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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상화된 위기와 폭력, 그럼에도 일어서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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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화된 위기와 폭력, 그럼에도 일어서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만나다 팔레스타인에서 연일 참혹한 뉴스가 들려오고 있다. 통합 식량 안보 단계 분류 기준인 IPC 지표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만 약 34만 명이 기근에 해당하는 굶주림을 겪고 있고, 약 87만 명이 '비상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거지의 92%가 파괴되었고, 정신 건강 회복 및 심리 상담 지원이 필요한 아동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의 보고도 있다. 이렇게 위기가 일상화된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은 젠더 기반 폭력에 더해 문화적 특성으로 그 피해가 드러나기도 어려운, 위험이 겹겹이 중첩된 상황에 있다. 2024년부터 현지에서 여성 언론인 육성과 여성 주도 온라인 언론 플랫폼 설립을 위한 'Speak-up'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사단법인 아디가 관련 소식을 전한다. #1. 사유는 필요 없다, 일상적인 체포와 구금 여성농민 활동가 메이사르 이야기 2024년 9월 25일,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새벽 6시. 요르단강 서안 도시 나블루스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농민조직 활동가 메이사르(Maysar)의 집으로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 15명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자고 있던 가족들을 모두 깨워 거실로 모이게 했고, 잠시 후 예순의 나이에 시각장애까지 있는 메이사르만 다른 방으로 불러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렸다. 가족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이스라엘 군인들은 안대를 풀어줬지만, 체포 사유에 대한 아무런 고지 없이 그대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집 밖에는 이스라엘 군용 차량 4대가 있었고, 수십 명의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렇게 이스라엘 군에 체포된 메이사르는 구금됐고, 가족들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중에 변호사를 통해 전해 들은 그녀의 체포 사유는 '이스라엘 안보 위협'이었다.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메이사르를 포함해 같은 이유로 체포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의 석방을 위해 계속 활동을 이어갔다. 4개월 뒤인 2025년 1월 20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휴전 1단계가 시행되면서 메이사르는 석방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일방적 휴전 파기와 재공격이 가해진 3월 18일 이후 그녀는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 언제 다시 끌려갈 지 모르기 때문이다. 2025년 5월 현재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47국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국경과 공항, 항만이 없다. 자체 화폐도 없고 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역 방문이나 현지인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으로는 택배를 보낼 수 없으며, 자체적으로 물품을 수입하거나 수출할 수도 없다. 모두 이스라엘 세관을 거쳐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한다. 팔레스타인에는 교통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은 있지만 군대는 없다. 대신 이스라엘 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장 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한다. 메이사르 사례는 여기에 해당한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인은 팔레스타인 아동과 여성, 청년을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유엔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점령된 팔레스타인의 영토들(OPT,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라고 명명한다. 국제적으로 분명 존재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처럼 식민지와 같다. #2. 문화적 특성상 드러나기 어려운 젠더 폭력 청년 여성 라나 이야기 팔레스타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4남매 중 첫째 라나(Rana). 교육을 중시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했고, 나블루스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악몽은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던 라나가 24세가 되던 해에 시작됐다. 직장생활을 하며 추가 학업을 하고 싶었던 라나에게 부모의 결혼 압박이 심해진 것이다. 버티지 못한 라나는 한 친척이 주선한 맞선자리에 나갔다. 라나보다 17살이 많았고, 아이도 있었던 남자는 첫 만남에서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여성의 도리를 훈계했다. 게다가 라나의 허락 없이 신체를 접촉하며 명백한 성추행을 했다.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도리어 라나가 자처했다며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라나는 부모에게 성추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가족 간 대화는 단절됐고, 남자는 라나의 SNS를 찾아내 충격적인 사진과 영상을 계속 보냈다. 불안과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라나는 현재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2018~2019년 팔레스타인에서 인권 조사를 했던 (사)아디는 당시 현지 여성 활동가는 "팔레스타인에는 이스라엘 점령 문제 못지 않게 젠더 폭력 문제도 심각하다. 하지만 문화적 특성 때문에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활발할 때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조용했는데, 젠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고,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2023년 UN WOMEN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여성의 59.3%가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했으며, 이 중 심리적 폭력(57%)이 가장 많았고, 경제적 폭력(20.5%), 신체적 폭력(18.5%), 성폭력(9%)이 뒤를 이었다. 또 2022년 팔레스타인 중앙통계청(PCBS)에 따르면 고등교육 이수율은 여성이 더 높지만,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남성의 3분의 1 수준, 고용률은 5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내 젠더 기반 폭력이 심각하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구조적으로 만연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생필품 트럭을 눈앞에 두고도 굶주리는 아이들 '인도주의 재앙' 속 엄마 니빈 이야기 수년째 가자지구에서 (사)아디와 함께 여성·아동 구호활동을 하고 있는 니빈(Nirveen)은 요즘 아침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지난 2025년 3월 2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는 모든 구호물품의 진입을 막은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식량은 거의 바닥났다. 그날 5월 13일도 동료와 함께 한 시간 넘게 가자지구 시내를 헤맸지만, 문을 연 가게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니빈은 점점 야위어 가는 여섯 살 셋째 아들 아흐메드 앞에서 또 다시 아들을 떠나보낼까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니빈에게는 먼저 떠나보낸 막내아들 아담이 있었다. 아담이 생후 4개월이던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수백, 수천 톤의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어 가자지구를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가자지구에 필요한 전기와 기름은 물론 물과 식량, 의약품까지 차단했다. 아담은 태어났을 때 소화기 문제가 있어 페디아슈어(PediaSure)라는 특수 환아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물품 반입 차단으로 환아식은 이내 소진됐다. 