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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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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한’ 정책에 따른 ‘결정’ 중국에서 일본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강간에 대한 조사와 논의로 1997년 북경출판사의 『일본군 중국침략 폭행실록』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나 성폭력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정부는 1,000명이 넘는 전범 용의자를 구류하였으며, 피해자 측과 아울러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1945년 러시아 군대에게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되었던 일본전쟁범죄자들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되어 푸순(抚顺) 전쟁 범죄자 관리소(사진1)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2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침략 전쟁 중 일본전쟁범죄자 처리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으로 약칭)이 통과되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령으로 공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은 이 결정에 따라서 특별군사법정을 조직하여 1956년 6월과 7월, 랴오닝성(辽宁省) 선양(沈阳)시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서 공개재판을 했다. 재판의 공소서와 변론은 모두 ‘결정’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판결되었다. ‘결정’은 일본의 전범들이 국제법과 인도에 반하는 죄로 중국의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이 투항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상황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게다가 구속 기간 중 전범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대 다수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정’은 ‘관대한’ 정책에 따라 전쟁 범죄자들을 분별 처리한다고 선언한다. 이 ‘결정’은 두 차례에 걸쳐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범에 대한 사면을 암시한다. 실제로 법정 변호인단의 변론 역시도 상투적이다시피 ‘결정’이 제시하고 있는 관대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세 가지는 현재 상황 변화, 피고인의 사죄와 반성, 중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 회복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전범자들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하는 변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피의자가 제국주의 국가와 군부, 그리고 각각의 국가기관에 속해있는 구조 속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군국주의 교육과 환경 속에서 군국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정부의 교화 노력을 통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포로들에게 ‘세심하고도 꾸준한 배려’에 입각한 ‘교화’사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들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교화사업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재판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정부의 교화사업은 판단 여하에 따라 제네바 협약 총칙 제3조 ‘신앙에 따른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사회주의 교화에 대한 낙관적 정치철학이 주요한 전범자들을 옹호하는 변호 논리로 작용하였다. 다케베 류조(武部六藏) 등 28명의 전쟁범죄안건에 대한 공소인은 리푸산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공소자인 자신이 국제법과 인도를 위반한 전쟁범죄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에 따른 징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외 스즈키 히라쿠(鈴木啓久) 등의 공소 내용을 보면 상당수의 양민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 그리고 “중국부녀를 일본군대 ‘위안소’로 보내어 강간한 일” 등을 중요한 공소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재판은 시종일관 ‘결정’의 원칙에 따라 변호와 공소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변론의 주요한 논거에 대한 검찰의 이의제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즈키 히라쿠 등 8명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것은 왕즈핑이었다. 그는 개인이 사회의 영향과 역사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지만, 결코 개인의 능동적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일본에는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힘도 있었다. 그런데 피고인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의식적으로 다양한 죄악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이 저지른 엄혹한 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고인의 범죄행위가 명령의 집행이었다고 하지만 일정한 직책을 지닌 자들은 국제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무장 양민학살과 마을 파괴, 부녀강간, 독가스 살포 등이 모두 엄중한 범죄행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상급의 명령을 변경하거나 저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국침략이 일본 군인의 직무”라고 저항하였다면서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변호사도 이 점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소인도 충분한 이해를 표하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위안에서 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20명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불기소되었다. 9명 전범의 죄상 중에는 강간 범죄가 3명이었다. 120명 중 자료가 남아있는 118명이 강간, 윤간을 자행하였으며,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죄가 있는 자가 43명이다. 그중 70명은 수십 명을 강간, 윤간하였으며 유아 강간을 인정한 자도 있다. 여기서 불기소된 120명의 범죄의 중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강간, 윤간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재판을 통해서 전쟁범죄를 따지고자 했다기보다 중국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실리를 꾀했던 것 같다.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6월 2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는… 양국이 빠른 시일에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하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을까?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을 품고 죄를 묻는 일이” 공소인들에게 부여된 권능일까?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용서의 주체는 누구일까?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진술한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정부를 향하여 자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전범자들 중에는 앞서 논한 산시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혔던 스미오카 요시카즈(住岡義一), 사가라 게이조(相樂圭二) 등도 있었다. 이들이 산시성 일대에서 자행한 부녀에 대한 폭력(강간, 윤간, ‘위안소’)으로 심신이 망가진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판 과정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자마자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 기소를 면한 이들과 질병으로 석방을 허락받은 이들은 3차에 걸쳐 일본의 적십자에서 보내온 일본 윤선 고안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복역을 선고받은 이들도 대부분 형기를 앞당겨 1960년대 중반까지는 모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귀국하는 고별사의 보도 내용이다. 1차로 불기소 처분되어 귀국하는 도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郞)는 ‘잘못을 하면 바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확실히 잘못했다. 