. 처음 <결>을 봤을 때 “너무 읽을 맛 난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기존 매체나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심지어 세련되게 써주셔서. 쭉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넓은 분야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결>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없으신 분이든,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100년 전에 나랑 상관없었던 여성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 바라보면 우리 책임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는 기념 사업과 할머님들에 대한 지원 사업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법적인 해결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세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 두번째 이야기 김순악> 전시는 2020년까지 이어져요. 오셔서 순악 씨를 만나주세요.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우습지만 순악 씨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갔던 평화 인권 캠프에서 처음 만난 ‘위안부’ 생존자가 김순악이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 했던 곳도 지금 김순악 할머니를 모신 영천 은해사고요. 저희처럼 순악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순악 씨 좀 만나러 와주세요. 각주 ^ 도쓰게키이치반(突擊一番). 당시 ‘삿쿠’라고 불렸다. 일본제국 군인에게 군수품으로 지급된 군용 콘돔으로 위안소에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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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2부 -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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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문학연구』 47호(2019)에 실린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의 내용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일본의 미투 운동과 ‘위안부’ 문제 1부. 역사수정주의, 백래시, 그리고 ‘위안부’ 문제 2부. 역사의 교차, 문화의 번역 매개로서의 ‘위안부’ 문제 1부에서는 일본에서 미투운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배경으로서 1990년대 이후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가 결합하여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키워왔고, 최근에는 유엔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의 자원으로 삼는 것은 물론 우파들만이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성적 존엄성의 회복을 요구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미투 운동의 시조로 되새기고자 하였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지원운동이 '전시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창출하고, 국제적으로도 '성노예제'라는 말을 공유하게 한 성과를 말하면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역사를 현재의 일본 사회와 적극적으로 접속시킨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확산되지 않는 원인을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체질에서 찾고 있다. 미투운동과 ‘위안부’ 문제를 연결하려는 구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조되었으며, 한국 시민사회를 본보기로 삼는 움직임 또한 나타났다. 젠더 연구자인 무타 카즈에(牟田和恵)는 ‘위안부’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위안부문제는 #MeToo다!〉라는 짧은 동영상을 제작하여 수요집회의 모습과 함께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온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영 페미니스트 예술가집단인 내일소녀대(明日少女隊)도 "‘위안부’문제는 #MeToo다"를 내세워 각지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 퍼포먼스를 펼쳤다.[1] 그 동안 지속해온 ‘위안부’ 연구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지원운동,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추진,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호응, 그 속에서 한국‧일본‧재일조선인들 사이의 참조와 연대의 축적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인식의 지평이 가능했다. ‘위안부’ 피해의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현장을 참조대상으로 삼고 일본의 미투운동을 임파워하고자 하는 시간적, 공간적 접속은 미투운동과 ‘위안부’ 운동 양쪽에서 네이션의 스케일을 벗어나는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이토 시오리와 서지현이라는 두 상징적 인물을 비교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복잡한 시선의 교차를 낳고 있다. 미투 지원운동의 조용한 확산 2019년 4월 10일 '이토 시오리의 민사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Open the Black Box'가 결성된 것은 특기할만하다. 원래 'Fight Together With Shiori(FTWS)'라는 이름으로 준비모임을 가졌던 몇몇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모임은"성폭력 피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 있는 블랙박스를 하나하나 열어가는 시작"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정식 발족했다.[2] 이토의 기자회견 후 지원 서명운동을 시작한 #WeTooJAPAN 발기인인 후쿠하라 모니카(福原桃似花)를 비롯하여 변호인단과 기존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0명이 모인 이 자리의 중심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지원운동을 이끌어온 재일조선인 2세 양징자(梁澄子)가 있었던 점도 상징적이다. 다른 하나의 움직임은 성폭행에 대한 사법 판단에 항의하는 플라워시위다.[3] 2019년 4월 이후 매월 11일 전국 대도시에서 200~400명의 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의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는 시위를 진행 중이다. 항의 행동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3, 4월에 성폭행과 관련해서 전국의 지방법원에서 나온 연이은 무죄판결이었다. 2019년 3월 12일 후쿠오카 법원은 준강간죄로 고발된 남자에게 "남자는 여성이 합의했다고 착각했다"면서 무죄판결을 내렸고, 4월 4일 나고야 법원은 친딸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에게 딸이 "저항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여성들은 이 시대착오적 판결에 항의하면서 피해자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담아 꽃을 들거나 꽃무늬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시위를 '플라워 시위'로 명명했다. 모임을 기획한 중심인물인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는 작가이자, 사업가로서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는 한류에 열광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지지하는 사람이자, ‘위안부’ 운동에 개입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축적되어 온 ‘위안부’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한국과의 소통을 어떻게 일본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앞을 가로막아 서는 벽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들의 문제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녀를 포함한 일본의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고민이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참인 2019년 12월 18일 오전, 이토 시오리가 일으킨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야마구치에 대한 330만 엔의 배상 판결과 함께 재판은 그의 행위의 불법성을 명시하였고, 증언의 진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였다. 