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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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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김헌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 소현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여순주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연구교수)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 정용숙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허윤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편집회의 1부 - '위안부' 문제를 통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편집회의 2부 -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위안부' 문제로 대중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소현숙 말씀해주신 것처럼 연구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라든지, 대중매체에서의 ‘위안부’의 재현, 그리고 내셔널리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 자발성과 동원의 문제 등 굉장히 다양한 논점들이 제기되었다.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들이고 앞으로 웹진<결>에서 이런 주제들을 다루게 될 것 같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웹진 <결>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만드는 웹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위안부' 지원단체가 만드는 웹진과는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겠지만, 어쨌든 대중들과 만나는 작업이기 때문에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역할들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용숙 '위안부' 문제는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있는 것들이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도의 깊이가 각기 다르다. 웹진 <결>이 타깃으로 삼는 ‘대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소현숙 연구소에서 처음 웹진 사업을 기획할 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웹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연구자들이 이 웹진을 통해서 관련 주제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들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헌주 어차피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관련 전공자나 지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중이 웹진 <결>을 찾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웹진 <결>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레퍼런스다. 예를 들면 유사 역사학이 유행했을 때, 그 논쟁을 진화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레퍼런스들이었다. 누군가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 전문가의 글을 찾아서 정리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웹진의 글들은 '위안부' 문제의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리라 생각한다. 윤명숙 웹진의 독자를 상정하여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연구자나 관심이 많거나 지적 수준이 높은 대중들이고 또 하나는 상당수가 학생들이 될 것이라고 본다. 전자는 지금껏 대부분 출간 서적에서 정보를 얻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친 경험에서 말하자면, 학생들의 경우는 책보다는 주로 블로그나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같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웹진 <결>이 신경 써서 상대할 주 타깃 중 하나를 대학생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문장은 중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평이한 문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연구자지만 연구자들의 글쓰기는 대부분 딱딱하고 어려운 편이다. 웹진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은 있으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하고 중학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함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구 논문이나 담론 논의와 같이 학문적인 분야까지 평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권명아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90년대부터 이 문제를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 다루는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위안부'와 관련된 연구가 부족하다든지, 너무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한다. 모든 연구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담론을 형성하는 통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서 아주 오랫동안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혐오발언)의 원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헤이트 스피치로 가공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따로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일본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재판 두 개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헤이트 스피치 책이 출간됐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되고 있다. 소위 혐한 출판물이라고 하는 책들이 대중적인 버전으로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정보들이 많이 부족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책보다는 인터넷에서 이야기가 많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할 수 있는 '위안부'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정보들이 대개는 비전문적인 채널인 경우가 많아서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일본 우익의 헤이트 스피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짚어줄 수 있는 미디어가 너무 절실하다. 대항 내러티브는 훨씬 더 전문적이고, 기존의 내러티브의 맹점을 잘 짚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올해 일본에서 출간된 헤이트 스피치 책에서도 '한국이야말로 성매매 천국’이라고 나온다. "이런 한국이 '위안부' 동원에 대해 문제 제기할 자격이 있느냐”고 써놨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은 단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인종차별이다. UN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폐해야 한다고 권고를 받았다”라면서 “일본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연구자들도 '위안부' 동원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한 성 관리와 전시 성폭력이 결합한 (보편적인 문제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도 그랬다면서 말이다. 이런 교묘한 내러티브에 대항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누구도 하고 있지 않다. 조경희 자꾸 일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웹진 <결>이 향후 다언어로 발신되리라 생각해서 말씀드린다. 90년대 탈냉전기가 ‘증언의 시대’가 된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의 커밍아웃과 증언의 힘이 크다. 이것은 ‘경험’이나 ‘기억’ 혹은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학술적 경향이나 담론 전반에 반영되었고 이에 대한 반감이나 혐오는 어느 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일본의 젊은 대중의 경우 ‘착한 이야기’를 하는 리버럴 세력을 기득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쉽게 역사 수정주의적인 담론에 끌리게 된다. 권명아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혐오 세력들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재일조선인을 혐오하고 LGBT(성소수자) 차별도 한다. 행동으로까지 옮긴 사람은 소수지만, 담론으로는 지속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이 웹진 <결>의 주된 타깃은 아니지만, 탈진실이나 반지성이라 말하는 시대에 대한 상상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가 이미 그만큼 담론투쟁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윤명숙 구체적인 관점이나 담론 형성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에 더해 역사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말하고 싶다. 먼저 역사 사실, 즉 팩트도 중요하고, 관점도 중요하다. 중요한 건 웹진에서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운동의 경우에는 해결이라고 하는 절명의 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훨씬 더 민족주의에 치우쳐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의 경험을 빌려 말하자면, 학교 교육에서도 기존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다 보면 ‘일본놈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끝나기 쉬운 커리큘럼이 많았다고 한다. 