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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논평 상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정치 지평 -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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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27일 이틀에 걸쳐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1]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 행사의 주제는 ‘전쟁, 식민주의와 여성폭력’으로, 러시아의 여성인권운동가 나스차 크라실니코바의 특별 기조연설 「우크라이나 전쟁과 여성폭력」으로 시작되었다. 나스차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성 강간을 이야기하며, 전시 성폭력은 민간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군사 기술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전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 연구자,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에 대항하는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행사를 지켜보면서 일본군‘위안부’운동은 더 이상 한일관계에 국한된 민족주의적 의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전쟁의 가부장성을 비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주제이자, 여전히 종식되지 않는 여성 성폭력 문제와 닿아있는 표상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흥미롭고 문제적인 기획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수치심으로부터 피해자를 해방시키기 개인적으로는 행사 이튿날에 이루어진 방글라데시의 여성작가 샤힌 아크타르와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전승희의 대담에 관심이 컸다. 샤힌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시기에 파킨스탄 군에 납치당해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의 수난과 성장을 탁월하게 그린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The Search)』의 작가로 초대되었다. 샤힌은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던 중, 사라예보 전쟁 아동 박물관(War Childhood Museum)에서 자신을 사로잡은, 전쟁 성폭력으로 태어난 어린이의 증언을 들려주었다. 샤힌의 목소리로 듣는 “내 전체 인생은 가해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수치심은 내 몫이 되었다”는 어린이의 발언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겪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사태임이 다시금 환기되었다. 자신을 짓밟은 이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으로 길러야 하는 여성과, 자기 존재를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들 속에서 살아갈 피해자의 삶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최근에 읽은 책 『여성의 수치심』(에리카 L. 존슨·퍼트리샤 모런 엮음, 손희정·김하현 옮김, 글항아리, 2022)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들은 수치심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수치심이란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쉬운, 완전히 혼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치스러운 생각, 행동, 감정에 대해 온전히 홀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결함 있고 부적절한 사람으로 느끼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데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간과되기 쉽다. 가령 성폭력이 성적 수치심을 강요함으로써 피해자의 입을 막는 과정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치심은 그 어떤 감정들보다 개인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문제다. 일본군‘위안부’야말로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성을 증거하는 존재다. 일본군‘위안부’는 당사자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소문 속에서 떠돌던 흐릿한 존재였다. 피해자가 수치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침묵을 깨야 하지만, 수치를 드러내고 표현할수록 더 많은 치욕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증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로소 어렵게 증언이 이루어졌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는 수치심의 폭력 속에 여전히 갇혀 있다. 연구자로서 학술 발표들이 다소 특별하게 다가왔는데, 그 이유는 전시 성폭력은 단지 학문적 주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온몸으로 상처 입으며 사건의 당사자와 관계 맺고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여는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혼자만의 굴욕 속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연구자, 활동가 그리고 양심적 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수치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려면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정동정치로서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수치심’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내밀한 테크놀로지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심문하는, 즉 가장 인간다운 자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한 이상의 불가능성과 마주할 때 느끼는 윤리 감정일 것이다. 1부 ‘폭력의 세계, 공존의 존재론’에서 이루어진 도미야마 이치로의 발표 「폭력, 이후」는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나누어 갖는 일의 가치와 그 방안을 모색하게 해주는 글이었다. 