피고에게 한없이 관대했던 그동안의 일본의 성폭력 판결내용을 생각했을 때, 이날의 판결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가 시작한 미투 운동은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이 판결이 그가 버텨낸 고통의 시간을 상쇄할 수 없고, 재판 투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한 이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이토의 투쟁과 지원 운동이 지금도 자기책임을 따지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큰 용기를 안겨줄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미투운동은 서서히 확장될 것이다. 문화번역의 실천과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2019년은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비롯한 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82년생 김지영』 일본판은 2018년 12월 출간 후 나흘 만에 3쇄를 찍고, 4달 만에 13만 부를 찍는 돌풍을 일으켰다. 2020년 1월 20일 현재도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작품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아시아문학 작품' 베스트 10 중 7개가 한국의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고, 최근 "한국‧페미니즘‧일본"이라는 특집을 꾸민 『文藝』 2019년 가을호는 1933년 창간 이래 86년 만에 이례적인 3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고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친 한국의 여성주의 서사는 지금 일본에서 일부의 매니아층을 넘어 대중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다. 아마존 재팬에 달린 200개 이상의 리뷰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도 김지영", "여성의 일상에 있는 무한한 절망", "비통한 감각", "절망 끝의 희망",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는 등 작품에 대한 공감을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부러움과 동경 또한 리뷰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의 수준은 한국보다 낫다"고 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침묵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한국의 사회문화적 동력은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직접적 정치참여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국을 선망하는 모습은 그동안 촛불시위를 비롯한 사회운동 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었는데, 폭발적인 미투운동을 거쳐 ‘김지영’ 신드롬 속에서 더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다. 사이토 미나코(斎藤美奈子)는 '일본에서 균등법, 기본법 제정 등 페미니즘의 제도화가 비교적 빨리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에 해당되는 페미니즘 입문서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나카 미츠(田中美津)나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등 1970-80년대 저작들이 너무 빛 바래버린 현실 속에서,"K페미는 J페미의 '30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토로하였다.[4] 다만, 한일 간 문화적 참조 관계의 역전을 강조하는 서사는 식민주의와 근대화론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설정하는 민족주의적 욕망으로 회수될 위험성이 있다. 한국이 압축적 근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사회의 길을 가면서도 개개인의 욕망이 집합적인 사회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탈식민 분단국가로서의 폭력의 경험과 상실감, 트라우마에 노출되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인 문화적 소비와 위계화의 욕망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문화번역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이 과정을 곧바로 한일 여성연대 등으로 정리하는 안일함도 피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스젠더 이성애 국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둘러싼 공감은 늘 주류 여성들 간의 지적 교류에 머물고 마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재일조선인 여성 연구자, 활동가들에 의해 촉발되어 온 경험을 마지막으로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미투와 ‘위안부’ 문제의 접속,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문화번역의 과정은 지식인들의 담론을 넘어 대중들의 동시대적인 정동과 맞물리면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의 형태조차 없는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키워가는 일이다. 역사를 해결하거나 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의 역사를 직시하고 더 말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각주 ^ https://tomorrowgirlstroop.com/ianfu ^ https://www.facebook.com/opentheblackbox ^ https://www.flowerdemo.org ^ 斎藤美奈子, 「世の中ラボ 【第106回】いま韓国フェミニズム文学が熱い」, webちくま 2019.2.21. http://www.webchikuma.jp/articles/-/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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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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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를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조사와 지원은 한국만큼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조사의 진행 상황, 그리고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물어보았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Q.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입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독립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1992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대외적으로 처음 밝힌 일본의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협력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과 고이치 기무라 박사님께서 함께 쓴 책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는 일전에 웹진<결>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 혹은 연구를 하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요?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자카르타의 <Internews> 라디오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욕야카르타(Yogyakarta) 법률구조단의 부디 산토소(Budi Santoso) 씨를 만났어요. 그때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저는 ‘위안부’ 피해자인 마르디엠(Mardiyem)에 대한 취재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의 주인공입니다. 당시에 썼던 취재 기사는 인도네시아 전역 50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지요.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웹진 <결> 독자를 위해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어떠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위안소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체(Aceh)에서부터 동쪽 끝인 파푸아(Papua)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국토 중 동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위안소에는 특히 한국과 타이완에서 온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는 등급별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 머나도(Manado)출신의 인도네시아 여성과 중국계 여성, 그리고 네덜란드계 여성들은 일본군 장교들 몫이었습니다. 반면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Java) 출신 여성들은 계급이 낮은 일본군들에게 할당되었지요. ‘위안부’들 나이는 16세에서 25세 정도였고, 그중에는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지기까지 Q.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졌습니다. 신문기자인 조코 산토소(Joko Santoso)가 일본군‘위안부’로 감금되었던 숙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했어요. 