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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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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정부 등록 피해자가 이제 아홉 분 생존해 계십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혜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사과와 보상,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뤄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피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적 차원의 합의가 필요해요. 또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본이자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국가적인 대응이 미흡한 상황이잖아요.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한국 내에서 알아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해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이 문제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대현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죠. 지금 한일 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라 어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생존자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일부러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민정 피해자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더 왕성하게 논의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우리 세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자분들과 대화하며 보다 가깝고 생생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데 저버리게 되는 거잖아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완전한 해결이란 없다는 인식이 먼저 합의되어야 합니다. 일본이 사과와 보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의견 나눔의 장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도경 피해자가 인정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남은 과제는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에요. 개인으로서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하고요. 심현희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비롯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를 통해 여성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Q.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내에서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등 다양한 여성운동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 청년들이 계속해서 페미니즘과 ‘위안부’ 이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대학에서 어떤 배움의 장들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심현희 현대의 여성운동과 ‘위안부’ 문제는 성평등과 인권을 주제로 다루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대학에서는 관련 교육과 논의의 장을 제공해 학생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강대현 어느 순간부터 대학에서 사회 운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학생과 청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더 많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김도경 제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페미니즘이 금기시되고 일부는 부정적으로 보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배움의 장이 많아져야 합니다. 김민정 논의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페미니즘의 올바른 개념과 정의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강의가 확충되어야 합니다. 백래시 현상을 접할 때마다 암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과도기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사회적으로 진일보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텨내려고 합니다. 이혜주 낙태죄 폐지 등 페미니즘 논의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백래시로 인해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했고, 우리나라도 낙태죄 폐지 관련 법안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잖아요. 페미니스트라면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학교 여성학 강의에서 김현경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우울하고 불안한 이 시간이 절대적일 것 같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만 결국 백래시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고, 대학에 여성학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남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봤던 사안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거든요. 모든 학문에 여성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희연 한 남자 교수가 학생을 추행해서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공론화된 적이 있어요. 그 후 그 교수의 연구실에 비판의 메모지가 가득 붙었고요. 미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작년부터 백래시가 심해졌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그런지 올해 초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많이 생겼어요. 저도 새로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같이 책을 읽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나에게 00이다”라는 문장을 완성시킨다면 괄호 안에 어떤 단어를 넣으시겠어요? 이혜주 ‘붉은색’이라고 넣어보고 싶어요. 빨간색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운동이나 혁명에 흔히 사용되는 만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색이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 문제가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김희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저의 ‘평생의 연구 과제’입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대하고 싶어요. 역사학도로서 가져가야 할 큰 숙제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도경 ‘숙제’인 것 같아요. 