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2024년 좌담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2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김수용 :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받고 일본으로 귀환한 전범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이하 중귀련)를 만들어 평화운동과 전쟁 반대 운동을 해요. 그렇기에 '인죄'와 '탄백'은 전범 재판을 받은 시기뿐 아니라 일본 귀환 이후 이어지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증언, 평화운동을 시야에 넣어서 논의해야 합니다. 중국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한다는 원칙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도 양형을 결정하는 과정은 치열했다고 해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현장 의견과 관대해야 한다는 중앙 의견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생각대로 결정된 것 같아요. 사형과 무기 징역이 없는 관대한 처벌로요.  🧶 조시현 :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던 시점의 증언과 이후 2000년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던 중귀련의 두 분에 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들의 자필진술서가 남아 있다면 2000년 법정 당시의 증언과 대조해 보고도 싶고요. 교화 목적으로 작성된 자필진술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쓴 전범이 가해자로서 '당사자성'을 획득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 것 같아요. 진술서를 쓴 전범의 귀국 후 활동이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보려면 개개인의 삶의 궤적을 알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래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진술서를 쓴 900여 명이 전부 중귀련 회원이 되었나요?   '중귀련' 결성 경위와 활동 내용  🧶 김수용 : 다는 아니에요. 찬조 회원까지 합해서 1996년 2월 1일을 기준으로 중귀련 회원은 1258명이었어요. 귀환 1년 후에 중귀련 설립을 위해 전체 회원 명부를 작성했다고 해요.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 안에서 조직을 만들어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전평화, 중일우호를 위한 활동을 하자는 내용에 동의했어요. 그래서 암묵적으로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명단을 작성했지만 활동 방향에 대한 이견(경제적 차원/정치적 차원)으로 실제 조직률은 50~55%를 넘지 않았고, 회비 납부율은 40~50% 정도였다고 해요. 🧶 심아정 : 중귀련 소식지 계간 『중귀련』은 1997년도부터 발간됐죠? 1997년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창간호가 발간된 건데, 무려 7천 부나 팔렸대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중귀련이 자위대 해외 파병 반대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을 시작한 건 1992년부터라고 해요. 확실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이후인 거죠. 중귀련 조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증언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성폭력 문제에 관해 가해자가 공개된 장소에 직접 나서서 증언하는 문화는 없었어요. 2000년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도 2000년 법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당시 후지이 다케시 선생은 중귀련 사람들의 탄백, 죄를 고백하는 말들이 상정하는 대상이 '중국 인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해요. 자필진술서에 돼지 콜레라로 묻어버린 돼지나 장티푸스에 걸린 어린 아이를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묻어버렸다는 것까지 전부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일일이 나열하며 이야기했다고 정말로 그런 존재들을 인죄의 대상으로 생각했을까… 이들의 인죄는 추상적인 중국 인민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전후에도 여전히 '일중우호',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그 부분이 중귀련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이죠. 그러니까 너무 중국과 일체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이후에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귀련 내부에서 해석이 갈렸지요.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중국의 뜻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옳다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조직이 분열됐다가 전범관리소 직원들의 설득과 두 단체의 노력으로 다시 결합한 일도 있었어요. 본국 귀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았으면 '정말 미안한 거 맞나?' 하고 의심할 수 있을 텐데 평생 증언하고 반전운동을 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정말로 미안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중귀련 활동을 통해 과거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형벌과 사죄가 평생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장은애 : 진정성을 의심한다기보다 진술서 형식의 고백이 어떻게 반성이나 성찰의 계기로 작용했을까 라는 질문이 해소되지 않아요. 어떤 전범이 귀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인에겐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며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어 기쁘다고 이야기할 때 누가 그것을 받아주고 용서해줬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런 대목에서 역시 섬뜩해요. 아무리 진술 과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런 식의 발언은 비위가 좀 상하네요. 근데 또 중귀련 활동을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 김수용 : 이 사람들도 진술서에서 죄를 인정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해요. 법정에서도 직접 피해자들을 대면하거든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한 번 만나고, 그 전에 자기들이 죄를 지었던 지역들을 방문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증언을 추가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귀환 뒤 중귀련도 결성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사죄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일례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류롄런(劉連仁)이란 중국인이 일본이 패전한 줄 모르고 14년 동안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건이 중귀련 회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중귀련 회원 중에 제59사단이 많았어요. 일명 '토끼몰이'라고 하는, 노동자 강제동원에 관한 일을 했던 부대였는데, 자신들이 잡아다 일본으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중국인이 눈앞에 나타난 거잖아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귀련은 전시에 강제동원됐다가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속 반성해 나갔던 게 아닐까요. 저는 중귀련의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들을 변호하게 되네요.       중국의 전범 재판과 자필 진술의 진정성 🧶 장원아 : 저는 문학연구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진술서에서 진정성을 따질 수 없지 않을까 해요. 애초에 진짜 형식만 볼 수 있는 글이라 '정말 반성했는가?' 하는 건 이 자료로는 파고들 여지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수용 : 저는 중귀련 분들의 진정성을, 귀환 이후 행동과 삶을 보면서 의심하지는 않게 됐어요. 하지만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자국민에게 “이 사람들을 용서해야 돼. 이들을 우리가 인간으로 개조해서 일본에 돌려보내야 해”라고 한 거잖아요. 그건 개인이 용서할 자격을 국가가 선취한 거라고 할 수 있잖아요. 화해도 국가가 시킨 면이 있고.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리고 고민도 돼요. 중귀련 분들이 전범관리소 소장, 부소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과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단 말이에요. 일본에 전범관리소 직원들을 초대도 하고, 또 중국에 가서 다시 만나기도 해요. 