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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2024년 에세이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소개 2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상영 기간 : 8월 21일(수) ~ 8월 27일(화) 상영작 🎬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 중국 | 반중이 | 2007년 🎬 그리고 싶은 것 | 한국 | 권효 | 2012년 🎬 22 | 중국, 한국 | 궈커 | 2015년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가능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증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하는가.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 마련한 두 번째 섹션 ‘귀를 열다’의 상영작들은 생존자들이 남겨 놓은 수많은 지도와 흔적을 다시 방문하며 저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려낸 맥락의 풍경화,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곤란함에 관한 고백들이다. 1990년대 최초의 일본군‘위안부’ 증언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접근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영화들은 이 증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하고 기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중한다. ‘귀를 열다’ 섹션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영화 세 편을 상영한다.      1.<가이산시와 그 자매들>(2007)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재구성해서 더 오래 기억하기   1992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는 남한, 북한, 중국, 필리핀, 대만,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는 한편, 일본 국내외의 대책위원회들이 함께 모여 이 역사적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의 순간이었다.  중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반중이 감독의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의 주인공인 허우둥어(侯冬娥) 역시 애초 국제 공청회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참가를 포기하게 된다. 중일전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선의 확장은 일본의 병참능력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외딴 곳까지 파견된 부대의 경우에는 그 부족한 병참지원을 현지에서 조달해나갔다. ‘위안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넓은 전선 속에서 민간여성 납치와 성폭행은 ‘위안소’라는 제도를 핑계 삼아 구조화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고 생존한 허우둥어를 만나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던 감독의 기획은 그의 죽음으로 좌절된다. 대신 반중이 감독은 약 10년 동안 산시성을 방문하며 허우둥어의 주변인을 만나 그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역사는 남았으나 인터뷰 대상이 사라지고 만 자리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같은 시기 피해 당사자였던 다른 중국인 일본군‘위안부’의 인터뷰, 당시 일본군 부대원의 회상, 그리고 허우둥어를 거치며 살아온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담아낸다.  오랜 시간에 걸친 성실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가이산시는 물론, 그와 비슷한 피해를 겪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 피해자들이 겪은 일종의 트라우마 지도를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트라우마적 사건 이후 이 ‘피해자/생존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로 피폐해졌는지를 국가 내, 국가 간 담론의 용인과 태만의 연대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점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2.<그리고 싶은 것> (2012) 재현의 대상과 주체 사이 지도 그리기   <그리고 싶은 것>은 평화를 주제로 한·중·일 작가들이 공동 작업한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의 권윤덕 작가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권윤덕 작가가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록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예술가의 창작기에 머물 수도 있었던 이 프로젝트는 일본 출판사의 수정 요구와 출판 불가 위기로 상황과 방향이 급변한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쇼와 일왕의 얼굴, 황군에 대한 묘사, ‘위안부’라는 소재 자체를 문제삼은 출판사의 수정 요구가 제기되는 초반에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려는 작가와 대립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다 영화는 중반부터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폭력을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젠더폭력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에 집중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책이 반일 감정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길 원치 않으며, 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며 표현의 어려움을 느낀다. 남성 동료 작가들은 권윤덕 작가의 방향과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안부’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떻게 일본이 중심이 아닐 수 있냐”고 묻는다. 권윤덕 작가는 할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한국인’이 아닌 ‘여성’으로 전환하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표현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여러 층위의 갈등 속에서 영화의 촬영 방식도 바뀐다. 초반에는 권윤덕 작가를 중심에 두거나 얼굴, 손 부위에 집중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단독 바스트 샷 위주로 구성되었으나, 작가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부터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 작가가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의견을 청취하는 모습을 담는다. 작가의 말을 들으며 곤란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띄는 동료 작가들을 길게 보여주고, 작가를 다른 사람들 속에 같은 프레임으로 넣어 거리를 넓힌다. 이러한 촬영 방식의 전환은 작가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 문제에 접근하면서 작가의 위치를 ‘여성’으로 놓을 때 발생하는 갈등 지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갈등이나 고민을 격화시키는 방식보다, 드러내지만 동시에 감추며 온건하게 보이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같은 영화의 접근법은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놓여 있는 사회적 타자나 소수자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한계 범위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3.<22>(2015)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과 봉인된 시간   2013년 궈커 감독은 <32>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다. 40여 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1944년 일본군 부대에 연행되어 성노예로 살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한 웨이 샤오란과 당시 임신해서 낳은 일본 혼혈 아들의 현재의 삶과 소회를 보여준다. 영화는 매일 크게 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모자의 일상을 정적인 카메라 워크로 담고, 이어 웨이 샤오란만이 프레임의 중심에 등장하는 회상 장면으로 이어가면서 70년의 세월을 따라 노년에 다다랐을 뿐, 피해 생존자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종의 동결, 유예된 시간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학적, 서사적 결정은 <32>에 이어 서둘러 제작한 <22>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더 많은 지역을 찾아가 카메라로 담지만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이들 22명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삶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담은 쇼트에 이어, 어떤 사죄나 피해 회복의 가능성도 부정당한 채, 봉인된 듯한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선 이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생존자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관객들은 봉인되고 유예된 세월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 유예된 세월과 역사는 아직 해원에 이르지 못했음도 깨닫게 된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반복된 시간의 쓸쓸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되기도 했던 영화 <22>는 아직은 증언과 인터뷰에 기댈 수 있는 피해 생존자들의 마지막 기록이다. 궈커 감독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동결된 시간과 유예의 영원함을 관객에게 전한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 등장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전 세대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단순히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증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까지 담아내고 있다. 증언 이후의 과정, 예술적 재현, 국가적 혹은 국제적 인식의 변화를 탐구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 영화들을 보는 경험이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의 복잡성과 재현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증언 이후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고민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황미요조

