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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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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흔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부터 이미 해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군인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동원해 왔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송연옥은 여러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상하이 사변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부국강병과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 유곽 일본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대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많은 해외 침략전쟁을 저질렀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위안부' 제도가 없었을까? 19세기 중엽 당시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제국 일본은 그 취약점을 군사주의로 메우려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이라는 구호 아래 자원 확보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나섰다. 이때 노동력으로 동원된 죄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국영 유곽이었다. 이 기획을 정부에 제안한 이는 개척사(開拓使)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로, 그는 개척사가 자금을 융자한 다음 도쿄 요시와라 유곽의 성매매 업자에게 유곽의 경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1872년의 ‘예창기해방령’과 1873년의 경기 불황으로 개설 직후 바로 폐업하고 말았다. ‘예창기해방령’은 서구 열강들이 예창기에 대해 인신매매된 노예라 비난하자 메이지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서 빚 때문에 몸이 묶인 예창기들의 해방을 지시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예창기가 해방되었으나, 여성들을 옭아맸던 ‘전차금(前借金. 나중에 갚기로 하고 미리 빚으로 쓰는 돈) 제도’와 유곽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성매매 제도를 통제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 철저한 성병 검사 실시, 세금 징수 등 공창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즉 유녀들을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업자에게 공간을 빌려서 자유영업을 하는 자로 보고 그 형식을 바꾼 것이다. 가시자시키(대좌부(貸座敷))와 창기(공창)란 신조어가 생긴 것이 이 즈음이었다. 전차금은 높은 이율로 계속해서 창기의 몸을 구속했다. 자본이 빈약한 일본에서 성매매업은 기간산업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경우 성산업에서 납부되는 세금이 지방세의 44%를 차지했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국가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방으로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다 1900년부터는 업자의 관리만 각 지방이 맡고 창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개항한 부산에 요시와라 유곽이 문을 연 이유 1876년, 일본은 운요호가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이 포격했다고 억지를 써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조약 체결 당시 전권변리대사로 조선에 온 이가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리고 1880년, 그가 도쿄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유곽인 요시와라의 나카고메루가 부산에 상륙했다. 개항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나카고메루가 부산이라는 낯선 토지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구로다의 보증이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루의 업주였던 아카구라 토키치(赤倉藤吉)는 ‘상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 부산으로 왔다[사진 1]. 당시 그는 수하에 있던 창기 10명을 빚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부산에 데려왔다. 부산에서의 성매매는 일본의 ‘가시자시키 영업규칙’이 준용되어 거류지 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아카구라는 3년 후인 1882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 내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조선이 잇따라 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과 대면하며 국가적인 체면을 계산하게 된 일본은 부산에서 공창제를 중지시키고, 인천에서는 애초에 가시자시키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 숨겨진 조선전쟁 그리고 성폭력 이후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면서 대륙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 일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894년 봄부터 거세진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가 청나라보다 3배가 넘었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 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일청전투실기』[사진 2]라는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민가를 습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보여주고 일본이 정의롭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그림과 달리 일본군이 만행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일제 육군 창설자이자 일본군 최고 책임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청전쟁미담』이라는 책에서 ‘군부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을 엄벌로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도 역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썼다. 청나라를 향해 북상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을 자행한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농민군을 대량 학살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그 전리품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 ‘성적위안시설’을 개설하였다. 1896년 타이베이현령(台北縣令) 갑 제1호 ‘가시자시키 및 창기 취체규칙’의 제정은 타이완에서 공창제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요리점의 발명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에서처럼 조선에 노골적으로 공창제를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 서구 열강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주요 11개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울에는 9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영문 잡지에 실은 이도 서울에 주재했던 서양인이었다. 이런 정세를 의식한 일본이 공창제를 대신해 발명한 것이 ‘특별요리점’이었다.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 혹은 ‘작부’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를 은폐하며 민간 업자에게 부도덕성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가즈키 겐타로가 펴낸 『조선국 부산 안내』(1901)에 실린 광고[사진 3-2]를 보면 요리점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옆에 가시자시키, 즉 유곽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아 성매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일본인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시자시키가 아닌 요리점이라 할 때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세수입의 증가였다. 요리점은 가시자시키보다 세율이 높아서 고액의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창제를 금지한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더 많이 얻게 된 이익을 바탕으로 공창제를 재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군의들이 증언하는 '위안소' 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지배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을 군사력으로 짓밟아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제공, 군용지의 수용(収用) 등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은 군대가 운용하는 ‘성적위안시설’을 설치하였다. 