앞으로 웹진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전공을 가진 편집위원들이 모인 만큼, 웹진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팩트냐 관점이냐가 아니라, 팩트는 팩트대로 중심에 놓고, 팩트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이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웹진 <결>에서 다뤘으면 하는 콘텐츠 이선이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합의를 했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 해결”이라고 한국 정부가 선언했다. 그 선언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었다. 피해자가 명백히 있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만으로는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과정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이 문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다양한 시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웹진 <결>에서 이러한 고민을 잘 담아냈으면 좋겠다. 김헌주 언론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다룰 필요도 있다. 국민기금 문제라든가 일본 내에서 있었던 고노담화라든가. 연구자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문제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위안부'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일 언론에서 기사들을 뽑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한국 언론은 한겨레신문부터 조선일보까지 모조리 일본의 우익 담론만 보도한다. 그게 언론에서 소비하기 좋은 거다. 일본 내부의 우익 담론만 보도하고 리버럴, 진보계열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언론을 통해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국회 속기록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일본 내의 중도정당이나 좌파정당에서는 아베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언론에서 제공하는 기사들을 통해서 '위안부'에 대처하는 일본의 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웹진 <결>에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권명아 그래서 일본을 포함한 해외의 일본군'위안부' 지원단체나 기관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일본의 많은 진보적인 단체와 학자들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연구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 잘 소개가 되지 않아서 국내에서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의견이 다 뭉뚱그려져 있다. 여순주 국내에도 관련된 단체들이 많이 있다. 아무래도 '위안부'와 관련된 활동의 중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가지고 있어 그 위주로 소개되면서 다른 지방에 있는 단체의 활동은 보도가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웹진 <결>이 국내의 다양한 단체를 소개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작년에 광주에서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이 진행돼서 4년 만에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직접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 때 강제노동과 관련된 부분이라 웹진 <결>에서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당시에 신문에 딱 한 면만 나오고 추가로 보도가 되지를 않더라. 그런 것도 연결해서 다뤄주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윤명숙 여순주 선생님 발언 중에 여자 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 무관하지 않다. 간단하게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정신대로 호칭했다. 또 식민시기 조선에서 업자들이 농촌에서 딸들이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개해주는 공장에 가면 된다고 속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취업 사기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연구소는 '위안부' 문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만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소·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모두 수집해야 할 것이다. '위안부' 동원에 활용된 취업 사기를 예로 들면, 당시 식민지기 조선의 여공 실태를 알아야 하니 여공 관련 자료 소개나 연구 성과를 웹진 <결>을 통해 국내외 연구자나 대중에게 제공하면 좋을 것이다. 정용숙 돌발적으로 외교 현안 같은 것으로 '위안부' 문제가 소환될 때, 그 불쑥 튀어나온 사건 밑에 있는 저간의 과정과 맥락을 전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예전에 들었더라도 꾸준히 관심 두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표면적으로밖에 못 하고, 같은 얘기 반복하고, 일회성 이슈 소비로 끝나고. 그래서 그런 걸 짚어주는 역할을 웹진 <결>이 해야 할 것 같다. 웹진이 정기적으로 나온다면 선제적으로 이슈를 다뤄줘도 좋겠다. 예를 들어 8월이라면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그달에 있었거나 기억해야 할 일들을 다룬다든가. 시사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다. 허윤 저의 지인이 BTS 팬이 되어서 ARMY(BTS 팬클럽) 활동을 시작했는데, BTS의 원폭 티셔츠 사건 때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본과 미국의 혐한들과 싸웠다. BTS를 파시스트로 프레이밍 한 것은 혐한 세력이 만든 의도적인 비난이라는 맥락에 놓여있는 것이라면서. 이에 대항할 자료를 찾기 위해서 영미권의 자료들을 검색하는데, 일본군'위안부'나 원폭 문제와 조선인의 관계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다. 결국, ARMY들이 선택한 방식은 원폭 피해자 협회와 '위안부' 할머니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팬덤)는 역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대응해 나가더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처럼 웹진 <결>에는 일종의 대중적 이슈 파이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제가 너무 어렵고 문턱이 높으면 ‘웹진’이라고 하는 형식으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가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형화된 서사를 좀 풍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히려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는 이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면서 담론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소현숙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느낀 건데, 학생들이 이 문제를 잘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 문제는 굉장히 쉬운 문제, 일본이 사죄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강의를 통해 이 문제가 사실은 쉽지 않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면 꽤 놀라는 것 같다. 저는 그런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하는 근거 담론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웹진이 해야겠지만, 또 한편에서는 일본군은 왜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만들어야 했었는지, 그 역사적 경험은 왜 한국군 위안소, 미군 기지촌의 역사로 해방 후까지 이어졌는지, 왜 피해자들은 전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일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한 번쯤 자기 문제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조경희 저는 작년부터 신입생들 대상으로 세미나 수업도 하고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도 맡았는데, 특히 작년에는 미투 때문에 여학생들은 '위안부' 문제를 젠더 폭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았다. 한편에서 식민주의나 재일조선인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심이 많지 않았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대로 과거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죄를 끌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꾸로 보면 '위안부' 문제만큼 다양한 문제에 걸친 사안도 없다. 계급, 여성폭력, 동원체제, 미 군정, 반공주의, 민주화, 탈냉전 등 하나하나 특집으로 꾸며볼 수 있겠다. 다만 어떤 점에 초점을 둬도 '위안부' 문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피해자들의 증언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원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웹진에서 직접 증언을 다룰 수 없어도 대중들이 증언을 접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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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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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두 번째 좌담회의 주제는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이다.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와 『제국의 위안부』사태를 경유하여, 한국 사회에는 일본군‘위안부’ 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군‘위안부’를 다룬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상영이 증가하고, 소설화되는 빈도도 높아졌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커졌다. 