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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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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발, 무성의, 냉담에 맞서 싸우다 '관부재판' 이끈 김문숙의 삶 김문숙(1927-2021)은 영화 〈허스토리〉에서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원고단장 문정숙 역'의 실제 인물이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총 10명의 원고단은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원에 제소했다. 김문숙은 원고단과 함께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 사법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는 피해여성 1인당 30만 엔씩을 배상하라"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역사적인 '관부재판'을 이끈 김문숙, 무엇이 그를 '위안부' 운동으로 이끌었을까? 김문숙의 삶의 궤적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문숙의 역동적이고 광활한 삶 전체를 관부재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화여대 약학과를 중퇴한 그는 1963년에 경기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부산에서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세웠다. 1985년에는 초대 부산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김문숙은 이 무렵부터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부산여성의전화, 부산여성폭력상담소 등의 설립 및 운영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특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 직을 맡으면서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자신의 삶을 한 순간도 분리시키지 않았다. 관부재판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2004년에는 사비를 털어 〈민족과여성역사관〉을 설립하고, 역사적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했다. 2021년 작고할 때까지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함께 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김문숙이 남긴 역사적인 기록물들을 이관받아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생관광 반대운동과 김문숙의 부끄러움 사업가로서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던 김문숙은 왜 '위안부' 문제에 뛰어 들었을까? 부산에서 여행사 대표로 사회적 입지를 확실하게 다진 김문숙이 60대에 '위안부' 문제라는 '가시밭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사업가에서 여성운동가로의 변신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김문숙의 전회(轉回)에 도화선이 되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기생관광 정책을 추진하고, 외국인 관광객에 한해 유흥음식세를 면제하는 한편 접객 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과 서비스 교육을 강화했다.[1] 그리고 1970년대부터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의 남성 단체 관광객들에게 기생파티는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소개되었다. 19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는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2] 라는 문구가 버젓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여러 폐해를 파생시킨 기생관광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자 한국과 일본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김문숙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싸워왔지만 근절되지 않는 기생관광을 조직적인 여성 운동으로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하던 중 그는 한 일본인 관광객에게 항의를 받았다. 일본 남성은 "전쟁 시에는 처녀들이 몸 팔러 얼마나 왔는데, 그때야 우리가 돈이 없어 얼마 못 줬지만 지금은 많이 주는데 왜 반대하느냐."[3]고 따졌다. 김문숙은 경악했다. 동시에 여성운동가를 자처해 온 자신이 20세기 최대의 여성 수난사인 ''위안부' 문제' 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4] 부끄러움의 원천은 자신의 무지였다. 김문숙은 역사적 사실을 직접 파악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 조각의 자료'도 찾기 힘든 실정이었다. 김문숙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무성의'했고, 일본 정부는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국 국민들은 '냉담'했다. 때로 결핍이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처럼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한국에 '위안부' 관련 자료가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자료가 없다고 해서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다는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것인가? 그 역사적 맥락에 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김문숙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한국인에게 비판적이었다. "전쟁에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은 그 혼령을 모시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데, 성의 도구로 쓰이다 죽어간 이 여성들은 아무데서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신대 문제는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도 온 동남아를 휩쓰는 일본 남자들의 매춘관광 문제,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매매춘 문제는 여성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매매춘 문제의 뿌리에는 정신대 수난사가 은폐돼 있어요. 정신대의 수난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 민족과 여성의 해방은 불가능합니다."[5] 왜 그토록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을까? 김문숙은 분초를 아껴 움직이면서도 운동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한 자 한 자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직접 글을 쓰고 나서야 자신이 왜 오랫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는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기 명문이었던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재학 중에 군수공장으로 가거나 종군 간호원이 되어 일본에 충성하라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기억에 없었다.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에게 황국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김문숙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학창 시절 '식민지 교육에 세뇌된 철부지'가 아니었다고 스스로 부인하기 어려웠다.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인권 향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왔던 김문숙이었기에 '위안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럽고 통탄스러웠다. 이화여대 중퇴 후 경북 중등교원 양성소 지리과를 나와 진주여고 교사로 일한 것조차 마음에 걸렸다. 일제 말기에 교사 자격증이 있으면 공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교사 자격증부터 따서 동원을 피할 수 있었던 여성이 당시 몇 명이나 되었을까 되짚어 본 것이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 김문숙은 불행한 역사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절박한 심정으로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통시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이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들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조사했다. 그때부터 독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외롭고도 치열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문숙의 삶의 방향은 또 한 번 달라지게 된다. 김문숙은 인생의 목표를 '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완전히 새롭게 설정했다. 김문숙에게는 당장 자료집 출간이 시급한 과제였다. 1990년 자비를 들여 정신대의 자취를 좇은 취재여행기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를 펴냈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자료집 출간 약 한 달 전인 1990년 11월, 김문숙은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천착한 윤정옥 교수 등과 함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인 1991년 5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에 이어 8월에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에 참가하며 '위안부'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늘의 별을 따는 각오로 진행된 '관부재판' 1991년 8월, 피해 생존자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부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에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요즘 서울거리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국민 모두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걸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6]며 고발한 김학순의 증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김문숙은 부산에 '정신대신고전화'를 개통했다. 이듬해인 1992년 1월에는 일본 언론에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조선인 제자들을 정신대에 보낸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온 일본인 교사 이케다 마사에의 고백이 전해졌다. 