제4군 군의 부장을 역임한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는 회고록 『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1934)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 철령(鉄嶺. 랴오닝 성)의 병참(兵站)부는 시험적으로 일정한 지역에서 사창을 허가하고 병참 헌병이 단속하고 감시하게 했다.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전에 군의가 성병 검사를 하고 합격자에게는 건강증을 발급, 병사들을 저렴하게 접대하게 했다. (시설) 입구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한 사람씩 점호(点呼)하고 나서 제한된 시간 내에 이용하게 했다. 여기서 후지타는 ‘위안소’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시설이나 관리 방법이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는 ‘위안소’와 같다. 또 후지타는 그런 시설이 1895년 타이완을 점령했을 때부터 있었다고도 썼다. 러일전쟁 중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던 봉천(현 심양)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의관 나카무라 료쿠야(中村緑野) 역시 위안소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내용은 후지타가 쓴 것과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병사를 관리하려고 만든 것임에도 병사에 대한 군의로서의 멸시감이 담겨있다. 드디어 임시 매소제(売笑制, 매춘제)를 허가하게 되었는데 상인을 시켜서 신원에 문제가 없는 만주인 작부를 데리고 왔다. 화류병(성병)에 감염되지 못하게 병사들에게 적절한 방법을 실행시켰다. 옆으로 긴 건물을 벽으로 나누어 각 방마다 출입구를 따로 만들었다. 건물 앞에는 나무로 된 낮은 담을 세우고 입구를 몇 군데 마련해서 혼잡하지 않도록 헌병의 감시 하에 이용하는 병사들을 차례로 방에 들여보내게 했다. 병사들이 수치심도 없이 건물 앞에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로우며 전쟁터가 아니면 못 보는 괴상한 장면이었다. 주목할 것은 글을 쓰는 군인에 따라 사용한 명칭이 다르다는 점이다. 후지타는 사창제라 하고 나카무라는 매소제, 다른 군인은 공창제라고 썼는데, 이 시기에는 같은 시설이라도 호칭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보고 선입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지타와 나카무라의 글이 실린 회고록은 1934년에 간행되었는데,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게 참고하라고 엮은 것이었다. ‘위안소’는 가설 목조건물일 때도 있었으나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4]의 좌측 그림은 봉천 북쪽 국경의 문인 법고문(法庫門)에서 일본 병사들이 여성들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장소가 관제묘, 즉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끄러운 만행을 현지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임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여 유곽을 건설하기까지 했다[사진 5]. 성매매 업소를 한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 단속하기에 효율적이고 위생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04년 안동(현 랴오닝성 단동)에서 개설한 유곽은 '유원지' 라고 이름 붙였다. 유곽의 여성에게는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성병 환자는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다. 여성의 영업 허가 연령은 일본보다 두 살 어린 16세였는데, 16세 미만이라도 성병 검사만 받으면 영업을 묵인했다. 1905년 작성된 규칙을 보면 예기 4엔, 작부 3엔, 중거(仲居. 나카이. 여관이나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 2엔, 하비(下婢. 하녀)1엔씩 매달 병참사령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는 군대가 포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원지는 군정(軍政)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후 민간인 업자에게 불하되었고 군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작부는 연령 규정이 없었으나 1930년부터 만 17세로 정해졌다.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성관리 정책의 연장선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며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한국군의 해산에 반발한 의병들이 일제에 항쟁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더 많은 군대와 헌병을 파견하였다. 의병 투쟁을 어느 정도 진압한 후 1908년 제정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조선에서 성병검사를 포함한 성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는 일본 병사들을 위한 조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마치 조선인들이 성병이 만연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성관리를 요구한 것처럼 꾸몄다. 이후 서울 외의 지역에도 차츰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관리 규칙을 만들었고 1916년에 ‘식민지 공창제’를 전면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성관리 내용을 보면,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달리 창기 허가 연령을 제국의 서열에 맞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내지’는 18세, 조선은 17세, 관동주와 타이완은 16세로 정해 여성들을 식민지나 전쟁터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성관리 정책은 상황에 따라 명칭과 내용을 바꿔가면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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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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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한국YWCA연합회는 지난 2023년 11월과 2024년 2월, 두 차례 주관한 수요시위를 통해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앞장서고 있다. 2024년 11월에는 세 번째 수요시위도 주관할 예정이기도 하다. 한국YWCA연합회가 왜 수요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그 활동과 연대의 의미를 남유진 성평등정책위원장이 소개한다. "지난 30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지난 2023년 11월 15일, '제162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성명의 일부이다. 한국YWCA연합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이날 수요시위는 여성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에 국내 시민단체들과 뜻을 함께하겠다는 대시민 선언이자 약속이었다. 한국YWCA는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로 창립한 이래 청년운동, 여성운동, 기독교운동, 국제운동 등을 펼쳐 온 운동체이다. 인종, 종족, 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은 하나이며,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과 회원이 한국YWCA연합회의 주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정의로운 탈핵·탈석탄 에너지 전환 사회 구축'이라는 '2024~2025 비전'을 제시하며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설정하는 한편 성평등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등 YWCA 목적에 기반한 운동을 지역 특성에 맞게 추진하는 정책과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한국YWCA연합회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해 온 궤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 수요시위 주관… 맞잡은 손, 연대의 과정 한국YWCA연합회는 2023년 1월부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네트워크(이하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연대와 단체 간의 활발한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분쟁 하 여성 인권 침해 및 성착취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한 결정이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는 한국YWCA연합회 외에도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여성연대, NCCK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이화여대민주동우회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에 관심있는 여성·인권·평화 관련 국내 시민단체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한 이후 한국YWCA연합회는 1622차와 1635차 수요시위를 주관했으며, 2024년 하반기에도 한 차례 더 주관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15일, 1차로 주관한 수요시위에서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 법적 배상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전쟁에 