이번 좌담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자들의 고민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회 : 허윤(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교수) 패널 : 권은선(중부대 연극영화과, 영화평론가) / 오혜진(한예종, 문학평론가) / 김청강(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1부> -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부> - '위안부'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 어디까지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 <3부> - 재현물로서 <허스토리>의 성공과 실패 <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허윤 안녕하세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의 두 번째 좌담회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재현을 중심으로 좌담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진 <결> 편집위원이고 부산외대에서 재직 중입니다. 참석해주신 선생님들은 중부대 권은선 선생님, 한양대 김청강 선생님, 한예종 오혜진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 일단 돌아가면서 인사하고, 선생님들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혹은 재현 문제에 대해서 관심 갖게 되신 계기나 이유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주시면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혜진 저는 한국 근‧현대문학 연구자고요. 주로 식민지기 소설과 비평, 문화론을 공부했습니다. 식민지 문화론을 공부하다 보니,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유독 너무 많이 재현되거나 혹은 거의 재현되지 않는 섹슈얼리티의 한 종류가 일본군‘위안부’의 섹슈얼리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 텍스트들을 최대한 찾아 구해 보면서, 그것에 개재한 정치적 쟁점이 뭔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이른바 “불가역적 최종합의”, 그리고 박유하 선생님의 저작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뿌리와이파리, 2013)와 관련된 논쟁이 점화되면서 ‘위안부’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 서사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죠.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의 역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다툰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닐 테고, 더구나 ‘위안부’ 역사에 접근하는 여러 관점, 민족주의나 민족주의 비판,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등을 서로 대치되는 사조들의 경합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재현과 재현물을 향유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서 사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재현의 윤리’, ‘재현의 정치’라는 말이 자명한 테제처럼 이야기되는데요.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어긋났다든지 충실하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재현의 윤리’란 무엇이고, ‘재현의 윤리’에 충실하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관점과 기술, 전략 등을 시도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김청강 안녕하세요. 저는 한양대학교에 있는 김청강이라고 합니다. 저는 1950~60년대 한국 대중영화를 가지고 박사 논문을 썼고, 그쪽으로 계속 공부를 해왔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나온 건 1990년대 이후인데, 우연히 얼마 전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그 이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의 처음 알게 되었어요. 과거에는 ‘위안부’ 재현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좀 찾아보고, 우리나라에서 재현된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재현된 것들도 찾아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좀 많이 발견하게 되었죠. 그래서 논문을 한 편 쓴 거고요(김청강,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졌나?-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동아시아문화연구』 71, 2017, 149~193쪽). 방금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도 재현의 윤리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재현의 윤리에 관해서는 '위안부'만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폭력, 식민지 폭력까지 확장해서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재현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권은선 안녕하세요. 권은선입니다. 중부대 연극영화학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역할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앞의 두 분처럼, 저도 '위안부' 문제 전문 연구가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제가 나와도 되는지 조금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전에 ‘위안부’ 영화의 재현과 관련된 논문 2편을 발표해서 이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권은선, 「일본군 ‘위안부’ 영화의 자매애와 증언 전수 가능성」, 한국콘텐츠학회 논문지 17(8), 2018, 414~421쪽;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여성학논집』, 34(1), 2017, 3~28쪽). 그 논문들은, <귀향>(조정래, 2016)을 보고 즉자적으로 몸으로 느낀 불편함과 분노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느낀 그 ‘문제적 관객성’을 영화 안에서의 시각적인 장치의 검토를 통해서 해명해보고 싶었어요. 아울러 그 영화가 구성해내고 있는 ‘위안부’ 이슈에 대한 공통감각과 정치적 효과가 적실한 것인지 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계속 고민하는 중입니다. 허윤 저는 최근 일본군‘위안부’ 재현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2015년 이후에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5), 이나정 감독의 KBS 특집극 <눈길>(2016)이 영화로 편집이 되어서 2017년에 개봉을 했고,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2017),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2018)에 이르기까지 상업 영화로 극장에 개봉한 영화가 4편 정도 되고요. 그다음에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일본군‘위안부’ 쟁점 섹션으로 다뤘었고, 2017년 DMZ 영화제에서 이대 한국여성연구원과 같이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진행했고, 2018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위안부' 기림일 제정을 맞아서 일주일간 특별전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김숨의 소설 연작이 있죠. 『한 명』(현대문학, 2016), 『흐르는 편지』(현대문학, 2018)와 증언소설 『(김복동 증언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길원옥 증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현대문학, 2018) 두 편이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다 보니까, 지금 문학과 영화 장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소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선생님들 공통으로 <귀향> 얘기들도 해주셨는데, 최근에 일본군'위안부' 재현물의 특징이나 흐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방금 설명한 것처럼 <귀향>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성공을 거두고 관객 수 300만을 넘어섰다는 것이 큰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일이고 역사적으로 재현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이 2015년 이후에 강화되면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치열하게 비평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약간 '재미는 없지만, 만듦새는 훌륭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텍스트'라는 말이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재현한 작품들의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이버 댓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천만이 봐야 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지,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작업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오혜진 '위안부’ 역사가 서사화되기 시작한 게 대략 해방 직후라고 하면,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에 분명 변화가 있겠죠. 최근만 보더라도 확연한 변화가 느껴집니다. 최근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대중서사의 공통적인 전제는 이혜령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듯, 일본군‘위안부’를 국가에 신고‧등록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고 한정하고, 그 연로한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기 전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이때 ‘위안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죠.[1] 그런데 실제로 조선인 ‘위안부’의 수는 2만 명 설부터 20만 명 설까지 있을 만큼 그 규모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게 특징인데요. 