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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2024년 논평 현재사(現在史)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2024 기림의 날 특집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 <3부> 0811_결-03.jpg   2015년 최종적으로 7개국 14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가 여성 인권 회복의 진행형, 나아가 인류 보편의 인권 신장과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외교로 그 의의가 왜곡되어 가고 있다. '2024 기림의 날'을 기념해 웹진 <결>은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며 10여 년 가까이 추진되어 온 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활동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1)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기억을 위한 세계시민운동 (2)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3)일본군'위안부'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하여_ 현재사(現在史)[1]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통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소규모의 유네스코 본부 인원과 기록유산 전문가 14명 등으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IAC)가 함께 한다. 국제자문위원회는 산하에 심사소위원회(RSC)를 두고 등재 가능성에 주목해 신청서를 사전 심사한 다음 국제자문위원회 회의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왔다. 전체적으로 국제자문위원회가 사업 운영을 주관하고, 2년마다 회의를 열어 제출된 등재 신청서를 선별, 등재 후보를 결정한 다음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등재 결정을 권고하는 수순이다. 이후 이 결과를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다.    '대화'를 전제로 한 등재 보류 결정 그런데 2017년에는 이러한 흐름과 사뭇 다른 '이상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2016년 3월 말이었던 신청서 마감이 5월 31일로 연기됐다. 이어 2017년 9월로 예정되어 있던 국제자문위원회도 아무런 설명 없이 10월 24일로 미뤄졌다. 더 놀라운 일은 국제자문위원회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등재 결정이 연기될 것이라는 일본의 보도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의 진행 과정과는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연기된 국제자문위원회를 열흘 가량 앞둔 10월 16일, 유네스코의 핵심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이사회가 열렸다. 집행이사회는 "상충되는 견해를 가진 두 신청 간에 '대화'를 요구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문구를 삽입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또 10월 24일 열린 국제자문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 여부에 대해 "대화를 전제로 한 연기"라는 기존에 없던 방식의 결정을 내렸다. 이를 전달받은 사업단은 즉각 발언권을 얻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10월 30일,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별다른 조처없이 한국과 일본에서 제출한 '두 신청자의 대화 진행'이라는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2016-76 개별 일본-미국(NGO):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  2016-101 일본군'위안부' 문서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위원회: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2017년 10월 16일 회의에서 UNESCO 집행이사회의 결정에 따라(202 EX/PX/DR 15.8, 항목 15) 사무총장에게 UNESCO가 신청자(No. 101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및 No. 76 '위안부와 일본군 규율에 관한 문서')와 관련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진행할 것을 권고합니다. 또한 IAC는 가능한 한 모든 관련 문서를 포함하는 공동 등재로 이어질 목적으로 이 대화를 위해 당사자들에게 편리한 장소와 시간을 정할 것을 권고합니다.[2]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절차에서 생긴 이러한 이상 현상은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것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신청서 마감 기한이 연기된 사이 일본 측이 신청서를 급조해 제출했고, 이는 결국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상충되는 견해'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를 근거로 국제자문위원회를 미루고, 집행이사회에서 결정된 '대화' 규정을 인용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대화를 전제로 한 연기'라는 전례없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사진 2_2017년 10월 결정문 원문.png 사진 1.jpeg   이용되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 : 누가 역사 갈등을 만들어가는가? 사실 일본의 공세적인 외교 활동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유네스코를 둘러싼 역사전을 놓고 대개 2014년 중국이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 등재를 신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시작은 2014년 군함도 등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한 일본의 움직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수상이 내건 '강한 일본, 자랑스런 일본'이라는 기치에 따라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석탄, 탄광 산업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등재 대상에는 아베 전 수상이 존경했다는 우익의 대두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이 운영한 학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있었다. 제국주의의 산실로 알려진 쇼카손주쿠를 포함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정받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군함도 등 산업시설에서의 조선인, 중국인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역사는 소거했다.  일본의 이런 도발에 대해 당연히 중국과 한국의 비판이 거셌고, 유네스코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중국이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등재 신청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부정해 온 두 역사적 사실,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가해 책임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사업을 민간에 맡겨 놓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 정부는 이 시기부터 직접 전면에 나섰다. 아베 전 수상은 중국이 유네스코를 정치적으로 오염시켰다고 비난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처럼 두 나라 정부 모두 유네스코의 의사 결정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난징대학살 기록물과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을 등재 신청했지만, 둘 다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본과 갈등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두 신청 모두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중국은 초점을 난징대학살 기록물 등재에 맞추고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은 양보를 얻어낼 카드로, 그러니까 일종의 희생타로 제출했다. 물론 이때 국제연대위원회가 중국을 포함한 8개국 15개 단체를 모아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의 등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도 '희생'을 고려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실제로 난징대학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성공한 후, 중국 정부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등재를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업단이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를 등재 신청할 때 중국이 방해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타이완의 국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이나 중국 모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역사전의 전면에 내세워 이용하거나 희생시켜 왔다. 한편 2015년 난징대학살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자 일본 우익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아베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역사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베 전 수상은 자민당 의원과 면담에서 "2년 후에는 '위안부' 문제가 나온다. 지금부터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혀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한 강도 높은 등재 방해를 예고했다. 이후 일본은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유네스코에 등재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외교적 압박을 가해오자 유네스코는 버티지 못하고 규정 개정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2015년 국제자문위원회가 이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 논의를 진행했다. 당시 일본은 2017년 회의 전까지 개정 작업을 끝내고 새로운 규정으로 심사를 진행하면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등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규정 개정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제202차 집행이사회는 자구책 혹은 절충안으로 "상충되는 견해를 가진 두 신청 간에 '대화'를 요구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202 EX/PX/DR 15.8, 항목 15)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국제자문위원회는 위 문구를 근거로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등재를 연기해 버렸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가 반발해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활동은 5년 넘게 멈춰 섰다.    새롭게 생성되는 '현재사' 기록들 : 더디게 가는 '대화' 프로세스  2024년 8월 말 현재,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은 중단된 상태지만 일본군'위안부'기록물 두 신청자는 합의 하에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유네스코 사무국의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무국은 대화 프로세스가 구체적으로 언제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언제 대화가 종료되고 대화가 결렬되면 어떻게 되는지 등 세부적 사안에 대해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제연대위원회의 일관된 주장은 2017년 등재 신청을 했기에 새로 만들어진 규정이 아니라 구 규정을 따라야 하고, 대화 종료 후에는 심사소위원회(RSC)의 평가를 받아들여 공동등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단체 3곳과 미국 단체 1곳이 공동 신청하는 형태로 구성된 일본측 신청자들이 등재 신청한 자료는 총 6건이다.[3] 이 신청 기록물 자체는 객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서들이다. 그중 미국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일본 방위청 소장 자료[4]는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에도 포함된 중복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외 방위청 소장 사료와 미디어보도제작연구센터 소장 자료는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포함할 수 있는 중요 기록물이다. 따라서 국제연대위원회에서는 기록물에 대한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2018년 5월, 유네스코 사무국은 어떤 주제와 방법으로 대화할 지 등 사전 정보 교환도 없이 중재자를 선발했다고 알려왔다. 그럼에도 국제연대위원회는 성실하게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을 결의하고, 중재자를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첫 중재자는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하지 못하고 1년 만에 사임했다. 유네스코 사무국은 2019년 6월 두 번째 중재자로 잉그리트 패런트(Ingrid Parent)를 임명했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국제도서관 협회연합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ibrary Associations)의 회장을 지내기도 한 기록학의 대가이다. 잉그리트 패런트는 두 신청자가 대화할 수 있도록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후보 2건에 대한 '대화' 개최 조건(Terms and Conditions for holding a dialogue regarding two nominations concerning 'Comfort women' for the memory of the world international register)'을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 듯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중재자와 3번의 비대면 회의와 수십 차례의 이메일 교환을 통해 '대화' 개최 조건을 합의해 갔다. 하지만 일본측이 번번이 추가 조건을 내세우면서 결국 대화가 개최되지 못한 채 잉그리트 패런트는 임기를 다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인지, 유네스코 사무국도 현재까지 별도의 안내가  없는 상황이다.  2022년 일본의 공세적 외교의 결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규정이 개정되면서 앞으로 모든 기록물은 국가를 통해 신청해야 한다. 또 기록물 관련국이 이의를 제기하면 심사 프로세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위 '대화'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일본이 등재를 반대하는 일본군'위안부'기록물에 대해서는 어떤 피해국이 신청해도 심사에 이르기도 전에 모두 좌절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7개국 각각의 시민들의 모임인 14개 단체는 곳곳에서 나타나는 암초를 때로 피하고 때로 뛰어 넘으며 등재 신청 과정을 진행해 왔다. 지난한 시간을 거쳐 어렵게 신청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 공동등재 추진이었기에 더더욱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유네스코라는 장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의 최선두에서 이 모든 불합리한 과정을 온 몸으로 견뎌내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대화 프로세스에 참여해, 결국 이겨낼 것이다. 또 세계적 기록물을 여러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은 물론 '세계의 기록유산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며, 문화적 관습과 실용성을 적절히 인정해 모두가 방해 없이 영구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원칙과 비전을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관련 활동과 압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기록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현재의 문제까지 포괄하며 모든 피해자들의 정의를 지키는 일임을 증명하는 '현재사(現在史) 기록물'이 될 것이다.   각주 ^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현재사라는 용어는 주진오 교수가 쓴 『주진오의 한국현재사-역사학자가 마주한 오늘이라는 순간』(추수밭 2021.11. 03.)에서 차용했다. ^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결정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 일본측 등재 신청 문서는 다음과 같다. (1)미국공문서관(NARA) 소장 3건( 1.1 Japanese Prisoner of War Information Report No.49 on Oct. 1, 1944 0f United States Officeof War Information, 1.2 Allied Translator and Interpreter Section, South West Pacific Area (ATIS),1.3. South East Asia Translator and Interrogation Center (SEATIC) (2)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1건 (2.1 1945.9.4. 「米兵の不法行為対策資料に関する件」) (3) 일본방위청 소장 1건 (3.1 1938.3.4.「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に関する件」) (4) 일본 미디어보도제작연구센터 소장 (4.1 2006年昭和研究所特別年鑑(元軍人の証言資料)) ^ 일본 정부가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은 그간 발굴된 공문서를 총리 관저로 보내는 운동을 했다. 일본위원회는 이 공문서 보내기 운동을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 자료로 판단해 그 문서의 사본을 등재 신청했다.