도미야마는 증언이나 애도 논의에서 그간 자주 거론되었던 피해자가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피해 사건의 당사자들은 자주 “결코 폭력에 대한 기억을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폭력에 의한 경험이 당사자에게 남긴 트라우마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도미야마는 “말할 수 없다”는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이나 제도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자료집, 30쪽)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폭력은 폭력적 행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 이후 우리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비단 과거의 피해자에게만 연관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폭력에 노출된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다”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면 새로운 정치적 지평이 열린다. 이러한 발견은 현재에 대한 환상을 박살냄으로써 우리를 상처 입히는 파상적 경험이지만, 사건의 당사자와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 온 것을 부끄러움과 함께 아는 것”(자료집, 36쪽)으로 표현된 상처입기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여는 정동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단지 오욕된 역사가 남긴 특수한 사건이 아니고, 현재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젠더폭력의 한 양상임을 깨닫는 것은, 폭력 이후를 피해자와 사건 바깥의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이번 행사와 연계된 온라인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또 2부 ‘침묵과 몸짓: 증언의 영화적 번역’에서도 논의된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2022)는 제국/식민의 기억 속에 갇혀 있던 일본군‘위안부’를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지평 속에서 재의미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김순악이 열여섯의 나이로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한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집창촌 포주로, 때로 식모를 전전해온 생애사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오늘날 미투 운동의 고발 주체들에게 김순악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김으로써 여성 성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일본군‘위안부’ -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 앞서도 말했듯이 이번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는 한국의 성공한 시민사회 운동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시 성폭력과 여성인권 침해를 상징하는 글로벌한 참조점”(자료집, 4쪽)으로서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 운동을 열어가는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필리핀, 중국 등 아시아 각 지역의 피해자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아시아 페미니즘 운동으로서의 가능성마저 보여주었다.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운동은 그간 탈식민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으므로, 이제는 여성혐오와 백래시로 나타나는 전 세계의 보수화 흐름에 맞서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어젠다로 도약해 갈 필요가 있다. 일본군‘위안부’가 트랜스내셔널 페미니즘의 맥락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부 ‘(포스트)냉전과 ‘피해자다움’’에서 발표된 김현경의 「냉전과 일본군‘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이 포착한 장면은 지극히 문제적이다. 1914년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944년 오키나와의 ‘위안부’가 된 배봉기는 1975년 재류특별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 및 남성에 의해 여성폭력을 응집한 하나의 육체”(자료집, 147)라고 할 수 있는 배봉기의 증언은 국가 간 틈바구니에서 유령화되었다. 전후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자리잡은 일본은 전쟁 범죄 책임을 부정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안착했고, 박정희 정권 역시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파트너를 자처하며 배봉기의 존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1991년 사망한 후에도 배봉기는 한동안 귀국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오키나와 민단과 조총련이 상이한 이념을 내세워 자신들이 배봉기의 삶과 경험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며 유골을 두고 소유권 분쟁을 벌인 것이다. 배봉기의 비극적 사례는 일본군‘위안부’가 더 이상 국경이나 문화에 갇히지 않는 트랜스내셔널한 전쟁 기억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민족의 수치를 환기시키는 표상이 아니라 사회진화론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기초해 온 남성 중심적인 근대문명 담론에 균열을 내는 주체여야 함을 보여준다. 이혜령의 「페허, 바다의 기억 – 일본군‘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 개념과 독일 작가 제발트의 논의를 빌어, 일본군‘위안부’를 “모든 전쟁의 중지와 폭력적 팽창을 추구하는 남근 중심적 세계질서의 파국”(자료집, 54쪽)을 요청하는 존재로 재위치화한다. 이혜령은 김학순에게 증언은 전쟁과 전장을 떠올리며 다시금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는 정동적 체험의 반복이었다고 일깨운다. 그리고 김학순이 본 폐허, 즉 죽음에 대한 당사자의 공포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심연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 내지 폴리스의 창설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3부 ‘[라운드테이블] 지금-여기, 일본군‘위안부’운동’과 6부 ‘[아시아 청년포럼] 여성과 폭력, 아시아 청년의 눈으로 묻고 답하다’는, 국경을 넘어 전쟁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새로운 폴리스 만들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단초다. 3부 도로테아 믈라데노바의 「평화의 소녀상과 ‘위안부’ 문제의 독일 현지화」는 독일에서 소녀상 설치를 위한 시민운동이 비교적 성공하게 된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발표자에 의하면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위안부’ 워킹 그룹”은 “종족 간 연합을 통해 국경을 초월하는 탈국가적 또는 초국적 활동”(자료집, 109쪽)을 함으로써 보편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폭력을 은폐하는 메커니즘과 성폭력을 조장하는 구조를 폭로하고 독일인들이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급진적 현지화’를 시도했다. 