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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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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흔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부터 이미 해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군인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동원해 왔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송연옥은 여러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상하이 사변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부국강병과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 유곽 일본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대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많은 해외 침략전쟁을 저질렀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위안부' 제도가 없었을까? 19세기 중엽 당시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제국 일본은 그 취약점을 군사주의로 메우려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이라는 구호 아래 자원 확보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나섰다. 이때 노동력으로 동원된 죄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국영 유곽이었다. 이 기획을 정부에 제안한 이는 개척사(開拓使)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로, 그는 개척사가 자금을 융자한 다음 도쿄 요시와라 유곽의 성매매 업자에게 유곽의 경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1872년의 ‘예창기해방령’과 1873년의 경기 불황으로 개설 직후 바로 폐업하고 말았다. ‘예창기해방령’은 서구 열강들이 예창기에 대해 인신매매된 노예라 비난하자 메이지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서 빚 때문에 몸이 묶인 예창기들의 해방을 지시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예창기가 해방되었으나, 여성들을 옭아맸던 ‘전차금(前借金. 나중에 갚기로 하고 미리 빚으로 쓰는 돈) 제도’와 유곽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성매매 제도를 통제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 철저한 성병 검사 실시, 세금 징수 등 공창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즉 유녀들을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업자에게 공간을 빌려서 자유영업을 하는 자로 보고 그 형식을 바꾼 것이다. 가시자시키(대좌부(貸座敷))와 창기(공창)란 신조어가 생긴 것이 이 즈음이었다. 전차금은 높은 이율로 계속해서 창기의 몸을 구속했다. 자본이 빈약한 일본에서 성매매업은 기간산업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경우 성산업에서 납부되는 세금이 지방세의 44%를 차지했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국가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방으로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다 1900년부터는 업자의 관리만 각 지방이 맡고 창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개항한 부산에 요시와라 유곽이 문을 연 이유 1876년, 일본은 운요호가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이 포격했다고 억지를 써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조약 체결 당시 전권변리대사로 조선에 온 이가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리고 1880년, 그가 도쿄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유곽인 요시와라의 나카고메루가 부산에 상륙했다. 개항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나카고메루가 부산이라는 낯선 토지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구로다의 보증이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루의 업주였던 아카구라 토키치(赤倉藤吉)는 ‘상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 부산으로 왔다[사진 1]. 당시 그는 수하에 있던 창기 10명을 빚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부산에 데려왔다. 부산에서의 성매매는 일본의 ‘가시자시키 영업규칙’이 준용되어 거류지 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아카구라는 3년 후인 1882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 내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조선이 잇따라 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과 대면하며 국가적인 체면을 계산하게 된 일본은 부산에서 공창제를 중지시키고, 인천에서는 애초에 가시자시키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 숨겨진 조선전쟁 그리고 성폭력 이후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면서 대륙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 일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894년 봄부터 거세진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가 청나라보다 3배가 넘었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 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일청전투실기』[사진 2]라는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민가를 습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보여주고 일본이 정의롭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그림과 달리 일본군이 만행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일제 육군 창설자이자 일본군 최고 책임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청전쟁미담』이라는 책에서 ‘군부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을 엄벌로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도 역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썼다. 청나라를 향해 북상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을 자행한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농민군을 대량 학살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그 전리품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 ‘성적위안시설’을 개설하였다. 1896년 타이베이현령(台北縣令) 갑 제1호 ‘가시자시키 및 창기 취체규칙’의 제정은 타이완에서 공창제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요리점의 발명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에서처럼 조선에 노골적으로 공창제를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 서구 열강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주요 11개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울에는 9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영문 잡지에 실은 이도 서울에 주재했던 서양인이었다. 이런 정세를 의식한 일본이 공창제를 대신해 발명한 것이 ‘특별요리점’이었다.