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위안부 역사관'은 역사 부정 세력 극복하는 장기 처방전
    2024년 인터뷰 '위안부 역사관'은 역사 부정 세력 극복하는 장기 처방전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   사기, 날조, 조작.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담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23년 9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이 개최한 국제토론회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역사 부정 현상'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국제토론회 전 과정을 이끈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에게 토론회의 주요 내용을 들었다.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 그룹과 친해요. 제대로 가르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교사들인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돼 함께 해온 시간이 꽤 쌓였어요. '위안부' 수업 지도안을 만들어 활용하고, 저희 단체 청소년교육프로그램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분들이 놀라운 얘기를 해요. 일제 강점기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위안부'나 강제동원을 주제로 자료 조사 과제를 내곤 하는데, 완전히 왜곡된 사실을 발표하는 학생이 많다는 거예요. 역사 부정 세력들이 유포해온 오염된 정보가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심각합니다.”   왜곡 정보 발표하는 학생들, 역사 부정 대응 국제토론회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4년, 햇수로 20년 넘게 현장의 여성인권활동가로 활동해온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 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대표의 얼굴 가득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교사들의 '고발'처럼 '위안부'의 피해 자체를 거짓이나 조작으로 몰고가는 잘못된 정보가 일상에 넘쳐나는데 반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의 대응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사태로 교류는 줄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시민사회계에 대한 의혹과 갈등이 불거지고 '마녀사냥식' 언론 보도가 쏟아지다보니 '위안부' 해결 운동이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그 해결 운동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으로 바뀌고 있고요. 수요맞불집회는 멈출 기미가 없고, 토론회 며칠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일 극우 인사들이 '위안부는 사기극'이라며 심포지엄까지 열었잖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고민이 구체화된 자리가 지난해 9월 20일 마창진시민모임이 개최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부정 현상에 대한 대응방안 모색' 국제토론회였다. 기획부터 섭외, 실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른 이 대표는 토론회에서 접한 역사 부정 행태가 '세계적'이고 매우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어 놀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방해로 '망명 신청자' 상태인 소녀상 “일본의 집요한 방해는 상상 이상이에요. 기시다 총리, 나고야 시장 등 일본 고위 관료들의 항의부터 지역 영사관이나 대사의 직접적인 로비, 여기에 대학 교수와 학자들, 각국 현지에 나가 있는 일본 기업과 시민단체까지 개입해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해요. 국경을 초월해 전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권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독일 베를린 미테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초기에도 일본의 항의로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가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등 재독 시민단체와 지역사회, 전문가들이 반발하고 철거 명령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는 등 강한 대응으로 존치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오는 9월 다시 철거 압박이 예상돼요. 줌(zoom)을 통해 독일 상황을 전해주신 한정화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대표이사는 소녀상이 체류 허가가 발급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관용되는 '망명 신청자' 상태라 표현하며 서글퍼하셨어요.” 일본 내 역사 부정 분위기는 1991년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을 아사히 신문에 특종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한 우익의 공격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주간금요일' 발행인인 우에무라 씨는 아베 신조 정권 시절인 2014년 1월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날조라는 공격을 받았고, 이후 딸을 해치겠다는 협박까지 받는 등 곤욕을 치러왔다.    글렌데일시 소녀상 영구 설치, 필라델피아엔 새 소녀상 토론회에서는 인권과 존엄성을 믿으며 연대해온 글로벌 시민들이 값진 결실을 맺고 있는 사례도 소개됐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위치한 글렌데일시. 2012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날을 기념해 7월 30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한 글렌데일시는 2013년에는 글레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도 세웠다. 이듬해 철수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글렌데일시가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대응해 소녀상을 영구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글렌데일 소녀상은 여러 차례 훼손을 당했으나 2020년 12월 보수작업을 마쳤고, '소녀상 지킴이' 시민 모임도 만들어져 잘 보호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는 8년여 노력 끝에 새로운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평화플라자위원회가 주축이 돼 추진한 소녀상 건립 계획은 2021년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로부터 승인받은 데 이어 2022년에는 두 차례 타운홀 공청회를 거쳐 확정됐다. 이어 2023년 7월에는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가 기림비 문구까지 정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남부 도시인 텍사스 달라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 알리기 활동을 펴고 있는 박신민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대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달라스에서 박 대표는 2015년부터 일상적으로 '귀향', '주전장' 등의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소녀상을 재현하거나 나비팔찌 등을 만들어 나누는가 하면 2019년부터는 '세계 위안부 기념일' 행사도 이끌고 있다.   기록과 기억, 교육이 어우러지는 '위안부 역사관' 이후 토론회는 자연스레 대안 찾기로 연결됐고, 이경희 대표가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은 공감의 폭이 가장 컸던 주제였다. “경상국립대 김명희 교수님도 기조 강연에서 강조하셨는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담론이 일본 정부와 우파의 외교 전략을 통해 전세계로 확장되는 양상이잖아요. 그래서 피해자들의 피해와 상처를 오롯이 기록하는 일, 인권과 역사적 교훈을 계속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문제 해결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답답한 건 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는 현실이에요.”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가 위안부 역사관을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추진해온 배경이다. 물론 이 대표는 지난 4~5년 동안 누구보다 격렬한 부침의 중심에 있었기에 역사관 건립사업이 녹록치 않은 목표임을 잘 안다. 애초 경남도 차원에서 추진 계획이 마련됐다가 타당성 조사가 다시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미뤄지더니 조사 결과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현재 역사관 건립 계획은 좌초된 상태. 그런데 이 대표는 의외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일본 참가자들이 보낸 연대의 목소리였다. “2005년 일본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로 개관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이하 WAM)'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는 일본의 유일한 박물관이에요.