민족이나 국적이 상이한 구성원들은 종족 간 만행의 역사를 수치스러워하며, 페미니즘에서 역사의 실타래를 풀 자원을 발견하고자 했다. 성폭력을 아시아의 야만으로 치부하고 서구인에게 은밀한 우월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소녀상이 전유되지 않고, 현존하는 젠더 폭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위안부’를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폴리스의 창설자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1960-1970년대 군산, 송탄 등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였던 김연자의 자기 서사인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를 읽고 있었던 탓인지 자주 일본군‘위안부’와 “양공주”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외국군 성매매 여성들이 겹쳐졌다. 김연자가 날마다 죽음을 꿈꾸던 절망의 땅이 바로 나의 고향이었고,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었던 탓일 듯하다. 오래전 고향에서 관광호텔과 버스터미널 사이에서 미군과 함께 있는 고3 짝꿍과 마주친 적이 있다. 저개발의 공간이 감추지 못한 옹색함과 무질서 속에서 미군과 한국 여성의 조합은 강렬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사라진 탓에 소식이 궁금한 친구였지만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친구가 나를 외면하게 만든 것은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것도 종류는 다르지만 약간의 수치심이었다. 이번 국제포럼은 역사 속 여성 피해자들이 강요된 수치심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의 조건이 무엇이며, 어떤 활동들이 필요한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일본군‘위안부’만이 아니라 “양공주”까지로 상상이 미치면, 식민과 냉전에 대한 여성주의 연구는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뗀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다행일까? 슬픔일까? 앞으로도 ‘여성인권과 평화’에 대해 이처럼 큰 질문을 던지는 뜻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 한국어, 영어, 일어로 제작된 <2022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자료집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발간자료 게시판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stop.or.kr/multicms/multiCmsUsrList.do?category=pd&srch_menu_nix=nFog4NJ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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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인터뷰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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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사회적 침묵 끝에 1990년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공개 증언이 나올 수 있었던 배후에는 탈냉전과 민주화, 탈식민 여성주의 인식론이 열어젖힌 새로운 담론공간이 존재한다. 종전에 민주화운동의 하위 부문으로 치부되던 여성운동 또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과 성폭력을 비판하면서 진영이 재편되었다. 이 시기 민족과 계급, 여성 차별의 모순이 중첩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헌신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며,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야마시타 영애 분쿄대학교 교수는 1988년부터 1998년 10년간 한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어머니와 조선인 아버지를 둔 자이니치 일본 국적자이며, 지난 2012년 한국에 소개된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박은미 옮김, 한울아카데미)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셔널한 공동체의 안과 밖, 그 사이-틈새라는 어려운 자리/비판적 위치에서 한국과 일본 사회를 경험하며 ‘위안부’ 문제를 성찰해 온 야마시타 교수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헌미 학술기획팀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선생님께서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이효재, 윤정옥 교수와의 만남은 어떠했나요? 1988년 9월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다음 해 3월에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유학 전에 스즈키 유코(일본의 여성사 연구자)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는데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위안부’ 문제도 같이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갈 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윤정옥 선생님이 1987년경에 일본에 ‘위안부’ 조사를 위해 오셨는데, 그때 아사히신문의 마츠이 야요리 기자가 윤정옥 선생님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셨어요. 그 글을 통해 윤정옥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은 민주화운동으로 학교에서 퇴출된 후 일본에 잠깐 체류하신 적이 있었고 그때 우연히 뵐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효재 선생님을 지도 교수님으로 삼아 한국에 갔습니다. 이효재 선생님이 1989년 10월 가족법 개정 운동 집회에 가자고 하셔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다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윤정옥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제 소개를 하면서 “저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전화번호를 물어보셨고, 그 후 이화여대 식당에서 자주 만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다음 해 7월에 윤정옥 선생님이 ‘정신대연구반’을 만드셨을 때 저도 함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여성학과 학생 4명이 모였어요. 