오늘 나는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 인민에게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귀국자들은 “일본과 중국은 빨리 국교를 회복하여 정상화하여야 하며 재차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돌아갔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보도자료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 정부가 이 보도를 통하여 전범자들을 불기소 처리하고 귀국시킨 이유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피해자의 절규와 중국 정부의 ‘관대’하고 ‘정의로운’ 재판, 그리고 스스로 용서받아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전범자의 자부를 보면서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이 전제되었을 때 용서와 화해란 가능한 것일까? 라는 사유가 과제로 제기된다. 법학자 이재승은 용서와 화해에도 도덕적 문법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국가권력이 범죄자의 처벌과정을 독점하고, 정의의 유일한 실현자로 나선다면 피해자의 소외, 배제, 파멸이 예정된다고 말하였다. 이재승의 지적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허우둥어(侯冬娥)의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교화’되어, 관대한 전범 재판을 거친 일본 군인들은 귀국하여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조직하여 중·일의 친선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런데 피해자 허우둥어는 자신의 피해를 말하겠다는 고통스러운 결심을 한 날에도 한나절 동안 비통한 눈물만 흘렸을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중일수교가 맺어진 지금(1992년)은 책임을 묻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52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타이완)은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일화조약·부속의정서(日華條約·附屬議定書)」 1항에서 “일본 인민에 대하여 관대하고 우호적인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스스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4조 갑항 제1항의 일본국이 제공해야 하는 용역의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 양국 대표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수교 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서 제7조는 전쟁배상 문제에 대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선언한다. 중일 양국 인민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엄청난 피해는 발생했지만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개인’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일본군에 의해서 자신의 존엄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피해가 ‘창부’라는 오욕으로 뒤바뀌어 일상생활에서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다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의 자존도 깊게 상처 입어 ‘대국’ 중국의 과시에 편승하여 피해의 실태를 알면서도 봉인함으로써 피해 여성들은 존엄을 회복할 길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게 되었다.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고 있었으며, 글자도 모르고 마을에서 발생한 엄청난 폭력적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 채 알지 못하였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의 증언은 피해를 ‘목격’했던 딩링(丁玲)이 1941년 작품 속 주인공 전전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으나 채 만들 수 없었던 피해 여성 시점의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언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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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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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남성영화의 시대와 ‘위안부’ 영화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대체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남성 중심 서사에 몰두해 왔다. 2015년이 되면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이 점점 강해지는데, 아마도 ‘벡델 테스트’의 인기는 이렇게 여성 캐릭터를 소외시켜온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을 것이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스 벡델이 고안한 이 양성평등지수 테스트는 “영화에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등장하는가 2. 그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의 내용이 남자에 관한 것이 아닌가”를 질문한다. 사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 작품이 바로 ‘여성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한국 영화의 현주소란 이 정도의 테스트조차 까다로워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기준으로 회자되었다. 한편, 2017년의 경우 흥행 한국 영화 15위 안에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단 한 편이었다. 이 역시 살펴볼 만하다. 지난 3년간, 소위 여성영화로서 화제를 불러 모으거나 흥행을 한 작품 안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16년 개봉한 <귀향>(조정래)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다. KBS 특집 드라마로 제작되어 영화로 재편집된 <눈길>(이나정, 2017)은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손희정, 권명아, 권은선, 주유신 등) 비평가들 사이에서 <귀향>과 함께 비교해서 볼만한 작품으로 계속 회자되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웰메이드 상업 영화로서 흥행하면서 여성 아티스트 나문희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고,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충성도 높은 팬덤인 ‘허스토리언’의 탄생을 불러왔다. 여전히 남성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여성의 이야기는 잘 상상되지 않는 한국 영화판에서, 여성 서사 중에서는 유독 ‘위안부’ 서사가 큰 관심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전까지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 영화에서 그다지 주목받는 소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는 좀 특이한 일이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소개될 본 글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귀향>에서부터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대중에게 소개된 ‘위안부’ 영화들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각각의 영화들은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 안에서 관객을 만났고, 또 각기 다른 의미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안’은 서사와 이미지의 문제를, ‘밖’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관객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귀향>의 화제성과 『제국의 위안부』라는 맥락 2016년, ‘위안부’ 문제는 또다시 대중적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15년 출간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12.28 불가역적 합의가 서둘러 선언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사건에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작품인 <귀향>이 개봉했다. <귀향>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이 작품이 