    한혜인

  • '위안부' 기록·정보를 만나는 지혜로운 자세, 일본군'위안부' 디지털 아카이브 총정리
    2024년 에세이 '위안부' 기록·정보를 만나는 지혜로운 자세, 일본군'위안부' 디지털 아카이브 총정리

    정확하고 깊이있게!  '위안부' 기록·정보를 만나는 지혜로운 자세 일본군'위안부' 디지털 아카이브 총정리   디지털 기술의 진화 덕분에 일상이 된 초연결사회, 이제 원할 때는 어디서든 쉽고 빠르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점점 중요해지는 것이 사실에 기반한 정확한 정보를 가려내는 일! 이럴 때 디지털 아카이브는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창고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생기거나 정보가 필요할 때도 디지털 아카이브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믿고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록을 제공하고 있는 공신력 높은 디지털 아카이브 5곳을 정리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창고, 디지털 아카이브 원할 때 어디서든 쉽고 편하고 빠르게! 초연결사회를 구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진화 덕분에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넓어졌다. 상품의 사양은 기본, 합리적 소비와 매매, 지식과 경험, 나아가 관계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유통 정보의 절대량은 물론이고 종류와 스펙트럼도 점점 더 분화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AI 기술의 발전까지 더해져 말그대로 온갖 정보가 쓰나미처럼 만들어지는 추세다. 그래서 점점 중요해지는 요구가 있다. 정보의 '질'이다. 왜곡 혹은 오염되거나 부패한 정보로 인해 부담해야 할 위험과 피해,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것에 반해 개개인이 진위를 확인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정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창고 중 하나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s)이다. 아카이브 영역에서 본류라 할 수 있는 기록학에서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기록의 전자적 보존 관리 시스템 혹은 저장소로 정의하는데, 쉽게 풀이하면 인터넷 공간에 거대한 디지털 콘텐츠를 저장하고 축적해 사용자들이 쉽게 접근하고 콘텐츠를 검색,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온라인 저장고라 할 수 있다. 분야나 주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재 운영 중인 디지털 아카이브는 공공기관을 비롯해 공적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해온 조직들이 활동 결과물과 수집 기록을 중심으로 구축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기록, 즉 정보 데이터의 품질과 순도가 높다. 그만큼 신뢰도 높은 기록과 정보에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채널로 디지털 아카이브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생기거나 정보가 필요할 때도 마찬가지다. 믿고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찾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 공신력을 갖춘 여러 기관들에서 디지털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고, 서비스를 하고 있는 기록도 일본군의 조직적인 위안소 운영 사실을 담은 공문서부터 피해자의 구술 증언과 치유 기록,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국제사회의 조사 보고서, 세계 각국 의회의 결의안 채택 관련 기록 등 30년이 훌쩍 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정보를 수집하여 공개하고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는 일본군'위안부'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아카이브814',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서비스하고 있는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가 대표적이며, 그 외 국가기록원, 서울기록원 같은 기록 전문 기관 및 '양성평등아카이브 여기모아', '오픈아카이브' 등 공공기관의 아카이브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정보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디지털 아카이브 5곳의 성격과 함께 주요 기록물 등을 정리했다.   01. 아카이브814 주소 : https://www.archive814.or.kr 특징 : 공공과 민간 기록, 연구 자료까지 고루 서비스하는 일본군'위안부' 전문 플랫폼   2020년 8월 14일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소속 기관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위안부' 관련 기록과 자료를 종합해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현한 '아카이브814'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라면 대개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저장소'라는 지향처럼 실제로 '위안부'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노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814'의 연원은 고 김학순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날인 8월 14일로, 2018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해마다 '기림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 아카이브814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역시 공공과 민간을 아우르며 일본군'위안부' 관련 신뢰성 높은 자료를 폭넓게 구축해 놓은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아카이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로, 먼저 여성인권평화, 형태별, 시기별로 분류한 '소장자료' 카테고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과 이송,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바를 보여주는 '진중일지', 전후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 사례로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 회의록 등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을 추적할 수 있는 공문서가 대표적이다. 문서류, 도서간행물류, 시청각기록물로 구분하고 있는 형태별 분류에는 '증언/구술자료'도 상당하다. '포스트 피해자 시대'라는 표현이 통용될 만큼 생존 피해자들이 점점 줄고 있는 때 김학순, 김복동 등 피해자 22명의 증언 영상과 38명의 구술 자료만큼 귀한 기록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위안부'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이중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떠돌다 아버지 사후, 1941년 양아버지가 일본군에 넘겨 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 김학순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방식 중 하나인 '취업사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취업을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일본 공장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배를 탔는데 도착해보니 대만이었고, 일본군'위안부'가 되어야 했다는 박두리의 증언이다.  이와 더불어 아카이브814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진실 규명과 해결을 위한 노력과 성취를 확인할 수 있는 국내외 활동 기록도 제공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아시아연대회의,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생산된 결의문, 일본군 성노예 전범들에 대한 피해국 검사단의 기소장 등인데, 이 역시 '여성인권평화' 코너에 정리해 놓았다. '컬렉션' 카테고리를 통해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노 담화 그리고 책임과 보상', '중일전쟁과 중국 내 '위안부'', 일본군'위안부'의 모집과 도항, 위안소의 실태 등 각 주제에 따라 기록과 맥락에 대한 설명을 연결한 다음 시각화 작업까지 더한 컬렉션을 통해서는 훨씬 풍부하게 '위안부' 문제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 원문을 공개하는 한편 내려받기, 인쇄 등 기능적인 서비스까지 갖춘 아카이브814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현상과 담론, 연구 결과를 콘텐츠화 하고 있는 웹진 <결>과 시너지를 내며 활발한 사회적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02.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 주소 : https://archives.womenandwar.net 특징 : 2023년 공개된 신생 아카이브, 30년 넘는 '위안부' 활동 기록과 정보 방대   2023년 7월 서비스를 시작한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민사회단체가 선보인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문 디지털 아카이브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신생' 아카이브지만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정보와 기록의 역사는 가장 깊다는 데 이견이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전문 디지털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이는 아카이브 탄생 과정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다.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를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는 (재)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기억연대)이다. 정의기억연대는 1990년 11월 여성단체 37곳이 참여해 창립한 이후 국내외에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와 피해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주도해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회의'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와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단체들이 이듬해 설립한 (재)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통합하면서 2018년 출범했다. 이후에도 계속 수요시위, 평화의 소녀상 건립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이끌어온 정의기억연대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한 역사교육, 추모사업 등을 통해 장기적으로 미래세대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전 세계에 인권과 평화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기 위한 구상으로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를 추진, 지난해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2012년 개관한 뒤 꾸준히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기록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기록을 수집·보존·서비스해온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역할도 컸다.