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이 토론회에 참석해 특별 전시를 비롯해 위안소 지도 등의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꾸준히 업로드하고, 1990년대 중·고등학교 역사 및 사회과학 수업에서 사용된 500여 종의 교과서를 대상으로 한 연구 등을 공개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온 WAM의 경험을 전했습니다. 일제 치하 '위안부'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는 공동의 목표를 언급한 와타나베 사무국장은 또 고개를 드는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주의에 대해 정보 공유와 연대를 통해 맞설 때라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마창진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왔어요. 우에무라 전 기자께서도 모금운동을 해주겠다고 하시고요. '위안부' 해결 운동이 더 어려운 지역사회에 정말 기운 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안부' 역사 교육 조례 제정도 과제 국제토론회 이후 마창진시민모임과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는 곤경에 처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미래를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고 현실적인 추진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비중 있게 고민하는 대안으로는 체계적인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평등 사회와 안전한 근로 환경 조성을 위해 연 1회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공교육 영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자치단체 차원의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또 지역의 시민단체가 감당하기엔 적잖이 버거운 행사지만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던 '국제청소년캠프'를 재개하는 일도 과제 중 하나이다. 필리핀,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온 청소년들과 경남 지역의 교사와 학생이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어우러진 캠프는 코로나사태로 오도가도 못한 2021년과 2022년에 온라인 캠페인으로만 진행돼 아쉬움이 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요즘도 언제 다시 캠프를 여느냐 문의를 해온다. 요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 경남 지역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기록화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는 이 대표는 현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소리 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피해 할머니 대부분이 돌아가신 '포스트 할머니 시대', 역사 주체로서 우리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피해의 연장선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문제를 발화하는 것, 후속 세대가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기반이라도 만들어놓는 게 저의 소명입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경희 마창진시민모임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5월 3일 금요일 

    이경희

  • 김학순 할머니,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나다
    2024년 에세이 김학순 할머니,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나다

    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 관람 후기 1991년 8월 14일 공개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삶이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났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서사를 테마로 한 2024 남산소리극축제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 무대에 오른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이다. 자전적 서사에 기반해 극을 창작하는 여성과 작품, 예술인 이야기에 주목해온 연극학 연구자 이지예 씨가 이 무대에 다녀온 감상을 전해왔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어스름이 포근히 내려앉는 시간,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저 멀리 막 조명을 켠 N타워가 보이는 여기는 서울 남산국악당, 올해 2회를 맞은 '2024 남산소리극축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은은한 조명이 켜지자 초록 잔디와 부드럽게 선을 이루는 한옥 처마가 더욱 돋보이는데, 개방감 있는 야외마당은 소리극축제를 함께 즐기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무대였다. 5월 8일부터 18일 사이에 열린 올해 남산소리극축제가 기획한 테마는 '여성 서사'.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제목 아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극 4편과 창작판소리 2편, 총 6편의 소리극과 창작판소리로 선보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 투사들의 의리와 애환을 그린 시대극 '이화소리'를 시작으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남장을 하고 대장군에 오른 여성영웅을 그린 '정수정전', 제주도 설화와 귀여운 동물 요소를 버무려 일상 속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어린이 음악극 '청비와 쓰담 특공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속 힘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배달의 신이 된 여자-배달순'과 함께 3.1운동의 불꽃인 유관순의 일대기 '유관순 열사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의 생애를 담은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가 그 작품들이다. 이 중 오늘 내가 만날 무대는 '우리소리 모색'의 대표이자 소리꾼인 정세연 대표가 작창과 각색, 소리까지 맡은 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 마당은 소리로 먼저 열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밝고 경쾌한 자락의 소리와 함께 우아한 흰색 한복을 입고 소리꾼이 등장했다. 첫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 노래가 인사였던 것.  소리꾼은 노래를 마치고 정성스레 관객을 맞았다. 감사와 함께 마음을 담아 준비했으니 잘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에 이어 공연이 어떤 작품인지 소개했다. 이어 판소리에 빠질 수 없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 추임새 연습도 잠깐 했다.  그런데 살짝 고백하자면 추임새를 따라하는 내 마음은 많이 시끄럽고 무거웠다.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이기에 답답하고 갑갑한 제자리 걸음과 그 안에서 매번 느끼는 무력감과 부채감, 나날이 더해지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접어두기 힘들었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만을 준비해왔던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만나기에 다른 적절한 얼굴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임새를 따라하다 발견했다.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증언자에서 운동가로 걸음을 쉬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삶을 담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 주고 받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는 더 없이 어울리는 추임새일 수 있는 거였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이었다.    구성지고 풍성한 소리, 공연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드디어 시작된 공연, 소리꾼은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었다. 대략 30분, 길지 않은 공연은 창작 레퍼토리와 익숙한 레퍼토리의 변주를 고루 품고 있었고, 덕분에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부터 오는 반가움과 새롭고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신선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구비구비 고저장단으로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를 풀어가는 정세연 소리꾼의 소리는 때론 구슬펐고 때론 아름다웠다. 해금 연주자와 고수는 때로 밀고 때로 당기며 애처로움과 긴장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다른 배역으로 무대로 호출돼 극을 풍성하게 엮었다. 