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한국근대 여성사를 전공하였다. 정신대연구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더불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 녹취 작업을 진행하는 등 초창기 ‘위안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논저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 조사』, 「제2차 세계대전기 인도네시아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귀환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군성노예제문제와 관련한 남북교류와 북측의 대응」,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Q. 강정숙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세요.
저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농민운동)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성사를 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껴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연구회에 들어가 조사연구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군'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이 주제를 비롯하여 여성사와 관련된 연구활동 등을 해왔습니다.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책을 통해서였어요. 집에 ‘위안부’를 소재로 쓴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 일본 책이 번역되어 들어왔던 것 같아요. 여성들을 굉장히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 쓴 책이었어요. 읽고 굉장히 불쾌해서 태워버렸어요. 아버지 책인데 그리 중요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예요. 90년대에 『한국여성사 근대편』을 쓸 때 ‘위안부’ 부분을 제가 쓰게 되면서 이 문제가 민족, 계급, 젠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농축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마침 ‘위안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1992년 3월에 제가 한국정신대연구회(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가입했거든요. 원래 한국여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있던 연구자 한 분이 한국정신대연구회에 역사연구자가 부족하니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파견 나간 기분으로 정신대연구회로 갔죠. 그런데 그게 잠시가 안 되더군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해자 할머니들과 만나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Q. ‘위안부’ 문제 연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주목하고자 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정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같이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수용소 명부, 귀환자 명부 같은 것을 저의 연구 주제로 삼았죠. 이러한 명부들은 당시 현장의 미묘한 부분들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죠. 그렇지만 제가 발굴했던 명단들은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명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있는 할머니들이 진짜 ‘위안부’였는지 아닌지는 제가 증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할머니를 찾아가 증언을 듣거나, 그 외의 군인 군속 등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차 조사를 했죠. 그래서 결국 사실이라고 확인되었을 때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강제적’인 동원이라는 말도 고민해봐야 해요. 만약 ‘강제’가 ‘물리적인 강제’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저는 ‘강제’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물리적인 강제 동원도 있었지만, 물리적인 강제 없이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있단 말이에요. 구조적인 측면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와 다름이 없어요. 공창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있잖아요. 강제라는 의미를 폭넓게 이해해야 해요.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과제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를 구분하는 데 관심이 있지,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걸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꾸 뒤로 미뤄요. 저의 바람이자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일본 욕만 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 논의를 확장하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 처음 만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누구인가요? 당시 구술했던 정황들이 궁금한데요.
그때가 할머니들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이제 막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에 취재 형식의 짧은 인터뷰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증언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당시 저는 강덕경 할머니와 박옥련 할머니를 만났어요. 증언집 1집에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당시 제 나이가 35, 6세 정도 됐을 때예요. 할머니 눈에는 당시의 제가 완전 새댁이었어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말을 가려서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할머니들이 봤을 때 저는 딸뻘이고 세상의 쓰라린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거죠.
그리고 당시는 국민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잖아요. 관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실 연구하기가 쉽지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있었어요. '처녀'여야 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물리적 폭력을 당해야 하고, 엄청난 학대를 당해야 하는 거죠.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할머니들은 그전까진 어디 가서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약자였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피해 사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었겠죠. 그러면 할머니들이 말을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 틀에 맞춰요. 그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거예요. 그래서 연구자는 할머니의 증언을 가려들으면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위안부’ 연구 초창기에는 연구를 진행하시기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996년 무렵이었나. 일본 방송국 NHK에서 같이 조사를 하자고 의뢰가 왔어요. 필리핀 수용소 기록에서 발견된 피해자 중 한 분인 김소란 할머니를 같이 찾아보자고요. 그래서 필리핀 수용소 기록을 들고 일본에서 할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하고 여순주 선생님이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당시 할머니의 한국 출신지 면사무소 도움을 받아서 제적부를 찾았죠. 그때는 제적부를 개인이 볼 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못 보죠. 그런데 할머니가 미국에 계시더라고요. 미국에 계신 할머니의 연락처를 간신히 찾아내고 당시 LA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할머니를 찾긴 찾았어요.