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는 서비스 개시 시기가 최근인 만큼 정보(2,419건)와 기록(2,811건)의 양적 규모가 크고, 분류 체계도 정교하다. 문서류, 박물류, 사진그림류 등 기록유형부터 연대, 출처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또 상위 카테고리인 '정보사전'을 통해서는 인물과 조직, 연표에 따라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고, 수요시위와 아시아연대회의, 법적 대응 등 주요 활동 기록을 집합적으로 묶어놓은 '컬렉션'은 맥락을 연결하는 설명과 함께 다양한 정보를 시각화로 구현해 놓아 이용자들의 이해를 높이고 있다. 특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정보사전'의 인물 코너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거나 문제 해결 운동에 개입하거나 주요하게 활동한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44년 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연행되었다가 탈출 과정에서 헌병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강덕경이 있다. 강덕경은 1992년 말부터 나눔의 집에 거주하며 미술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강덕경은 위안소에 대한 경험을 많이 그렸는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상징하는 '빼앗긴 순정'을 비롯한 '책임자 처벌' 등이 그가 그린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열린 전시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정보사전'에서는 이처럼 인물과 조직에 대한 설명과 사진, 활동, 생산된 기록에 대한 관계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지금도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수요시위'는 별도의 '수요시위 아카이브'로 연결해 보다 폭넓게 기록을 탐색할 수 있도록 했다. 관련 기록이 수만 건에 달해 현재도 정리 중인 수요시위 컬렉션은 총 2,473건의 관련 기록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는 또한 주요 기록물들을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로도 서비스하고 있다.      03. 국가기록원 주소 : https://www.archives.go.kr 특징 :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해 관리 중   우리나라는 민간 소장 기록물 가운데 국가적으로 영구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정해 멸실이나 훼손을 막고 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국가지정기록물' 제도를 두고 있다. 이에 근거, 국가기록원은 2008년부터 서울에서 세계기록총회가 개최된 2016년까지 제1호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를 비롯해 이승만 대통령 기록물(제3호),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제6호) 등 총 12호(15건)를 '소중한 기록유산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해 안전한 보존·관리를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2013~2014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된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물이 포함돼 있다. 현재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은 제8호(나눔의집 3,060점), 제8-1호(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940점), 제8-2호(나눔의집 125점)인데, '평화의 소녀상'의 모티브가 된 고 김순덕의 '못 다 핀 꽃(1995)'부터 '위안부'로 끌려가는 순간을 생생히 묘사한 '끌려감(1995)' 등 피해자가 직접 그린 그림 기록도 들어 있다.  국가기록원은 소장 '위안부' 관련 기록 중 주요기록물 27건을 선정해 상세 정보와 함께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27건 중 대다수는 여성가족부와 행정안전부에서 생산한 사료 목록집과 피해자 증언 자료이다. 사료 목록집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초 문헌 자료로, 국내에 산재해 있는 기록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증언 자료 역시 일본군 성노예제 증거 기록과 비교해볼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좀더 풍부한 기록을 확인하려면 국가기록원 누리집을 찾아 '통합검색'을 이용해 '위안부'를 검색하면 된다. 2024년 8월 말 현재 검색 결과는 5,632건으로,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일본 내각관방장관보실 등에서 생산한 공문서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생산한 강제동원 피해 신고 조사 기록이 있다. 시기별로 보면 1950년부터 1980년 사이 발굴되거나 수집된 기록이 80건이고, 대부분이 1990년대 이후에 생산된 기록들이다.  이중 온라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록은 총 36건이다. 제공되는 목록에 비해 적은 수량이지만 '위안부' 연구 동향, 문헌 자료 목록, 일본군인 회고록 자료, 동원 지역 분포 지도, '위안부' 모집 광고 등이 기술된 「'위안부' 관련 이해를 위한 기초입문」과 같은 기록은 '위안부'에 대한 조사나 연구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04. 서울기록원 주소 : https://archives.seoul.go.kr 특징 : 세계 최초 조선인 '위안부' 영상 등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기록물 기증   2017년 7월, 음성 없는 18초 분량의 영상 하나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견된 이 영상은 확인 결과 미·중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 지역을 탈환한 다음날인 1944년 9월 8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서와 사진 기록이 '위안부' 문제의 뼈와 살을 복원했다면, 영상은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해석과 함께 공개된 후 많은 공감을 이끌어낸 이 영상은 지금까지도 조선인 '위안부'가 담긴 세계 최초의 영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상을 발굴한 이들이 서울대학교 정진성 연구팀이었다. 2014년 9월 '일본군 위안부기록물 관리사업팀'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결성된 연구팀은 생존 피해자의 증언과 일치하는 '위안부' 여성 총살 기록이 적힌 중국 윈난 원정군의 작전일지 등 약 250건의 사진 및 문서와 1,000여 건의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2018년 연구팀은 미국, 영국, 태국 소재 기록기관에서 수집한 일본군'위안부' 관계 기록을 서울기록원에 기증했다. 서울기록원은 기증 자료를 모아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수집한 일본군'위안부' 기록' 컬렉션을 만들고, 2019년에는 이를 시민에 공개하는 전시회도 개최했다. 컬렉션에서는 미·중 연합국 공문서, 포로 심문자료, 스틸 사진, 지도, 동영상 등 총 237건의 자료를 제공한다. 그중에서 해제 작업이 완료된 기록은 137건이다. 북한 조선중앙TV가 방송한 다큐멘터리 <사진 속의 진상을 파헤치다>에는 '만삭의 위안부'로 불리는 박영심의 증언이 등장한다. 옛 모습이 남은 위안소 건물에서 자신의 방을 찾고,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는' 박영심의 모습은 중국 쑹산의 연합국 포로수용소 사진과 겹쳐진다. 정진성 연구팀이 서울기록원에 기증한 '위안부' 컬렉션에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타임슬립(Time Slip)을 하는 느낌을 받을 만큼 생생한 기록이 많다.   05. 양성평등아카이브 여기모아 주소 : http://genderarchive.or.kr 특징 : 간행물, 홍보 전단, 스티커 등 '위안부' 운동 관련 기증 자료 대다수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운영하는 '양성평등아카이브 여기모아'는 서울시의 양성평등 콘텐츠 허브로, 양성평등과 관련한 통계 자료(성인지통계 모아), 정책 연구 자료(정책연구·사업 모아), 기증 자료(기증자료 모아)를 제공한다.  이 가운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은 '기증자료 모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증자료 모아'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도서관에 2015년부터 기증된 자료를 원문으로 모아 기록 유형, 기록 형태, 생산자, 기증자별로 분류해 모은 아카이브이다. 독립적인 콘텐츠라기보다 여성운동의 관점을 담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자료가 대다수이다.  2024년 8월 말 현재 '위안부' 관련 기록은 483건인데, 도서간행물류가 352건으로 가장 많고 문서류(119건), 사진그림류(6건), 박물류(5건) 순이다. 특히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과 관련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록도 살펴볼 수 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남북한 공동검사단이 히로히토 일본 천황 외 전쟁 당시 군부 지도자 등 12인에 대해 인도에 반한 범죄로 기소한 고발장을 비롯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에서 주최한 '현대의 녀성에 대한 폭력 국제공청회 포스터' 등이다.  이외 중국 하이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 내용을 요약한 내용의 팸플릿, 서울시여성가족정책실의 '위안부' 전시 팸플릿, 일본군'위안부'기억의터 건립추진위원회의 홍보 브로슈어, 기림의 날 스티커 등 홍보·전단 기록도 볼 수 있다.   이밖에 오픈아카이브(https://archives.kdemo.or.kr)에서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에서 기증한 문서사료 217건,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의 기자회견 사진 등 사진사료 49건, 구술 자료 3건 등 모두 277건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오픈아카이브를 운영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장고 이전에 따라 2025년 상반기까지 원문 활용 서비스 등은 중단된 상태라 이용 시 참고해야 한다.    비공개, 시스템 불안정 등 아쉬움도 있어 각각의 성격과 특성에 따라 차별화된 일본군'위안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개별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다 보면 아쉬움이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국가기록원'의 경우 관련 기록 목록은 적지 않지만, 여러 이유로 '비공개' 대상이 많아 접근이 제한적이다. '서울기록원'과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의 경우 시스템이 불안정할 때가 있어, 보이던 기록이 다시 검색하면 사라지기도 하는 문제가 발견됐다. 또 '아카이브814'는 해제 서비스가 부족해 일본 정부의 공문서 등 주요 기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양성평등아카이브 여기모아'는 '위안부' 관련 기록이 모여 있지 않아 원하는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디지털 아카이브는 사실을 바탕으로 문제를 탐구하는 데 기초가 되는 필수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깊이 있고 폭넓게 접근할 수 있고, 여성 인권과 평화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디지털 아카이브의 확장은 더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기록읽기'를 실천하는 선순환을 측면 지원하고 있다. 특히 역사 수정주의 등 의도적인 '위안부' 역사 폄훼와 왜곡이 이뤄지고 있는 이 즈음, 정확한 기록과 정보의 보고인 디지털 아카이브의 효용이나 역할도 비례해 확대될 것이다.   