김문숙은 식민지 시대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낸 사실을 고백하며 "정신대 동원 명령은 거절할 수 없는 천황의 명령"이었음을 밝힌 이케다의 양심선언에 박수를 보냈다.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이 점점 거세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 "군의 관여는 인정되나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7]는 입장을 발표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했다. 김문숙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자비로 냈던 『말살된 묘비-여자정신대』의 일본어판 출간을 결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책 출간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사법적 정의와 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멈출 수 없었던 김문숙은 '하늘의 별 따기'를 어떻게든 시도해야 했다. 일본 법정에서 사법 투쟁을 벌이는 관부재판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이다. 1992년 12월,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부산 군대위안부·여자 정신대 공식사죄 및 배상청구 소송'을 접수했다. 피해자들의 건강 상태와 경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부산에서 가까운 지역을 선택한 것이었다. 1993년 9월 시모노세키지부 제3법정에서 이뤄진 첫 구두변론을 시작으로 1998년까지 총 23번에 걸쳐 진행된 재판. 거동조차 불편한 피해자도 있었지만 변론은 계속됐다. 무료로 변론을 맡아준 13명의 변호인단과 200여 명의 일본 후쿠오카 후원회 회원들의 도움이 컸으나 6년 동안 소요된 경비는 만만찮았다. 김문숙은 그 비용을 기꺼이 떠안았다. 1998년 4월 27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은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에 대해 원고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각 30만 엔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 중 유일하게 원고의 청구가 인용된 역사적 판결이었다. 물론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시모노세키 지부의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소송을 기각한 데 이어 2003년 최고재판소마저 항소를 기각해 원고측 최종 패소가 확정됐지만 1998년 판결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93세에도 김문숙은 역사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관부재판 과정에서 김문숙이 가장 실망한 부분은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죄의 의무는 없다는 재판부의 태도였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도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입었다. 이는 김문숙이 역사 교육에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 주변적 위치에 놓인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모으는 일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04년 9월, 사재 1억 원을 들여 조성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민족과여성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MBC 다큐에세이 그 사람 - 허스토리 실제 주인공 수향 김문숙>에는 매일 역사관에 출근해 방문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역사의 진실을 강조하는 김문숙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전 재산을 여성운동에 내놓을 정도로 배포가 컸지만, 김문숙의 생활은 소박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김문숙의 일상이 다큐멘터리에서 잔잔하게 조명되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김문숙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김문숙이 펴낸 책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창문을 닫고 원고지를 당겨 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일까?" [8] 인생을 '배움의 연속'이라 생각했던 김문숙은 93세에도 일과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21년 김문숙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역사를 공부했던 김문숙에게 '앎'이란 정의, 윤리, 용기, 자긍심과 같은 뜻이었다. 김문숙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려웠던 한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민족과여성역사관〉을 건립하고, 5톤 트럭 2대 분량의 역사 자료를 평생에 걸쳐 모았다. 일본 정부의 오리발, 한국 정부의 무관심, 한국 사회의 냉담함과 맞서 싸워온 김문숙의 삶이 그 속에 켜켜이 녹아 있다. '김문숙 아카이브'가 곧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역사에서 길을 찾고 싶다. '김문숙 아카이브'에서 역사의 난제를 대면하고, 그 해법의 단초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각주 ^ 박정미, 「발전과 섹스-한국 정부의 성매매관광정책, 1955년-1988년」, 『한국사회학』 48(1), 2014 참조.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외 민족과여성 역사관, 2018, p.10.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12. ^ 김문숙, 「정신대를 두 번 죽인다」,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32.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33.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64에서 재인용. ^ 김문숙, 『소녀와 할머니』, 앞의 책, p.72. ^ 김문숙, 「소인의 탄식」, 『사월의 비는 오월의 꽃을 실어온다』, 예인당, 1993,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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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자료해제 위안계장 출신 일본 군인이 본 것과 말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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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계장 출신 일본 군인이 본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우한병참』을 통해 읽는 '위안부'와 위안소 일본군 사령부 위안계장으로 직접 위안소 관리를 담당한 야마다 세이키치의 저술 『우한병참(武漢兵站)』은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공간으로 존재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한일관계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를 연구해 온 후루하시 아야가 『우한병참』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일본군의 강력한 관리 아래 운영된 중국 우한 지역의 한커우특수위안소의 상황, '위안부'로 일한 조선인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기록의 행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들을 정리했다. 1014_결_자료해제-01.jpg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나 '위안소'에 관해서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관련 기록물은 1990년대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잇따른 공개 증언으로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사회적인 주목을 받은 후 실상을 조사하기 위한 중요 사료로 주목받았다. 1978년에 출판된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清吉)의 저술 『우한병참(武漢兵站)』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중국 우한(武漢) 한커우(漢口) 지역에 있던 '한커우특수위안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위안소 거리'를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인 야마다는 일본군 사령부 위안계장으로 직접 위안소 관리를 담당했기 때문에 위안소가 일본군에게 어떤 공간으로 존재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유곽 같은 겉모습으로 일본군의 강력한 관리 아래 운영된 위안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한병참』에 담긴 기록물을 통해 당시 위안소 상황과 '위안부'가 된 조선인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20개 위안소에 여성 280명이 있었던 위안소 거리, 한커우특수위안소 1900년생인 야마다 세이키치는 1941년 10월부터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중국 우한병참사령부에서 부관(副官)으로 근무했다. 그는 우한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위안계장으로 임명돼 모든 위안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위안 업무는 부대에서 지내는 군인들의 복리후생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것으로, 예컨대 식당을 비롯해 요정, 유기장, 극장, 도서관, 특수위안소 등에 관련된 업무가 포함된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스러운 곳은 위안소였다"고 설명한다(61쪽). [사진 1] 한커우 적경리의 일본군 위안소 유적.jpg 한커우특수위안소는 일본군이 한커우에 입성하는 1938년 11월에 앞서 설치가 계획, 실행돼 입성하자마자 영업을 시작한 곳이다. 야마다가 한커우에 부임한 1941년에는 이미 자리가 잘 잡혀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거리 이름을 따서 지칭리(積慶里)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커우특수위안소(지칭리)는 큰 거리에서 옆으로 길 하나 들어간 곳에 있고 높은 벽돌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자 왼쪽은 순사 대기소, 업주조합 사무실이 나란히 있었다"(77쪽). 또한 "순사 대기소는 군 경비대에서 경찰이 파견되어 필요에 응하여 출입을 단속했다."(82쪽) 따라서 여성들이 그 장소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위안소는 일본인이 경영한 9개, 조선인이 경영한 11개 등 총20개가 있었고, 여성들은 일본인이 약 130명, 조선인이 약 150명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벽돌 안쪽에는 위안소뿐만 아니라 연못이나 작은 공원도 있고, 여성들은 공원에서 라디오 체조도 했다. 