  •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2024년 에세이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의 첫 상영작인 <오키나와의 할머니>.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기 12년 전인 1979년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여러 해에 걸친 자료 조사에 이어 마침내 배봉기 할머니를 만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은 '누군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남겨 놓았다. '최초'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나오기까지 감독의 심경을 쫓아가본다. 남자인 내가 여성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침략당한 측의 가난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록자의 의무가 아닐까. 1979년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완성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이 직접 작성한 '감독 노트' 중 5월 3일에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배봉기 씨를 처음 취재하기 시작한 1977년부터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야마타니 감독의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것은 자신이 이 기록을 남길 '적격자'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남성인 자신보다는 같은 민족의 여성이 이 기록을 받아 적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에 내내 휩싸였으나, 그럼에도 끝끝내 카메라를 놓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기록자로서의 의무감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야마타니 감독은 "언젠가 나타날 여성 기록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생각"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증언하는 이가 배봉기 씨 혼자일지라도 그녀의 말 뒤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음을 상기하기를, 영화를 통해 '위안부'들의 존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첫 상영 소감을 짧게 남겼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인 2016년 ,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한국DMZ영화제에 초대받아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작품을 본 재일한국인 박수남 감독이 야마타니 감독에게 연락을 하게 되면서 두 감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2018년 12월 일본 업링크 시부야에서 <오키나와의 할머니>와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이 함께 상영되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넘치는 관객들을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 미안하고 아쉬워 3개월 뒤 같은 장소에서 앵콜 상영까지 진행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야마타니 감독은 궁금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영화'에 왜 이다지 관객들이 모이는가! 이 '서툰'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2018년 <침묵>과 동시상영을 했던 당시, 야마타니 감독이 남긴 소회의 글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감독 나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감독(나) 자신이 '위안부'였던 배봉기 할머니의 말에 넘어가, 미소라 히바리의 '사과의 추억'을 음치인 목소리로 열창하는 것이다. 배 할머니는 전후, 오키나와의 술집에서 일하며 남자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장면에서는 조용했던 관객석이 폭소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 '위안부'를 일면적인 피해자로 '섹슈얼라이즈'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위안부'라는 존재는 인간적으로 더 복잡한 면을 지니고 있다. 둘째, 배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어요. 네, 저는 이길 줄 알았어요"라고 태연하게 단언한다. '전 조선인 위안부'가 자신 있게 단언하면, 녹음하고 있던 내가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동시녹음 마이크에 담겨 있다. 전쟁 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내선일체'가 배 할머니에게는 전후에도 살아있다. 배 할머니는 철저한 '황국 할머니'였다. 일본이 36년간 조선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배 할머니가 그 생생한 증인이다. 셋째, 영화는 공개 직후, 전국적으로 반향이 있었고, 배 할머니에게 많은 성금이 모였다. 나는 즉시 그 성금을 가지고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가 처음 산 것은 금반지(조선에서는 결혼의 상징)였다. 그리고 나를 집에서 준비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식사 후 "맛있었네, 부부 같아."라고 갑자기 고백하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야마타니 감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군'위안부'라는 존재가 가진 인간적인 복잡성이야말로 <오키나와의 할머니>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굳어진 선입견을 버리고, 치밀하고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 이 영화에 있었다. 그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 그것이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이토록 오랫동안, 지금도 여전히 상영되는 의미이다.    관련 상영작품  🎬 오키나와의 할머니 | 일본 | 야마타니 데쓰오 | 1979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야마타니 데쓰오, 웹진 <결> 편집팀

  •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2024년 에세이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상영작 이야기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하는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한다. 2024년 8월 14일부터 8월 27일까지 퍼플레이 온라인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는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는 '입을 떼다', '귀를 열다'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결을 포착해 담아낸 국내외 영화를 소개한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작품도 여럿 포함돼 있다. 웹진 <결>은 영화제 관련 소식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컨텐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1)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1)_ 입을 떼다, 절박한 파란 도깨비불 기록하기 (2)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2)_ 귀를 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듣기의 모색 (3)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3)_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 (4) 2024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4)_ 박수남과 함께하는 '여행'   예닐곱 살에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가 있었다. 열세 살에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또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운 소녀가 있었다. 1935년생이니 올해로 여든아홉 살, 평생을 수많은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싸워온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 이야기다.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노동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 재일조선인 같이 '낮고 상처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온 그에게 야마타니 데쓰오 등 일본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존경을 보냈다. 특히 작가이자 편집자인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에는 박 감독이 걸어온 길에 대한 웅숭 깊은 존경이 가득하다. 이번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에서도 박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을 만날 수 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에서도 점점 주목도를 높이고 있는 박 감독의 영화를 만나기 전후 오이와케 히데코의 글 두 편을 소개한다. 소제목을 붙이고 문장을 다듬는 등 약간의 편집 과정을 거쳤음을 밝힌다.    #1_ 작가 오이와케 히데코가 말하는 박수남 하얀 한의 길   박수남은 '여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자문해 온 여행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그녀가 일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많은 동포의 삶과 만난다. 교수형을 당한 이진우, 히로시마의 재일조선인 피폭자, 배봉기 씨 등 조선인 '위안부', 그리고 조선인 군속들 등이다. 스스로 존재의 부조리를 물을 때,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인생을 역사에 농락당하고 존재가 말살된 동포들이 있었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여행은 언제나 '역사의 어둠을 따라 내려가는 여행'이 되었다. 거기서 그녀의 저서나 영화가 탄생했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동시에 오빠의 존재였던 것 같다. 유능했지만 젊어서 자살한 오빠의 한. 그녀는 영화 속에서 종종 '오빠와 언니를 찾는 여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빠의 인생을 겹쳐온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말을 잇는 무녀 박수남을 만난 것은 20년 전인 1991년,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이 완성되어 오키나와에서 상영회가 열렸을 때였다. 당시 나는 마이니치신문사의 『LOOK BACK』이라는 연감을 편집하며, 거기에 몇 편의 르포를 썼다. 그 중 하나로 박수남을 인터뷰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찾아 약 10일간 상영위원회의 사무실에서 함께 지내며, 아카 섬과 자마미 섬에 동행했다. 