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 혹은 ‘작부’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를 은폐하며 민간 업자에게 부도덕성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가즈키 겐타로가 펴낸 『조선국 부산 안내』(1901)에 실린 광고[사진 3-2]를 보면 요리점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옆에 가시자시키, 즉 유곽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아 성매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일본인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시자시키가 아닌 요리점이라 할 때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세수입의 증가였다. 요리점은 가시자시키보다 세율이 높아서 고액의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창제를 금지한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더 많이 얻게 된 이익을 바탕으로 공창제를 재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군의들이 증언하는 '위안소' 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지배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을 군사력으로 짓밟아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제공, 군용지의 수용(収用) 등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은 군대가 운용하는 ‘성적위안시설’을 설치하였다. 제4군 군의 부장을 역임한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는 회고록 『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1934)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 철령(鉄嶺. 랴오닝 성)의 병참(兵站)부는 시험적으로 일정한 지역에서 사창을 허가하고 병참 헌병이 단속하고 감시하게 했다.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전에 군의가 성병 검사를 하고 합격자에게는 건강증을 발급, 병사들을 저렴하게 접대하게 했다. (시설) 입구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한 사람씩 점호(点呼)하고 나서 제한된 시간 내에 이용하게 했다. 여기서 후지타는 ‘위안소’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시설이나 관리 방법이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는 ‘위안소’와 같다. 또 후지타는 그런 시설이 1895년 타이완을 점령했을 때부터 있었다고도 썼다. 러일전쟁 중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던 봉천(현 심양)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의관 나카무라 료쿠야(中村緑野) 역시 위안소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내용은 후지타가 쓴 것과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병사를 관리하려고 만든 것임에도 병사에 대한 군의로서의 멸시감이 담겨있다. 드디어 임시 매소제(売笑制, 매춘제)를 허가하게 되었는데 상인을 시켜서 신원에 문제가 없는 만주인 작부를 데리고 왔다. 화류병(성병)에 감염되지 못하게 병사들에게 적절한 방법을 실행시켰다. 옆으로 긴 건물을 벽으로 나누어 각 방마다 출입구를 따로 만들었다. 건물 앞에는 나무로 된 낮은 담을 세우고 입구를 몇 군데 마련해서 혼잡하지 않도록 헌병의 감시 하에 이용하는 병사들을 차례로 방에 들여보내게 했다. 병사들이 수치심도 없이 건물 앞에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로우며 전쟁터가 아니면 못 보는 괴상한 장면이었다. 주목할 것은 글을 쓰는 군인에 따라 사용한 명칭이 다르다는 점이다. 후지타는 사창제라 하고 나카무라는 매소제, 다른 군인은 공창제라고 썼는데, 이 시기에는 같은 시설이라도 호칭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보고 선입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지타와 나카무라의 글이 실린 회고록은 1934년에 간행되었는데,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게 참고하라고 엮은 것이었다. ‘위안소’는 가설 목조건물일 때도 있었으나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4]의 좌측 그림은 봉천 북쪽 국경의 문인 법고문(法庫門)에서 일본 병사들이 여성들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장소가 관제묘, 즉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끄러운 만행을 현지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임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여 유곽을 건설하기까지 했다[사진 5]. 성매매 업소를 한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 단속하기에 효율적이고 위생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04년 안동(현 랴오닝성 단동)에서 개설한 유곽은 '유원지' 라고 이름 붙였다. 유곽의 여성에게는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성병 환자는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다. 여성의 영업 허가 연령은 일본보다 두 살 어린 16세였는데, 16세 미만이라도 성병 검사만 받으면 영업을 묵인했다. 1905년 작성된 규칙을 보면 예기 4엔, 작부 3엔, 중거(仲居. 나카이. 여관이나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 2엔, 하비(下婢. 하녀)1엔씩 매달 병참사령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는 군대가 포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원지는 군정(軍政)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후 민간인 업자에게 불하되었고 군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작부는 연령 규정이 없었으나 1930년부터 만 17세로 정해졌다.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성관리 정책의 연장선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며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한국군의 해산에 반발한 의병들이 일제에 항쟁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더 많은 군대와 헌병을 파견하였다. 의병 투쟁을 어느 정도 진압한 후 1908년 제정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조선에서 성병검사를 포함한 성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는 일본 병사들을 위한 조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마치 조선인들이 성병이 만연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성관리를 요구한 것처럼 꾸몄다. 이후 서울 외의 지역에도 차츰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관리 규칙을 만들었고 1916년에 ‘식민지 공창제’를 전면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성관리 내용을 보면,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달리 창기 허가 연령을 제국의 서열에 맞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내지’는 18세, 조선은 17세, 관동주와 타이완은 16세로 정해 여성들을 식민지나 전쟁터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성관리 정책은 상황에 따라 명칭과 내용을 바꿔가면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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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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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YWCA는 왜 수요시위에 연대하는가 한국YWCA연합회는 지난 2023년 11월과 2024년 2월, 두 차례 주관한 수요시위를 통해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앞장서고 있다. 2024년 11월에는 세 번째 수요시위도 주관할 예정이기도 하다. 