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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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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카메라 렌즈의 안과 밖 🧶 김한상 : 다큐멘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폭력과 피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잘 재현해서 현재의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이 갖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궈 커 감독님의 <22>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의 어떤 모습들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이 영상들은 다시 후대에 기록될 자료나 전문가의 발언과 함께 새롭게 재구성될 가능성을 남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인 피사체로서 피해 생존자들 혹은 증언자들을 다루는 접근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증언자와 상호작용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 혹은 증언자의 증언은 대상화가 되고 혹은 감상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황미요조 : <22>는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근접해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담아내거나 반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분들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간간히 인터뷰가 나오기는 하지만 어떤 큰 역사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거나 개인의 삶을 일관되게 구축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중요하게 담고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현재 시간, 그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얼굴의 주름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유예된 시간, 동결된 시간 자체를 보여줍니다. 스물 두 분의 생존자 중 이제 일곱 분만이 남아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왔고 이 역사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내러티브 구축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영화가 무엇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가지는 예의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은경 : <22>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생존자들의 증언을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히는 한편으로 ‘부재’를 환기시키는데요, 특히 ‘사라짐’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메모리 시대에 ‘위안부’ 기억은 이제 피해 당사자의 어떤 회상이나 증언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기억의 전승이라고 하는 것, 그들의 부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내가 그것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창조적인 재해석을 통해 그 기억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질문하는 영화로 보았습니다. 🧶 소영현 : 기록과 기억의 대상이 피해 생존자로 한정된 경향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시각화하는 순간 언제나 피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는데, 사실은 피해 생존자 말고 돌아오지 못한, 기록에도 남지 않은 수많은 피해 생존자와 피해자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죽었기에 기록도 안 되고,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많은 부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록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 피해자,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 기록에도 남겨지지 못한 피해자와 피해 생존자를 위문하는 가족과 친척들, 돌아왔으나 트라우마적 과거에 갇히게 하는 사회를 폭넓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피해가 선명해 보인다고 해도 사실 피해와 가해는 구분되기 힘들거나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기 원하지 않는 가족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제 질문은 그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는가로 요약된다고 하겠습니다. 익숙한 재현 방식을 넘어 🧶 황미요조 : <보드랍게>는 기존 ‘위안부’ 재현 방식과는 다르게 김순악이라는 피해자의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대구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인권 활동가 인터뷰라든지, 드라마적인 애니메이션, 김순악의 생전 인터뷰와 일상생활 푸티지 들, 또 성폭력 생존자인 동시대 여성들에 의한 김순악의 증언 낭독, 그리고 화면 바깥에 화자가 전제된 연대기적 설명 자막과 사진이나 신문 기사처럼 정보 제공을 위해 화면 사이에 끼워 넣은 인서트용 아카이브 푸티지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김순악의 생애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층위의 재현 양식은 그동안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된 인터뷰나 보이스오버 위주의 ‘위안부’ 피해자 재현양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 김은경 :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김순악의 다양한 이름은 그녀를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고 또 단일한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복수의 김순악‘들’은 편하고 매끄럽게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미투 운동 당사자들의 음성이 서로 중첩돼 울리는 가운데 열거된 그 이름들은 정말 듣는 청자가 천 개의 귀를 열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고,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름의 나열은 단지 김순악이라는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효과, 그러니까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 어떤 ‘숭고한 피해자’라는 상징을 완전히 깨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영화는 ‘강제 동원된 일본군’위안부’ 대 매춘부 혹은 기지촌 미군 ‘위안부’’ 혹은 ‘인신매매된 순진한 기지촌 여성’ 대 ‘기지촌 여성을 착취하는 포주 마마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 통념이나 피해자의 전형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일부러 김순악이라는 굉장히 난해한 텍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정형화된 기억과 담론을 뒤흔들며, 여러 이름으로 살았던, 여러 목소리로 중첩되어 설명되는 그 김순악‘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재현 방식들, 그러니까 기존 다큐멘터리에서 해온 관습을 뒤로 하고 애니메이션과 미투 운동 당사자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관객이 김순악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미학적 선택은 ‘위안부’ 역사의 박제화에 저항하면서 관객이 함께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굉장히 훌륭한 미학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또 낭독자들은 김순악의 삶을 읽어내려 가면서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어루만지고 ‘아이고, 참 애묵었다’며 다독입니다. 