생후 7개월부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동이 났고, 한 달간 힘겹게 버틴 아담은 9개월이 되던 2024년 2월, 영양실조와 탈수로 세상을 떠났다. 1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아흐메드를 보는 니빈과 가족들의 마음은 찢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 이후 오늘(2025년 5월 28일)로 600일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언론은 이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또는 '가자 전쟁'이라 명명하지만 사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가자지구 보건부의 발표에 따르면 5월 28일 기준, 230만 명에 달하는 가자지구 주민 중,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는 5만 4,056명이고 부상자 수는 12만 3,129명이다.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6만 1,700명을 넘어선다. 매일매일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과 봉쇄가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이 비극의 피해자 중 70%는 여성과 아동이다. 유엔의 인권기구,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 모두 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은 가자지구 민간인을 향한 '집단 학살'이자 '전쟁 범죄'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국제기구와 국가도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을 막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230만 명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군사 무기만이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 전염병, 가뭄, 폭염 등과 함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하는 생존 필수품의 부재이다. 놀랍게도 생필품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가자지구 입구에 생필품을 실은 수천 대의 트럭이 줄지어 있지만 이스라엘이 막고 있어 보급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니빈의 경우처럼 부모는 아이들의 아사(餓死)를 걱정하고, 부모와 가족을 잃은 아이들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 삶의 마지막 자락에 매달려 있다. '인도주의 재앙'이라는 표현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참혹한 현실이 가자지구를 뒤덮고 있다. #4. 젠더 폭력 가속화시키는 '나크바대재앙'를 고발한다 '아디'가 펼치는 연대와 기록 이야기 2016년 설립된 사단법인 아디는 아시아 분쟁 피해 지역의 인권 회복을 목표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이다. '아디'는 Asian Dignity Initiative의 줄임말(ADI)이자 배의 돛을 고정시키는 순우리말 아딧줄에서 따온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존엄성을 증진하기 위해 인권, 평화, 개발이라는 돛의 방향을 잡고 제대로 나아가겠다는 단체의 지향을 담고 있다. 아디는 창립 직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사 점령에 따른 인권 침해 문제를 인지하고 현지 방문과 기록을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 또 팔레스타인 내 점령 관련 폭력(ORV: Occupation Related Violence) 뿐만 아니라 젠더 기반 폭력 역시 심각함을 파악하고 2020년부터 매년 '팔레스타인 여성인권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특히 2020년부터는 폭력 피해 여성들의 인권 보호와 역량 강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여성 언론인 육성과 여성이 주도하는 온라인 언론 플랫폼 설립을 목표로 한 독립 미디어 실험 'Speak-up'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현지 여성단체와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 사회에 전달해 왔다.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하마스의 군사 공격과 인질 납치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말은 다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국했던 1948년부터 비극이 출발했다고 입을 모으는 그들은 그 시기를 '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점령 폭력은 팔레스타인 사회 내 다양한 폭력을 야기했고, 젠더 폭력을 더욱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건국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 수천 명이 살해됐고, 72만 명이 난민이 됐다. 건국 이후 4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이 거주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식민지화 했고 입법, 사법, 행정 전 영역에서 차별했다. 이에 대응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고 무장투쟁을 감행했다. 그 결과 1993년, 전 세계의 관심 속에서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오슬로협정'이 체결됐고, 팔레스타인 지역 일부에 자치권이 부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슬로협정을 끝내 이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로 분할해 식민지배 하였다.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는 영토 병합과 주민 추방 정책이, 가자지구에서는 봉쇄와 고립 정책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수백 개의 정착촌을 건설한 이스라엘은 자국민 수십 만 명을 이주시키고, 가자지구에는 4번의 대규모 군사 공격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대원들이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약 1,200명이 사망하고 251명이 인질이 되는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삶은 점령 폭력을 제외한다면 가부장제 질서가 견고한 사회의 여성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생필품 반입 차단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는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내몰고, 가족 전체가 폭탄에 희생당하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국제사회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맥락 속에서 팔레스타인 여성을 억압받는 불쌍한 피해자로 인식했고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디가 경험한 그녀들의 모습과 이야기는 달랐고, 단일한 이미지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위에서 전한 세 이야기처럼 이중, 삼중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록 과정에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꿋꿋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메이사르는 오늘도 자신이 몸담은 여성농민 조직에 출근하고, 라나는 고통의 경험을 나누며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니빈은 남아 있는 자녀의 생존을 위해 매일 음식을 찾아 거리를 나서고 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여성 역량 강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점령 구조와 가부장적 질서를 바꾸려는 여성들도 있다. 아디가 2024년 1월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여성 언론인 양성 프로그램 'Speak-up' 프로젝트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활동가 시린 제이단(Shirin Zeidan)도 그중 하나다. 오랜 기간 이스라엘 점령 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전문성을 갖춘 현지 여성들이 직접 사회 문제 이슈들을 발굴하고 기사화해 인권 향상을 주도할 수 있도록 추진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 25명은 4월부터 10월까지 저널리즘과 뉴스, 미디어의 이해에 관한 기초부터 정치와 경제, 여성, 문화 등 특정 분야 이슈, 그리고 기사 작성법과 촬영 장비 사용법 등 전반적인 미디어 교육을 이수했다. 교육을 마친 여성들은 '올리브의 계절: 이스라엘 정착민의 폭력과 농부들의 회복력'을 주제로 한 기사, '체크포인트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 팔레스타인의 치의대생'을 주제로 한 영상 뉴스를 포함해 총 6편의 기사와 6편의 영상을 제작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린의 참여 후기 중 한 대목이다. "올해 가장 큰 변화는 나블루스에서 직면한 모든 장애물과 어려운 보안 조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 저는 인생 내내 일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증명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여성지원센터에서 저는 첫 번째 기회를 얻었고, 맡겨진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죠. 저는 모든 도전에 힘과 결단력으로 임했고, 저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는 제 역할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단지 피해자로서의 외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점령과 억압, 그리고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도 살아남고 저항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생존과 연대의 이야기다. 