때로는 하기 싫고 미루고 싶지만 숙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잖아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돼 좌절감도 들지만, 그럼에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심현희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사명’입니다. 역사적으로 희생된 피해자분들의 고통과 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연대하겠습니다. 강대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본질과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객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민정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기억’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늘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인류사에도 중대하게 기억될, 특수하면서도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이 전 지구상에서 근절될 때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잊혀서는 안 되며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되는 기억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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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 이금주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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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물으며 오랫동안 소송투쟁을 벌여왔다.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도 지난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길에 이금주라는 한 여성이 있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으로 광주천인소송 등 다양한 강제동원 관련 소송을 이끌었던 이금주. 그녀의 일생을 담은 책 『어디에도 없는 나라』[1]를 통해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운 한 여성의 불굴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명분과 신념이 확고해도 계속 지기만 할 때, 우리는 지친다.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분과 비탄의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멋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거듭되는 패배를 겪으면서 자포자기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정의와 원칙의 기준이 모호해질 때마다 명분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된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이하 이금주로 표기)의 평전을 읽으며 명분 있는 패배를 끝내 명분 있는 승리로 이끌어낸 한 여성의 투지에 큰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금주가 69세부터 102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1920년에 태어나 2021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이금주는 69세 되던 해인 1988년에 태평양전쟁희생자 전국유족회를 발족하고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게 된다. 1942년에 이금주의 남편은 일본 해군 군속으로 남태평양 타라와섬에 강제 동원되었고, 이듬해인 1943년에 사망했다. 해방 후 교사로 근무하며 성당에서 프란체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금주는 69세부터 운동가의 삶을 걸었다. 그는 마치 싸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유족회를 빈틈없이 운영했다. 교사 시절, 그리고 성당의 행정 업무를 맡아보던 시절부터 이금주는 “기록의 달인”이었다. 일기는 물론이고, 이사회 내용 및 지출명세서 등을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모두 받아 적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축적되자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93년에 1,273명의 원고가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고인단은 일본 사법부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원고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해서 ‘광주천인소송’[2]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고 수가 천 명이 넘는 만큼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금주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리 1,100명의 재판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올 2월 17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기까지 꼭 11개월 걸렸습니다. 그동안 무지에서 나오는 모략과 질투, 명예 훼손 등은 어처구니가 없고 구역질이 났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목적지만을 바로 보고 백절불굴의 의지와 강한 결심으로써 다른 지부에서 안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금주는 회원 가입 신청, 소장 작성, 위임장 작성, 소득증명 서류 작성 등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재판이 지연되는 상황을 회원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1994년 3월에 첫 공판이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5년에 이금주는 또다시 회원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니까 안 줄 것 같다’, ‘언제 끝날 것인가, 너무 지루하다’, ‘속았다. 포기하자’ 등등입니다. 우리 대답은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하자’는 것입니다. 줄 것 같으면 왜 우리가 싸울 것입니까? 이 재판이 지방재판소에서 끝나면 고등재판소로 가고, 고등재판소에서 끝나면 일본최고재판소까지 가서 투쟁한다고 하시오. 일본 변호단은 우리 1,100명이 인지대도 내지 않고 무료 재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 원고 피해자들이 재판 걸어놓고 물러서거나 포기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시키시오.” 이금주는 처음부터 이 싸움이 얼마나 험난할지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한다”는 말 속에 이금주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싸움은 한판 승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금주의 말은 옳았다. 도쿄지방재판소는 1998년에 광주천인소송을 기각했고, 1999년에는 BC급 포로감시원 소송[3]을 기각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금주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을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아사히(朝日)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일본 여론에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 사법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1999년에 일본 도쿄고등재판소는 광주천인소송 항소에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금주는 2000년에 일본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광주천인소송 상고는 각하되었다. 