또 사망한 여성을 위한 공양탑도 있었다(77쪽). [그림 1] 한커우특수위안소 내부 지도.jpg [그림 2] 한커우 병참 시설 배치도.jpg 위안소에는 여성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란히 표시돼 있고, 군인들이 여성을 골라 지명해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78쪽) 이용 시간은 병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하사관은 저녁 8시까지, 장교는 그 이후로 정해져 있었다.(82쪽) 장교는 숙박도 가능했다. 군인들이 서로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하려는 배치로 보이는데, 여성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성병검사는 매주 1회 군의관이 직접 담당했다.(야마다는 군의관이 아니어서 성병검사에 관한 기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성병검사에 대해서는 야마다와 같은 시기에 한커우병참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사와 겐이치(長沢健一)의 『한커우위안소(漢口慰安所)』(1983)에 자세하게 나온다.) 위안소에서 벌어들인 금액은 매일 병참에 보고해야 했었다. 병사, 하사관, 장교로 구분해 어떤 여성이 군인 몇 명을 상대했는지도 상세히 보고했다.(82쪽) 병참에서는 보고된 결과를 보고 혼잡을 피하기 위한 대응을 했다고 한다. 군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위안소'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야마다는 여성들이 하루에 상대하는 인원 수를 대략 병사 6명, 하사관 1명, 장교 1명 정도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27~28일을 일할 경우 약 1년 6개월 후에는 전차금을 갚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84쪽). 하지만 실제로 전차금을 갚고 집으로 돌아간 여성의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야마다가 위안계장으로 일한 기간이 3년 반 가량이라 그렇게 위안소를 벗어난 여성의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은 여성들은 전차금이라는 거짓 구조에 묶여 인권 침해를 계속 당해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병참은 여성들의 이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한커우에서 일하려면 병참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도착하자 업자와 함께 필요서류를 가지고 병참 위안담당을 찾아온다"(86쪽). 위안담당은 서류를 확인하고 헌병대와도 이력서를 공유했다. "조선에서 온 자는 (공창) 전력도 없고, 나이도 18, 19살 정도인 젊은 여자가 많았다. '힘든 일인데 할 수 있냐?'고 묻자 미리 업자가 잘 말해놓았는지 그녀들은 일은 납득해 왔다고 모두 끄덕인다"(86쪽). 야마다는 실태조사를 위해 "출생지, 연령, 전력, 학력, 병력, 가족구성, 전차금 등을 통계"(86쪽)로 정리했다. 이와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다면 실태를 알고 연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는 볼 수 없다. 모아 놓은 자료들은 패전 후 일본군의 명령으로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288쪽). 한커우에서 지낸 조선인 여성 '위안부'들 그러면 한커우에서 지낸 여성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대부분의 '위안부'는 극심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심지어 조선인 중에는 글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교육 수준이 아주 떨어진 이도 있었다. 혹은 부모가 없거나, 남자에게 버림받는 등 불행한 이가 많았다. 그 중에는 부모나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여 스스로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81쪽). 앞서 소개한 대로 야마다는 여성들이 '위안소'에서 할 일을 알고서 왔다고 기록하는데, 그 주장은 의심스럽다. 예컨대 영화 「낮은 목소리1」(1995, 변영주 감독)에도 나오는 하상숙은 바로 여기서 지낸 조선인 여성인데, "관공서 같은 곳에 찾아가 허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은 여자 나이가 열여덟 살이 넘어야 허가장을 줬기 때문에 주인은 나에게 열여덟 살이라고 말하라고 했다"고 이야기한다.[1] 현대 성매매 알선 방식을 봐도 성매매 유입 전에 성매매 업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들어가는 여성들은 드물다. 게다가, 야마다는 높은 지위에 있는 나이 많은 일본 군인이며 낯선 남성이다. 따라서 야마다 앞에서 여성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해도, 여성들이 실제 '위안소'에서 어떤 일을 겪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야마다는 인상에 남는 여성들의 에피소드를 기록했는데 그 중 조선인 여성들도 나온다.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한다. 고바나(小花)는 급성복막염으로 장기 입원했다가 끝내 사망했다. 고바나는 "어머니는 일찍 사망하고, 아버지와는 연락두절. 아직 스무 살도 안 되는데 고향에 아이를 하나 두고 온" 조선인 여성이었다. 고바나를 위해 위안소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는 위안소 여성들이 모두 조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97쪽) 미치코(美千子)는 호적이 16세로 되어 있어서 영업 허가를 받지 못했다. 시골 관습으로 출생신고가 늦었던 뿐이고 실제로는 18살임을 주장하는 업자 말을 믿고 야마다는 영업을 허가해 주었다. 야마다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던 이 여성에게 미치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100쪽) 착하고 지적인 얼굴을 했던 사유리(小百合)는 2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심지어 아버지한테서도 버림받았다. 결국 이웃 여성이 사유리를 키워줬다. 사유리는 어떻게 해서든 자립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본어 타이핑을 배우고 도쿄에 가서 은행에서 일했다. 그러나 키워준 여성이 자꾸 돈을 요구하니 은행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키워준 여성은 모르핀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집에 돈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위안부'를 지원해서 왔다. 당시는 '위안부'라고 안하고 다른 일을 소개해준다 해서 온 사례도 많았다고 설명한다.(102쪽) 성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던 미사코(美佐子)와 그녀를 문병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야마다는 봤다. 미사코와 동료들은 레코드를 들으며 놀고 있었다. 야마다는 그녀들과 함께 레코드를 듣게 되었는데 김갑자(金甲子)의 '夏四月'이라는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미사코는 야마다에게 그 레코드를 주었다. 그 레코드는 패전의 혼란 속에서 어느날 잃어버렸다.(106쪽) 대구 출신인 다마미(珠美)는 양쯔강(揚子江)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저녁이 되어도 다마미가 돌아오지 않자 업자가 찾으러 다녔다. 다리에서 강을 보고 있던 다마미가 업자의 모습이 보이자 강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나중에 동료들은 다마미가 병이 들어 몸이 아팠다거나, 친하게 지냈던 병사가 다른 여성한테 갔다는 소문을 듣고 말싸움을 했고, 그가 다마미를 찾아오지 않게 된 것에 괴로워 했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107쪽) [사진 2] 한커우 적경리의 일본군 위안소.jpg 여성의 목소리가 빠진 기록물의 한계 『우한병참』에는 가장 가까이서 한커우특수위안소를 지켜봤던 야마다가 '위안소'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야마다는 위안소를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야마다의 상사인 호리에 사다오(堀江貞雄) 사령관도 같은 의견이었다. 호리에 사령관은 "'위안소'는 필요악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 폐해를 조금이라도 감소할 방법을 생각하자"(60쪽)고 야마다에게 이야기한다. 호리에는 전쟁 후에 출판한 수기에서 위안소는 장병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래 전쟁터에 오기 전까지 완전히 순결을 지켰던 젊은이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이러한 시설이 있기 때문에 환경의 힘에 지배되어 여기로 향하게 한 사례가 오히려 많다는 게 실상"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위안소는 유지하되 다른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63쪽, 호리에 사다오 『목소리 없는 전선(声なき戦線)』에서 재인용) 호리에는 또 여성들에 대한 위안소 업자들의 착취를 없애고, 여성들이 돈을 벌게 해 빨리 전차금을 갚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64쪽, 앞의 책에서 재인용)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은 야마다는 도서관이나 유기장을 운영해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거나, 업자들이 제출하는 기록을 조사해 수상한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위안소 규모를 줄이지도, 업자들에 의한 착취를 없애지도 못했다. 그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한커우특수위안소는 끝까지 번성했다. 야마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물론 그것이 군의 방침이었다 해도 매춘임에 틀림없고 여성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위안계장을 명령 받은 나는 전쟁 속 필요악이라는 병참사령관의 생각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체제 안에서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 '위안부'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을 원하고 거기에 얼마 안 되는 편안함을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전쟁(聖戦)이라는 미명하에 악랄한 업자의 착취에 눈을 감고 인신매매를 도와준 공범자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는다면 나는 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299-300쪽) 『우한병참』을 통해 위안소를 관리했던 40대 일본인 남성 장교 야마다 세이키치 눈으로 본 '위안부'의 모습을 읽어보았다. 자신의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이 야마다는 여성들의 실제 생활은 보여주지 못했고, 그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 갔는지 알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즉 일본 군인의 눈에 비친 '위안부' 여성들의 모습일 뿐, 실제 여성들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패전 후 군인들이 일본으로 도망나갈 때, 야마다는 여성들의 귀국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칭리 여자들은 언제 고국에 돌아갔는지", "부디 모두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줬으면 한다"(298쪽)고 '무책임하고 건방진' 태도를 남겨놓았을 뿐이다. 