그들이 존재로서 저항하는 한 아디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함께 싸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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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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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윤경회 간사 인터뷰 1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 통념, 법적 권한의 한계와 함께 조사 의지를 가진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탓에 결실을 맺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2018년 9월 14일부터 시행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이듬해 12월 2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 첫 발걸음이었다.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제출하며 활동을 종료한 '5·18조사위'는 한계가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토대로 피해 실태를 확인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했고, 이어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결성의 주축이 된 윤경회 간사와 '5·18조사위' 및 '열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Q : 안녕하세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사회적 참사와 과거사 조사 활동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띕니다. 자기소개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윤경회 : 개인적으로 오늘 웹진 <결>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특별해요. 제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닿아 있거든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대학 1학년 새내기 때 공익광고 제작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꽤 봤어요. 그때 <낮은 목소리2>를 만난 계기로 역사다큐 감독을 꿈꿨는데, 이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천착으로, 학생운동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러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업무를 수행했고, 고양성폭력상담소에서 상근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전임 팀장께서 건강문제로 공석이 되어 지원하게 되었구요. 2023년 3월 13일부터 출근했으니 조사 활동 종료일인 12월 26일까지 9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제가 합류하게 된 거죠. 이듬해 6월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5·18조사위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한 뒤에는 피해자 분들과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이하 '열매')'를 만들고 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활동 종료 9개월 남기고 합류하고 보니… Q :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종합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가지는 못했었죠? 🧶 윤경회 : 맞습니다. 과거에도 성적 피해 사례가 언급된 적 있고, 연구자들이 진행한 구술 채록이 언론이나 다큐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공식화된 것은 2018년 말입니다. 피해자 김선옥 님의 5월 8일 인터뷰를 계기로 발족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요. 하지만 공동조사단 활동 기간(2018.6.8.~10.31.)이 채 다섯 달도 안 됐고, 법적 권한에도 한계가 있어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어요. 이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2019년 12월 27일 출범한 '5·18조사위'가 2020년 4월 공동조사단의 조사 자료를 인계 받아 검토하고, 5월 11일 직권으로 성폭력 사건에 관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5일 '성폭력'을 조사 범위에 포함하는 법 조항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에 들어가게 되고요. Q : 활동 종료 9개월 전이면 조사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서 합류하신 거네요. 🧶 윤경회 : 시기상으로 그래요. 처음에는 인계 받은 조사 자료를 검토, 취합해 심의 안건까지 담은 보고서를 정리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 일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자료를 검토해보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피해자의 동의부터 구체적인 피해와 관련한 질문과 답변, 간인까지 마친 진술 조서 형식이어야 하는데, 피해 입증 자료로 인정받기 어려운 단순 녹취록에 불과했어요. 이유를 봤더니 조사관이 피해자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드러나지 않은 분들까지 찾아내기 위해 이전 자료나 연구까지 뒤져 전수조사해 연락했지만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냐', '피해를 밝힌 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분들이 많았던 거예요. 상황이 그러니 만나만 주십사 겨우 설득해 확보한 자료가 녹취록이었던 건데, 내용도 빈약했어요. 이분들에게는 온몸에 새겨진 40년 전의 피해를 처음으로 언어에 실어 말하는 경험이다보니 내용 여기저기가 거시기, 거시기예요. 또 울음으로 끊긴 부분도 많아요. 피해자가 우시니 조사관도 울고… 이야기가 중단되는 거죠.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Q : 피해 입증 자료 전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 윤경회 : '큰일났구나!' 겁이 덜컥 났죠. 힘들게 진술하고 곧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고 계신 분들께, 새 팀장이 와서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이잖아요. 실제로 '전임은 어디 갔냐', '우사스럽게 또 하란 말이냐',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안 했다'… 두어 달 동안 엄청 원성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연락을 드리고, 계속 다니다가 한 피해자의 가게에서 5시간 동안 기다린 적이 있어요. 그때가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결정적인 기회였던 것 같아요. 끝내 조사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간 쌓여온 피해자들의 경험을 대변해주셨거든요. 그동안 관심이 고마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피해 경험과 아픔을 성심을 다해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넘고 헤쳐온 삶의 애환은 빠진 채 여고생, 군용 트럭, 집단 강간 같은 자극적인 용어들로 그 이야기가 소비되더라는 거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국가의 성의 있는 조치도 없었고요. 한편으로 피해자의 '말하지 않을 권리'도 저희에게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욕구이자 권리잖아요. '증언'의 의미도 있고요. 반면 말하고 싶지 않은 피해 경험도 있었어요. 한 예로, 5·18 당시 전남합동수사본부 조사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거나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됐다가 조사받으러 상무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성적 침해 피해가 있었어요. 문제는 그 피해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용기 있는 여성의 증언이 다른 여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였어요. 1980년대 정조 관념 속에서 함께 연행돼 구금, 조사받은 여성들은 '너도 그랬어?'라는 시선을 받을까봐 너무너무 무서웠던 겁니다. 누군가 밝힌 사실이 아무런 윤리의식 없이 인용, 재인용되거나 험하게 다뤄지는 걸 끔찍한 공포 속에서 봐야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Q :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질문을 다시 받으셨던 거네요. 🧶 윤경회 : 정말 난감했어요. 동시에 고마웠고요. 피해자들이 왜 진술을 거부하는지, 왜 적지 않은 분이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신지, 그 고충과 저희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작전을, 조사 설계를 다시 짰어요. 조사의 목적과 방향은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조사 방법과 40년 전 사건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 진상조사를 추진할 것, 둘째, 사건 후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 실상은 물론 사회관계적 피해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연계·도출할 것, 셋째, 국민들이 피해자의 오랜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 등을 설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사팀을 새로 꾸렸어요. 5급 팀장과 6급과 7급 조사관 각 1명, 총 3명이 전부였지만요. 