연이은 패소에도 이금주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곱 건의 소송을 치르며 열일곱 번 기각당했다. 긴 세월 이금주와 피해자들이 겪은 좌절과 패배의 고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금주는 소송을 처음 제기하면서 동지들에게 외쳤던 “계속 투쟁하자”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운동가였다. 2012년 피해자들이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때도 피해자들을 도우며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목적지만을” 보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최종 승소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이금주는 99세였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의 작가는 “열일곱 번 문을 두드려 열일곱 번 기각당하는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할 수 있었을까?”라는 말로 이금주의 투쟁을 승리의 역사로 기록했다. 더불어 이금주가 “온기 없는 냉방에서 새벽부터 온종일 붙잡고 씨름해 작성한 각종 기록물”의 가치를 역설했다. 광주유족회를 운영하며 이금주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직접 작성한 노트들과 발품을 팔아 모은 관련 자료들이 현재 보존 장소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평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이금주가 남긴 역사적 자료들이 더 이상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즉각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각주 ^ 송경자 지음, (사) 일제강제동원시민 모임 엮음, 선인, 2023 ^ 1992년 2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제 당시 노무자·군무원으로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과 근로정신대 및 징병 희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대규모 집단소송. ^ 일제 말기 동남아시아에 강제 동원되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전후 행해진 연합국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 전범 피해자와 유족들이 1995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대신하여 전범으로 처벌받은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미지급한 임금의 지급 등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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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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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원폭티셔츠’ 논란과 전개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방송국 TV 아사히(テレビ朝日)는 생방송 전날 밤 BTS의 출연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BTS의 멤버 지민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미지와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란히 실린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이례적인 출연 취소의 배후에는 재특회[1]를 중심으로 한 넷우익이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BTS와 나치의 동질성까지 주장하며 BTS를 미국의 강성 유대인 단체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BTS 국내 팬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원폭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티셔츠 착용에 일본인의 원폭 피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방송의 취소 이유가 단지 티셔츠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외 팬덤을 겨냥한) 설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일본 넷우익의 고발로 글로벌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개입하기 시작하자 BTS는 자칫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일본 넷우익이 BTS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를 파헤치면서,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 자리에 놓고 침략 전쟁 주체로서의 과거를 외면해 온 일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점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에 관한 정보들이 팬덤 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교육되면서, 티셔츠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기억의 복원과 소통: 아시아 팬들의 전쟁 기억과 증언 팬덤 내 담론의 초점이 바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 의해 점령된 아시아 국가 출신 팬들은 가족으로부터 들어 온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증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사이판을 비롯한 태평양 섬들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가장 잔악한 짓은 미국이 이겼을 때 항복을 거부하고 사이판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식인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사이판 여성들 중에도 강제로 위안부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X(구 트위터) “나는 필리핀인이고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배웠다. 여성뿐만 아니라 위안부 역할을 하는 게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년간 점령했지만 그 기간 동안 약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X(구 트위터) BTS 팬덤이라는 초국적 공동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피해국이었던 아시아권 국가의 팬들이 집단적으로 증언에 나서게 된 상황은, 개인들이 기억을 언어화함으로써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서 도외시 되어 온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실천적 효과를 낳았다. 기록으로 연대하는 기억정치의 장: 백서 프로젝트 기획사의 입장문 발표로 티셔츠 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전 세계 5개 대륙의 20여 명의 BTS 팬들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원폭 티셔츠 사건에 대한 105페이지 분량의 백서를 작성했다.