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류광지안(刘广建)

  • 게시일2025.02.24
  • 최종수정일2025.02.25

중국 잡지를 통해 보는 연합군 구출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모습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네 명의 일본군’위안부’ 모습을 담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1944년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 속 임산부는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생존자 박영심이었다. 구조돼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박영심은 일본의 항복 후 고국으로 송환됐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해온 중국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박영심을 포함해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과 관련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기사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류광지안 부연구관원이 소개한다.

 

[사진 1]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중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햇필드 이병이 촬영한 것이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RG 111 Entry SC Box 356 / 설명은 서울기록원 참고)

 

1944년 9월, 미 육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이병 햇필드(Charles H. Hatfield)는 중국 윈난성 쑹산 전선에서 ‘유명한’ 전쟁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만삭의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사진에는 중국군 병사와 여성 네 명이 등장하는데, 옷차림과 외모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됐다. 초췌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한 표정의 네 여성은 웃고 있는 중국계 미군 정보장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인데, 한 눈에 보아도 임신 상태였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만삭의 여성은 흙더미에 기대어 두 손을 짚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박영심’이라는 이름의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합군 촬영 사진 속만삭의위안부’피해자’

당시 박영심은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과도한 피로와 극도의 긴장 상태였던 박영심은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 구조된 박영심은 즉시 중국 원정군 제8군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산된 태아를 꺼내는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중국 윈난성 바오산에서 한동안 요양한 박영심은 이후 다른 조선인 ‘위안부’ 30여명과 함께 쿤밍으로 보내져 앞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박영심과 동료 여성들은 이듬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비극적인 경험은 역사 속에서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가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침묵을 깨고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잔혹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하는 대열에 박영심도 동참했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는 전쟁 중 일본군이 자행한 ‘위안부’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심각하게 유린한 반인륜적 전쟁 범죄임을 입증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 12월, 국제사회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방문한 박영심은 숙소에 있던 목욕 가운을 보고 과거 위안소에서의 기모노가 떠올라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결국 그녀의 증언은 비디오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영상으로나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그 범죄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2003년 11월, 박영심은 중국 난징과 윈난 쑹산을 방문해 예전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직접 지목하는 역사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5년 12월 1일, 박영심이 지목한 난징 리지샹위안소 옛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안부’ 주제 기념관인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그 후 리지샹 전시관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데 힘써왔으며, 여기에는 박영심과 동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사진 2] 박영심이 1939년부터 약 3년간 ‘위안부’로 생활했던 동운위안소 19호실. 중국의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의 일부로 공개되고 있다. (사진 제공: 류광지안(by photographer Sun Chen(孙晨)))

 

10년 간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로운 단서

약 10년 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리지샹 전시관은 박영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냈다. 1945년 6월 25일 발행된 잡지 『대전화집(大战画集)』에 실린 ‘윈난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의 여성들, 그녀들이 속은 경위를 털어놓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반도의 젊은 여성들이 중국 윈난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과정과 쑹산 진지에서 겪었던 비참한 경험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사진 3] 『대전화집』 1945년호 표지 (제공 : 류광지안)

 

기사에 따르면 1942년 봄, 일본인들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을 돕는 일을 하는 ‘여성 보조 부대(妇女辅助队)’를 모집한다고 속였다. 안전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난한 농가 출신 소녀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쉽게 현혹되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을 믿고 지원하여 배에 올랐고, 남양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미얀마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폭력이었다. 마지막에 그들은 윈난성 쑹산의 일본군 진지로 보내져 유린당했다. 중국군이 쑹산을 점령했을 당시 원래 24명이던 ‘위안부’ 가운데 살아남은 여성은 열 명이었다.

 

[사진 4] 『대전화집』 기사 사진.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10명의 '위안부'들이다.