그렇다면 ‘위안부’의 역사를 산정 가능한 특정 당사자의 문제로 규정하는 발상에는 문제가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위안부’였던 이들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 ‘위안부’ 역사를 역사화하는 오늘날의 한 경향이며, 그것의 정치적 효과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현재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산정 가능한 피해생존자들의 문제로 한정하니, 이 ‘피해생존자’들과의 직접적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 곧 ‘위안부’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들에 매우 중요해집니다. ‘위안부’에 ‘빙의’한다거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사를 갈음하는 재현방식이 선호되죠. 그렇게 할 때 ‘위안부’ 역사를 다룬 서사의 당위성과 윤리성이 담보된다고 믿는 경향이 짙어집니다. 이는 비단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광주항쟁 등과 같은 역사적 폭력을 재현하는 최근 대중 서사에서 널리 확인되는 경향입니다. 광주항쟁을 재현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의 재현전략도 바로 그것이었죠. 이런 재현전략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이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정치적‧미학적으로 사유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질문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재현전략이 선호되는 원인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죠. 허윤 선생님의 논문에서 지적된 대로, ‘재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폭력을 재현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덜기 위해 당사자들의 재현(증언, 기록)으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덜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들과 윤리적‧정치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고, 즉 일종의 ‘진정성의 정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2] 또는 반대로, ‘위안부’ 역사를 후대 시민사회의 문제로 사유하기보다는, 지지 가능한 특정 존재를 ‘당사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실 ‘위안부’를 비롯한 식민의 역사를 자기 문제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각도로 사유하는 게 ‘재현의 정치’를 사유하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식민지기에 ‘위안부’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서사는 거의 없었고,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으로서 ‘위안부’의 역사를 다룬 소설들이 조금 등장합니다. ‘동네의 아는 처녀가 일본군에게 끌려가 어디에 다녀왔다더라’라는 식이죠. 이때의 화법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빙의하려는 최근 서사의 전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김청강 저는 과거에 어떻게 재현이 되어왔는가를 조금 살펴봤기 때문에 그 추이를 좀 본다면, 지금은 피해 생존 할머니들이 계시고 그 할머니들이 운동을 사실 꽤 오랫동안 해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장 안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랬던 것에 비해서 그 이전에, 그러니까 운동화 되기 이전에 '위안부'를 표상하는 것은 사실 피해자의 입장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게 체화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더라고’ 돼있기 때문에, 재현들이 사실은 굉장히 거리감이 있죠. ‘위안부’들이 계속해서 나오기는 하지만, 굉장히 추상적으로 나오는 거죠. 어떤 생생한 피해자로서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 피해를 얘기하지만,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는 그런 재현의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영화로는 1960년대에 나왔던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가 '위안부'를 드러낸 가장 첫 번째 영화인 것 같은데요. 이 영화 자체가 굉장히 독특한 영화예요. 1965년에 만들어졌고, 당시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한일 간의 문제, 혹은 식민지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이 영화가 나왔습니다. 남자주인공은 버마전선으로 파견된 장교이고, 거기에서 ‘위안부’를 처음 만나요. 그런데 영화에 '위안부'가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위안부'가 나오는 방식이 유엔 마담 같은 미군 ‘위안부’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다 한복을 입고 있고, 민족의 피해자라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에 비해서, 1960년대 영화에는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위안부’의 모습, 그러니까 미군 ‘위안부’의 모습이 영화에 재현되고 있었던 거죠. 피해자의 직접적인 진술이라든지 증언이라든지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위안부'가 있었고 피해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표현이 돼있지만, 그게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의 피해를 증언하는 그런 방식과는 대단히 달랐고, 그래서 거리감이 있는 재현들은 쭉 지속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용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그 맥락들이 달라집니다. 일본인이 재현하는 조선인 '위안부'라든지.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춘부전> 같은 경우에는, 원래 <춘부전>이 1947년인가? 그때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에 기반한 건데. 거기에선 주인공이 조선인 여성이었죠. 근데 당시에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오락물로 소비되는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성적으로 대상화된 모습으로 나오는 거죠. 일본군 병사의 애인들, 이런 식으로 일본 사회에서 유통되었던 것이 1960년대에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이 일본 여성으로 바뀌어요. '위안부'이긴 한데 일본인. 그리고 거기에 조선인 피해 ‘위안부’ 여성이 등장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독특한, 스위칭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이 <춘부전>이 한국에서 <여자 정신대>(나봉한, 1974)라는 영화로 다시 리메이크될 때는 다시 조선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게 또 스위칭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재현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피해자의 목소리라는 것이 증언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의 코드들이 계속 피상적으로 스위칭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더 진정성이 있거나, 개인의 목소리나 복잡한 목소리들이 들어가 있지 않고, 코드가 스위칭 되면서 순환되는 그런 형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권은선 저는 주로 최근에 생산된 대중영화를 눈여겨보고 있는데요. <귀향> 이후에 눈에 띄는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다. <귀향> 이전에 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대중 서사들에는 일본 군인이나 조선인 남자와의 이성애 로맨스가 반드시 주요 서사적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향> 이후에는 이성애 로맨스가 탈각되고 여성들 간의 자매애, 혹은 우정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유령과 함께함’의 형태를 취합니다. 위안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그래서 <눈길>에서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함께하거나 <귀향>에서처럼 영매와 빙의를 통해 유령을 데려오기도 하고요. 이는 '위안부' 증언 구조의 한 특성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미 죽은 자, 영혼)을 대리하여 증언한다’는 감각입니다. 또 다른 서사적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세대 간 배치의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와 후속 세대 인물 간의 관계, 우정이 서사 장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대 간 배치는 ‘증언 전수’ 가능성과 후속 세대의 책임의 문제를 함의합니다. <귀향>의 정민(강하나 분) 같은 후속 세대 인물은 그야말로 몸을 내어주는 (빙의) 매개체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눈길>에서 옆집에 거주하는 ‘헬조선’의 소녀나 <아이 캔 스피크>의 구청 직원 청년은, 텍스트 내에서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책임감을 느끼는 후속 세대의 형상화입니다. 그리고 허윤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서사가 지금 대중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열심히 탐색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는 <귀향>의 360만 관객 동원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장르적으로 보면 <아이 캔 스피크>는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 있고, <허스토리>는 일종의 ‘법정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영화에서 미 하원과 일본 법정에서 수행하는 일본군‘위안부’의 연설 장면은, 마치 1950~1960년대 한국 영화사에 등장했었던 ‘고백하는 여자들’(근대적 여성 주체의 출현)의 귀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귀향>이나 <눈길>이 일종의 고통 전이, 그러니까 오혜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빙의되는 감각’ 같은, 시각적‧서사적 장치에 의존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나 <허스토리>는, 이혜령 선생님이 말씀하신, ‘커밍아웃 스토리’ 이후, 공적인 장소에서의 운동가로서의 일본군'위안부'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대중적인 장르 서사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고, 기존의 축적된 담론을 대중적인 언어로 녹여내려고 하는 것들이, 최근 ‘위안부’ 영화를 둘러싼 흥미로운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청강 허윤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 논문 제목이 「할머니와 소녀 그 사이의 여성들」인가요? 