설득이 안돼서 결국 소수의 피해자만 조사에 동의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 조사를 통해 피해자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국가의 통지서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유한, 기어코 이 일을 해내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한 인력이라는 점이 달랐달까요. 조사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국가폭력 피해' 전문가 없어 조사와 '치유적' 상담 병행 Q : 상담 전문가가 동행한 조사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 윤경회 : 네. 다행히 전문위원을 위촉할 수 있어 성폭력, 국가폭력에 대해 이해가 있는 상담 전문가를 포함시켰어요. 피해자와 만남은 단 한 번의 조사, 그럼에도 의미 있는 조사여야 해요. 하지만 그 조사가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시간이에요. 언어에 실어 누군가에게 피해 경험을 말하려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재현해야 하는데, 몸으로 경험한 폭력이라 벌벌 떨고, 구토를 하고, 심지어 손발이 이렇게 퉁퉁 부어요. 인지적 과정이 아니라 몸으로 재현이 되는 거예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도 없던 때, 성폭력이 부녀자에 대한 정조의 죄였던 때, 여성으로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저수지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의 피해 경험은 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어요.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해온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이 때문에 조사 과정의 말하기가 치유적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된 상담자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는 상담 전문가가 없어요. 그간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조사팀이 전문위원과 같이 감당해 가면서 조사와 상담을 겸하기로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지한 또 하나의 자각이 있어요. 저희가 공권력, 그러니까 군인이나 합수단 수사관에게 피해를 당해 국가와 사회에 불신이 높은 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었어요. 이번에는 저희가 국가기관이고 공무원이에요. 이들이 피해를 인정받고 배·보상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저희인 거예요. 1980년대와 완전히 다르게, 조사 과정 전체가 공권력이 신뢰를 회복하는 '치유적 경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조사 활동 시작부터 함께 한 2명의 국방부지원단도 다르지 않았어요. 피해자들께 과거에는 가해자였지만 지금은 은폐된 진실을 물 위로 올리는데 조력하는 군인이라는 점, 이들의 도움으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군인을 경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에 주목하다 Q :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재개된 셈이네요. 🧶 윤경회 : 그렇죠. 그런데 피해자 진술은 또 다른 난관의 연속이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도 사건이 구성되지 않았거든요. 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강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었어요. 특별한 인상 착의는 없고 군복 아니면 그냥 '메리야스' 입은 남자예요. 과거의 자료나 증언을 놓고 보면 진술이 일관되지도 않고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취합되는 사전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40년이 지난 일, 피해를 언어로 말해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충격적인 트라우마는 '블랙아웃', 즉 기억을 상실시킨다는 사실 등이요. 미국 9·11테러 10년 후 피해자를 추적해보니 사건 발생이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기억하는 비율이 50%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어요.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을 입증 자료로 쓸 수 있을까 검토하다 보니 반복되는 얘기가 보였습니다. 감각과 장면이었어요. 강간을 당할 때 느꼈던 감각, 그때 씩 웃던 군인의 표정, 장갑 낀 손, 하혈로 젖은 옷을 입고 숙소로 돌아갈 때의 축축함, 군용 트럭에서 우루루 내리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겁이 나 막 뛰었던 순간, 무서워서 셔터를 내릴 때 눈앞에서 누군가 대검에 찔려 피가 솟구치는 장면…. 이를 저희는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이라고 명명하기로 하고, 이를 중심에 놓고 피해를 입증할 만한 진술을 서사적으로 듣기로 했습니다. Q : 서사적으로 듣는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이었을까요? 🧶 윤경회 : 녹음기를 켜놓고 피해 장소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오늘날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피해자가 기억하고 말하는 대로 쭉 듣는 거예요. 그러면 조사관이 피해자의 삶을 '서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의미 있는 진술을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지하는, 어찌보면 피해자의 기억과 언어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그런 뒤 조사관이 피해자의 핵심 진술이 시간 순으로 드러나게 진술내용을 정리해요. 물론 자의적인 해석 등 부수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진술 조서를 정리한 다음에는 소리내 읽어드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용에 피해자가 합의하면 정식 진술 양식인 '간인(間印. 함께 묶인 서류의 종잇장 사이에 걸쳐서 도장을 찍음)'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요. 그런데 소리내 읽을 때 피해자와 저희 모두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피해자의 말을 조사관이 '이런 뜻이냐'고 확인하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 자주 일어났는데, 에코랄까, 공명이랄까, 동시에 시공간이 울리는 느낌이에요.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통해 피해가 적절한 언어로 구성되고 제3자가 이해할 만한 새로운 글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하나의 매듭이 풀린 것처럼 '치유'의 경험을 하는 게 보였습니다. '시공간 울리는 경험' 바탕으로 19명 설득... 유형 분석 가능해져 Q : 피해자와 조사관이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본 같습니다. 🧶 윤경회 : 그런 시간을 거쳐 진술에 동의하고 대인조사와 기록조사, 실지조사를 추진한 피해자는 총 19명입니다. 전수조사 때 파악한 52건의 피해 의혹 사례를 놓고 보면 적은 수치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피해자와 조사관이 듣고 말하며 공명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 결과도 어려웠을 거예요. 왜냐면 그 울림의 경험 속에서 차츰 조사를 거부하는 분들을 설득하는 '요령'이 생겨났거든요.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결국 지지하고, 최선을 다해 듣고, 의미 있는 질문과 정보를 찾으면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저희 조사관의 태도와 의지라는 걸 여러 번 느꼈어요. 나중에 19건이 유형 분석을 하기에 충분한 숫자라는 연구자와 전문가의 평가까지 들어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Q : 이렇게 방향부터 태도까지 재설계해 진행한 '5·18조사위' 진상 규명 활동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 결과보고서군요. 그 주요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 윤경회 : 조사위에서는 확인해야 할 것을 세 가지로 봤어요. 첫째는 5·18 당시 성폭력 피해 사실이 있었는가 진위 여부 파악,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발생했고,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였어요. 이건 출범 전부터 쟁점이었는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군인 개인의 일탈일 수 있다는 시각이 있었거든요. 여기에 마지막으로 조사 재설계 과정에서 추가한 것이 사건 발생 후 현재까지 43년 동안의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피해였습니다. 그리고 40년만의 조사에서는 피해자들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조사 방법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인 과정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피해자를 아픈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약자, 배·보상을 바라는 수혜자로 보는 우리 안의 시각을 교정하고, 본인의 피해를 포함해 당시 5·18을 겪은 목격자이자 진상 규명을 위해 참여하는 권리 주체이자 국가에 증언을 각오한 증언자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을 바탕으로요. 