실제로 하상숙은 우한을 떠날 수 없었다. 성적인 착취를 계속 당하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 버림받은 여성에게 어떻게 행복한 삶을 찾으라고 하는가. 하상숙 뒤에는 우리가 못 만났던 많은 여성들이 있다 『우한병참』을 비롯한 일본군 장병들에 의한 기록은 '위안소' 운영 실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이미 널리 활용되어 왔다. 이러한 자료를 다시 읽을 때 이 자료가 말하지 않는 것,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함을 강조해 둔다. [사진 3] 『우한병참(武漢兵站)』.jpg 각주 ^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1』, 2018,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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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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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돼 살아남은 위안소의 '아이러니'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1937년부터 중국 전국토에서 전개된 중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광범위한 침탈 현장이었던 중국은 당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한 위안소의 역사가 녹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동안 아시아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억의 전승을 위한 중국의 노력 등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난징과 상하이를 찾았다. 현지 일본군'위안부' 유적지 및 박물관 탐방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1부 - 난징 리지샹위안소 유적전시관 (2)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2부 - 상하이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 (3) 중국 위안소 유적지·박물관 탐방기 3부 - 상하이 훙커우구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 한국인이 인식하는 역사 속 중국 상하이는 우리 독립운동의 장(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프랑스조계령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상하이는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興士團 遠東委員部)가 상하이 쉬후이구(徐汇区)에 설치돼 활동 기반이 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역사적인 의거 현장인 훙커우 공원(現 루쉰공원)도 상하이에 있다. 그 외 인성학교(仁成學校), 영안공사(永安公司), 신규식(申奎植) 거처 등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직영, 거류민 위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 위안소 다른 한편으로 상하이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현장이다. 상하이 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위안소 터가 그러하다. 상하이는 일본군 위안소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또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곳이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 이후 개항한 상하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면서도 일방적인 식민지와 차별성을 가진 국제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 일명 톈진 조약) 조인을 전후해 상하이에 진출한 일본은 1900년대 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 상하이에 거류지를 조성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14년 상하이 거류 일본인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 해군 특별육전대가 상주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서구 제국의 세력이 주춤해진 틈을 타 일본은 상하이 내 세력을 더욱 키워갔는데, 1932년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충돌인 '1차 상하이 사변' 시기 일본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본격적으로 구상하여, 위안소를 지정하고 관리,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에 최초의 해군위안소를 지정했고, 1932년 3월 1차 상하이 사변 전투가 종결된 후 일본 육군도 육군위안소를 개설하였다. 위안소는 특정 지역에 밀집돼 있었는데, 상하이의 관문인 우쑹(吳淞)과 쓰촨베이루(四川北路) 일대가 대표적인 지역이다. 일본군 주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 지역에서는 약 70여개의 위안소가 조사, 발굴됐다. 첫 해군위안소 지정 후 1년 만인 1933년 17곳으로 늘어난 위안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 및 2차 상하이 사변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설치한 곳, 일본군이 감독하고 일본 거류민이 위탁해 운영한 곳, 소위 '한간(汉奸)'으로 불린 친일 중국인 또는 친일 한국인이 운영한 곳, 군 또는 민간인이 경영한 유동적 임시 위안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제는 1940년 2월 훙커우구(虹口区)와 자베이구(閘北区)에 위안조합회를 설립해 늘어나는 위안소를 관리하였다. 상하이사범대학교 쑤즈량(苏智良) 교수를 비롯,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상하이 소재 위안소는 180여 곳 이상이었으며, 조사를 진행하면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상하이 위안소 유적지 답사는 상하이 사범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장루이(張如意) 선생, 후왕신위(黃心宇) 선생의 안내와 설명으로 진행됐다. 상하이 훙커우구에 소재한 위안소를 답사하고, 다이살롱(大一沙龍), 수장(曙庄), 쓰촨리 52호, 어메이루(峨眉路) 400호 등 4곳을 확인했다. 다이살롱, 가장 오래 유지된 위안소 이른 아침 상하이사범대학교에서 첫 답사지인 다이살롱으로 출발했다. 다이살롱은 상하이 훙커우구(虹口区) 둥바오싱루(东宝兴路) 125농(弄)에 위치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다이살롱은 일본 해군이 최초로 지정한 위안소 중 하나이다. 원래 이 주소지에는 광둥(廣東) 지역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광둥 사람들이 악화된 정세를 피해 거주지를 떠나며 빈 공간이 된 것을 일본인 이주자 곤도 미츠코(近藤美津子) 부부가 차지해 일본식 유흥업소, 이른바 '대좌부(大座敷)'를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 일본 해군은 상하이 주둔 해군육전대 대원들을 위한 위안소를 지정하는데, 다이살롱이 그 중 하나였다. 이는 1차 상하이 사변 발발 시기와 맞물린다. 다이살롱 부근에 일본 해군육전대 집결지가 있었고 인근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 소재지였다. 1932년 당시 1호 건물에 일본인 '위안부' 7명으로 운영된 다이살롱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번성'해 위안소를 5개 동까지 확장하고 '위안부' 수도 늘었다. 처음에는 민간 일본인들도 출입했는데, 1937년 8월 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이후, 즉 2차 상하이 사변 이후부터는 일본군만 출입이 가능해졌다. 다이살롱이 일제의 침략이 진행됨에 따라 병력이 증가하면서 그 성격과 규모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다이살롱에 있었던 '위안부'들에 대한 정보나 정확한 통계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다이살롱이 위안소였음을 확인해 준 증언자들에 따르면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 조선인 '위안부'들도 있었다. 증언자들은 당시 주변에서 거주하거나 다이살롱에 고용된 사람들로 '고려 여인들(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주인을 도왔던 관리자 고려인(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종전 때까지 운영된 다이살롱 건물은 적산(敵産)으로 묶여 있다가 국공내전이 종결된 후 일반에 분배되어 지금까지 거주지로 활용되고 있다. 2018년까지 다이살롱에는 여러 거주자들이 생활했는데, 지금은 1가구만 남고 모두 퇴거한 상태이다. 거주자의 승낙으로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흔쾌히 생활공간을 개방해주는 '마지막' 거주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연구를 진행하며 꾸준히 다이살롱 거주자들과 유대관계를 쌓아온 상하이사범대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보였다. 서양식 2층 건축 양식을 지닌 총 5개 동으로 이뤄진 다이살롱 건물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구비되어 있었다는 일본군의 '위락'을 위한 노천 무도회장, 연못, 바(bar), 일본식 정원 등은 사라지고, 일본식 정원의 형태만 남아 그때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현재 다이살롱은 유적지화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상충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하이 시는 보존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개발을 원하여 이를 반대하는 훙커우구로 인해 마지막 거주자가 건물을 떠나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퇴거를 거부하는 거주자의 개인적 이유로 이 위안소 건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장 위안소∙쓰촨리 52호 위안소, 잘 구축된 시설로 종전 후 주민 거주 공간으로 활용 다음으로 쓰촨베이루 쓰촨리에 위치한 수장(曙庄) 위안소와 쓰촨리 52호 위안소 현장을 찾았다. 쓰촨베이루는 일본 해군육전대 사령부가 소재한 곳이었다. 쓰촨리 1604농 41호에 위치한 수장 위안소의 주소패가 걸려있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면 3층 건물 두 동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모두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었다. 수장 위안소 역시 원 거주민이 살고 있던 것을 1937년 2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군이 무력으로 차지한 뒤 위안소로 사용되었다. 무도회장, 욕조, 서구식 화장실 등 각종 시설이 잘 구축돼 있었고, 건물 앞 공터에는 방공호도 구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양호한 시설 때문에 일본군 장교가 출입했던 위안소로 알려져 있으며, 종전 후 주민들이 곧바로 생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건물 1층은 장교 전용 바였고, 2~3층에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다. 일본군은 쓰촨베이루 일대 건물들을 강점한 뒤 개축해 사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수장에는 미닫이 창문과 같은 일본식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 있다. 