강간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구성하여 고통을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영화가 촉발한 감정의 역동과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때, 그에 반박하는 대중 서사로서 <귀향>이 선보이는 식민지배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 이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귀향>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소통되는 사회적 맥락 중 하나였던 『제국의 위안부』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제국의 위안부』와 <귀향>은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 전자가 ‘위안부’ 피해자의 징모 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할 때, 후자는 성노예화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폭력이나 고통이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공유하고 있었던 가부장제의 문제이지 제국의 지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은 그녀들을 팔아넘긴 부모거나 그녀들을 징모하고 판매했던 조선인 포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설명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매춘을 했던 ‘가라유키상’ 전통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선 여성들의 사정은 당시 일본 매춘 여성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주장은 중국 여성과 조선 여성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 남성들의 ‘동반자이자 동료’로서 서로 정을 나누는 보호의 대상이었던 반면, 중국 여성들이야말로 일본군 남성들의 강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라는 상상력은 이렇게 발동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에서 발견되는 징집 과정에서의 자발성과 ‘즐거운 한때’에 대한 기억들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남한의 가부장제와 착종된 민족주의적 사유체계 및 그를 바탕으로 하는 ‘폭력적인 운동’이 ‘위안부’ 피해자를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 속에 가둬 넣어야 했기 때문에 이 기억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피상적으로 보편적 성 체제인 가부장제만을 문제 삼으면서 가부장적 군사주의에 기댄 일본 제국주의의 작동 기제에 면죄부를 주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의 부제는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을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는 공적 기록에서 사라진 ‘여성기억’을 복원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여성기억을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역사 다시 쓰기’로 치환해 내고 재영토화시킨다. 기실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안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려면 일본과 조선/남한의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가부장제와 어떻게 교차적으로 작동하였는가를 살펴야지, “가부장제가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지배 체계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작업은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등장하여 12.28 불가역적 합의라는 외교 정치적 사건과 협업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냈다. 매혹이 된 폭력, 남성으로 젠더화되는 대중 <귀향>은 『제국의 위안부』와는 대조적으로 보편적인 가부장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위안부’ 동원 체제를 성노예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관객을 이끌었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공모를 이해하면서 가부장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서로 접속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영매인 은경(최리)에게 귀신이 들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은경이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은경의 아버지가 그를 공격하자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붙는다. 그리고 둘 다 은경의 몸 위에서 죽고 만다. 은경은 보편적인 성폭행 피해자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을 연기함으로써 ‘위안부’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욕망을 가진 남성으로서 속죄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잠재적 가해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의 고백은 동시에 그 ‘욕망’을 자연화시키면서 오히려 위안소 제도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서 감독의 이런 태도가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드러나는 영화적 시선의 주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이 되며, 이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반드시 그런 젠더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젠더화된다. 이때 우리는 <귀향>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관객이 <귀향>에 몰입하고 열광하도록 했던 대중성은 영화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적 서사-이미지’(권은선)가 선보이는 선정성에 놓여 있었다. 여성의 신체와 강간을 일종의 볼거리로 만들고 그 피해의 고통을 물신화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봉합시킨다. 물론 영화는 텍스트 내에 이미 남성적인 선정성에 대한 변명을 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미술치료 작품에 바탕하고 있음으로 ‘사실적 묘사’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성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성폭력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과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것인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의심은 <귀향>의 연작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조정래, 2018, 이하 <귀향2>)를 보면 더욱 강해진다. <귀향2>는 <귀향>에 출연했던 한 배우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합창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흑백 기록 영상과 <귀향>의 컬러 영상이 교차 편집된 작품이다. 현재의 시점을 담은 흑백 영상은 사실 아무런 서사의 의미 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귀향2>는 <귀향>의 재탕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작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아류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류작을 통한 자기 복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아류를 만들고야 마는 감독의 나르시시즘에 놓여있다. 감독은 <귀향>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위안소 첫 집단 강간 시퀀스’를 재생하면서 그 위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구술을 보이스오버로 배치한다. 그 목소리를 영상 위에 그대로 입히면서 “내 영화는 피해자의 증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재차 강변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의 목소리는 감독의 정당성을 보증하기 위한 변명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귀향2>는 <귀향>의 재현 영상과 현실 기록 영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기록 영상조차 흑백으로 색을 빼버린다. 