이를 위해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드리는 것은 물론 치유와 회복에 필요한 정책적 제안을 권리로 보장하고 분석해 보고서에 담기로 했습니다. 피해 진술의 일관성, 구체성, 합리성 등을 따지는 2020년의 형법 기준을 들이대면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피해를 가리기 어려우니까요. 이렇게 해서 집계된 피해 사례가 19건이었고, 최종 보고서에는 16건에 대해 '진상규명'으로 의결했습니다. 전직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덕분에 확인된 성폭력 진상 Q : 3건은 왜 포함되지 못했을까요? 🧶 윤경회 : '진상규명불능'으로 판단된 3건 중 1건은 '진상규명불능' 원안이 가결된 것이고, 2건은 '진상규명' 원안이 부결된 건이예요. 2건 모두 시내버스에서 이루어진 성폭력인데, '대낮 도심의 시위진압작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통념이 강하게 작용했어요. 한 분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조사활동기간 만료로 재조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최종적으로 19건 사례를 종합 분석한 결과 먼저 성폭력 피해가 계엄군의 조직적인 작전으로부터 야기된 폭력이라는 사실, 즉 '국가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 발생 상황은 크게 세 덩어리였어요. 하나는 광주를 고립시키려 주변 지역을 에워싸면서 진행된 외곽봉쇄작전에서 계속 발생해요. 매복을 위한 정찰 요원을 서너 명씩 보내는데, 이들이 찾고 이동하는 작전 구역 내 야산, 산골짜기 등에서 피해가 일어난 겁니다. 또 다른 피해는 도심의 시위 진압 작전이 이뤄진 터미널과 초등학교, 금남로 등지에서 나타나요. 당시 도심 집회에 대응하는 계엄군의 작전은 해산이 아니라 연행하고 체포하는 방식이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연행 후에는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겨요. 대개 남성들이 탈의한 모습이지만 여성도 다르지 않았어요. 1979년 부마항쟁 때 시위에 참여하는 여대생들이 늘어나자 이를 새로운 현상으로 본 군 당국이 5·18 때는 창피를 당하면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 초기부터 시위 진압 대책으로 강제 탈의를 지시하고 실행했습니다. 공용 터미널에서, 초등학교 앞에서 속옷만 빼고 다 벗겨진 여성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전남대나 조선대 운동장으로 이동해요.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에 트럭 안에서 군인들의 추행이 자행됐어요. 계엄군에게 여성을 강간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제 탈의 지시는 이동 트럭, 후미진 골목, 수색하는 집 등의 사각지대에서 폭력과 야만성을 부추기는 기제가 됐던 거예요. Q : 당시 계엄군의 강제 탈의 지시를 뒷받침하는 문서 기록이나 군인들의 진술도 있나요? 🧶 윤경회 : 지시 내용이 담긴 문서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계엄군 지도부 중에 협조적인 이도 없었고요. 다만 꼭 강조하고 싶은 부분 중 하나는 5·18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에서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투입된 계엄군의 참회와 반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5·18조사위'의 주요 활동에는 당연히 계엄군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국가의 책임을 판단하려면 군의 작전과 지시 상황, 피해와 연관성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시 광주 금남로에 최초 투입된 제7공수여단 33대원을 전수조사하기 위해 총원 298명 중 주소지가 파악된 199명에게 서한문을 보내고 전화와 문자로 진술조사 참여를 요청했어요. 제가 입사하기 전 그만둔 6급 조사관의 조사 활동이었어요. 이중 약 10%인 29명이 응해 대인 조사가 이뤄졌고요. 이들을 통해 옷을 벗기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있었고, 현장에서는 자기가 봐도 '미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여성들에 대한 추행이 벌어졌다는 증언을 확보했어요. 심지어 대검을 옷을 벗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대원 중 1명은 대검을 날카롭게 갈아서 출동했다는 진술도 있었어요. 실제로 등에서 날카로운 것이 느껴진 뒤 옷이 벗겨지고 피를 흘렸다는 사례가 4건이고, 군용트럭에 오르다 대검에 찔려 결국 자궁을 잃은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증언을 통해 전직 계엄군도 피해자들처럼 평생 수치심과 공포감을 지고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이 폭력의 주체였다는 부끄러움, 혹시 알아볼까 겁이 나서 제대 후에는 광주 쪽으로 아예 발길을 못한 분도 있었어요. 또 부마항쟁 때처럼 사나흘이면 광주도 진압될 거라던 예상이 어긋나니까 엄청나게 공포스러웠다는 거예요. 강도 높게 훈련받은 군인인데도 점점 인파가 늘고 차량 시위까지 격렬해지는 와중에 옆에 있던 동료가 맞고 다치고 쓰러지는 걸 보니까 눈이 돌았다고, 무서우니까 더 폭력적이 되더라는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Credit 인터뷰어 : 소현숙, 손정미 인터뷰이 : 윤경회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5월 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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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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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의 윤경회 간사 인터뷰 2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 통념, 법적 권한의 한계와 함께 조사 의지를 가진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탓에 결실을 맺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2018년 9월 14일부터 시행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이듬해 12월 2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 첫 발걸음이었다. 2024년 6월 종합보고서를 제출하며 활동을 종료한 '5·18조사위'는 한계가 있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를 토대로 피해 실태를 확인하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 조사팀장으로 참여했고, 이어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결성의 주축이 된 윤경회 간사와 '5·18조사위' 및 '열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치유회복을 통합한 국가폭력 조사의 길을 열다 (2) “우리는 서로의 용기, 서로의 증언자”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못했을 뿐, 남성 성폭력 피해자도 많다 🧶 윤경회 : 연행하고 구금,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피해가 많았습니다. 취조하고 진술 조서를 작성하는 전남합동수사본부 조사실에서, 구금 시설로 호송되던 중 차량이나 여관에서, 가택수색 과정에서 피해가 있었어요. 당시 남성들은 완전히 복종하도록 아예 속옷까지 벗겨진 상태로 취조를 받았고요. Q :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남성도 많았겠네요. 🧶 윤경회 : 네. 저희 보고서에 성폭력 피해와 관련해 한 남성의 참고 진술도 담겼어요. 연행된 남성들은 폭도로 몰려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로 취조를 받았는데, 현장에서는 '빨갱이 ○○를 낳을 바에 못쓰게 해야 한다'며 성기를 짓밟고 막대 같은 자로 치기도 했는데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는 증언이었어요. 분명한 성고문, 재생산권 침해 피해잖아요. 그때 저희가 왜 이런 부분에 대해 조사를 신청하거나 진술하는 남성이 없었는지 여쭤봤어요. 그런데 그분이 거꾸로 저희에게 그동안 청문회를 비롯해 여러 자리에서 많은 증언을 했지만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도청을 사수했던, 목숨을 건 용감하고 정의로운 시민군에 대해서만 들으려 했던 우리 사회의 통념이 남성들의 성폭력 피해를 묻었다고 생각합니다. 5가지 신체적·정신적 피해 유형과 '생애사적' 피해 Q : 묻지 않아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성 성폭력 피해 또한 우리 사회의 책임을 꼭 되짚어야 할 지점이네요. 🧶 윤경회 : 맞습니다. 그렇게 피해자 중심의 서사적 진술 청취를 통해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확인됐고, 그 책임은 국가를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은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선 안 되잖아요. 핵심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피해자의 '핵심 장면'과 '감각 기억'을 언어화하는 작업에 이어 그에 부합하는 사실 자료와 정황 증거, 그러니까 군·경 등의 작전기록, 참고인 진술과 유사 피해 사례를 확보해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동시에 당사자가 피해 발생 장소에 없었음을 입증하는 자료 등 핵심 진술을 배척하는 기록과 정황 증거까지 교차 확인했고요. 이런 핵심 진술 분석 작업을 통해 성폭력 피해를 강간 및 강간미수, 강제추행, 성고문, 성적 모욕 및 학대와 함께 유산과 자궁적출 등 재생산권리를 침해한 재생산폭력까지 피해를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5가지 유형 모두 신체적 위해인데, 이는 정신적으로도 돌이키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겼어요. 