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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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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한국YWCA연합회는 지난 2023년 11월과 2024년 2월, 두 차례 주관한 수요시위를 통해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앞장서고 있다. 2024년 11월에는 세 번째 수요시위도 주관할 예정이기도 하다. 한국YWCA연합회가 왜 수요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그 활동과 연대의 의미를 남유진 성평등정책위원장이 소개한다. "지난 30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지난 2023년 11월 15일, '제162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성명의 일부이다. 한국YWCA연합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이날 수요시위는 여성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에 국내 시민단체들과 뜻을 함께하겠다는 대시민 선언이자 약속이었다. 한국YWCA는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로 창립한 이래 청년운동, 여성운동, 기독교운동, 국제운동 등을 펼쳐 온 운동체이다. 인종, 종족, 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은 하나이며,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과 회원이 한국YWCA연합회의 주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정의로운 탈핵·탈석탄 에너지 전환 사회 구축'이라는 '2024~2025 비전'을 제시하며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설정하는 한편 성평등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등 YWCA 목적에 기반한 운동을 지역 특성에 맞게 추진하는 정책과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한국YWCA연합회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해 온 궤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 수요시위 주관… 맞잡은 손, 연대의 과정 한국YWCA연합회는 2023년 1월부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네트워크(이하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연대와 단체 간의 활발한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분쟁 하 여성 인권 침해 및 성착취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한 결정이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는 한국YWCA연합회 외에도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여성연대, NCCK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이화여대민주동우회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에 관심있는 여성·인권·평화 관련 국내 시민단체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한 이후 한국YWCA연합회는 1622차와 1635차 수요시위를 주관했으며, 2024년 하반기에도 한 차례 더 주관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15일, 1차로 주관한 수요시위에서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 법적 배상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전쟁에 반대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이날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의 니시야마 나오히로 '오사카유니온네트워크' 대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기시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죄와 배상을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는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라며 "(연대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말하는 것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모든) 말이 봉오리가 돼서 활짝 피어나고 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수요시위 마지막 순서인 성명서 낭독을 맡은 한국YWCA연합회는 "삼 십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의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며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한 1635차 수요시위 2024년 2월 14일, 2차로 한국YWCA연합회가 주관한 1635차 수요시위에는 특별히 제21차 한·일YWCA청년협의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은 연대 발언과 특별 합창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여정에 힘을 실었다. 미카 미나미 일본YWCA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 세대가 한·일의 틀을 넘어 연결되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그 책임과 마주하는 첫 걸음을 떼게 하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에리 카와고에 일본YWCA 활동가 또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홀로 사회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것을 떠올렸으면 한다."는 응원을 전해 환호를 받았다. 특히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함께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 릿쿄대학교 겸임 강사이자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인 이령경 작가의 수업을 대학에서 수강한 남다른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이령경 작가의 평화학, 인권 관련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다 건너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선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수업했던 강사와 그 수업에서 눈을 반짝이던 학생은 특별한 현장에서 연대 발언자로 함께 나선 이 우연한 만남에 서로 놀랐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확장하는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여하다 한국YWCA연합회의 연대 목소리는 국외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지난 2024년 3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68)에 참여해 '전시 성폭력과 전후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한 주제 발표를 했다. 2024년 3월 11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본회의 일정이 진행된 'UN CSW68'의 주제는 '빈곤 해결과 젠더 관점에서의 제도와 재정 강화를 통한 모든 여성과 소녀들의 성평등 달성 및 역량 강화 가속화(Accelerating the achievement of gender equality and the empowerment of all women and girls by addressing poverty and strengthening institutions and financing with a gender perspective)'였다. UN CSW68은 장관급 회의인 본회의(Official Meetings), 정부 및 국가기구 운영 행사인 부대 행사(Side Events), UN ECOSOC 협의 지위(편집자주-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비영리 민간조직인 NGO가 유엔에 공식적으로 등록돼 얻은 지위) NGO 행사인 병렬 행사(Parallel Event)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부분은 병렬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정의연의 협조를 받아 준비한 발표를 통해 한국YWCA연합회는 한국이 경험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시 성폭력과 이후 피해자가 겪는 교차적인 피해와 빈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 후 패널로는 우크라이나YWCA 율리아네츠 회장,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 일본YWCA 마이코 활동가, 세계교회협의회(WCC) 니키 목사 등이 참여해 토론과 발언을 이어나갔다. 한국YWCA연합회의 발표와 토론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다시 한 번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여성 인권 향상 위한 함께 걷기 한국YWCA연합회는 끊임없이 굴종을 요구한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여성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인권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 왔다. 이러한 역사와 관점을 기반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관련 활동을 뉴스레터로 공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와 함께 할 것이다. 또 중점 운동 아젠다인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심으로,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전 세계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일'임을, 지속적으로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바로 '연대'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견지하며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은 전 세계 여러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는 등 초국가적 여권 운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이 수요시위는 1700차를 향해 가고 있다. 그간 두 차례 수요시위를 주관한 한국YWCA연합회는 2024년 11월 세 번째로 주관을 맡기로 했다. 과거에 그래왔듯이, 현재 그렇듯이, 미래에도 한국YWCA연합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이 땅과 이 땅이 아닌 곳 모두에 상존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근절하기 위해 함께 걷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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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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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항일 국민군의 거점 마파니크에서는 일본군의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우고, 이어 소녀들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동원했다. 시간이 흘러 ‘말라야 롤라스’, 즉 ‘자유로운 할머니’가 된 이 소녀들은 이제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전쟁 중 성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 필리핀 인권변호사로, 일본군 성 노예 범죄에 대한 법적 투쟁 등 다양한 활동에 함께하고 있는 버지니아 수아레즈 변호사가 말라야 롤라스의 저항과 투쟁 이야기를 전한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 자유로운 할머니들)’는 필리핀 마파니크 전투의 생존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저항한 ‘후크발라합(Hukbalahap. 