그때마다 무대 위 세계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었다. 두 명의 코러스 공연자들과의 부드러운 호흡도 깔끔했다.  '평화의 소녀상'과 의자에서 모티프를 따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끌고 밀고 기대고 앉는 등 소리꾼이 공연 내내 다양하게 활용한 의자는 '위안부' 시절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공간으로, 숨죽이며 탈출을 상상하는 순간으로, 막막하고 무거운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됐고, 마지막에는 할머니가 평화롭게 앉을 수 있는 자리로 함께 했다. 비교적 간결한 이야기 구조와 다양한 장면으로 연출된 무대, 소품의 활용 등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는 국악을 어렵고 낯설어 하는 관객이 듣기에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공연이었다.      '인권운동가'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적어 아쉬워 하지만 아쉬움도 털어놓아야겠다. 무엇보다 김학순歌라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학순의 탄생 순간과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 기생 권번에 수양딸로 팔려간 이야기 뒤에 납치돼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다시 가혹하고 신산했던 이후의 삶이 극의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발뺌과 왜곡에 분노한 할머니가 폭발하듯 터트린 증언. 하지만 곧 할머니의 목소리는 240명의 피해 할머니에 대한 호명으로 바뀌었고,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와 인권운동가가 되어 다시는 이 땅에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오늘도 증언을 하고 계신다'는 설명으로 넘어가더니,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짧은 발화 이후에 딸들에게 드넓은 벌판을 훨훨 날기를 주문하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막을 내렸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마무리라 박수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일본의 사죄를 위해 항변하고, 여성인권 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 투지 넘쳤던 그녀의 삶을 그려 나간다.” 고 하지 않았나!  '그 증언' 이후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이들과 얼마나 많은 언어로 사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외치셨던가!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마음을 용기 있게 전하고 다니신 '평화와 인권 활동가' 김학순 할머니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정작 그 서사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무거운 주제이고, 민감한 이야기라 매 걸음이 조심스러웠을 창작자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 이 작품을 쓰셨겠다 싶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자리를 자꾸만 만들고 싶어 오늘과 같은 작품을 쓰고 만들고 다듬고 노래했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의미, 다른 세대와 이 기억을 나누고 새로이 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또 공연의 길이가 짧아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에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악당 같은 무대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역사와 교육의 현장에서 김학순歌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신, 국악당의 다정했던 환대 아울러 꼭 남기고 싶은 관람 후기가 있다. 남산국악당 측의 다정하고 성숙한 환대이다. 국악당 측은 저녁시간 차가워진 밤공기에 관객들이 불편할까 무릎 담요를 준비해 필요한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금지가 없는 것도 좋았다. 플래시만 주의하면 공연 내내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공연장 내 음료 반입도 허용됐다. 이런 환대는 이틀 전 다른 극장을 찾았다가 앞자리 관객이 안내원에게 주의받던 장면과 대조적이었다. 앞자리 관객이 잠시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곧바로 안내원이 달려와 뒷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 '바른 자세'로 앉아 달라 '부탁'하는 거였다. 물론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관객들이 감각과 상상을 무대 위 다른 세계로 이입할 준비를 하는 시간을 방해한 건 정작 안내원이었다. 실제로 요즘의 관극 문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극이 시작한 지 꽤 지나 있었다. 그런데 국악당에서는 달랐다. 휴대폰을 꺼 달라는 안내도, 자리를 옮기지 말라는 안내도 없었다. 안내가 없었어도 공연 중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고, 누구도 음료를 쏟지 않았다. 그 안내 없음이 새삼 감사했다.  

    이지예

  •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동원
    2024년 논평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30여 년,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 군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했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최근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I, II -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이하 선집) 시리즈를 발간했다.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중국의 당안관은 일본군 전범의 진술서 842건을 120권으로 엮은 자료집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 자필진술서』를 발간했는데, 선집은 그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중국 당안관이 발간한 일본 전범의 진술서는 총 6만 3,000쪽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이 공개되자 언론에 보도되고 학계의 관심과 연구로 이어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구소에서는 그중 사단장, 정보장교 등으로 전쟁의 명령자급에 있던 이들의 진술을 선별하여 1편으로 묶었고, II편에서는 헌병, 영사관 경찰, 철로 경비병 등 전선에서 직접적으로 명령을 집행한 이들의 진술을 담았다.    중국 '전범 개조정책'이 낳은 특별한 포로 진술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푸순, 타이위안 등지에 위치한 중국 전범 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유례없는 '전범 개조정책'을 실행하였다. 연합군의 전범재판이 처벌에 치중하였다면, 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 정부는 처벌보다는 인간의 개조에 강조점을 두고 전범을 관리하였다. 항복한 적의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에 근거를 둔 이 정책은 '전범의 인격을 존중하라'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하지 마라' '일본인의 습관을 존중하라'와 같은 명령으로 구체화 되었고, 실제로 전범관리소 직원보다 양호한 식사와 인도적인 수감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일본군 전범들로부터 감화와 죄의 자각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소위 '인죄탄백(認罪坦白)' 운동으로 알려진 이 과정은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 점점 '감화'된 일본군 포로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며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심문하는 담당자가 기록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일본 전범들이 자필로 범죄행위를 세세하게 기술한 진술서가 나온 것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를 토대로 1956년 중국 정부는 특별 군사 법정을 열고 전범 재판을 진행하였고,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전범 대부분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 기소돼 금고 8년에서 20년의 형을 받았다. 사형수나 무기형은 한 명도 없었다. 석방된 포로들은 본국 귀환을 보장받았고, 1956년부터 시작된 전범의 본국으로의 귀환은 1964년 마지막 전범 3명이 복역을 마치면서 마무리됐다.    가해자가 말하는 '위안부' 동원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낱낱이 고백한 이 진술서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진술들이다. 