사건 직후의 충격과 고통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 무렵의 정조 관념에서는 피해가 드러나면 인생이 끝나는 일로 여겨져서 이를 숨기고 원치 않는 결혼을 서두르고, 결국은 나중에 그것이 가정폭력의 빌미가 되고마는 경우도 있어요. 숨겨야 하는 약점이 있다는 '정체성' 피해는 대인관계를 어렵게 해 학업이나 직장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이와 함께, 앞서 조사 재설계 단계에서 추가됐다고 언급한 '사회관계적 피해' 또한 '5·18조사위'의 중요한 확인 대상이었습니다. 사건 후 43년이 지나는 동안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생애사적' 피해를 포함시키지 않는 진상 규명과 배·보상은 '피해자 중심주의'일 수 없으니까요. 실제 피해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례만 말씀드릴게요. 대검에 찔려 하혈을 계속 하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해 자궁을 적출했던 여성은 이후 애인에게 버림 받고, 아버지에게 떠밀려 미국으로 갔어요. 남동생이 농촌지도자상을 받는데 방해가 되고, 동네에서도 '위험'하다며 쫓겨난 거예요. 그렇게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배·보상의 기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하셨어요. 그런데 의료 기록이 없다며 대검에 의한 자상과 자궁 적출 피해가 인정되지 않았어요. 피해자 등급을 구분하는 구금 일수(38일)와 소견서를 적용하니 경미한 편에 속하는 12등급을 받으셨던 거예요.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자궁을 적출해야 했는데 의료기록이 없고, 국가는 입증 자료가 없다며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죠. 그분은 그 과정에서 큰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어요. 결국 이분 덕분에 명예회복과 배·보상에 생애사적 피해를 포함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담게 되었어요. 향후 4·3항쟁, 부마항쟁 등 비슷한 피해가 있었던 국가폭력 역사에서 국가의 태도와 책임을 설정하는 데 의미 있는 참고 사례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상황'과 '처지'에 맞는 피해 판단 기준 중요… 성과는 누적·중첩된 증언으로 국가 책임 규명한 것 Q : 이번 '5·18조사위' 활동과 보고서는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와 관련해 중요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하신 것 같습니다. 피해 판단 기준을 새로 설정한 부분도 특별한 접근으로 보이는데,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 🧶 윤경회 : 저희는 '5·18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조사 방법과 판단기준'이라 표현했는데, 5·18 피해와 연결하면 압도적인 공포 상황에서 빚어진 국가폭력과 그에 따른 트라우마, 그리고 1980년 당시의 사회적 통념과 여성에게 적용된 정조 관념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런 상황과 처지에 놓인,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마저 재구성될 수 있기에 피해 여성이 세련되게 증언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그래서 피해자의 '감각 기억'과 '핵심 장면'을 서사적으로 듣고 조사 주체가 언어화하는 거예요. 이와 함께 기록과 증언, 유사 피해 사례 등을 찾아 핵심 진술에 부합하는 사실관계와 진술뿐 아니라 배척하는 것까지 확인해 증언의 개연성을 확인하는 절차도 필수적이고요. 요약하면 '피해자를 억울하지 않게 한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배척하는 자료보다 옹호하는 자료가 더 많으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자는 기준이에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엘살바도르의 진실화해위원회가 제시한 '증거 우위'라는 기준점을 차용한 것입니다. Q : 아울러 관련 조사를 이끈 입장에서 진단하는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 윤경회 : 저희의 조사 대상은 19건, 심의·의결 결과 진상규명된 사건은 16건인데, 청취한 생존 피해자는 21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피해 사실과 사건 후 생애사적으로 누적되고 중첩된 신체적·정신적 후유증과 사회관계적 2차 피해에 대한 진술을 얻은 점이 가장 큰 성과일 겁니다. 이 진술이 곧 사건의 개연성을 떠받치는 '패턴 증거'이자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정책 수립에 필요한 기초 정보까지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사위는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전문에 반영할 것,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회복, 보상 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 등 '11개 대정부 권고사항'을 발표했습니다. 전체 내용과 활동 과정을 담은 백서 등은 5·18기념재단의 누리집에서 볼 수 있어요. 더불어 피해자 중심적 접근 원칙을 조사의 목적, 조사 방법과 판단 기준, 조사관이 피해자를 보는 관점과 태도까지 조사의 전 과정에 적용하고자 했던 '5·18조사위'의 노력과 경험도 향후 유의미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계는 여러 이유로 조사하지 못한 미규명 사건이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연행·구금·조사 과정에서 '성적 모욕 및 학대'와 '성고문'을 당한 남성 피해자 건을 비롯해 조사 회피와 거부로 인해 조사가 중단된 23건[1], 피해자의 사망과 자살, 정신병 발병 등으로 진술 청취가 불가능했던 10건, 그 외 조사과정에서 추가 확인한 피해 사례가 있는데, 기존 전수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건이었습니다. 향후 새로운 과거사위가 출범하면 조사할 수 있도록 '미규명 사건'의 유형을 구분해 보고서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서로가 너무 감사한 존재"…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결성되다 Q : 종합보고서를 제출하는 순간 '5·18조사위' 활동도 종료된 건가요? 🧶 윤경회 : 조사위 활동 마무리 시점은 대정부 권고사항을 포함한 종합보고서를 대통령실에 보고한 2024년 6월이었습니다. 그리고 「5·18진상규명법」은 권고사항을 소관하는 국가기관의 장에게 대통령실과 국회에 종합보고서가 보고된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당 권고사항에 대한 이행계획 또는 조치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고, 이행하지 않은 경우 이유도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위의 대면보고 요청을 대통령실에서 거절해 공직자 전자결재시스템을 통한 서면보고에 그쳤고, 이후 관계부처에 이행계획 수립을 지시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또한 남겨진 과제인 거죠. 진상규명 결정 후 종합보고서 작성 기간에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를 개최했어요.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상담 받고 약을 먹어도 몽롱해지기만 하지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시며, '나랑 같은 피해 입었다는 사람들 얼굴 한 번 보고 싶소'라고 하셨거든요. 긴 말 안해도, 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다면서요. 먼저 요구하시는 데다 동병상련의 피해자들이 소통하다 보면 회복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2024년 1월 '5·18 성폭력 피해자 대상 종결상담 및 간담회 추진 계획'을 수립해 4월 28일 첫 만남이 이뤄졌어요. 피해자 열 분과 연구자, 조사 활동 관계자, 광주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함께 한 간담회에서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라는 말이 나왔어요. 피해자들의 증언은 무덤 같은 세월을 이겨낸 용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증언이 모여 43년 간 은폐된 진실에 대한 국가 책임이 인정된 거잖아요. '그때 공용터미널에서, 수창초등학교 앞에서 나도 그랬어'라는 증언이 모여 서로의 피해를 입증하는 정황 증거가 됨으로써. 이러한 집단적인 증언은 피해 발생의 패턴과 유형도 드러나게 했고요. 각자가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피해자이자 목격자, 참고인이자 증언자니까 서로가 너무너무 소중한 거죠. Q : 그 자리가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가 만들어지는 새로운 출발이 된 거군요. 🧶 윤경회 : 네, 간담회에서 계속 만나자는 제안이 나왔어요. 그냥 눈만 봐도 서로 어떻게 살아왔을지 너무 알겠으니까! 그래서 서로 연락하고 만날 수 있도록 SNS 단체대화방을 만들어드리고 저희는 빠지려고 했어요. 근데 앞날이 예상되니까 머리가 아파왔어요. 법적 조력을 받는 일도, 관련 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은 분들이라 활동이 이어지기 어렵겠더라고요. 상의를 거듭하다 2024년 8월 29일, 16명의 피해자와 가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열매' 결성식을 가졌어요. 이날 어릴 적 정신병동 입퇴원을 반복하던 엄마를 원망하고 부담스러워했던 어느 피해자의 딸이 엄마의 피해사실을 알게 된 후 그동안 버티고 살아준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했어요. 모두를 울릴 만큼 감동이었어요. '열매'는 조사팀장인 제가 간사를, 전문위원이 상담자 역할을 맡아, 매달 증언 형식의 치유회복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9월 말에는 국회 등과 입법 과제나 후속 활동을 공유하는 '증언대회-용기와 응답' 행사도 가졌어요. 