그 키워드가 보여주는 부분이 굉장히 명백한 거 같아요. 최근의 재현에서는, 운동가가 된 할머니의 삶과 동일시하는 방식 혹은 폭력이 재현됐던 그 순간 소녀들을 재현하는 방식. 1960년대나 그 이후에 재현됐던 건 다 성인 여성들이거든요. 성인 여성들이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코드 스위칭이 되는데, 그에 반해서 2015년도 이후 최근에는 성인 여성의 경험으로 되는 것보다는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 그리고 현재 운동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 측면이 특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윤 30대 이상 세대에게 가장 강렬한 일본군'위안부' 재현의 서사가 <여명의 눈동자>(김종학, 1991)잖아요. 저도 초등학생 때 봤는데, 권은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애 로맨스 코드가 굉장히 강렬해서 북한군을 사랑해서 비극적으로 죽는 여자라는 기억만 단편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명절에 온 친척들이 다 모여서 <여명의 눈동자> 재방송을 봤던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채시라 씨가 하얀 조선옷을 입고 처연하게 등장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그때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 아무도 소녀를 떠올리지 않잖아요. 성인 여성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게 세대 감각이 확실하게 있는 게, 20대 친구들에게 일본군'위안부' 표상에 대해 물으면, 100% 소녀상을 떠올리더라고요. 기억이 세대별로 분절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여명의 눈동자>는 1970년대 일간스포츠 연재작이잖아요. 소설은 1장부터 강간으로 시작해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작품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보는 소위 ‘국민 드라마’였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좀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김청강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여명의 눈동자>가 굉장히 충격적인 드라마였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가, 논문을 쓰면서 1편을 봤는데, 1편이 딱 윤여옥(채시라)이 강간당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공공 드라마로, 이렇게 공중파에서 방송이 됐던가. 1990년대 초반의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 놀라울 정도라는.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뭐냐면, 저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이후, 적어도 그게 운동화 되기 직전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조금 낫지 않았을까 기대했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1980년대보다. 1980년대는 영화가 너무 에로화됐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 가장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도를 가졌던 건 1991년도 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지영호)였어요. 그 감독 자체도 에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소재적으로만 가져다가 정말 센세이셔널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가 너무나 명백한 그런 영화였던 거잖아요. 그래서 공개적인 증언이 있었던 1991년도 당시에 ‘위안부’ 문제를 소재적으로 소비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어떤 폭력이 있었는가 궁금해하는 이런 식의, 여성들이 어떻게 당했지 그 모습이 어떨까? <여명의 눈동자>도 그런 맥락에서 소비되었을 것 같아요. 오혜진 ‘위안부’라는 역사적 존재가 해방 직후까지 ‘소문’의 대상으로만 전해져왔다면, 1991년 고 김학순 님의 증언은 ‘위안부’ 역사 재현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혔습니다. 그 증언의 장면이 있었기에, ‘위안부’를 ‘말하는 주체’의 형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최초의 미투’였다고까지 이야기될 정도죠. 이 증언을 계기로 수요집회 등 ‘위안부’ 문제를 ‘운동’의 문제로 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싸우는 주체’로서의 ‘위안부’ 형상도 등장했습니다. ‘위안부’의 역사를 ‘민족의 수난’이라는 식으로 보던 관점에서 나아가 여성 인권의 문제로 사유하는 경향도 확고해졌죠. 최근 ‘위안부’ 재현 서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변수는 ‘시민사회’인 듯해요. 두 가지 방향인데요. 하나는 ‘위안부’를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를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그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와 연대하는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영화 <눈길>에서 ‘위안부’는 단지 ‘소녀’나 ‘할머니’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자 다른 동료 시민을 보살피는 이 사회의 ‘어른’으로 등장합니다. 가족과 사회가 방기한 여성 청소년 ‘은수(조수향 분)’를 돌보는 유일한 시민이 바로 ‘종분(김영옥 분)’이죠. 이건 ‘위안부’였던 이들이 사회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만 재현되던 그간의 경향과 다릅니다. 게다가 여성 청소년 은수는, ‘종분’이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말하는 첫 번째 커밍아웃 대상이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커밍아웃’ 전에, ‘종분’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이자 여성 시민인 ‘은수’였어요.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옥분(나문희 분)’이 그저 사회에 숨어 조용히 움츠리고 사는 ‘피해자’가 아니라, 구청에 8,000건의 민원을 넣을 만큼 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열망이 강한 ‘시민’으로 묘사됩니다. 민원을 넣는 행위는 이 사회의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지금까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숨겨야 했던 것이 이 사회의 편견과 혐오, 불합리한 법과 제도 때문인데도 ‘옥분’이 사회와 제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존재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 캔 스피크>의 핵심 중 하나는 ‘옥분’이 증언할 수 있도록 돕는 구청 직원 ‘민재(이제훈 분)’의 역할이었죠. <허스토리>는 아예 주인공을 ‘위안부’ 피해생존자라기보다 그들의 증언을 돕는 ‘문정숙(김희애 분)과 여성단체들’로 설정했고요. 연대주체로서의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죠. 이런 최근의 경향은 ‘위안부’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위안부’가 경험한 고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그간의 인식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귀향> 등의 사례를 보면, 여전히 ‘위안부’ 역사 재현의 핵심은 ‘위안부’가 당한 고통을 ‘실감 나게’ 재현해서 독자/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는 손희정 선생님의 언급대로, ‘위안부’ 경험을 가진 이들의 가장 큰 고통을 ‘강간의 고통’으로 고착[3]시키는 남근주의적 발상의 소산일 수도 있죠.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소개한 루소의 ‘고통과 연민의 원광경’이라는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루소는 ‘어머니 눈앞에서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와 그 광경을 감옥의 창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는 죄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요. 이 이야기에서 시모코베 미치코는 세 가지 차원의 고통을 읽어냅니다. “찢기는 아이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 자식을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비탄에 찬 고통,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죄수의 고통. 이 중에서 연민compassion의 원형이 되는 것은 세 번째 죄수의 고통이다.” 아랍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오카 마리는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위안부’ 문제에 대입해서 이야기해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아이가 ‘위안부’이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성노예가 되었던 자신의 고통을 지금 증언하고 있는 생존 ‘위안부’ 여성들”이며, ‘감옥 속 죄수’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을 함께 체험하지는 않았고, 그에 대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 고통을 ‘분유’하는 존재. 그렇다면 과거에 ‘위안부’라는 고통의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하지만, 대신 그 고통을 ‘분유’해야 하는 존재로서 후대의 시민들이 바로 그 ‘죄수’의 입장에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이해할 때, 사건의 폭력성은 “타자의 고통에 의해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함, 그 고유의 고통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오카 마리는 말합니다.