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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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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이정아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 Q. 참여곡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이정아입니다. <그리고 싶은 것>(권효, 201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중·일 작가들이 각자 생각하는 ‘평화’의 이미지를 그려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라는 동화책을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는데요, 그 영화와 책을 바탕으로 노래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할머님께서 유난히 꽃을 좋아하셔서 책이나 앨범 사이에 꽃을 꽂아 놓으시고 압화(꽃누르미) 작업을 하시더라고요. 곡 제목은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굉장히 많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에둘러 표현해도 고통스럽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되도록 쉬운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로 표현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곡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다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나물 캐러 갔다가 끌려가신 분도 계시잖아요. 제가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장 보러 나갔다가 끌려갈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런 사실을 일상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나였을 수도 있고, 너였을 수도 있는, 모두의 일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Q. 곡을 만들면서 느낀 점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접근 자체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작업을 위해 공부하면서 힘들기도 했죠. 특히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정말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서 끝까지 다 못 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도 비슷한 주제의 작업이 있다면 참여하려고 해요. 필요한 일 같아서요. */ It was an ordinary dayAnd the sun was shining On the meadow and the hills And on the trees But as rain fell on the ground A dark dark shadow was coming around And rootlessly they torn the flowers Oh as cruel as they could be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35 whole years Then the shadow disappeared But the flowers oh our flowers Were left bleeding and abused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say it isn't true?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just go by as if they're through? But they couldn't take away The scent of the flowers Spreading through And through here in our hearts It was never your fault Please don't be afraid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최고은 악순환 Q. <악순환>은 어떻게 시작된 곡인가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라고 합니다. <이야기해주세요> 3집에 <악순환>이라는 곡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노래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에 수록된 「악순환」이라는 시와 제목이 같아요. 이 시는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라는 구절로 시작하거든요. 이게 <이야기해주세요> 작업과 맞아떨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의 구절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한이 많은 남도의 판소리를 배웠는데, 의도한 정서를 담으려니 자연스레 국악적인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악순환>은 그런 한국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올해는 제가 데뷔한 지 10년이 되는 해예요. 10년 전에는 노래를 만들면 생각과 표현 사이에 괴리가 컸어요. 음악을 할수록 그 간극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쁨이 있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을 때 <악순환>을 작업하게 됐죠. 2019년 겨울에 한 달 반 정도 유럽 투어 공연을 했어요. 30여 번의 공연에서 매번 <악순환>을 불렀습니다. 관객들이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한’을 느꼈는지, 공연 때마다 <악순환>에서는 박수 소리가 길게 나왔어요. 곡에 대한 상반된 피드백도 재미있었어요. 기획팀 서상혁 님은 처음 이 곡을 듣고 내재된 ‘흥’을 느끼셨대요. 반대로 송은지 님은 공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소감은 어땠나요?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굉장히 반갑고 좋았어요. 음악으로 소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만들어진다는 게 기뻤거든요. 그래서 곡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주제를 담으려다 보니 스스로 검열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이야기해주세요> 시리즈를 응원하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했는데, 그러려면 ‘사람들이 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최소한 저에게는 좀 더 소신을 지키는 방향으로 작업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많은 뮤지션이 정말 좋은 음악들로 참여했는데, 기획팀이 부디 지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웃음)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가 계속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 시간이 가도 시간이 온다 어제가 가도 어제로 온다 나는 나를 사용하면서 하루하루 생산한다 일 년을 생산한다 인생을 생산한다 황푸하, 김해원 나의 고향 Q. <나의 고향>이라는 곡에 담긴 메시지를 소개해주세요. 김해원 : 안녕하세요, 김해원이라고 합니다. ‘김사월X김해원’이라는 포크 팀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지금은 솔로 활동과 영화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을 황푸하 씨와 함께 만들었어요. 저는 편곡과 프로그래밍, 믹싱 등을 맡았습니다. 황푸하 : 저도 포크 음악을 하는 황푸하라고 합니다. <나의 고향>에서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 앨범 안에서 이 곡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기도 했고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은유적으로 나무들이 우리에게 계속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가사를 썼습니다. 지금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들으려 하지 않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소통의 부재와 답답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해원 : 저희가 함께 작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업했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아주 모호하기도 했습니다. 황푸하 : ‘고향’이라는 키워드 안에는 잃어버린 곳을 다시 꿈꾸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처음 곡을 구상할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재난의 피해자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장면을 떠올렸어요. 김해원 : 황푸하 씨가 처음 가사를 보여주셨을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사건을 겪기 전에 살던 공간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봤어요. 