관객들로 하여금 두 푸티지의 성격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영상은 철저하게 죽은 이미지로 박제되고 도구화된다. <귀향2>에 이르면 “과연 <귀향>은 여성영화였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귀향>은 ‘여성영화’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으로 젠더화된 관객성에 소구하면서 남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피해 서사를 통해 표현한 ‘남성영화’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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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2부 - 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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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상은 가능하다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나무연필, 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를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 <눈길>의 경우 <눈길>은 그 ‘반복과 차이’ 때문에 <귀향>과 자주 비교되었다. 두 작품 다 위안소에 끌려가는 소녀들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 소녀들 사이의 우정, 죽음과 생존, 그리고 노년에 다다라 벌어지는 일들을 담는다. 이렇게 비슷한 서사구조를 공유하는 이유는, 두 작품 다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증언 안에서도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재현을 선보이고 있다. <눈길>은 <귀향>과 달리 발가벗겨진 채로 두들겨 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예컨대 <귀향>이 강간당하는 ‘처녀’의 비명을 담아낼 때, <눈길>은 매일 반복해야 했던 콘돔 세탁의 비루함과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한탄을 보여준다. <눈길>에서 여성은 그저 ‘유린당한 몸’으로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짓밟힌 짐승’으로 여길 때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길>이 ‘여성들의 읽고 쓰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영애(김새론)는 종분(김향기)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삶의 이유를 찾고, 종분에게는 글을 배운다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된다. 한 평론가는 이것이 가르칠 수 있는 자와 배워야 하는 자라는 계급적 위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가르친다’와 ‘배운다’라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가지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될 수 없다. 영애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아는 종분이 영애에게 ‘글을 가르칠 기회’를 준다. 읽는 법을 알려달라며 책을 먼저 내미는 것은 종분이다. 그리하여 “너 착각하지 마라, 너나 나나 똑같애!”라는 종분의 외침은 성노예화가 어떻게 피식민자의 계급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폭로한다. 이후에 종분에게 있어 글을 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비로소 이 국가 시스템에 시민으로서 다시 기입된다. 영애 덕분에 『소공녀』를 읽게 된 그는 귀향하여 ‘강영애’라는 이름으로 국가 시스템에 등록하고, 국가보훈처가 보낸 고지를 읽으며, 첫사랑에게 편지를 쓴다. 종분에게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없는 자’가 아니라 ‘등록된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 기록할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렇게 ‘들리는 자’, ‘읽힐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증언의 힘: “아이 캔 스피크” 우리는 왜 “비명과 울부짖음”만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결국 ‘위안부’ 피해자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간에 자신의 언어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귀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의 완전한 부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스템의 완전한 부재’다. 여기서 ‘부재’란 영화가 그것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게 사라진 일본과 조선/남한은 ‘사악한 일본인’과 ‘무능한 조선/남한 남자’라는 정형으로 개인화된다. 오빠는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 무능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년이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고, 접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이는 가족 로망스 안에서만 정치가 상상되고 재현되고 설명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인식론을 반영하면서 재생산된다. 물론 국가의 부재야말로 이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굿이라는 문화적 형식에 기대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대중을 매혹시킨다. 이때 정민(강하나)의 혼을 ‘귀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매 은경은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 성/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머물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폭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은경이 영매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중요했을 것이다. 은경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 가해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까지 목격하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이성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 그 제도의 틈새에 존재하는 자, 영매가 된다. 과연 생존자에게 세상을 떠난 동무와 그로 상징되는 고통의 기억은 영매를 통해서만 불러올 수 있는 타자였을까.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있었다”는 영옥(손숙)의 말은 생존자들이 삶에서 언제나 죽은 자들의 혼과 함께였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영매여야 하는가? 다시 <눈길>을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 ‘할머니 종분’(김영옥)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 영애의 영혼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한다. 종분은 귀향 후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는 종분을 ‘국가 시스템에 등록된 자’로 그려내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분에게 그 과거가 '귀신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 것이 ‘진혼’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할머니들의 용기와 결기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켜온 살아 있는 운동들이었다. <귀향>에도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이 든 영옥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던 장면이다. 신고할까 말까 주저하던 영옥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를 하겠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말에 되돌아가 외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이는 제도에 ‘미친년’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제도의 성격 자체를 다시 쓰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녀 시절’의 재현을 과감히(!) 삭제하고 말하는 자로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점프한 <아이 캔 스피크>가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아이 캔 스피크>는 <귀향>에서 할머니가 “그 미친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리고 <눈길>에서 상상하고 재현했던 ‘말하고 쓰고 기록하는 행위’에 주어졌던 의미를 살려낸 작품으로 ‘위안부’ 재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민원 왕” 옥분 할머니(나문희)와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의 우정을 다룬 코미디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영화가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였다. 