끝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관리소 직원들을 스승처럼 대하거든요. 근데 들여다보면 일본 전범들이 제일 먼저 만났던 피해자가 관리소 직원들인 거예요. 관리소 직원 중에는 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관리소에서 대면하기도 해요.  처음 중귀련에 대해 공부할 때는 관리소 직원과 수감된 전범들을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일본인 전범들이 가장 먼저 만난 피해자가 전범관리소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 사람들이 서로 갈등도 해요. 일본인들은 '나는 전범이 아니다.' '나는 소련에서 포로였는데 왜 전범 취급을 하느냐. 빨리 나를 풀어줘라.' 하고, 관리소 직원들은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나보다 더 좋은 밥을 먹여가면서, 정말 찢어 죽여도 모자랄 사람들을 우리가 이렇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데, 저렇게 자기들은 포로라고 막 난동 부리는 것을 봐줘야 되는가'라고 하고. 그래서 차라리 이러느니 한국전쟁 의용군으로 가겠다고 한 직원도 있었죠. 한편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쩌면 제일 먼저 화해한 피해자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화해와 연대 이런 말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 안에서 이들은 화해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요. 그래서 아직도 너무 복잡한 느낌이에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기도 힘들고요. 선생님들의 말이 뭔지는 알겠어요. 이걸 보면 저도 되게 기괴해요. 그래도 이들의 과정을 아니까 '그래, 이때는 이 정도의 인식이었구나' 하면서 그 의도가 의심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너무 몰입해 있나 봐요. 🧶 심아정 : 이 자료집은 진술서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문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재판받기 전에 진술서를 다 썼고, 그래서 1955년에는 연극 같은 걸 하면서 나름 문화생활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이 뭔가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집단 치료 심리극 같이 자기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역할도 맡아 공연을 하는데, 연극 제목을 보면 '일본군에 의한 강간과 고문'이에요. 그러니까 강간을 죄라고 인지를 한 거죠. 근데 강간당하는 여성도 자기들이 연기해요, 농부의 아내라던가. 이런 내용이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죄책』에 나와요.  김수용 선생님 말대로 섣불리 해당 시기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전 생애를 통해서 이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귀환 이후 이들이 앞다투어 내는 수기가 있잖아요? 후지이 다케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 '가해자들의 미투'라는 표현을 썼어요. '나도 잘못했어, 나도 잘못했어' 이런 식으로 계속 병사들이 수기를 내는데, 저는 처음에는 정말 대단하다 했지만 이렇게 경합하듯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해 행위를 드러내는 방식에 도대체 누구를 향한 말이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가? 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기도 했어요. 아까 나온 얘기처럼 국가가 용서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남자들(전범과 관리소 직원들) 사이에 생긴 화해의 무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또 어디 있지?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정말 복잡했어요. 처음에는 긍정적인 인간의 변화를 촉발한 어떤 계기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데, 전범관리소 내에서 연극을 하는 상황을 읽고 나니 또 한편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러니까 연극 무대에 올라가 각각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완곡한 우회로를 전혀 쓰지 않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가해 행위에 대한 인정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진술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진술의 시간 이후에 나온 관련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체제와 진술 형식, 말하기의 이면 🧶 이슬기 : 심아정 선생님이 말한 위화감이 사회주의 국가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크다 싶어요.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이고 낯설어 더 이상하고 기괴하게 다가온다는 거죠. 저는 진술서를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약간 익숙한 지점도 있었어요. 인민재판에서의 말하기 같거든요. “내가 이걸 잘못했고, 이걸 잘못했고…”라고 말해야만 인정해주는 것, 뭉뚱그려 표현하면 “네 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구나”라고 하는 게 사실은 북한이나 북베트남, 중국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이 전쟁 이후에 자본주의자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때 썼던 방식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의 말하기는, 이게 정말 진심이냐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이렇게 말하도록 했던 분위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것은 다른 체제, 사회주의 인민재판의 성격과 연결돼 있어 지금 우리에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요.  🧶 김수용 : 공감되는 말씀인 게 이 시기 중국에 있었던 '삼반오반운동'이라는 인민재판 형식의 반부패 운동과 그 형식이 거의 같아요. 어떤 잘못을 얘기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증인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얘기하고, 그 반론을 듣고 자신의 진술을 다시 수정하는 자기비판의 형식이죠. 따라서 탄백인죄는 특별한 전범 정책이라기보다 중국이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만든 포로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일들이라서 심아정 선생님이 말씀하신 위화감은 사회주의 정치운동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니까요. 🧶 조시현 : 중국의 전범 재판에서 탄백과 인죄라는 명목으로 자아비판을 하는 것은 진술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민 또는 당국에 투항, 즉 몸을 맡긴다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죽어 마땅하니 재판의 처분이나 조치에 순응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범 재판 구상에서 핵심적인 기둥이겠구나 싶고, 이게 관대한 처분과 연동되겠다 싶습니다.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2024년 좌담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3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국제법의 맥락에서 중국의 전범 재판 읽기 🧶 심아정 : 국제법의 맥락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전범 재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읽기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진 방식일텐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전범 재판 사례는 전쟁 범죄나 용서와 화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시현 : 국제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단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포로를 귀환시켜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국제사회에서 1949년 출범한 '신중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국가들이 많았고, 연합국의 정식 일원도 아니었고, 또 일본과 정식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본군 포로들이 억류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한 압박이 있었는데, 당시 서구에서 얘기했던 국제법이나 인도주의를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보면 군인들 대상 교육에 국제인권법, 인도주의법의 핵심이 다 담겨 있었고, 오히려 더 나아간 부분도 있어요. 그중 하나가 강간을 금지하는 것을 중시했던 점이에요. 