어릴 적 배웠던 동요나 근대에 만들어진 신민요 안에 담겨있는 향수의 정서 같은 걸 계속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김해원 :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이 주제에 대한 일종의 음악적인 연구 결과라고 생각해요.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증도 필요하고, 해당 주제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해야 하죠. 저도 그 어려운 과정을 겪었죠. 황푸하 : 예전에 <세월호 미수습자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 ‘집에 가자’> 앨범에서 사회 이슈를 음악을 통해 저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고 음악 작업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이런 작업을 통해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아요. 김해원 :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는데, 사실 제 자신이 아닌 주변과 사회 구성원의 이야기를 소재로 음악 작업하는 것을 어려워했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계속 음악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또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어요. 김해원 : 처음에는 앨범을 정말 많은 분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일종의 작은 연구를 했다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황푸하 :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뉴스가 쏟아지고 여론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음악은 정치적인 논쟁이나 여론몰이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서 끌어낸 근본적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앨범을 들으시면서 음악에서 언어보다 더 깊이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바람이 유독 많은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리운 나의 고향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빗방울 떨어지는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 아래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리운 나의 고향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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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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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들여다보기] 1부 -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종류의 연구의 의미 2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3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들여다보기 어느 나라건 군대는 체계적으로 운영됩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일본군의 군대 관리에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군속(군무원의 옛말)의 숫자와 이들의 상태(사망과 부상 여부, 귀국 일시 등)를 기록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야 병력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인에게 월급이나 상벌을 주며, 군인·군속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경우 가족에게 사망 통보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기록 중 하나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입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군인·군속으로 동원되어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한 이들의 명부입니다. 이때 '유수(留守)'는 일본어로 '부재중' 혹은 '집의 주인이나 가족이 외출한 사이에 그 집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인들도 일본의 군인·군속으로 동원됨에 따라 이러한 명부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외에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부를 만들었는데, 이 글에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함께 살펴볼 복원명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복원(復員)명부'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반대로 병역을 마치고 제대하여 귀향하는 이들을 기록한 명부입니다. 그렇기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는 특정 인물이 전쟁 당시 군인·군속 신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요. 이 글에서는 일본군이 작성한 명부자료 중 인도네시아 남방 제5·9·10육군병원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그리고 남방 제9육군병원의 복원명부에서 찾은 조선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살펴보기 본격적으로 명부의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살펴볼까요? 아래 그림들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사본입니다. <그림 1>은 남방군 제7방면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표지이고, <그림 2>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라는 조선인 여성의 기록이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그림 3>은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안원남선의 부분, <그림 4>는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김복동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후방에 남아 있는 명부를 만들고 이를 일선으로 파견된 부대에 전달하면, 일선의 각 부대가 현지에 편입되거나 소속 부대가 변경된 군인·군속의 이름을 추가·삭제 등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작성 규정을 만들어 육군에 적용한 시기는 전쟁 말기인 1944년 11월 30일부터입니다.[1] 하지만 이 시기에 <그림 2>, <그림3>, <그림4>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든 육군병원들이 소속된 남방군 제7방면군은 이미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였던 당시 전황상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아래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들은 현지 부대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드느라 바빴다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인의 회고담이 있기도 합니다.[2] 그럼 이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좀더 꼼꼼히 살펴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2000년 즈음 명지대 홍종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홍종필 교수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명단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홍 교수는 당시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전쟁 중에 사망한 조선인들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이 명단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교수는 명단 속 한정수라는 인물을 이름만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유가족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홍 교수가 알려준 것 이상의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다시 만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제공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3]에서였습니다. 남방 제5육군병원 간호부로 기록된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방 제9육군병원,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들의 이름을 추가로 발견했어요.