민원 왕 옥분은 이 청문회에서 공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고, 민재를 자신의 영어 선생으로 찍으면서 사건과 사고가 펼쳐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영화를 추동하는 모티브이자 에너지이며 사건이고 주제인 셈이다.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제목을 잘 지은 작품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영화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 안에 줄거리뿐만 아니라 주제가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스토리언’의 탄생과 남겨진 과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에 걸쳐 진행된 관부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는 <허스토리> 역시 제목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작품의 타이틀 크레딧은 <히스토리(History)>로 시작된다. 이어서 영화는 ‘그의(His)’를 지우고 그 자리에 ‘그녀의(Her)’를 다시 써넣으면서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바로잡아 여성 중심으로 재기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여성들의 삶 속에서 쌓인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셈이다. 타이틀 크레딧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는 다른 어떤 ‘위안부’ 영화보다 여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페미니즘적 서사-이미지 구성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강간을 볼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을 피하고, 여성들의 주체성에 집중하며,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영화가 많은 부분을 재판정에서의 증언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였을 터다. 민규동 감독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허스토리>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 비평이 ‘위안부’ 재현에 대해 고민해 온 내용을 세심하게 참조하면서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이 작품은 일종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교본이 정답은 아니고, 언제나 ‘좋은 작품’인 것도 아니다. <허스토리>는 아쉽게도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을)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려놓은 서사-이미지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째서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의 재현은 소녀-할머니의 이분법 속에 갇혀있는가.” 잠시 <눈길>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종분이었다. 이런 평가에 대해 <눈길>의 유보라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초에 <눈길>을 기획할 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생존해 돌아온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소녀-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냥 ‘할머니’ 캐릭터를 상상했다면, 나 역시 상처받거나 분노에 찬 캐릭터를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리서치하고 생각하고 상상해 보니, 종분과 같은 두터운 맥락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상상력’의 문제란 이런 것일 수 있다. 즉각적으로 손쉽게 주어진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 오랜 고민과 성찰 안에서 등장하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그런 ‘새로운 이야기’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줄 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위안부’ 피해자의 30~40대를 재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곳에 한국사회의 한계가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허스토리>는 영화와 여성 관객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우 흥미로워졌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영화의 남성 중심성에 지친 청년 여성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맸다. 2018년에 <미쓰백> 팬덤 ‘쓰백러’와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의 등장은 이런 흐름 위에 있었다. 허스토리언은 단체관람과 티켓 구매 등을 통해 관객 운동을 펼쳤고, 이는 배우 김희애의 팬덤 형성으로도 이어졌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파워하우스 여성 영웅’인 문정숙(김희애)에 열광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객이 등장한 것이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관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 안에서 대중 ‘위안부’ 서사는 무엇을 갱신해야 하고 갱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언제나 형성 중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의 여정에는 종착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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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2) 송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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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옥 (문화센터 아리랑 관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와 여성사의 기틀을 마련한 연구자로서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저서로 『군대와 성폭력』,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공저)』, 『한국 여성사 연구 70년(공저)』,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공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 등이 있다. Q. 송연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웹진 결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1947년에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교육은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가 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어가 되겠지요. 식민주의가 신체화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시절,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자 한국에 민족사를 배우러 갔는데, 당시 조국의 정치적인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국에 가게 된 건 1992년부터입니다. 역사 연구를 단념한 시기도 있었으나, 50세 때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어 그 후에는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대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에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双葉社, 1973)를 읽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센다의 책에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약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위안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한국에 살아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죽거나 버려졌을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그동안 진행하셨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들을 소개해주세요. 『개벽』77호(1948년 2,3월호)에 최정석이란 사람이 쓴 ‘해방되는 창기 5천명’이란 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습니다. 