아까 여성의 자리가 어디에 있냐고 말씀하셨지만 공산군들은 강간을 주목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흔히 서양에서는 제1차 대전부터 강간이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지만 저는 대명률이나 당나라 법률에서와 같이 동아시아에서는 전근대 시대에 이미 강간을 중요 범죄로 취급하고 법률로 처벌해왔던 전통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런 전통은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간 방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강간=나쁜 행위'라는 규범 인식은 이미 있었고, 병사들한테도 다 주지가 된 사실이잖아요. 그런 법의식과 자기 행동과의 엄청난 괴리가 있는데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죄의 인지 과정에서 과연 그런 괴리가 바뀌어 나갔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면은 이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음으로 김수용 선생님이 제기한 전범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요. 저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있고 그 다음에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인민(people)이라고 얘기해 볼 수 있을 텐데, 인민이 만든 게 나라니까 국민 주권적인 관점에 따르면 재판소에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국가가 만든 재판소에. 문제는 '공산 정권'이 갖고 있는 사법 체제에서 재판을 받은 거잖아요. 아직 국교가 회복되지 않는 단계에서. 어쨌든 일본이 봤을 때 중국은 국가로 승인 받지 못한 거죠. 국가가 아닌 사람들이 일본군을 전범으로 재판했고, 그 전범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요. 당시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을 전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환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고 자국민이니까 당연히 인도적으로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범 재판은 꼭 국가재판소만 하는 거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중국 인민 일부가 적어도 국가로서 인정을… 그들이 세운 정부와 법원이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 법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재판을 했잖아요. 그것은 결국 인민들에 의한 처벌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정당화 근거를 찾는다면 그렇게 얘기해 볼 수 있겠죠. 중국도 전범 재판을 했다는 것은 국제법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해서 실천에 옮긴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텐데, 전범을 교육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국제법 법전 어디에도 전범 교육에 관한 내용은 없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교화형이라는 기본적인 형벌 사상을 갖고 있죠. 그걸 전범한테 투영하니 이런 작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국제법에서는 전쟁 포로를 붙잡아다가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세뇌 교육을 해도 된다는 말은 없어요. 이건 오히려 심한 경우 전쟁법 위반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죠. 그러니까 중국 정부는 국제법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반 혐의라고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국제법을 조금 더 발전시킨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범자의 범죄행위를 처벌해야한다는 게 전쟁 범죄 처벌 사상인데 사람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 그야말로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엄청나게 새로운 철학인 거예요. 전쟁 범죄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사죄의 의미나 용서 등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 있죠. 🧶 김수용 : 중귀련 회원 대부분이 소련에서 5년간 있다가 중국으로 넘겨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소련에서는 노동을 통한 교화였어요. 독일군 포로, 러시아 혁명에 반대했던 반혁명자, 일본군 포로들도 그 교화의 대상이었는데, 강제노동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해요. 열악한 환경이나 추위에 의한 사망도 많았고요. 그래서 소련에서 시련을 겪다가 귀환한 사람들의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의 대표적인 '피해서사' 중 하나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이송된 일본인 전범들은 시베리아 억류자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6년간은 교육, 교화를 받은 거죠.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들과 시베리아 억류 경험만 있는 사람들의 귀환 이후 행보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말하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죠.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시베리아 경험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일소중립선언을 위반한 소련의 잘못이고,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관동군특종연습' 같은 준비를 하며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했기에 일소중립선언 위반이 소련의 일방적인 잘못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따라서 자신들을 완전한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고 해요. 피해자 서사와 결이 다른 그 부분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의 개조와 사죄 🧶 이슬기 : 사회주의 인간상에서는 집단을 중시하고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까닭을 인간이 어떤 구조에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본다고 가정한다면 전범들의 행위를 개인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라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즉 개개인의 죄로 접근하지 않고, 각각의 전범은 일본이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 개개인이 저지른 죄를 밝힘으로써 일본이라는 전범 국가가 저지른 죄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이들 전범에게 사상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전범들을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거잖아요. 이들의 자필진술서를 볼 때 위화감을 느끼는 까닭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나와 분리된 과거의 나에 대해 비판을 수행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할 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는데, 예외적으로 이번에 우리가 본 중국의 전범들의 경우 성공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중귀련 활동을 보건대 인죄가 단순한 요식 행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 귀환 후까지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어쨌든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저도 흔치 않은 성공 사례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난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원인을 생각해보면 수형 생활 이후 전범들이 중국을 떠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수형 생활의 기억을 가지고 계속 살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만약 중국에 계속 머물면서 문화대혁명을 겪고 중국인들처럼 어려움을 겪었다면 전범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아까 김수용 선생님의 발언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일본 전범의 가해자성을 생각할 때 자필진술서를 쓰던 당시가 아니라 이들의 '전생애를 통해' 중귀련의 활동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처음 진술서를 작성할 때 '말 못할 살인'이 있었다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니까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은 살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드러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명령권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전쟁과 죄책』에 언급된 사례 중 전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미 점령 하의 일본에서 미군에 의해 일본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강간 피해자들이 '나를 강간한 미군 병사를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다'라면서 원한을 토하는 것을 듣고 공포심을 느낀 명령권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포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 자기가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 그래서 이제까지는 나는 명령권자였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운운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급급해서 피해자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들은 것을 계기로 탄백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건 자신이 가진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자백도 해요. 