[2] 이 백서는 사건이 불거진 배경과 한일 간의 역사·정치적 맥락을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나아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논란에 대한 반응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한국, 일본, 그 밖의 글로벌 팬덤의 내부 반응을 보여주면서, 사건에 대한 국가별 언론 보도를 검증했다. BTS 팬덤에 의해 발간된 이 백서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팬덤이 백서의 발간을 통해 국가 간 역사 기억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 팬덤은 BTS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만 하지 않았으며, 글로벌 스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면서 이와 연루된 모든 주체들의 세계 시민으로서의 문화적 민감성을 되돌아볼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백서를 간행하면서 국가 간 역사 및 문화 교육의 불균형과 그 해소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컨대 아시아인들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반면,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중에 벌인 잔학행위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할 때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번 티셔츠 논란을 통해 팬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티셔츠 논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보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팬덤의 역사 인식과 수행적 실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활동은 적극적인 역사 인식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전쟁 피해에 대한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팬덤이 특히 충격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목록을 서로 공유하고 이에 대한 감상평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국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대한 기부로 이어져, 약 300여 명의 해외 팬들이 ‘나눔의 집’에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위안부 이슈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보며 알게 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됐다. 다큐를 보면서 한국 여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도 위안부 동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X(구 트위터) “나는 54세이고 이번 BTS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의 세계사 시간에도 일본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 세계에 ‘들려야’ 할 필요가 있다.”(X(구 트위터)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밑거름 삼아 뻗어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망은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에게 자행된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BTS 팬덤에게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팬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으로 상품화되는 현대의 젠더 구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며 해당 문제에 공감하였다. 오늘날, 팬덤 문화는 전지구화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팬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문화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뿐 아니라 팬덤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풀뿌리 담론의 활발한 생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BTS 원폭 티셔츠 논란은 팬덤 내에서 자칫 한일 양국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치환될 수 있었으나, 글로벌 여론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과 전쟁 중 여성폭력에 대한 공감대가 초국적 팬덤 내부에 형성됨으로써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팬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가 기억 정치를 수행한 실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각주 ^ 재특회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반외국인 정책, 특히 혐한 기조를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이다. 초대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대표적 넷우익 인사로 2016년 일본제일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 White Paper Project 혹은 백서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해당 문건은 영어와 한국어로 기술되었으며 다음의 URL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https://whitepaperproject.com/k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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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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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1부> 우리 일상과 접촉면이 넓은 미디어, 그만큼 상호 영향의 진폭이 크고 깊다.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시 새롭게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시작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연다. 개봉 후 328만 명이 볼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울림을 주는 좋은 영화'라는 평까지 받은 「아이 캔 스피크」는 '생존자'인 동시에 '목격자'로 증언하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서발턴의 말하기, 피해자를 제외한 가해국 간 사죄와 사면이라는 불편한 퍼포먼스 등 '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자극한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김현석 감독이 연출해 2017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던 주인공 '옥분(나문희 분)'이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해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시장 상가에서 수선집을 하는 옥분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편, 불법 사항을 신고하는 '도깨비 할매'. 아무리 동네를 위한 일이라도 그녀가 넣은 민원만 8,000여 건에 이르다 보니 구청 직원들에겐 '블랙리스트'요, 한 번이라도 신고를 당해 본 상인에겐 껄끄러운 이웃이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이 넣은 수많은 민원을 처리하는 구청 공무원이다. 영화 전반부는 공동체의 문제를 법(민원)으로 해결하려는 옥분과 권력의 편에서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구청 공무원 민재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어'로 증언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그러나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지고,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된 친구 '정심(손숙 분)' 대신 미 의회 증언에 나서게 되자 민재는 누구보다 든든한 옥분의 서포터가 된다. 