반대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이날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의 니시야마 나오히로 '오사카유니온네트워크' 대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기시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죄와 배상을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는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라며 "(연대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말하는 것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모든) 말이 봉오리가 돼서 활짝 피어나고 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수요시위 마지막 순서인 성명서 낭독을 맡은 한국YWCA연합회는 "삼 십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의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며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한 1635차 수요시위 2024년 2월 14일, 2차로 한국YWCA연합회가 주관한 1635차 수요시위에는 특별히 제21차 한·일YWCA청년협의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은 연대 발언과 특별 합창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여정에 힘을 실었다. 미카 미나미 일본YWCA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 세대가 한·일의 틀을 넘어 연결되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그 책임과 마주하는 첫 걸음을 떼게 하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에리 카와고에 일본YWCA 활동가 또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홀로 사회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것을 떠올렸으면 한다."는 응원을 전해 환호를 받았다. 특히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함께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 릿쿄대학교 겸임 강사이자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인 이령경 작가의 수업을 대학에서 수강한 남다른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이령경 작가의 평화학, 인권 관련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다 건너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선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수업했던 강사와 그 수업에서 눈을 반짝이던 학생은 특별한 현장에서 연대 발언자로 함께 나선 이 우연한 만남에 서로 놀랐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확장하는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여하다 한국YWCA연합회의 연대 목소리는 국외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지난 2024년 3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68)에 참여해 '전시 성폭력과 전후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한 주제 발표를 했다. 2024년 3월 11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본회의 일정이 진행된 'UN CSW68'의 주제는 '빈곤 해결과 젠더 관점에서의 제도와 재정 강화를 통한 모든 여성과 소녀들의 성평등 달성 및 역량 강화 가속화(Accelerating the achievement of gender equality and the empowerment of all women and girls by addressing poverty and strengthening institutions and financing with a gender perspective)'였다. UN CSW68은 장관급 회의인 본회의(Official Meetings), 정부 및 국가기구 운영 행사인 부대 행사(Side Events), UN ECOSOC 협의 지위(편집자주-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비영리 민간조직인 NGO가 유엔에 공식적으로 등록돼 얻은 지위) NGO 행사인 병렬 행사(Parallel Event)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부분은 병렬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정의연의 협조를 받아 준비한 발표를 통해 한국YWCA연합회는 한국이 경험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시 성폭력과 이후 피해자가 겪는 교차적인 피해와 빈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 후 패널로는 우크라이나YWCA 율리아네츠 회장,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 일본YWCA 마이코 활동가, 세계교회협의회(WCC) 니키 목사 등이 참여해 토론과 발언을 이어나갔다. 한국YWCA연합회의 발표와 토론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다시 한 번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여성 인권 향상 위한 함께 걷기 한국YWCA연합회는 끊임없이 굴종을 요구한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여성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인권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 왔다. 이러한 역사와 관점을 기반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관련 활동을 뉴스레터로 공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와 함께 할 것이다. 또 중점 운동 아젠다인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심으로,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전 세계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일'임을, 지속적으로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바로 '연대'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견지하며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은 전 세계 여러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는 등 초국가적 여권 운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이 수요시위는 1700차를 향해 가고 있다. 그간 두 차례 수요시위를 주관한 한국YWCA연합회는 2024년 11월 세 번째로 주관을 맡기로 했다. 과거에 그래왔듯이, 현재 그렇듯이, 미래에도 한국YWCA연합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이 땅과 이 땅이 아닌 곳 모두에 상존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근절하기 위해 함께 걷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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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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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항일 국민군의 거점 마파니크에서는 일본군의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우고, 이어 소녀들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동원했다. 시간이 흘러 ‘말라야 롤라스’, 즉 ‘자유로운 할머니’가 된 이 소녀들은 이제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전쟁 중 성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 필리핀 인권변호사로, 일본군 성 노예 범죄에 대한 법적 투쟁 등 다양한 활동에 함께하고 있는 버지니아 수아레즈 변호사가 말라야 롤라스의 저항과 투쟁 이야기를 전한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 자유로운 할머니들)’는 필리핀 마파니크 전투의 생존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저항한 ‘후크발라합(Hukbalahap. 항일 국민군)’의 거점이었던 마파니크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격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그들의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웠다. 심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한 남성의 입에는 잘린 성기가 물려 있기도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에 이어 일부 소녀들은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됐다. 그 소녀들이 바로 지금의 말라야 롤라스이다.[1] 노년에 이른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과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해진 군사적 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는 일본군 점령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동시에 전쟁과 군사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를 점령하려는 시도에 맞선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일본군의 성폭력에 맞서는 것을 넘어 전쟁 중 여성의 신체를 점령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필리핀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과 군사화에 따르는 악행과 공포를 고발하는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말라야 롤라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이다. 