글의 앞부분에 ‘일제가 여성에 관해서 이 땅에 남긴 해독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공창제도(公娼制度)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봉건적인 노예여성관을 유지, 연장시킨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정석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포함해서 공창제를 ‘日帝(일제)의 搾取(착취)와 이 땅의 社会悪(사회악)을 가장 醜悪(추악)한 가운데 가장 端的(단적)으로 나타내는 実証(실증)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일제가 조선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유린·착취하고, 가난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거잖아요. 개항 이후의 일제 침략 과정을 보고, 최정석의 글을 해독한 후 일제가 식민지지배 정책으로 이용한 공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를 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공창제는 일본에서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이 쓰이지만, 그 내용은 일본 공창제보다 업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여성들에게는 더 불리하게 만들어졌더라고요. 이러한 식민지 공창제가 ‘위안부’제도의 전제가 되었다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군‘위안부’를 연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문제를 연구과제로 하면 일본인이라도 대학 교수로 채용되기가 어렵다고 해요. 반일 사상의 소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거지요. 제가 1993년에 조선사연구회 대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국가적 관리매춘’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연구한 결과,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의 성매매업 종사율이 높아진 결론을 얻었어요. 그것은 조선인이 전쟁 체제에 휘말려 들어 간 것을 증명한 건데, 제 발표를 들은 한국 남자 유학생이 저에게 막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취지를 단순하게 오해한 거였지만, 그런 식의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은 민족 차별 속에서 3D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런 반응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Q. 연구하시면서 만났던 ‘위안부’피해자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1992년 8월 말, 한중국교가 체결되기 직전에 중국 목단강까지 가서 김순옥 할머니(1922~2018)를 만났어요. 김순옥 할머니의 존재는 우연히 알게 됐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조사차 러시아 국경에서 가까운 둥닝(東寧)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예전에 일본 병사였던 사람이 안내를 해줬죠. 조사 마지막 날에 마을 노인이 ‘카이코’라는 여자가 옛날에 ‘위안부’였다고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중국 여행이 어려울 때라 귀국 날짜를 연기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행은 숙제를 남긴 채 그냥 돌아왔어요. 이후, 저와 김영희씨가 연변대학 임희준 교수님의 도움을 받고 둥닝까지 조사하러 갔는데, 옌지(吉林)에서 둥닝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10시간이나 택시를 달려서 저녁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목단강에 있는 딸 집에 갔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날은 둥닝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목단강으로 출발했어요.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어요.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 이동만으로도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순옥 할머니를 만났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한테도 저희들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동포였는지라 정말 기뻐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대해주셨어요. 딸한테도 얘기 못 했던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얘기 해주셨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나 뵈니까 ‘카이코’의 수수께끼도 풀렸어요. ‘카이코’는 카요코란 일본 이름으로 위안소에서 붙여진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카이코’라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Q.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연구자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본 교육기관에서만 배운 재일조선인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을 평가하는 눈이 냉철하다는 겁니다. 일본 역사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일찍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에선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15년 전쟁이 아니라 50년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으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소평가에서 과대평가까지 눈높이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위안부’ 연구에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Q.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목 혹은 집중하고자 하셨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상해 위안소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얻은 결론은 상해와 같이 전쟁터였다가 점령지가 된 지역은 위안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매매업이 확대·번창했다는 거예요. 성매매 요리점은 위안소를 보완하고 또 국가가 개설한 위안소가 있으므로 다른 성매매업도 대의명분을 얻어 서로가 번창하는 그런 전쟁 사회상을 더 밝혀야 해요. 공창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또 지금 일본에서 ‘위안부’제도와 구별해서 공창제를 정의하는데 시민법, 평시, 폐창의 규정을 그 근거로 들지만,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은 시민법이 적용된 평시였을까요? 그런 공창제 정의는 식민주의와 전쟁 사회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연구자 혹은 개인으로서 선생님의 인생에서 ‘위안부’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본군‘위안부’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재일조선인 여성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성차별, 민족 차별, 계급차별을 복합적으로 경험했고 정신적인 상처도 깊이 입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의 상징이 ‘위안부’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의 뿌리인 식민주의는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나타난 헤이트 스피치와도 상통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저희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희망으로 연구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이슈 중에서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이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후학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연구를 더 확장해가면 좋을까요?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위안부’문제는 많은 증언과 연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아직 낡은 담론과 틀 속에 갇혀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연결하여 보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공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를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실상을 밝힐 연구가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이슈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감정적 층위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 말씀드린다면 민족적인 시각은 강해도 여성적, 계층적인 시각을 복합해서 보는 것은 아직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해방 후에 만들어진 민족주의도 강하고요. 