옥분은 민재와 함께 '영어로'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옥분이 국가에 '피해자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일본군의 전쟁 범죄 증언에 앞서 '자기 증명'부터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의 도움으로 급하게 피해자 등록을 마친 옥분은 '위안부' 피해 당시 정심과 찍은 사진을 들고 미 의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국가의 보증(='위안부' 피해자 등록)도 물적 증거(=사진)도 아니다. 청중의 주목을 이끌어 낸 것은 옥분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 즉 흉터였다. 옥분이 '살아있는 증거'로서 자기 신체를 드러내 보이자 장내는 숙연해진다. 마침내 옥분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말하기 시작한다. 옥분: 일본군들이 내 몸에 새겨놓은 칼자국과 낙서요. 내 몸엔 이런 흉터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이 한없이 되살아납니다. 증거가 없다구요? 내가 바로 증거예요. 여기 계시는 미첼이 증거고, 살아있는 생존자들 모두가 증겁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을 때 내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소, 열세 살. 나는 죽지 못해 살았소.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I'm standing here today for those young girls. Their childhood was stolen away by the crimes of the Japanese army. We must remember those girls and the pain that they lived through. Japan committed crimes against humanity. But there has been no sincere apology for the 'Comfort Women' issue. (중략) We are not asking for too much, just for you to acknowledge your wrong doings. We are giving you the chance to ask for our forgiveness, while we are still alive. “I am sorry.” Is that so hard? (자막: 나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소녀들이 겪었던 고통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용서 받을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강조-인용자, 「아이 캔 스피크」 1:43:43~1:47:46) 증언의 두 겹, '생존자'로서 말하기와 '목격자'로서 말하기 옥분의 증언은 둘로 구분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한 번은 한국어로, 또 한 번은 영어로 발화된다. 그런데 여기엔 단순히 언어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로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 곧 '생존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어로 발화된 증언에서는 일본군의 범죄에 의해 유년을 빼앗긴 소녀들을 '대신'하고 있음을 밝히며 시작한다. 더하여 영어 증언에서는 옥분의 목소리에 병상의 정심이 오버랩되어 옥분이 정심을 '대신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옥분은 위안소 범죄를 겪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로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대신한 '목격자'로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라틴어에서 '증인'에 해당하는 말이 두 개 있음을 지적했다. 첫 번째는 'testis'로 영어의 'testimony(증언)'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이는 두 당사자 간 재판이나 소송에서 제삼자의 위치에 있는 '목격자'를 가리킨다. 두 번째 말은 'superstes'로 어떤 일을 끝까지 겪어낸 사람, 어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 즉 '생존자(survivor)'를 의미한다. 관련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말한다. 본디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중립성의 결여로 인해 재판을 위한 사실 입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거니와, 무엇보다 절멸 수용소의 폭력에 대해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자는 그곳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는 '온전한 증언자'가 되지 못한다.[1] 한편, 증인에 대한 아감벤의 고찰은 젠더-권력의 차원에서 한 번 더 해석될 필요가 있다. 라틴어 testis는 '목격자' 외에 '고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2] 법적 용어로서 증언(testimony) 또한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남성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증언 선서를 할 때 고환에 손을 얹었다고 한다. '증언'은 객관적 사법 장치라 여겨지지만, 어원적으로 보건대 거기엔 이미 '남성' '시민'이라는 젠더-권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의 자리에서 '위안부' 생존자는 이중의 곤경에 처한다. 절멸 수용소에서 폭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거나 살아 왔더라도 온전히 말할 수 없게 된 자들이라 한 프리모 레비의 지적처럼, 살아남은 자로서 진정한 증인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윤리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한편, '증언'이라는 말 자체에 기입된 젠더-권력을 염두에 두면 하위 주체인 '위안부' 생존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난관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옥분은 의회라는 미국의 국가 장치에서 증언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옥분의 증언이 '지배자'의 언어로, 즉 반공블럭 형성을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전후 해결을 어렵게 한 미국의 개입을 은폐하는 한에서, 동시에 냉전 체제가 만든 '한국-미국-일본' 동맹이 허용하는 한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옥분은 신체에 새겨진 상처로서, 즉 '생존자'로서 자기를 증명했지만 곧이어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할 것을 자처하였다. 이때 자기 증명을 위한 생존자로서 말하기는 피식민의 역사를 간직한 모국어를 통해 발화되지만, 목격자로서의 증언은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발화된다. 옥분은 '목격자(testis)'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지배 체제의 언어(=영어)'를 구사함으로써 '증언(testimony)'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내 그려진 '위안부' 생존자의 영어 배우기는 '서발턴(subaltern)'의 지배 언어 배우기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는 중층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옥분은 지배 체제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지배 체제에 종속되거나 타협하게 된다. 