    김서연

  •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2024년 논평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 두레방은 결코 멈출 수 없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 회복 활동을 비롯해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를 알리며 한국 최초의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온 두레방의 공간이 대규모 개발사업을 명분으로 철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옛 성병관리소' 건물인 두레방 철거가 '빼뻘마을' 여성공동체를 내쫓는 일이자 원형이 보존돼 있는 근현대 역사문화적 공간을 폐기하는 일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두레방 김은진 원장이 의정부시와 동두천시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를 역사문화평화공원으로 활용하자는 제안과 함께 현장 상황을 전해왔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두레방(My Sister's Place)'의 역사는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 지점에 '문혜림'이라는 여성이 있다. 2022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문혜림은 헤리엇 페이 핀치벡(Harriett Faye Pinchbeck)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 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의 부인인 그는 사회사업가로, 국적 덕분에 미국 우편 시스템을 이용해 국제사회에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려 민주화를 도운 인물이기도 하다. 미군 부대에서 알코올, 약물 문제를 겪는 미군을 상담해주던 사회사업가 문혜림의 눈에 성매매를 하는 한국 여성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세상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이었다. 문혜림은 '나라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장로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프로젝트를 통해 1986년 의정부시 캠프 레드크라우드 옆에 두레방을 세웠고 후에 고산동, 일명 '빼뻘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빼뻘'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아 '배벌'로 불린데서 출발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우리말이 익숙지 않은 미군들의 발음 때문에 와전됐다거나 기지촌에 한 번 발을 들이면 좀체 빼기 어려워 나왔다는 설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두레방, 기지촌 여성들이 서로 돕고 쉬며 이야기하는 곳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공동체'라는 '두레'의 뜻을 연결해 '여성들이 서로 돕고 모여서 쉬며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탄생한 두레방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기지촌 여성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다각도로 활동했다. 일상적으로는 상담, 한글과 영어 교육, 공동 식사, 요리교실, 야유회, 탈성매매를 위한 빵 만들기, 카드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자립을 도왔다. 또 기지촌에서 발생하는 불법 성매매 문제,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와 실태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 여성들을 위한 전문 상담, 의료·법률 지원, 치유 프로그램 운영, 자활사업 연계, 출판·영상자료 제작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또 나날이 늘어나는 혼혈아들을 위한 놀이방, 공부방도 운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레방은 매우 정치군사적인 영역인 '기지촌'이라는 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보다 현실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해결과 민관 협력 체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는 2012년, 인권 침해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교육과 홍보 등을 목표로 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발족으로 이어졌다. 두레방과 기지촌여성인권연대는 관련 조례 제정과 함께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하며 성매매를 조장한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묻는 국가손해배상 소송, 특별법 제정, 국제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왔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 이후 '성매매 피해 지원 상담소'로 지정받은 두레방은 2006년부터 '두레방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2009년에는 '두레방쉼터'를 설립해 1990년대 중순부터 국내 기지촌으로 유입된 성매매 피해 이주여성을 돕고 있고, 2021년에는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을 설립해 반성매매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권 개선부터 조례 제정, 국가 책임 인정한 대법원 판결까지!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온 두레방의 주요 성취들 지난 38년 동안 기지촌을 둘러싼 착취 구조와 인권 침해 상황을 인식한 두레방은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기지촌 미군 '위안부' 운동을 주도해 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의정부시 안에, 빼뻘마을 안에서 여성들과 통과해온 시간이다. 수많은 상처를 딛고 사회와 화해(통합)하기, 홀로서기(자활), 자기 존중감 회복하기(치유 프로그램) 등은 여성들과 지금까지 살던 영역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해온 과정이었다. 법률 제정 등 사회적 성취에 기여한 부분도 상당하다. 2004년 2월의 성매매방지법 제정에 앞장선 것을 비롯해 기지촌 여성 명예 회복과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 활동, 조례 제정 운동, 이주여성을 위한 E-6-2비자대안 네트워크 활동 등이다. 모두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사회와 거대한 군사화가 취약한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극복하는 연대활동이었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성매매피해상담소(2006), 외국인여성지원시설(2009), 평택여성인권상담센터 품(2021) 등을 등록, 운영하며 국가 예산을 받아 공식적으로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역사상 여성단체 최초로 등록된 비영리민간단체였다. 2020년 4월 29일은 기지촌 여성운동에서 역사적인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경기도의회에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날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이 7년 동안 헌신한 성과였다. 2022년 9월 29일도 기념비적인 날로, '기지촌 성 산업 제도를 국가폭력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원심 확정 판결을 이끌어낸 일은 두레방 기지촌 여성운동의 쾌거였다. 2014년 6월 25일,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이 국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여성들의 성매매를 방조, 묵인, 관리한 책임이 있기에 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지 8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기지촌 정화 운동'은 판결에서 정부의 책임을 판단하는데 인용된 대표적인 증거였다. 1969년 주한 미군 감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던 기지촌 일대에는 인종 갈등, 성병 등의 문제가 더해지면서 혼란이 극심했다. 그동안 여성들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다, 자긍심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 헌신하라'며 정책적으로 기지촌 성매매를 장려해온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자 불안한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는 출구로, 또 주한 미군의 주둔을 보장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대통령 직속기구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만드는 등 '기지촌 정화 운동'을 추진했다. 핵심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정화'였다. 당시 미군 측은 심각한 성병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시키고, 이들에 대한 관리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이후 클럽, 길거리 등을 불문하고 이른바 '토벌'이라고 불리는 불심검문이 이뤄졌고,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다. 이때 미군으로부터 성병이 있다고 지목당한 여성은 정당한 검사 절차 없이 바로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성병관리소로 보내져 감금, 격리 치료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독한 치료제로 인해 고통받은 것은 물론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쇼크사하는 등 수많은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두레방은 또 19대, 20대, 21대 국회에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발의에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함께 했다. 하지만 법안이 현실화되지는 못하고 임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그럼에도 두레방은 다음 국회에서도 '기지촌 여성 특별법'을 다시 발의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속에서 기지촌 미군 '위안부'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고자 노력해 여성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미군 성매매가 범죄임을 명확히 한 점, 1980~1990년대 한국 상황에서 성산업은 성착취라는 사실을 공식화하고 반성매매 운동을 촉발시킨 부분 등 두레방이 이끌어낸 사회적 인식 변화도 꼭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철거 위기의 두레방과 원형 간직한 '옛 성병보건소'  이런 두레방은 최근 또 다른 커다란 시련과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여성이 떠나간 기지촌의 빈자리를 대체해온 '이주여성' 문제다. 