그의 숙모였던 투미나(Tuminah)는 중부 자바, 솔로(Solo) 지역에 후지 여관(Fuji Ryokan)이라고 이름 붙여진 위안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해요. 조코 산토소는 본인이 속한 수아라 머르데카(Suara Merdeka) 신문에서 1992년 7월 16일, 7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숙모의 ‘위안부’ 사연을 기사화했죠. 기사를 본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그의 부인인 평화 운동가 옥초 기무라(Okcho Kimura) 씨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처음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죠. 1993년 일본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Nichibenren) 소속 5명의 변호사가 자카르타 법률구조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착취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손해배상 문제가 제기되었죠. 일본 변호사들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끝까지 파악하겠다는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인 인텐 수웨노(Inten Suweno)의 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밝혀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나요? 당시 사회부 장관이었던 인텐 수웨노의 성명은 1993년 4월 20일, 머르데카(Merdeka) 일간지에 게재되었고, 성명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래로 반인륜적인 ‘위안부’ 문제가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죠. 사회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비정부기구인 자카르타 법률자문단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노무동원 피해자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본 등록 업무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으로 이관되었고요. Q. 등록을 받은 결과는 어땠습니까? 1993년 4월 29일부터 1993년 9월 14일까지 등록을 받은 결과, ‘위안부’ 피해자 1,156명과 노무동원 피해자 17,245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되었어요. 그리고 1995년 아시아 지역 보상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연합 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 of Asia Pasific War Victims Organizations Claiming for Asia Compensation)에 인도네시아가 가입한 후, 1996년 일본군 보조병인 헤이호(Heiho‧兵補) 출신 연합이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군 침공에 따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희생자 개인별 보상 약정(Agreement Individual Compensation for Asia Pacific Victims of Japanese Aggression)에 따른 인도네시아 희생자들의 보상 추진이었습니다. 1996년 3월 30일에 마감을 통해 ‘위안부’ 피해 여성 19,573명이 등록하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개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공식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사실에 대해 경악과 충격, 부끄러움을 표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Q.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황은 어떤가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변호사연합회(Nichibenren) 인권위원회의 자카르타 법률구조단 방문 이후, 법률구조단은 ‘위안부’ 현황 조사와 등록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시기에 법률구조단은 인도네시아부인회(회장: 누르샤바니 캇자숭카나(Nursyahbani Katjasungkana)와 반 여성적 무력 반대 포럼(Forum Resistance Military Against Women. 의장: 고이치 기무라 박사)과 연계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한 제소를 준비했고 많은 변호사가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본 연계 활동은 결속력 있게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 여론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6년에 법률구조단의 몇몇 분과 저,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위안부’ 연대(JAJI)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지역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본 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하게 됩니다. 본 연대의 조직은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과 지원을 원하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Q.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관장하는 특별기구나 단체가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이하 JSII)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출간, 사진전, 회화 전시회,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위한 기자 초청 간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JSII는 지금도 계속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유품을 다수 보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품들을 갖고 계시는지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 찾아가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점령기 때 만들어진 유물이나 만행의 장소들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관련 물품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일본군 술병, 도자기 잔, 탄피, ‘위안부’들이 입었던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 치마, 신발 가방, 모자, 의료 기구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물품은 ‘위안부’용 의료기구예요. 이 의료기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2년도예요.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헤이호 출신인 사르무지(Sarmudji) 씨가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에게 보여준 사진에서 처음 보았죠. 그 사진에는 1992년에 찍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의료기구, 유리로 만들어진 주사액 3병, 2개의 낡은 붕대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위안부’용 의료기구는 수라바야(Surabaya)에 있었던 위안소에서 헤이호 출신 친구가 가져온 것을 사르무지 씨가 인수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사르무지 씨가 당시 집을 수리하느라 이 의료기구가 집 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지를 못했어요. 사르무지 씨가 밝히기를 어떤 일본인이 찾아와 본 의료기구들의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어요. 2004년에 저는 사르무지 씨를 다시 만났고 그제야 일부 파손된 ‘위안부’용 의료기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르무지 씨는 기꺼이 이 역사적인 유물들을 저에게 넘겨주었죠. Q. 비록 서면을 통한 인터뷰지만,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다양한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국제적인 호응과 협력을 얻기 위한 ‘소녀상’ 설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캠페인 전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이에 힘을 받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안부’라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상호 지원과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치적으로 촉구하는 국제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세미나 개최, 책자 발간,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한국의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운동은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끝으로 인도네시아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참상을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 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