수장위안소는 1938년에 가장 번성하였다가 1944년부터 상하이 주둔 일본군 수가 줄어들게 되자 점차 쇠락했다. 수장 위안소에 동원된 '위안부'의 수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수십 명의 일본인 '위안부'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장 위안소에서 도보로 1~2분 거리에 있는 쓰촨리 52호 건물 역시 일본군 위안소로 활용된 곳이다. 수장과 마찬가지로 3층 건물이며, 일본군 장교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두 위안소 모두 일본인 업자들이 운영했는데, 쓰촨리 52호 건물도 현재까지 거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메이루 해군직영위안소, 한 향토사학자의 집요한 추적으로 확인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훙커우구 어메이루(峨眉路) 400호에 남아 있는 일본 해군 직영 위안소 건물이다. 凹 형태의 5층 건물로, 앞서 찾은 다른 위안소 건물처럼 거주민들의 실생활 터전이었다. 이 건물이 일본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는 향토사학자 저우신민(周新民)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저우신민은 은퇴 후 상하이 및 주변 도시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본인이 졸업한 대공직업학교의 역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2012년 9월, 기록보존소인 상하이 당안관에서 '사립대공직업학교 개황에 관한 보고'에 실린 대공직업학교 약사를 검토하던 중 "일본 해군구락부를 접수하여 학교 교사로 삼았다"는 문구를 발견한 것이 단초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1여년 간 중국 내 남아 있거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다만 대공직업학교 교사 사치산 (沙啓善)선생으로부터 학교 건물이 '일본인이 남긴 낡은 집'이라는 사실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저우신민은 일본 쪽 자료에 시선을 돌렸다. 추적 결과 어메이루 400호 건물이 일본 해군육전대의 하사관병 집회소였고, 당시 위락시설을 잘 갖춘 3층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일본 해군구락부는 장교 위안소였고, 해군하사집회소는 하사관과 사병이 사용한 위안소였으며 둘 다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하였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어메이루 400호는 일본 해군육전대가 직영한 위안소였던 것이다. 저우신민은 문헌 검토에 이어 어메이루 400호에 거주한 주민들의 진술을 통해 교차 검증에 들어가 1980년대 원래 3층이던 건물이 5층으로 증축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어메이루 400호 건물은 증축이 되긴 했으나 1층에 있는 매표소 공간부터 계단의 모습 등 위안소로 활용되던 당시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증언한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은 없어진 건물 지하실에 당시 사용하던 집기들도 있었다고 한다.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의 위안소,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되길 6월의 상하이 날씨는 체감상 한국의 여름과 비슷한데, 답사 당일은 아침부터 비도 내려 답사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또 우리가 찾아간 상하이 위안소 건물 모두 현재까지 주민들이 거주하며 생활 하고 있는 공간이어서 내부를 살펴보기도 쉽지 않았다. 방문한 위안소 건물에서 다소 생경한 감각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위안소라는 역사적 특수성보다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수많은 마천루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국제도시 상하이는 개항 후 조성된 근대 건축물도 즐비한 공간이다. 그 당시 지어진 건물 중 다수는 일제의 상하이 침략 이후 원래의 목적을 빼앗기고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로 활용되었다. 종전 후 위안소 건물들은 원래의 성격을 되찾았으나 그 과정에서 역사성이 희미해지거나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일상성으로 인해 상하이 위안소 건물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위안소라는 일본 제국주의가 빚어낸 인권 유린의 역사 위에 개인의, 일가족의 생활 터전이 수십 년간 덧입혀지면서 장소는 살아 남았고, 중국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진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어 온 건물들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철거되거나 잊힐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위안소 건물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역사기억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쑤즈량 교수와 향토사학자 저우신민의 문제제기에 중국 사회가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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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디아스포라 감독이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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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감독이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법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담은 영화를 만든 아르헨티나 국적의 한인 동포 2세 세실리아 강 감독. 계기는 우연히 들은 김복동 할머니의 연설이었다. 그때까지 '위안부'라는 단어조차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는 그는 몇 년 후 김복동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소명처럼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 20대 젊은 여성들이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낭독하며 출발하는 영화는 2023년 11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 모든 경쟁 부문 최우수 영화상인 '시그니스상', 그리고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아직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후세대와 공감대를 형성해가야 하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를 놓고 세실리아 강 감독과 마주 앉았다.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일본군'위안부' 영화 "말하기는 치유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고, 치유를 시작하기 위해 용감하게 침묵을 깼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2022년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상처를 치유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매주 수요일마다 여기 있어야 하나요? 왜 우리 여성들은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울까요? 왜 우리는 매일 말 그대로 죽도록 맞으면서도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에 침묵해야 하나요? 왜 우리는 남성들의 일상적인 학대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여길까요?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말하기가 상처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말하기는 분명 우리의 상처를 더 빨리 낫게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7월 4일이었다. 장대비 쏟아지는 1550차 수요시위에 참여한 멜라니 정은 직접 적은 연대 발언을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다. 머나먼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이 동포 2세 여성은 이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만나고 온 터였다. 역시 아르헨티나 동포 2세 감독인 세실리아 강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PARTIÓ DE MÍ UN BARCO LLEVÁNDOME)>는 이렇게 주인공 멜라니 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점점 깊이 인식하는 과정을 좇으며 전시 성폭력과 일상의 폭력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가 또 다른 가해자임을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영화, 한인 동포 2세 감독,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여성 인권에 공명하는 아르헨티나 젊은 20대 여성들의 목소리…. 국제사회와 공유는 물론 후세대와 어떻게 만나고 접촉면을 넓혀 나갈지, 묵직한 과제를 앞에 둔 국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영화 <내게서 출발한 배>는 세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함의를 전하는 작품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장기 상영을 할 만큼 주목받고 있다. 아직 국내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24 학술 콜로키움'에 참석한 세실리아 강 감독을 만나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은 김복동 할머니의 '위안부' 연설… 사망 소식 듣고 '뭔가 해야겠다' 생각 Q. 부모님께서 아르헨티나로 이민가신 이듬해인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이신데, 먼 남미에서 어떻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하셨을까요? 🧶 세실리아 강 : 2013년이었습니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지막 실패>의 한국 부분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어쩌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연설을 처음 들었습니다. 아직도 생각나는 게 열네 살 무렵 일본으로, 중국으로 끌려다니며 하루에 20~30번이나 강간을 당하고 옆에서 다른 여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고통, 그 상처와 기억을 안고 어렵게 집으로 돌아온 후에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한 현실, 침묵하면서 느껴야 했던 수치심… 굉장히 구체적이었던 할머니의 말씀이에요. 정말 놀라고 충격이었어요. 더구나 용기있게 나서서 증언하시는 이유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후세대에게 절대로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교육했으면 좋겠다, 그거 하나였어요. 