항일 국민군)’의 거점이었던 마파니크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격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그들의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웠다. 심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한 남성의 입에는 잘린 성기가 물려 있기도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에 이어 일부 소녀들은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됐다. 그 소녀들이 바로 지금의 말라야 롤라스이다.[1] 노년에 이른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과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해진 군사적 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는 일본군 점령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동시에 전쟁과 군사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를 점령하려는 시도에 맞선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일본군의 성폭력에 맞서는 것을 넘어 전쟁 중 여성의 신체를 점령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필리핀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과 군사화에 따르는 악행과 공포를 고발하는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말라야 롤라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이다. 말라야 롤라스는 필리핀 대법원에서 12년에 걸쳐 직무 집행 명령 소송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일본 대법원이나 정부에 말라야 롤라스 사건을 제소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법원은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문제’라며 이 역사적인 ‘롤라 이사벨리타 비누야 사건’을 기각했다.[2] 말라야 롤라스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 제소하기도 했다. 필리핀 법정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했지만 벽에 부딪히자 정의를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말라야 롤라스 사건은 CEDAW에 제출되었다. 2023년 세계 여성의 날, CEDAW 전문가위원회는 19쪽 분량의 문서를 통해 말라야 롤라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구제책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첫째, 피해자들이 겪은 지속적인 차별에 대한 전면적인 배상이다. 여기에는 피해 인정, 공식 사과, 물질적 및 정신적 손해 배상, 존엄성과 명예 회복을 포함한 보상, 재활 및 원상 회복이 포함된다. 물질적 배상은 피해자들이 겪은 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피해의 정도와 권리 침해의 심각성에 비례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둘째, 전쟁 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자 모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전국적 배상 제도 구축이다. 여기에는 전쟁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 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를 인정해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전쟁 범죄, 특히 제도화된 전시 성 노예 제도의 여성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기타 형태의 배상을 제공해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 개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승인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권고이다. 넷째, '붉은 집(Bahay na Pula)'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전시 성 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기리고 그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교육 기관(중등 및 대학 교육 포함)의 교육 과정에 필리핀 여성 피해자 및 생존자들의 역사를 포함시키라는 권고이다. 이는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역사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인권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이다. 다양한 캠페인, 지역을 넘어 국내외 연대로! 말라야 롤라스는 여성인권단체 ‘카이사 카(Kaisa Ka, 여성자유를 위한 연대)’의 지원을 받아 피해 회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연대 단체 중에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alaya Lolas)’가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 인정을 전제로 한 진정한 공개 사과, 배상, 재활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시위 형식으로 진행되며, 3・8세계 여성의 날과 11월 23일 마파니크 피해자 추모일,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일본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 또는 무역 협정이 논의될 때마다 시위가 이어진다. ‘전쟁반대여성연대(Women Against War)’는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화에 맞서는 캠페인이다. 카이사 카는 모든 전쟁이 영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점령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평화로운’ 시대에도 여성들은 군인들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 이용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말라양 카바타안(Malayang Kabataan. 자유로운 젊은이들)'은 말라야 롤라스를 접한 다양한 학생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으로, 현재 말라야 롤라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마파니크와 ‘붉은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그들은 전시회와 패션쇼, 기타 기금 마련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카이사 카,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 다른 학생 및 미디어와 협력해 미디어 보도, 방문 및 토론 등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필리핀에는 말라야 롤라스와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활동들이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교사, 농부, 어부 등으로 구성된 다부문 조직인 ‘국가민주화운동(KILUSAN. para sa Pambansang Demokrasya)’은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의 악영향을 폭로하고 말라야 롤라스의 고통을 전쟁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로 강조한다. 즉, 전쟁이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며, 말라야 롤라스와 같은 성노예 피해자들을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국가민주화운동은 2004년부터 격년으로 평화행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단체인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인 이곳은 중국 혁명가 후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연합체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미디어 포럼, 시위 활동 등을 진행했다. 또 ‘위안부 동상’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위안부’ 동상을 마닐라 로하스 대로에 설치했으나, 필리핀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철거되었다. 롤라를 위한 꽃은 일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라진 ‘위안부’ 동상을 찾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와 성 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해 왔지만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작성한 대항 보고서는 필리핀 정부가 전쟁 범죄 피해자인 말라야 롤라스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결의안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복지개발부를 통해 제공하는 지원 또한 CEDAW의 권고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많은 단체와 인권위원회는 CEDAW 보고서에 말라야 롤라스의 사례와 문제를 포함시켰다. CEDAW가 말라야 롤라스에게 유리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다음과 같은 여러 조치들이 이어졌다. 2024년 5월 13일, 필리핀 대통령이 대통령실 공보부를 통해 모든 정부 기관에 지시 서한을 발송했다. 또 사회복지개발부의 지원 및 조치와 함께 상원의원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가 ‘상원 결의안 539’를 발의, CEDAW 결의안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했다. 또 외교관계위원회의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여러 개인 및 기업(Tulay Foundation, Wha Chi Foundation, Wilcon Builders, Feedmmix, Prologue Café, Kamuning Bakery, House of Justeas, 목사, 사진작가, 의사, 블로거 등)도 지원 대열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마파니크 지역 사회에서도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받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롤라스의 손자와 손녀들은 ‘포토보이스(Photovoice)’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롤라스가 손자, 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세션이다.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학에서 전시되었다. 마파니크 초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은 롤라스의 이야기와 마파니크 포위 공격의 역사를 수업에 포함시켰다. 또 마파니크의 바랑가이 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약속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제 청년들이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홀리엔젤대학, 유니버시티 오브 더 이스트, 앤젤레스대학 등의 학생들은 말라야 롤라스의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청년모임(Youth for Nationalism and Democracy)과 카이사 카의 청년 조직 등 다양한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포럼과 원탁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재편되는 안보 협력의 이면은 지역 군사화 한편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양국 군대가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서로의 영토에 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는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그리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체결되었다. RAA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최근의 연결고리이다. 