말라야 롤라스는 필리핀 대법원에서 12년에 걸쳐 직무 집행 명령 소송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일본 대법원이나 정부에 말라야 롤라스 사건을 제소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법원은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문제’라며 이 역사적인 ‘롤라 이사벨리타 비누야 사건’을 기각했다.[2] 말라야 롤라스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 제소하기도 했다. 필리핀 법정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했지만 벽에 부딪히자 정의를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말라야 롤라스 사건은 CEDAW에 제출되었다. 2023년 세계 여성의 날, CEDAW 전문가위원회는 19쪽 분량의 문서를 통해 말라야 롤라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구제책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첫째, 피해자들이 겪은 지속적인 차별에 대한 전면적인 배상이다. 여기에는 피해 인정, 공식 사과, 물질적 및 정신적 손해 배상, 존엄성과 명예 회복을 포함한 보상, 재활 및 원상 회복이 포함된다. 물질적 배상은 피해자들이 겪은 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피해의 정도와 권리 침해의 심각성에 비례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둘째, 전쟁 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자 모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전국적 배상 제도 구축이다. 여기에는 전쟁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 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를 인정해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전쟁 범죄, 특히 제도화된 전시 성 노예 제도의 여성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기타 형태의 배상을 제공해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 개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승인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권고이다. 넷째, '붉은 집(Bahay na Pula)'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전시 성 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기리고 그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교육 기관(중등 및 대학 교육 포함)의 교육 과정에 필리핀 여성 피해자 및 생존자들의 역사를 포함시키라는 권고이다. 이는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역사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인권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이다. 다양한 캠페인, 지역을 넘어 국내외 연대로! 말라야 롤라스는 여성인권단체 ‘카이사 카(Kaisa Ka, 여성자유를 위한 연대)’의 지원을 받아 피해 회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연대 단체 중에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alaya Lolas)’가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 인정을 전제로 한 진정한 공개 사과, 배상, 재활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시위 형식으로 진행되며, 3・8세계 여성의 날과 11월 23일 마파니크 피해자 추모일,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일본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 또는 무역 협정이 논의될 때마다 시위가 이어진다. ‘전쟁반대여성연대(Women Against War)’는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화에 맞서는 캠페인이다. 카이사 카는 모든 전쟁이 영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점령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평화로운’ 시대에도 여성들은 군인들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 이용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말라양 카바타안(Malayang Kabataan. 자유로운 젊은이들)'은 말라야 롤라스를 접한 다양한 학생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으로, 현재 말라야 롤라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마파니크와 ‘붉은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그들은 전시회와 패션쇼, 기타 기금 마련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카이사 카,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 다른 학생 및 미디어와 협력해 미디어 보도, 방문 및 토론 등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필리핀에는 말라야 롤라스와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활동들이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교사, 농부, 어부 등으로 구성된 다부문 조직인 ‘국가민주화운동(KILUSAN. para sa Pambansang Demokrasya)’은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의 악영향을 폭로하고 말라야 롤라스의 고통을 전쟁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로 강조한다. 즉, 전쟁이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며, 말라야 롤라스와 같은 성노예 피해자들을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국가민주화운동은 2004년부터 격년으로 평화행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단체인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인 이곳은 중국 혁명가 후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연합체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미디어 포럼, 시위 활동 등을 진행했다. 또 ‘위안부 동상’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위안부’ 동상을 마닐라 로하스 대로에 설치했으나, 필리핀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철거되었다. 롤라를 위한 꽃은 일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라진 ‘위안부’ 동상을 찾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와 성 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해 왔지만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작성한 대항 보고서는 필리핀 정부가 전쟁 범죄 피해자인 말라야 롤라스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결의안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복지개발부를 통해 제공하는 지원 또한 CEDAW의 권고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많은 단체와 인권위원회는 CEDAW 보고서에 말라야 롤라스의 사례와 문제를 포함시켰다. CEDAW가 말라야 롤라스에게 유리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다음과 같은 여러 조치들이 이어졌다. 2024년 5월 13일, 필리핀 대통령이 대통령실 공보부를 통해 모든 정부 기관에 지시 서한을 발송했다. 또 사회복지개발부의 지원 및 조치와 함께 상원의원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가 ‘상원 결의안 539’를 발의, CEDAW 결의안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했다. 또 외교관계위원회의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여러 개인 및 기업(Tulay Foundation, Wha Chi Foundation, Wilcon Builders, Feedmmix, Prologue Café, Kamuning Bakery, House of Justeas, 목사, 사진작가, 의사, 블로거 등)도 지원 대열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마파니크 지역 사회에서도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받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롤라스의 손자와 손녀들은 ‘포토보이스(Photovoice)’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롤라스가 손자, 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세션이다.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학에서 전시되었다. 마파니크 초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은 롤라스의 이야기와 마파니크 포위 공격의 역사를 수업에 포함시켰다. 