위안소의 설치 및 운영, '위안부' 동원과정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컨대, 1편에 실린 일본군 제117 사단장 히라쿠 스즈키의 진술을 보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 과정에 일본군이 체계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중국 차오현에서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부관 호리오 소좌에게 명령하고 이것을 설치하기 위해서 중국 인민 및 조선 인민 부녀자 20명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중국과 조선 인민을 유괴하여 이른바 위안부로 삼았는데 이 부녀자의 수는 약 60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전쟁 범죄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하는 일본 우익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존재하지만,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 작성한 이 진술서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피해자의 증언이나 일본군, 일본 정부가 작성한 공문서 자료는 많이 공개되었지만 이처럼 일본군인 개인의 시점에서 작성된 가해 경험이 공개된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전범진술서의 사료로서의 의미는 적지 않다. 귀환한 일본군 전범들의 반전평화운동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전범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흥미롭게도 본국으로 복귀한 전범들은 이후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반전평화운동에 매진하며 보냈다. 이들은 '침략 전쟁은 절대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죄를 고백한 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등 그들이 행했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강연 활동도 펼쳤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 사실을 밝힌 2명의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냉대에도 꿋꿋하게 세계 평화에 대한 발언을 지속한 중귀련은 회원들이 고령으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2002년 공식 해체됐다. 그러나 그 활동의 의미를 숭고히 여긴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와 학자, 언론인, 일반 시민들은 이후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을 만들어 중귀련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범죄의 잔학성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죄의 고백 이후 반전평화를 위해 헌신한 일본군 전범들의 삶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새삼 느끼게 한다. 연구소에서 발간한 선집에는 전범 진술서 번역문과 함께 진술서의 요지, 자필진술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진술자들의 개인 이력 등을 담은 전문가의 해제, 그리고 진술서 원본 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로서 이 선집은 학계 전문가나 일선 학교의 교사, 관심 있는 일반 대중에게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여성인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웹진 <결> 편집팀

  •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024년 좌담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1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장원아: 이번에 세미나팀이 읽은 책은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온 배경과 맥락이 궁금했어요.   🧶 김수용: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붙잡거나 소련에서 인계 받은 일본군 포로, 만주국 관료 등을 전범관리소에 수용하고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군 포로들이 자신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죠. 이 기록이 전범 재판에서 기소를 위한 증거자료, 즉 자필진술서로 정리돼요. 오늘 읽는 선집에는 그중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던 일본군 전범 6명이 작성한 진술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자필진술서 중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것들을 선별해 번역한 것이 이 자료집입니다. 사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가 주목 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중국이 전범 재판을 하고 오랜 세월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필진술서를 공개했죠.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 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央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그거예요. 중국 당국이 일본이 '위안소'를 운영했던 증거가 중국에 있다면서 관련 내용을 발표한 거죠.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장원아: 『선편』은 842명 진술서를 120권으로 발간했는데, 자필진술서는 계속 자신의 범죄행위를 쭉 열거하는 방식으로 써져 있잖아요. 이 책에는 그중 6명의 진술서가 실려 있고요. 저는 읽으면서 120권 모두 이런 내용의 반복이라면 얼마나 기괴한 군상의 나열인가 싶었어요.  🧶 심아정: 예전에 김수용 선생님과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와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전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서해문집, 2020)과 김원이 쓴 『기구한 인연: 무순전범 관리소장 김원의 회고록』(한울, 1995)을 읽고 나서도 문제의식이 생겼는데, 막상 자필진술서를 꼼꼼하게 읽고 나니까 장원아 선생님 말씀대로 '기괴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성찰이나 가해자성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약간 소름 끼쳤어요. 일본 군인들 스스로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팩트'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요. 이 자료는 전범 재판을 앞두고 쓰인 자필진술서잖아요. 저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가해 병사 2명이 증언할 때 무참한 강간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너무 속상했거든요. 피해자들과 한 자리에서 가해 증언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증언하던 가해 병사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읽은 진술서에 겹쳐져 보여요.  🧶 조시현: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은 가해자인 일본군이 피해자인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요. 전범 스스로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던 주제잖아요? 자필진술서를 '문학적 글쓰기'라고 한다면 일종의 독백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군'위안부'와 병사의 접촉(encounter) 측면에서 가해자 입장인 병사가 '위안부'를 직접적인 수신인으로 상정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을 통해 '위안부'와 관련된 일을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진술서를 읽는 주체는 중국 당국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수신인이 부재하는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편으로 병사들의 진술서를 놓고 가해자의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나란히 놓으면 일종의 대화 효과가 발생하는 것 같고요. 물론 전범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현재로서는 생존한 피해자, 가해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군과 일본군'위안부'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물론 생존해 있다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자리에 있게 하는 조건을 만들기도 어렵죠. 2000년 법정에서 '가해자 증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 일본군 병사 두 명이 피해자 입장에 선 이들을 만났는데, 그때를 제외하고 서로 대면한 경우는 거의 없었죠.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을 때 자필진술서를 통한 병사들의 발화가 '말을 거는 행위'이자 '대화의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런 측면에 주목해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겠지요. 🧶 심아정: 저는 자필진술서가 '가해자성'과 관련해 분석의 토대가 되는 문건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이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돼요. 중국에서의 전시 상황을 더 자세히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 김수용: 전범들이 본격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시기가 주로 '삼광작전(三光作戰. 