당시 박수남은 55세, 온화한 따뜻함과 동시에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격렬한 분노 모두를 지니고 있었고, 그 열량의 크기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눈앞에서 전화 상대와 격렬하게 말다툼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나중에 그 말다툼 중 몇 개는 영화 장면 삭제 요구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박수남에 대해 정말 놀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계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 철저한 자세였다. 예를 들어, 그 상영회 전후 아카 섬이나 자마미 섬의 노인들 집에 박수남은 자주 방문해 술을 나눴다. 그들로부터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영화 필름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남은 또 몇 번이고 방문해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박수남도 처음 방문한 집인 줄 알았다.  언론의 취재에서는 '증언 채록'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박수남의 자세에서는 그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혹독한 경험과 마음에 감추어 둔 이야기를 풀어내고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끌어내는 무녀처럼.  그것은 영화에서도 강하게 느껴졌다. 한국과 오키나와에서 사람들은 박수남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말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두 번의 큰 병을 겪고 난 박수남이 2006년 오랜만에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섬의 노인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한 말이 상징적이다. "네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너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이 섬에서는 죽은 자도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 그런 박수남의 자세가 있었기에 2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이번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토우치 자쿠초 씨가 영화 전단지에 써 준 글 중에 "진실은 이렇게 반드시 누군가의 힘으로 세상에 전해지는군요."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박수남은 역사의 깊은 어둠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이 세상에 전하는, 역사의 무녀일지도 모른다.   고마쓰가와 사건, 이진우와의 만남 박수남은 1935년 일본 미에현에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토목 공사 현장 감독이었다. 부하라 불린 낮은 직급의 인부들은 조선인 부락에 살았지만 박씨 집은 일본인 주택가에 있었고,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돌을 맞고 욕설을 들은 무서운 경험을 한다. 그녀 또한 초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눈길로 일본인들에게 배척당했다. 지금까지 함께 놀던 여자 아이들도 같이 놀지 않게 되었다. 가족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내게 밖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데르센의 인어 이야기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다. 만약 마녀가 나를 일본인으로 만들어준다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리도 기꺼이 바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일본인인 척'하면 배척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고통을 낳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일본인인 척하고 있는 나를 견딜 수 없고, 자신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찢겨 나간다는 것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이다. 빨간 꽃이 빨갛게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의 색 모두가 바래져 간다. 햇빛이 얇은 베일에 덮인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 영혼은 그 당시 병들어 있었다."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와 관련이 깊어진 건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니는 여학생과 세 살 여아를 살해한 혐의로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그는 극빈한 환경 속에서도 '명랑하고 활달한' 학년 리더, 일본인 '가네코 진우'로 살았다. 그러나 체포 후 "꿈속의 꿈처럼,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었고, 자신이 죽였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내가 죽인 것일까."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에 박수남은 자신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박수남은 당시 22세였다. 2년 전부터 시가현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민족학교 교사였던 박수남은 담임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친 소년 사건을 계기로 남북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민족교육을 제안하면서 교사 집단에서 고립됐고, 도망쳤다. 그런 박수남에게 이진우는 "그 마을에 두고 온 소년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가와사키에서 작은 사설 학교를 열고, 유흥가를 떠도는 불량 청소년들을 "조직화"하며,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조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자신의 문화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느끼며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사설 학교에서 사용한 교재는 "내 이야기를 쓸 것이다-검고 아름답다"고 쓴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집 『니그로와 강』이었다. 그리고 가와사키의 동포 소년들에게 다가가듯이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고 면회실을 교실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편지를 묶어 엮은 서한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는 나중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쪽발이의 비참함, "하얀 시선의 포위" 속에서 "광대 역할을 하며" "자신을 죽여 가는" 동포들. 당시 박수남이 반복해서 쓴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 매달려, 찢겨 나간다. 그때 갑자기 죽음이 떨어지는 것이다." 1962년 1월, 체포 후 4년 만에 이진우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2세. 그로부터 3년 전에 형이 자살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박수남의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부터 '공화국의 재외 국민에게 범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 한편 1960년 민주화와 남북통일을 요구한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청년들에게 충격을 받아 한국 유학을 신청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했다. "나는 남북의 경계, 틈새에 서 있었다. 내가 설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모의 역사를 아는 여행'은 지쿠호와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었다. 지쿠호의 폐허가 된 탄광 마을을 방문했을 때 검은 벽에 쓰인 세 줄의 한글 낙서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산사태 사고로 사망한, '코바토(小鳩)'로 불리던 하얀 피부의 14세 소년의 글이었다. 개와 고양이의 무덤에 묻혔다는 소년의 간절한 외침. 이것이 박수남의 원점이 되었다.  "이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다. 이전 작품의 한국 로케 때 소년의 고향을 찾아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년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울려 퍼지며, 나를 여행으로, '누치가후'에 이르게 하는 여행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촬영하다, 영상의 세계로 히로시마의 동포들이 사는 원폭 슬럼에 들어간 것도 1964년이었다. 당시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내 여행은, 죽은 자들을 포함해 존재들을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존재 그 자체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그들은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수남은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에서도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말한다. 자기비판은 전혀 없이. 하지만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는 일본어는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과 침묵, 이것이 대단하다. 눈 속에 파란 도깨비불 같은 것이 타오른다.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생각이다. 침묵이 그들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내 말로 표현하면, 그 침묵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영상이다, 카메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의 크랭크인은 1986년, 이듬해 완성했다. 증언 발굴부터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작품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를 무시해 온 일본의 반전 반핵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상영이 물결처럼 퍼졌다. 그리고 상영을 계기로 1987년 세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의 피폭 문제가 다뤄졌고, 피폭자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까지 채택됐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모든 빛을 두려워하며, 깜깜한 좁은 벽장 속에 갇혀 있던 소녀, 원폭 슬럼에 사는 할머니들의 모습.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가 아니다. 조용히 차분히 그 억울함과 슬픔이 다가온다.   오키나와와의 만남, 깊은 침묵의 섬으로 박수남이 오키나와와 처음 만난 것은 1972년이었다. 