또 마파니크의 바랑가이 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약속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제 청년들이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홀리엔젤대학, 유니버시티 오브 더 이스트, 앤젤레스대학 등의 학생들은 말라야 롤라스의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청년모임(Youth for Nationalism and Democracy)과 카이사 카의 청년 조직 등 다양한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포럼과 원탁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재편되는 안보 협력의 이면은 지역 군사화 한편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양국 군대가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서로의 영토에 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는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그리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체결되었다. RAA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최근의 연결고리이다. 일본-필리핀 RAA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필리핀, 미국, 일본, 호주 사이의 4자 안보 협력체인 ‘SQUAD’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미국은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규범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지정했으며, 3국 안보 협력, SQUAD, QUAD(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 안보 협력 체제), AUKUS(미국, 영국, 호주 등 3개국 안보 동맹) 프로젝트는 모두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더 많은 동맹국을 참여시켜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목표를 취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이런 협정들이 주로 외국 군대-이 경우에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뿐 필리핀 군대에는 동일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의 VFA처럼, 실제로 일본군은 세관 및 형사소송 절차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지만 필리핀군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VFA는 미군에게 특권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군 병사가 필리핀 루손섬의 수빅에서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RAA 역시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군사적 태세 강화와 전쟁 준비의 결과로 군비 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전략과 유사하게 일본 정부는 군사 장비를 과시하며 필리핀에 구매를 유도할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군비 지출이 모든 측면의 안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군비 지출은 사회복지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무력에 대한 의존성만 높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은 실탄 사격 훈련과 기타 군사 작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폐기물과 화학 물질로 인한 위험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의 군사화 심화로 이어져, 필리핀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대리 국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남중국해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군사적 틀이 아닌 신뢰, 협력,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 안보 체제가 필요하다. 군사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전쟁의 잔혹성과 상처를 상징하는 말라야 롤라스!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그리고 말라야 롤라스에 의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가운데 전쟁, 군사화, 외세의 개입과 점령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위안부’ 세대를 막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롤라스와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각주 ^ [편집자주] 이후 자연스럽게 단체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다. ^ [편집자주] 보고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1,000명 이상의 여성이 납치, 감금된 상태에서 성 노예로 학대당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1951년 일본과 전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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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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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본 일제말기 청년들의 해방 이후 삶의 향방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연재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이후 TV드라마와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위안부'를 성애화하여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당대의 잘못된 인식이 작용하였음은 그간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하여 국문학자 이지은은 이 소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이 해방 이후 젠더에 따라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였는지를 추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전장(戰場)의 식민지 청년들 한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윤정옥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의 소식을 '학도병(학병)'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1] 여기서 '학병'이란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1943.10 공포)로 인해 사실상 '강제' 입대한 학생들로, 이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전장의 병사이자, 그녀들의 소식을 고국에 전해준 동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병과 '위안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많은 학병들이 전장에서 희생되었으나, 귀환한 학병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귀환 학병들에겐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공동의 과업에 참여한 이들은 실제 학병 징집자든, 기피자든, 면제자든 할 것 없이 모두 '학병 세대'로 포괄될 수 있었다.[2] 반면, 귀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생활고를 면치 못하였으며,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생활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로 말할 수 있는 공론장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사회적 계기도,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일간스포츠』, 1975.10.1~1981.3.2.)[3]는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 즉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다른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부여받는지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텍스트다. TV드라마,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한국 사회에 '윤여옥'이라는 대표적인 '위안부' 상(像)을 남긴 「여명의 눈동자」는 연재 중에 단행본이 출간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소설의 인기가 상당 부분 여성 섹슈얼리티를 외설적으로 소비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소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 소설이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위안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탈각되었는지 그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제국의 폭력이 만든 '학병-위안부'의 연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로 차출된 여옥과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된 대치, 하림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장구한 서사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부대를 따라 전선을 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소설에서 '여옥-대치', '여옥-하림'은 모두 제국의 권력 장치 아래에서 성적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대치의 경우 고참의 강요로 위안소를 찾았다가 '위안부'가 된 여옥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품은 두 사람은 위안소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여옥이 하림과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일제의 감옥소 안이다. 