한국YWCA연합회가 왜 수요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그 활동과 연대의 의미를 남유진 성평등정책위원장이 소개한다. "지난 30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지난 2023년 11월 15일, '제1622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성명의 일부이다. 한국YWCA연합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이날 수요시위는 여성 인권과 평화를 향한 길에 국내 시민단체들과 뜻을 함께하겠다는 대시민 선언이자 약속이었다. 한국YWCA는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로 창립한 이래 청년운동, 여성운동, 기독교운동, 국제운동 등을 펼쳐 온 운동체이다. 인종, 종족, 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은 하나이며, 독립적 주체로서의 여성과 회원이 한국YWCA연합회의 주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정의로운 탈핵·탈석탄 에너지 전환 사회 구축'이라는 '2024~2025 비전'을 제시하며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설정하는 한편 성평등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등 YWCA 목적에 기반한 운동을 지역 특성에 맞게 추진하는 정책과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한국YWCA연합회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해 온 궤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 수요시위 주관… 맞잡은 손, 연대의 과정 한국YWCA연합회는 2023년 1월부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네트워크(이하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연대와 단체 간의 활발한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분쟁 하 여성 인권 침해 및 성착취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한 결정이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는 한국YWCA연합회 외에도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여성연대, NCCK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이화여대민주동우회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에 관심있는 여성·인권·평화 관련 국내 시민단체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다. 정의연 네트워크에 가입한 이후 한국YWCA연합회는 1622차와 1635차 수요시위를 주관했으며, 2024년 하반기에도 한 차례 더 주관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15일, 1차로 주관한 수요시위에서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직시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 법적 배상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전쟁에 반대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롯해 각종 폭력에 저항하겠다는 평화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이날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의 니시야마 나오히로 '오사카유니온네트워크' 대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기시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죄와 배상을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는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라며 "(연대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말하는 것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모든) 말이 봉오리가 돼서 활짝 피어나고 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수요시위 마지막 순서인 성명서 낭독을 맡은 한국YWCA연합회는 "삼 십여 년간 이 자리에서 1,622회의 외침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사죄와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일본 정부는 끊임없이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부정과 정당화를 도모해왔다"며 "여기에 모인 우리는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하루속히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한 1635차 수요시위 2024년 2월 14일, 2차로 한국YWCA연합회가 주관한 1635차 수요시위에는 특별히 제21차 한·일YWCA청년협의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일본YWCA 청년 활동가들은 연대 발언과 특별 합창을 통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여정에 힘을 실었다. 미카 미나미 일본YWCA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 세대가 한·일의 틀을 넘어 연결되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그 책임과 마주하는 첫 걸음을 떼게 하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에리 카와고에 일본YWCA 활동가 또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홀로 사회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것을 떠올렸으면 한다."는 응원을 전해 환호를 받았다. 특히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함께 연대 발언에 나선 일본 릿쿄대학교 겸임 강사이자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회원인 이령경 작가의 수업을 대학에서 수강한 남다른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이령경 작가의 평화학, 인권 관련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에리 카와고에 활동가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다 건너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선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수업했던 강사와 그 수업에서 눈을 반짝이던 학생은 특별한 현장에서 연대 발언자로 함께 나선 이 우연한 만남에 서로 놀랐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확장하는 '연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여하다 한국YWCA연합회의 연대 목소리는 국외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지난 2024년 3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68)에 참여해 '전시 성폭력과 전후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한 주제 발표를 했다. 2024년 3월 11일부터 22일까지 2주간 본회의 일정이 진행된 'UN CSW68'의 주제는 '빈곤 해결과 젠더 관점에서의 제도와 재정 강화를 통한 모든 여성과 소녀들의 성평등 달성 및 역량 강화 가속화(Accelerating the achievement of gender equality and the empowerment of all women and girls by addressing poverty and strengthening institutions and financing with a gender perspective)'였다. UN CSW68은 장관급 회의인 본회의(Official Meetings), 정부 및 국가기구 운영 행사인 부대 행사(Side Events), UN ECOSOC 협의 지위(편집자주-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비영리 민간조직인 NGO가 유엔에 공식적으로 등록돼 얻은 지위) NGO 행사인 병렬 행사(Parallel Event)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국YWCA연합회가 발표한 부분은 병렬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정의연의 협조를 받아 준비한 발표를 통해 한국YWCA연합회는 한국이 경험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시 성폭력과 이후 피해자가 겪는 교차적인 피해와 빈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제 발표 후 패널로는 우크라이나YWCA 율리아네츠 회장, 한국YWCA연합회 이한빛 간사, 일본YWCA 마이코 활동가, 세계교회협의회(WCC) 니키 목사 등이 참여해 토론과 발언을 이어나갔다. 