김순악의 삶과 낭독의 얽힘은 낭독자들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애먹었다’라는 말을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연대하는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 황미요조 : <내게서 출발한 배>는 아르헨티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가 이루어지는데 특히 주인공인 멜라니는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하며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 가정폭력을 당한 엄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는 한국에 와서 ‘위안부’ 문제에 더욱더 심층적으로 다가가는 멜라니의 여정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렇게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과 동시대의 20대 젊은 여성의 삶 사이의 공명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보드랍게>와 공통 지점을 갖습니다. 하지만 <보드랍게>와 달리 우리는 <내게서 출발한 배>를 통해 피해자 황금주의 구체적인 삶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주의 삶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증언의 일부만이 목소리나 표정, 몸짓 같은 멜라니의 ‘몸’을 통해 파편적으로 제시됩니다. 한국에서 멜라니가 방문한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나 기록, 자료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황금주’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멜라니를 비롯해 여성들이 서로 주고받는 감응적인 반응들을 바라봄으로써, 그 감응의 공동체에 참여해 일부가 됨으로써 ‘황금주’의 삶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떤 억압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삶일 수도 있고, 불안정한 20대나 가정폭력 피해자의 위치일 수도 있습니다. 황금주의 생애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제시되듯이, 그에 감응하는 주체들의 삶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황금주’부터 현재 디아스포라 20대 여성까지 연결하면서도 계속 어떤 빗금을 긋고 영화 안에 액자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연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 있다는 것을 계속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누구의 삶도 일관되게 구성하지 않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감응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 소영현 : 기본적으로 ‘위안부’문제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졌던 피해와 피해자를 가시권으로 이끄는 일, ‘드러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피해생존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현재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가도 고민해야 할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오늘의 영화 3편은 다양한 재현 양식을 구현하고 있어 흥미롭게 봤습니다. 우선 일본군‘위안부’를 부인해 왔던 오랜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직접 증언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운동의 성격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중심으로 구축하게 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분하자면 <22>의 경우 피해 생존자 가시화 작업이 온전하게 요청되고, 거기에 긴급하게 반응해야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었습니다. <보드랍게>는 감독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사건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 개인의 삶이 삭제되어 버리고 역사적 증인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한 점들이 굉장히 의미 있었습니다. 나아가 세실리아 강 감독님의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는 ‘위안부’문제 논의의 확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 재현의 방식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진전된 작업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에 대한 기록 작업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용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문제는 수용자가 계속 바뀐다는 겁니다. 또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꽤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수용자의 가변성을 고려할 때 그것에 맞춘 재현의 방식이 반복적으로 지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늘어나면서 실제로 공적 기억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려가 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억 투쟁 과정에서 피해와 피해 경험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 이미 다 보여줬으니까, 드러냈으니까 지나간 거고 이후에는 다른 방식의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경험의 재현 방식에 대한 대안적이고 보완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22>와 <보드랍게>의 작업이 말해주듯, 그런 의미로 피해-증언의 복원과 피해 경험자의 복원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그 자체로 보족(補足)적 작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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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2024년 9월 26일 <다큐를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트라우마의 재현과 세대를 넘는 기억의 전승>을 주제로 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현존과 목소리를 영상으로 전달함으로써 역사부정세력에 대항하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콜로키움에서는 <22>의 궈 커 감독,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의 세실리아 강 감독, <보드랍게>의 박문칠 감독을 초청해 작품에 담아낸 문제의식과 제작 과정을 듣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들과 각 작품이 이룬 성취와 향후 과제에 관해 논의하였다. 웹진 <결>은 주요 토론 내용을 2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1부> - '위안부' 피해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다큐를 통해 보는 재현과 기억의 전승 <2부> - 포스트 피해자 시대, 세대를 넘어 기억하기 <22> 감독 궈 커 | 98분 | 2018 (▶보러가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많은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촬영 당시인 2014년 피해 생존자 수를 의미하는 제목처럼, 중국의 궈 커 감독은 다큐멘터리 <22>에서 피해생존자 22명의 일상을 과장 없이 따라가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받았던 고통과 그 이후의 지난한 삶이 새겨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 영화는 2017년 중국 개봉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게서 출발한 배> 감독 세실리아 강 | 120분 | 2023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리아 강 감독은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위안부’피해자 고 김복동의 강연을 듣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디아스포라로서 이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할 것인가라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역시 한인 2세인 주인공 멜라니 정은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황금주의 증언을 낭독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을 몸으로 보여준다. 