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이지은

  • 게시일2025.02.10
  • 최종수정일2025.02.14

학병의 사명과 '위안부'의 운명

-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본 일제말기 청년들의 해방 이후 삶의 향방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연재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이후 TV드라마와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위안부'를 성애화하여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당대의 잘못된 인식이 작용하였음은 그간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한계에 더하여 국문학자 이지은은 이 소설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이 해방 이후 젠더에 따라 어떻게 다른 경험을 하였는지를 추적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사진 1] '여명의 눈동자' 1권과 10권의 표지 이미지. 1975년 신문 연재 소설로 시작된 '여명의 눈동자'는 1981년 6년 동안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으로도 발간됐다.

 

 


전장(戰場)의 식민지 청년들

한국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윤정옥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의 소식을 '학도병(학병)'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1] 여기서 '학병'이란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1943.10 공포)로 인해 사실상 '강제' 입대한 학생들로, 이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전장의 병사이자, 그녀들의 소식을 고국에 전해준 동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병과 '위안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많은 학병들이 전장에서 희생되었으나, 귀환한 학병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귀환 학병들에겐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공동의 과업에 참여한 이들은 실제 학병 징집자든, 기피자든, 면제자든 할 것 없이 모두 '학병 세대'로 포괄될 수 있었다.[2] 반면, 귀환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생활고를 면치 못하였으며,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생활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로 말할 수 있는 공론장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사회적 계기도, 역사적 과업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다.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일간스포츠』, 1975.10.1~1981.3.2.)[3]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청년들, 즉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다른 역사적‧사회적 위치를 부여받는지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텍스트다. TV드라마, 연극 등으로 각색되며 한국 사회에 '윤여옥'이라는 대표적인 '위안부' 상(像)을 남긴 「여명의 눈동자」는 연재 중에 단행본이 출간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소설의 인기가 상당 부분 여성 섹슈얼리티를 외설적으로 소비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소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 소설이 '위안부' 여성을 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위안부'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탈각되었는지 그 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제국의 폭력이 만든 '학병-위안부'의 연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로 차출된 여옥과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징집된 대치, 하림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장구한 서사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이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부대를 따라 전선을 이동하면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소설에서 '여옥-대치', '여옥-하림'은 모두 제국의 권력 장치 아래에서 성적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대치의 경우 고참의 강요로 위안소를 찾았다가 '위안부'가 된 여옥을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연민을 품은 두 사람은 위안소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한편, 여옥이 하림과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일제의 감옥소 안이다. 사이판에서 포로로 붙잡힌 여옥과 하림은 미군 OSS 요원이 되고, 이후 미군의 지시 하에 조선 독립을 위한 공작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경찰은 고문의 강도를 높이다 급기야 여옥과 하림에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명의 눈동자」의 관음증적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학병과 '위안부'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동류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학병과 '위안부'가 위안소나 감옥과 같은 제국의 폭력장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 건설의 사명과 대결 구도의 재배치

그렇다면 제국이라는 적대항이 없어진 뒤에도 학병과 '위안부'는 연대할 수 있을까. 해방공간으로 접어들면서 「여명의 눈동자」는 독립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해 나갈 만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거니와,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에서 탈영한 학병들은 중국군이나 광복군 등에 합류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여명의 눈동자」 또한 학병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림과 대치의 항일 무장 투쟁 행적을 강조한다. 대치가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를 두루 거쳐 팔로군 내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한다면, 하림은 미군 OSS 요원으로서 해방 직전 경성으로 침투한다. 이후 이들은 해방 공간의 주요 사건들, 이를 테면 각종 암살 사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9월총파업(1946), 4.3항쟁(1948), 여순사건(1948), 지리산 빨치산 투쟁(1951) 등에서 매번 대결하게 된다. 남한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에서 대치는 빨치산 수장으로, 하림은 진압군 대장으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건설의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호명하고자 하는 욕망은 해방 공간의 갈등과 대립을 '학병 vs 학병'의 구도로 재배치함으로써 달성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제주 4.3항쟁에서 대치와 하림의 대결이다. 소설은 무장대 총사령관과 진압 사령관의 협상, 토벌대 사령관의 피살사건 등 당대 알려진 4.3사건의 전개를 유사하게 따라가면서도, 일본군 출신의 토벌대 사령관들을 탈영 학병 출신의 하림으로 대체한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유격전의 경험을 쌓은 일본군 출신 방공(防共) 전사들을 제주도와 지리산으로 파견했다.[4]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사건을 둘러싼 해방공간의 갈등 구도를 대치와 하림, 즉 '학병 vs. 학병'으로 재배치한다. 미소 군정과 남북 단독 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신제국의 점령지가 된 약소민족의 설움으로, 혹은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갈등으로 서사화될 수는 있지만, '해방' 공간에서조차 '일본군 출신의 군·경 vs 학병이 지휘하는 무장대'의 대결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하림과 함께 남쪽의 편에 서 있는 「여명의 눈동자」의 입장에서 '학병이 이끄는 무장대'와 대결하는 남쪽 세력이 일본군 출신의 군부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식민지/점령지'의 대결 구도가 재배치되고 국민국가 건설이 역사적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해방 공간에서는 '학병-위안부'의 연대 대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학병 간의 갈등이 전면화된다. 이와 같은 서사 전략은 식민지 역사 및 친일 잔재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하지만, 남한 통치체제 내부에 존속한 식민의 잔재는 은폐하는 우를 범한다.