사이판에서 포로로 붙잡힌 여옥과 하림은 미군 OSS 요원이 되고, 이후 미군의 지시 하에 조선 독립을 위한 공작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경찰은 고문의 강도를 높이다 급기야 여옥과 하림에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명의 눈동자」의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학병과 '위안부'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동류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학병과 '위안부'가 위안소나 감옥과 같은 제국의 폭력장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 건설의 사명과 대결 구도의 재배치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적대항이 없어진 뒤에도 학병과 '위안부'는 연대할 수 있을까. 해방공간으로 접어들면서 「여명의 눈동자」는 독립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해 나갈 만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거니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에서 탈영한 학병들은 중국군이나 광복군 등에 합류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여명의 눈동자」 또한 학병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림과 대치의 항일 무장 투쟁 행적을 강조한다. 대치가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를 두루 거쳐 팔로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한다면, 하림은 미군 OSS 요원으로서 해방 직전 경성으로 침투한다. 이후 이들은 해방 공간의 주요 사건들, 이를 테면 각종 암살 사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9월총파업(1946), 4.3항쟁(1948), 여순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 투쟁(1951) 등에서 매번 대결하게 된다. 남한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에서 대치는 빨치산 수장으로, 하림은 진압군 대장으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은 해방 공간의 갈등과 대립을 '학병 vs 학병'의 구도로 재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제주 4.3항쟁에서 대치와 하림의 대결이다. 소설은 무장대 총사령관과 진압 사령관의 협상, 토벌대 사령관의 피살사건 등 당대 알려진 4.3사건의 전개를 유사하게 따라가면서도, 일본군 출신의 토벌대 사령관들을 탈영 학병 출신의 하림으로 대체한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유격전의 경험을 쌓은 일본군 출신 방공(防共) 전사들을 제주도와 지리산으로 파견했다.[4]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사건을 둘러싼 해방공간의 갈등 구도를 대치와 하림, 즉 '학병 vs. 학병'으로 재배치한다. 미소 군정과 남북 단독 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신제국의 점령지가 된 약소민족의 설움으로, 혹은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으로 서사화될 수는 있지만, '해방' 공간에서조차 '일본군 출신의 군·경 vs 학병이 지휘하는 무장대'의 대결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림과 함께 남쪽의 편에 서 있는 「여명의 눈동자」의 입장에서 '학병이 이끄는 무장대'와 대결하는 남쪽 세력이 일본군 출신의 군부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식민지/점령지'의 대결 구도가 재배치되고 국민국가 건설이 역사적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해방 공간에서는 '학병-위안부'의 연대 대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학병 간의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와 같은 서사 전략은 식민지 역사 및 친일 잔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하지만, 남한 통치체제 내부에 존속한 식민의 잔재는 은폐하는 우를 범한다. 여자의 운명과 역사로부터의 배제 혹은 초월 해방 공간이 학병 사이의 대결로 재편되었다면, 여기에서 누락된 '위안부'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일까. 학병과 '위안부'가 제국의 폭력 속에서 연대를 형성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해방 직후 대치는 여옥을 식민지 역사가 빚은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자 "치욕스런 역사의 잔영"이라 여기며, 안타깝지만 새 시대의 그늘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5] 반면, 하림이 보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아이까지 낳아 살아 돌아온 여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이다.[6]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얼핏 대치와 하림은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수치로 여기는 쪽이나, 민족의 신화로 여기며 보호하려는 쪽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새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위안부'를 역사적 사명을 둘러싼 대결구도로부터 배제하든, 혹은 신화화하여 역사로부터 초월하게 하든,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여기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 탈각된다. 이와 같은 타자화의 시선은 대치와 하림이 여옥과 맺는 섹슈얼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 내내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대치와 하림이지만, 섹슈얼한 장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치와 하림은 여옥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를 점한다. 제국의 폭력 아래에서 연대관계였던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보이는 대상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주체-벌거벗겨진 몸'이라는 권력 구도는 식민지 시기 대치와 하림이 경험한 '일본군-조선인 학병(대치)', '미군-조선인 포로(하림)' 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인 학병들을 괴롭히던 일본군의 오오에 오장은 대치에게 자신이 보는 데서 점령지 여성을 강간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오에는 대치를 벗게 만듦으로써 대치가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대치는 점령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오오에와 같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림의 경우 또한 이와 유사하다. 하림이 OSS 요원이 되기 위해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미군 심판관은 하림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미군 심판관은 '벌거벗겨진 몸'이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용한다. 제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청년들을 길들이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을 활용했다. 그렇다면 대치와 여옥, 하림과 여옥이 '보는 주체-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은 단지 '학병-위안부'의 연대적 관계가 위계적 관계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러한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제국의 폭력과 상당히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학병-위안부'는 식민지 민족으로서 연대관계를 맺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학병의 몫이 되었다. 학병들이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이 되었다면, '위안부'는 또 다른 국가(건설) 세력에 의해 식민화된 셈이다. 해방 직후 하림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대치가 공산국가 건설을 꿈꿀 때, 여옥 또한 "앞으로 나의 육체를 탐내는 남성들은 모두 나의 적"[7]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여옥의 '여자의 길'은 '아내의 길'로 회수되고 만다. 문제는 '아내의 길'이 여옥의 정치적 주체성만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대치의 착취 또한 은폐한다는 점이다. 대치는 여옥에게 미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요구했고, 여옥은 내키지 않음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가부장제 규범은 대치가 여옥을 끊임없이 이용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 기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여옥은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대치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치가 6·25 전쟁 중에 빨치산이 되어 찾아오자, 여옥은 또 다시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여옥은 대치를 도와주기 위해 빨치산 무리를 토벌군 대장인 하림에게 알리지만, 이는 배신행위로 간주되어 결국 여옥은 대치 손에 죽게 된다. 이후 대치는 빨치산 동료들에게 버려지고, 곧이어 미쳐버린다. 