실제 배우이자 연기 학교에 다니는 멜라니가 가정폭력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위안부’ 문제와 접속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액자식 구조인 이 영화는 포스트 메모리 세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2023년 11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특별상과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보드랍게> 감독 박문칠 | 73분 | 2022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박문칠 감독의 고민이 담긴 영화 <보드랍게>에는 피해자 고 김순악의 증언과 그 주변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 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등 김순악을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위안부’ 피해가 종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진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그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여성이었음을 조명한다.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모여 ‘n개의 김순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현재의 젠더 폭력과 ‘위안부’ 역사 사이의 연결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세대와 지역을 넘어선 기억의 확장 🧶 김은경 : 저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가 결국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았습니다. 이른바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 우리가 ‘위안부’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확장할 것인가, 어떤 기억과 연결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세 영화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 조서연 : 미체험 세대가 과거의 폭력과 기억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데요. 오늘 콜로키움에서 다루는 세 편의 영화들은 ‘타자의 기억을 나눠 갖는 자들’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감정·감응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점에서는 오카 마리가 제안한 동일화하지 않는 공감으로서의 ‘분유(分有)’가 떠오릅니다. 즉 과거의 폭력을 겪은 사람의 경험을 타자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경험한 자의 기억은 이야기되어야 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또 트라우마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이후 세대가 공감이라는 가치를 매개로 새로이 자신의 기억을 만든다는 점에서 마리안느 허쉬의 ‘포스트메모리’도 연상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 일본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 일본인 학생입니다. 그래서인지 <22>에서 젊은 일본인 유학생 코메다 마이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이후 세대의 관계, 즉 자신의 삶과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얼른 연결하기 힘든 이들이 코메다의 고백 혹은 모습을 경유해 감정을 투사하고, 또 피해자들이 폭력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실제 인간임을 상상할 수 있게 돕습니다. 이처럼 <22>가 피해자들의 과거를 보는 동시에 현재를 담는 데 주력하는 것은 영화 속 장면들의 내용과도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22>에 등장하신 분들은 대개 고향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고, 종전 후에도 중국 사회의 가부장성과 민족주의적·성적 낙인으로 2차 피해를 계속 당해 오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문제로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가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가 지속시키고 재생산하는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 김은경 : 피해자가 직면했던 냉혹한 현실은 <보드랍게>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저는 <보드랍게>가 누구도 자신을 ‘보드랍게’ 대해주지 않았다는 김순악의 하소연을 제목으로 삼고, 그걸 ‘컴포트(comfort)’로 번역함으로써 위안소의 위안(comfort)과 귀국 후에 ‘보드랍지(comfort)’ 않았던 냉정한 현실의 간극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 봤습니다. 일본군‘위안부’의 폭력적인 ‘comfort’를 피해자의 맥락에 재배치해 전복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겁니다. 그동안 ‘comfort’의 가해성, 즉 내가 그 가해에 가담하고 연루되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감독님께서 이 영화의 제목을 ‘comfort’로 설명하고 김순악의 삶에 재배치함으로써 할머니의 신산했던 삶, 누구도 정말 애먹었다고 얘기해 주지 않는 그 삶에, 그 고통에 나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독님께서 똑똑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 조서연 : 영화들에서 제가 눈여겨본 것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둘러싼 새로운 기억이 지속적으로 생성될 가능성입니다. 포스트메모리가 바로 ‘역사’가 아닌 ‘기억’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과거와의 정서적인 연결, 즉 구체화된 살아 있는 연결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연관지어 생각함으로써 비극적 사건이 현재와 미래의 상상력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과거를 대면하기 위한 연결적인 접근과 관계를 형성”해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도 계속해서 기억해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김은경 : 조금 더 욕심이 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도 그렇지만 <보드랍게>의 서사, 기획은 훌륭하고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화라는 사회적 텍스트를 통해서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사실 미투 운동 당사자와의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굉장히 훌륭한 기억하기 방식이 틀림없지만 좀 더 ‘comfort’의 맥락에 좀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군사화된 대한민국의 기지촌 이주 여성의 ‘dis/comfort’의 현실을 한국의 ‘위안부’ 기억 공간에 등장시켰더라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안전지대에서 이탈시켜서 다시 ‘위험한’ 대항 기억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사정 또한 너무 잘 이해합니다. 또 <내게서 출발한 배>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방식, 그리고 주인공 멜라니의 입을 통해 겹쳐지는 구조를 선택한 부분은 큰 미덕으로 보였고, 아르헨티나의 관객으로서는 굉장히 좋은 결말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주 2세대 젊은 여성이 ‘위안부’ 증언을 낭독하면서 자신의 엄마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다시 한국 방문과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서사로 이어지는 게 다소 관습적인 전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포스트 메모리 시대에 기억하기는 어떤 기억의 발원지에 대한 강박에서 좀 벗어나서 그 기억 행위자가 처한 문화와 경험 그리고 지역적 배경 속에서 상상적 재해석을 통해서 재탄생할 때 그 의미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아르헨티나 이주 2세대 여성이 기억하는 ‘위안부’ 역사가 초국적 이주민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만나는 그런 결말이었으면 어땠을까, ‘위안부’ 기억이 지구 반대편의 로컬 기억과 만났다면 좀 더 두꺼운 기억으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카메라-출연자-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 🧶 조서연 : 맨 앞과 맨 뒤 장례식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22>가 당사자성을 더 넓히는 텍스트라는 점, 그러니까 활동가들의 말하기로 시작하고 끝났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피해 생존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활동가들이 자신의 삶 속에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새겨 넣게 된 사연을 술회하는 장면들과 병렬됩니다. 🧶 소영현 : 저도 그런 점을 흥미롭게 보았는데요. 