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동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한정수를 비롯한 명부 속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조사를 계속했지요. <그림 2>는 자바섬 자카르타에 있던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가 기록된 부분입니다. 최상단 여백에 복원(復員, 병역해제) 여부를 확인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최상단 우측의 '21.4.24' 문구는 쇼와 21년(1946년) 4월 24일에 이 사람의 병역이 해제되었음을 뜻합니다. '21.4.24' 문구의 아래 칸에는 한정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병역이 같은 시기에 해제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한정수가 남방제5육군병원의 군속으로 편입된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편입 시기가 1945년 8월 1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한정수는 7월 30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칸의 한자를 볼 때 이는 한정수의 사망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칸에는 본적지, 주소, 유수 담당자 등이 적혀 있는데 주소 자리에 도장으로 '合祀 濟(합사 제)'라는 문구가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유골이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한정수 명부의 최하단에는 '除(제)', '死(사)'라는 글씨가 도장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병역이 해제되었음과 한정수가 사망했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명부의 중앙 하단에 '供(공)', '供号(공호)'라는 도장과 함께 숫자가 적힌 것은 공탁금 번호로 추정됩니다. 공탁금은 일제시기에 동원된 민간인들에게 주어야 할 임금 등을 미지급하고 공탁한 금액을 말합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전까지 공탁금을 일제징용 노무자들에게 주지 않고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명부에 찍힌 도장들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탁금 도장은 후생성에서, '합사 제' 도장은 야스쿠니신사에서 합사 작업이 끝난 시점에 찍은 도장입니다. 다른 문구들도 각 목적에 따라 명부 위에 더해진 것이겠지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담긴 여러 가지 기호와 정보들은 아직도 연구 대상입니다. 명부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겠지요. 위에서 살펴본 <그림 2>와 함께 <그림 3>, <그림 4>도 살펴보죠.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77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22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에 있던 제9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142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30일과 31일에 수마트라섬 북부 메단의 제10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고요[4]. 각기 다른 육군병원에서 작성한 이들 명부에 실린 여성들의 직업은 간호부, 임간(臨看, 임시간호부), 용인(傭人, 최하급의 군속)등 저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명부의 형식은 비슷합니다. 일본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공통 형식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하다 저는 2015년 12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재직 당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을 조사하면서 남방 제9육군병원의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했습니다. 그때 찾은 복원명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명부의 여백에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에 편입된 시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선지가 조선의 어느 지역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적지, 귀국할 곳의 역 이름, 병종, 관등급, 씨명, 생년월일 등의 칸이 있습니다. 위의 복원명부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의 임간(임시간호사) 신분에서 해용(解傭, 고용계약의 해지)된 시점이 1946년 5월 24일이라는 점입니다. 1946년 5월 24일은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을 탄 날짜이기도 합니다.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정리한 강석재의 수첩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도네시아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자바섬이나 수마트라섬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한 뒤 1946년 5월 24일, 귀국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지요. 위의 복원명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들이 배를 타고 귀향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의 일본군 사령관이 이들을 해용 처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하게 된 이유는 「육군유수업무부령」, 「유수업무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육군유수업무부령」(칙령 제313호)과 「유수업무규정」 자료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홈페이지(http://www.jacar.go.jp/)에서 참고할 수 있다 ^ 浜田國雄, 「一 兵卒の綴った‘ジャワの 想い出’から」 , 『南五戰史』, 199쪽. ^ 국가기록원에서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위해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에서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를 전산화하였고, 2004년 3월부터 온라인으로 이 명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이하 진상조사보고서), 2009. 1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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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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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들여다보기] 1부 -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종류의 연구의 의미 2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3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하- 명부에 실린 조선인 여성들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왔을까? 세 개의 남방 육군병원이 있었던 곳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입니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 이 세 병원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실린 조선인 여성들은 301명, 혹은 병상일지에서 추가 확인된 1명까지 포함하면 302명입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자카르타의 남방 제5육군병원은 1945년 8월 1일 간호부 82명을,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의 남방 제9육군병원은 8월 22일 임간(臨看, 임시간호부) 78명(제9육군병원 명부의 77명에 병상일지에 기록된 1명을 추가한 인원)을, 메단의 남방 제10육군병원은 8월 30일과 31일 용인(傭人, 최하급의 군속) 142명을 편입시켰습니다.[1] 이 병원들이 속해 있었던 남방군의 제7방면군이 담당했던 영역과 각 병원의 위치는 <그림 1>의 지도와 같습니다. 아래 지도는 공문서와 함께 피해자, 군인·군속, 주민의 증언을 토대로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이 작성한 지도의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 만든 것입니다. 보라색 선으로 표시된 곳이 남방군, 주황색 선으로 표시된 것이 남방군 제7방면군의 관할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남방군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있던 일본 육군 전체를 총괄하였고, 제7방면군은 이 중 말레이시아(싱가포르 포함)와 인도네시아 지역의 육군을 담당하였죠. 