간담회에서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경험한 정체성 변화에서 힌트를 얻어 대중 공간에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 거죠.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증언대회 역시 감동적이었어요. 피해자 집단이 공론장에 처음으로 등장한 거잖아요. 참석자들은 '열매'의 용기를 지지하고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국회의 응답을 요구하며 연대의 의지도 보여주셨는데, '열매' 분들이 얼마나 감격하셨는지 모릅니다. 계엄 선포 후 도청 간 피해 여성… 5·18 속 여성의 역사 찾기도 과제 Q : 또 다시 공명의 순간, 서로 치유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자리였겠습니다. 🧶 윤경회 : 맞아요. 증언대회를 계기로 열매는 세 가지 활동 방향을 정했어요. 하나는 피해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치유회복의 길을 찾아가는 것, 두 번째는 법적 지원 방안을 포함해 피해에 부합하는 배·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 마지막으로 유사한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과거사 문제에서 '깃발 같은 역할'을 할 것 등이에요. 사실 5·18 피해 여성들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나 4·3항쟁 피해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어요. 공적인 치유 여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갈 지 고민하고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열매'의 활동이 1980년 광주보다 더 먼 과거사 성폭력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푸는 일과 연결되리라는 겁니다.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5·18민주화운동과 함께 했던 여성들의 역사도 재조명되고, 주목받았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폭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공적 담론의 장에 등장한 경우는 이번 '5·18조사위' 활동을 제외하고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외에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고정돼 있어요. 40~50년 시간을 소거한 채 어디서건 피해 당시의 험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요구받아요. 사실 사건 후 생애사가 더 힘든 경우도 있고, 힘들었던 경험이 진취적인 자각으로 연결돼 개인을 성장시키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변화무쌍하게 오늘을 살고 있는 여성으로 '열매' 분들의 이야기를 청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지난해 연말에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됐잖아요. 조사과정에서 피해자분들에게 여쭤본 적이 있어요.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실 거 같냐고? 시신을 수습하고 5월 27일 도청에 남아 연행된 피해자들이 '5·18 때문에 인생이 힘들었지만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실제 계엄이 발생하자, '열매' 분들 중에 가장 연세가 높고 휠체어를 타고 모임에 오시는 분이 계엄 선포가 있던 날 택시를 타고 도청 앞으로 가셨더라고요. 그분은 당시 광주에서 남편과 사진관을 운영하던 중에 시위가 격렬해지고 사망자가 급증하자 현장을 찍어 기록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의 활동을 하신 분이셨어요. 유방과 회음부가 훼손된 시신에서 나온 벌레들이 떠올라 7년 가까이 하얀 쌀밥을 못 드셨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하세요. 남편은 증언과 사진으로 알려졌지만 아내는 군인들에게 입은 피해를 드러내지 않으려 입을 닫았고, 때문에 그분이 기여했던 역사도 묻히고 말았어요. 그런 분이 계엄이 선포되자 또 다시 도청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신 거죠. 그런 분을 단순히 과거의 피해자로만 기억하는 것이 정당한가 묻게 됩니다. 이러한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 기록하는 것이 곧 우리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겠구나, 이분들과 탄핵 광장을 빛냈던 젊은 세대가 함께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투' 서지현 검사와 안고 울다 Q : 우리 사회에 '미투(Me Too)' 열풍을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와 피해 여성들이 만나는 자리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윤경회 : 아, 그 사연도 정말 극적인데, 2018년 공동조사단이 발족하고 이어 '5·18조사위'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5·18민주화운동 38주기를 열흘 가량 앞두고 나온 김선옥 님의 미투였어요. 5·18 당시 수사관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그 분이 서지현 검사의 미투에 용기를 얻어 증언을 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서 검사의 미투가 김선옥 님의 미투를 낳았고, 그로 인해 '5·18조사위'의 조사와 진상 규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거예요. '열매' 모임에서 자연스레 서 검사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무렵이 서 검사가 엄청 힘든 때였어요. 본인의 모든 것을 걸고 미투를 하고, 싸움을 시작했는데 모든 소송에서 다 패소한 상태였거든요. 조심스럽게 서 검사에게 '열매' 결성식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감사하게도 서 검사로부터 '고맙고, 만나고 싶다'는 답변이 왔어요. 서 검사에게도 '열매'의 소식이 위로와 용기가 되었다고 해요. 결성식은 말 그대로 '서로의 증언자'가 함께 하는 자리였어요. '열매' 분들과 서 검사가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어요. 한 사람의 용기가 집단의 용기와 응답으로 이어지고, 과거의 증언이 좌절한 피해자의 오늘을 응원하는 경험이었죠. Q : 이렇게 넓고 깊이 있게 '5·18조사위' 활동과 '열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활동이 간사님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또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활동해 나가실 지 궁금합니다. 🧶 윤경회 : 저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약자나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고, 실제로 조사위나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소위 '명예 남성'으로 살았을 확률이 높았을 거예요. 그런데 상처받고 약한 개인들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발화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모습을 목격하며 약하고 강하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되었어요. 침해당하고 무너졌던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딛고 기대고 어루만지며 일어나는 것, 그것만큼 강한 것이 또 있을까 배우고 있고요. 그래서 지금처럼 '열매'와 함께 걸림돌을 디딤돌로 전환하며 걷다 보면 해원 같은 축제를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를 위해 과거사 진상조사와 치유회복을 통합한 상설 정부조직을 상상해보기 시작했어요. 10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Credit 인터뷰어 : 소현숙, 손정미 인터뷰이 : 윤경회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5월 9일 금요일 편집자주 ^ 24건 중 1건은 피해자가 알츠하이머로 진술이 불가했으나 과거 검찰 조사기록으로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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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실재하는 감각, 삶의 진실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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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감각, 삶의 진실 듣기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의 <소장품섬_최찬숙: 밋찌나> 전시 개최 후기 예술에 있어 역사만큼 지속가능한 영감의 원천이 있을까. 한편으로 누락과 공백을 예민하게 포착해 다층적 해석과 상상을 허용하는 예술만큼 역사에 상보적인 관계가 있을까. 2025년 3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소장품섬_최찬숙: 밋찌나> 전시는 역사와 예술이 교차할 때 어떤 울림과 파동을 일으키는지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 작가는 2채널 비디오와 사운드가 결합된 작품에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리고 '밋찌나'를 통해 증언이라는 극도로 제한적인 부분 너머 일본군'위안부'의 존재 자체에 가 닿기를 주문하는 듯하다.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한 김소슬 학예연구사가 후기를 보내왔다. 광복 80주년 역사적 의미 되새길 소장품섬 <밋찌나> 전시 부산현대미술관은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고 예술 가치가 높은 작품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해마다 특별한 작품을 선정해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한 소장품 가운데 부산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은 정기적으로 관람객에게 공개된다.