이들의 불안한 존재론적 특성은 여성의 빈곤화와 인신매매성 이주로 연결되면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 차별이라는 삼중의 인권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두레방은 이들 이주여성들을 위해 법률, 의료, 각종 노동 인권 침해 관련 지원과 상담, 나아가 보호 시설, 안정적인 숙식, 귀국 지원까지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당황스러운 문제는 두레방 이전이다. 1979년에 준공된 두레방 건물은 원래 기지촌 여성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검진받던 '옛 성병보건소'였다. 두레방은 의정부시 소유의 이 '아픔'의 공간을 2000년부터 임대해 평화교육의 장, 국제 인권 운동의 장, 기지촌 여성 운동의 장으로 탈바꿈시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두레방에게 시내로 이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발단은 2022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이다. 일명 '새뜰마을사업'으로, 국가균형발전위가 선정한 신규 사업 대상지 68개소 중에 의정부시의 현 빼뻘마을이 포함돼 두레방 건물을 부수거나 고쳐서 커뮤니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이름이라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개발 방향이 읽힌다. 옛것은 미련없이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2024년 1월 11일 의정부시청 여성보육과 과장과 팀장이 두레방을 방문해 사무실 이전을 종용했다. 1월 22일에도 균형개발추진단 도시재생과 과장, 재생정비사업팀장 외 주무관 2인이 두레방을 찾았다. 이들은 '두레방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보강해 사용할 계획이다. 건물을 활용해 빼뻘마을 라이프 푸드 팝업스토어(쿠킹클라스-통닭만들기 등)를 진행하고, 등산객도 유치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반복하는 논리는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현재 빼뻘마을에는 미군도, 여성들도 많지 않은데 두레방이 꼭 그곳에 있어야 하냐는 것이다. 이에 두레방은 고령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빼뻘마을에 단 한분이라도 살아계시는 한, 곁에서 지속적인 지원과 지지를 담당해야 하는 단체라고 응답했다. 둘째는, 그럼 공간을 의정부 시내로 옮기란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가 시내로 가면 내담자들이 업주의 눈치를 보고 상담하러 올 수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시내로 가면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기지촌 여성들은 방문하기 어렵다. 셋째, 현 빼뻘마을의 교통이 너무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두레방은 아무 불편 없이 역할을 수행해 왔다. 넷째,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고령의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일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두레방의 정체성은 기지촌 여성 지원이다. 지원을 멈추는 것은 늙고, 연약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국가에서 또 외면하는 일이다. 경기도는 '기지촌여성지원조례'를 제정했고, 두레방은 그 조례에 맞추어 지원하고 있다. 다섯째, 보조금은 의정부에서 받으면서 아웃리치는 동두천 등 타 도시로 많이 나간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 보조금 예산은 매칭펀드(여성가족부 50%, 경기도 25%, 의정부시 25%)이며, 어느 지역에 있든 요청하는 모든 내담자를 지원해야 한다. 동두천으로 특히 많이 가는 이유는 기지촌 이주여성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 성착취 피해 이주여성 지원 사례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두레방이다.     두레방이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 빼뻘마을이 깨끗하고 안전한 마을로 거듭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두레방은 그 과정에서 약자의 역사가 무시되고 고스란히 삭제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전쟁 후 스스로 거름이 되어 도시 경제를 일으키고 가족과 나라를 먹여 살린 기지촌 여성들, 국가폭력에 희생된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지우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정부는 그간 노년이 되면 아파트를 주겠다고 속여왔다. 그런데 아파트는커녕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요, 사랑방이며, 최후의 공간인 두레방을 빼앗으려 한다! 언니들은 분노했다. 만나주지 않는 시장을 만나기 위해 시청 앞 거리로도 나섰다. 시장과 만남은 성사되었으나 결론적으로 "(2025년 6월까지) 1년간 유예기간을 가지며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 현재까지 시장의 답변이다.  두레방은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캠프 스탠리가 아직 반환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빼뻘마을은 아직도 기지촌이기 때문이다. 두레방은 '옛 성병보건소' 건물을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장소를 치유와 회복의 장소로 변신시켰다. 두레방이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상담소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이기에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기지촌 현장인 빼뻘마을과 두레방은 군사주의의 폐해와 여성 인권에 대해 교감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미군기지와 기지촌과 여성들의 삶, 두레방의 역사가 응축돼 있는 '옛 성병보건소' 건물은 아픈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교육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공간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자 유일한 건물이기도 한 '의정부 옛 성병보건소'는 물론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보존해야 한다. 1970~1980년대 기지촌 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 한때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명명되기도 했던 이들은 기지촌 쪽방에서 고령의 독거노인으로 외로움을 안고 만성질환, 빈곤과 싸우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제도가 짊어져야 마땅한 책임까지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은폐된 성매매 공간인 기지촌에서 수십 년 동안 '국가안보'라는 명분 아래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고쳐지지 않은 트라우마를 안고 지금껏 살아온 기지촌 여성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에서 추진하는 두레방 이전은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사안이 아니다. 기지촌 여성들의 보금자리, 최후의 공간을 빼앗는 인권의 문제이다.     기지촌 여성 공동체 의미 담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을! 지난 2024년 5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예술가들과 '두레방×ㅃㅃ보관소' 연대로 '거품·소음·웅성거림' 전시 프로젝트가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아픔이 스며있는 미술치료 결과물, 공예작품, 사진자료, 인터뷰 영상이 설치된 전시장이 바로 두레방 건물이었다. 그리고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을 열어 두레방이 왜 빼뻘마을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목소리를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제안된 가장 현실적인 공간 활용 대안이 '기지촌여성박물관' 혹은 '평화여성인권박물관'이었다.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을 둘러싼 또 하나의 이야기의 집인 두레방은 지난 8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역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보존해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시회 마지막날인 6월 5일 열린 '공존과 공생의 마을재생을 제안하다' 포럼에서 발표한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의 제언도 연결된 내용이었다. "생태와 사람 그리고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도시재생은 있을 수 없다. 1년 유예가 아닌 60년의 성찰로 함께, 다양하게 숙의해야 한다. 두레방 공동체를 시민들이 함께 축적하고 의미화하는 커뮤니티아트센터 형태면 좋겠다." - 이원재 문화연대위원장  두레방은 여전히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체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레방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두레방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릴 것이다. 9월 경기여성정책컨퍼런스 주제로 '두레방 이야기'가 확정됐다. 정기적인 포럼을 계속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기지촌 평화기행이나 다크투어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경기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시민들을 만나고, 나아가 세계와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것이다. 두레방 공간은 부끄러운 장소, 감추어야 할 역사가 아니기에 결코 멈출 수 없으며 갑자기 '쫓겨' 나서도 안 된다. 두레방의 정체성이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로 제한되어서도 않된다. 두레방 활동의 사회적, 역사적, 지역적 가치와 의미는 앞으로도, 더 다양하게 공유되고 해석돼야 한다. 두레방은, 두레방 언니들은, 두레방 활동가들은 마지막까지 빼뻘마을에서 함께 할 것이다.  