오키나와 반환의 해, "나는 속아서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밝힌 배봉기 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수남의 주장은 '전장에서 성을 팔며 다닌 창녀'라는 기존의 통설이나 속설을 뒤엎고, 강제 동원된 남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성 노예'라고 인식했다.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가 상영되면서 그 배봉기 씨가 오키나와를 방문한 1987년, 언론에 노출됐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강제 동원된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와 군대에 성을 판' 여자로 취급받았다. "동성으로서 그것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조선인 여성의 손으로 만든 영상으로 그녀가 고발한 진실을 복권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오키나와, 전쟁 중에 강제 연행된 옛 군속들의 존재, 배봉기 씨. 이들에 대한 생각이 두 번째 작품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제가 조선인이라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했다. 섬 사람들에게 위안소의 여성이나 군속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면 '당신은 가족인가요?' 라고 묻곤 했다. 나라를 빼앗긴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오키나와 취재는 시작됐다. 그러나 침묵은 매우 깊었다." 상영 후에도 박수남은 '위안부'들의 사죄와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싸움을 지원했고, 1997년 도카시키 섬에 배봉기 씨 등 '위안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리랑 위령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국민 기금 정책'으로 전환된 이후 그 운동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한편 영화 상영 후인 1992년, 박수남은 살아 돌아온 군속들을 오키나와로 초대하는 데 분주했다. 이 통곡과 위령의 여행이 이번 영화의 후반부에 그려져 있다. 또한 두 번째 작품 취재를 통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봉인된 '옥쇄'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생각이 생겼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의 실명, 맹학교 입학, 대장암, 그리고 재발…. "더 이상 영화 제작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옥쇄'의 10만 피트가 신경 쓰이고 신경 쓰여, 죽을 수도 없었다." 전환점은 2005년이었다.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포기했던 영화 제작에 대한 의욕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암 수치가 사라지고 체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실감하며 후지산 등반도 했다. 2006년 1월, 박수남은 오랜만에 오키나와의 게라마 제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자마미 섬에 주둔했던 전 육군 대장 우메자와 히로시 씨 등이 옥쇄 명령은 군 명령이 아니라며 이와나미 서점 등을 제소한 이야기를 들었다. 옥쇄 명령은 마을 조장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제시된 것은 전후 조장의 동생이 쓴 '기억노트'였다.  그러나 15년 전, 그 조장의 동생은 박수남에게 술에 취해 속았다며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박수남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이 재판의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녀는 나하의 병원에 입원 중인 조장의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중태임에도 명확히 말했다. 박수남은 그 내용을 모두 녹음하고 촬영했다.  이렇게 등을 떠밀리듯 세 번째 영화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 이듬해인 2007년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옥쇄의 군 명령을 삭제하라'는 수정 의견을 붙였다. 옥쇄를 강요받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억울함, '치무구루시(チムグルシ. 오키나와 방언으로 한과 비슷한 뜻)'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정말로 오키나와 할머니의 말대로 '신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는 타이밍에 <누치가후>가 완성됐다. 아마도 박수남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50년에 걸친 '박수남의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실의 크기와 깊이에 놀라고 있다.       #2_ 박수남의 목소리 자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은 경험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이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듯이 나는 반생을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며 일본에서 살아가는 정체성을 창출해가는 여행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그 여행 속에는 히로시마도 있었고, 히로시마에서 오키나와로의 여행도 있었다. 패전 후 아버지는 절의 본당에서 한글 교실을 열었고, 딸에게 민족교육을 받게 하려고 나를 조선 중·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에는 싫었다. 그러나 거기서 역사를 배우고,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알게 되면서 색이 돌아오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으로 있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 그런데 오래지 않아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날 학교에 경찰이 '돌격'해 왔다. 1.5m나 되는 참나무 막대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우리는 교실에서 쫓겨 도망쳤다. 운동장에 내몰린 학생 수백 명은 참나무 막대로 무차별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도망가면 죽는다!'고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조선인이 일본 학교에 왜 다닐 수 없느냐'며 맞섰다. 이것이 내가 권력과 맞선 첫 경험이었다. 13살이었다. 이때,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짓밟는 강력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조선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전학련 대회 때 갔던 센다이에서 조선인 부락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차별받아 일본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방황하는 현실을 보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음 해 민족학급의 교사가 되었다. 민족학급은 간사이 지역에 지금도 남아 있는, 공립 초등학교에 마련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교실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부임한 시가현의 사메가이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단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도망쳐 나왔다. 당시 한국 국적의 4학년 남학생 명연희라는 아이가 담임 교사의 가방에서 급식비를 훔쳐 나간 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빨갱이를 싫어해 아이를 민족학급에 보내지 않았다. 다른 민족학급 교사는 '남자아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 아니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동포 아닌가. 재외 공민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아이가 올 수 없는 민족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급여와 보너스로 8천 엔을 만들어 그의 집에 찾아갔다. 끝내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돌려주었지만, 이 행위가 영웅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며 나는 고립되었다. 좌절이었다. 나는 젊었고, 견디지 못해 도쿄로 돌아왔다. 그때 '고마쓰가와 사건'이 있었다. 내가 두고 온 명연희와 이진우가 겹쳐 보였다. 이진우는 명연희였다.   이진우와 명연희 이진우가 체포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한 충격이었다. 이진우는 나이기도 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어떻게 인격이 분열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잡히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빼앗긴 사람의 경험은, 경험 그 자체도 빼앗긴 것이다. 살해한 그녀와 자신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그녀들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녀들은 베일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 시대, 같은 세대의 동포들 가슴에는 누구나 이진우가 있었다. '이 소년을 구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에게도 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년에게 직접 다가가기보다 많은 R들에게 호소하기로 선택했다. 당시 나는 가와사키의 나카토미(현 사쿠라모토)에 작은 학원을 열고 유흥가를 배회하는 '비행' 동포 소년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인 그 학원에서 사용한 교재는 '검고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는 미국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시집 『니그로와 강』(The Negro Speaks of Rivers)이었다. 그러다 피해자 가족의 집을 방문했다. 피해자의 나이 든 소박한 아버지는 '소년의 성장 과정도 불쌍하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준다면 딸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부모님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끔찍한 일을 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딸 한 명을 죽인 일로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편지와 향을 받았다. 소년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작은 공간이지만 그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감형 운동을 부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먼저 그 소년을 만나 자신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와사키의 학원에서 했던 것처럼.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머지는 서한집(박수남 편 『이진우 전 서한집』)에 쓰여 있는 대로다. 편지를 쓰고 면회실이 교실이 되었다. 