역사학계에선 친일이냐 항일이냐 하는 2항 대립적인 단계를 넘어선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으나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적인 시선에 관해서는 그런 성과가 잘 반영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회사 연구가 더 다양하게 진전되어야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 하에서 국내외에서 생활한 동포의 실상이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아직까지 성매매에 대한 표리일체로 된 호기심과 멸시감, 혐오감이 강한 사회입니다. 공창제 운운할 때 나오는 거부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을 더 일상화해야 하고 성적인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Q.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를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 낳은 문제이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위안부’ 제도를 낳은 배경, 즉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사회와 경제 상황을 지방마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연구가 나와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만 보면 정치적인 담론의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실증적인 연구가 소외될 우려도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으로 중첩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중국에 있는 자료도 계속해서 발굴·수집해서 그 성과를 널리 공개해 젊은 연구자들을 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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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3)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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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한국근대 여성사를 전공하였다. 정신대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 녹취 작업을 진행하는 등 초창기 ‘위안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논저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 조사』,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군성노예제문제와 관련한 남북교류와 북측의 대응」,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Q. 강정숙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농민운동)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성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껴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연구회에 들어가 조사연구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주제를 비롯하여 여성사와 관련된 연구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책을 통해서였어요. 집에 ‘위안부’를 소재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 일본 책이 번역되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여성들을 굉장히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 쓴 책이었어요. 읽고 굉장히 불쾌해서 태워버렸어요. 아버지 책인데 그리 중요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예요. 90년대에 『한국여성사 근대편』을 쓸 때 ‘위안부’ 부분을 제가 쓰게 되면서 이 문제가 민족, 계급, 젠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농축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마침 ‘위안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1992년 3월에 제가 한국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가입했거든요. 원래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연구자 한 분이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역사연구자가 부족하니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파견 나간 기분으로 정신대연구회로 갔죠. 그런데 그게 잠시가 안 되더군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나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Q. ‘위안부’ 문제 연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주목하고자 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같이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수용소 명부, 귀환자 명부 같은 것을 저의 연구 주제로 삼았죠. 이러한 명부들은 당시 현장의 미묘한 부분들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죠. 그렇지만 제가 발굴했던 명단들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명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였는지 아닌지는 제가 증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를 찾아가 증언을 듣거나, 그 외의 군인 군속 등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차 조사를 했죠. 그래서 결국 사실이라고 확인되었을 때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강제적’인 동원이라는 말도 고민해봐야 해요. 만약 ‘강제’가 ‘물리적인 강제’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저는 ‘강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물리적인 강제 동원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 없이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구조적인 측면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다름이 없어요. 공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있잖아요. 강제라는 의미를 폭넓게 이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과제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걸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꾸 뒤로 미뤄요. 저의 바람이자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본 욕만 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확장하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처음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누구인가요? 당시 구술했던 정황들이 궁금한데요. 그때가 할머니들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이제 막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취재 형식의 짧은 인터뷰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증언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당시 저는 강덕경 할머니와 박옥련 할머니를 만났어요. 증언집 1집에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당시 제 나이가 35, 6세 정도 됐을 때예요. 할머니 눈에는 당시의 제가 완전 새댁이었어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말을 가려서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봤을 때 저는 딸뻘이고 세상의 쓰라린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거죠. 그리고 당시는 국민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잖아요. 관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실 연구하기가 쉽지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처녀'여야 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하고, 엄청난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거죠.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할머니들은 그전까진 어디 가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약자였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었겠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틀에 맞춰요. 