[4] 저는 이 말을, ‘후대 시민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고통’이라는 뜻이 아니라, 후대 시민들은 그 ‘무력함’을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그렇다고 할 때, 현재 ‘위안부’ 관련 대중 서사는 야수에게 물어뜯기는 존재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재현하는 데에만 주력할 뿐, 그 고통의 역사를 사유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과 책무에 대한 상상은 지체돼 있죠. ‘위안부’의 역사를 피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해결”해야 하는(역으로 말하면, 피해생존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종료되는)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 ‘나’의 역할을 성찰하게 하는 문제로서 ‘위안부’ 역사를 상상하는 재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위안부’ 역사 재현의 초점을 그렇게 이동해보면, 그건 ‘위안부’ 할머니에게 빙의하거나, ‘할머니’의 말을 대변한다는 식의 상상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죠. <아이 캔 스피크>는 흥미로운 영화지만,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가난과 고독, 침묵의 원인을 그녀가 ‘가족과 사회에게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민재’와 그 동생이 옥분에게 ‘유사 가족’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끝나죠. 이런 발상은 권명아 선생님 책에 잘 설명됐듯, ‘근친성’ 혹은 ‘육친적 상상력’을 경유해서만 동정과 공감, 연대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5]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였다고 생각해봐’라는 발상. 그런데 누군가의 ‘할머니’나 ‘엄마’가 아니더라도, ‘위안부’ 피해생존자는 사회의 일원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한국 사회 공통의 역사로 올리기 위한 ‘증언’을 한 것이고, 그는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이 사회에 개입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죠. <허스토리> 역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법정투쟁을 다루는데, 그것은 ‘문정숙(김희애 분)’이라는 영웅적이고 탁월한 개인이 불굴의 의지와 경제력으로 상황을 주도한 덕분으로 묘사됐죠. ‘위안부’라는 존재가 경험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게 급했던 시대, 그것을 ‘민족의 수난’으로만 의미화하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르죠. 달라야 하고요. ‘위안부’ 재현의 초점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대한 정치화와 재역사화가 필요합니다. 허윤 역사성이 다 소거된 채 언제나 그 시점으로 계속 돌아가는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점이 큰 문제인 것이죠. 각주 ^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읽기」,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 허윤, ^ 손희정, ^ 오카 마리,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216~218쪽. ^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한국사회의 정동을 묻다』, 갈무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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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일본군은 중국 점령 후 어떻게 ‘위안부’를 제도화했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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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당안관 소장자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 문서철 중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료 일본제국은 일본군‘위안부’제도를 전시 노동 동원이나, 군동 원처럼 일원화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불법을 은폐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운영했다. 몇몇 학자들이 위안소와 ‘위안부’를 유형화하거나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작업은 특별한 ‘위안부’피해를 규명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지만, 전체상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일본제국은 전시 상황에 따라, 식민지든 점령지든 전장지든 매우 유연하게 여러 방식으로 ‘위안부’를 제공하고 이용했다. 여기에서는 중국 점령 후, 상하이에 설립된 일본 군용 ‘위안부’ 제도에 대한 사료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 다양성의 일면을 보겠다. 이번 소개할 상하이당안관 소장 상하이 특별시 관련 사료, 『日僞上海特別市政府』철은 그 다양한 일본군‘위안부’제도의 한 유형으로,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上海海軍特別陸戰隊)를 주둔시키면서 세운 친일정부를 이용해 만든 ‘위안부’제도에 관한 것이다.[1] 사료의 역사적 배경 :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상하이시에는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에 의해 프랑스 조계지와 영국, 미국, 일본의 공동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이 중화민국으로 중국을 다스리게 된 1928년에 상하이시는 상하이 특별시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상하이 지역은 상하이 특별시, 프랑스 조계지, 공동조계지로 나누어져 각각 행정체계가 달랐다. 상하이 특별시는 국민정부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프랑스 조계지의 경우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공동조계지는 각국의 총영사와 영국, 미국, 일본 등의 관료 및 중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부국(工部局)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조계지는 중화민국의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은 공동조계지 중 소위 일본 조계지로 불렸던 곳인 훙커우(虹口)에 집중해서 거주했다. 상하이에는 각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 이탈리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일본 역시 1932년 10월 1일 소위 제1차 상하이사변 이후부터 일본해군 특별 육전대를 주둔시켰다. 주둔지는 조계지역 밖의 자베이(閘北)의 지앙완루(江湾路)에 사령부를 두었다. 주둔군의 규모는 초기 2,500명에서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 당시에는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제2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은 해군 특별 육전대 이외에도 육군으로 구성된 상하이 방면군을 파견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그 결과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하고, 1937년 12월 첫 친일정부인 대도(大道) 정부를 앞세웠다. 1938년 10월 이후 난징(南京)에 세워진 친일정권인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대도 정부를 없애고, 상하이 특별시로 편입했다.[2] 1941년 상하이 방면군과 함께 황푸장(黄浦江)에 정박해 있는 미군함과 영국포함을 장악하여, 공동조계를 접수한 일본은 상하이 지역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군은 이 시기에 생산된 사료이다. 사료의 의의 및 금후 연구 방향 본 상하이 특별시 관련 자료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군의 행정력이 모두 미치는 상하이 특별시 지역에서의 위안소 설립과 '위안부' 동원, '위안부' 및 위안소 관리 등 제도 설립에 일련의 행정문서이다. 일본군과 점령지 친일정권이 합심하여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 갔던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일본군과 상하이 특별시는 1939년에는 일본군을 위한 오락소 및 위안소 개설과 ‘위안부’동원에 관련한 문건을 주고받았고, 1941년에 이르러서 ‘창기취체규칙’ 등 관련법을 만들었다. '창기취체규칙'은 기본적으로 창기에 관련한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는 데 목적을 둔 규칙이다. 원칙대로라면, 규칙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규칙에 따라 창기, 즉, ‘위안부’를 동원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위안소가 만들어지고, ‘위안부’ 동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에서 ‘창기취체규칙’을 만든 것은, 일어날 수 있는 불법적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동원한 ‘위안부’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제도적 사후 승인이라 할 수 있다. 본 사료를 통해 일본제국이 ‘위안부’ 제도를 어떻게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고 이용했는지를 보다 긴밀하게 연구할 수 있다. 또한 난징, 베이징, 텐진 시의 유사 사료와 비교 검토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 타이완과 조선에서 ‘위안부’ 동원체계의 유사성과 차이점 등을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위안소 설치에 관한 사료군 상하이 특별시의 행정체계는 시장을 필두로 사회국, 공안국, 재정국, 공무국, 교육국, 위생국, 토지국, 공용국으로 구성된다. 일본군이 점령한 후, 상하이 특별시는 상하이 방면군 육군 특무부가 관할했다. 육군 특무부는 상하이 육군 특무반을 두고 총무과, 시부(市府)과, 계획과, 서무과, 선전과, 조사과 등 6부로 구성하고, 상하이 특별시 정부를 앞세워 통치했다. 겉으로 보면 중국인 시장과 중국인 관료들이 행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육군특무반에 보고·승인되는 절차를 거쳤다. 여기에서 소개할 사료는 1938년 10월 상하이 특별시를 점령한 후, 총 조계지를 제외한 지역에 일본군 위안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사료이다.[3] 사료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소는 육전 대본부가 있는 자베이(閘北) 지역(지도상 1지역), 미군과 영국군의 함대가 정박해 있어 일본군이 경비하고 있었던 황푸강(黄浦江) 근처의 푸둥(浦東)(지도상 2)과 차오전(草鎮) 지역(지도상 3)에 설치되었다. 