붉은색 점으로 표기된 곳이 이 글에서 다루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속 여성들이 있었던 병원의 위치입니다. (숫자5 : 제5육군병원, 숫자9 : 제9육군병원, 숫자10 : 제10육군병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이 작성한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이곳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5·9·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실린 조선인 여성 301명에 대한 개별 조사를 일일이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이 여성 모두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고 단정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합니다. 또한 한국 정부에 인도네시아 지역으로 동원되었다고 신고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 모두를 이들 명부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명부에 실린 여성 중 상당수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개별적으로 조사한 명부 속 여성 18명이 모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2] 그런데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 많은 조선인 여성들이 어떻게 지금도 멀게 느껴지는 인도네시아까지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민간인이었던 여성들이 어떻게 군의 작전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이 전쟁터로 여성들을 동원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한 1942년 1월 이후 ▲보르네오섬에 있던 일본군과 일본 외무성이 주고받은 공문, ▲대만총독부와 일본 외무성이 주고받은 공문, ▲대만군과 육군성이 주고받은 공문들을 보면 일본 육군이 군'위안부' 수송을 강력하게 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3] 공문들을 살펴보면 우선 현지군이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일본 내무성 등에 '위안부'를 공급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조선, 대만 등에서는 여성들을 국외로 내보내기 위해 일본 외무성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공문 중에서는 대만식민통치 당국인 대만총독부에서 일본의 외무성에게 군'위안부' 동원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외무성이 군'위안부' 동원에 여권 발급은 우스우니 군증명서 발급으로 갈음하라고 마지못해 허락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즉, 전쟁에 나선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을 요청하자 일본군 수뇌부가 군인들의 성병 예방과 성욕 해결, 점령지의 치안 유지 등을 위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정책이라는 틀을 만들고, 이 틀을 토대로 '위안부'를 동원한 것이지요. 그러면 일본군의 요구는 어떻게 조선인 여성 한 명 한 명에게 전달되었을까요? 당시 조선에서는 동원업자들이 전쟁터로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 납치, 협박 등 물리적 폭력을 포함해 인신매매와 같은 교묘한 방법도 이용하였습니다. '좋은 공장에 취업할 수 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 등의 사기 수법이 많았고, 부모의 빚 등을 구실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단 하나의 수법이 아니라, 여러 수법이 결합된 상태로 미성년자까지도 불법적으로 동원하였습니다. 명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들의 '위안부' 동원과정을 상상하다 명부에 실린 조선인 여성들의 본적지별 분포를 분석하면 위안소 업자들이 조선 내에서 '위안부'를 주로 동원한 지역을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각 병원의 명부 자료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로 보내진 여성들의 고향을 살펴보면 제5육군병원 소속 여성들은 경남 출신이 28.0%로 가장 많습니다. 이어 경북 19.5%, 전남 13.4%, 경기 11.0% 순입니다. 제9육군병원은 경북 50.6%, 경남 11.7%, 전남 10.4%, 경기 9.1%로 경상남북도를 합하면 62.3%에 달합니다. 제10육군병원도 경남 출신이 38.0%로 가장 많습니다. 이어 경북 출신 28.2%, 경기와 전남은 각 7.0%입니다. 특히 제9육군병원의 명부에는 경북 중에서도 경주 출신 여성이 상당히 많습니다.[4] 경주에서 요리점을 경영하던 송경호라는 업자가 경주를 중심으로 여성들을 모아 제9육군병원이 있는 팔렘방으로 향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팔렘방에서 명월관이라는 이름의 위안소를 경영하던 송경호는 경주에서도 명월관이라는 이름의 요리점을 경영했었습니다. 이 외에도 전체적으로 경상도 여성의 비율이 높은 데에는 경상도가 일본과 가깝고 국외로 이동하기 편리하다는 지리적 특징, 그리고 높은 인구 밀도 등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연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큰 원인은 위안소 경영자, 여성 동원업자 등이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위 그림은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서 암촌갑(岩村鉀)이 유수담당자로 기록되어 있는 여성들을 발췌해서 편집한 것입니다. <그림 7>을 보면 암촌갑은 임간(임시간호부) 7명의 '주인'으로, 여성들의 주소지는 모두 '부산부 초량정 402'로 기록되어 있습니다.[5] 암촌갑은 이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땅을 소유하고 있던 조선인 허갑입니다. 그런데 암촌갑은 실제 팔렘방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는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의 주소지로 기록된 '부산부 초량정 402'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이 지역의 답사도 몇 차례 해보았지만, 아직 초량정 402번지가 암촌갑의 주소지라는 것 이외 어떤 역할을 한 곳이었는지는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6] 다만 암촌갑이 여성 7명의 주인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보아 암촌갑이 이 7명의 여성들의 1차 고용주로서 팔렘방으로 가는 위안소 업자에게 넘긴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겠지요. 흥미로운 지점은 암촌정강의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암촌정강이 기록되어 있는 줄에는 유수담당자 이름란에 암촌갑과 이등종필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주인'이 아닌 '부'로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이등종필이 실제 아버지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등종필이 아버지라면 암촌정강은 이등정강이어야 하는데 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서는 암촌정강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 의해 암촌정강이 암촌갑의 호적에 입적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암촌갑의 호적에 암촌정강이 수양딸이나 어떠한 명목으로도 입적된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암촌정강이 인도네시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사소개업자로 판단되는 암촌갑의 수양녀로 처리되어 이동하였고, 인도네시아에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작성할 때에는 약간의 혼돈상태가 반영되어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명부를 통해 '위안부' 제도 은폐를 시도한 일본군 제7방면군 직속 남방제1육군병원이 작성한 『남방제1육군병원약력』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 부근의 소화관(昭和館) 자료실에 정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1945년 8월 22일 제7방면군령에 따라 임시간호부를 배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7방면군 산하 남방 제9육군병원의 『부대약력』에도 "종전과 함께 군에서는 남부 수마트라 주류부대 여자군속 전원을 임시간호부로"[7]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 '위안부'였을 여성들이 일본군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인도네시아 지역에 있던 일본 육군과 해군에 간호부 등과 같은 군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일본군이 명부에 여성들의 기록을 편입한 시기입니다. 