한국YWCA연합회의 발표와 토론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다시 한 번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여성 인권 향상 위한 함께 걷기 한국YWCA연합회는 끊임없이 굴종을 요구한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여성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인권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 왔다. 이러한 역사와 관점을 기반으로 한국YWCA연합회는 관련 활동을 뉴스레터로 공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와 함께 할 것이다. 또 중점 운동 아젠다인 '탈핵기후생명운동'을 중심으로,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 '전 세계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일'임을, 지속적으로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바로 '연대'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견지하며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운동은 전 세계 여러 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는 등 초국가적 여권 운동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이 수요시위는 1700차를 향해 가고 있다. 그간 두 차례 수요시위를 주관한 한국YWCA연합회는 2024년 11월 세 번째로 주관을 맡기로 했다. 과거에 그래왔듯이, 현재 그렇듯이, 미래에도 한국YWCA연합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에 동행할 것이다. 이 땅과 이 땅이 아닌 곳 모두에 상존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근절하기 위해 함께 걷는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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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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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항일 국민군의 거점 마파니크에서는 일본군의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우고, 이어 소녀들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동원했다. 시간이 흘러 ‘말라야 롤라스’, 즉 ‘자유로운 할머니’가 된 이 소녀들은 이제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전쟁 중 성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다. 필리핀 인권변호사로, 일본군 성 노예 범죄에 대한 법적 투쟁 등 다양한 활동에 함께하고 있는 버지니아 수아레즈 변호사가 말라야 롤라스의 저항과 투쟁 이야기를 전한다. ‘말라야 롤라스(Malaya Lolas. 자유로운 할머니들)’는 필리핀 마파니크 전투의 생존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저항한 ‘후크발라합(Hukbalahap. 항일 국민군)’의 거점이었던 마파니크는 잔인하고 끔찍한 공격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남성들을 총살한 뒤 그들의 시신을 9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녀들 앞에서 불태웠다. 심지어 거꾸로 매달려 있던 한 남성의 입에는 잘린 성기가 물려 있기도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에 이어 일부 소녀들은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됐다. 그 소녀들이 바로 지금의 말라야 롤라스이다.[1] 노년에 이른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마파니크 지역과 학살된 남성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행해진 군사적 폭력과 ‘위안부’ 제도의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말라야 롤라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는 일본군 점령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동시에 전쟁과 군사화 속에서 여성의 신체를 점령하려는 시도에 맞선 저항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일본군의 성폭력에 맞서는 것을 넘어 전쟁 중 여성의 신체를 점령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필리핀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과 군사화에 따르는 악행과 공포를 고발하는 말라야 롤라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말라야 롤라스의 대표적인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이다. 말라야 롤라스는 필리핀 대법원에서 12년에 걸쳐 직무 집행 명령 소송을 벌였다. 필리핀 정부가 일본 대법원이나 정부에 말라야 롤라스 사건을 제소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대법원은 ‘법원 권한 밖에 있는 정치적 문제’라며 이 역사적인 ‘롤라 이사벨리타 비누야 사건’을 기각했다.[2] 말라야 롤라스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에 제소하기도 했다. 필리핀 법정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했지만 벽에 부딪히자 정의를 찾아 외부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말라야 롤라스 사건은 CEDAW에 제출되었다. 2023년 세계 여성의 날, CEDAW 전문가위원회는 19쪽 분량의 문서를 통해 말라야 롤라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구제책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다. 첫째, 피해자들이 겪은 지속적인 차별에 대한 전면적인 배상이다. 여기에는 피해 인정, 공식 사과, 물질적 및 정신적 손해 배상, 존엄성과 명예 회복을 포함한 보상, 재활 및 원상 회복이 포함된다. 물질적 배상은 피해자들이 겪은 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피해의 정도와 권리 침해의 심각성에 비례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둘째, 전쟁 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자 모두에게 모든 형태의 구제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전국적 배상 제도 구축이다. 여기에는 전쟁 참전 용사인 남성과 전시 성 노예 생존자인 여성 모두를 인정해 사회적 혜택 및 기타 지원 조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전쟁 범죄, 특히 제도화된 전시 성 노예 제도의 여성 피해자들에게 보상 및 기타 형태의 배상을 제공해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 개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승인한 기금을 조성하라는 권고이다. 넷째, '붉은 집(Bahay na Pula)' 유적지를 보존하거나 전시 성 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기리고 그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교육 기관(중등 및 대학 교육 포함)의 교육 과정에 필리핀 여성 피해자 및 생존자들의 역사를 포함시키라는 권고이다. 이는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역사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인권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조치이다. 다양한 캠페인, 지역을 넘어 국내외 연대로! 말라야 롤라스는 여성인권단체 ‘카이사 카(Kaisa Ka, 여성자유를 위한 연대)’의 지원을 받아 피해 회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연대 단체 중에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alaya Lolas)’가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 인정을 전제로 한 진정한 공개 사과, 배상, 재활 및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시위 형식으로 진행되며, 3・8세계 여성의 날과 11월 23일 마파니크 피해자 추모일, 필리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일본 총리가 필리핀을 방문할 때, 또는 무역 협정이 논의될 때마다 시위가 이어진다. ‘전쟁반대여성연대(Women Against War)’는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화에 맞서는 캠페인이다. 