일본군이 행한 조직적인 전쟁 범죄를 중국에서 일컫는 말)' 이후라는 점과 포로로 포획된 지역이 동북지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동북지역에서 소련의 포로가 된 후 5년 정도 억류되어 있다가 1950년에 중국으로 이송되죠. 이들은 주로 산둥성을 비롯해 화베이에서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공산군과 게릴라전을 치렀던 사람들인 거지요. 🧶 심아정: 병사들의 태도도 눈에 띕니다. 원문을 전부 번역한 진술서에서 다른 가해 경험은 소상히 이야기하는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진술은 꺼리는 듯해요.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병사들이 그저 한마디씩만 언급하고 넘어가는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양적으로 적다기보다는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있어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왜일까'에 대해 자꾸 짚어보게 돼요. 그런데 일본 전범들이 인죄를 할 때 상정하고 있는 '중국 인민'에 여성의 자리는 있었을까요?      상세한 범죄 고백, 회피하는 듯한 '위안부' 진술 사이 🧶 장원아: 심아정 선생님의 질문과 관련해 저는 이 사람들이 '강간하면 안 된다'라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간은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니까요. 강간하면 안 되고 죽이면 안 되고 때리면 안 되고… 이렇게 '불법'으로 지목된 행위인 강간의 피해 대상으로서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성의 자리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여성의 자리가 생겨난 거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료를 읽을 때 법정에 제출하기 위한 용도의 진술서라는 점을 고려해야 될 것 같아요. 🧶 심아정: 죄를 열심히 기억해내서 말 몇 마리, 보리 몇 단까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다 함께 머리를 모아 궁리해서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가해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곧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진술서를 통해 알게 됐어요. 이 자료를 보기 전에 읽은 2차 자료들, 그러니까 김효순의 책이나 김원의 회고록 등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날것으로 된 진술서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굉장히 느낌이 달랐어요. 🧶 김수용: 심아정 선생님은 진술서를 읽고 여성의 자리에 대해 고민하는데요, 부끄럽게도 저는 그런 문제를 잘 포착하지는 못했어요. 반면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술서를 작성한 시점이 1950년대 초반이잖아요. 당시에 과연 이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의식이나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고민, 반성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을까라는 부분이요. 🧶 심아정: 1950년대에 여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그들에게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꺼림칙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범 개개인한테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관해 물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우리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 조시현: 저 또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침묵, 부작위를 파헤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침묵의 원인은 아마도 구조와 관련 있을 텐데, 현재의 논의 수준에서는 가부장제 때문이야라고 하고 말아버리는 것 같아요. 🧶 김수용: 『침화일군폭행총록(侵华日军暴行总录)』이라는 자료가 있어요. 산둥성을 침략한 일본군의 범죄 내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 조사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에 '부녀자를 납치, 감금해서 20일간 능욕한 후 살해' 했다거나 신체의 어느 부분을 훼손했는지 등 상세한 서술이 나와요. 마을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 같은데,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어요. 대개 마을에서 성폭행을 한 다음에 '위안소'로 끌고 가서 '위안부'를 시키는 수순이었잖아요.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성폭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없다는 게 특이해요. 이 대목을 읽고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기록에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제외되었을 가능성과 당시에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요.  🧶 심아정: 전장에서 일본 군인들은 여성 강간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군인 수기를 보면 대개가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기죠. 전범 진술서에서도 전범의 65%가 강간 경험을 밝히고 있어요. 물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강간'과 당시 감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을 거예요. 현시점에서는 우리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아요.  🧶 김수용: 전범들은 자필진술서를 쓰기 전에 선행 학습을 했다고 해요. 『자본론』, 『공산주의사』, 『제국주의 이론』 같은 책들을 공부하고 나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거죠. 생애를 돌아보고 침략 전쟁에 이용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됐는지 학습한 다음에 자필진술서를 서술했고, 죄에 대한 인지 과정은 한참 뒤에 이뤄져요.    진술서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 느낌이 드는 이유 🧶 장수희: 죄행이 너무 자세히 적혀 있어 업무 일지를 옆에 두고 보면서 썼나 싶을 정도였어요.  🧶 김수용: 전범 중에 한 사람이 기억력이 엄청 좋았나 봐요. 그 사람이 '언제는 뭘 했고, 언제는 뭘 했고…'라는 식으로 일지처럼 사실 위주로 서술해서 제출했더니 “네가 뭘 잘못했는지, 그 일이 왜 잘못인지를 써”라면서 진술서를 반려했대요.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반나절만에 '내가 언제 누구를 어디서 죽였고', '어느 집을 불태웠고'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나 봐요. 그것도 반려를 당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지금 전쟁 일지, 업무 일지를 쓰라는 게 아니다. 지금 너의 글에는 네가 그런 행위를 했을 때 피해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빠져 있다'라고 했대요. 이 글은 선생님들 지적처럼 진술서, 요컨대 법적인 문서잖아요. 진술서라는 형식 때문에 사실에 대한 기술이 두드러진 것 같아요. 그런데 전범 증언을 읽다보면 어떤 병사가 자필진술서를 쓰면서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필진술서와 확실한 차이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은 자필진술서는 기술이 엄청 건조하잖아요. 법적 문서의 성격이 강한 자필진술서는 형식상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자필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 병사들이 매일 밤마다 토론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글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인죄 후에는 참관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발전상을 견학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전쟁을 치른 지역을 방문해 피해자나 그 유족과 대면하는 과정도 진행되었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전범들이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실체를 목격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참관 학습을 '인죄의 여행'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 장은애: 이 진술서에서 뭔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게 수용된 전범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진술서가 작성된 과정을 알아야 된다고 하신 말씀과도 맥이 닿아 있는데, 진술서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전범들이 진술서를 작성하고 사상 교화 과정을 거친 후에 교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자신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 마을에 찾아갔다고 해요. 그때 중국 정부 측에서 일본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여자(전쟁 당시 7살)에게 마을 안내를 하도록 시켜요. 그랬더니 여자가 '내가 저 사람들한테 마을 안내를 해야 하느냐,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다'라고 호소했다고 해요. 