제5육군병원은 패전 직전에, 제9·10육군병원은 패전 이후에 여성들을 명부에 편입했습니다. 일본군, 특히 제7방면군은 왜 이 여성들을 패전이 다가올 즈음에야, 혹은 패전 이후에야 간호부·군속으로 편입하고 명부에 기록을 남겼을까요? 일단 여성들을 정식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기록하여 간호인력으로 확보해야겠다는 제7방면군 수뇌부의 판단이 있었다는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귀환 과정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대로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은폐하기 위해 패전 직후에 '위안부' 여성들을 간호부로 둔갑시켰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어떤 연구자는 위안소를 운영한 민간업자나 여성들을 모은 동원업자의 책임이 일본 정부나 일본군보다 더 크다고 보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 내에서 '위안부' 여성이 동원된 과정을 보면 ▲여성을 모집한 인사소개업자와 동원업자, ▲조선 내 요리점 및 가시자시키[貸座敷]라고 불리는 유흥업자 등을 통했습니다. 여성들을 모으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업자들이 나섰습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위안부' 제도의 중심에는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들을 일본군에 공식적으로 편입한 사실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의 은폐 시도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지속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앞으로 더 많은 명부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 성과를 쌓는다면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위안부'를 관리하고 결국 이 제도를 은폐하기까지 한 전쟁 당시의 상황을 더욱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2009, 32쪽. ^ 강정숙,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의 간호부 편입에 관한 연구-留守名簿를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20, 2011.6, 70-71쪽 ^ 그 중 하나가 외무대신,「南方方面占領地ニ對シ慰安婦渡航方ノ件」, 『종군위안부자료집』, 吉見義明편, 大月書店, 1992, 143쪽.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앞의 책, 62쪽. ^ 성태섭, 김종진(1923년생, 충남 서천군, 2007. 11. 14. 강정숙 면담) 구술 등 팔렘방으로 동원되었던 군속들의 구술을 통해서 확인된다. ^ 강정숙,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조선인명부를 통해 본 군‘위안부’동원」. 지역과 역사. 제28권, 2011, 305-6쪽. ^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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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이름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 -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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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행간을 읽어내고 엮은 책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직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문서의 상당수를 파기하였다. 일본군에게 불리한 문서들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활용되거나, 일본군의 전시 잔학행위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동원하거나 관리하면서 작성된 문서들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여성을 위안소로 강제동원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명부나 명단을 만들었다. 명부는 일본군이 만든 제도 속에서 여성들이 이름과 숫자로 적혀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분명하게 보여줄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명부 중 아주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은 현존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분석한 연구를 모아서 정리한 책이다. 7명의 저자가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으며 책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의 발굴 현황과 이것이 작성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본론은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명부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명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을 덧붙이는 형태로 되어있다. 부록에는 책에서 다룬 중요 자료의 일부가 원문 형태로 제공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2010년대의 연구 성과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명부나 명단들이 발견된 것은 이 문제가 알려진 1990년대부터이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 성과가 점점 축적되면서 명부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성과들을 편집하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명부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 낼 수 있을까? 강정숙 선생님의 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도 이 문제를 다루지만,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명부는 작성한 주체와 목적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고 위안소를 운영하기 위해 생산한 명부들이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한혜인 선생님의 글 2편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명부의 네 가지 분류 일본군이 만든 '위안부' 관련 명부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성들을 모집하여 위안소로 이동시킬 때에 필요한 명부, 위안소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명부,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명부,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 등이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 여러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동원했다. 전시에 민간인 여성을 전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도항(渡航) 허가서나 신분증명서, 승선명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명부들은 일본군'위안부'의 동원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지만, 대부분이 파기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외적으로 타이완척식이 작성한 특요원('위안부') 명부가 남아있는데, 이는 여성들을 대만의 지룽(基隆) 항에서 중국 남부의 하이난으로 도항시킬 때 작성한 것이다. 최종길 선생님의 글이 이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로 위안소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가 있다. 지역에 따라 위안소를 관리하는 주체가 달랐는데, 일본군이 이를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현지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위안소 관리를 위해서는 위안소 내의 인원을 정리한 명부의 작성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정기적으로 작성, 보고되었다. 관련 문서들 대부분이 사라졌으나, 연합군이 전후에 작성한 「ATIS 조사보고서 120호, 일본군의 편의위락시설」에는 필리핀에서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위안소 관리 문건의 예시와 서식들이 남아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식에 따르면 위안소 관리를 위해 '위안부'의 영업허가증, 업자가 작성하는 위안소 영업 허가 신청서 및 영업 보고서, 성병 검진 보고서, 교체 허가 신청서, 위안소의 종업원 명단 등이 작성되어야 했다. 위 명부들은 모두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명부들이다. 