이렇게 서술이 달라지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진술서를 읽으면서 파악했듯이 처음에는 가해 사실을 그저 병렬적으로 나열하잖아요. 가해 사실을 단순히 병렬했을 때는 피해자의 원한에 대한 상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다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들이 일본에 돌아간 뒤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계기로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 방문이에요. 그 대목에서 제게 시각적으로 남은 강렬한 장면이 있어요. 방파제 폭파를 명령한 고위급 관료가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폭파로 사망했어요. 그런데  그 고위급 관료가 폭파를 명령한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갔더니 400~500명이 대기하고 있더래요. '우리를 죽인 일본 사람들이 온다' 이러면서요. 빨간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중국인들이 멀리서 보이더래요.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죽였던, 혹은 죽이라고 명령했던 어린이나 여자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오른 적도 없었고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는데, 멀어서 얼굴 하나하나는 보이지 않지만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 몇 백 명이 와글와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포심'을 '죄책감'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죄책감의 단서가 되는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옛 침략 군대의 중위가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간  수용되어 있다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수룩한 변명인지 통렬히 느꼈습니다.”(『전쟁과 죄책』, 193쪽)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읽은 진술서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으로 성찰과 사죄와 책임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을 단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진술서 이후의 시간대 속에서 병사들이 자기의 죄를 자각했을 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자각이 뒤늦게 발현될 수도 있고 안 됐을 수도 있어요. 전쟁에 휩쓸린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혹할 수 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죽이고 말았던'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계기들이 찾아올 수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 김수용 : 저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어요. 이분들이 진술서를 쓰고 전범 재판을 받은 것이 전쟁 책임, 이를테면 법적 책임을 진 것이라면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의 행보는 전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중귀련 활동을 통해 평생에 걸쳐 전후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용서받지 못할 책임을 갚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현재로서는 그런 책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활동을 전후 책임의 선례로서 평가해보고 싶어요. 그랬을 때 우리가 원하는 책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라는 반성적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 조시현 :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19세기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인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법의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 먼저 '인류애',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를 '인도'로 번역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진술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한정된 표현 속에서만 인류적인 장면이 잠깐씩 드러날 뿐이에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이 팩트 위주의 서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성찰과 반성은 없고 사실만 나열하는 진술서 형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자신의 범죄 행위로부터 오히려 소외되는 측면이 야기되는 거죠. 저는 이 부분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자필진술서가 김수용 선생님이 이야기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중귀련 사람들의 증언이나 수기 같은 다른 자료를 같이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이 자료의 핵심이 '위안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김수용 선생님이 관심가지고 있는 부분들, 그리고 가해자성이라든가 인죄라든가 조금 더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장원아 : 초반에 이 자료집이  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이 이야기와 연결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위안부' 관련 부분이 왜 이렇게 적지?' 했다가 '대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찾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에 닿았어요. '위안부' 문제가 사실 딱 '위안부', 위안소만 끄집어내서 그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가,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본 진술서에 작성 시점, 1950년대의 어떤 가치관이나 국가관, 국제법 인식 같은 것들이 반영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간이 '문제'로서 서술되고 방식도 그런 시대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진술서를 읽고 해석하는 우리는 현재의 인식과 감각 속에서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으려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고 의미를 도출할 때 적어도 세 시기를 고려해야 정확한 독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즉 이 텍스트에 전쟁 시기, 전범관리소에서 진술서를 쓴 시기, 그리고 우리가 읽는 현재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각각의 시기를 구분하며 읽어야 이 자료를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하게 일본군'위안소'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만 주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식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서 문제화되고 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 심아정 : 김수용 선생님이 일전에 논문에서 언급한 '당사자성'이 떠오릅니다. 