세 영화 모두 카메라가 활동가와 멜라니처럼 피해 생존자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눈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돌보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목소리로, 질문으로 변경 가능하지만 그 옆에 찍으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같이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이 포착되고 함께 잡히는 것이 시각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강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조서연 : 낭독이라는 장치 또한 흥미로운데요. <내게서 출발한 배>에서 출연자로 하여금 고 황금주 님의 구술 기록을 읽게 하는 방식은 자료의 낭독이라기보다 연기자의 재연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 역시 일본군‘위안부’ 당사자가 살아온 ‘피해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이 영화의 주안점은 여러 정체성, 여러 경험을 가진 멜라니라는 사람이 자신과 시공간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군‘위안부’라는 문제에, 더 정확히는 황금주라는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 빠져드는지, 그에 대해 무엇을 투사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새로운 시야를 구성해 가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장에서 이후 세대의 자리를 과정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의미있게 보입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수요집회 장면에서 멜라니의 발언은 자신의 삶도, 어머니의 삶도, 황금주의 삶도 모두 여성이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젠더 폭력의 구조 속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았는데요, 귀여운데 잘 싸우는 여자아이를 팔뚝에 새기는 멜라니의 타투 장면입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라는 타인의 삶을 자기화하는 이후 세대의 당사자 되기 과정에 대한 영화로 보입니다. 🧶 김한상 : 보이는 위치에 있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상호작용 역시 중요합니다. <보드랍게>와 <내게서 출발한 배>는 모두 이미 세상을 뜬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후세대 인물들에게 ‘공연’하도록 조건을 던져주고 촬영하는 접근법을 취했는데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 결합된 다큐멘터리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실험들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는 ‘재현’이라는 기존의 목표를 넘어섭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순악과 황금주라는 인물을 각각 ‘공연’하게 되는 두 작품에서 출연자들은 한쪽은 경북 지역의 미투 생존자이고, 다른 한쪽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면서 가정폭력을 목격해 온 여성 연기 지망생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과는 물리적이고 시공간적인 거리가 있는 상황 속에 놓였던 피해자들의 증언이지만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걸쳐봄으로써 특정 방식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모습을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 앞을 무대라고 했을 때 그 앞에 놓인 피사체로서의 출연자들 역시도 자신들의 상황과 공연해야 될 특정한 역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놓인 사회적 맥락을 성찰해보게 되면서 급진적인 각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무대와 배우의 관계가 급진화되는 과정, 이것을 브레히트는 일종의 교육적 과정으로서의 교육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런 측면이 많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재현’이라는 접근만으로 머물 수는 없는 공공 기억의 측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시사하는 두 작품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출연자와 카메라 사이의 급진화, 즉 상호작용을 넘어서 어떻게 출연자와 관람자의 상호작용, 다큐멘터리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끌어낼 것인가, 피해 기억의 공공화를 위해 어떻게 이 ‘재현하는 자와 관람하는 자’의 구도에 변화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앞으로 탐구해 나갈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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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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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마침내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성사시킨 '시민연대'의 힘 전시를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과 인권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실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의미이다. 공공 시설에서 정당하게 계획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와 소녀상 전시가 우익 세력의 협박으로 중단되는 일이 거듭되는 현실을 목격한 일본 시민들의 대응은 <표현의 부자유> 전시였다. 거의 10년에 걸쳐 이 전시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연결한 힘이었던 선의와 배려, 열정과 감성, 자발성과 자율성 등이 큰 역할을 했다. 2022년 4월에 개최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일본 소카대 쿠라하시 코헤이 교수가 이에 대해 소개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한국에서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해 건립됐다. 이후 한국에는 80개 이상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미국과 독일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당사자국인 일본에는 소녀상이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 소녀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표현의 부자유>라는 전시회다. 이 미술전은 정치적 이유 등으로 거부된 작품을 전시하는 장이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소녀상을 둘러싸고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소녀'라는 표상에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파와 정부 또한 소녀상을 '위안부상'이라고 부르며 <표현의 부자유>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전방위적으로 방해해 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회'는 다시 기획되고 지역을 순회하며 열리는 과정이 지속돼 왔다. 심지어 법적 판단을 구하기도 하고, 전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변호사들이 참여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한 걸까? 방해와 위협으로 거듭 좌절된 일본 소녀상 전시 일본에서 '소녀상'은 매우 강한 혐오의 대상이다. '말뚝을 박고', '얼굴에 종이봉지를 씌우고', '차는' 등 우파 지지자들의 직접적인 파괴 행위가 계속돼 왔다. 또 공격적으로 '폭파'를 언급하거나 '정액을 끼얹겠다'고 발언한 국회의원과 저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이런 행위에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화되는 것과 피해자의 이미지가 '소녀'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는 어떤 경위로 시작됐을까? 계기는 20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을 만나 촬영해온 나고야시 거주 사진작가 안세홍은 도쿄 니콘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 개최를 추진했다. 1년 전 확정된 전시회 상황이 급변한 것은 개최 한 달 전이었다. 사진전을 소개한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우파의 눈에 띄었고, 항의가 거세졌다. 당시 안세홍은 법원에 가처분 절차를 밟아 장소 사용 결정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개최 사흘 전 전시회는 취소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도쿄도미술관에서 'JAALA미술가회의(Japan Asia Africa Latin-American Artist Association)'가 주최하는 <제18회 JAALA 국제교류전>에 소녀상 미니어처와 작가 박윤빈의 유화 '위안부!'