그러나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나는 조총련에서 추방되었다. 귀환 운동이 전개되고 일한 친선 무드가 고조되는 시기에 이런 파렴치한 사건을 문제 삼는 것은 분위기를 해치고 깎아내리는 것이 된다고. 애초에 그는 한국 국적이고 공화국 공민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했다. 사회주의 환상이 고조되고 있는 '천리마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 조총련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한, 파란 귀신불 같이 타오르는 침묵 나의 긴 여행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을 무너뜨린 청년들을 만나고 싶어서 한국에 유학하려 했으나 박정희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한 탓에 갈 수 없었다. 북쪽 나라에서도 추방당했는데 말이다. 이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개인이 자유롭게 살고, 생각하고, 발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두 개의 국가에서 추방당하고, 배제되어, 망명자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이 나라에 남아 생활하는 의미를 묻기 위해 부모님의 역사를 알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히로시마로의 첫 여행은 침묵과의 만남이었다. 조선인들은 확실히 존재했으나, 피폭자로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가난한 원폭 슬럼에 살면서도 피폭 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버려진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싶었다. 나는 원폭 슬럼의 피폭자 집에 기숙하며, 그곳 할머니와 함께 작업화를 신고 실업대책 사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피폭자를 발굴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도, 어느 탄광에서도, 그 시대에 일본의 정책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를 구술했다. 자아비판이나 전쟁 책임은 전혀 없이. 그러나 실제로 가장 고통받은 동포들은 일본어가 서툴고, 조선어도 소박하며, 말할 수 있는 단어조차 부족했다. 그런 사람들과의 작업은 침묵을 듣는 일이었다. 그들이 더듬더듬 말할 때의 표정이나 침묵, 그것은 대단했다. 주름 속에 깊이 새겨진 눈 속에서 파란 귀신불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마음, 그것이 눈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침묵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영화 제작의 계기가 되었다.   원폭 슬럼에서 만난 할머니를 찍고 싶었다 말이 필요 없는, 일상만을 영상에 담고 싶다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전쟁 전에 먼저 온 남편의 부름을 받고 히로시마에 왔다. 그때 폐품 수집을 위해 조선인 슬럼 밖으로 나갔다. 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자신을 보는 눈에 놀랐다고 한다. 문명인일 것 같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보는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고, 짐승의 눈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마비된 듯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거리를 걷다 보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은 마치 짐승을 보는 눈 같았다. 내가 마치 짐승의 자식인 것처럼. 나는 얼어붙어 걸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이 싫어졌다. 사랑하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라고. 겨우 여섯 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원폭 슬럼에서 만난 그 할머니는 자신들을 보는 일본인들이야말로 짐승의 눈을 가진 짐승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걷던 어머니가 일본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그녀와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조선인 1세대는 그토록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나락의 밑바닥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웠다. 바닥에서 그들을 지탱시켜준 것은 일본인들과 맞서며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2세대는 그들의 눈을 짐승의 눈으로 생각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짐승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고 불리는 원폭 슬럼에 사는 그녀의 집 부엌 냄비는 언제나 반짝였고, 이불 시트는 새하얗고, 그녀 자신도 언제나 풀먹인 마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긴 일본인 이번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에서도 강제로 연행되어 황민화 교육의 강요 속에서 변해간 조선인의 '한'을 다루었다. 일본군'위안부'도 그것만을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천황제를 내면화해간 남자들, 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완전히 자신을 빼앗겨 간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를 보고 "어디에 '위안부'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안부'라는 시스템은 국가 폭력에 의한 일상적인 강간, 윤간이다. 그녀들은 '매춘부'가 결코 아니며, 천황의 군대에 의한 성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들에게 한 푼의 보상도 없었다. 그것을 정당화한 논리는 천황제였고, 천황제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는 '위안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투력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군이 위안소를 관리했다. 살육의 현장에서 돌아온 남자들이 그 위안소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살해하는 병사로 만들어진 남자들의 성 또한 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고, 삶도 빼앗겼다. 나는 과거에 나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일본인이 일본인 자신으로 있는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시아의 눈으로 침략자를 보는 상상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전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은 '모모타로'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상력을 되찾으려면 역사의 진실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있다. 영화 <아리랑의 노래>를 본 한 학생이 말했다. "박수남 씨는 '하얀 한의 길'을 걸어왔지만, 가해자인 일본인은 '빨간 한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을까."     관련 상영작품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 일본 | 박수남 | 1991년 상영 기간 : 8월 14일(수) ~ 8월 20일(화) 🧶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영화 보러 가기

    오이와케 히데코, 웹진 <결> 편집팀

  •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024년 논평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1부>   0811_결-01.jpg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은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행보를 이어왔다. 1991년 김학순 씨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이후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피해를 극복해가면서 세계 분쟁 지역에서 고통받은 여성 인권 피해자를 위해 활동하는 인권운동가로 성장했다. 피해자와 공감하며 펼친 이들의 지원 활동은 국가를 뛰어넘은 국제연대 활동이었다. 최초의 증언으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피해를 뛰어넘어, 전시 하 보편적 여성 인권 문제를 각인시키며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여성 인권 신장과 평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유하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 과정에서 위안소의 존재부터 강제 동원 사실 등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기록물이 발굴됐다. 피해자들의 증언 기록도 광범위하게 생산됐다.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기록도 상당했다.  20여년 동안 축적되어온 이 기록물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MOW)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이가 있었다.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IAC) 위원을 지낸 서경호 교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에 13세기부터 집적되어 온 역사적인 소장 도서가 고스란히 소실되는 안타까운 사건을 경험한 세계가 기록유산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출발했다. 1995년 유네스코는 인류의 다양한 기억을 보호하고 세계인이 공유하자는 취지를 밝히며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는 이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록유산 등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록물 자체의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이다. 여기서 '세계적 중요성'은 기록유산에 담긴 역사적 의미나 일괄적 내용 해석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해당 기록유산이 지니고 있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 가치와 보존 필요성을 중시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인권 회복 운동을 지켜봐온 서경호 교수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있어 핵심 요소인 '세계적 중요성'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서 교수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전문가들에게 등재 추진을 제안했다. 곧바로 수용되지는 못했지만 서 교수의 제안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실체화되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로 변화시켜 간 것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2016년  7개국 14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위한 국제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원회)가 영국 왕립 전쟁박물관과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이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등재를 신청했다.  