전후 세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경험자와 기억을 나눠 가지는 공동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을 수용해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당사자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일본군 포로들의 자필진술서 작성과 이후 일본에서의 중귀련 활동까지 연결해 보면, 전범들이 진술한 증언에서 시작해 그걸 공유한 사람들이 뜻을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전후 일본에서 여러 기념관을 세우고 반전평화 운동도 전개하면서 당사자성이 점차 확장되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지금 진술서를 읽는 우리가 선 위치는 '그때-그들'과 또 다르기에 일본인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당사자/비당사자', '가해자/피해자'의 자리를 이분화하지 않는 방식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2024년 인터뷰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 필리스 김 CARE 대표 인터뷰 <1부>   미국 사우스다코타대학교 사회교육학 징 윌리엄스 교수와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의 필리스 김 대표, 미국인들에게 '먼 나라의 오래전 불행한 역사'라 할 수 있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인권 문제로 접근해 교육하고 활동하는 이들이다. 2018년에 처음 만난 이후 '위안부' 문제 연대 활동을 해온 두 사람은 현재 공동 저술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쯤 나올 예정인 이 책은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방법을 담은 첫 번째 출간물이 될 예정이다. 웹진 <결>은 연구차 한국을 방문한 징 윌리엄스 교수와 서울에 체류 중인 필리스 김 대표를 인터뷰해 2회에 걸쳐 싣는다.  <1부> 미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자국중심주의 극복하는 글로벌 시민교육 <2부> 국제사회 왜곡 막고 공감 넓힐 영문 '위안부' 증언집 발간되길   Q.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 징 윌리엄스 :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아 천진사범대에서 영어영문학 번역 석사를 마쳤어요. 2014년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곧바로 임용된 사우스다코타대학에서 사회교육학 부교수로 일하며 초등 및 중등 사회 연구 방법론을 가르친 지 10년 정도 됩니다.  🧶 필리스 김 : 저는 스무 살, 대학 2학년 때 가족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어요. 한국 이름은 김현정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법정 통역사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OMFORT WOMEN ACTION FOR REDRESS & EDUCATION. 이하 CARE)'의 대표로 있는데요, 2020년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왔다가 코로나사태로 발이 묶인 후로 서울에 장기 체류 중입니다. 물론 전시나 행사가 있을 때 미국을 오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목하게 된 계기   Q. 교육, 특히 역사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항상 강조돼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더 특별한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미국 사회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오래 전 먼 아시아에서 전쟁 중에 일어난 '남의 나라의 불행한 역사'일 텐데, 그 안에서 꾸준히 연구하고 관련 활동을 해오신 두 분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 징 윌리엄스 : 말씀드렸다시피 중국 태생이라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간 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보니 전시 하 아시아 역사는 아주 간략하게 다루는 반면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가득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이라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 거죠. 역사 교육을 계속 연구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조금 더 깊숙이 파게 됐고, 선생님 혹은 교육자가 돼서 가르칠 때 이 내용을 꼭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목표 중 하나는 사회학을 가르칠 때 전 세계적인 관점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 필리스 김 : 이민 간 지 얼마 안 된 1992년 4월 29일, 저희 가족이 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후유증을 남긴 'LA폭동'이 일어났어요. 그 현장 한 가운데 있다 보니 미국 내에서 한인으로 산다는 것, 나아가 이민자 커뮤니티와 인종 갈등, 사회 정의, 여성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만난 직접적인 계기는 2007년 채택된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 Res. 121)' 캠페인이에요. 전국 네트워크 중 하나인 서부 캘리포니아 캠페인팀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제가 통역사다 보니 할머니의 눈과 귀가 돼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제 역할은 끝난 줄 알았는데 이후에도 사죄나 책임보다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변함이 없고,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 '역사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고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특히 미국에서의 활동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2007년 캠페인을 함께 했던 분들과 단체를 만들고 2013년 글렌데일 시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캠페인, 2017년 중국계 분들이 주도해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선보인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설치 프로젝트 등에 참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계속 '이슈'를 만드는 일본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어요. 글렌데일 시에 소송을 걸고, 샌프란시스코 기림비가 설치되자 오사카에서 자매도시 인연을 끊겠다 하고, 일본 외교관이 교과서 저자인 교수에게 '위안부' 관련 문구를 삭제하라고 압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으로 전해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방해가 양날의 검이기도 했던 게 저희의 기운을 빼고 정치인을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했지만, 교육계·법조계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주목하게 되는 효과도 있었어요. 이해관계가 없는 분들에게는 더 깊게 이해하고 지지하는 계기도 됐고요.    Q. 거대하고 다양성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활동을 접한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잘 가늠되지 않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게 되는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미국 사회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10년 사이 얼마나 변했다 하는 걸 보여주는 데이터나 연구는 없지만 획기적인 변화 중 하나가 캠페인을 벌인 캘리포니아 주에서 '위안부' 문제를 '성노예 제도의 예로 가르칠 수 있다'는 문구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 과정에 포함된 것입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 뉴욕 주 같은 곳에서 먼저 진보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다른 주들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때가 2016년이었어요. 사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교과 과정에 포함시켜도 아무도 가르치지 않으면 효과가 없잖아요. 직접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부터 전국 단위까지 다양한 컨퍼런스에 다녔습니다. '레슨 플랜', 그러니까 수업 지도안 같은 교육 자료를 싸들고 가서 세션도 열고,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부스를 마련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알려드리기도 했죠. 그렇게 해도 2017년, 2018년 무렵까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에 대한 선생님들의 이해가 낮았어요.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2023년 11월에 다시 대면으로 열린 전미 사회학 컨퍼런스에서 윌리엄스 교수님과 세션을 하고, 얼마 뒤에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세션을 했어요. 그때 깜짝 놀란 게 많은 선생님들이 세션이나 부스를 찾아와 '나 '위안부' 문제 알아, 더 좋은 자료 있니?' 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르쳐 봤어.' 하는 거예요. 몇 년 전만해도 '위안부' 문제를 설명하면 성과 폭력이 들어가 있어 부담스러운 주제라며 두려움과 우려를 나타냈다면 이제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로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좀 더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더 알려 달라'라고 하는 걸 보면서 변화를 체감했습니다. 