서발턴 말하기의 전략·타협·종속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의 역학 관계 안에서 부침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민재가 옥분의 피해자 등록을 서두르기 위해 구청장을 설득한 논리는 '위안부'문제 범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구청장의 정치적 이익이었다. '위안부' 운동이 현실 정치와 관계 맺는 한, 정치 진영과 담론 자장 안에서 길항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서발턴은 타협과 협상을 통해 말하기 장소를 확보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서발턴의 말하기는 언제든 지배 담론에 의해 포획되고 굴절될 위험에 노출된다. 문제는 이처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역학 관계들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소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옥분이 하원 의회에 입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그녀의 양쪽에 늘어선 두 진영-정의를 연호하는 시민단체와 욱일기를 든 사람들-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분법적 적대관계는 옥분의 언어 구사 양상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한국어와 영어는 증언의 언어이지만, 일본어는 적국의 언어로 정확하게 나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미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을 제기한 실존 인물 '마이클 혼다' 의원이 영화에서는 '마이클 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화한 마이클 혼다 의원에게서 '혼다'라는 일본계 정체성을 지움으로써 '위안부'문제를 '한국-일본' 양국의 적대적 관계로 단순화한다. 이 구도에서 불완전한 전후 처리를 주도한 미국의 행위성은 누락되고, 오히려 '심판관'의 위치를 또다시 부여받게 된다. 가장 문제적인 '타협'은 옥분이 '법적 배상'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분은 일본 정부에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생존자들이 살아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 단체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법적 배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은 강제성이 없고, 보상 규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물론 결의안은 '위안부' 제도가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당시 일본 관헌의 '직접 개입'을 부정하던 아베 내각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의안은 또 “일본 황군이 '위안부 여성'으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것에 대해 명백하고도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며, 역사적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후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미국 의회의 입장 표명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은 피해자들이 일관되게 요구한 '법적 배상'을 누락한 한계 또한 분명하게 지닌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국제 관계와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법률적 차원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여성인권의 추구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유리"[3]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윤리적 차원이 법적 배상 없이 달성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제스처는 순전히 사법적인 것이지 윤리(학)적인 것이 아니”[4][5]다. 즉 '위안부'문제를 법률적 층위가 아니라 윤리적 층위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법적 책임을 '사면'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옥분의 실제 모델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가 '결의안 통과에 관한 성명서'에서 다시금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formal apologies and legal reparation)”을 촉구한 것은 매우 적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윤리가 사법적 책임을 상쇄하는 기묘한 굴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는 공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부 내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법에 호소했던 옥분이 정작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지 않는다. 영화의 더 결정적인 문제는 피해자의 핵심 요구를 누락하였음에도 그 호소에 미국이, 그리고 전세계가 '공식 인정'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옥분은 지배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미-일 우방이라는 국제 관계를 해치지 않는, '사법'이 아닌 '윤리'의 영역 안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영화는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전달한 것처럼 재현해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증언을 마친 옥순은 마침내 위인들의 동상으로 둘러싸인 의회 건물에서 미국 의원들에게 사과와 경의를 받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의 복권이라는 보편 가치가 '미국 정신'에 둘러싸여 실현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마는 것이다. 가해자를 사면하는 '보편 윤리'를 넘어 2007년 4월 말, 미국을 방문한 일본 아베 총리는 대통령 부시에게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를 표명한 바 있다. 이 사과는 일본과 미국 양쪽 언론 모두의 비판을 받았는데, 당시 계류 중이던 '위안부' 결의안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사과 대상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를 '수락'한다는 미국 대통령의 답변이었다. 피해자를 제외한 채 '미-일' 양국 수반이 사죄와 수락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실 정치의 모순적인 장면은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증언을 마친 후 옥분은 청중에게 인사를 받고, 더하여 자신을 의심했던 이들로부터도 사과를 받는다. 그러나 한 아시아계 인사는 끝까지 옥분을 모독하고, 이에 옥분은 일본어로 일갈한다. 옥분의 응수로 인해 그 아시아계 인사는 일본인으로 특정된다. 앞서 아베와 부시의 '사과와 수락'이 피해자를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면,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은 가해자를 제외한 채 피해자의 명예회복으로 나아가려는 듯하다. 두 장면을 함부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은 공히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미국화'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해자는 피해자 대신 미국에 사과를 하며, 피해자는 가해자 대신 미국에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미국은 '가해-피해' 갈등 구도 바깥의 '심판관'으로서 혹은 '보편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책임이 있는 하나의 주체이지, 결코 이 문제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양국이 연출한 영화/정치적 퍼포먼스는 정반대 편에서 미국을 특권화하며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사면한다. 