이 대목을 읽고 고민이나 성찰이 부재한 상태로 기계적 진술을 하게 만든 다른 쪽의 힘, 그러니까 중국 쪽의 '듣는 귀'에 대해서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어요. 진술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묵음 처리'된 원인에 대해 생각할 때 진술이 일본군 전범과 중국 사이의 양자 구도 속에서 생산된 거라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구도, 공산주의 체제 하 중국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국내외적 변화와 맞물린 중국의 정치적 선택들까지 폭넓게 고려할 필요가 있어요. 텍스트 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술서에서 드러나는 한계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범 개인에게 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거죠.  🧶 김수용: 자필진술서에서는 다른 전쟁 범죄에 비해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이 적은데, 1997년 중귀련에서 발행한 소식지는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관련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요. 자필진술서가 1950년대 초에 작성된 것이라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았다면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와 증언 이후, 전범들의 인식이나 증언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닌지 궁금해요. 🧶 심아정: 그런데 좀 꺼림직스러운 부분은 위안소나 '위안부' 관련 진술 비중이 적은 것보다 어쩐지 무언가 켕겨 그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이 2000년 법정 때 증언한 두 가해 병사를 언급하면서 법정이 열리기 전에 중귀련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다른 설문에는 답신율이 굉장히 높았던 반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답신율은 15%밖에 안 됐다고 지적했어요. 그때 왜 그랬을까, 저도 궁금했던 기억이 나요. 🧶 김수용: 전범들이 진술서를 쓸 때도 말 한 마리 죽인 거, 보리 불태운 거까지 말하면서 강간이나 성폭행 관련 얘기는 가장 뒤늦게 나와요. 전쟁 상황이라도 성폭행이나 강간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그들에게도 있었는지 끝까지 숨겨요. 나머지 죄는 명령 때문이라는 변명이 통하는데 전시 성폭력 문제는 그러기 어렵거든요. 꺼리는 거겠죠. 꺼려졌을 거예요. 심지어 중귀련에서도 일본군'위안부' 얘기는 많이 나오지 않아요. 🧶 조시현: 선행 논문이나 자료집을 보면 전범들은 강간과 위안소에서의 행위를 범죄로 자백하고 있어요. 흔히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말을 썼지만, 이를 강간이라고 인식하고 범죄라고 진술한 거죠. 저는 이게 굉장히 흥미로운데, 그런 인식이 일부에서 나타난 건지 전반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위안소에 간 행위를 강간 행위로 파악하는 케이스가 있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용어 사용에서 발견되는 특이점과 번역 문제 🧶 조시현: 언어(용어) 문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자료집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싣고 있어요. 번역문과 원문의 용어 차이를 살펴보는 건 번역하는 한국의 입장, 전범 재판을 한 중국의 입장, 일본인 전범의 입장을 교차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돼요.  교화 과정에서 전범들은 여러 언어를 학습했어요. 가령, 만주국의 괴뢰적 성격을 강조하는 '위(僞) 만주국'이라는 표현을 비롯해 '항일', '애국', '인민' 같은 용어들 말이에요. 전범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항일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용어들을 수용, 차용해서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전범들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자신의 입이나 손으로 기입(register)하게 된 거죠. 그때 자신과 타자간의 충돌이나 심리적 갈등이 발생했고, 나아가 이것이 반성의 계기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필진술서는 두 개의 시선과 인식이 교차되는 현장이었을 수도 있는 거죠. 또 연합군의 포로 심문 문서랑 비교해 봐도 자필진술서는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포로 심문서는 포로가 한 말을 다른 누군가가 기록한 것이잖아요. 그 포로 심문서를 읽을 때는 화자의 '퍼스널리티'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어요. 반면에 자신의 살인 행위를 덤덤하게 기술한 '자필' 진술서를 읽을 때는 어떤 사람인지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중국에서 작성된 자필진술서와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의 차이는 극명한 것 같아요. 🧶 김수용: 그렇긴 한데, 전범이 기술한 범죄 목록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조시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퍼스널리티를 파악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계속해서 향응을 받았다고 서술한 진술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무슨 뇌물을 이렇게 많이 받았어?'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드러나는 측면이 있죠.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확실히 자필진술서는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와 달라요. 자필진술서의 경우 서술자가 중국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크잖아요? 중국 인민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중국이 일본을 물리친 것을 '정의로운 반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인 피의자 조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낯선 장면이에요. 🧶 조시현: 자료집을 번역할 때 굉장히 수고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핵심 단어들이 원문의 뉘앙스 차이를 감안하며 번역됐는지 궁금했어요. 매번 일본군'위안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원자료에 사용된 용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여성들을 '위안소'로 데리고 가서 노역을 시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어를 확인해보니 노예의 노(奴)자를 쓰고 있어요. 노역(奴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통해 어떤 일본군의 경우에는 피해당한 여성을 '노예'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거죠. 그야말로 '성노예'라는 표현을 선취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해제와 번역과 더불어 원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원문까지 수록되어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인죄(認罪)와 탄백(坦白)의 법적 의미 🧶 조시현: 중국에서 전범은 '탄백'과 '인죄'의 과정을 거쳤어요. 이 두 개념은 곧 있을 전범 재판에 대한, 즉 법적 절차를 전제하고 나온 것이죠. 법적인 측면에서 인죄는 죄가 있음, 곧 유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영미식이죠.(기소에 대한 인정 여부 절차. 이른바 arraignment 절차)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 피고의 유죄 인정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아요. 형을 계산하는 양형 때 고려하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영미권에서는 죄를 인정하면 그 인정을 바탕으로 재판 처리를 해요.(유죄협상제. plea bargaining) 그 인죄 개념을 중국 공산당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또한 형사재판의 경우 자백만으로는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보편적 원칙이에요. 그러니까 중국이 어떻게 판결을 내렸는지는 전범 재판 기록을 대조해 봐야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추가 증거가 필요한 경우는 어떤 때이고, 또 특정 범행을 인정할 때 필요한 입증 증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특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의 경우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을 문제였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굳이' 얘기한 셈인데 왜 했을까, 증거가 있었던 걸까, 혹시 보강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등 수사관의 입장에서 추론을 확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필진술서는 수사, 기소, 처벌, 재판을 포함한 법적 절차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충분히 질문해봐야 해요.  