🧶 징 윌리엄스 : 필리스 김 대표님 말씀처럼 1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제가 얘기하면 그때서야 많은 교육자분들이 큰 충격에 휩싸여 '어떻게 내가 몰랐을까' 했어요. 제가 고등 교육을 담당했는데, 처음에는 '위안부' 문제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일어난 난징 대학살을 연구하려고 했어요. 난징 대학살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지를 연구하게 됐고,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집중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필리스 김 대표님과 저는 전미 사회학 관련 컨퍼런스 때 부스에서 처음 만나 2018년 이후부터 같이 일해 왔습니다. CARE에서 받은 자료 사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사용해 제가 약 90분 분량의 '레슨 플랜'을 만들었어요. 그 지역 고등학교에서 한번 사용해 보기로 했죠.  아이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들려줬는데 역시 '충격'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객관적 역사와 정서적 공감에 기반한 수업 지도안    Q. 그렇게 인식을 변화시키는 교수님의 수업 지도안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 징 윌리엄스 : 90분 정도 진행되는 수업은 제가 일본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요. 일본 제국과 메이지 시대, 그리고 어떻게 군사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는지, 20세기 일본이 어떻게 해외 진출을 하게 되었는지를 개략하는데, 갑자기 일본이 이랬어라고 말하기보다 역사 전후를 알려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일본이 중국 북동 지역을 어떻게 침략했는지, 난징 대학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특히 난징 대학살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는지 설명하다보면 위안소를 설치해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사실 등과 만나게 됩니다.  물론 수업에서 너무 적나라한 이미지나 사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이미지나 자료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니까요. <디 어폴로지(The Apology)>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며 조금씩 설명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중국, 한국,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 세 분이 나와요. 학생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을 자연스레 듣게 됩니다. 다큐멘터리를 본 다음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해요. 어떻게 이 할머니들이 끌려가게 되었는지, 당시 할머니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얼마나 오랜 기간 '위안부'로 생활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후에 할머니가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지, 할머니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지 등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해야지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만약 일본 정부가 사과한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까? 할머니들의 마음이 그나마 좀 풀릴까?' 물어봤더니 '아니다. 할머니에게서 가장 중요한 걸 앗아갔기 때문에 사과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데 사과조차 안 했으면 어떻게 할까'라고 했더니 '인정할 수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은 대략 이렇게 진행됩니다. 저는 '위안부'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을 '디피컬트 히스토리(Difficult History)', 풀이하면 '어려운 역사'라고 하는데요. 어렵고 민감한 사안에는 강간, 성폭력이 포함돼요. 또 이렇게 '어려운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대학에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사람들이에요. 어려운 주제의 예시로 '위안부' 문제를 들어 '나는 이렇게 가르칠 것 같다'고 생각을 나누고, 학생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대해 어떻게 커리큘럼을 꾸려나갈지 함께 레슨 플랜을 짜기도 합니다.   Q. 말씀을 들으니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주제를 놓고 상호 교감을 이뤄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미국의 중등, 대학 교과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약간 부가적인 설명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필리스 김 : 미국은 주에서 고등학교 세계사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제시해 주는 주제들이 있어요. 대개 8~10년에 한 번씩 개정하면서 새 이슈를 넣고, 특정 설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아까 캘리포니아 주에서 '위안부' 문제를 '성노예 제도의 예로 가르칠 수 있다'는 문구가 교과 과정 아이템에 포함됐다는 건 고등학교 세계사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여러 주제 중에 '위안부' 문제가 들어갔다는 의미예요. 그 중에 교사가 주제를 선택해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교사가 원하는 주제를 가르치려면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45분짜리 수업 2개로 구성된 징 윌리엄스 교수님 수업 지도안은 그 교사들이 수업에서 활용할 자료예요.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예비 교사니까 지도안을 이들에게 활용하기도 하고, 실험적으로 고등학교에 실제로 가서 수업 지도안을 활용해 '테스트 티칭'을 하기도 하고요.        '위안부' 교육은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일이기도   Q. 도입부에도 나왔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는 자신들의 과거사이고, 피해 경험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여성 인권처럼 보편성에 기반해 공감할 수 있지만 미국 사회는 대개 제3자의 역사로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게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 걸까요? 🧶 징 윌리엄스 : 제가 사회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글로벌한 관점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도 미래 교육자로서 글로벌한 관점으로 가르치길 바라고요.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겠지만 특히 자국중심주의가 강한 미국은 자국과 연관이 없으면 교육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로벌 교육, 글로벌 시민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것 같은데, 저는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사람들을 '케어'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기회가 있습니다. 글로벌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단순히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인권 문제입니다. 제 수업에 여학생들이 많은데, 우리가 지금은 안전한 곳에 살고 있지만 몇 년 전에 이 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단순히 이 문제를 꼭 끝내야 된다는 게 아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그 첫 단추를 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몇 년 뒤에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 여성 인권 옹호자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과 연결하면 아이들은 관심을 보입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등에서 오늘도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히 여학생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 받은 설문조사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요. 한 학생의 대답을 짧게 요약해 볼게요.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인간적이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잘못하면 그 잘못을 인정하라고 배우는데 심지어 일본 정부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피해 여성들은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나서서 본인이 당한 일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특히나 한국의 문화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강간을 당하면 바로 신고하는 게 어렵습니다. 