그러나 세계시민사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노력은 곧 일본의 공격에 가로막혔다. 일본이 "유네스코를 정치화(politicization)한다"고 호도하면서 한국과의 갈등 사안으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일본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 운동에 대한 세계사적 의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사료의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 쟁점기록물(contested/questioned nomination)로 분류하고 논쟁화 했다. 또 이에 발맞춰 일본의 일부 시민단체가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라는 제목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까지 했다.  2017년 유네스코 사무국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장을 정치의 문제로 만든 것은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측 신청자와 공동등재를 전제로 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결정 후 지금까지도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등재가 허락된 것도, 거절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부유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결성되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활동은 초기에는 한국정부가 주도했다. 2012년 한국과 일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할 때 한국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되었고, 2014년 여성가족부가 이어받아 추진했다. 여성가족부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재청 등과 공동으로 ''위안부'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2017년에는 등재를 목표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이하 사업단)을 구성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당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도 없지 않아 일본이 '정치적 목적'이라고 비판할 개연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5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및 국제협력위원장,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 유엔경제사회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신혜수가 단장을 맡으면서 방침을 바꾸었다. 시작은 한국정부가 주도했지만 등재 주체와 이후 등재 활동은 시민사회가 이끌어가기로 한 것이다. 등재 방식도 한국 단독이 아닌 관련 국가들과 함께 공동등재 하기로 결정했다. 또 등재 주체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운동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하 '2000년 법정')'의 틀을 복원하기로 했다. 사업단은 한국 내 일본군'위안부' 관련 박물관 및 단체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일본군'위안부'역사관(나눔의집),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민족과여성역사관(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등의 동의를 얻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한국위원회(이하 한국위원회)>를 결성했다.  원고 삽입 사진1_ 2015_국제연대위원회결성식 (1).jpg 그리고 국제적 연대체를 구성하기 위해 '2000년 법정'에 참가했던 국가 및 단체와 중국에 연락했다. 일본은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과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 등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활동은 단체 차원의 참여가 아니라 기록물을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체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일본위원회(이하 일본위원회)>를 구성해 참가했다.  원고 삽입 사진2_ 2015_국제연대위원회결성식2 (1).jpg   필리핀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인 <릴라필리피나 로라스 센터>가, 타이완은 <타이페이시 부녀구원기금회>가 참여했다.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는 일본의 네트워크에 힘입었다. 일본에서 인도네시아 피해자 지원과 운동을 함께 해온 시민운동가와 인도네시아 운동가가 연대, <인도네시아 일본군'위안부'네크워크>를 만들어 참여했다. 동티모르는 일본동티모르전국협회 대표인 마츠노 아키히사(松野明久) 교수가 협력자로 합류한 동티모르 HAK협회(동티모르 인권협회)가 참여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Foundation of Japanese Honorary Debts)>이, 중국에서는 상하이사범대학 내에 있는 <일본군'위안부'연구소>와 전중국변호사협회 대일배상청구위원회 소속 변호사의 법률사무소 <팡위안법률사무소>가 합류했다. 북한측과도 협의하였다. 2015년 당시에는 공동등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던 북한은 이후 2016년 등재신청서를 제출할 때까지 확정적 답신을 하지 않아 아쉽게도 참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2015년 5월 21일, 합류가 결정된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네덜란드 등 총 8개국의 14개 단체[1]가 모여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합의를 도출한 국제연대위원회는 결성식에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합의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등재 활동에 들어갔다.  합의 내용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물의 공동등재를 목표로  설정한 다음 등재 주체는 국제연대위원회로 할 것, 전반적인 준비 업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이 담당할 것, 등재 신청 자료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관련 기록물, 세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지원 운동 자료를 포함할 것, 그리고 각 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 기준에 적합하도록 주의 깊게 선정하고 목록화할 것 등이었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합의문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협의를 위한 국제회의에서 채택됨  2015년 5월 21일, 서울, 대한민국  일본군'위안부' 피해로 알려진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한 인권 유린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이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과 여성 인권 운동 단체들은 오늘날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 피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전쟁으로 인해 처참히 짓밟혀버린 여성 인권에 대한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격과 증언, 관련 기록들과 세계적으로 진행되어온 지원 운동들을 담은 자료는 역사적 유산으로서 기록화하고 보관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극적인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며 미래세대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기록물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등재하기 위하여 협력할 것을 동의한다. 우리는 공동등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하며, 아래의 조항들에 합의한다. 1.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하여,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협력한다.   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사무국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 사업단(한국여성인권진흥원 내)이 맡아 공동등재를 위한 전체적 준비 과정을 추진한다.  3. 우리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 기준에 적합하도록 주의 깊게 선정하고 목록화하여 등재신청서를 작성하기에 알맞은 형태가 되어야 함을 숙지하고 있으며,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등재 기준인 진정성·희귀성·원본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한다. 4.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본부에 공동등재를 하기 위해 각 기관이나 단체가 보유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사본을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 사무국에게 2015년 하반기까지 제출한다.  5. 국제연대위원회의 각 단체나 개인은 기록물의 사본을 제출할 때 등재 기준의 하나인 기록물 관리·보존 계획을 작성하여 같이 제출한다. 관리·보존 계획은 사실에 근거하며 실현 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기록물은 각국이 소장하여 관리·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각 국의 상황상 기록물 관리 및 보존이 어려울 경우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협의하여 관리·보존한다.   6.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보유한 다른 기관이나 개인이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를 통해 등재를 하고자 할 때에는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추가로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국제연대위원회 참가단체나 개인은 국제연대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공동등재 이후에도 추가적으로 기록물들을 올릴 수 있다. 7. 우리는 공동등재에 관한 사항이나 관련 정보를 공동등재 국제연대위원회의 합의 없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을 것을 합의한다.  