특히 종업원 명단은 성명, 출생일시, 직업, 거주지, 본적 등 상세한 내용을 모두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작성된 명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명부 작성을 위한 예시와 서식은 일본군'위안부'를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 번째로는 일본군이 군인‧군속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명부와, 현지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조선인들의 인원을 관리한 명부가 있다. 전자로는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 후자로는 「진화계림회명부」 가 있다. 이 명부들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부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볼 수 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에서는 전쟁 말기 일본군이 '위안부'를 간호부로 편입했던 정황이 확인되고, 「진화계림회명부」에서는 위안소 업주로 직업을 등록한 조선인들의 기록을 통해 중국 진화에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한혜인 선생님의 글에서, 「진화계림회명부」는 쑤즈량·천리페이 선생님의 글과 윤명숙 선생님의 글에서 각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후 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명부들이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각지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었거나, 연합군이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귀환시키는 과정에서 만든 명부들이다. 이 명부들은 조선인의 강제동원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로 활용되지만, 그 안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강정숙 선생님은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피해자의 동원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연합군은 전후 포로로 잡힌 조선인 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를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보고서와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다.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와 중국 쿤밍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포로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쿤밍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쟁포로」가 그것이다. 이 두 보고서에 첨부된 명단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 나이, 동원 시기가 남아 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에서 버마 마니차로 동원된 여성들 20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한국 정부에 피해자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명부를 통한 연구의 어려움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명부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 명부가 제공하는 정보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명부가 작성된 역사적 맥락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명부 속 이름만으로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는 아직 분석되지 않은 조선인의 승선명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승선명부에는 전쟁이 끝난 후 태평양의 여러 지역에서 귀환한 조선인들의 이름, 귀환일시, 직업, 주소 등이 남아있다. 대부분이 남성이지만 때로 여성의 이름도 발견된다.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를 설명해줄 또 다른 자료가 없다면 추가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척시키기 어렵다. 피해자의 증언, 동원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 문서 기록이 교차하지 않는다면 명부 그 자체로는 연구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명부에 기록된 내용들이 개인정보라는 점은 연구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지금은 논문이나 연구 결과물에서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소, 인적 사항을 공개하고 있지만,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던 1990년대에는 이런 정보를 학계나 일반에 공개하기 쉽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의 정보까지도 자료 공개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우려하여 자료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 처음부터 이름이나 여타 정보를 가린 문서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료 활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세한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 지역의 명부에서 다른 피해자의 이름을 찾아낸 사례들이 몇몇 있다. 증언이 자료와 만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발굴된 명부의 수많은 이름 중에서 이렇게 피해자로 밝혀진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여전히 많은 이름들이 베일에 싸인 상태로 남아있다. 연구자 개인 혹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명부에 남아있는 이름과 주소를 바탕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이 바라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또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할 가능성 역시 갖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가족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피해사실을 더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귀환자의 승선명부를 바탕으로 피해자가 태평양의 트럭 제도로 동원되었음을 확인한 사례도 있다. 다만 이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덧칠된 이름들에서 역사 발견하기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자료와 달리 명부는 특정 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수, 출신지, 연령과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정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로 명부를 활용해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 중국 진화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같이 명부가 발견된 지역에 관한 연구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동원되었고, 얼마나 많은 위안소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증언과의 비교검토, 현지 조사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명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군'위안부' 제도 전체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설명할 때 곤란한 부분 중 하나는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했는지, 그 중 조선인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비율을 가늠하게 해주는 몇몇 자료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지역의 연구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동원되었는지, 그들의 동원 시기는 어떠했는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실증적으로 규모를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의 위안소가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러 지역의 사례를 종합한다면 더욱 정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는 아직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는 분야이다. 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명부도 많고, 새롭게 해외 자료보관소들에서 발견되는 명부들도 있다. 