저는 만행을 저지른 남자들은 절대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법적으로 관련 조치와 벌을 받아야 됩니다. 이 남성들은 '위안부'를 여자로 인식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성적 장난감으로 본 것이고 본인의 쾌락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저는 부끄러움, 트라우마, 정의롭지 못한 행동 그리고 인정하지 않는 이 모든 행동 자체가 잔인하게 보입니다.'    아르메니아 '인종 청소'와 홀로코스트   Q. '위안부' 문제와 인권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와 공감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 필리스 김 : 돌아보니 저희가 교육이나 소녀상과 기림비 설치를 위한 캠페인을 할 때 똑같은 질문을 하는 미국인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미국인이 당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저희는 세 가지 설명을 해요. 첫째는 홀로코스트가 미국에서 일어나거나 미국인이 홀로코스트를 당하지 않았지만 배우잖아요. 너무나 중요한 인권 문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세계사적 비극이기에 누구나 배워야 한다라고 얘기하면 모두 동의해요. '위안부' 문제도 같은 얘기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100년도 더 지난 1910년경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인종 청소'예요. 당시 생존자들은 자기들의 고통에 대해 한 세대가 지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어요. 그러다 다음 세대가 그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터키 정부에 사실을 인정하고 정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분들이 하는 얘기가 그때 바로 국제사회에 '인종 청소'를 알리고, 해결을 요구했더라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였어요. 이제 4세대로 접어들고 있지만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도 보편적인 인권 문제로 열심히 가르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국가가 저지르는 전시 성폭력을 말할 때 항상 먼 아프리카나 중동 국가를 떠올리지만 사실 미국에서도 조직적인 성폭력, 인신매매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할머니들의 얘기와 흡사해요. 70년, 80년이 지났지만 결국 본질은 같은, 현재 우리 커뮤니티와 깊이 관련된 문제인 거예요.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낸 최초의 어마어마한 사건이라는 점을 얘기해요. 그전에도 얼마나 전시 성폭력이 많았겠어요. 그럼에도 항상 피해 여성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부끄러워하고 숨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우리 할머니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셨잖아요. 여성학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침묵을 깬 할머니들이 '액티비스트'로 변해 이 운동을 이끈 건 정말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소현숙 인터뷰이: 징 윌리엄스 사회교육학 부교수, 필리스 김 CARE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6월 3일 월요일 

    징 윌리엄스, 필리스 김

  •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개최
    2024년 에세이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개최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서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이번 온라인 영화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국내외 영화를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묶어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영화나 거의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온라인 영화제 일정◀ #상영 플랫폼 |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 #주최·주관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관람 방법 | 퍼플레이 회원가입을 통해 누구나 관람 가능(무료) #상영 기간 | 2024년 8월 14일(수)~27일(화) #문의 | nbf@skunkworks.co.kr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주제 1.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영상기록물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존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입을 떼다'에서는 생존자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들의 구술증언을 영상에 담는 데 집중했던 ‘위안부’ 관련 초기 영화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에는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로 발견되었던 오키나와의 배봉기,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의 이야기와 박수남 감독의 초기 작품이 포함됩니다.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상영작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 50년의 침묵 | 호주 | 네드 랜더 | 1994년 🎬 일용할 양식 | 호주 | 루비 챌린저 | 2018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입을 떼다' 상영작 소개글 보러 가기​   주제 2.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초기 작품들이 ‘위안부’로 동원된 피해자들의 피해사실을 그들의 증언을 통해 알리는 데 집중했다면, 생존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2000년대 이후 생산된 작품들은 포스트 피해자 시대를 예비하며 피해자들이 남긴 증언을 어떻게 후세대에 전달하고 기억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귀를 열다’에서는 200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통해 피해자의 증언과 기억의 전승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살펴봅니다. 상영 기간 : 8월 21일(수) ~ 8월 27일(화) 상영작 🎬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 중국 | 반중이 | 2007년 🎬 그리고 싶은 것 | 한국 | 권효 | 2012년 🎬 22 | 중국, 한국 | 궈커 | 2015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귀를 열다' 상영작 소개글 보러 가기

    웹진 <결> 편집팀

  •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024년 에세이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소개 1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상영작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 50년의 침묵 | 호주 | 네드 랜더 | 1994년 🎬 일용할 양식 | 호주 | 루비 챌린저 | 2018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그들의 눈 속에 타오르는 파란 도깨비불을 보았다!” 일본어로도 한국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재일조선인의 참담함을 마주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이면은 절박하고 저릿한 사명이지 않았을까.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시작된 1990년대 이후, 박수남 감독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피해자들의 증언에 시선을 맞추며 기록화에 나섰다. 증언을 적절하게 구획하고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 탓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갔지만 모두가 필사적으로 기록했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길지 않은 일본군'위안부' 주제 영화의 역사 가운데 앞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화들은 각각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영화제의 첫 번째 섹션 '입을 떼다'에서는 이러한 초기작들을 모아 당시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배봉기의 삶을 좇은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오키나와의 할머니>(1979, 86분),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강제동원과 착취 그리고 천황제의 황민화 교육에 주목한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 100분),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의 이야기를 담은 <50년의 침묵>(1994, 57분), <일용할 양식>(2018, 15분) 등 네 편이다. 