하림은 대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여명의 눈동자」는 남쪽 체제를 택한 하림만 남기고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1975년 10월 1일부터 1981년 3월 2일까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묘비문을 마지막 문장으로 하여 끝을 맺는다. 여옥의 무덤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세워준 조그만 돌비도 눈 속에 서있었다. 그[하림-인용자]는 거기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여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자꾸만 그 돌비를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신화"라는 것이 본래 초월적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림이 지키려고 했던 "신화"는 역설적으로 여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치가 말했던 "역사의 잔영으로 그늘에 숨어"들어야 하는 '위안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림과 대치의 상반된 태도는 결국 여옥의 존재가 하나의 비석으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물화(物化)됨으로써 합치된 셈이다. 물론 이는 여옥을 대상화·타자화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하림과 대치의 은밀한 바람처럼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제 역사에선 여옥이 사망한 바로 그 즈음 연합군/한국군 위안소가 세워졌다. "정부가 연합군 전용 위안소 설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는 보건부가 1951년 10월 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保防 제1726호)이다."[8]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는 남한 정부에 의해 계승‧변형되었다. 소설은 조국이 지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여자'의 죽음에 애달파 하였으나, 조국이 지키지 못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결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의 변형과 계승이 애초 소설 속에 예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존속된 것은 한국 군대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일본군, 일본 육사 출신의 병사와 간부를 다수로 하여 창설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로 6·25전쟁 당시 한 장교는 "군 '위안부'를 이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연대장이 관동군 출신자였으므로 군 '위안부' 발상을 했다고 기억했다."[10]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새로운 국가 건설기의 '적자'로서 학병을 호명하기 위해 남한 군대에 이어져 내려온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삭제해 버렸다. 국가 건설 시기 남한 군·경의 지휘부에 자리 잡았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 대신 탈영 학병 하림을 내세웠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잔재를 삭제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만 셈이다. 이때 은폐된 존재란 바로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도 역사도 되지 못했던 연합군/한국군 '위안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명의 눈동자」에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남한에 계속해서 존재했던 군 '위안부'만 은폐하는 게 아니라, 여옥 이외에 어떠한 일본군 '위안부'도 그리지 않는다.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부'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들 가운데 여옥 외에 귀환한 여자는 없다. 하림이 학병 기피자들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대치가 귀환 학병들과 함께 제주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지만, 여옥은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지닌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직 여옥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학병들에겐 그들을 모이게 하는 역사적 과업이 주어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계기는 없다. 대신 여옥에게 주어진 것은 '아내의 길'이었다. 학병이 역사적 '사명'을 통해 세대로 구성된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탈역사적인 여자의 '운명'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겐 이러한 운명조차도 가부장제 규범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대신 이 비극적 운명을 통해 '위안부'는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고 만다. 각주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pp. 121~122. ^ 김건우, 「운명과 원한」, 『서강인문논총』 5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참조. ^ 이 글은 『일간스포츠』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하 작품명, 연재 횟수, 날짜만 표기함. ^ 허은, 『냉전과 새마을』, 창비, 2022, p. 85. ^ 「여명의 눈동자」(727), 1978.2.16.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99.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p. 167~168.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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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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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박영심은 일본의 항복 후 고국으로 송환됐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해온 중국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박영심을 포함해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기사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류광지안 부연구관원이 소개한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이병 햇필드(Charles H. Hatfield)는 중국 윈난성 쑹산 전선에서 ‘유명한’ 전쟁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만삭의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에는 중국군 병사와 여성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옷차림과 외모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됐다. 초췌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표정의 네 여성은 웃고 있는 중국계 미군 정보장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인데, 한 눈에 보아도 임신 상태였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여성은 흙더미에 기대어 두 손을 짚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박영심’이라는 이름의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군 촬영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피해자’ 당시 박영심은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과도한 피로와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박영심은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구조된 박영심은 즉시 중국 원정군 제8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산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한동안 요양한 박영심은 이후 다른 조선인 ‘위안부’ 30여명과 함께 쿤밍으로 보내져 앞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박영심과 동료 여성들은 이듬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비극적인 경험은 역사 속에서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침묵을 깨고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하는 대열에 박영심도 동참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는 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유린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임을 입증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12월, 국제사회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방문한 박영심은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떠올라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결국 그녀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영상으로나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그 