일본-필리핀 RAA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필리핀, 미국, 일본, 호주 사이의 4자 안보 협력체인 ‘SQUAD’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미국은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규범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지정했으며, 3국 안보 협력, SQUAD, QUAD(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 안보 협력 체제), AUKUS(미국, 영국, 호주 등 3개국 안보 동맹) 프로젝트는 모두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더 많은 동맹국을 참여시켜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목표를 취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이런 협정들이 주로 외국 군대-이 경우에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뿐 필리핀 군대에는 동일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의 VFA처럼, 실제로 일본군은 세관 및 형사소송 절차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지만 필리핀군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VFA는 미군에게 특권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군 병사가 필리핀 루손섬의 수빅에서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RAA 역시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군사적 태세 강화와 전쟁 준비의 결과로 군비 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전략과 유사하게 일본 정부는 군사 장비를 과시하며 필리핀에 구매를 유도할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군비 지출이 모든 측면의 안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군비 지출은 사회복지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무력에 대한 의존성만 높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은 실탄 사격 훈련과 기타 군사 작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폐기물과 화학 물질로 인한 위험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의 군사화 심화로 이어져, 필리핀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대리 국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남중국해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군사적 틀이 아닌 신뢰, 협력,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 안보 체제가 필요하다. 군사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전쟁의 잔혹성과 상처를 상징하는 말라야 롤라스!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그리고 말라야 롤라스에 의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가운데 전쟁, 군사화, 외세의 개입과 점령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위안부’ 세대를 막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롤라스와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각주 ^ [편집자주] 이후 자연스럽게 단체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다. ^ [편집자주] 보고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1,000명 이상의 여성이 납치, 감금된 상태에서 성 노예로 학대당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1951년 일본과 전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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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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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마침내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성사시킨 '시민연대'의 힘 전시를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과 인권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실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의미이다. 공공 시설에서 정당하게 계획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와 소녀상 전시가 우익 세력의 협박으로 중단되는 일이 거듭되는 현실을 목격한 일본 시민들의 대응은 <표현의 부자유> 전시였다. 거의 10년에 걸쳐 이 전시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연결한 힘이었던 선의와 배려, 열정과 감성, 자발성과 자율성 등이 큰 역할을 했다. 2022년 4월에 개최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일본 소카대 쿠라하시 코헤이 교수가 이에 대해 소개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한국에서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해 건립됐다. 이후 한국에는 80개 이상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미국과 독일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당사자국인 일본에는 소녀상이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 소녀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표현의 부자유>라는 전시회다. 이 미술전은 정치적 이유 등으로 거부된 작품을 전시하는 장이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소녀상을 둘러싸고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소녀'라는 표상에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파와 정부 또한 소녀상을 '위안부상'이라고 부르며 <표현의 부자유>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전방위적으로 방해해 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회'는 다시 기획되고 지역을 순회하며 열리는 과정이 지속돼 왔다. 심지어 법적 판단을 구하기도 하고, 전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변호사들이 참여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한 걸까? 방해와 위협으로 거듭 좌절된 일본 소녀상 전시 일본에서 '소녀상'은 매우 강한 혐오의 대상이다. '말뚝을 박고', '얼굴에 종이봉지를 씌우고', '차는' 등 우파 지지자들의 직접적인 파괴 행위가 계속돼 왔다. 또 공격적으로 '폭파'를 언급하거나 '정액을 끼얹겠다'고 발언한 국회의원과 저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이런 행위에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화되는 것과 피해자의 이미지가 '소녀'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는 어떤 경위로 시작됐을까? 계기는 20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을 만나 촬영해온 나고야시 거주 사진작가 안세홍은 도쿄 니콘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 개최를 추진했다. 1년 전 확정된 전시회 상황이 급변한 것은 개최 한 달 전이었다. 사진전을 소개한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우파의 눈에 띄었고, 항의가 거세졌다. 당시 안세홍은 법원에 가처분 절차를 밟아 장소 사용 결정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개최 사흘 전 전시회는 취소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도쿄도미술관에서 'JAALA미술가회의(Japan Asia Africa Latin-American Artist Association)'가 주최하는 <제18회 JAALA 국제교류전>에 소녀상 미니어처와 작가 박윤빈의 유화 '위안부!'가 전시되었다. 그런데 전시회 4일째, 미술관 측이 무단으로 작품을 철거했다. 하지만 이 일은 안세홍 전시 때와는 달리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접한 미디어 아티스트 오에노키 준은 전시가 거부된 작품을 미술관 벽에 프로젝션으로 투사해 보여주는 것으로 전시회 파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2014년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가 출범하고, 2015년 도쿄의 갤러리 후루토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되었다. 실행위원회를 이끈 오카모토 유카 씨에 따르면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재질로 만든 동상이라면 일본에서 전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 소녀상 작가 김서경-김운성 부부에게 소녀상을 의뢰했다. 전시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들은 예산이 부족한 전시회 측의 사정을 듣고 직접 자비를 들여 소녀상의 수송을 도왔다. 일본에 반입하기 위해 크기가 큰 조각상은 3등분으로 분할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다시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전시되었다. 작가들은 전시 후 일본을 떠나기 전 "이 소녀상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면서 소녀상 뒷면에 "일본에 남긴다"고 서명했다. 이로써 마침내 일본에 소녀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소녀상은 도쿄도 내 어느 극단의 오두막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무료로 대여되고 있다. 연극 상연이나 영화 촬영 시 대여된 적도 있다. '사라져야 했던' 소녀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녀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9년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이하 아이트리 2019)에서 선보인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 전시이다. 나고야시 아이치현에서 3년마다 열리는 아이트리는 월 관람객 수가 25만 명을 상회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유명 국제 예술제이다. 이 예술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 소녀상이 출품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우파의 협박, 일부 정치인들의 반발 등 논란이 일었고, 결국 개최 3일 만에 전시가 중단되고 말았다. 다음 달에는 일본 문화청이 예술제에 보조금 약 7,800만 엔을 전액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이후 감액 지급). 예술제에 참가했던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겁박하는 이런 행태에 대해 작품 봉인 및 전시 거부,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연대하며 고발했다. 