이 영화들은 각기 다른 시각과 접근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이 영화들을 통해 다시금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복잡성과 무게감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오키나와의 할머니> (1979) 이중의 타자화, 제국 앞의 오키나와인과 조선인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오키나와의 할머니>는 1970년대 후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야마타니 감독은 와세다대학 재학 중 독립영화 제작 단체를 설립해 오키나와에서의 집단자결, 강제이주 등 아픈 역사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영화는 조선을 포함해 전쟁 중 성노예로 동원된 식민지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감독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야마타니 감독은 일본군'위안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취재 여행을 하던 중, 오키나와에 남아 살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배봉기를 알게 된다. 배봉기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계속 오키나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약 30년 동안 미군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다. 이때 배봉기는 오키나와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일본 국적의 신원 보증인을 얻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배봉기의 과거가 밝혀지며 '위안부' 생존자로서의 이력이 드러나게 된다.  오랜 취재 여행을 통해 드디어 마주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배봉기 앞에서 야마타니 감독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인터뷰를 전개할 지 쉽게 알 수 없다. 말보다 먼저 그가 겪어왔을 험한 시간이 마음을 먹먹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접근법 없음'의 곤궁함과 방법론적 부재가 이 영화의 특이성을 구축한다.  영화는 또 패전 앞에서 항복보다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오키나와인, 전쟁 상황 속에서 조선인을 죽여야 했던 오키나와인 등 제국 일본에 대해 주변부적 위치에 존재해 온 오키나와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기록 없는 거주민으로 살아온 조선인 배봉기의 존재 앞에서 오키나와의 주변부화는 다시금 상대적인 것이 된다.  이 이중의 대상화, 타자화는 각자의 역사를 청취하는 일본인, 피해와 가해의 위치를 오가는 오키나와인과 카메라를 지닌 감독이라는 위치가 얽히면서 전후 냉전과 탈식민, 젠더의 문제들이 각각의 학문 분과에서 논할 사안이 아니라 한데 서로 연결된 결합물임을 보여준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2.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 황민화라는 폭력 혹은 오키나와에서의 아리랑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일본에 잔류한 재일조선인들의 삶과 고통을 기록한 작품이다. 감독은 일본어와 한국어 어느 쪽의 언어로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만나며, 글로는 이들의 표정과 감정을 담아낼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래서 영상으로 이들의 한을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 앞서 만든 박수남의 데뷔작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는 히로시마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를 인터뷰해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담아냈다.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데뷔작에 이어 오키나와의 강제동원을 다룬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는 모두 강제동원된 조선인이라는 결과에 수렴하나 오는 길은 저마다 달랐음을 보여준다. 누구는 징병으로, 누구는 노동력으로, 또 누구는 성노예의 형태로 끌려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소재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 기록하고, 그 피해를 식민지배국 일본과 일본인의 착취 구조가 가져온 결과임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다뤄져 왔다. 그랬을 때 가해국 일본과 피해국 조선 사이의 입장을 명확한 구분하면서 그 차이를 극대화해 드러내는 담론적 장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일본(인)의 가해 행위와 그 가해 행위를 불러온 구조가 낳은 결과의 총합이고, 이로 인해 조선(인)이라는 존재의 속성, 주체와 행위자로서의 조선인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박수남 감독이 본 오키나와의 조선인에게 가해진 착취는 천황제 아래 모든 인간을 황민화하려는 동원 체제의 결과였다. 조선인에게 가해졌던 동원과 착취는 그보다 40년 앞서 일본에 병합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드리워져 있었다. 박 감독은 강도는 다를지라도 인격을 살해할 정도의 강력한 피해, 혹은 강력한 폭력을 통한 융합을 주장하는 사건의 진원지는 천황제의 황민화 교육임을 기어이 들춰낸다.  영화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황민화 교육이 한국인의 정신에 새긴 성공적 결과들을 전시한다. 이후 황민화 교육의 동원과 착취의 가장 바깥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등장한다.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은 황민화에 기반한 동원이 일본인, 오키나와인, 조선인,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 모두를 대상으로 삼아 서로를 타자화하도록 만들면서 확산되어갔음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그 상호적 대상화와 타자화 과정마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3. <50년의 침묵> (1994) 침묵 너머의 연대   얀 루프 오헤른의 삶과 용기를 담은 <50년의 침묵>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여성 오헤른이 50년간의 침묵을 깨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1923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태어난 오헤른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1944년 강제 연행을 당한다. 오헤른은 당시 연행된 200~300명에 이르는 '위안소' 성노예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약 석 달 가량 붙잡혀 있었고, 약 50년간 그 누구도 오헤른의 피해를 입에 올리지 않았기에 이야기는 묻혀져 있었다. 그러다 1991년 김학순이 미디어 앞에서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히고 나섰다. 이 증언은 전 세계의 뉴스 채널에 보도되었고, 이를 보고 용기를 얻은 오헤른은 피해 증언에 참여하기로 한다. 1992년 12월, 남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하는 역사적인 국제 공청회가 일본 도쿄에서 열리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헤른이 5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떼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 초반에는 오헤른이 대가족과 함께 보낸 행복한 어린 시절, 여름에 할아버지의 리조트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 등이 홈무비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따뜻한 추억의 순간 뒤로 이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은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영화는 오헤른이라는 한 인물의 용기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증언에 용기를 얻은 다른 네덜란드 여성들이 피해 증언에 나서며 연대를 이루는 과정까지 담고 있다.  오헤른은 이후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전쟁 성폭력 반대 운동에 나서며 활발히 활동한다. 2007년에는 한국 영화 <아이캔 스피크>의 모티브가 된 미의회 하원의 청문회에 이용수와 함께 증언하기도 했다. <50년의 침묵>은 공개된 증언의 힘과 피해자 간의 연대, '위안부' 문제가 국가와 민족적 대립의 단위를 탈피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1990년대에 제작된 이 영화들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초기의 혼란과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각 영화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그들의 고통과 용기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입을 떼다'라는 제목 아래 마련한 상영작들은 당시 영화들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조망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황미요조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