이 명부들에 관한 연구는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태를 밝혀내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연합군, 점령지의 조선인 조직들에 관한 연구와 함께 명부를 작성한 이들이 가졌던 시각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 본론에 수록된 서민교 선생님의 일본군에 대한 연구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소를 설치한 주체인 일본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의 분야와 시야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명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제국의 식민지와 점령지에 대한 문제, 인종주의적 시각의 문제,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등 여러 주제와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해야 한다. 앞으로도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목차 1부. 은폐의 기술, 제도 속에 숨겨지는 이름 발견되는 이름, 이른바 '위안부' 명부 - 한혜인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운영과 기록되지 않는 이름 - 한혜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의 위안소 운영 실태와 가려진 명칭 - 최종길 2부. 숨겨진 '위안부' 이름 발견하기 중국 저장성 「진화계림회명부」 속 '위안부' - 쑤즈량・천리페이 인도네시아 「팔렘방조선인회명부」 속 '위안부' - 강정숙 보론 기록과 기억의 사이에서, '위안부' 관련 명부 연구 - 강정숙 중국 당안관 자료 현황과 자료 해제(「진화성구 근황표」와 「진화계림회명부」) - 윤명숙 중일전쟁기 일본군 상황과 일본군위안소 설치 - 서민교 부록 자료 1. 인원 및 물자수송의 건 자료 2. 지나사변 이후 중남 중국에서 군에 대한 협력사항 자료 3. 타이완척식 관계 하이난도 도항자 인명표 자료 4. 하이난도 조사대용 및 군용자재 공급의 건 자료 5. 독립기념관 소장 수용인원명부 자료 6. 1946년 종전 당시 일본군 육군 주요 부대 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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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새로운 연대를 발명하는 ‘팀(Team) 『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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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작가의 『풀』 김금숙 작가의 『풀』(『Grass』 by Keum Suk Gendry-Kim)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한국에서는 2017년 8월 14일에 출간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어로, 다음 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 2월 14일 출간 이후 약 5개월간 2,300부 이상 팔렸습니다. 한국처럼 일본도 2월 초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4월 7일부터는 주요 지역에 긴급사태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지금은 긴급사태가 해제되었지만, 일상이 급격하게 바뀐 가운데 2월 21일 교도통신의 보도를 시작으로 6월 1일까지 11개의 언론사가 『풀』을 소개했으며 8개의 서평이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3월에 예정되었던 『풀』 원화 전시나 나눔의 집 방문 기획 등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팬데믹의 일상 속에서도 『풀』이 일본 독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풀』이 엮어준 네 사람의 인연 코로나19의 위협에도 『풀』의 높은 작품성과 '풀 한 포기를 전하려는' 진심은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미에 씨는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 교사였습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선생님의 공개 증언이 세상에 나오자 그는 관련 신문 기사를 교재로 만들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94년 2월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스미에 씨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났고 자신이 만난 그들의 삶과 '위안부' 범죄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그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평화 운동과 인권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풀』을 처음 읽은 스미에 씨는 ''위안부' 문제는 어렵다', '나와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만화 『풀』이라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번역과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런 스미에 씨의 결심과 김금숙 작가를 이어준 사람은 강제숙 씨입니다. 강제숙 씨는 1990년대 초반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95년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지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해 왔으며 지금은 동남아시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미에 씨와 강제숙 씨는 19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오랜 동지입니다. 강제숙 씨는 『풀』에도 등장하는데, 김금숙 작가와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이옥선의 삶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이 책에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활동에서 강제숙 씨를 만났습니다. 시민모임 관련 행사에서 강제숙 씨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을 이어주는 든든한 통역자이자 길잡이였습니다. 제가 스미에 씨를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90년대 후반 관부재판 지원을 위해 대구 시민모임을 방문한 스미에 씨와 함께 김분선, 이용수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방문한 일본인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던 두 분이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위안소에서 배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노래와 춤을 즐기셨지만 그렇게 오래 일본어를 말하고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피해자들에게 일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듣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가해국의 시민과 함께 하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한 스미에 씨가 저에게 『풀』을 함께 번역하자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시작된 인연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풀』이 만든 새로운 연대의 장 2019년 8월 23일, 쓰즈키 스미에, 강제숙 씨와 함께 김금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번역자로서 작가와 상의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낸 뒤 도란도란 밥을 먹는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20년 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귀한 선물 같은 작품을 만나 번역이라는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연대를 이어가게 되었으니까요. 이 연대는 세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풀』의 일본어 출판은 처음부터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본어 출판위원회 공동대표가 되어 준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명예 관장과 오카하라 미치코(岡原美知子) 씨도 스미에 씨의 오랜 동지입니다. 