그 후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시와 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다카스 클리닉의 다카스 카츠야 원장, 햐쿠타 나오키, 다케다 쓰네야스, 아리모토 카오리 등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오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에 대한 소환 서명운동[1]을 전개했다. 그러나 2021년 선거관리위원회 조사에서 모인 서명 중 83.2%에 위조 등의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서 '사라져야 했던' 이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두고 '또 다른 출발'이라 해야겠다. '아이트리 2019'에서 소녀상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독립적인 전시회를 기획하는 주최 단체가 생겨났고, 도쿄를 시작으로 관련 기관들이 협력하는 형태로 연대해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개최 예정지에 우익의 항의 시위와 압력, 방해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투쟁에 힘입어 도쿄와 나고야, 오사카 등에서 전시할 권리를 획득해 갔다. ▶ 연기된 도쿄 전시회 첫 소녀상 전시회 지역은 도쿄였다. 2021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신주쿠의 갤러리 세션하우스 가든에서 기획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는 사전 공지 및 관람 신청을 개시했지만 우파의 방해와 가두 선전이 계속되자 결국 갤러리 대표가 이웃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해 '대관 불가'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급히 다른 장소를 물색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휴관 끝 중단된 나고야 전시회 '아이트리 2019 사건' 이후 만들어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를 잇는 아이치의 모임'은 2021년 1월 나고야시 시민갤러리 사카에에서 <우리의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를 개최하려 했다. 역시 방해가 예상되었기에 시설 관리자와 경찰과도 협의하는 등 신중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7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최가 발표되자 가두시위, 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협박이 계속됐다. 게다가 8일에는 갤러리로 수상한 우편물이 도착해 스태프와 변호사까지 퇴거 명령을 받았다. 경찰 입회 하에 우편물을 개봉하자 폭죽 같은 것이 터졌다. 협의를 시도했으나 시설과 행정이 응하지 않고 휴관을 연장해 결국 주최 측은 전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허가 취소된 오사카 간사이전 나고야전의 작품을 이어받은 오사카 실행위원회는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엘오사카(오사카부립노동센터)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간사이>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행사장 쪽에서 '안전 확보'를 이유로 시설 사용 허가를 취소했다. 실행위원회는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7월 9일 사용 불허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도 항소가 기각돼 공공시설 전시회를 막을 명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 드디어 개최된 도쿄전 오사카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시설에서 개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은 실행위원회는 전시회 한 달 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최종 462명에게 341만 2,900엔을 후원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쿠니타치시민예술소홀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를 개최했다. 전시회를 방위하라! 치열했던 도쿄전 안팎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이하 도쿄전)> 전시회에 실제 스태프로 참여한 나는 내부자로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도쿄전에서 가장 치밀하게 준비한 미션 중 하나는 전시회를 지키는 일, 곧 '방위'였다. 먼저 매일 약 40명, 총 240명의 자원봉사자와 7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여 교대 근무 등의 치밀한 경비 배치 계획을 세우고, 법적 조치도 확인했다. 또 경찰과도 협의했다. 역시나! 전시회 개최 중에 40여 개 우익 단체가 몰려와 가두선전을 하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종군위안부를 조작하고 동상을 상징처럼 만들어 그것을 예술이라며 하며 전시하는 너희는 바보냐, 이봐!"라고 스피커로 떠들어댔다. 우익들은 가두선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녀상 전시를 방해했다. 전시회를 무단 촬영 한다든지, 행사장 앞에서 항의문을 낭독한 뒤 실행위원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아예 티켓을 구매해 갤러리에 입장하는 우익도 있었다. 또 전시회를 찾은 우익을 촬영해 유튜브와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평소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에 대항해 활동하던 방위 담당자는 이들 '요주의 인물'을 식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주의 깊게 감시했다. 현장 밖에서도 각 지역 '카운터 운동[2]'과 연계해 '○○가 부자유전에 간다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들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했다. 혐오 발언과 함께 우익의 시위가 격해지면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 운동도 격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쿄 부자유전에서는 그런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간사이전에서는 마네킹 플래시몹 퍼포먼스도 조용한 카운터로 진행됐다. 도쿄전 방위 자원봉사자들도 혐오 발언을 동반한 우익의 가두선전이나 도발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그보다 실행위원들이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개최지인 쿠니타치시 지역의 시민활동 네트워크와 연계하는 일이었다. 실행위원들은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자유전에 협력할 쿠니타치 시민을 찾아 '예술전 개최를 실현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이를 통해 경찰과 시설, 실행위원과 쿠니타치 시민의 연대로 안전하게 전시회를 개최할 '방위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한편 공안경찰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초기부터 협의해온 이들이 전시회 진행자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전시 첫날 스태프를 가장한 경찰관이 갤러리 내에 무단으로 진입해 직원들이 그를 저지하는 일이 빚어졌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둘째날 오전에는 전 스태프에게 '공안, 경찰이 쿠니타치시청 명찰을 달고 있다'는 정보가 공유되었고 '경찰은 우리 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주의가 전 스태프에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시설 측이 설치한 방범 카메라 18대 중에 경찰 카메라가 3대 포함되어 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교육위원회와 경찰에 확인한 결과 정황이 상당했다. 경찰이 가져가겠다고 한 카메라 3대의 영상 데이터는 예술소홀과 시교육위원회 입회 하에 지우기로 했다. '부자유전'의 다른 이름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연대와 선의, 열정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모였을까? 방위 담당의 핵심 멤버와 변호사는 실행위원회, 경험자, 전문가이므로 경찰과의 사전 절차 등 준비는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실행위원회의 인맥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준비 과정을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에서 했기에 직업이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전시장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나중에 보니 개최지의 시민운동가부터 학생, 재일코리안 등 다양했고, 노숙자와 고령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장 운영은 재미있게 표현하면 '엉망진창'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재일코리안의 요리점에서 매일 배달해준 도시락은 맛있었다. 반드시 '한국 요리'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 도시락이 역시 이 전시회가 '평화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한 미술전임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기도 했다. 도쿄 전시회를 비롯해 그동안 개최된 지역별 <표현의 부자유전> 모두 전국적인 조직이 아닌, 콜렉티브 방식의 운영이었다. 직업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지만, 선의와 열정으로 함께 모여 함께 실천하고, 함께 해산하는 집합-이산 형태였다. 전시 장소 또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공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이나 운영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실천의 의의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이 실천의 첫 번째 의의는 홋카이도대학 현무암 교수가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세이토샤, 202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녀상은 국가 간 대립의 산물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전시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적 연대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실천은 모두 운동 문화의 '친밀권(intimate sphere)'[3] 안에서 '무보수'이자 'DIY(Do it Yourself)', '집단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함께 모여 실천하고 해산하는 집합-이산의 과정에서 가해국 시민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파트너라는 응답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이 실천은 공공 영역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동안 <표현의 부자유전>은 민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 시설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우익이 찾아오기 때문에 경비에 대한 우려로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공공 공간 또는 공적 매체에서 '위안부'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없는 일본의 현실에서 이 실천은 '위안부' 문제를 공공 영역으로 가져오게 한 중요한 투쟁이다. 또한 일본 시민운동 자체의 공공 영역으로의 확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번째로 이 실천을 통해 '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소녀상이 일본에 세워지지 못하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상을 전시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일본 사회의 경우 특정 장소에 건립하는 것보다 전시회 개최를 통해 지역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의 전시회는 도쿄의 실행위원회가 전국 투어를 하는 식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니다. 