그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는 할머니의 증언을 가려들으면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위안부’ 연구 초창기에는 연구를 진행하시기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6년 무렵이었나. 일본 방송국 NHK에서 같이 조사를 하자고 의뢰가 왔어요. 필리핀 수용소 기록에서 발견된 피해자 중 한 분인 김소란 할머니를 같이 찾아보자고요. 그래서 필리핀 수용소 기록을 들고 일본에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하고 여순주 선생님이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당시 할머니의 한국 출신지 면사무소 도움을 받아서 제적부를 찾았죠. 그때는 제적부를 개인이 볼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못 보죠. 그런데 할머니가 미국에 계시더라고요. 미국에 계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간신히 찾아내고 당시 LA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할머니를 찾긴 찾았어요. 그런데 빠뜨린 게 있었죠. 할머니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료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게 할머니한테는 엄청난 충격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의 과거사를 다 아시고 결혼을 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영주권 때문에 잠깐 미국에 가 계셨던 거고, 원래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할머니가 건강 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사진 한 장 안 남겨주셨어요. 김소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김소란 할머니의 구술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회가 발간한 세번째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증언집 1, 2권과는 다르게 사투리, 구어체 등 피해자들의 말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여 피해자들의 정서와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강제로 동원되어 남양군도 파라오에서 군생활을 했던 홍종태 씨가 경험하고 목격한 위안소 및 ´위안부´에 대한 증언도 담았다." popuptitle="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data-url="/taxonomy/term/393">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에 있는데, 거기엔 포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이 조그마하게 실려있어요. 연구자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을 잘 못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 삶이 일차적이고 중요한 거죠. 오키나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뻔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활동가 선생님이 “그게 할머니한테 뭐에 도움이 되는 건데?”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배란 이런 거구나’ 그런 걸 느꼈었는데요, 그래서 스톱 했어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생활과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Q. 지금은 역사학계 안에서 구술사가 방법론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을 바꾸게 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던 것 같아요. 구술 작업을 하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던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트라우마도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할머니 구술 중의 특정 내용을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반복해서 질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전의 이야기와 엉키거나 그 전의 이야기가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를 해야 할머니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구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증언집이 일본 우익에게 부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구술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은 굉장히 미숙했다고 봐야죠. 그때 우리 사회가 짜임새 있는 방법론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할머니는 이렇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한 거죠. 대부분의 사회문제 해결이 운동이 선행되고 연구가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놔두고 운동만 앞서서 진행되면, 연구자가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생겨요.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역사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면 굉장히 자극적인 것 위주로 연출하게 되고, 사실과 점점 멀어질 수가 있는 거죠. ‘위안부’ 연구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Q. 아까 군인 군속 등 할머니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겠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보다 당시 현지에서 일했던 군인 군속들이 비교적 좌표가 잘 잡혀요.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지역에 동원됐던 군인이나 군속, 노무자 이런 사람들이요. 우리가 그 당시에 산 사람이 아니어서 감이 안 잡히는 부분을 이 할아버지분들은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이 할아버지 중엔 위안소를 갔던 분도 계시거든요. 이 ‘위안부’가 누구다라고까지는 말을 못 하지만, 당시 그곳에 위안소가 몇 개가 있었고, 대략 몇 명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거죠.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교차 조사가 되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군인 군속을 조사하고 연구도 했는데, 연구자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중요한 기회와 많은 분을 놓쳤어요. 그때가 그분들도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어요. 지금은 살아계신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자들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텐데요. 연구할 때 연구하려는 방향, 내용 이런 것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식으로 찾아보고 연구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쓰인 연구들도 있잖아요? 이럴 때 감정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는 거죠. 새로운 연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Q.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거 같아요. 기존 연구 자체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이 후학들에겐 때론 장벽이 될 수 있는데, 거기에 매몰돼서 쫓아가기보다는 과감하게 문제 제기 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10년을 할 생각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연구자를 키울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는 거죠. 연구를 맡겼으면 한 번 발표시키고 끝낼 것이 아니라 2탄, 3탄 계속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줘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주제예요. 티끌만 한 자료 하나 가지고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하거든요. 크게 안 보여요. 작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게끔 연구 지원을 해줘야 해요. 이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같은 곳이 생겼으니까, 이 기관에서 지원을 꾸준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연구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얼마큼 성실하게 연구를 이어가느냐 중요해요. 성실하게 연구를 해야 뭐가 나와요. 이른 시간 안에 자꾸 큰 거를 요구하면 오독이 나와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ntervei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강정숙 정리 : 슬로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