미치코 씨는 히로시마현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스미에 씨와는 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미치코 씨는 1993년에 열린 심포지엄 '제4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 진정한 화해를 바라며'에서 처음으로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본명을 숨긴 채 증언한 한국의 피해자가 김복동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2016년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치코 씨는 한국, 중국, 필리핀의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안전하게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계속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2012년 4월 결성, 이하 히로시마 네트워크)의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히로시마 네트워크는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일본 히로시마 시내에서 시위를 엽니다. 지난 6월 27일에는 유엔이 정한 '분쟁 하 성폭력 철폐의 날(6월 19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피해자 관련 행사를 열었습니다. 스미에 씨, 에리코 씨, 미치코 씨 세 명과 함께 출판사 고로카라(こらから)가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 9월 7일 시작된 모금은 4일 만에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했습니다. 예상 밖의 호응이었습니다. 2차 모금도 순식간에 목표액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응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총 432명의 시민이 펀딩에 동참해준 덕분에 일본어판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2020년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야마에서 일본어판 『풀』 출판 기념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도 열 수 있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위안부'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고 활동해 온 4개 지역의 시민들을 포함해,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문제 운동, 후쿠야마에서는 부락민 차별 문제 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주축으로 행사가 열렸습니다. 21일 도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건물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자료관의 스태프들과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 시바 요코(柴洋子)같은 활동가들 덕에 가능했습니다. 시바 씨는 『풀』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같고, 이옥선은 대만의 피해자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시바 씨 외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랜 시간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이옥선과 함께 각지의 피해자들을 떠올렸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히로시마조선중고급학교 학생이 사회를 봤고, 후쿠야마에서도 고등학생이 사회를 봤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30년 '위안부' 운동의 바통이 넘겨질 것입니다. 이 만남은 '위안부' 피해 역사를 뉴스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역사와 제대로 대면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2일 오사카 행사의 공동 주최는 '다민족 공생 인권 교육센터'였습니다. 오사카에서의 행사장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 고령자 복지 시설 '바다'를 운영하면서 인권 운동을 하는 송정지 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남편 김동휘 씨는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하던 1975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된 국가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제가 재일한국인 조작 간첩 사건의 재심 재판을 지원, 연구하면서 만난 인연입니다. 당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열심히 책을 판 사람은 김오자 선생님을 비롯한 조작 간첩 피해자와 가족분들이셨습니다. 고문 수사관, 조작에 관여한 검찰, 사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풀』의 이옥선이 “일본놈들이 나빠, 아베가 사죄해야지, 배상해야지”라고 하는 원통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오사카 행사의 뒤풀이 자리에는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조작 간첩 사건 당사자들과 관계자, 지역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온 분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풀』을 통해 국가 폭력과 인권을 다시 생각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에 전하는 30년 운동의 역사 『풀』의 그림은 단순함이 극대화된 흑과 백의 수묵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은 내가 되기도 하고, 붓 터치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바람, 비, 산, 나무, 나뭇잎, 풀, 새는 이옥선의 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김금숙 작가가 그려낸 위안소에서의 직접적인 폭력은 누군가가 배당받았을 군화, 검은 묵으로 채운 3쪽 18칸의 어둠, 그리고 뼈마디 굵고 거친 이옥선의 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검은 여백 속에 배인 짐승 같은 울부짖음, 평생 이옥선이 안고 온 고통의 깊이는 독자가 상상해 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는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남영동, 서빙고의 몇 호실을 떠올리고, 지원자들은 피를 토하듯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을 떠올립니다. 『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딸로 태어나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옥선이, 전쟁이 끝나고도 여성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어야 했던 구조적 폭력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풀』의 특별한 점은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풀』 속의 '나'는 이옥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합니다. 작가는 엄마 배에서 나와 여태껏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이옥선을, 형제끼리 의지하며 살려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뭣 하러 왔나 싶다는 이옥선을, 폭 안아드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대신에 작가는 15살 옥선이 걸었을 중국 연길의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느끼고, 연길 동 비행장에서 서시장을 지나 위안소였던 건물의 복도에 섭니다. 『풀』 속의 작가를 따라 이옥선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는 이옥선의 삶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내가 사는 오늘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잔혹한 폭력의 실상, 70여 년 전의 과거사, 일본에 대한 증오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옥선은 어떻게 살고 싶었던 존재였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우리 사회는 괜찮은가?' 자문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부재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풀』은 소중한 작품입니다. 해외에서도 『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9 미국 뉴욕타임스 최고의 만화', '2019 영국 가디언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만화계 시상식 중 가장 영예로운 '아이스너 어워드' 3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당당히 맞서왔고 지금도 맞서고 있는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와 지원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옥선들'의 삶으로 대변되는 참담한 역사로 '모험'을 떠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팔린 2,300여 권의 『풀』은 역사를 지우려는 힘에 맞서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국경을 넘은 '위안부' 운동 30년 역사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