각지에서 개최될 때마다 지역별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지역의 시민운동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회가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은 행정과 경찰, 우익의 편견과 혐오, 폭력 등에 맞서 나간다. 이처럼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연대의 친밀권이 공공권(公共圏)[4]을 쟁취해 나가고, 피해의 기억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이동하며 '기억의 장소'를 확대해 나가는 실천이 되고 있다. 편집자주 ^ 소환 서명운동 : 당시 대표적으로 활동한 이들이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을 잇는 아이치의 모임' 공동대표인 나카타니 유지 변호사와,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 공동대표 오카모토 유카 공동대표 등이다. ^ 카운터 운동 : '카운터스(counters) 운동'으로도 표현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극렬해진 혐오와 인종차별에 맞서 반혐오, 반차별 운동을 전개한 자발적인 시민 운동이다. 일본 내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끈 주역이다. ^ 친밀권 : '당사자 간 연대’의 형태를 포함한 사랑과 지지의 공간을 의미한다. ^ 공공권 : 국가적 공공권, 공적 공공권, 시민적 공공권 등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언론처럼 비국가적이고 비시장적인 영역으로서의 시민 사회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강제나 배제 없는 대화의 공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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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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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하지 못한 '위안부', 애도되지 못한 기억: 배봉기라는 이름[1] 2025년 3월 10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의 소식이 전해졌다.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고 요구하며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는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가 그녀의 유골함이 손상된 채로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었다는 사실을 담은 사진과 글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온 김신현경 교수는 그동안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침묵을 강제한 구조를 되물으며 배봉기의 삶과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기억하기를 제안한다.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991년 가을, 오키나와의 허름한 숙소에서 한 여성이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름은 배봉기.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었고, 국적도 없이 오키나와에서 살아가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 조선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1975년, 일본 정부에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면서 자신이 오키나와에 '위안부'로 끌려왔음을 밝혔다. 이는 오늘날까지 확인된 가장 이르고,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다. 우리가 '위안부' 운동의 시작점으로 기억하는 1991년 김학순의 증언보다 16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최초 증언자'로 기억되지 않았다. 배봉기는 1914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례원에서 머슴 아버지와 품팔이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민며느리와 보모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함경남도 함흥에 정착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1943년, '여자 소개꾼'들로부터 "일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를 소개받는다. 흥남역에서 출발해 경성, 부산, 시모노세키, 모지, 가고시마를 거쳐 도착한 곳은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 그 '일자리'가 바로 '위안부'였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중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배봉기는 그 참혹한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 투쟁이었다. 미군 점령하의 오키나와에서 그녀는 '무국적 조선인'으로 분류되었고,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그녀는 다시 '위안부'였던 자신을 말해야 했다. 이처럼 '위안부' 피해자임을 가장 먼저 증언했지만, 한국에서 그 '최초'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다. '위안부' 운동 역사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조용히 잊힌 이름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배봉기의 죽음의 의미는 단지 한 개인의 사망이 아니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두 재일조선인 단체, 곧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은 그녀의 유골을 어디에, 누구의 이름으로 묻을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벌였다. 누구의 '죽음'인가,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녀를 '대신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배봉기의 주검을 둘러싼 이 경합은 단순한 장례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살아온 시간 속에 깃든 식민주의와 냉전의 긴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망자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누구의' 유골인가?: 민단과 총련의 유골 소유권 분쟁 198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휩싸였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과 개혁으로 촉진된 글로벌 탈냉전,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운동의 언어로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기생관광과 유신 반대 운동을 벌여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1988년 개최한 '여성과 관광문화'라는 제목의 국제 세미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기생관광'이라 불리던 산업은 한국 정부가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적극 장려한 성매매나 다름없었다. 이 세미나에서 나중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화여대 교수 윤정옥은 오랜 현장 조사와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 정신대연구위원회 설치와 1990년 1월 한겨레신문 연속 기고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 사회 여성운동에 굵직한 흐름을 형성했다. 1990년 11월, 여러 여성 단체들이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사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공개 증언을 통해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를 고발한 그녀의 증언은 이후 전 세계를 향한 연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배봉기도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녀를 돌봤던 총련 활동가 김현옥의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고향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가고 싶지만 고향에도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89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남한 여대생 임수경에게도 관심을 보였으며, 1990년부터 시작된 북일수교협상에 특별한 기대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녀가 1991년 10월 18일 홀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한국 언론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소식을 듣고 오키나와를 직접 찾은 정대협 윤정옥 대표가 전한 부고는 한겨레신문에 짤막한 기사 한 줄로 실렸을 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삶이 아닌, 죽음 이후 남겨진 유골에 쏠렸다. 배봉기의 1주기를 앞두고 총련은 그녀가 생전에 "외국 군대 없는 통일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유언처럼 해석하며, 오키나와에 유골을 남겨두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민단 측에서는 그녀의 조카, 즉 언니의 아들이 등장해 유골을 고향으로 가져가겠다고 나섰다. 두 주장은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사망한 지 닷새가 지나 발견되었기에 사후에 어디에 있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1987년 출간된 『빨간 기와집』, 1989년 인터뷰, 1991년 나온 다큐멘터리 <아리랑의 노래>, 2017년의 <침묵> 속 배봉기의 말들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마음은 단순히 어느 나라에 속하고 싶은지를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고향에 갔는데 집이 없더군요…. 너무나 쓸쓸한 거예요." "가보고는 싶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외로울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고향이라는 장소가 더 이상 안전하거나 따뜻한 공간이 아니게 된 이들에게 귀향이 갖는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봉기를 둘러싼 이념적 해석은 오히려 그녀의 말을 지우는 방식이었다. '포스트식민' 페미니스트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서발턴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망의 부재를 지적한다. 기록된 배봉기의 목소리와 별개로 그녀의 '말'은 양쪽 모두에게 재현되고 대변되는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민단은 그녀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여성'으로, 총련은 '분단된 조국을 거부한 여성'으로. 그렇게 각각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녀는 또다시 침묵하게 되었다. 귀향하지 않은 '위안부', 외면한 한국 사회 배봉기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정치적 맥락은 남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더욱 메말라갔다. 민단과 총련이 벌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감정을 안고 떠났는지에 대한 관심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정치에 남한 사회는 조용히 동조하고 있었다. 