제 삶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울림이었습니다. 그 순간까지 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위안부'라는 완곡한 표현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동시에 서른이 넘도록 아무 것도 몰랐던 스스로가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Q.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 깊이 공감하는 경험과 이후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나아가 자신의 전문 분야와 연결한다 해도 제작비가 만만찮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정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뒤따르기도 하고요. 어떤 사명감이나 숙제로 받아들이셨던 건가요? 🧶 세실리아 강 :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참담한 마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지만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고, 개인적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벅차기도 했고요. 다만 당시에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 마음 속에 이 주제가 일종의 소명처럼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2019년 1월에 김복동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제게도 변화가 있었어요. 2023년 말에 매우 극우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아 문제가 더 악화될 거라는 우려가 많은데, 한인 사회를 포함해 아르헨티나는 8시간마다 여성 한 명이 희생당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가정폭력이 심각해요. 그러다 10년 전부터 미투운동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그 영향을 받았고, 특히 젠더 문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제 작업 안에서 폭력 문제, 여성 인권 문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고민하게 된 거예요. 증언 낭독, 할머니 존중하고 희망에 집중하는 방식 Q. 아르헨티나 여성 감독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영화화 할 것인가, 즉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등 본격적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세실리아 강 : 무겁고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 지 고민이 많았고, 사실 두려움이 컸어요. 최대한 피해 할머니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맡은 버지니아 로포 작가와 계속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가 처음으로 동의한 부분이 이 영화가 할머니들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대신 관객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역사의 어두운 부분보다는 희망에 집중하자는 것이었어요. 역사가도, 학자도 아닌 제가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때 작가가 과거의 역사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서 젊은 여성들한테 할머니들의 증언을 읽어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주셨어요. <20년 후에>라는 다큐로 유명한 예술가이자 인본주의자인 브라질의 에두아르도 쿠티노(Eduardo Couthino) 감독에게 영감을 많이 받아온 터라 그의 인터뷰 형식도 빌려 왔고요. 한인 사회 20대 여성들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영화의 도입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Q. 세실리아 강 감독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는 개인적 경로와도 유사한 흐름입니다. 🧶 세실리아 강 : 맞아요. 아날로그적 방식일 수 있지만 최대한 가까이 느껴지는 주제와 구조여야 한다는 게 중요했어요.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에서 받은 강렬한 경험이 바탕이라 영화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할 여성들 캐스팅을 앞두고는 한인 2세라 해도 세대가 달라 오래 전의 일, '나와 상관없는 일'로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큐를 찍으면서 그런 편견들이 무너졌습니다. 여성들 대부분이 '위안부'의 의미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몰랐어요. 그러다 보니 인터뷰 초기에는 질문을 해도 답변을 주저했고요. 이후 할머니들의 증언을 1인칭 시점으로 낭독하면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점점 문제에 접근하게 됐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작은 차별과 억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충격이었어요. 여성들은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동시에 한인 사회 구성원이잖아요.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부모 세대는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삶 자체가 매우 고됐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중요시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큰데, 이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억압적일 수 있어요. 한국에 오게 되면서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 여성들이 어느 부분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를 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이런 문화와 차이에 집중하면서 여성들과 점점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거듭된 각본 수정과 표류, 속도전 후의 감동 Q. 이후 영화는 인터뷰이 중 한 명인 멜라니 정의 비중이 커지고, 멜라니는 점점 주도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또한 애초의 설계였나요? 🧶 세실리아 강 : 캐스팅 인터뷰에서 멜라니가 연기를 공부하는 배우 지망생인 걸 알았어요. 너무 반가웠죠. '센스 오브 미러링(Sense of Mirroring)'이라 해야 하나, 같은 예술 계통이라는 동류의식이 생기면서 먼저 당겼어요. 대본 리딩을 시켰는데 하고 싶은 연기를 애드립으로 해보겠다며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을 낭독하는 거예요. 단순히 읽는 게 아니고 무언가 개인적인 경험까지 녹여낸 연기였어요. 할머니의 증언이 멜라니의 일상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멜라니의 내러티브로 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전개 과정도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재정적인 이유로 첫 스크립트에서는 한국 방문 장면을 넣지 않았거든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할 무렵 코로나사태가 터졌고, 각본도 여러 번 바뀌었어요. 그 중간에 다른 일로 싱가포르 일정이 생겨 한국까지 들르게 됐어요. 이런 때 촬영하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싶어 멜라니와 상의해 시나리오를 다시 썼죠. 돌아보면 아르헨티나에서의 촬영이 강렬한 열정이었다면 한국에서의 촬영은 적은 예산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기복과 시차, 바다에서 표류하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 찬 '감정적인 오디세이'에 가까웠어요. 조사하고 섭외하고 준비해서 촬영까지 마친 기간이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엄청난 속도였거든요. 장마 기간이었던 데다 한국말을 그나마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 제작진 6명 모두 고생을 엄청 했고요. 사운드맨부터 방문을 허락해준 기관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 촬영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멜라니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수요시위에도 참여할 수 있었어요. 두 곳에 전시돼 있는 황금주 할머니의 기록을 만났을 때, 오자마자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촬영하느라 정신없던 와중에 너무나 멋진 발표문을 쓴 멜라니의 연대 발언을 들었을 때 저희 모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아르헨티나 여성이 '위안부' 문제에 다가가는 과정이 잘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Q. 꾸준히 황금주 할머니 이야기가 등장하잖아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걸까 궁금했어요. 🧶 세실리아 강 :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는데, 멜라니가 먼저 읽고 선택한 거예요. 황 할머니의 증언에 좀 더 마음이 닿았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우연이 겹친 결과였어요. Q. 영화 제목이 시적이에요. <내게서 출발한 배(A Boat Departed From Me Taking Me Away)>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 세실리아 강 :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여성 시인 알레한드라 피사르니크(Alejandra Pizarnik)의 시에서 따왔어요.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열정적으로 페미니즘을 지향한 분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시는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요. 다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말은 물론이고 현재도 여성들에게는 하고 싶은 말 이상의 것이 있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중의적으로 '위안부' 역사가 모두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요. Q.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개봉했다고 들었습니다. 🧶 세실리아 강 : 2024년 7월, 240석 규모의 대중영화관인 중남미미술관(MALBA) 극장에서 <내게서 출발한 배>가 개봉했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상영 중이에요. 또 영화 전문 공연장인 산 마르틴 극장 아트하우스에서도 2주 동안 상영했는데, 만원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상영관이 늘어나고 있고요. 기대 이상의 호응이라 저희도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관심과 장기 상영 이유 Q. 