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 자유로운 할머니들)’는 필리핀 마파니크 전투의 생존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저항한 ‘후크발라합(Hukbalahap. 항일 국민군)’의 거점이었던 마파니크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격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그들의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웠다. 심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한 남성의 입에는 잘린 성기가 물려 있기도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에 이어 일부 소녀들은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됐다. 그 소녀들이 바로 지금의 말라야 롤라스이다.[1] 노년에 이른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과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해진 군사적 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는 일본군 점령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동시에 전쟁과 군사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를 점령하려는 시도에 맞선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일본군의 성폭력에 맞서는 것을 넘어 전쟁 중 여성의 신체를 점령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필리핀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과 군사화에 따르는 악행과 공포를 고발하는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말라야 롤라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이다. 말라야 롤라스는 필리핀 대법원에서 12년에 걸쳐 직무 집행 명령 소송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일본 대법원이나 정부에 말라야 롤라스 사건을 제소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법원은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문제’라며 이 역사적인 ‘롤라 이사벨리타 비누야 사건’을 기각했다.[2]
말라야 롤라스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 제소하기도 했다. 필리핀 법정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했지만 벽에 부딪히자 정의를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말라야 롤라스 사건은 CEDAW에 제출되었다. 2023년 세계 여성의 날, CEDAW 전문가위원회는 19쪽 분량의 문서를 통해 말라야 롤라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구제책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둘째, 전쟁 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자 모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전국적 배상 제도 구축이다. 여기에는 전쟁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 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를 인정해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전쟁 범죄, 특히 제도화된 전시 성 노예 제도의 여성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기타 형태의 배상을 제공해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 개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승인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권고이다.
넷째, '붉은 집(Bahay na Pula)'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전시 성 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기리고 그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교육 기관(중등 및 대학 교육 포함)의 교육 과정에 필리핀 여성 피해자 및 생존자들의 역사를 포함시키라는 권고이다. 이는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역사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인권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이다.
다양한 캠페인, 지역을 넘어 국내외 연대로!
말라야 롤라스는 여성인권단체 ‘카이사 카(Kaisa Ka, 여성자유를 위한 연대)’의 지원을 받아 피해 회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연대 단체 중에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alaya Lolas)’가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 인정을 전제로 한 진정한 공개 사과, 배상, 재활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시위 형식으로 진행되며, 3・8세계 여성의 날과 11월 23일 마파니크 피해자 추모일,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일본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 또는 무역 협정이 논의될 때마다 시위가 이어진다.
‘전쟁반대여성연대(Women Against War)’는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화에 맞서는 캠페인이다. 카이사 카는 모든 전쟁이 영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점령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평화로운’ 시대에도 여성들은 군인들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 이용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말라양 카바타안(Malayang Kabataan. 자유로운 젊은이들)'은 말라야 롤라스를 접한 다양한 학생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으로, 현재 말라야 롤라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마파니크와 ‘붉은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그들은 전시회와 패션쇼, 기타 기금 마련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카이사 카,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 다른 학생 및 미디어와 협력해 미디어 보도, 방문 및 토론 등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필리핀에는 말라야 롤라스와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활동들이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교사, 농부, 어부 등으로 구성된 다부문 조직인 ‘국가민주화운동(KILUSAN. para sa Pambansang Demokrasya)’은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의 악영향을 폭로하고 말라야 롤라스의 고통을 전쟁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로 강조한다. 즉, 전쟁이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며, 말라야 롤라스와 같은 성노예 피해자들을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국가민주화운동은 2004년부터 격년으로 평화행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단체인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인 이곳은 중국 혁명가 후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연합체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미디어 포럼, 시위 활동 등을 진행했다. 또 ‘위안부 동상’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위안부’ 동상을 마닐라 로하스 대로에 설치했으나, 필리핀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철거되었다. 