카이사 카는 모든 전쟁이 영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까지 점령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평화로운’ 시대에도 여성들은 군인들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 이용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말라양 카바타안(Malayang Kabataan. 자유로운 젊은이들)'은 말라야 롤라스를 접한 다양한 학생들의 느슨한 연대 조직으로, 현재 말라야 롤라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다. 마파니크와 ‘붉은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 그들은 전시회와 패션쇼, 기타 기금 마련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카이사 카,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 다른 학생 및 미디어와 협력해 미디어 보도, 방문 및 토론 등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필리핀에는 말라야 롤라스와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활동들이 있다. 청년, 여성, 노동자, 교사, 농부, 어부 등으로 구성된 다부문 조직인 ‘국가민주화운동(KILUSAN. para sa Pambansang Demokrasya)’은 전쟁과 군사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전쟁의 악영향을 폭로하고 말라야 롤라스의 고통을 전쟁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로 강조한다. 즉, 전쟁이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성의 몸을 이용하며, 말라야 롤라스와 같은 성노예 피해자들을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국가민주화운동은 2004년부터 격년으로 평화행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반전 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체인 '전쟁 중지(STOP THE WAR)'는 말라야 롤라스를 전쟁의 악행과 공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중요하게 다룬다. 필리핀이 미국 주도의 군사 동맹에 휘말려 여러 전쟁과 군사화에 끌려들어 가는 상황에서 롤라스의 고통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과 필리핀이 미국-필리핀 상호방문협정(VFA)과 유사한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면서 롤라스의 고통은 다시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단체인 ‘롤라를 위한 꽃(Flowers for Lolas)’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단체인 이곳은 중국 혁명가 후손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연합체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학교에서 포럼을 개최하는가 하면 미디어 포럼, 시위 활동 등을 진행했다. 또 ‘위안부 동상’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위안부’ 동상을 마닐라 로하스 대로에 설치했으나, 필리핀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철거되었다. 롤라를 위한 꽃은 일본 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라진 ‘위안부’ 동상을 찾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고무적인 것은 청년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와 성 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해 왔지만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작성한 대항 보고서는 필리핀 정부가 전쟁 범죄 피해자인 말라야 롤라스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결의안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사회복지개발부를 통해 제공하는 지원 또한 CEDAW의 권고와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많은 단체와 인권위원회는 CEDAW 보고서에 말라야 롤라스의 사례와 문제를 포함시켰다. CEDAW가 말라야 롤라스에게 유리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다음과 같은 여러 조치들이 이어졌다. 2024년 5월 13일, 필리핀 대통령이 대통령실 공보부를 통해 모든 정부 기관에 지시 서한을 발송했다. 또 사회복지개발부의 지원 및 조치와 함께 상원의원 리사 혼티베로스(Risa Hontiveros)가 ‘상원 결의안 539’를 발의, CEDAW 결의안의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했다. 또 외교관계위원회의 상원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여러 개인 및 기업(Tulay Foundation, Wha Chi Foundation, Wilcon Builders, Feedmmix, Prologue Café, Kamuning Bakery, House of Justeas, 목사, 사진작가, 의사, 블로거 등)도 지원 대열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 마파니크 지역 사회에서도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받은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롤라스의 손자와 손녀들은 ‘포토보이스(Photovoice)’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롤라스가 손자, 손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해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세션이다.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학에서 전시되었다. 마파니크 초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은 롤라스의 이야기와 마파니크 포위 공격의 역사를 수업에 포함시켰다. 또 마파니크의 바랑가이 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당하고 살해된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로 약속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제 청년들이 롤라스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홀리엔젤대학, 유니버시티 오브 더 이스트, 앤젤레스대학 등의 학생들은 말라야 롤라스의 사건을 논문 주제로 삼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청년모임(Youth for Nationalism and Democracy)과 카이사 카의 청년 조직 등 다양한 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포럼과 원탁 토론을 주도하고 있다. 재편되는 안보 협력의 이면은 지역 군사화 한편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양국 군대가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서로의 영토에 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는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그리고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체결되었다. RAA는 필리핀과 일본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최근의 연결고리이다. 