윤정옥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Q. 1988년 9월에 이화여자대학교로 유학을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오면서 여성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학부 전공은 무엇이었고 유학 결심과 전공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 초등학교는 민족학교, 중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 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에는 국경이나 국적이 크게 관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신문을 보다가 ‘여자는 만들어진다’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읽게 됐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때까지는 성 정체성도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고 치마보다는 바지가 좋았어요. 민족학교 다닐 때 고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머리를 기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기악합주부에서는 남학생만 지휘자가 될 수 있었어요. 오빠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데 저만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요. 그런데 기사를 보니까 이게 남녀차별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여성 문제에 눈을 떴고, 대학 입시 때는 이미 미술에 관심이 없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미대를 몇 군데 지원해 한 군데 합격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학교에 가지 않고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미대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단 다니고 있는 대학을 졸업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졸업 후 여자대학인 쓰다주쿠대학교에 학사 입학(3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조선어를 제1외국어로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다행히 국제관계학과에 붙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어요. Q. 한국에 처음 오신 건 언제였나요? 1979년에 처음으로 오빠와 둘이서 아버지의 고향에 갔어요. 그때는 할머니와 친척분들을 뵈었고, 7개월 후인 1980년 2월에 혼자 다시 갔어요. 한국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전국 일주를 하면서 마지막에 서울에 올라와 이화여대를 찾아갔어요. 그 근처 책방에서 이화여대에서 출판한 『여성학』(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과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79)이라는 제목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것을 사서 나중에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도 여성학이 도입되었지요. 그러나 대학에는 여성학과 같은 곳은 없었고, 저는 한국 여성사와 현재 상황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Q. 한국에 1988~1998년까지 10년간 계셨는데, 석사를 마친 후 유학은 끝난 건가요? 석사를 마친 후에 연구생을 거쳐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96년경에 과정을 끝냈습니다. 또 94년 가을학기부터 동국대 일어일문과에 ‘외국인 초빙교수’로 취직해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열심히 활동하던 때였기 때문에 한국에 계속 있고 싶었죠. Q.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는데 서울의 인상이 어땠는지요. 관련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과거청산의 맥락에서 종종 놓쳐지는 것이 1990년대 글로벌한 탈냉전과 한반도에서 지속된 냉전 및 남북 체제경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지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일본 자이니치 사회에서 이러한 모순적 변화(탈냉전이 되었지만 냉전이 계속되는)를 혹시 느끼셨는지요. 사실은 더 일찍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선언 전에는 사실상 가지 못했던 거지요(민족학교 출신인 것도 있고 해서 부모님이 말렸습니다). 그래서 88년에 서울에 갔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올림픽 직전이라 활기도 엄청났고요. 자이니치 사회는 매우 복잡해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이니치의 경험이 다 달라요. 그런데 일본의 자이니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이었어요. 또 당시 젊은 세대들은 이미 조총련이나 민단과 거리를 두었지요. 저의 경우는 80년대 초반에 자이니치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나그네’라는 젊은이들의 독서 모임에 가끔 나갔어요. 하지만 여기도 거의 남자들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1984년 쓰다주쿠대 학부를 졸업할 때쯤 ‘조선여성사독서회’라는 자이니치 여성 모임을 만들었어요. 주로 한국에서 구입한 여성 관련 서적을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중심이었지만 곧 다양해졌어요. 민족학교 출신자들이 모인 것은 아무래도 한국어 책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자이니치 사회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어요. Q. 선생님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셔널리즘의 틈새’,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민국가 사이의 정체성을 ‘야마시타 영애’라는 이름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야마시타 에이아이와 야마시타 영애, 그리고 최영애라는 세 개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민족학교 다닐 때는 최영애였고 일본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야마시타 에이아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어요. 그 뒤로 ‘나는 조선인(최영애)인가, 일본인(야마시타 에이아이, 영애=英愛의 일본어 독음)인가’ 고민을 했습니다. 1977년쯤 마츠이 야요리 씨 주최로 ‘아시아여성모임’이 생겼고, 대학 입학 후 우연히 그 모임을 알게 되어 나가게 됐습니다. 그 모임에서 어느 날 나의 아이덴티티와 이름에 관한 고민을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한 분이 “그럼 야마시타 영애라고 하면 어때요?”라고 하셨죠. 자이니치와 결혼한 분이셔서 그런지 감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 발상이 너무 멋있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야마시타 영애’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Q. 야마시타는 어머니의 성인가요? 맞아요. 저는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어머니와 저, 오빠 모두 아버지 국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어요. 