뿐만 아니라 '보편 윤리'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의 사법적 책임을 더 이상 촉구하지 못하는/않는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한계가 「아이 캔 스피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에서 공론화되는 '위안부'문제를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미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일 것이다. 각주 ^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p. 22, 51. ^ Robert K. Barnhart Ed., The Barnhart Dictionary of Etymology, H.W. New York: Wilson Co., 1988, p. 1129. ^ 조양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대외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6, 2008, 한일군사문화학회, p. 73. ^ 아감벤, 앞의 책, p. 30. ^ 아감벤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 동안 아이히만의 변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논법, 곧 '아이히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사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도덕적 책임 감수는 사실상 법률적 유죄를 상쇄하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아감벤은 “유죄나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때로 필요한 일일 수 있지만) 윤리(학)의 영토를 떠나 법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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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위안부 역사관'은 역사 부정 세력 극복하는 장기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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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 사기, 날조, 조작.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담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23년 9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이 개최한 국제토론회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역사 부정 현상'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국제토론회 전 과정을 이끈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에게 토론회의 주요 내용을 들었다.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 그룹과 친해요. 제대로 가르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교사들인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돼 함께 해온 시간이 꽤 쌓였어요. '위안부' 수업 지도안을 만들어 활용하고, 저희 단체 청소년교육프로그램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분들이 놀라운 얘기를 해요. 일제 강점기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위안부'나 강제동원을 주제로 자료 조사 과제를 내곤 하는데, 완전히 왜곡된 사실을 발표하는 학생이 많다는 거예요. 역사 부정 세력들이 유포해온 오염된 정보가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심각합니다.” 왜곡 정보 발표하는 학생들, 역사 부정 대응 국제토론회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4년, 햇수로 20년 넘게 현장의 여성인권활동가로 활동해온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 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대표의 얼굴 가득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교사들의 '고발'처럼 '위안부'의 피해 자체를 거짓이나 조작으로 몰고가는 잘못된 정보가 일상에 넘쳐나는데 반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의 대응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사태로 교류는 줄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시민사회계에 대한 의혹과 갈등이 불거지고 '마녀사냥식' 언론 보도가 쏟아지다보니 '위안부' 해결 운동이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그 해결 운동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으로 바뀌고 있고요. 수요맞불집회는 멈출 기미가 없고, 토론회 며칠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일 극우 인사들이 '위안부는 사기극'이라며 심포지엄까지 열었잖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고민이 구체화된 자리가 지난해 9월 20일 마창진시민모임이 개최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부정 현상에 대한 대응방안 모색' 국제토론회였다. 기획부터 섭외, 실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른 이 대표는 토론회에서 접한 역사 부정 행태가 '세계적'이고 매우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어 놀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방해로 '망명 신청자' 상태인 소녀상 “일본의 집요한 방해는 상상 이상이에요. 기시다 총리, 나고야 시장 등 일본 고위 관료들의 항의부터 지역 영사관이나 대사의 직접적인 로비, 여기에 대학 교수와 학자들, 각국 현지에 나가 있는 일본 기업과 시민단체까지 개입해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해요. 국경을 초월해 전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권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독일 베를린 미테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초기에도 일본의 항의로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가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등 재독 시민단체와 지역사회, 전문가들이 반발하고 철거 명령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는 등 강한 대응으로 존치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오는 9월 다시 철거 압박이 예상돼요. 줌(zoom)을 통해 독일 상황을 전해주신 한정화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대표이사는 소녀상이 체류 허가가 발급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관용되는 '망명 신청자' 상태라 표현하며 서글퍼하셨어요.” 일본 내 역사 부정 분위기는 1991년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을 아사히 신문에 특종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한 우익의 공격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주간금요일' 발행인인 우에무라 씨는 아베 신조 정권 시절인 2014년 1월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날조라는 공격을 받았고, 이후 딸을 해치겠다는 협박까지 받는 등 곤욕을 치러왔다. 