물론 1991년 당시 민단과 남한 정부가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남한은 냉전이 빠르게 해체되던 국제정세 속에서 새로운 외교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과 수교를 마친 상태였고, 중국과 수교도 추진 중이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일명 '7·7 선언'과 남북총리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에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 진출을 꾀하는 일본과는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었고, 북한 역시 사회주의 체제가 허물어지는 속에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을 타개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1991년 1월 북일수교회담이 열렸고, 이후 2년여 동안 총 8차례 회담이 계속됐다. 특히 북한은 1992년 6차, 7차 회담에서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배봉기의 죽음과 1주기 즈음은 '위안부' 문제가 북일 외교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총련은 이 정치적 흐름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고, 반대로 민단은 이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배봉기의 유골을 두고 민단이 조카를 내세워 법적 소유권을 주장한 것도 단순한 가족의 의지라기보다, 하나의 정치적 제스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한 사회와 정부는 이 모든 일에 거의 침묵했다. 배봉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1975년 그녀의 삶이 처음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와 비슷한 침묵이었다. 다만 1975년의 침묵과 1991년의 침묵은 성격이 다르다. 1970년대는 냉전의 강고한 시기였고, 총련과 관련된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일은 사실상 금기였다. 반면 1991년의 남한은 탈냉전과 민주화를 겪고 있었다.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비핵화 선언 등 남북한 화해 무드를 강조하던 그 시기에는 오히려 민감한 이슈를 피하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배봉기의 죽음도 그렇게 화해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덮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침묵은 또 다른 배제였다. 제국의 신민으로 동원되어 귀향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한 여성의 생을, '화해의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전의 유산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었을까. 이 무렵,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남한 사회에서 본격적인 의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 한국, 북한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2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북한에서 열린 3차 토론회는 남한 주요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이목을 끌었다. 남북한, 일본, 미국, 독일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했고, 북한은 이를 민족문제로 정의하며 남북의 공동 대응을 강조했다. 일본 참가자들은 가해국의 시민이자 천황제 사회의 피해자로서 연대의 주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장에서도 배봉기처럼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해 12월 6일, 배봉기의 49재가 치러진 날, 김학순이 도쿄지방재판소에 '위안부' 피해자로는 최초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날, 일본과 한국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가 역사화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시간의 병치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중심에 놓고 기억해왔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국가 간 관계 속에서 기억을 조직해 왔지만, 그 국가 경계 바깥에서 살아가다 조용히 사라져간 이들에게는 쉽게 시선을 주지 못했다. 배봉기의 죽음은 그 틈에 존재했다. 제국, 냉전, 분단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생을 꾸렸고, 그 경계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한 복합성과 감정의 결은 당시 사회운동 안에서도, 정부의 대응 안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 선뜻 답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다. 기억인가, 재소유인가 그러나 지금, 배봉기의 유해는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민단체 '배봉기의 평화'는 2025년 3월 10일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사진과 글에서 그녀의 유골이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함이 손상되어 흙과 섞인 채로 방치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그녀는 어디에 묻혀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기억으로 그녀를 말하려 하는가. '배봉기의 평화'는 '일본군'위안부' 최초 증언자 배봉기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며 '배봉기의 유해를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자'는 요구를 중심으로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다시 호명되는 일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녀가 '최초의 증언자'로 불리는 것은 소중한 인정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호명이 국가주의적인 서사로 제한될 가능성을 경계하게 된다. 더욱 성찰해야 할 것은 배봉기의 증언이 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그녀의 말은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을 지워버린 것은 바로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국가 중심의 기억 체계였다. 이 체계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녀를 다시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하는 일은 애도를 제도화하고, 기억을 다시 권력의 틀 안에 가두며, 그 기억을 가능하게 했던 사유와 노동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배봉기라는 존재를,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응축된 장소로 바라보아 왔다. 그녀가 품었을 복합적인 감정들—꿈에서는 자주 갔지만,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고향에 대한 감정—을 가능한 한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유골을 어느 일방이 '가져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시는' 애도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키나와의 이웃들과, 한국의 사람들이, 국가의 대결 구조를 넘어서 그녀를 기릴 수는 없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배봉기를 다시 기억하는 일이, 단지 '국가가 인정한 최초 증언자'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녀의 말이 왜 들리지 않았는지를 묻고, 그 침묵을 강제한 구조—식민과 냉전, 그리고 지금까지 '위안부' 운동을 감싸온 국가주의적 해결 틀 자체를 되묻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애도는 체제와 제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이제 다른 방식의 말하기, 다른 감각의 연대, 다른 시간의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 편집자주 ^ 이 글은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한국여성학』 제37권 제2호, 2021)라는 제목의 논문의 Ⅴ장 ‘주검을 둘러싼 경합: 지워지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웹진 『결』의 목적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DOI: 10.30719/JKWS.2021.06.37.2.203) 또한 이 논문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김은실 엮음, 휴머니스트, 2024) 에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라는 제목으로 수정, 보완되어 재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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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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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 제주4·3사건 여성 생존자 담은 다큐 <목소리들> 제작자 김옥영 7년 7개월 동안 공식적으로만 3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가폭력 사건인 제주4.3사건. 부족하나마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이뤄지고 해마다 희생자를 기리는 추념식이 열리지만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거대한 피해가 있다. 삼중 사중의 참혹한 고통과 피해를 겪고도 침묵해야 했던 제주 여성들의 삶이다. 다큐 <목소리들>은 처음으로 가려져있던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결국 세상 속으로 불러내 위로한다. 이 여정의 전 과정을 함께 한 제작자 김옥영 피디를 만났다. 영화 <목소리들> 감독 지혜원 제작 김옥영 | 다큐멘터리 | 89분 | 개봉 2025. 4. 2.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었다.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공산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섬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 질렀다. 제주4.3사건 피해자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오래 알려지지 못했다. <목소리들>은 한 헌신적인 제주 4.3 연구자의 길을 따라가며,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제주 여성들의 경험, 침묵 속에 잠겨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Q : 반갑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할 때부터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해 오셨는데, 오늘은 영화 제작자로 뵙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로 말씀 시작하겠습니다. 🧶 김옥영 : 이번에 제주4·3사건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을 제작하고 각본을 맡은 김옥영입니다. 30년 정도 여러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는데, 주로 KBS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뤄왔습니다. 