    김은진

  • 소녀상, 인권·평화 메시지 안고 이탈리아 스틴티노에 당도하다
    2024년 논평 소녀상, 인권·평화 메시지 안고 이탈리아 스틴티노에 당도하다

    소녀상, 인권·평화 메시지 안고 이탈리아 스틴티노에 당도하다   2024년 6월 22일, 남유럽의 변방 이탈리아 사르데냐섬 스틴티노시에 해외로는 14번째, 유럽에서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이어 2번째로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되었다. 알고 보니 스틴티노시는 여성인권변호사 출신이 현직 시장이고, 소녀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기회를 주도할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는 '소녀의 권리 헌장'을 채택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기리는 벤치까지 설치한 성평등 도시였다. 토리노대학교 주세삐나 데 니콜라 교수가 시장 인터뷰를 포함해 제막식 이후 현지 소식을 보내왔다.    '깎아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내는 행위인 조각. 이 도구적 활동을 인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활동으로, 또 특별한 경험과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념하는 메시지와 상징으로 발전시켜 왔다. 조각상이 표현과 의사소통, 지식과 통제의 도구 역할을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타임캡슐로 비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녹아 있는 조각상은 나아가 한 나라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념 또한 개인은 물론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 공동체의 의지와 행위를 응축한 행위이자 불법부당한 권력의 폭력으로 고통받거나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다. 또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또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갈등이 끝난 후 사회적 회복을 촉진하거나 희생자를 위한 추모 의식, 불공정과 차별의 극복, 그리고 정당한 단죄 욕구를 반영하려는 의지인 기념 행위는 사회 전 영역에서 화해와 포용, 지속 가능성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 연결된다. 국가를 비롯해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기념 동상을 세우는 배경이다.   남유럽의 변방 이탈리아 스틴티노시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2024년 6월 22일, 오래 전부터 아름다운 바다와 매혹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전 세계 부호들의 요트가 정박해 있는 유명 휴양지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스틴티노시가 전쟁과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는 용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함께 전시 성폭력 문제, 평화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것이다. 시청에서 약 200m 떨어진 해변가, 스틴티노시가 제공한 공공부지에 자리잡은 소녀상은 해외에서는 14번째, 유럽에서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 이어 2번째로 설치됐다. 소녀상은 어떻게 남유럽의 변방인 스틴티노시까지 올 수 있었을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기억연대)'의 제안을 인권변호사 출신의 리타 발레벨라(Rita Vallebella) 스틴티노 시장이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이는 현지 언론의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기리는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여성들, 그리고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을 대표합니다." 지역 언론 <today.it>[1]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힌 리타 발레벨라 시장은 소녀상으로부터 여성의 몸에 대한 잔혹행위와 함께 지역사회와 국가,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대변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았고, 이를 스틴티노 시민들이 수용했다고 전했다.    사진 1.png   사진 2_Vallebella sindaca di Stintino - Facebook Comune di Stintino.jpg   그리고 발레벨라 시장의 이력과 스틴티노시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곳에 소녀상이 올 수 있었던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2년 전 선출된 발레벨라 시장은 변호사로, 여성과 폭력에 관한 문제에 항상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유럽의회에서 자문 역할을 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또 스틴티노시는 '소녀의 권리 헌장(Carta dei Diritti della Bambina)[2]'을 채택한 사르데냐 섬 지자체 중 하나이다. 이 헌장은 소녀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기회를 주도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2023년 3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중 하나를 접하고 있는 스틴티노시의 포르토 베키오(Porto Vecchio)에는 성폭력 피해자인 모든 여성들을 기리는 세 개의 빨간 벤치도 설치돼 있다.  또 다른 지역 신문 <Unione Sarda>에 따르면, 평화의 소녀상 개막식에는 시민들과 스틴티노 시장, 한국에서 온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비롯해 인근 도시의 시장과 부서장들 외에 지역 아동 및 청소년 권리 보호 기관, 권리 및 평등 기구의 지역 대표, 여성폭력방지협회 회장, 사르데냐 섬의 또 다른 도시인 사사리(Sassari)시의 여성 권리 보호를 위한 변호사네트워크협회 등도 참석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스틴티노시가 보여준 관심과 참여는 이 도시가 정의와 인류애에 대한 헌신, 여성 폭력에 대한 관심과 해결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곳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024년 8월 26일, 발레벨라 시장과 직접 전화 통화가 연결됐다. 그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여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폭력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정의기억연대의 요청으로 제막식 등의 행사 홍보대사로 선정된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과 싸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스틴티노시는 성폭력을 주요 주제로 하는 국제회의의 무대가 될 겁니다."   사진3.png     이탈리아의 비극적인 전시 성폭력 사례인 '마로키나테' 사건 전쟁은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 여성의 몸을 도구로 사용해 왔다. 실제로 여성의 성적 예속 현상과 군사적인 남성 패권은 전쟁 중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여러 전쟁에 연루된 많은 여성들이 겪은 공통의 경험이다. 이는 이탈리아의 역사에서도 발견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던 '마로키나테(Marocchinate)'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약 90km 떨어진 프로시노네시(Frosinone)의 치오치아리아(Ciociaria) 지역에서 수천 명의 여성이 겪은 사건으로, 일본군'위안부'의 문제처럼 오랫동안 침묵 속에 덮여 있었다.   비극은 1944년 5월, 프랑스 장군 알퐁스 주앵(Alphonse Juin)이 나치 점령군이 주로 주둔하고 있던 몬테카시노 마을에서 이탈리아를 둘로 나누고 있던 구스타프 선을 돌파하고 마을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의 지휘 아래 모로코 출신 남성들로 이뤄진 군대 '구미에르(Goumiers)'를 소집하면서 촉발됐다. "저 산 너머, 오늘 밤 당신들이 무찌를 적들 너머에는 넓은 땅이 있다. (…) 여인과 포도주, 집이 가득한 땅이다. (…) 당신들이 승리한다면 그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빼앗거나 파괴하거나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3] 이후 50시간 동안 구미에르에게 치오치아리아 지역을 누빌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주민들은 며칠 동안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이때도 비극은 속임수와 지켜지지 않은 약속 속에서 벌어졌고, 많은 시민들(특히 여성들)이 구미에르 군대에 의해 자행된 신체적, 성적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당시의 공포를 전하는 수많은 증언 중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자녀들의 기억도 있다. 또한 '마로키나테'의 피해자인 어린 소녀 가운데는 자신들이 겪은 폭력과 사회적, 심리적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로키나테의 희생자들도 집단적인 차별과 역사적인 소외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그들을 하위 사회 영역에 머물게 했다. 특히, 현재는 대부분 사망한 당시의 생존자들은 여러 인터뷰에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고립과 소외, 차별을 당한 경험을 보고했다.[4] 그럼에도 국가는 모호한 입장을 보이며, 마로키나테 사건을 이미 법적으로 다루고 해결된 다른 모든 전쟁 범죄와 같은 수준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피해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 슬픈 역사적 사건은 알베르토 모라비아(Alberto Moravia)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비토리오 데 시(Vittorio De Sica) 감독의 영화 <라 치오치아라(La Ciociara. 두 여인)>에서 주인공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의 연기로 고발되기도 했다. '전쟁은 적군도 아군도 없고 승리와 패배도 없으며 남는 건 오직 죽음과 상처 뿐'임을 전하는 열연으로 소피아 로렌은 1962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 정부의 비문 제거 요청 단호히 거절한 스틴티노시 시장 다시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로 돌아오자. 제막식 소식을 전하던 지역 신문과 언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일본 간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논쟁은 <Il Foglio>, <La Repubblica> 같은 일부 전국지에도 보도됐다. 신문 <Il Foglio>[5]는 "개막식에는 사실 이탈리아 기자들보다 아시아 기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 이 동상이 세워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고 소개했다. <The Post Italy>[6]의 보도는 좀더 상세했다.  "스틴티노시에서의 동상 개막식은 사토시 스즈키(Satoshi Suzuki)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리타 발레벨라 시장을 만나 행사 연기와 조각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비문의 재고를 요청했다. 그 비문에는 일본이 자국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간당한 여성들의 가족에게 결코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7]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레벨라 시장에게 물었다. 시장은 일본 대사가 비문에 쓰인 내용뿐만 아니라 비문 자체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전했다. 