푸둥과 차오전의 주둔군들은 1941년 미군, 영국군 함대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① 소장번호 『R-3-134』 「가오챠오구 분국의 보고, 시민 양수이창이 동구포상로 6호에서 위안소 개설 상황」 「爲據 高橋區 分局 呈報 市民 楊水長 在東溝浦上路 六號 開設 慰安所 情形 祈鑑 核備 査由」 소장번호『R-3-134』의 「가오챠오구(高橋區) 분국에 시민 양수장이 東溝 浦上路 6호에 위안소를 개설 상황 보고하기 위한 예비 조사 사유에 대한 안건」은 앞의 [그림1]에 표시된 2 지역, 푸둥 지역에 설치하는 위안소에 관련한 사료이다. 본 사료는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 보고문건으로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장이 시장에게 보내는 문건이다. 첨부 문건으로는 명부와 지도가 있다. 1939년 2월 25일, 푸둥의 둥고우(東溝) 분주소의 순관(巡官), 즉 경찰이 가오챠오구(高橋区)의 분국(分局)에 보고한 것을 토대로, 상하이 특별시 국장이 시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 문건을 보면, 위안소를 개설하려는 시민 양수장은 상하이 특별시의 「지령」으로, 일본군 푸둥헌병대와 둥고우육군경비대, 둥고우지도관공소 등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위의 기관에서 허가를 받은 양수장은 위안소 개설허가증과 더불어 위안소 고용인원의 성명, 연령, 출신지 등을 기록한 명부, 위안소 약도를 갖추어 지역 경찰서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먼저 위안소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사고가 났을 때는 위의 헌병대, 육군경비대 등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위안소는 일본 육·해군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중국인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소에는 위안소를 관리하는 고용인과 통역, 그리고 위안부 7명을 고용하고 있다. 고용인으로는 남성 1명과 46세 여성 1명을 고용했다. 위안부는 7명으로, 연령별로 보면 23세 1명, 22세 2명, 21세 1명, 20세 1명, 17세 1명, 15세 1명을 고용하고 있다. 위안부들의 출신지는 상하이 3명 창수(常熟) 1명, 단양(丹陽) 1명, 창저우(常州) 1명, 장두(江都)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9년 당시 15세의 여성도 고용되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② 소장번호 『R1-4-364』 「가오챠오 경찰서 보고에 의하면 양수이창이 차오전(草鎭) 71호에서 위안소를 개설」 「爲據 高橋警署 呈報 楊水長 在草鎭 七一號 開設 慰安所 抄具 略圓 轉報鑑核備査由」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에서 시정부로 보내는 보고건이다.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문건은 상하이시 정부 「지령」으로 분류되는 서류이다. 결재라인은 주임, 과장, 주임 비서를 거쳐 비서장에서 시장까지 거치는 문건이다. 본 문건에서 나오는 위안소는 앞의 [그림1]의 3 지역이다. 1939년 10월 13일 난탕자이(南塘宅) 39호에 고용인 1명 통역 1명 기녀 5명, 여고용인 1명을 두고 양수장이 위안소를 개설했다. 위의 사료에서 위안소의 개설 목적은 일본군의 오락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기녀 중 특히 초심자(純系)는 일본군에게 공급하기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초심자를 일본군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원래 기녀가 아니었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난탕자이 39호 위안소는 1940년 12월 26일, 영업 부진이라는 이유로 기녀 5인, 남녀 고용 3인과 함께 차오전 71호로 장소를 옮겼다. 위안소의 장소를 옮길 때도 일본군 푸둥북부대 연락관 사무소, 일본군 푸둥헌병분견대 및 가오챠오경비대, 차오전 부대에서 영업허가를 받았다. 이 서류에서는 핫토리(服部) 반장의 소속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문서 등에 비추어 보아 일본군 특무기관의 지역반 반장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이 사료는 2013년 「한·중 연구자 네크워크 구축과 상하이·난징지역 ‘위안부’관련 자료조사 ^ 神戶輝夫, 「日中戦争における文化侵略(4)」, 『大分大学教育福祉科学部研究紀要』,2001년. ^ 지도는 다음 사이트에서 인용하여 필자가 사료에서 위안소 설립지역을 표시 가공했다. https://minkara.carview.co.jp/userid/203735/blog/c89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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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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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옥(1925년~ / 영문학자, 인권운동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위안부’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1980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국제 관광문화와 여성(일명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정신대 답사 보고를 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 공동 대표를 역임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리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구자. 저서로 『平和を希求して : 「慰安婦」被害者の尊嚴回復へのあゆみ』 『朝鮮人女性がみに 「慰安婦問題」 : 明日をともに創るために』 등이 있다. “지금도 내가 느끼는 거는..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사람, 위안부 이렇게 떠들어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직도 많아. 내가 안 당했고, 내 딸이 아니니까. 근데, 혼자 공부 잘 해가지고 PhD 되고 월급 많이 받고 이게 아니라, 나 혼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거야.” 지난 2월 14일, 웹진 <결> 편집팀은 서울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웹진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찾아뵙고 소식을 알리고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떠올릴 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선구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대감과 떨림을 안고 찾아간 노학자의 집은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흔을 넘긴 연세로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보다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치열했던 평생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후학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짧게 진행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여성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그를 평생 뜨겁게 움직이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소설 전공이었거든. 19세기 전공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많았기 때문에 단체 일이나 사회사업 같은 건 관심도 없었어. 그런데 개인 개인을 만나게 되잖아. 만나고 보면 그렇게 기가 막히고, 생각도 못 할 이야기들이…... 이건 내가 아는 소설,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 직후, 윤정옥은 정신대로 떠났다던 여성들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1970년대, 『분노의 계절』이라는 책이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길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찾아다니던 중, 1980년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간 답사를 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으며 개인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1988년 4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실태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조사를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에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삶의 속살과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매료되었던 영문학자였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윤정옥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전쟁, 계급, 빈곤, 사회 구조와 여성 차별의 고리들을 생생히 발견하면서 은퇴 이후에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솔직한, 학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내가 미안하잖아……”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정신대 소집장이 어김없이 날아왔지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아버지의 판단으로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온 가족이 피난을 떠나 겨우 고난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지만 끌려간 여자들은 소식조차 알 수 없이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피해간 어떤 문제를 나와 같은 이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게감, 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과 책임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공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교수 재임 동안에는 틈틈이 방학 기간에 사비를 털어 답사와 연구를 이어 갔고,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윤정옥은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현장답사 조사위원을 꾸려 일본, 타이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생생하고 절절한 조사 내용은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한 달 동안 연재되었고, 우리 사회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7월 윤정옥은 그의 서재에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학생(여순주, 야마시다 영애, 이상화, 조최혜란)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거침없이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면담을 통해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구술집(증언집)을 간행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피해자 증언 녹취와 피해 실태 조사를 주도하는 한편 국외 거주 피해자 발굴과 국적회복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정신대연구소 활동과 함께 1990년 11월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공동대표로서 운동을 활발히 주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것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묻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되찾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 절대 쉽지 않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려운 게 어딨느냐’며 그는 오히려 “내가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누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 말이지. 