일본-필리핀 RAA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필리핀, 미국, 일본, 호주 사이의 4자 안보 협력체인 ‘SQUAD’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미국은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규범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지정했으며, 3국 안보 협력, SQUAD, QUAD(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 안보 협력 체제), AUKUS(미국, 영국, 호주 등 3개국 안보 동맹) 프로젝트는 모두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더 많은 동맹국을 참여시켜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목표를 취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방문군협정(VFA)을 통해 이런 협정들이 주로 외국 군대-이 경우에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뿐 필리핀 군대에는 동일한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의 VFA처럼, 실제로 일본군은 세관 및 형사소송 절차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지만 필리핀군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VFA는 미군에게 특권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군 병사가 필리핀 루손섬의 수빅에서 필리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RAA 역시 유사한 사건 발생 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군사적 태세 강화와 전쟁 준비의 결과로 군비 지출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전략과 유사하게 일본 정부는 군사 장비를 과시하며 필리핀에 구매를 유도할 것이다. 필리핀 국민은 군비 지출이 모든 측면의 안보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군비 지출은 사회복지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무력에 대한 의존성만 높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은 실탄 사격 훈련과 기타 군사 작전으로 인한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폐기물과 화학 물질로 인한 위험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 동맹은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의 군사화 심화로 이어져, 필리핀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대리 국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남중국해의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군사적 틀이 아닌 신뢰, 협력,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 안보 체제가 필요하다. 군사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전쟁의 잔혹성과 상처를 상징하는 말라야 롤라스! 말라야 롤라스를 위한, 그리고 말라야 롤라스에 의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가운데 전쟁, 군사화, 외세의 개입과 점령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위안부’ 세대를 막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롤라스와 함께 하는 국제적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각주 ^ [편집자주] 이후 자연스럽게 단체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다. ^ [편집자주] 보고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1,000명 이상의 여성이 납치, 감금된 상태에서 성 노예로 학대당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1951년 일본과 전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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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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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실천인 이유 마침내 일본 <표현의 부자유전> 성사시킨 '시민연대'의 힘 전시를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과 인권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실천!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의미이다. 공공 시설에서 정당하게 계획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와 소녀상 전시가 우익 세력의 협박으로 중단되는 일이 거듭되는 현실을 목격한 일본 시민들의 대응은 <표현의 부자유> 전시였다. 거의 10년에 걸쳐 이 전시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시민들을 연결한 힘이었던 선의와 배려, 열정과 감성, 자발성과 자율성 등이 큰 역할을 했다. 2022년 4월에 개최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일본 소카대 쿠라하시 코헤이 교수가 이에 대해 소개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한국에서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해 건립됐다. 이후 한국에는 80개 이상의 소녀상이 세워졌고, 미국과 독일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당사자국인 일본에는 소녀상이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 소녀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표현의 부자유>라는 전시회다. 이 미술전은 정치적 이유 등으로 거부된 작품을 전시하는 장이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소녀상을 둘러싸고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소녀'라는 표상에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파와 정부 또한 소녀상을 '위안부상'이라고 부르며 <표현의 부자유>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전방위적으로 방해해 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회'는 다시 기획되고 지역을 순회하며 열리는 과정이 지속돼 왔다. 심지어 법적 판단을 구하기도 하고, 전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변호사들이 참여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한 걸까? 방해와 위협으로 거듭 좌절된 일본 소녀상 전시 일본에서 '소녀상'은 매우 강한 혐오의 대상이다. '말뚝을 박고', '얼굴에 종이봉지를 씌우고', '차는' 등 우파 지지자들의 직접적인 파괴 행위가 계속돼 왔다. 또 공격적으로 '폭파'를 언급하거나 '정액을 끼얹겠다'고 발언한 국회의원과 저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이런 행위에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화되는 것과 피해자의 이미지가 '소녀'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는 어떤 경위로 시작됐을까? 계기는 20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을 만나 촬영해온 나고야시 거주 사진작가 안세홍은 도쿄 니콘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 개최를 추진했다. 1년 전 확정된 전시회 상황이 급변한 것은 개최 한 달 전이었다. 사진전을 소개한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우파의 눈에 띄었고, 항의가 거세졌다. 당시 안세홍은 법원에 가처분 절차를 밟아 장소 사용 결정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개최 사흘 전 전시회는 취소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도쿄도미술관에서 'JAALA미술가회의(Japan Asia Africa Latin-American Artist Association)'가 주최하는 <제18회 JAALA 국제교류전>에 소녀상 미니어처와 작가 박윤빈의 유화 '위안부!'가 전시되었다. 그런데 전시회 4일째, 미술관 측이 무단으로 작품을 철거했다. 하지만 이 일은 안세홍 전시 때와는 달리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접한 미디어 아티스트 오에노키 준은 전시가 거부된 작품을 미술관 벽에 프로젝션으로 투사해 보여주는 것으로 전시회 파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항의 운동으로 2014년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가 출범하고, 2015년 도쿄의 갤러리 후루토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되었다. 