현지에서는 낯선 이야기일 텐데, 그렇게 관심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 세실리아 강 : 무엇보다 그동안 어디서도 접한 적 없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입소문이 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제가 그랬듯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상처가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도 깊이 전해지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며 폭력과 범죄를 경험한 아르헨티나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상영회에서 관객 중 누군가는 영화 속 수요 시위 장면을 언급하면서 '비슷한 두 사건'을 연결 짓는 발언을 해요. 수요 시위를 보면 1970년대 군사 독재 시절 납치되거나 실종된 자녀와 포로로 태어난 손자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며 매주 목요일 대통령궁 앞 마요 광장에서 열린 '마요 광장의 할머니들'의 목요 행진이 떠오르니까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속담도 있는데, 목요 행진과 수요 시위 모두 기억과 진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또 다시는 그런 역사의 참상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연대의 감정을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도 케이팝(K-Pop)을 비롯해 한류가 엄청난 인기예요. 한류에 빠진 이들의 관심이 한국 문화 전반으로 넓어지면서 영화까지 영향을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Q. 영화제 수상 소식도 들었습니다. 🧶 세실리아 강 : 2023년 11월에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에 참여해 국제 경쟁 부문에서 첫 선을 보였어요. 기대 없이 참여했는데, 찬사와 함께 '심사위원 특별상'과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관객상', 모든 경쟁 부문 최우수 영화상인 '시그니스상', 그리고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어요. 엄청난 영광이죠. 예상 못한 수상인데다 덕분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게 돼 너무나 기뻤습니다. Q. 한국 개봉 계획은 어떤가요? 🧶 세실리아 강 : 아르헨티나 관객뿐 아니라 한국 관객들도 만나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직 상영 계획을 잡지는 못했어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한인 교포 2세라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가진 감독의 관점으로 담아낸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를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보고 이해할지 굉장히 궁금해요. 만약 한국에서 상영되면 중첩된 기억과 역사, 경험을 훨씬 더 폭넓게 이해하고 열린 논의와 토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시선 담은 작품 꾸준히 소개하고파 Q.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주요 고민 중 하나는 앞으로 후세대와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아르헨티나의 젊은 한인 여성들과 공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게서 출발한 배>가 던지는 메시지가 인상적인데, 관련해 영화가 어떻게 활용되면 좋겠다 하는 기대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세실리아 강 : 저의 영화가 어떤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미래 주역인 젊은 세대 사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역사적 사건도 의미를 잃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이들 미래세대와 만나는 기회를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만들어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게서 출발한 배>의 내러티브에 동의할 수도, 거부감을 느낄 수도, 반대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면 좋겠어요. Q. 꾸준히 아르헨티나와 한국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앞으로도 이 정체성을 이어나갈 예정인지, 향후 작품이나 활동 계획과 함께 말씀 부탁드립니다. 🧶 세실리아 강 : 어릴 때부터 항상 다르다고 느꼈어요. 가끔 '강제이주' 당한 느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외모부터 문화까지, 너무나 다른 세상 사이에 있는 존재였던 거죠. 10대 때는 특히 불편한 게 많았어요. 모든 디아스포라가 거치는 과정일 거예요. 그런데 그 다름이, 외모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 것이 어느 순간 저의 특별한 정체성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덕분에 남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도 이 다큐멘터리를 꼭 찍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촬영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고, 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면 다음 작품인 <장남>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민 1세대인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처음 시도하는 픽션 영화이기도 해요. <내게서 출발한 배>를 선보이고 나니까 이제야 말로 제가 완전히 준비된 것 같습니다. 픽션, 논픽션을 떠나 언젠가는 코미디적 요소 가득한 영화도 만들고 싶은 꿈도 있고요. 영화로 계속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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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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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는 130년 전부터 있었다 흔히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1932년 중국에서 일어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19세기부터 이미 해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군인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동원해 왔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송연옥은 여러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상하이 사변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부국강병과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국영 유곽 일본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대개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많은 해외 침략전쟁을 저질렀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위안부' 제도가 없었을까? 19세기 중엽 당시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제국 일본은 그 취약점을 군사주의로 메우려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이라는 구호 아래 자원 확보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에 나섰다. 이때 노동력으로 동원된 죄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국영 유곽이었다. 이 기획을 정부에 제안한 이는 개척사(開拓使)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로, 그는 개척사가 자금을 융자한 다음 도쿄 요시와라 유곽의 성매매 업자에게 유곽의 경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1872년의 ‘예창기해방령’과 1873년의 경기 불황으로 개설 직후 바로 폐업하고 말았다. ‘예창기해방령’은 서구 열강들이 예창기에 대해 인신매매된 노예라 비난하자 메이지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서 빚 때문에 몸이 묶인 예창기들의 해방을 지시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예창기가 해방되었으나, 여성들을 옭아맸던 ‘전차금(前借金. 나중에 갚기로 하고 미리 빚으로 쓰는 돈) 제도’와 유곽은 그대로 남았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성매매 제도를 통제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 철저한 성병 검사 실시, 세금 징수 등 공창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했다. 즉 유녀들을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업자에게 공간을 빌려서 자유영업을 하는 자로 보고 그 형식을 바꾼 것이다. 가시자시키(대좌부(貸座敷))와 창기(공창)란 신조어가 생긴 것이 이 즈음이었다. 전차금은 높은 이율로 계속해서 창기의 몸을 구속했다. 자본이 빈약한 일본에서 성매매업은 기간산업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경우 성산업에서 납부되는 세금이 지방세의 44%를 차지했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국가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방으로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다 1900년부터는 업자의 관리만 각 지방이 맡고 창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개항한 부산에 요시와라 유곽이 문을 연 이유 1876년, 일본은 운요호가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이 포격했다고 억지를 써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조약 체결 당시 전권변리대사로 조선에 온 이가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그리고 1880년, 그가 도쿄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유곽인 요시와라의 나카고메루가 부산에 상륙했다. 개항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나카고메루가 부산이라는 낯선 토지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구로다의 보증이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루의 업주였던 아카구라 토키치(赤倉藤吉)는 ‘상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 부산으로 왔다[사진 1]. 당시 그는 수하에 있던 창기 10명을 빚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부산에 데려왔다. 