본능적,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거야. 의지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 증오와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공감의 문제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윤정옥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문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한국이 도리어 가해국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2006년, 개인 자격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 2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향했던 십수 년간의 외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연대하게 된 일본의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90년 책상 하나에 전화기 한 대로 정대협의 막연한 여정을 시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시민연대 출범을 제안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호응한 국내와 베트남 현지의 많은 단체는 2000년대 이후 지속해서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2, 3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전쟁으로 침해된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가 회복되기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2세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해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더라도”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입장과 외교적 관계,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것을 외쳐온 윤정옥의 노력은 최근 들어 느리나마 결실을 보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십수 년간 활동을 이어온 결과, 지난 2018년 4월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과 성폭행 문제도 아직은 풀어야 할 단단한 매듭이 많이 남아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연구자들과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계속 뒤를 이어나가기를 기원하고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발견과 공감 “내가 아무리 공부 잘 해가지고 에이플러스 받아서 하버드 나오고 런던대 나오더라도, 나 혼자 살 수 없는 거야. 꼭 내 주위에는 같은 사람이 있어. 나 혼자만 잘된다는 생각, 그건 버려야 할 거 같아. 내가 있으면 누가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 같이, 동서남북이 있는 것 같이. 동이라는 것은 서가 있어야 동이야. 남이라는 건 북이 있어야 남이야. 혼자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할 거 같아.”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윤정옥.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열고,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Intervie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윤정옥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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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일본군은 중국 점령 후 어떻게 ‘위안부’를 제도화했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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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 당안관 소장자료 『日僞上海특별시정부』 중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료 (2) 위안부 동원에 관한 사료군 ③ 소장번호 『R1-3-134』 「정찰총대의 보고에 의하면 쟈딩의 정찰분대가 쟈딩 반장의 지시에 따라 군인위안소를 조직하는 경과 상황」 「爲據 偵緝總隊 呈報 嘉定 偵緝分隊 遵 嘉定班長 指飭 組織 軍人慰安所 經過 情形 仰祈 鑑備査由」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에서 시 정부로 보내는 보고문건이다. 이 문건은 주임, 과장 비서를 거쳐 비서장에서 시장의 결재 라인을 거쳤다. 「지령」문건으로 분류했다. 본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9년 12월 27일 제12 분대장이 경비 총대장(郭紹儀)에게 일본육군 특무기관 이케다 (池田) 반장이 개설한 위안소에 관한 내용을 첩보한 문건이다. 즉, 자딩(嘉定)지역의 일본육군 특무기관 자딩반(嘉定班)의 이케다 반장이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군인위안소 즉 사창과 같은 것”을 조직했다고 보고했다. 이케다 반장이 위안소를 개설하여 매월 여자들에게 돈(洋銀) 15원을 보조금으로 보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상하이 특별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케다 반장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상하이로 통역을 보내, 결국 12월 10일 여자 4명으로 위안소 설립 허가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본군 이케다 반장이 직접 젊은 여자 4명을 모아 위안소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상하이 특별시 내에서 친일 중국인을 이용한 것 이외에도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했고, 위안부도 일본군이 직접 동원했다는 것, 즉 일본군이 위안소 및 위안부의 동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3) ‘위안부’ 관리에 관한 사료군 ④ 소장번호 『R1-4-364』 「쟈베이 분국에 의거해 해군부흥부함 훙커우 쟈베이 일대 창기가 小谷冠櫻씨가 평강복리회를 조직한 일을 처리하는 안을 격문과 요람을 초록해 첨부」 「據 閘北分局 呈報 幷 准海軍 復興部函 以 虹口 閘北 一帶 娼妓 由 小谷冠櫻氏 組織 平康福 利會 統籌 辦理 一案 抄附 繳文及簡章等件 會銜呈請核示由」 본 문건은 상하이 특별시 위생국 및 경찰국의 「지령」문서로, 평강복리회 조직을 위해 일본 해군 부흥부와 교환한 문건이다. 해군 부흥부는 일본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해군무관부 및 육전대 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상하이의 군방비 구역의 도시계획, 중국인민생활지도, 위무, 토지, 가옥의 조사 및 물품 보관 및 대여, 물자보급 등 재산관리 및 분쟁 조사, 기관 간의 분쟁, 적산처리 등 광범위한 일을 수행하는 기관이다.[1] 따라서 평강복리회의 조직 및 관리는 해군 부흥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본 문건은 1941년 9월 29일 해군 무관부와 해군 부흥부는 공문 「해군부흥부 제48호」를 상하이 특별시 정부 경찰국과 상해 특별시 정부 위생국 앞으로 보낸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하이시 당국은 화류병 예방 및 사고방지의 견지에서 해군경비구역 내의 중국인 및 제3국인의 사창을 통제하는 기관으로 평강복리회 설립을 허가하고, 치안, 방역(防疫) 상 만전을 기해 유감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지금까지 관리해 왔던 ‘위안소 조합’도 동일한 목적의 기관이지만, 평강복리회로 조직을 통합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즉, 1939년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생긴 위안소들을 관리했던 것은 위안소 조합이었고, 1941년 9월에 위안소 조합을 평강복리회로 일원화한다는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갑북 경찰분국과 상하이 특별시 경찰국 연락관은 상하이 방역위원회의 분과회의 (참석자 : 笹井중장, 田中중장, 大内흥아원 技師, 出本조사관, 해군육전대 군의장, 해군의부장, 安藤군의관, 天野해군군의중좌, 일본인의사공회(日本人醫師公會) 부회장, 일본영사관 가타야마(片山) 경부(警部), 위생국 직원 등)를 개최했다. 상하이 특별시 정부는 해당 부처와 회의를 거쳐, 일본 해군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해군에서 원하는 대로 시행하고, 이 평강복리회에 드는 비용은 상하이시 정부가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평강복리회는 일본해군부의 허가를 받아 개설한 것으로, 하세이(笹井)중장의 지도 하에 운영하며, 평강복리회의 대표는 경찰국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경찰국은 해군부흥부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당분간 해군부흥부에서 직접 감독할 것이라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평강복리회는 치우지앙루(虬江路) 679호에 설치되었다. 특별회장은 상하이 사상문화연구소 소장인 吳一新(일본인, 일본명 小谷冠櫻)으로 정하고, 근무개시일은 1941년 10월 1일로 했다. 본 사료를 통해 상하이 지역의 위안소의 관리는 중국 민간인 吳一新의 평강복리회가 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초기는 해군부흥부, 이후에는 일본 해군부의 중장이 담당했다는 점, 그리고 형식적 운영자인 민간인 吳一新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각주 ^ 支那事変第10回功績概見表 上海海軍特別陸戦隊 D作戦部隊陸戦隊 自昭和16年6月1日 至昭和16年11月30日、C14121077300(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