가 전시되었다. 그런데 전시회 4일째, 미술관 측이 무단으로 작품을 철거했다. 하지만 이 일은 안세홍 전시 때와는 달리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접한 미디어 아티스트 오에노키 준은 전시가 거부된 작품을 미술관 벽에 프로젝션으로 투사해 보여주는 것으로 전시회 파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2014년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가 출범하고, 2015년 도쿄의 갤러리 후루토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되었다. 실행위원회를 이끈 오카모토 유카 씨에 따르면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재질로 만든 동상이라면 일본에서 전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 소녀상 작가 김서경-김운성 부부에게 소녀상을 의뢰했다. 전시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들은 예산이 부족한 전시회 측의 사정을 듣고 직접 자비를 들여 소녀상의 수송을 도왔다. 일본에 반입하기 위해 크기가 큰 조각상은 3등분으로 분할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다시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전시되었다. 작가들은 전시 후 일본을 떠나기 전 "이 소녀상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면서 소녀상 뒷면에 "일본에 남긴다"고 서명했다. 이로써 마침내 일본에 소녀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소녀상은 도쿄도 내 어느 극단의 오두막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무료로 대여되고 있다. 연극 상연이나 영화 촬영 시 대여된 적도 있다. '사라져야 했던' 소녀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녀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9년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이하 아이트리 2019)에서 선보인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 전시이다. 나고야시 아이치현에서 3년마다 열리는 아이트리는 월 관람객 수가 25만 명을 상회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유명 국제 예술제이다. 이 예술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 소녀상이 출품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우파의 협박, 일부 정치인들의 반발 등 논란이 일었고, 결국 개최 3일 만에 전시가 중단되고 말았다. 다음 달에는 일본 문화청이 예술제에 보조금 약 7,800만 엔을 전액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이후 감액 지급). 예술제에 참가했던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겁박하는 이런 행태에 대해 작품 봉인 및 전시 거부,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연대하며 고발했다. 그 후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시와 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다카스 클리닉의 다카스 카츠야 원장, 햐쿠타 나오키, 다케다 쓰네야스, 아리모토 카오리 등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오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에 대한 소환 서명운동[1]을 전개했다. 그러나 2021년 선거관리위원회 조사에서 모인 서명 중 83.2%에 위조 등의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서 '사라져야 했던' 이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두고 '또 다른 출발'이라 해야겠다. '아이트리 2019'에서 소녀상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독립적인 전시회를 기획하는 주최 단체가 생겨났고, 도쿄를 시작으로 관련 기관들이 협력하는 형태로 연대해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개최 예정지에 우익의 항의 시위와 압력, 방해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투쟁에 힘입어 도쿄와 나고야, 오사카 등에서 전시할 권리를 획득해 갔다. ▶ 연기된 도쿄 전시회 첫 소녀상 전시회 지역은 도쿄였다. 2021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신주쿠의 갤러리 세션하우스 가든에서 기획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는 사전 공지 및 관람 신청을 개시했지만 우파의 방해와 가두 선전이 계속되자 결국 갤러리 대표가 이웃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해 '대관 불가'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급히 다른 장소를 물색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휴관 끝 중단된 나고야 전시회 '아이트리 2019 사건' 이후 만들어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를 잇는 아이치의 모임'은 2021년 1월 나고야시 시민갤러리 사카에에서 <우리의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를 개최하려 했다. 역시 방해가 예상되었기에 시설 관리자와 경찰과도 협의하는 등 신중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7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최가 발표되자 가두시위, 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협박이 계속됐다. 게다가 8일에는 갤러리로 수상한 우편물이 도착해 스태프와 변호사까지 퇴거 명령을 받았다. 경찰 입회 하에 우편물을 개봉하자 폭죽 같은 것이 터졌다. 협의를 시도했으나 시설과 행정이 응하지 않고 휴관을 연장해 결국 주최 측은 전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허가 취소된 오사카 간사이전 나고야전의 작품을 이어받은 오사카 실행위원회는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엘오사카(오사카부립노동센터)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간사이>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행사장 쪽에서 '안전 확보'를 이유로 시설 사용 허가를 취소했다. 실행위원회는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7월 9일 사용 불허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도 항소가 기각돼 공공시설 전시회를 막을 명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 드디어 개최된 도쿄전 오사카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시설에서 개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은 실행위원회는 전시회 한 달 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최종 462명에게 341만 2,900엔을 후원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쿠니타치시민예술소홀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를 개최했다. 전시회를 방위하라! 치열했던 도쿄전 안팎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이하 도쿄전)> 전시회에 실제 스태프로 참여한 나는 내부자로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도쿄전에서 가장 치밀하게 준비한 미션 중 하나는 전시회를 지키는 일, 곧 '방위'였다. 먼저 매일 약 40명, 총 240명의 자원봉사자와 7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여 교대 근무 등의 치밀한 경비 배치 계획을 세우고, 법적 조치도 확인했다. 또 경찰과도 협의했다. 역시나! 전시회 개최 중에 40여 개 우익 단체가 몰려와 가두선전을 하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종군위안부를 조작하고 동상을 상징처럼 만들어 그것을 예술이라며 하며 전시하는 너희는 바보냐, 이봐!"라고 스피커로 떠들어댔다. 우익들은 가두선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녀상 전시를 방해했다. 전시회를 무단 촬영 한다든지, 행사장 앞에서 항의문을 낭독한 뒤 실행위원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아예 티켓을 구매해 갤러리에 입장하는 우익도 있었다. 또 전시회를 찾은 우익을 촬영해 유튜브와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평소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에 대항해 활동하던 방위 담당자는 이들 '요주의 인물'을 식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주의 깊게 감시했다. 현장 밖에서도 각 지역 '카운터 운동[2]'과 연계해 '○○가 부자유전에 간다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들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했다. 