부산에서의 성매매는 일본의 ‘가시자시키 영업규칙’이 준용되어 거류지 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아카구라는 3년 후인 1882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 내 일본의 입지가 약화되고 조선이 잇따라 조약을 체결한 서구 열강과 대면하며 국가적인 체면을 계산하게 된 일본은 부산에서 공창제를 중지시키고, 인천에서는 애초에 가시자시키 영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 숨겨진 조선전쟁 그리고 성폭력 이후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면서 대륙에서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 일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1894년 봄부터 거세진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가 파병하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는데, 규모가 청나라보다 3배가 넘었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 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를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내정 간섭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일청전투실기』[사진 2]라는 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조선의 민가를 습격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각적으로 청나라 병사들의 만행을 보여주고 일본이 정의롭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그림과 달리 일본군이 만행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일제 육군 창설자이자 일본군 최고 책임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청전쟁미담』이라는 책에서 ‘군부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을 엄벌로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감독해야 할 상관도 역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썼다. 청나라를 향해 북상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을 자행한 일본군은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농민군을 대량 학살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면서 그 전리품으로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 ‘성적위안시설’을 개설하였다. 1896년 타이베이현령(台北縣令) 갑 제1호 ‘가시자시키 및 창기 취체규칙’의 제정은 타이완에서 공창제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요리점의 발명 19세기 말 일본이 타이완에서처럼 조선에 노골적으로 공창제를 실시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에 서구 열강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주요 11개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서울에는 9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영문 잡지에 실은 이도 서울에 주재했던 서양인이었다. 이런 정세를 의식한 일본이 공창제를 대신해 발명한 것이 ‘특별요리점’이었다.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 혹은 ‘작부’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를 은폐하며 민간 업자에게 부도덕성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가즈키 겐타로가 펴낸 『조선국 부산 안내』(1901)에 실린 광고[사진 3-2]를 보면 요리점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옆에 가시자시키, 즉 유곽이라고 나란히 적어 놓아 성매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일본인이 조선 여성을 ‘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시자시키가 아닌 요리점이라 할 때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것이 세수입의 증가였다. 요리점은 가시자시키보다 세율이 높아서 고액의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창제를 금지한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더 많이 얻게 된 이익을 바탕으로 공창제를 재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기다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군의들이 증언하는 '위안소' 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2년 후,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지배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를 상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제국을 군사력으로 짓밟아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제공, 군용지의 수용(収用) 등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은 군대가 운용하는 ‘성적위안시설’을 설치하였다. 제4군 군의 부장을 역임한 후지타 츠구아키라(藤田嗣章)는 회고록 『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1934)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증언을 하였다. 철령(鉄嶺. 랴오닝 성)의 병참(兵站)부는 시험적으로 일정한 지역에서 사창을 허가하고 병참 헌병이 단속하고 감시하게 했다.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전에 군의가 성병 검사를 하고 합격자에게는 건강증을 발급, 병사들을 저렴하게 접대하게 했다. (시설) 입구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한 사람씩 점호(点呼)하고 나서 제한된 시간 내에 이용하게 했다. 여기서 후지타는 ‘위안소’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시설이나 관리 방법이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는 ‘위안소’와 같다. 또 후지타는 그런 시설이 1895년 타이완을 점령했을 때부터 있었다고도 썼다. 러일전쟁 중 최대의 전투가 펼쳐졌던 봉천(현 심양)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의관 나카무라 료쿠야(中村緑野) 역시 위안소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내용은 후지타가 쓴 것과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병사를 관리하려고 만든 것임에도 병사에 대한 군의로서의 멸시감이 담겨있다. 드디어 임시 매소제(売笑制, 매춘제)를 허가하게 되었는데 상인을 시켜서 신원에 문제가 없는 만주인 작부를 데리고 왔다. 화류병(성병)에 감염되지 못하게 병사들에게 적절한 방법을 실행시켰다. 옆으로 긴 건물을 벽으로 나누어 각 방마다 출입구를 따로 만들었다. 건물 앞에는 나무로 된 낮은 담을 세우고 입구를 몇 군데 마련해서 혼잡하지 않도록 헌병의 감시 하에 이용하는 병사들을 차례로 방에 들여보내게 했다. 병사들이 수치심도 없이 건물 앞에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로우며 전쟁터가 아니면 못 보는 괴상한 장면이었다. 주목할 것은 글을 쓰는 군인에 따라 사용한 명칭이 다르다는 점이다. 후지타는 사창제라 하고 나카무라는 매소제, 다른 군인은 공창제라고 썼는데, 이 시기에는 같은 시설이라도 호칭이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보고 선입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지타와 나카무라의 글이 실린 회고록은 1934년에 간행되었는데,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에게 참고하라고 엮은 것이었다. ‘위안소’는 가설 목조건물일 때도 있었으나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 4]의 좌측 그림은 봉천 북쪽 국경의 문인 법고문(法庫門)에서 일본 병사들이 여성들을 고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장소가 관제묘, 즉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에 위안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끄러운 만행을 현지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임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여 유곽을 건설하기까지 했다[사진 5]. 성매매 업소를 한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 단속하기에 효율적이고 위생상으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04년 안동(현 랴오닝성 단동)에서 개설한 유곽은 '유원지' 라고 이름 붙였다. 유곽의 여성에게는 성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성병 환자는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다. 여성의 영업 허가 연령은 일본보다 두 살 어린 16세였는데, 16세 미만이라도 성병 검사만 받으면 영업을 묵인했다. 1905년 작성된 규칙을 보면 예기 4엔, 작부 3엔, 중거(仲居. 나카이. 여관이나 요리점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여성) 2엔, 하비(下婢. 하녀)1엔씩 매달 병참사령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는 군대가 포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원지는 군정(軍政)에서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후 민간인 업자에게 불하되었고 군인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작부는 연령 규정이 없었으나 1930년부터 만 17세로 정해졌다.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성관리 정책의 연장선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으며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한국군의 해산에 반발한 의병들이 일제에 항쟁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더 많은 군대와 헌병을 파견하였다. 의병 투쟁을 어느 정도 진압한 후 1908년 제정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은 조선에서 성병검사를 포함한 성관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는 일본 병사들을 위한 조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해 마치 조선인들이 성병이 만연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성관리를 요구한 것처럼 꾸몄다. 이후 서울 외의 지역에도 차츰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관리 규칙을 만들었고 1916년에 ‘식민지 공창제’를 전면으로 도입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성관리 내용을 보면,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달리 창기 허가 연령을 제국의 서열에 맞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내지’는 18세, 조선은 17세, 관동주와 타이완은 16세로 정해 여성들을 식민지나 전쟁터로 인도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제국의 성관리 정책은 상황에 따라 명칭과 내용을 바꿔가면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책임은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