글렌데일시 소녀상 영구 설치, 필라델피아엔 새 소녀상 토론회에서는 인권과 존엄성을 믿으며 연대해온 글로벌 시민들이 값진 결실을 맺고 있는 사례도 소개됐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위치한 글렌데일시. 2012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날을 기념해 7월 30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한 글렌데일시는 2013년에는 글레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도 세웠다. 이듬해 철수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글렌데일시가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대응해 소녀상을 영구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글렌데일 소녀상은 여러 차례 훼손을 당했으나 2020년 12월 보수작업을 마쳤고, '소녀상 지킴이' 시민 모임도 만들어져 잘 보호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는 8년여 노력 끝에 새로운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평화플라자위원회가 주축이 돼 추진한 소녀상 건립 계획은 2021년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로부터 승인받은 데 이어 2022년에는 두 차례 타운홀 공청회를 거쳐 확정됐다. 이어 2023년 7월에는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가 기림비 문구까지 정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남부 도시인 텍사스 달라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 알리기 활동을 펴고 있는 박신민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대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달라스에서 박 대표는 2015년부터 일상적으로 '귀향', '주전장' 등의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소녀상을 재현하거나 나비팔찌 등을 만들어 나누는가 하면 2019년부터는 '세계 위안부 기념일' 행사도 이끌고 있다. 기록과 기억, 교육이 어우러지는 '위안부 역사관' 이후 토론회는 자연스레 대안 찾기로 연결됐고, 이경희 대표가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은 공감의 폭이 가장 컸던 주제였다. “경상국립대 김명희 교수님도 기조 강연에서 강조하셨는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담론이 일본 정부와 우파의 외교 전략을 통해 전세계로 확장되는 양상이잖아요. 그래서 피해자들의 피해와 상처를 오롯이 기록하는 일, 인권과 역사적 교훈을 계속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문제 해결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답답한 건 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는 현실이에요.”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가 위안부 역사관을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추진해온 배경이다. 물론 이 대표는 지난 4~5년 동안 누구보다 격렬한 부침의 중심에 있었기에 역사관 건립사업이 녹록치 않은 목표임을 잘 안다. 애초 경남도 차원에서 추진 계획이 마련됐다가 타당성 조사가 다시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미뤄지더니 조사 결과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현재 역사관 건립 계획은 좌초된 상태. 그런데 이 대표는 의외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일본 참가자들이 보낸 연대의 목소리였다. “2005년 일본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로 개관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이하 WAM)'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는 일본의 유일한 박물관이에요.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이 토론회에 참석해 특별 전시를 비롯해 위안소 지도 등의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꾸준히 업로드하고, 1990년대 중·고등학교 역사 및 사회과학 수업에서 사용된 500여 종의 교과서를 대상으로 한 연구 등을 공개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온 WAM의 경험을 전했습니다. 일제 치하 '위안부'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는 공동의 목표를 언급한 와타나베 사무국장은 또 고개를 드는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주의에 대해 정보 공유와 연대를 통해 맞설 때라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마창진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왔어요. 우에무라 전 기자께서도 모금운동을 해주겠다고 하시고요. '위안부' 해결 운동이 더 어려운 지역사회에 정말 기운 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안부' 역사 교육 조례 제정도 과제 국제토론회 이후 마창진시민모임과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는 곤경에 처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미래를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고 현실적인 추진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비중 있게 고민하는 대안으로는 체계적인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평등 사회와 안전한 근로 환경 조성을 위해 연 1회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공교육 영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자치단체 차원의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또 지역의 시민단체가 감당하기엔 적잖이 버거운 행사지만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던 '국제청소년캠프'를 재개하는 일도 과제 중 하나이다. 필리핀,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온 청소년들과 경남 지역의 교사와 학생이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어우러진 캠프는 코로나사태로 오도가도 못한 2021년과 2022년에 온라인 캠페인으로만 진행돼 아쉬움이 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요즘도 언제 다시 캠프를 여느냐 문의를 해온다. 요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 경남 지역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기록화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는 이 대표는 현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소리 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피해 할머니 대부분이 돌아가신 '포스트 할머니 시대', 역사 주체로서 우리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피해의 연장선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문제를 발화하는 것, 후속 세대가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기반이라도 만들어놓는 게 저의 소명입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경희 마창진시민모임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5월 3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