혐오 발언과 함께 우익의 시위가 격해지면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 운동도 격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쿄 부자유전에서는 그런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간사이전에서는 마네킹 플래시몹 퍼포먼스도 조용한 카운터로 진행됐다. 도쿄전 방위 자원봉사자들도 혐오 발언을 동반한 우익의 가두선전이나 도발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그보다 실행위원들이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개최지인 쿠니타치시 지역의 시민활동 네트워크와 연계하는 일이었다. 실행위원들은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자유전에 협력할 쿠니타치 시민을 찾아 '예술전 개최를 실현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이를 통해 경찰과 시설, 실행위원과 쿠니타치 시민의 연대로 안전하게 전시회를 개최할 '방위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한편 공안경찰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초기부터 협의해온 이들이 전시회 진행자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전시 첫날 스태프를 가장한 경찰관이 갤러리 내에 무단으로 진입해 직원들이 그를 저지하는 일이 빚어졌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둘째날 오전에는 전 스태프에게 '공안, 경찰이 쿠니타치시청 명찰을 달고 있다'는 정보가 공유되었고 '경찰은 우리 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주의가 전 스태프에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시설 측이 설치한 방범 카메라 18대 중에 경찰 카메라가 3대 포함되어 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교육위원회와 경찰에 확인한 결과 정황이 상당했다. 경찰이 가져가겠다고 한 카메라 3대의 영상 데이터는 예술소홀과 시교육위원회 입회 하에 지우기로 했다. '부자유전'의 다른 이름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연대와 선의, 열정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모였을까? 방위 담당의 핵심 멤버와 변호사는 실행위원회, 경험자, 전문가이므로 경찰과의 사전 절차 등 준비는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실행위원회의 인맥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준비 과정을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에서 했기에 직업이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전시장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나중에 보니 개최지의 시민운동가부터 학생, 재일코리안 등 다양했고, 노숙자와 고령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장 운영은 재미있게 표현하면 '엉망진창'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재일코리안의 요리점에서 매일 배달해준 도시락은 맛있었다. 반드시 '한국 요리'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 도시락이 역시 이 전시회가 '평화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한 미술전임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기도 했다. 도쿄 전시회를 비롯해 그동안 개최된 지역별 <표현의 부자유전> 모두 전국적인 조직이 아닌, 콜렉티브 방식의 운영이었다. 직업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지만, 선의와 열정으로 함께 모여 함께 실천하고, 함께 해산하는 집합-이산 형태였다. 전시 장소 또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공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이나 운영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실천의 의의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이 실천의 첫 번째 의의는 홋카이도대학 현무암 교수가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세이토샤, 202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녀상은 국가 간 대립의 산물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전시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적 연대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실천은 모두 운동 문화의 '친밀권(intimate sphere)'[3] 안에서 '무보수'이자 'DIY(Do it Yourself)', '집단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함께 모여 실천하고 해산하는 집합-이산의 과정에서 가해국 시민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파트너라는 응답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이 실천은 공공 영역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동안 <표현의 부자유전>은 민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 시설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우익이 찾아오기 때문에 경비에 대한 우려로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공공 공간 또는 공적 매체에서 '위안부'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없는 일본의 현실에서 이 실천은 '위안부' 문제를 공공 영역으로 가져오게 한 중요한 투쟁이다. 또한 일본 시민운동 자체의 공공 영역으로의 확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번째로 이 실천을 통해 '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소녀상이 일본에 세워지지 못하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상을 전시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일본 사회의 경우 특정 장소에 건립하는 것보다 전시회 개최를 통해 지역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의 전시회는 도쿄의 실행위원회가 전국 투어를 하는 식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니다. 각지에서 개최될 때마다 지역별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지역의 시민운동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회가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은 행정과 경찰, 우익의 편견과 혐오, 폭력 등에 맞서 나간다. 이처럼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연대의 친밀권이 공공권(公共圏)[4]을 쟁취해 나가고, 피해의 기억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이동하며 '기억의 장소'를 확대해 나가는 실천이 되고 있다. 편집자주 ^ 소환 서명운동 : 당시 대표적으로 활동한 이들이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을 잇는 아이치의 모임' 공동대표인 나카타니 유지 변호사와,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 공동대표 오카모토 유카 공동대표 등이다. ^ 카운터 운동 : '카운터스(counters) 운동'으로도 표현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극렬해진 혐오와 인종차별에 맞서 반혐오, 반차별 운동을 전개한 자발적인 시민 운동이다. 일본 내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끈 주역이다. ^ 친밀권 : '당사자 간 연대’의 형태를 포함한 사랑과 지지의 공간을 의미한다. ^ 공공권 : 국가적 공공권, 공적 공공권, 시민적 공공권 등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언론처럼 비국가적이고 비시장적인 영역으로서의 시민 사회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강제나 배제 없는 대화의 공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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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에세이 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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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1] 2025년 3월 10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의 소식이 전해졌다.