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돼 형성된 모래섬, 을숙도에 자리잡은 미술관은 그 지리적 특징을 살려 소장품 상설 전시관에 '소장품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해마다 학예연구사들이 추천한 작품이 전시된다. 2025년, 미술관은 소장품섬 첫 전시 작품으로 최찬숙 작가의 작품 <밋찌나>를 선택했다. 광복 8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한 기획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산에서 미얀마 밋찌나 지역으로 끌려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열릴 소장품섬 <밋찌나> 전시를 앞두고 차가운 공기가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서울 삼청동에서 최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곧 주요 활동지인 베를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위안부' 이야기를 하면서 미얀마를 떠올리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어떻게 <밋찌나>를 작업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작업을 오랜 숙제처럼 마음 한구석에 안고 있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죠. 친할머니의 삶의 여정을 쫓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의 시간은 저에게 증언의 무게를 피부로 감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픈 감각이죠. 일단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서울대학교 정진성연구팀의 증거집을 보게 되었죠. 미얀마 밋찌나 지역의 여성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증거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생생한 표정이 담긴 사진, 차고 넘치는 증언들, 심지어 명단도 있었지만, 전후 그 누구도 '내가 거기 있었다'고 증언하거나 나타나지 않았죠. 증언자가 사라지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이 생겨났죠."[1] 2015년 결성된 서울대학교 정진성연구팀은 2016년부터 서울시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인권 증진을 도모하고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생산한 기록들을 수집·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태국 현지 등을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를 발굴, 조사했고, 그 결과 미·중 연합군 공문서, 포로 심문 자료, 스틸 사진, 지도, 동영상 등 가치 있는 자료를 다수 수집하였다.[2] 이와 관련한 결과 보고 형식의 전시[3]에 최 작가가 초대된 것이 <밋찌나> 제작의 계기였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어보기, 함께 기억하기[4] 정진성연구팀이 발굴한 연합군 공문서 등 사본 기록을 따라 소장품섬 공간 안으로 들어가 만나게 되는 <밋찌나>는 TV 모니터와 벽 한 면 전체를 가릴 만큼 큰 프로젝션 2개의 영상 채널로 이루어진 18분 30초 분량의 영상 작품이다. 이 영상에서는 세 여성이 등장해 '나는 밋찌나(I am Mytkina)'라고 소개한다. 이 생소한 단어, 밋찌나[5]는 미얀마 이라와디강 상류에 인접한 지역 이름으로, 전쟁 당시 이곳에 위안소가 있었고, 남아 있는 문서와 사진을 통해 스무명 정도의 '위안부' 피해자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생존자는 없었다. 영상에는 누군가가 던진 동일한 질문에 세 여성이 답하는 장면이 연이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계속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위안소나 막사 지붕에 대한 묘사는 모두 다르다. 한 명은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고, 다른 한 명은 교회 모습으로 기억하는 식이다. 각자의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하지만 이들의 진술은 모두 엇갈려 무엇이 사실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위안부' 증언자 그 자체가 아니다. 세 밋찌나는 각각의 인물을 대변하기 보다는 가상의 인물로 세 가지 헤게모니 축을 대변한다. 즉 제국주의적 관점, 가부장적 민족주의,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지만 각기 다르게 보이는 상황을 <밋찌나>로 연출하였다. 결국 이미지 자체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제일 강조하고 싶었던 건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체험하는 감각들이 진실이라는 것 "결국 이미지 자체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제일 강조하고 싶었던 건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체험하는 감각들이 진실이라는 거죠. 이건 실제 증언에서 나온 기록인데, 일본군들이 수류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 그 엄청난 폭발음, 뒤 이어 물 위를 떠다니는 비늘을 목격한 직관적인 경험…" 심문을 받는 세 여성은 되묻는다. "정확한 기억?" "어떻게 하면 정확히 말할 수 있죠?"라고. 기억의 취약성이다. 그들에게 기억이란 밤 배에서 보던 달빛, 밋찌나 이라와디 강 추위, 내리쬐던 빛줄기, 손으로 움켜잡으려고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진흙 같은, 무언가를 움켜쥐었다고 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유일하게 동일한 진술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 살아있었다는 감각,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관점에 따라 공방 하는 견해들이 '위안부'의 삶을 과연 재현할 수 있을까? <밋찌나>를 관통하는 이 질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어보기, 함께 기억하기'라 압축하는 미술사학자 조혜옥의 분석에 공감한다. 최찬숙은 '재현'이 '대표' 하지 않는 방식을 깊이 있게 고민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빛, 소리, 냄새, 촉감처럼 거기 살아있었던 존재로서 그들을 듣고 기록하기 위해 온몸으로 다가가고 함께 기억하는 작업이다. "최찬숙은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재현하거나 표상할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또 감히 그들을 말하게 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재현'이 '대표' 하지 않는 방식을 깊이 있게 고민한다. 그 방식은 그들이 기억하는 빛, 소리, 냄새, 촉감처럼 거기 살아있었던 존재로서 그들을 듣고 기록하기 위해 온몸으로 다가가고 함께 기억하는 작업이다. <밋찌나>에서도 작가는 그들이 기억하는 햇빛, 달빛, 진흙과 같은 감각과 실존의 기억들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지 고심한다. 말할 수 없음을 듣는 것은 '하나의' '중대한' 진실이 아니라 삶의 작은 진실들을 듣는 방식은 아닐까? '증언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포획,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여러 순간 속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살아있었던 '생명을 가진 존재'들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최찬숙은 그렇게 말이 아닌 감각의 기억으로, 피부로 그들에게 가닿는다."[6]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대화를 하다 보니 '보여주는 것만을 보진 않겠다'는 것이 최 작가의 관점으로 보였다. 그가 앞으로 계속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최 작가는 '가치'를 말했다. "제가 하는 작품이 인식을 바꾼다고 자신하지는 못해요. 사실 어떤 변화는 정치가 이뤄낸다고 믿었거든요. 예술은 너무 미미하다고 생각됐죠. 하지만 최근에 한국의 상황을 겪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어요. 정치적으로 이루어 내는 변화, 그 외형은 거대하고 실질적으로 여겨지지만, 실체가 부풀려진 거품과 같을 수 있죠. 하지만 예술은 거품처럼 사라지지 않는,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더 정확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관객과 함께 흔들리지 않고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를 떠올리거나 만들어 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어요" 각주 ^ 《소장품섬_최찬숙:밋찌나》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브로슈어, 2025. ^ 서울기록원, 서울대 정진성연구팀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수집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 2016~2018, 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comfort-women ^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서울도시건축센터, 2019. ^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제작한 《소장품섬_최찬숙:밋찌나》 브로슈어에 게재된 미술사학자 조혜옥의 글 제목이다. ^ 국립국어원 표기에는 미치나로 되어있으나 이 글에서는 최찬숙 작가의 작품명 ‘밋찌나’를 본떠 그대로 사용한다 ^ 조혜옥,「무브 투 리-멤버」, 『밀려나고 새어 나오는(최찬숙 아트북)』, 아트북프레스, 2024,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