서명   대한민국 |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한국위원회   중국 | 상하이사범대학교 '위안부'문제연구소 수즈량(Su Zhiliang) 일본 |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위한 일본위원회 대만 | 타이페이시 부녀구원기금회(또는 대만위원회) 강슈아(Kang Shu-hua) 네덜란드 |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브리지뜨 밴 할더(Brigitte van Halder) 필리핀 | 릴라필리피나(또는 필리핀위원회) 레칠다 엑스트라마두라(Rechilda A. Extremadura)   원고 삽입 사진3_ 2015_일본위원회 결성회의 (1).JPG     세계 전문가들과 공조… 세계기록유산 경향성에 부합한다 인정 사업단은 등재 주체로 국제연대위원회를 결성하고, 외부 협력자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및 여성 인권 관련 전문가들을 섭외했다. 관련 전문가들의 추천서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과 같이 공문서로만 구성되지 않는 기록물의 등재에 필요 요소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인권위원회 산하 <차별방지 및 소수자보호에 관한 소위원회(Sub-Commission on Prevention of Discrimination and Protection of Minorities)>에서 '전쟁 중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관행' 등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한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 전시 상황에서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그와 유사한 형태 특별보고관)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대 교수, 한국의 정진성 서울대 교수, 타이완의 전문가 쥬더란(朱德蘭) 등 세계의 일본군'위안부'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추천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또 1993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조사하고, 1994년에 보고서를 발간해 유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한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찾아가 사무총장의 추천서도 받기로 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이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저명한 세계적 인사들과의 공조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갔다.  원고 삽입 사진4_ 2015_자메이카회의 (1).JPG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를 위한 기록물 군의 제목에 대한 논의도 주요 결정사항 중 하나였다. 제목에서 기록물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업단은 먼저 '일본군'위안부':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긴 여정('Comfort Women': A Long Journey Seeking Justice and Peace)'을 제안하고, 여러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2]  태국의 전문가가 '정의(Justice)'라는 표현이 배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정치적인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정치적 논쟁의 여지를 피하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를 제안했다. '피해자'도 해석적 언어이기에 일본군'위안부'만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도 덧붙였다.  사업단은 태국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국제연대위원회의 동의를 구해 등재신청 기록물군의 최종 제목을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Voices of 'Comfort Women')'로 정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신청 기록물 종류의 경향은 종이로 된 단순한 문서뿐 아니라 시각적 자료, 비디오 같은 전자적 자료 등을 포함하는 추세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여러 매체로 된 통일적 기록물이라면 좋은 기록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특히 지금까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적이 없는 여성들의 피해에 대한 기록군이라는 점도 부각해야 할 부분이었다.  피해 여성들이 직접 증언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최근의 세계기록유산의 경향성에 가장 부합하는 소중한 기록물군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또 등재 주체인 국제연대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공동등재일 경우 참가국이 많을수록 좋으며, 무엇보다 세계기록유산이 아직 하나도 없는 북한[3]과 기록물 보존 환경이 열악한 동티모르 등이 함께 한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추구하는 방향과 매우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등재 자료 구성에 대해서는 국제연대위원회 관련국 이외 미국, 영국, 호주 등 타국의 국가 기록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도 공동등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만일 공동등재가 안 될 경우 등재 동의를 받고 자료를 포함할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여러 전문가의 설명과 조언을 종합한 결과, 준비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세계적 중요성' 요소를 갖추고 있고, 등재 신청 주체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추구하는 가치와 원칙에 잘 조응한다고 판단한 사업단과 국제연대위원회는 곧 어떤 기록물을 선별하고 어떻게 구성할 지, 등재를 위한 실무 작업으로 활동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각주 ^ 타이완을 하나의 국가로 취급하여 8개국으로 했으나, 이후 타이완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중국의 항의와 타이완 단체 수용으로 등재신청서 및 신문 등 인터뷰에서는 국제연대위원회 7개국 14개 단체로 하기로 했다. ^ 사업단은 2015년 8월 22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자메이카에서 주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관련 가이드 - 등재지침서 설명, 케이스 스터디>회의에 참석하여, 관련 전문가들의 실제적 조언을 들었다. ^ 2015년 초 접촉할 당시 북한측이 긍정적 답변을 하였기에 국제연대위원회의 잠정적인 구성원이었다. 자메이카 회의가 열리고 있던 2015년 8월까지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사업단은 북한이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혜인

  •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2024년 논평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2부>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기록물이 '세계적 중요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세계적 중요성'은 기록물이 가지는 '역사 서사'로, 다음과 같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기록물이 가지는 시간성(Time), 장소(Place), 인간(개인)의 업적(People), 주제(Subject/Theme), 표본(Form and Style), 그리고 사회적·정신적·문화적 중요성(Social·Spiritual·Community Significance) 등 여섯 가지이다.  '시간성'의 조건은 인류 사회의 가치 변화 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특별한 방법으로 그 시기를 반영하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기록물이어야 한다. '장소' 조건은 일정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물이 세계사 또는 세계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지역적 정보를 지닌 기록물이어야 한다. '인간의 업적'은 세계사 또는 세계 문화에 기여한 인물에 관련된 기록물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표본' 조건으로는 뛰어난 미적 양식을 보여주는 기록물이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상의 조건을 충족한 기록물이 사회적·정신적·문화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세계의 특정 문화권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기록물이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서 기록물 자체가 진본이어야 하고, 희귀성을 지니면서, 세계에서 유일하며 대체불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물이 소실되거나 훼손될 경우 인류의 기억과 유산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다고 판단되는 기록물이어야 등재 대상이 된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기록물의 범주가 결정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처럼 단일 국가의 자랑스런 역사적 기록물이 대상일 경우 단일한 하나의 기록물군이 대상이 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이 전쟁, 식민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중첩된 사건은 피해와 가해라는 입장에서 역사의 서사를 점유하려 하기 때문에 기록물의 범주가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단순히 정부 문건 등 문서 기록물만으로는 '완전한 역사'를 그려내지 못한다. 제국이나 권력자의 언어로 생산된 소위 '공문서'라고 불리는 문자적 사료 뿐 아니라, 피해자가 체현해 낸 '기억'이라는 비문자적 기록물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200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가이드라인을 개정해 문자와 비문자, 영상, 가상기록 등 디지털 자료까지 아울러 광범위한 기록 매체와 방법을 기록유산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범주를 넓혀 놓은 것도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약자의 역사를 인류사회가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 결정이었다.    일본군'위안부' 역사가 가지는 '세계적 중요성'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사건은 1931년 만주사변 전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군인, 관료, 헌병 등이 직간접적으로 여성을 강제로 동원해 일본군 수용소 내부 또는 전장지 주변에 설치한 위안소에서 정신적, 신체적 노예 생활을 강요한 것으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규모의 여성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벌어진 사건으로만 인식했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에 머물렀을 것이다. 실제로 심각한 전시 중 강간과 성노예 문제임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 진실이 널리 알려지고 논의되기 전까지 방치되어 왔다.