범죄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2003년 11월, 박영심은 중국 난징과 윈난 쑹산을 방문해 예전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직접 지목하는 역사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5년 12월 1일, 박영심이 지목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옛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주제 기념관인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후 리지샹 전시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데 힘써왔으며, 여기에는 박영심과 동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10년 간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로운 단서 약 10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리지샹 전시관은 박영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윈난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의 여성들, 그녀들이 속은 경위를 털어놓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반도의 젊은 여성들이 중국 윈난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과정과 쑹산 진지에서 겪었던 비참한 경험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1942년 봄, 일본인들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돕는 일을 하는 ‘여성 보조 부대(妇女辅助队)’를 모집한다고 속였다. 안전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난한 농가 출신 소녀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쉽게 현혹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을 믿고 지원하여 배에 올랐고, 남양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미얀마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폭력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로 보내져 유린당했다. 중국군이 쑹산을 점령했을 당시 원래 24명이던 ‘위안부’ 가운데 살아남은 여성은 열 명이었다. 이런 내용과 함께 기사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열 명의 여성은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위안부’피해자들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일본인,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약 1년간 요양을 한 사진 속 인물들은 구출 당시와 비교해 외모와 체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박영심의 모습도 확인됐다. 사진 속 박영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촬영 당시 기분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양 1년 후,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사진부대는 쑹산 전투 현장에서 많은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상 자료는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대전화집』에 실린 이 사진 속 여성 열 명을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이들 모두가 다른 영상에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구출된 후 건강하게 지냈고, 수술을 받았던 박영심을 포함해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구출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의 모습은 몹시 초라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구출 뒤 사진에서는 미군이 촬영할 당시의 불안하고 초라하며 당황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마음이 편해 보였다. 구출 당시에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난을 겪은 이들 여성들은 구조 후 중국 군인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인 ‘위안부’든 조선인 ‘위안부’든 그들은 오직 하나의 바람만을 간절히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大战画集』 기사와 번역문> 중국 뎬시(滇西)에서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 자신들이 속은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 군부대는 누장(怒江)강 전방(前线)의 쑹장(松江)강 전투에서 독특한 ‘전리품’을 얻었다. 바로 10명의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조선인도 있다. 지난 3개월간 그녀들은 쑹산(松山) 전투(중국의 항일전쟁 중 송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적군들과 함께 생활했다. 누장강 전선 각 거점의 일본군 부대에는 일본 위안부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번은 텅충(騰沖) 지역에서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포착되기도 했다. 일본군 화약고가 폭발될 때 한 조선인 위안부가 그대로 생매장되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는 일본군들은 모두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부대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 위안부들 중 네 명이 조선인이었다. 나이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로 서양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화사해 보였다. 이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서양식 옷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사 온 것이다. 그녀들은 낮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미국 담배를 피고 있었다. 지난 수 월간 겪었던 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북조선의 평양 사람으로 전부 농촌 여성이었다. 1942년 봄, 일본의 정치 관계자가 이들이 있는 마을에 찾아와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얼마나 천하무적이고, 어떻게 "부녀자 지원팀"을 모집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또 싱가포르가 얼마나 안전한 후방 지대인지, 이들이 가면 병원에서 병간호 일만 하면 된다는 등의 감언이설을 내뱉고 갔다. 비록 이런 감언이설들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장의 돈이 너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한 여성의 아버지는 농부인데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비를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후 받을 수 있는 1,500위안의 정착비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속아 이곳에 왔는데… 끌려온 24명 중 14명이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열여덟 명의 여성이 1942년 6월에 북조선을 떠나 남양지역에 보내졌다. 남양으로 가는 길에서 이들은 일본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시아제국이 구축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허황한 선전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싱가포르를 지나치고 멈추지 않는 것을 알아챘을 때,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차는 미얀마 양곤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할 때, 그녀들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다. 쑹산지역에 도착하자 네 명의 조선 여성은 서른다섯 살의 일본군 정식 위안부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본인 위안부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여성) 쑹산 지역 일본 군부대에는 그녀들을 포함해서 총 스물네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른 업무 외에도, 그녀들은 일본 병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산속 야영지의 동굴을 청소하고 했다. 중국 군부대가 쑹산을 공격할 때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스물네 명 중 열네 명의 위안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일본군 당국은 그녀들에게 만약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면 반드시 각종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 줄곧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이 말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생활로 인해 일본 군부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심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구출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 1944년 미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사진병이었던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