2010년부터는 ‘스토리온’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해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을 다루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Q : 그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통해 반민특위, 5·16군사쿠데타, 10월유신, 5·18민주화운동, 12.12군사반란 등 한국 현대사를 가르는 굵직한 사건들을 대면해 오셨습니다. 이번에 제주4·3사건(이하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을 기획하고 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 김옥영 : 2005년 4부작 <8.15의 기억>을 제작할 때였어요. 현대사 주요 사건의 쟁점을 실존 인물 인터뷰를 통해 조명해보는 작품으로, 처음으로 구술사를 다큐에 도입해 주목받았었죠. 마지막 4편 주제가 ‘해방공간의 이념 대립’이었어요. 그때 서북청년단 일원으로 부산철도노조 파괴에 참여한 분과 철도 노조원이었던 분을 찾아냈어요. 나레이션 등 제작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두 분의 인터뷰만으로 당시 상황을 드러내기엔 무언가 미진해 당시 이념 대립의 희생양으로 4·3사건에서 남편을 잃은 한 할머니를 출연시켰어요. 근데 할머니는 4.3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그저 모른다는 말만 하셨어요.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라는 말만 하며, 4·3평화공원 위령제단 희생자 명패로 가득 찬 벽 아래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강력해서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Q : 시작은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 김옥영 : 아니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졌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0년 1월 공포, 2021년 2월 전면 개정안 국회 통과. 이하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이상하게 연결되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다 몇 년 전에 제주 어느 마을에서 지내는 4·3위령제 르포 기사를 접했는데, 위령비에 적힌 여자들의 이름이 모두 누구의 처, 누구누구의 여...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는 대목에서 딱 멈춰지더라고요. 왜 저 여자들은 이름조차 남길 수 없었나 생각이 들면서 자동적으로 그 할머니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만일 4·3 다큐를 하게 되면 제주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 그때였어요. 그 뒤로 4·3사건에 대해 조금씩 공부했죠. 2021년 여름 휴가 때는 제주를 찾아 숙소와 도서관만 오가며 자료에 빠져 지냈어요. 사례사례마다 기가 막혀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22년 제주4·3평화재단의 제작 지원 공고를 보고 기회구나 싶어 지혜원 감독을 설득해 참여를 했습니다. 뒷모습으로, 침묵으로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Q : 김은순, 김용열, 고정자, 홍순공 네 분의 할머니와 중간중간 연구자이자 안내자로 제주4·3연구소의 조정희 연구원이 등장하는 영화 <목소리들>은 "침묵이 여성들의 주요한 기억방식이었다"는 고발 같고, 절규 같고, 아우성 같은 조은 선생님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에 다가가겠다는 영화의 의지와 선언 같았습니다. 🧶 김옥영 : 2022년 가을에 김경만 감독의 다큐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가 나왔어요. 4.3 당시 형무소로 끌려갔던 수형인 할머니들이 70여 년이 지나 청구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인정받은 내용을 담은 영화인데요. 재판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들이 겪은 삶을 인터뷰로 담아내고 그 사이사이 제주의 풍광을 심리적이고 은유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형식이 저희 기획과 똑같았습니다. 심지어는 할머니 다섯 분이라는 숫자까지 같았죠.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런 형식적 유사성은 후발주자에게 극히 불리합니다. 그렇다고 여성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좀더 ‘젠더’적으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Q : 그동안 4·3사건 피해에 대한 조사가 있었지만 젠더적인, 그러니까 성폭력 등의 피해에 대한 증언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 김옥영 : 제주에 소문은 무성했습니다. ‘그랬다더라’는 이야기는 실로 많아요. 문제는 직접 증언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다큐라는 장르가 ‘사실’을 다루는 장르인데 직접 증언이 없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래서 접어야 하나 이러고 있을 때 김은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지혜원 감독은 당시 출연자를 확정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들을 만나보고 있었는데 토산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젊은 여자들이 모두 끌려가 죽었을 때 오직 혼자 살아돌아온 할머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거죠. 그런데 이 할머니가 칠십 평생 당시의 일을 말씀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4.3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 그날의 일도 증언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고 해요. Q :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김 할머니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보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 김옥영 : 할머니가 그러니 아드님이 촬영팀의 접근을 무척 경계하셔서 그때도 그저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간 거지 무슨 본격 촬영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당시 할머니들을 만날 때 테스트 촬영 겸 촬영감독을 동반하고 다닌 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어요.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며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떠는 그 모습을 찍어왔는데 영상을 프리뷰하는 순간, 강한 확신이 왔습니다. 이 할머니만 계시면 직접 증언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 말하지 못하는 /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이 직접 증언보다 더 강력한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은순 할머니를 발견한 후에 이 할머니를 중심으로 초기 기획안을 전면 재구성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 할머니의 휴먼 다큐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특정한 스토리가 아니라 4·3 당시 제주 여자들이 보편적으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김은순 할머니 외에 각각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할머니들을 복수의 주인공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잡혀간 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눈물 흘릴 겨를도 없이 ‘짐승처럼 산 어머니’의 기억을 간직한 김용열 할머니, 철창에 온몸이 찔린 채 살아남은 후유장애인으로 원치않은 결혼을 하고도 평생 물질을 하며 양가를 부양해야 했던 홍순공 할머니, 도피자 가족이 겪어야 했던 설움을 안고 소녀가장으로 안 해본 일 없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온 고정자 할머니가 그렇게 선택된 분들이었어요. 생존 이후가 더 고달팠던 여자들은 왜 피해자가 될 수 없었는가 Q :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셨던 홍 할머니가 시부모님 제사상을 차리면서 건너방에 함께 준비한 친부모님 제사 이야기를 할 때 애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게 되는데요, 영화 <목소리들>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자 성취는 할머니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그 피해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부분인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조정희 연구자가 강조한 말이기도 한데, <목소리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재단해왔는지를 드러냅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4.3희생자 범주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수형인, 후유장애자 이 네 가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성희롱을 당했든, 성폭력을 당했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든, 그 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해도 다 해당이 안 됩니다. 더욱이 여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어온 고통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관습적으로 의당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수치심 때문이기도 했고, 한 동네에서도 누가 ‘나쁜놈’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4.3사건 당시 사라진 수많은 남성 사망자의 빈 자리를 여성들이 메꿔 왔습니다. 산의 무장대로부터 주민들을 격리하기 위해 마을을 둘러 성담을 쌓았는데, 남자들이 없으니 여자들의 몫이었어요. 보초도 서고 군사훈련도 받았어요. 남자들이 없는 공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마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모두 여자들의 일이었어요. 즉 제주 역사의 한 축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딛고 여자들의 의지와 노동으로 일구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제주 여성들이 죽을 힘을 다해 힘겹게 밀고 끌고 온 시간을 헤아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치유라도 가능할 겁니다. Q : 그 과정에서 조정희 연구자의 안내 덕분에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김옥영 : 이 다큐는 증언을 하지 않는 김은순 할머니를 중심에 놓다보니 일반적인 방식과는 좀 다르게 스토리텔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김 할머니가 그날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놓고 그 의문을 다른 사례들을 통해 추론해가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이른바 논증구조라고 하는 틀을 가져온 겁니다. 사건의 진행을 주욱 따라가는 방식이 아닌,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구축해가는 이런 구조는 논리의 단락과 단락 사이를 잘 연결해주지 않으면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 이야기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지거든요. 그래서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안내자로 조정희 선생을 모셔왔어요. 오랫동안 4·3사건 속 여성들의 경험을 추적해 왔던 연구자였기에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셨어요. 특히 후반부에 조 선생님이 말하는 "제주의 할머니들은 4·3의 피해를 어머니, 아버지, 오빠 등 가족의 죽음으로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기억들은 혼자서 감내해야 할 공포와 수치심이 돼 버렸다. 