 

 

여자의 운명과 역사로부터의 배제 혹은 초월

해방 공간이 학병 사이의 대결로 재편되었다면, 여기에서 누락된 '위안부'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일까. 학병과 '위안부'가 제국의 폭력 속에서 연대를 형성하였다면, 해방 공간에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해방 직후 대치는 여옥을 식민지 역사가 빚은 "대표적인 비운의 여성"이자 "치욕스런 역사의 잔영"이라 여기며, 안타깝지만 새 시대의 그늘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5] 반면, 하림이 보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아이까지 낳아 살아 돌아온 여옥은 그야말로 "하나의 신화"이다.[6]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의 상징인 것이다.

얼핏 대치와 하림은 정반대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군 '위안부'를 수치로 여기는 쪽이나, 민족의 신화로 여기며 보호하려는 쪽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새 시대의 역사적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위안부'를 역사적 사명을 둘러싼 대결구도로부터 배제하든, 혹은 신화화하여 역사로부터 초월하게 하든,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여기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 탈각된다.

이와 같은 타자화의 시선은 대치와 하림이 여옥과 맺는 섹슈얼한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 내내 모든 면에서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대치와 하림이지만, 섹슈얼한 장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대치와 하림은 여옥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를 점한다. 제국의 폭력 아래에서 연대관계였던 학병과 '위안부'가 해방 공간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보이는 대상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는 주체-벌거벗겨진 몸'이라는 권력 구도는 식민지 시기 대치와 하림이 경험한 '일본군-조선인 학병(대치)', '미군-조선인 포로(하림)' 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인 학병들을 괴롭히던 일본군의 오오에 오장은 대치에게 자신이 보는 데서 점령지 여성을 강간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오에는 대치를 벗게 만듦으로써 대치가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대치는 점령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오오에와 같은 '점령군'이 되었다.

하림의 경우 또한 이와 유사하다. 하림이 OSS 요원이 되기 위해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 미군 심판관은 하림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미군 심판관은 '벌거벗겨진 몸'이 바라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용한다. 제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청년들을 길들이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을 활용했다.

그렇다면 대치와 여옥, 하림과 여옥이 '보는 주체- 보이는 대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은 단지 '학병-위안부'의 연대적 관계가 위계적 관계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러한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제국의 폭력과 상당히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학병-위안부'는 식민지 민족으로서 연대관계를 맺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학병의 몫이 되었다. 학병들이 새로운 국가(건설) 세력이 되었다면, '위안부'는 또 다른 국가(건설) 세력에 의해 식민화된 셈이다.

[사진 2] 미군 심판관 앞에서 벌거벗은 채 심사를 받고 있는 하림 - 「여명의 눈동자」(273), 1976.8.22.) (이우범(李友範) 그림, 『일간스포츠』 일부 직접 촬영)

 

해방 직후 하림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대치가 공산국가 건설을 꿈꿀 때, 여옥 또한 "앞으로 나의 육체를 탐내는 남성들은 모두 나의 적"[7]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여옥의 '여자의 길'은 '아내의 길'로 회수되고 만다. 문제는 '아내의 길'이 여옥의 정치적 주체성만을 박탈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 대한 대치의 착취 또한 은폐한다는 점이다. 대치는 여옥에게 미군의 정보를 빼내 올 것을 요구했고, 여옥은 내키지 않음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가부장제 규범은 대치가 여옥을 끊임없이 이용하게 하는 구실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 기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여옥은 두 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대치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치가 6·25 전쟁 중에 빨치산이 되어 찾아오자, 여옥은 또 다시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여옥은 대치를 도와주기 위해 빨치산 무리를 토벌군 대장인 하림에게 알리지만, 이는 배신행위로 간주되어 결국 여옥은 대치 손에 죽게 된다. 이후 대치는 빨치산 동료들에게 버려지고, 곧이어 미쳐버린다. 하림은 대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여명의 눈동자」는 남쪽 체제를 택한 하림만 남기고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

1975년 10월 1일부터 1981년 3월 2일까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재된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묘비문을 마지막 문장으로 하여 끝을 맺는다.