실행위원회를 이끈 오카모토 유카 씨에 따르면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재질로 만든 동상이라면 일본에서 전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 소녀상 작가 김서경-김운성 부부에게 소녀상을 의뢰했다. 전시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들은 예산이 부족한 전시회 측의 사정을 듣고 직접 자비를 들여 소녀상의 수송을 도왔다. 일본에 반입하기 위해 크기가 큰 조각상은 3등분으로 분할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다시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전시되었다. 작가들은 전시 후 일본을 떠나기 전 "이 소녀상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면서 소녀상 뒷면에 "일본에 남긴다"고 서명했다. 이로써 마침내 일본에 소녀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소녀상은 도쿄도 내 어느 극단의 오두막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무료로 대여되고 있다. 연극 상연이나 영화 촬영 시 대여된 적도 있다. '사라져야 했던' 소녀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녀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9년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이하 아이트리 2019)에서 선보인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 전시이다. 나고야시 아이치현에서 3년마다 열리는 아이트리는 월 관람객 수가 25만 명을 상회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유명 국제 예술제이다. 이 예술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 소녀상이 출품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우파의 협박, 일부 정치인들의 반발 등 논란이 일었고, 결국 개최 3일 만에 전시가 중단되고 말았다. 다음 달에는 일본 문화청이 예술제에 보조금 약 7,800만 엔을 전액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이후 감액 지급). 예술제에 참가했던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겁박하는 이런 행태에 대해 작품 봉인 및 전시 거부,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연대하며 고발했다. 그 후 보조금 지급을 둘러싸고 시와 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다카스 클리닉의 다카스 카츠야 원장, 햐쿠타 나오키, 다케다 쓰네야스, 아리모토 카오리 등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오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에 대한 소환 서명운동[1]을 전개했다. 그러나 2021년 선거관리위원회 조사에서 모인 서명 중 83.2%에 위조 등의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에서 '사라져야 했던' 이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두고 '또 다른 출발'이라 해야겠다. '아이트리 2019'에서 소녀상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독립적인 전시회를 기획하는 주최 단체가 생겨났고, 도쿄를 시작으로 관련 기관들이 협력하는 형태로 연대해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모든 개최 예정지에 우익의 항의 시위와 압력, 방해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투쟁에 힘입어 도쿄와 나고야, 오사카 등에서 전시할 권리를 획득해 갔다. ▶ 연기된 도쿄 전시회 첫 소녀상 전시회 지역은 도쿄였다. 2021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신주쿠의 갤러리 세션하우스 가든에서 기획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는 사전 공지 및 관람 신청을 개시했지만 우파의 방해와 가두 선전이 계속되자 결국 갤러리 대표가 이웃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해 '대관 불가' 입장으로 돌아섰다.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급히 다른 장소를 물색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휴관 끝 중단된 나고야 전시회 '아이트리 2019 사건' 이후 만들어진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를 잇는 아이치의 모임'은 2021년 1월 나고야시 시민갤러리 사카에에서 <우리의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를 개최하려 했다. 역시 방해가 예상되었기에 시설 관리자와 경찰과도 협의하는 등 신중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7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최가 발표되자 가두시위, 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협박이 계속됐다. 게다가 8일에는 갤러리로 수상한 우편물이 도착해 스태프와 변호사까지 퇴거 명령을 받았다. 경찰 입회 하에 우편물을 개봉하자 폭죽 같은 것이 터졌다. 협의를 시도했으나 시설과 행정이 응하지 않고 휴관을 연장해 결국 주최 측은 전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허가 취소된 오사카 간사이전 나고야전의 작품을 이어받은 오사카 실행위원회는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엘오사카(오사카부립노동센터)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간사이>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행사장 쪽에서 '안전 확보'를 이유로 시설 사용 허가를 취소했다. 실행위원회는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7월 9일 사용 불허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이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도 항소가 기각돼 공공시설 전시회를 막을 명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 드디어 개최된 도쿄전 오사카 재판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시설에서 개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은 실행위원회는 전시회 한 달 전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최종 462명에게 341만 2,900엔을 후원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4월 2일부터 5일까지 쿠니타치시민예술소홀에서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를 개최했다. 전시회를 방위하라! 치열했던 도쿄전 안팎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이하 도쿄전)> 전시회에 실제 스태프로 참여한 나는 내부자로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도쿄전에서 가장 치밀하게 준비한 미션 중 하나는 전시회를 지키는 일, 곧 '방위'였다. 먼저 매일 약 40명, 총 240명의 자원봉사자와 7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여 교대 근무 등의 치밀한 경비 배치 계획을 세우고, 법적 조치도 확인했다. 또 경찰과도 협의했다. 역시나! 전시회 개최 중에 40여 개 우익 단체가 몰려와 가두선전을 하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종군위안부를 조작하고 동상을 상징처럼 만들어 그것을 예술이라며 하며 전시하는 너희는 바보냐, 이봐!"라고 스피커로 떠들어댔다. 우익들은 가두선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녀상 전시를 방해했다. 전시회를 무단 촬영 한다든지, 행사장 앞에서 항의문을 낭독한 뒤 실행위원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아예 티켓을 구매해 갤러리에 입장하는 우익도 있었다. 또 전시회를 찾은 우익을 촬영해 유튜브와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평소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발언)'에 대항해 활동하던 방위 담당자는 이들 '요주의 인물'을 식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주의 깊게 감시했다. 