그랬으면 저도 최 씨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이유는 모릅니다. 그래서 호적과 주민등록상에도 ‘야마시타 에이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권상의 영어 표기도 ‘EIAI’로 되어 있던 걸 1998년에 ‘YEONG-AE’로 바꿨어요. Q.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 방일 직전, 정신대 문제에 대한 여성계(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서울지역 여자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연합성명서, 7월 윤정옥 교수와의 정신대연구반(훗날의 한국정신대연구소) 발족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요.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님인 이영자 선생님이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강의를 오셨었어요.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너무 재밌었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5월 초순쯤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식사하던 중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식민지 시대의 징용, 징병에 관해 말한다고 하는데 여성 문제인 정신대(‘위안부’의 의미로)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한다. 우리가 이것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 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친구들이 역할 분담을 하면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Q.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합성명서까지 이어진 건가요? 그렇죠. 여성학과 친구들이 다방면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여성연합을 포함한 여성계의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어요. Q. 정신대연구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그것이 나중에 한국정신대연구소로 이어지고, 정대협에서 일본 창구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일본 NGO와의 연락, 통번역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대협에는 언제 합류해서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7월에 연구반이 생겼고, 8월경에 윤정옥 선생님에게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일본의 6월 국회 회의록이었는데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조선인‘위안부’에 대해 질문을 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은 민간업자가 한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한 내용이었어요. 윤정옥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죠. “이런 게 일본에서 왔는데 문제적이다, 일본 정부에 대해 공개서한을 쓰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한국어로 쓰시고 제가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의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회의에서도 검토했고요. 그리고 공개서한을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고 또 10월 말에 윤영애 총무님, 김혜원 선생님을 비롯해 세 분이 일본에 가서 직접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어요. 제가 통역을 맡았고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바로 정대협을 만들게 되었어요.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으니 전담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교회여성연합회가 중심이었어요. 공개서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답신은 계속 없었어요. 기한이 지나고 세 번 정도 독촉장을 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참 지나서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답을 하겠으니 대사관으로 나오라고. 그래서 정대협 대표들이 대사관에 가셨어요. 근데 그때 대사관 측의 반응이 너무 실망스럽고 인간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효재 선생님, 윤정옥 선생님, 윤영애 총무님 모두 화가 나셨죠. 그때 일본 측에서 제대로 대응하고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통역이나 번역 같은 잡일을 했습니다. 김학순 님이 일본 정부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신 직후부터 정신대 신고 전화가 폭발했는데 저도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벨이 울리면 긴장하며 수화기를 든 기억이 납니다. 자원활동가였던 셈이죠. 아무 직함 없이 그냥 실행위원회도 참석하고 그랬어요. 정대협 구성 단체인 정신대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요. 92년인가, 이미경 선생님이 총무였을 때 정대협 조직을 개편하면서 국제협력 일본 담당이라는 역할이 생겼던 걸로 기억해요. Credit 인터뷰어: 이헌미 인터뷰이: 야마시타 영애 정리: 퍼플레이 강푸름 일시: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장소: 한국여성인권진흥원(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50 센트럴플레이스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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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위안부피해자법에 대한 역사적 검토: 보호·지원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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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필자의 2021년 석사논문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의 의미: 한일청구권협정 부작위 위헌소송을 중심으로」의 2장의 2절과 3절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2023년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이하 위안부피해자법, 법률 제4565호)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것을 명시했다(제1조 목적). 현재 이 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어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뿐만 아니라 국민의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변모했다. 30년의 세월 동안 위안부피해자법은 한국 사회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그 피해자들을 보는 시각의 변화를 반영하며 바뀌었고, 또 그것을 바꿔온 기제이기도 했다. 