다음으로 이 문서의 특징 중 하나가 개인의 생각이나 감상, 양심의 가책 등과 관련된 표현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형법상 범죄행위의 주체 이외에 무슨 주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전범들의 주체성에 관해 얘기하려면 다른 맥락들을 시야에 둘 필요가 있어 보여요. 구체적으로 중귀련 활동과 진술서를 교차해 볼 필요도 있고요. 관련해서 자필진술서와 전쟁 수기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진술서의 성격 내지 형식은 작성자 본인의 인적 사항과 범죄행위가 기술된 수사 문서잖아요. 이처럼 진술서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료에 다시 접근하면, 가해자측 증언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증거를 얻기 위한 하나의 루트로서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보강 증거일 경우가 많기는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일본군의 인식을 드러내는 여러 표현들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유용성이 있는 것 같아요.  또 이 자료를 제대로 독해하려면 진술의 형식이나 체계 같은 것을 알고 가야할 것 같아요. 법적 문서로서의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자료를 다시 보면, 법적인 절차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죄로 자백한 것과 윤리적인 반성과 사죄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요.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회개하고 반성하고 사죄하고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고 해서, 즉 '인죄, 탄백'이 바로 법적 의미의 사죄는 아닌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방식의 사죄 말고도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귀환 이후 중귀련의 활동은 분명 사죄의 과정인 것 같아요. 이 자료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죄는 일회성이어서는 안 된다, 계속돼야 하는 행위이자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진정성이 드러나고, 그게 진짜 화해로 가는 길이니까요. 사실 법학 용어에는 '용서'라는 개념이 없어요. 기소를 안하고 풀어주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형을 면제해서 석방을 한다든지 하죠. 다 용서와 무관한 일이에요. 용서는 보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료를 읽고 사죄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고민해보고, 중귀련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주목하는 것이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2024년 에세이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2부>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시리즈가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이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강제성'과 '자기 의지', 미국의 책임 등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리적으로 논파해 나간다. 하지만 그 사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면서 운동의 본질을 흐려 어느새 '위안부' 문제를 가벼운 국제정치적 '논란거리'로 만드는 지점도 읽힌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주전장'의 참여자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主戰場)>(2019, 원제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은 기존의 '위안부' 영화와 달리 피해자의 삶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담론 지형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 곧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활동해 온 시민단체부터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변호사, 정치인, 역사 부정론자들, 그리고 부정론자들의 스피커가 되고 있는 백인-미국-남성 인플루언서들까지 다양한 주체의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파해 나간다. <주전장>은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설치(2013), 일본 국회의 고노담화 재검토 논의(2014),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등 국제적으로 '위안부' 논의가 뜨거웠던 2010년대 중반 일련의 사건을 비추면서 소위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위안부' 담론을 둘러싼 갈등과 그 참여 주체들의 진영을 해부한다.   강제성과 노예제도 성립의 핵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선 <주전장>의 장점은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검증하는 논의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의외로 부정론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주된 논리는 '협의'의 강제성이 없었으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는 인권 변호사 토츠카 에츠로, 국제법 교수 아베 코키의 법적 견해를 통해 적절하게 반박한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인용해 본다. 아베 씨는 '강제'라는 단어에 대해서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라는 단어를 법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속아 넘어가는 것도 자신 본연의 의지는 아닌 겁니다.  -토츠카 에츠로의 발언 (<주전장>, 00:47:30~00:48:00) 노예제라는 것은 사람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하죠. 이런 상태를 '전적인 지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여성들이 '전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면 '노예제'가 성립됩니다. 이때 그녀들이 고액의 보수를 취하고 있었건 아니건 이는 노예제의 성립 여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큰 돈을 받았을 때는 노예가 아니고 돈을 안 받았을 때는 노예다'라는 것은 국제법상에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학자들이 밝힌 자료나 역사적 서술에 기술되어 있듯이 돈을 받거나 만찬을 즐기거나 외출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본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자유 의지를 현저하게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전적인 지배' 제도 하에서 허가를 받아야지만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그것은 '노예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베 코키의 발언(강조-인용자. <주전장> 01:08:37~01:10:01) 일반적으로 '강제 연행', '성노예'라고 하면 군인이 총을 앞세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 연행하거나 쇠사슬에 묶여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왜곡된 관념은 '위안부' 피해자가 '속아 넘어간 것이니', 또 '돈을 받았으니' 강제 연행이나 성노예는 아니라는 주장이 널리 통용되는데 일조한다. 그러나 법적 강제성이나 노예제도의 핵심은 '자유 의지에 반해' 혹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행위를 강제 당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wam'의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의 말처럼 “자유를 빼앗긴 채 지속해서 강간당했는데 1억 엔을 준다고 해서, 그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왜 성노예라고 하면 안 되는지” 오히려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또 다른 행위자 '미국' <주전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영화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에게 '시카고 대디'라 불리며, 미국 사회에서 역사 부정론자들의 스피커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유튜버 토니 머라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문제에 우리나라를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망신스럽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 간에 의견만 분분하게 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토니 머라노가 '헤이트 스피커(Hate Speaker)'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논리는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미국인들에게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한일 간 분쟁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 중에는 '위안부' 문제가 미국 내 아시아계 민족 사이의 불화를 일으킨다고 