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고 요구하며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는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가 그녀의 유골함이 손상된 채로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었다는 사실을 담은 사진과 글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온 김신현경 교수는 그동안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침묵을 강제한 구조를 되물으며 배봉기의 삶과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기억하기를 제안한다.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991년 가을, 오키나와의 허름한 숙소에서 한 여성이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름은 배봉기.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었고, 국적도 없이 오키나와에서 살아가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 조선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1975년, 일본 정부에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면서 자신이 오키나와에 '위안부'로 끌려왔음을 밝혔다. 이는 오늘날까지 확인된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다. 우리가 '위안부' 운동의 시작점으로 기억하는 1991년 김학순의 증언보다 16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최초 증언자'로 기억되지 않았다. 배봉기는 1914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례원에서 머슴 아버지와 품팔이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민며느리와 보모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함경남도 함흥에 정착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1943년, '여자 소개꾼'들로부터 "일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를 소개받는다. 흥남역에서 출발해 경성, 부산, 시모노세키, 모지, 가고시마를 거쳐 도착한 곳은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 그 '일자리'가 바로 '위안부'였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배봉기는 그 참혹한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 투쟁이었다. 미군 점령하의 오키나와에서 그녀는 '무국적 조선인'으로 분류되었고,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그녀는 다시 '위안부'였던 자신을 말해야 했다. 이처럼 '위안부' 피해자임을 가장 먼저 증언했지만, 한국에서 그 '최초'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다. '위안부' 운동 역사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잊힌 이름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배봉기의 죽음의 의미는 단지 한 개인의 사망이 아니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두 재일조선인 단체, 곧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은 그녀의 유골을 어디에, 누구의 이름으로 묻을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벌였다. 누구의 '죽음'인가,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녀를 '대신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배봉기의 주검을 둘러싼 이 경합은 단순한 장례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살아온 시간 속에 깃든 식민주의와 냉전의 긴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망자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누구의' 유골인가?: 민단과 총련의 유골 소유권 분쟁 198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휩싸였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과 개혁으로 촉진된 글로벌 탈냉전,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운동의 언어로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기생관광과 유신 반대 운동을 벌여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1988년 개최한 '여성과 관광문화'라는 제목의 국제 세미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기생관광'이라 불리던 산업은 한국 정부가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적극 장려한 성매매나 다름없었다. 이 세미나에서 나중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화여대 교수 윤정옥은 오랜 현장 조사와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 정신대연구위원회 설치와 1990년 1월 한겨레신문 연속 기고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 사회 여성운동에 굵직한 흐름을 형성했다. 1990년 11월,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사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공개 증언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를 고발한 그녀의 증언은 이후 전 세계를 향한 연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배봉기도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녀를 돌봤던 총련 활동가 김현옥의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고향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가고 싶지만 고향에도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9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남한 여대생 임수경에게도 관심을 보였으며, 1990년부터 시작된 북일수교협상에 특별한 기대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녀가 1991년 10월 18일 홀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한국 언론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소식을 듣고 오키나와를 직접 찾은 정대협 윤정옥 대표가 전한 부고는 한겨레신문에 짤막한 기사 한 줄로 실렸을 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삶이 아닌, 죽음 이후 남겨진 유골에 쏠렸다. 배봉기의 1주기를 앞두고 총련은 그녀가 생전에 "외국 군대 없는 통일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유언처럼 해석하며, 오키나와에 유골을 남겨두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민단 측에서는 그녀의 조카, 즉 언니의 아들이 등장해 유골을 고향으로 가져가겠다고 나섰다. 두 주장은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사망한 지 닷새가 지나 발견되었기에 사후에 어디에 있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1987년 출간된 『빨간 기와집』, 1989년 인터뷰, 1991년 나온 다큐멘터리 <아리랑의 노래>, 2017년의 <침묵> 속 배봉기의 말들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마음은 단순히 어느 나라에 속하고 싶은지를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고향에 갔는데 집이 없더군요…. 너무나 쓸쓸한 거예요." "가보고는 싶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외로울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고향이라는 장소가 더 이상 안전하거나 따뜻한 공간이 아니게 된 이들에게 귀향이 갖는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봉기를 둘러싼 이념적 해석은 오히려 그녀의 말을 지우는 방식이었다. '포스트식민' 페미니스트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서발턴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망의 부재를 지적한다. 기록된 배봉기의 목소리와 별개로 그녀의 '말'은 양쪽 모두에게 재현되고 대변되는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민단은 그녀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여성'으로, 총련은 '분단된 조국을 거부한 여성'으로. 그렇게 각각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녀는 또다시 침묵하게 되었다. 귀향하지 않은 '위안부', 외면한 한국 사회 배봉기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정치적 맥락은 남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더욱 메말라갔다. 