현장 밖에서도 각 지역 '카운터 운동[2]'과 연계해 '○○가 부자유전에 간다고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들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했다. 혐오 발언과 함께 우익의 시위가 격해지면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 운동도 격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쿄 부자유전에서는 그런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간사이전에서는 마네킹 플래시몹 퍼포먼스도 조용한 카운터로 진행됐다. 도쿄전 방위 자원봉사자들도 혐오 발언을 동반한 우익의 가두선전이나 도발에 일절 대응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그보다 실행위원들이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 2022>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개최지인 쿠니타치시 지역의 시민활동 네트워크와 연계하는 일이었다. 실행위원들은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자유전에 협력할 쿠니타치 시민을 찾아 '예술전 개최를 실현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이를 통해 경찰과 시설, 실행위원과 쿠니타치 시민의 연대로 안전하게 전시회를 개최할 '방위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한편 공안경찰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초기부터 협의해온 이들이 전시회 진행자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전시 첫날 스태프를 가장한 경찰관이 갤러리 내에 무단으로 진입해 직원들이 그를 저지하는 일이 빚어졌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둘째날 오전에는 전 스태프에게 '공안, 경찰이 쿠니타치시청 명찰을 달고 있다'는 정보가 공유되었고 '경찰은 우리 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주의가 전 스태프에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시설 측이 설치한 방범 카메라 18대 중에 경찰 카메라가 3대 포함되어 있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교육위원회와 경찰에 확인한 결과 정황이 상당했다. 경찰이 가져가겠다고 한 카메라 3대의 영상 데이터는 예술소홀과 시교육위원회 입회 하에 지우기로 했다. '부자유전'의 다른 이름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연대와 선의, 열정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모였을까? 방위 담당의 핵심 멤버와 변호사는 실행위원회, 경험자, 전문가이므로 경찰과의 사전 절차 등 준비는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실행위원회의 인맥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준비 과정을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에서 했기에 직업이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전시장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나중에 보니 개최지의 시민운동가부터 학생, 재일코리안 등 다양했고, 노숙자와 고령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행사장 운영은 재미있게 표현하면 '엉망진창'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재일코리안의 요리점에서 매일 배달해준 도시락은 맛있었다. 반드시 '한국 요리'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 도시락이 역시 이 전시회가 '평화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한 미술전임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기도 했다. 도쿄 전시회를 비롯해 그동안 개최된 지역별 <표현의 부자유전> 모두 전국적인 조직이 아닌, 콜렉티브 방식의 운영이었다. 직업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지만, 선의와 열정으로 함께 모여 함께 실천하고, 함께 해산하는 집합-이산 형태였다. 전시 장소 또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공용이었다. 따라서 협상이나 운영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실천의 의의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이 실천의 첫 번째 의의는 홋카이도대학 현무암 교수가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세이토샤, 202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녀상은 국가 간 대립의 산물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전시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적 연대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실천은 모두 운동 문화의 '친밀권(intimate sphere)'[3] 안에서 '무보수'이자 'DIY(Do it Yourself)', '집단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함께 모여 실천하고 해산하는 집합-이산의 과정에서 가해국 시민들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파트너라는 응답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이 실천은 공공 영역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동안 <표현의 부자유전>은 민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지금은 공공 시설에서 열리고 있다. 물론 우익이 찾아오기 때문에 경비에 대한 우려로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공공 공간 또는 공적 매체에서 '위안부'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없는 일본의 현실에서 이 실천은 '위안부' 문제를 공공 영역으로 가져오게 한 중요한 투쟁이다. 또한 일본 시민운동 자체의 공공 영역으로의 확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 번째로 이 실천을 통해 '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소녀상이 일본에 세워지지 못하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상을 전시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일본 사회의 경우 특정 장소에 건립하는 것보다 전시회 개최를 통해 지역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의 전시회는 도쿄의 실행위원회가 전국 투어를 하는 식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니다. 각지에서 개최될 때마다 지역별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지역의 시민운동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회가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민들은 행정과 경찰, 우익의 편견과 혐오, 폭력 등에 맞서 나간다. 이처럼 일본에서 소녀상 전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연대의 친밀권이 공공권(公共圏)[4]을 쟁취해 나가고, 피해의 기억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이동하며 '기억의 장소'를 확대해 나가는 실천이 되고 있다. 편집자주 ^ 소환 서명운동 : 당시 대표적으로 활동한 이들이 '<표현의 부자유/그 후전>을 잇는 아이치의 모임' 공동대표인 나카타니 유지 변호사와, 표현의 부자유전 도쿄실행위원회 공동대표 오카모토 유카 공동대표 등이다. ^ 카운터 운동 : '카운터스(counters) 운동'으로도 표현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극렬해진 혐오와 인종차별에 맞서 반혐오, 반차별 운동을 전개한 자발적인 시민 운동이다. 일본 내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끈 주역이다. ^ 친밀권 : '당사자 간 연대’의 형태를 포함한 사랑과 지지의 공간을 의미한다. ^ 공공권 : 국가적 공공권, 공적 공공권, 시민적 공공권 등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언론처럼 비국가적이고 비시장적인 영역으로서의 시민 사회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강제나 배제 없는 대화의 공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