 

이런 내용과 함께 기사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열 명의 여성은 1944년 9월 쑹산 전투에서 중국군에 의해 구조된 ‘위안부’피해자들이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일본인,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약 1년간 요양을 한 사진 속 인물들은 구출 당시와 비교해 외모와 체격이 조금 달라졌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박영심의 모습도 확인됐다. 사진 속 박영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어 사진 촬영 당시 기분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양 1년 후,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 

1944년 9월, 미 육군 164 사진부대는 쑹산 전투 현장에서 많은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과 영상 자료는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대전화집』에 실린 이 사진 속 여성 열 명을 미군이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이들 모두가 다른 영상에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구출된 후 건강하게 지냈고, 수술을 받았던 박영심을 포함해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구출 당시 ‘위안부’피해자들의 모습은 몹시 초라했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구출 뒤 사진에서는 미군이 촬영할 당시의 불안하고 초라하며 당황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마음이 편해 보였다. 구출 당시에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지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난을 겪은 이들 여성들은 구조 후 중국 군인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에서는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인 ‘위안부’든 조선인 ‘위안부’든 그들은 오직 하나의 바람만을 간절히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大战画集』 기사와 번역문>

 

중국 뎬시(滇西)에서 포로로 붙잡힌 위안부들
 - 자신들이 속은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국 군부대는 누장(怒江)강 전방(前线)의 쑹장(松江)강 전투에서 독특한 ‘전리품’을 얻었다. 바로 10명의 일본군 위안부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조선인도 있다. 지난 3개월간 그녀들은 쑹산(松山) 전투(중국의 항일전쟁 중 송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적군들과 함께 생활했다.
누장강 전선 각 거점의 일본군 부대에는 일본 위안부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번은 텅충(騰沖) 지역에서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포착되기도 했다. 일본군 화약고가 폭발될 때 한 조선인 위안부가 그대로 생매장되는 것을 당시 현장에 있는 일본군들은 모두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부대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 위안부들 중 네 명이 조선인이었다. 나이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로 서양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화사해 보였다. 이 여성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서양식 옷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사 온 것이다.
그녀들은 낮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미국 담배를 피고 있었다. 지난 수 월간 겪었던 전쟁의 충격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북조선의 평양 사람으로 전부 농촌 여성이었다. 1942년 봄, 일본의 정치 관계자가 이들이 있는 마을에 찾아와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얼마나 천하무적이고, 어떻게 "부녀자 지원팀"을 모집하여 싱가포르로 보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또 싱가포르가 얼마나 안전한 후방 지대인지, 이들이 가면 병원에서 병간호 일만 하면 된다는 등의 감언이설을 내뱉고 갔다. 비록 이런 감언이설들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장의 돈이 너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들 중 한 여성의 아버지는 농부인데 넘어져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비를 부담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후 받을 수 있는 1,500위안의 정착비로 아버지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속아 이곳에 왔는데…
끌려온 24명 중 14명이 숨을 거두었다.

대부분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열여덟 명의 여성이 1942년 6월에 북조선을 떠나 남양지역에 보내졌다. 남양으로 가는 길에서 이들은 일본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시아제국이 구축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허황한 선전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싱가포르를 지나치고 멈추지 않는 것을 알아챘을 때, 마음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차는 미얀마 양곤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할 때, 그녀들은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다. 쑹산지역에 도착하자 네 명의 조선 여성은 서른다섯 살의 일본군 정식 위안부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본인 위안부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여성)
쑹산 지역 일본 군부대에는 그녀들을 포함해서 총 스물네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다른 업무 외에도, 그녀들은 일본 병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산속 야영지의 동굴을 청소하고 했다. 중국 군부대가 쑹산을 공격할 때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스물네 명 중 열네 명의 위안부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소에 일본군 당국은 그녀들에게 만약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면 반드시 각종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 줄곧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이 말들을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년간의 생활로 인해 일본 군부대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박영심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구출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 1944년 미군 164 통신사진중대 소속 사진병이었던 에드워드 페이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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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류광지안(刘广建)

현재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대학살 희생동포기념관'의 부연구관원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 관련 역사와 '위안부' 문제, 난징대학살, 일본 전범 재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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