여기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주전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결코 외부자적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겹쳐 놓으면서, 미국이 정의 구현이라는 가치보다 '한-미-일' 우방을 통해 얻어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약에 압력을 가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종전 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공산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군비에 압력을 가했으며, 이를 위해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되어 있던 키시 노부스케를 석방하여 총리가 되도록 지원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전장>은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오늘날 일본의 부정론자들을 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전장 없는 '주전장', 희미해지는 운동의 본질 이처럼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중요한 쟁점들을 객관적 사료와 신뢰할 만한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논리적으로 돌파해 나간다. 그러나 영화 <주전장>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재미'는 단지 새로운 지식과 복잡한 담론 지형을 이해하게 되는 인식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을 통해 부정론자들의 자가당착과 무지성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가령, 일본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스기타 미오는 고노담화의 근거는 자칭 '위안부'라 주장하는 이들의 증언밖에 없으며, 그 조차도 일관성이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글렌데일 시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기 위해 어느 일본계 미국인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한다. 영화는 증언의 가치를 폄훼했던 그의 발언을 다시 보여주며, 스기타 미오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국가는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극우 내셔널리스트의 핵심 인물인 카세 히데야키는 스스로를 역사가로 소개하면서도 “저는 타인이 쓴 책은 안 읽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영화는 이들을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들로 그려낸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장면은 모종의 쾌감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 해도 여러 번 나타나듯, 극우 내셔널리스트들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반인륜적인 발언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파시즘적 혐오 발언을 했던 이들의 '무식한' 실체가 까발려질 때 그간의 불쾌함과 모욕감이 해소되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이 통쾌함에는 일본 내셔널리스트에 맞서는 한국의 내셔널리즘도 얼마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통쾌함으로 설욕되고, 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맞서는 동안, 다시 말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고 국가주의적 파토스가 에너지를 얻는 동안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망각되기 쉽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는 냉소적 어조가 부정론자를 향한 것임에도 이 영화를 통해 얻어지는 쾌감 속에서 어느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정치적 '논란거리'의 하나로 가벼워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주전장'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담론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담론 투쟁의 국제적 무대인 '미국'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최종적 메시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및 연대 시민단체가 30여 년 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재발 방지에 있다기보다 현재 '위안부' 담론의 '주전장'은 어디이며, 이곳의 전세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는 현실 정치의 부침 속에서 전개되는 '위안부' 운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는 여자들이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고, 인신을 속박 당하여, 거대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를 입은, 실제 사건의 장소인 전장이 누락된다. 사건의 장소인 실제 전장이 망각될 때, '위안부' 운동의 최종 목적은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대결로 도착되기 쉽다.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을 기억하기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와 같은 전장의 누락과 본질의 도착이 영화 <주전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찌감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목소리를 내어 왔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201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되돌아보는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1]  비슷한 논법이 부정론자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고 밝힌 어느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위안부' 문제는 원래 있던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아니라 문제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작용에 의해 사회문제로 출현했다. 이 문제는 담론에 의해 구축된 것이지 전시 중에 위안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위안부' 문제란 구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가 문제시되어 일본 정부가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이다.”[2] 이러한 인식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위안부'는 불행하고 불쌍하며,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사람들”[3]로 인식되었으므로 “1990년 이전에 위안부 문제란 없었다”[4]고 주장하는 역사 부정론자들과 얼마나 다를까. 진영을 막론하고 공히 이들에게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적·정치적 대결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모든 것'에 정작 일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사건'은 소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쟁화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을 잊게 한다.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는 수사 속에서 역설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 실제 전쟁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놓인 돌뿌리일 뿐이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이다. 그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군사적 도구로 만드는 전시 성폭력을 단죄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주전장'이 한낱 돌뿌리와의 싸움일 리는 없다.       각주 ^ 우에노 치즈코, 이선이 역,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다시 쓰며」(개정증보판 서문),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4, p. 13.  이헌미는 이 명제가 "위안부 운동과 담론을 둘러싼 역사적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을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역사의 가속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억의 단기 소실점을 넘어서, 일본군'위안부'의 현재사에서 망각되고 누락된 지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헌미, 「한일 위안부 외교의 역사와 쟁점」, 역사연구 42, 2021, p. 98, 102.) ^ 木下直子, 「慰安婦」門題の言說空間, 勉誠出版, 2017, pp. 1∼2. ^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p. 346. ^ 위의 글, p. 340.

    이지은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