공허한 눈빛, 긴 한숨, 말라버린 눈물과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여성의 피해를 4·3이라는 국가폭력의 피해 범주에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볼 때"라는 의미의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항상 부차적인 존재였던 여자들을 드러내는 ‘1mm’의 힘 Q : 4·3사건에서 묻혀져 있던, 더 정확히는 지워져 있던 여성의 역사를 드러내는 작업에 남다른 사명감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 김옥영 : 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기획안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언급했는데요. 전쟁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에서도 여자들의 이야기는 후일담이 나오지 않아요. 4·3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건에서 여자들은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 당해 왔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시대의 움직임이 제게 좀더 직접적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요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래 전 통곡하던 할머니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고, 여성의 이름이 지워진 위령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허용하지 않았다면 제가 용기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소수라도 처음에 한 사람이, 그 다음에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내어온 덕분에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진전돼 왔잖아요. 제게 영화를 만드는 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누가 봐주든 그렇지 않든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 들어주기를, 더 많은 목소리가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관행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 정한 원칙이 있어요. 대신 제게 중요한 건 ‘1mm’예요. 역사를 1mm씩이라도 전진시킬 가능성에 제가 하는 일의 의미가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별다른 흔적이나 파장을 남기지 못할 수도, 때로 1cm를 후퇴할 수도 있지만 1mm의 힘으로 전력투구를 해요. 그것이 영화나 다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변화를 일으키는 시작이기도 하고요. 놀랍게도 요즘 그 믿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며 반짝반짝 빛나는 2030 여성들을 보면서요. Q : 영화로 다시 돌아오면, 안개와 거친 파도 등 제주의 풍경을 다룬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부감으로 보여주는 제주의 밭담은 특히 놀라웠는데요, 그동안 변덕이 심한 기후에 적응해온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빚은 장관으로 알았다가 사실 여성들의 땀과 눈물로 쌓아 올려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김옥영 : 제주의 풍광 하나하나에도 기억이 녹아 있는 거죠. 제주의 밭담이 성담으로 변하고 성담이 밭담으로 변한 그 과정은 사실 스터디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한 사실이었습니다. 제주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사연이 바로 이 밭담이 제주 여성의 표상으로 여겨지게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풍경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타이틀백에 나오는 안개 자욱한 ‘잃어버린 마을’도 그런 곳이에요. 제주에서는 4·3 때 폐허가 된 후에 복구되지 못하고 버려진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하는데 중산간 지역에 꽤 있어요. 4·3의 슬픈 운명을 이곳만큼 오롯이 전하는 곳도 없을 겁니다. Q : 포스터에도 이미지가 있는데, 할머니들이 겪은 당시의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부분도 눈에 띄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와 ‘미투’ 여성들을 담은 박문칠 감독의 영화 <보드랍게>가 연상되기도 했고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 김옥영 : 다큐는 현장을 다루는 것이 기본인데 역사 다큐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라서 현장이 없다보니 늘 그림이 부족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약화 형식의 그림체를 쓰기가 싫었어요. 4.3이라는 비극적인 사건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다가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의 목탄 드로잉을 보게 되었는데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드로잉 화법으로 애니메이션을 하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러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미술 작가 한 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황선숙 작가신데요. 저는 그분에게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상황 설명용으로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의 말 속에 담긴 정서를 확장해주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구체적 상황 묘사보다 ‘반추상적 표현’을 요청했습니다. 황작가님은 다큐 삽화가 처음이라 어려워하는 지점도 있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면서 작업한 결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4월 3일, 동시에 전국 132개 극장에서 수천 명 관객과 만나다 Q : 이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연결된 작업을 한 적은 없으셨어요? 🧶 김옥영 : 2008년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있을 때 김동원 감독의 <끝나지 않은 전쟁>에 작가로 참여했어요. 한국을 비롯해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 생존해 계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인터뷰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일본이 점령하면서 ‘위안부’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발굴해 소개했어요. 당시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이셨죠. Q : 할머니, 가족들도 영화를 보셨을 텐데, 반응은 어떠셨을까요? 🧶 김옥영 : 전주국제영화제 월드프리미어 상영 때 김용열 할머니를 따님이 모시고 왔어요. 이분은 어릴 때 야학이라도 다녀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건 ‘판사라도 되어서 4.3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던, 결기있는 할머니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GV를 하면서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우시는 겁니다. "어머니가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서 평생 4.3 이야기를 못하고 살았는데 영화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면서 말이죠. 관객 모두가 함께 울었습니다. 11월에 있었던 제주4.3영화제 때는 외지와는 달리 4.3 당사자 분들이라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독과 저는 좀 긴장했어요. 그런데 상영이 끝나고 장내 불이 켜졌을 때 그렇게 까칠했던 김은순 할머니의 아드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에게 씩 웃어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김은순 할머니와 홍순공 할머니는 너무 편찮으셔서 못 오셨고 가족분들이 오셨는데, 다들 ‘고맙다’고 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영화 중 ‘4·3 토산실상기’를 쓰셨던 김양학 할아버지는 영화가 나오기 전에 언제 볼 수 있냐고 계속 전화로 물어보셔서 난감했는데 이때 오셔서 마침내 영화를 보셨죠.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 Q : <목소리들>은 지난 4월 3일 전국 132개 극장, 165개 스크린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기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김옥영 :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라는 좀 특별한 방식으로 개봉했습니다. 극장에 의존하는 기존 배급 방식이 아니라 관객들이 직접 티켓을 공동구매해서 극장을 여는 방식인데요. <수라>(감독 황윤), <괜찮아, 앨리스>(감독 양지혜) 같은 영화들이 이미 같은 방식으로 개봉해 성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몇 달 전부터 천천히 상영회를 누적해오다가 관객수가 4,000~5,000명이 되었을 때 개봉한 것이라 저희들과 조건이 달랐어요. <목소리들> 영화의 의미를 살리자면 4월 3일 개봉을 해야 하는데 그걸 결정할 당시가 겨우 두 달 전이었어요. 그럼에도 관객추진단을 모집해 4월 3일 전국에서 한꺼번에 100개의 극장을 열겠다고 선언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안 되면 어떡하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개봉 지원을 받지 못해 포스터, 웹자보, 보도자료 등도 배급사와 제가 직접 만들어야 했고, 관객추진단 모집하고 홍보하고 지원도 해야 하고, 정말 정신없던 두 달이었어요. 그런데 3월 14일 103개 극장이 확보돼 목표를 돌파했고, 4월 3일 당일은 자체 개봉 극장까지 합쳐 132개 극장 165스크린을 달성하게 된 거죠. 하루 사이 8,084명이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은 짜릿했습니다. 정말 관객이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재가 다가올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Q :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다큐 <목소리들>은 피디님께 어떤 의미인지, 마지막 질문으로 여쭙습니다. 🧶 김옥영 : 지난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우리 사회에 거대한 공명을 일으켰잖아요.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목소리들>을 보고 비로소 4.3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젊은 관객들이 많아 이 영화를 만들기 참 잘했다 싶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개봉이라는 걸 처음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고, 내용적으로는 여성을 통해 4·3사건을 조명한 첫 번째 영화를 저희가 만들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 번 밖으로 드러난 목소리는 어떤 외압이 있지 않는 한 쉬이 지워지지 않아요. 저희 영화가 뒤를 잇는 작품들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극장 개봉은 마무리됐지만 공동체 상영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더 많이 봐주세요. 우리의 현재가 미래에는 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현재도 미래를 도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 손정미 인터뷰이 : 김옥영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5년 4월 23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