롤라를 위한 꽃은 일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라진 ‘위안부’ 동상을 찾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와 성 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해 왔지만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작성한 대항 보고서는 필리핀 정부가 전쟁 범죄 피해자인 말라야 롤라스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결의안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복지개발부를 통해 제공하는 지원 또한 CEDAW의 권고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많은 단체와 인권위원회는 CEDAW 보고서에 말라야 롤라스의 사례와 문제를 포함시켰다. CEDAW가 말라야 롤라스에게 유리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다음과 같은 여러 조치들이 이어졌다. 2024년 5월 13일, 필리핀 대통령이 대통령실 공보부를 통해 모든 정부 기관에 지시 서한을 발송했다. 또 사회복지개발부의 지원 및 조치와 함께 상원의원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가 ‘상원 결의안 539’를 발의, CEDAW 결의안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했다. 또 외교관계위원회의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여러 개인 및 기업(Tulay Foundation, Wha Chi Foundation, Wilcon Builders, Feedmmix, Prologue Café, Kamuning Bakery, House of Justeas, 목사, 사진작가, 의사, 블로거 등)도 지원 대열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마파니크 지역 사회에서도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받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롤라스의 손자와 손녀들은 ‘포토보이스(Photovoice)’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롤라스가 손자, 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세션이다.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학에서 전시되었다. 마파니크 초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은 롤라스의 이야기와 마파니크 포위 공격의 역사를 수업에 포함시켰다. 또 마파니크의 바랑가이 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약속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제 청년들이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홀리엔젤대학, 유니버시티 오브 더 이스트, 앤젤레스대학 등의 학생들은 말라야 롤라스의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청년모임(Youth for Nationalism and Democracy)과 카이사 카의 청년 조직 등 다양한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포럼과 원탁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재편되는 안보 협력의 이면은 지역 군사화
한편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양국 군대가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서로의 영토에 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는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그리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체결되었다.
RAA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최근의 연결고리이다. 일본-필리핀 RAA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필리핀, 미국, 일본, 호주 사이의 4자 안보 협력체인 ‘SQUAD’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미국은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규범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지정했으며, 3국 안보 협력, SQUAD, QUAD(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 안보 협력 체제), AUKUS(미국, 영국, 호주 등 3개국 안보 동맹) 프로젝트는 모두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더 많은 동맹국을 참여시켜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목표를 취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이런 협정들이 주로 외국 군대-이 경우에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뿐 필리핀 군대에는 동일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의 VFA처럼, 실제로 일본군은 세관 및 형사소송 절차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지만 필리핀군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VFA는 미군에게 특권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군 병사가 필리핀 루손섬의 수빅에서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RAA 역시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군사적 태세 강화와 전쟁 준비의 결과로 군비 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전략과 유사하게 일본 정부는 군사 장비를 과시하며 필리핀에 구매를 유도할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군비 지출이 모든 측면의 안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군비 지출은 사회복지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무력에 대한 의존성만 높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은 실탄 사격 훈련과 기타 군사 작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폐기물과 화학 물질로 인한 위험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의 군사화 심화로 이어져, 필리핀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대리 국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남중국해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군사적 틀이 아닌 신뢰, 협력,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 안보 체제가 필요하다. 군사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전쟁의 잔혹성과 상처를 상징하는 말라야 롤라스!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그리고 말라야 롤라스에 의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가운데 전쟁, 군사화, 외세의 개입과 점령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위안부’ 세대를 막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롤라스와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각주
연결되는 글
-
- 필리핀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사회적 인식
-
김동엽 (부산외대 HK 교수)
- 글쓴이 버지니아 수아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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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1996년부터 28년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여성 해방을 목표로 하는 여성 단체 'Pagkakaisa ng Kababaihan para sa Kalayaan(Kaisa Ka)'의 회장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인 필리핀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를 비롯한 많은 여성, 노동자, 농민, 어업 단체의 법률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Stop the War Coalition-Phils'의 의장이자 대변인 중 한 명이다. 미 해병대원을 상대로 한 '제니퍼 로드(Jennifer Laude) 사건'을 맡아 승소했으며, '아동 결혼을 방지하는 법률 및 시행 규칙(RA11596)'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