이에 대한 발레벨라 시장의 답변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저는 피해자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 동원된 수십만 명의 한국인과 중국인 여성들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이번 결정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갖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일본 대사에게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것은 누구를 반대하거나 누구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발레벨라 시장은 비문과 관련해 확인한 후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수정할 의향이 있으나, 공식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 한국 당국에 직접 연락했지만 현재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소녀상과 비문은 모든 사항이 명확해질 때까지 현재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장은 또 소녀상 설치 후 위협과 모욕을 담은 가짜 이메일을 많이 받고 있다는 어려움(일본의 극우 지지자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과 함께 스틴티노시를 방문한 아시아 관광객들이 평화의 소녀상에 꽃다발과 편지를 놓고 갔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일본 정부가 2020년 9월 소녀상을 먼저 설치한 독일에 지속적으로 행사한 외교적 압력은 물론 존치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 베를린시의 카이 베그너(Kai Wegner) 시장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발레벨라 시장은 독일에서 일어난 것처럼 찬반 시위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확실한 것은 스틴티노시에 설치된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논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이 응시하고 있는 미래 한편 유럽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곳이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두 나라가 1940년 9월 27일 일본과 함께 체결한 '삼국 동맹(Tripartite Pact)'을 체결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세 나라 간의 군사 동맹을 공식화했으며, 이후 이들은 '추축국'으로 불렸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유럽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도력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과거와 독일의 나치 과거를 고려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책임감'일까.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자행한 '위안부' 문제는, 특히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 학자, 연구자, 문서화된 조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포함되며, 네덜란드 등 당시 이 지역에 있던 서양 국가들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스틴티노시에 소녀상이 설치되면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문제는 점점 국제적인 이슈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관련 당사자들은 국제 기관인 유엔(UN) 등을 통해 궁극적인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피해자들에게 존엄성을 되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피해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겪어온 낙인을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 피해자'나 '강제 수용자'라고 부르면서 모든 폭력, 피해, 학대를 겪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루면 어떨까.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이 응시하고 있는 곳은 이러한 관점을 확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주 ^ https://www.today.it/attualita/stintino-capitale-delle-donne-sardegna-corea-giappone.html, 2024년 7월 2일. ^ 소녀의 권리 헌장 은 F.I.D.A.P.A. BPW Italy (이탈리아 여성 예술, 직업, 사업 협회 – Business and Professional Women)에서 작성한 문서로, BPW (국제 전문 여성 단체)의 다른 국제 지부들과 협력하여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UN(유엔)의 "아동 권리 헌장"을 확장하고 각색한 버전으로, 성별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소녀와 여성을 위한 평등과 존중의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헌장은 소녀의 권리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기관의 관심을 높이고, 그들에게 보호를 보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성 평등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Stefania Catallo. (2017) "La Memoria Scomoda della Guerra: le Marocchinate" Universitalia. ^ 2022년 3월, 아리안나 스파치아니(Arianna Spaziani)가 작성한 연구 '침묵의 시작과 끝: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위안부의 증언, 낮은 목소리',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Sapienza University of Rome) 학사 논문, 지도교수 주세삐나 데 니콜라(Giuseppina De Nicola). ^ https://www.ilfoglio.it/esteri/2024/06/25/news/il-passato-fra-tokyo-e-seul-che-torna-e-mette-in-mezzo-la-nostra-stintino-6682249 , 2024년 6월 25일. ^ https://www.ilpost.it/2024/06/23/statua-corea-giappone-stintino/ 2024년 6월 23일. ^ 스틴티노시 평화의 소녀상 비문 일부. "일본 정부가 계속해서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독일,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일본은 여성과 인류에 대한 전쟁 범죄를 책임감 있게 인정하고 그러한 잔학행위를 기억하는 데 정의로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https://womenandwar.net/article/?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28456807&t=board

    주세삐나 데 니콜라

  • 노란색 나비로 파도와 바람 만들어요
    2024년 인터뷰 노란색 나비로 파도와 바람 만들어요

    노란색 나비로 파도와 바람 만들어요 블로그 통해 '위안부' 활동 알리는 성미산학교 학생들 2024년 5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개관 12주년 및 김복동 5주기 특별전시 '여러분에게 평화' 개막 행사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시선을 끈 부분은 공연을 펼치고 있는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모습. 알고 보니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노래와 몸짓 실력은 이미 소문나 있고, 3년째 5월이면 한 주를 정해 수요시위를 주관하는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꾸준히 참여해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확인하다 두 학생 이야기를 접했다. 주인공은 올해 4월부터 굿즈를 만들고 블로그를 통해 박물관을 홍보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이연우, 이자민 학생. 두 학생과 두 학생의 담임을 맡아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교사 '둘리'(이선정. 둘리는 성미산학교에서 부르는 별명)를 만났다.   "지나간 어제 다가올 내일 그 사이 수요일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햇살 아래 너의 오늘은 어떤지 언제나 이곳에서 안부를 물어, 안녕 네가 답해준다면,  네가 옆에 있다면 더 크게 외칠 수 있어 노란색 나비로 파도를 만들자 정의의 물결이 일렁이도록 보랏빛 날개로 바람을 만들자 진실의 외침이 퍼져나가도록" <나비바람>이라는 곡의 노랫말이다. 작사·작곡자는 모두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들. 직접 '뮤직비디오' 영상까지 제작해 지난 7월 12일 유튜브에 공개한 학생들은 노래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매주 수요일이면 거리에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 또 함께했던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며 가사를 적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가 재생산되는 요즘,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지나간 어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가올 내일'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갈 내일, 이미 만들고 있는 오늘이 '정의의 물결이 일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이길 바라며' 이 노래를 들을 여러분의 오늘은 어떤지 안부를 묻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박물관으로 향하는 두 학생 학생들은 이 노래를 2025년 5월 성미산학교 학생회가 주관할 예정인 수요시위에서 부를 예정이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좀더 특별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포스트 중등 11학년 이연우 학생과 12학년 이자민 학생이다. 성미산학교 학제는 초등 5년, 중등 5년, 관심 영역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실행해보는 과정인 포스트 중등 2년 등 12학년제로 운영되는데, 일반 학제와 비교하면 고2, 고3에 해당한다. 두 학생은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하 박물관)을 찾아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노랫말과 맞춤하게 '노란색 나비로 파도를 만들고, 보랏빛 날개로 바람을 만들고 있는' 학생들이다. 피해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 '포스트 할머니시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시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체험 세대의 관심이 반가워 두 학생과 역사를 가르치는 이선정 교사를 만났다. Q. 먼저 박물관에서 어떤 자원봉사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 이자민 :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3월에 상의드릴 때는 약간 방치돼 있던 블로그를 다시 활성화해 박물관 홍보를 하기로 했었어요. 방문객들의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높아 젊은 분들과 교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해 박물관을 알리자 한 거예요. 그런데 활동을 시작하니 급히 해야 할 수작업이 많더라고요. 방문객들께 나눠드리는 티켓 정보가 바뀔 때마다 수정 스티커를 제작해 붙이는 일부터 행사에 사용할 노란 나비 메시지 카드나 대표적인 박물관 기념 굿즈인 나비팔찌, 나비반지 만들기 등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하고 있어요. 🧶 이연우 : 박물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나비메시지도 관리해요. 방문객들이 남긴 나비메시지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또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갈 자리가 필요하니까 일정 기간 지나면 정리를 하는 거예요. 우선 나비메시지를 떼어낸 다음 거기에 적힌 내용을 촬영해요. 방문객들의 마음이잖아요. 그러고 나서 나비메시지는 상자에 보관해요.  🧶 이자민 : 일본에서 많은 자료를 받은 지난 6월에는 한 달 동안 박물관 수장고에 가서 스캔하고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도 했어요. 일본어로 된 신문 기사나 잡지, 지도, 사진, 포스터 등이었어요. 내용을 좀 알았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요. 하필 에어컨이 고장나서 더워서 엄청 힘들었어요.(웃음)   Q. 