[사진 3]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이우범(李友範) 그림, 『일간스포츠』 일부 직접 촬영)

 

여옥의 무덤은 눈 속에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세워준 조그만 돌비도 눈 속에 서있었다. 그[하림-인용자]는 거기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여옥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자꾸만 그 돌비를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윤여옥, 1928년3월5일~1951년8월9일」 - 「여명의 눈동자」(1661), 1981.3.2.


"신화"라는 것이 본래 초월적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림이 지키려고 했던 "신화"는 역설적으로 여옥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치가 말했던 "역사의 잔영으로 그늘에 숨어"들어야 하는 '위안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림과 대치의 상반된 태도는 결국 여옥의 존재가 하나의 비석으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물화(物化)됨으로써 합치된 셈이다. 물론 이는 여옥을 대상화·타자화했던 두 사람의 시선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하림과 대치의 은밀한 바람처럼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실제 역사에선 여옥이 사망한 바로 그 즈음 연합군/한국군 위안소가 세워졌다. "정부가 연합군 전용 위안소 설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는 보건부가 1951년 10월 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保防  제1726호)이다."[8]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는 남한 정부에 의해 계승‧변형되었다. 소설은 조국이 지키지 못한 '단 한 명의 여자'의 죽음에 애달파 하였으나, 조국이 지키지 못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결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하나는 해방 이후 '위안부' 제도의 변형과 계승이 애초 소설 속에 예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군 '위안부' 제도가 존속된 것은 한국 군대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일본군, 일본 육사 출신의 병사와 간부를 다수로 하여 창설되었기 때문이다.[9]  실제로 6·25전쟁 당시 한 장교는 "군 '위안부'를 이용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연대장이 관동군 출신자였으므로 군 '위안부' 발상을 했다고 기억했다."[10]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새로운 국가 건설기의 '적자'로서 학병을 호명하기 위해 남한 군대에 이어져 내려온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삭제해 버렸다. 국가 건설 시기 남한 군·경의 지휘부에 자리 잡았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자 대신 탈영 학병 하림을 내세웠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잔재를 삭제하고자 했던 욕망은 그 의도와 별개로 오히려 식민주의의 연속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만 셈이다. 이때 은폐된 존재란 바로 여옥의 무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도 역사도 되지 못했던 연합군/한국군 '위안부'들이다.

다른 하나는 「여명의 눈동자」에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남한에 계속해서 존재했던 군 '위안부'만 은폐하는 게 아니라, 여옥 이외에 어떠한 일본군 '위안부'도 그리지 않는다. 위안소에서 다른 '위안부'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들 가운데 여옥 외에 귀환한 여자는 없다. 하림이 학병 기피자들과 함께 친일파를 처단하고, 대치가 귀환 학병들과 함께 제주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지만, 여옥은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지닌 여자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직 여옥 한 명만이 존재한다. 학병들에겐 그들을 모이게 하는 역사적 과업이 주어지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계기는 없다. 대신 여옥에게 주어진 것은 '아내의 길'이었다. 학병이 역사적 '사명'을 통해 세대로 구성된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탈역사적인 여자의 '운명'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위안부'에겐 이러한 운명조차도 가부장제 규범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대신 이 비극적 운명을 통해 '위안부'는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고 만다.

 

일러스트 ⓒ이사각

 

 

각주

  1.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pp. 121~122.
  2. ^ 김건우, 「운명과 원한」, 『서강인문논총』 5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참조.
  3. ^ 이 글은 『일간스포츠』 연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하 작품명, 연재 횟수, 날짜만 표기함.
  4. ^ 허은, 『냉전과 새마을』, 창비, 2022, p. 85.
  5. ^ 「여명의 눈동자」(727), 1978.2.16.
  6.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7. ^ 「여명의 눈동자」(1031), 1979.2.14.
  8. ^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 '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99.
  9.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p. 167~168.
  10. ^ 김귀옥,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선인, 2019,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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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지은

<일본군 ‘위안부’ 서사 연구>(2023)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군‘위안부’, 기지촌 여성, 탈북 여성 등 국가 경계의 여성 서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셜클럽』(문학동네, 2024), <일본군‘위안부’ 운동 초기 증언의 교차적 듣기>(2022), <가부장제 민족주의의 분열증과 여성 생애사 쓰기의 가능성>(2021) 등의 비평 및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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