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이 사건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공개 증언과 함께 전시 성폭력 및 여성 인권에 대한 가치 변화, 여성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평화에 대한 인식 등 피해자와 세계 시민사회가 만들고 발전시킨 변화야말로 우리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지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의 피해자 김학순이 공개 증언을 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피해자들이 연이어 증언에 나섰고, 세계 시민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시민운동을 전개해 갔다. 피해국 뿐 아니라 당사국인 일본 정부도 진상 규명 작업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통해 일본군에 의한 여성 강간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인권 침해의 정도를 인정한 바 있다. 이 문제는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궁극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시 여성 폭력 문제는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 규정에 반영되어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및 강제 불임 수술 등을 처벌 가능한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는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여성과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던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를 흔들고, 나아가 여성 인권과 관련해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규범과 가치를 이끌어낸 역사가 되었다. 이는 곧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활동들을 기록한 기록물이 '세계적 중요도'라는 조건을 충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성폭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공식석상에서는 터부시되거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가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기록물을 은폐하거나 조직적으로 폐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기록물이 소실되거나 훼손될 경우, 1990년대 이후 강화되어온 여성 인권 가치 등 인류의 기억과 유산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할 강력한 이유이다.    등재 위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범위와 분류 한편으로 등재 신청 자료의 범주를 논의해 온 국제연대위원회는 현재까지 발굴되어 있는 모든 일본군'위안부' 기록을 신청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이어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각국의 국가기록원, 문서보관소, 박물관, 자료관 등 공공기관 소장 기록물 목록을 정리한 다음 다시 각국과 기관에 연락해 공동등재 의사를 확인하고, 허가를 구했다. 또 민간단체, 민간 설립 박물관 등에도 확인했고, 개인 소장 자료도 일일이 조사했다.  그 결과 영국의 왕립전쟁기념관이 공동등재를 받아들여 국제연대위원회와 함께 공동등재 기관이 되었다. 국제연대위원회 8개국과 미국, 호주, 영국의 문서보관소 등 총 20개소의 공공기관에서 등재 신청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민간 박물관 2개소와 개인 2명의 소장 자료도 등재 신청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등재 신청한 기록물은 총 2,744건이었다.    국제연대위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시기부터 피해자들과 세계 시민의 인권 회복 운동까지로 명시했다. 이에 기반해 관련 기록물은 ①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알 수 있는 공문서와 사문서, ② 피해자 생산 문서, ③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운동 기록 등 3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그 상세는 다음과 같다.    ① 공문서는 1931년부터 1956년까지 전 시기와 전범 재판까지의 기록물로, 일본군'위안부' 정책과 위안소 운영의 역사적 원인, 경과, 결과를 나타내는 공문서 및 당시의 사문서와 1990년 이후 한국 등 피해국 정부에서 진상을 조사한 문서를 포함한다.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기록물 총 563건을 목록화했다.  ② 피해자 생산 문서는 1990년 이후 피해 증언, 목격자 증언, 치료 기록, 심리 치료를 위한 그림과 작품 등 피해자들이 생산한 문서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기록물은 모두 1,449건이다. ③ 시민단체 운동 기록으로는 국제연대위원회에 포함되어 있는 14개 단체의 활동 기록 중 영향력이 컸던 대표적 운동을 중심으로 목록을 정리했다. 이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기록물은 총 732건이다.     2016년 국제연대위원회는 신청 자료 목록을 선별하기 위해 세계기록유산 및 기록학 전문가와 함께 제2차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심도있게 논의한 부분은 피해자 증언의 '원본성'과 '진실성' 조건에 관한 문제였다. 즉, 한 피해자가 여러 번 증언한 경우 어떤 것을 원본으로 취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피해자의 증언 안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서 말하는 '진실성' 조건을 어떻게 판단 혹은 심사할 것인가와 관련한 문제였다.  당시 참가했던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서는 피해자가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증언하거나 조금씩 변화하면서 증언해도 그것은 하나하나가 별도의 기록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원본'이라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 증언에서 역사적 사실과의 정합성은 역사 연구에서는 필요한 요건이지만, 세계기록유산에서는 피해자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 그 자체가 중요하기에 '진실성'을 가진 기록물로 보았다. 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증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의 다양성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와 '정치화'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집행이사회가 국가 개입 강화 규정을 개정 가이드라인에 채택하기 전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같이 여러 국가가 공동등재 신청을 할 경우 국가 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홈페이지에 직접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사무국에서 등재 신청서를 접수한 후 국제자문위원회((IAC.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산하 심사소위원회(RSC. Register Subcommittee) 즉, 전문가 집단을 두어 접수된 신청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조건에 부합하는지 심사하게 했다. IAC는 RSC의 결과를 참고해 심사한 다음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등재 권고를 하고, 이를 사무총장이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2015년 5월, 국제연대위원회는 2,744건의 목록을 작성해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홈페이지에 등재 신청을 완료했다. 작성 과정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규탄하는 내용을 기재해야 한다는 의견, 일본군'위안부'를 성노예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견, 일본군'위안부' 피해 문제는 일종의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혹은 대량 학살)'이고,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사건이라는 의견 등이 제기됐다. 사업단은 전문가와 상의해 의견 중 일본 정부에 관한 내용은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어 신청서에 싣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성노예'가 본질이지만 일본이 '정치화' 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노예적 상태'라는 용어로 대치해 작성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과 미국의 모 단체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동등재 형태로 만든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리고 등재 심사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2017년 4월 17일 전문가 심사소위원회(RSC)에서 심사한 결과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록물이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기록물"로 평가했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신청서 내에 일본군'위안부' 사건을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대량 학살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전해왔다. 덧붙여 RSC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의 역할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를 등록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비교는 적절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신청서를 다시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이어 수정해 제출할 경우 IAC에 전달될 것이며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IAC가 2017년 9월 회의에서 수립한 조언에 따라 등록부에 등재할 새로운 항목에 대한 결정을 발표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이 등재된다면 굳이 신청서에 홀로코스트나 캄보디아 대량 학살과 비교해 기술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범죄성이 증명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따라 RSC가 권고한 대로 수정해 2017년 4월 23일 최종본을 제출했다.  당시 국제연대위원회는 이미 RSC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 "대체 불가능하고 독특하다"고 평가했기에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에 매우 희망적이었다. 한편으로 신청서를 제출한 일본 측 행보가 일본 정부의 적극적 관여 속에서 추진된 것임을 파악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강력한 외교적 수단으로 유네스코 사무국을 겁박할 것을 예상해 최대한 원칙에 맞는 방법으로 유네스코 측의 의견을 수용하며 적극적으로 프로세스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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