그럼 블로그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 이자민 : 스캔 작업을 마치고 7월 17일 '박물관 이모저모-마농의 박물관 자원활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첫 글을 올렸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네 차례 더 글을 업로드했는데, 나비메시지에 담긴 글, 박물관 스티커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한 이야기, 나비팔찌를 만드는 과정 등을 담았어요. 9월 말에 올린 글에는 박물관에서 제가 좋아하는 공간인 2층 계단과 벽 이야기와 김복동 특별전시관, 추모관, 정원 등을 소개했어요.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처럼 벽돌 벽 사이사이에 전시돼 있는 할머니들의 메시지와 사진을 보고 감동 받고, 힘을 얻은 경험을 나눴어요.  🧶 이연우 : 2주에 하나씩 올리려고 했는데, 계획만큼은 안 되고 있어요.(웃음)        블로그 콘텐츠 기획해 박물관 홍보… 1차 목표는 이웃 100명 늘리기! Q. 블로그 활동에 대한 반응은 좀 어때요? 🧶 이자민 : 지금까지 '좋아요'와 '댓글'은 대부분 친구들이 남긴 거예요.(웃음) 블로그 이웃을 100명 더 늘리는 게 올해 1차 목표예요. 장기적으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람들에게 좀 더 가볍게 스며들었으면, 또 박물관이 쉬는 날 좀 더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더 홍보가 될까 고민하고 있어요. 오늘 웹진 <결>과 인터뷰한 이야기도 써야겠어요. 🧶 이연우 : 사실 저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일도 있었고, 아이디어가 없어 많이 참여하지 못했어요. 대신 소재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 올려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 이선정 : 맞아요, 연우가 그림을 잘 그려요. 🧶 이연우 : 여기 박물관 시설이나 마당부터 시작해 수요시위 현장 모습도 그려보고 싶어요. 그림이라는 특성 때문에 보다 편하게 보실 것 같아요.   🧶 이자민 : 나비메시지를 정리하다 보면 감동적인 소감글이 많아 지속적으로 소개하려고 해요. 그 사이에 활동가 분들 인터뷰, 박물관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Q. 다양한 콘텐츠가 기다리고 있네요. 이제 활동한 지 6개월 정도 지났는데, 보람이랄까 성취랄까, 활동하면서 느끼는 소감이 있을 것 같아요. 🧶 이자민 : 엄청 대단하거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실제로 계속하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뿌듯하긴 해요.  🧶 이연우 :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많아요. 그래도 박물관에 도움이 되고, 주위에서 여성 인권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을 때는 좋아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처음엔 열 받고 슬펐는데 점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박물관에 대한 진심이 뚝뚝 묻어난다. 그런데 두 학생은 언제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 성미산학교와 이선정 교사의 특별한 교육방식이 있다.  Q.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수요시위를 주관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혹은 하게 된 계기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 이선정 : 대안학교라 정규 교육 과정에 따른 수업 지도 방식에서 자유로운 성미산학교는 큰 틀에서 생태교육을 지향하고 있어요. 환경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중심으로 각 과정을 운영하는데, 저희는 초등은 생태적 감수성을, 중등은 생태적 지혜를 익히는 시간이라 표현해요. 이를 바탕으로 포스트 중등은 생태적 용기를 내는 과정이고요. 각 과정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교사가 중요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정해요. 역사를 전공한 제가 성미산학교에 온 때가 2019년입니다. 당시 여러 갈등으로 한일관계가 빠르게 안 좋아질 때였어요. 포스트 중등 1학년 학생들과 어떤 프로젝트를 하면 좋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우연히 모두 여학생이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공부해보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동의해서 한 학기 동안 공부했어요. 그 다음에는 아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해서 프로젝트를 하게 됐고요. 다큐멘터리나 논문을 보고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뉴스를 놓고 토론하고, 수요시위에도 같이 참여하고 있어요. 학교 가까이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과 고(故) 김학순・김복동 할머니를 모신 천안 국립망향의동산도 찾았어요. 현장에 가기 위해 미리 공부하고, 가서 또 생생하게 배우니까 학생들의 관심이 깊어져요. 이 과정이 이어졌고, 점차 중등 수업에서도 다루게 됐습니다. 🧶 이자민 : 저도 초중등 때 박물관에 서너 번 왔어요. 처음 일본군'위안부' 역사와 피해 할머니의 고통에 대해 들었을 때 놀라고, 열 받고 그랬어요. 돌아와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너무 슬펐던 게 기억나요. 그런데 알수록 분노 같은 마음이 점점 존경심으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용기 있다는 말을 훨씬 뛰어넘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요시위에서 활동가 분들을 만난 것도 큰 계기였던 것 같아요. 진실을 위해 꾸준히 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려서부터 노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위안부'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점점 쌓이고 합쳐져서 올해 박물관에서 필드워크까지 하게 됐어요.  🧶 이연우 : 저도 중등 때부터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아 좀 더 깊이 알고 싶고, 활동도 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수요시위에 참여하면서 뭔가 연대하는 마음이 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어요.  🧶 이선정 : 성미산학교의 중등과 포스트 중등 과정 학생회는 학생 자치뿐만 아니라 주제를 정해 학생들끼리 학습을 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여러 연대 활동에 참여하기도 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해본 학생들이 있으니, 학생회에서 수요시위를 직접 주관해보면 어떻냐고 제가 제안했습니다. 학생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수요시위도 어떻게 진행할 지 기획하고, 대본 쓰고 합창이나 몸짓(율동) 등을 다 준비해서 주관했어요. 2021년부터 해마다 5월에 한 번씩 했으니까 그동안 세 번 주관했네요. 올해는 자민이 사회를 봤어요.  🧶 이자민 : 혼자는 아니고 다른 친구와 같이 사회를 봐서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어요.  7~8개 정도 되는 합창과 몸짓 레퍼토리는 미리 연습했고, 대본도 있었거든요. 근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연대 발언 챙기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오신 분들 바로바로 파악해 소개하느라 정신이 좀 없긴 했어요.(웃음) 🧶 이연우 : 저는 단체 합창에 참여했는데, 같이 간 친구한테 엄청 감동 받았잖아요. 평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친구인데 연대 발언을 맡은 거예요. 조마조마 걱정했는데, 또박또박 엄청 당당하게 발표하는 걸 보니까 멋지더라고요. 사실 날도 덥고 피곤했는데  친구의 용감한 모습도 보고 어른들께 와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도 듣고 나니까 오길 잘했구나, 이게 힘이 되는구나, 내년에 또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생각이 살짝 들었어요.     반대시위나 부정 댓글에는 상처받지 않아요  Q. 수요시위 현장에는 맞대응 반대집회나 방해하는 이들도 있어 학생들이 위험하지 않냐는 우려도 있었을 것 같아요.   🧶 이선정 : 수요시위에는 보호 펜스가 설치돼 있기도 하고, 대비도 하니까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교사도 함께 해요. 또 학생들에게 미리 반대시위가 있어도 놀라거나 상처 받을 필요 없다, 험한 댓글도 있을 거다, 이 또한 우리 사회의 목소리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해 설명해요. 실제로 차 타고 지나가면서 빵빵 경적을 울리거나, 창문을 내리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매춘을 가르치냐'고 소리치고, 돌아와서 또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요. 학생들에게 '너희가 저 소리를 이길 수 있다'고 응원하기도 하고, 농담처럼 '봐라, 저 분들도 자기 목소리를 전하려고 저렇게 열심히 산다'고 하기도 해요. 🧶 이자민 : 수요시위 때는 미리 얘기를 듣고 해서 괜찮은데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요. 왜곡된 정보를 먼저 배우고 거기에 기준이 맞춰지면 그 뒤에 다른 사실이나 진실을 알게 돼도 거부감이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게 않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블로그 활동도 이런 걸 고민하면서 하게 된 측면도 있어요. 🧶 이연우 : 현수막을 펼치고 반대시위 하는 사람들을 본 적도 있고, 인터넷 게시글이나 댓글에서 잘못된 이야기도 봐요. 근데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안타까워 하며 지나치게 돼요.  🧶 이선정 : 사회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옳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고 있어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향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자고 이야기하죠.     그래도 되는 존재는 없다! Q. 대안학교 학부모님들이라 여러 활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일 거 같은데, 주위에서 걱정하는 목소리는 없나요?  🧶 이선정 : 학생들이 시위만 하러 다니는 게 아니냐, 그런 자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게 아니냐 등의 오해와 비난을 건너건너 들은 적도 있어요. 그런 것에 일일이 해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에 학생들이 그런 말에 상처받지도 않고요. 다만 학생들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공유하려 애쓰고 있어요. 사실은 학생들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웃음) Q. 마지막으로 두 학생께는 계획을, 선생님께는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릴게요. 🧶 이자민 : 시한은 따로 없고, 2025년 2월까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블로그 등 여러 자원봉사 활동을 쭉 할 예정입니다. 저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블로그 봐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 이연우 : 박물관과 '위안부'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 블로그에 올리고, 행사가 있으면 합창과 몸짓 열심히 연습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요. 🧶 이선정 : 현재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위안부' 문제 말고도 국가폭력, 동물권, 전쟁 등 다양해요. 미군기지 모니터링, 난민 문제도 있고요. 이 모든 주제들의 교집합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래도 되는 존재는 없다'는 거예요. 생명의 존엄, 생태적 상생을 위해서는 현장만큼 좋은 교재가 없고요. 연우와 자민 모두 본인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분명히 기여하고 있어요. 자랑스러워요. 꾸준히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참, 웹진 <결>에도 부탁이 있어요. 10대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콘텐츠도 많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연우·이자민·이선정,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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