그런데 빠뜨린 게 있었죠. 할머니의 입장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료의 사실을 확인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게 할머니한테는 엄청난 충격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의 과거사를 다 아시고 결혼을 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영주권 때문에 잠깐 미국에 가 계셨던 거고, 원래 생활은 한국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죠. 그렇지만 당시 할머니가 건강 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사진 한 장 안 남겨주셨어요. 김소란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에요. 김소란 할머니의 구술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에 있는데, 거기엔 포로수용소에서 찍힌 사진이 조그마하게 실려있어요.
연구자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하잖아요. 할머니가 어떤 심정일지를 생각을 잘 못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 삶이 일차적이고 중요한 거죠. 오키나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뻔했는데, 오키나와에 있는 활동가 선생님이 “그게 할머니한테 뭐에 도움이 되는 건데?”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배란 이런 거구나’ 그런 걸 느꼈었는데요, 그래서 스톱 했어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생활과 미래 등을 고려했을 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Q. 지금은 역사학계 안에서 구술사가 방법론으로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을 바꾸게 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던 것 같아요. 구술 작업을 하시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던 부분들이 있었을까요?
할머니는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죠.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트라우마도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할머니 구술 중의 특정 내용을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반복해서 질문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그 전의 이야기와 엉키거나 그 전의 이야기가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를 해야 할머니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할머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구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긴 증언집이 일본 우익에게 부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구술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은 굉장히 미숙했다고 봐야죠. 그때 우리 사회가 짜임새 있는 방법론을 전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할머니는 이렇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걸 이렇게 본다, 이렇게 한 거죠.
대부분의 사회문제 해결이 운동이 선행되고 연구가 뒤를 따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놔두고 운동만 앞서서 진행되면, 연구자가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생겨요.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역사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면 굉장히 자극적인 것 위주로 연출하게 되고, 사실과 점점 멀어질 수가 있는 거죠. ‘위안부’ 연구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Q. 아까 군인 군속 등 할머니 외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겠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보다 당시 현지에서 일했던 군인 군속들이 비교적 좌표가 잘 잡혀요.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지역에 동원됐던 군인이나 군속, 노무자 이런 사람들이요. 우리가 그 당시에 산 사람이 아니어서 감이 안 잡히는 부분을 이 할아버지분들은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게다가 이 할아버지 중엔 위안소를 갔던 분도 계시거든요. 이 ‘위안부’가 누구다라고까지는 말을 못 하지만, 당시 그곳에 위안소가 몇 개가 있었고, 대략 몇 명이 있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 거죠.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교차 조사가 되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군인 군속을 조사하고 연구도 했는데, 연구자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중요한 기회와 많은 분을 놓쳤어요. 그때가 그분들도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어요. 지금은 살아계신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후학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자들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텐데요. 연구할 때 연구하려는 방향, 내용 이런 것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식으로 찾아보고 연구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면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쓰인 연구들도 있잖아요? 이럴 때 감정적으로 동의는 되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하고 의심할 수 있는 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는 거죠. 새로운 연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Q.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거 같아요. 기존 연구 자체가 만들어 놓은 어떤 틀이 후학들에겐 때론 장벽이 될 수 있는데, 거기에 매몰돼서 쫓아가기보다는 과감하게 문제 제기 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10년을 할 생각을 하고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연구자를 키울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는 거죠. 연구를 맡겼으면 한 번 발표시키고 끝낼 것이 아니라 2탄, 3탄 계속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줘야 해요. ‘위안부’ 문제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주제예요. 티끌만 한 자료 하나 가지고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하거든요. 크게 안 보여요. 작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계속할 수 있게끔 연구 지원을 해줘야 해요. 이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같은 곳이 생겼으니까, 이 기관에서 지원을 꾸준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연구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얼마큼 성실하게 연구를 이어가느냐 중요해요. 성실하게 연구를 해야 뭐가 나와요. 이른 시간 안에 자꾸 큰 거를 요구하면 오독이 나와요.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Intervei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강정숙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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