민단과 총련이 벌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감정을 안고 떠났는지에 대한 관심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정치에 남한 사회는 조용히 동조하고 있었다. 물론 1991년 당시 민단과 남한 정부가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남한은 냉전이 빠르게 해체되던 국제정세 속에서 새로운 외교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과 수교를 마친 상태였고, 중국과 수교도 추진 중이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일명 '7·7 선언'과 남북총리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 진출을 꾀하는 일본과는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었고, 북한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허물어지는 속에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을 타개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1991년 1월 북일수교회담이 열렸고, 이후 2년여 동안 총 8차례 회담이 계속됐다. 특히 북한은 1992년 6차, 7차 회담에서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배봉기의 죽음과 1주기 즈음은 '위안부' 문제가 북일 외교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총련은 이 정치적 흐름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고, 반대로 민단은 이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배봉기의 유골을 두고 민단이 조카를 내세워 법적 소유권을 주장한 것도 단순한 가족의 의지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제스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한 사회와 정부는 이 모든 일에 거의 침묵했다. 배봉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1975년 그녀의 삶이 처음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와 비슷한 침묵이었다. 다만 1975년의 침묵과 1991년의 침묵은 성격이 다르다. 1970년대는 냉전의 강고한 시기였고, 총련과 관련된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일은 사실상 금기였다. 반면 1991년의 남한은 탈냉전과 민주화를 겪고 있었다.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비핵화 선언 등 남북한 화해 무드를 강조하던 그 시기에는 오히려 민감한 이슈를 피하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배봉기의 죽음도 그렇게 화해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덮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침묵은 또 다른 배제였다. 제국의 신민으로 동원되어 귀향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한 여성의 생을, '화해의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전의 유산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을까. 이 무렵,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남한 사회에서 본격적인 의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 한국, 북한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북한에서 열린 3차 토론회는 남한 주요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이목을 끌었다. 남북한, 일본, 미국, 독일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고, 북한은 이를 민족문제로 정의하며 남북의 공동 대응을 강조했다. 일본 참가자들은 가해국의 시민이자 천황제 사회의 피해자로서 연대의 주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장에서도 배봉기처럼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해 12월 6일, 배봉기의 49재가 치러진 날, 김학순이 도쿄지방재판소에 '위안부' 피해자로는 최초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날, 일본과 한국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시간의 병치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중심에 놓고 기억해왔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국가 간 관계 속에서 기억을 조직해 왔지만, 그 국가 경계 바깥에서 살아가다 조용히 사라져간 이들에게는 쉽게 시선을 주지 못했다. 배봉기의 죽음은 그 틈에 존재했다. 제국, 냉전, 분단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생을 꾸렸고, 그 경계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한 복합성과 감정의 결은 당시 사회운동 안에서도, 정부의 대응 안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 선뜻 답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다. 기억인가, 재소유인가 그러나 지금, 배봉기의 유해는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는 2025년 3월 10일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사진과 글에서 그녀의 유골이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함이 손상되어 흙과 섞인 채로 방치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그녀는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기억으로 그녀를 말하려 하는가. '배봉기의 평화'는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며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는 요구를 중심으로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다시 호명되는 일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녀가 '최초의 증언자'로 불리는 것은 소중한 인정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호명이 국가주의적인 서사로 제한될 가능성을 경계하게 된다. 더욱 성찰해야 할 것은 배봉기의 증언이 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그녀의 말은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을 지워버린 것은 바로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국가 중심의 기억 체계였다. 이 체계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녀를 다시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하는 일은 애도를 제도화하고, 기억을 다시 권력의 틀 안에 가두며, 그 기억을 가능하게 했던 사유와 노동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 왔다. 그녀가 품었을 복합적인 감정들—꿈에서는 자주 갔지만,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고향에 대한 감정—을 가능한 한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유골을 어느 일방이 '가져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시는' 애도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키나와의 이웃들과, 한국의 사람들이, 국가의 대결 구조를 넘어서 그녀를 기릴 수는 없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배봉기를 다시 기억하는 일이, 단지 '국가가 인정한 최초 증언자'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녀의 말이 왜 들리지 않았는지를 묻고, 그 침묵을 강제한 구조—식민과 냉전, 그리고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을 감싸온 국가주의적 해결 틀 자체를 되묻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애도는 체제와 제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이제 다른 방식의 말하기, 다른 감각의 연대, 다른 시간의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 편집자주 ^ 이 글은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한국여성학』 제37권 제2호, 2021)라는 제목의 논문의 Ⅴ장 ‘주검을 둘러싼 경합: 지워지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웹진 『결』의 목적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DOI: 10.30719/JKWS.2021.06.37.2.203) 또한 이 논문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김은실 엮음, 휴머니스트, 2024) 에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라는 제목으로 수정, 보완되어 재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