가령, 현재로선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글에서는 법 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와 내용의 변화, 그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위안부피해자법의 제정 경위 위안부피해자법은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 의안으로 제출되어 같은 해 4월 국회에서 통과되고, 6월에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안은 일본 정부에 법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한일 간 도덕적 우위는 가져가되 피해자는 우리 정부가 구제하겠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1] 외무부는 법 제정이 당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유엔 인권위 제소와는 별개의 조치라고 밝혔다.[2] 이러한 조치에 일본 정부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3] 법에 따른 지원으로는 피해를 신고한 생존자에게 생활보호기본금 500만 원 및 생활지원금 15만 원 지급, 영구임대주택 입주, 의료 무료 혜택 등이 결정되었다. 외무부에 따르면 이러한 금액은 법규나 제도상의 제한, 다른 국가지원대상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정한 것이었다. 외무부는 근로정신대나 강제징용자 등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선 장기적 대책을 마련할 것이지만, “종군위안부 보호 조처를 먼저 다룬 것은 가장 반인륜적이고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 이러한 조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는 실상이 알려졌기 때문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보호·지원을 요구하는 일본군‘위안부’ 운동[5]의 목소리와 그것을 추진하려고 했던 외무부의 시도는 이전 정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기점으로 한,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청산하라는 운동의 지속적인 요구가 한국 정부의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일까? 먼저 한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급진적’이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화를 둘러싼 운동의 흐름과 한국 정부의 대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0년대 냉전의 붕괴는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를 불러왔고,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한국 사회는 되돌아온 식민지기와 전쟁의 기억, 그것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두고 들끓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원폭 피해 및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 한일 여성 연대를 기반으로 한 기생관광 반대 운동의 교차점에서 등장했다. 1990년 10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외 여성단체들은 한일 정부에 일본 정부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실인정, 공식사죄, 보상, 역사교육 등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거듭된 부인과 책임회피가 이어졌다.[6] 이에 맞선 1991년 8월 김학순의 기자회견에서의 공개 증언, 그리고 12월 일본 정부에 대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 제소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현안 과제”로 ‘격상’시켰다.[7]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표하자, 가토 내각 관방장관은 정부의 관여를 인정하고, 관계성청 자료조사 방침을 발표했다. 곧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선 진상규명, 후 보상 또는 배상 방침을 세우고, 자체 진상규명 작업을 맡을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 구성 계획을 밝혔다. 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한국 정부의 “피해 여성에 대한 응급생활보호조치”를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8] 이에 비하면 김영삼 정권의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은 한발 나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 관계의 장애물로서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진상규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일본 정부의 배보상을 정부 차원에서 요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993년 8월 진상조사 발표와 함께 설치, 관리 및 이송에 관해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에 한국 정부가 만족하며 이 문제를 더는 한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9] 정대협은 위안부피해자법 제정을 환영하긴 했으나 이것이 일본 정부를 대신한 “물질적 보상”인지, “민족 수난의 희생자에 대한 동포적 차원의 위로와 생활 지원”인지 질의했다. 또한, 중대한 인권침해[10]를 입은 피해자는 배상의 권리를 갖는 주체이며 이들을 대신해 정부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1]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 정부의 민간을 경유한 금전적 보상이 법적 책임에 따른 것이 아닌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지, 그럼으로써 피해자들을 단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경계해왔다. 운동이 1996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통한 의료·복지 사업에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96년 정대협은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한편, 피해자를 위해 생활안정지원금을 증액해달라고 요청했다.[12]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치를 두고 법적 책임과 정부의 향후 대책을 고려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관계가 경색되어선 안 된다는 외무부가 갈등을 빚었지만, 1998년 5월, 한국 정부가 2차 지원금을 지급하되, 민간의 배상 요구에는 개입하거나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진 않는 것으로 국민기금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3] 종합하자면, 1990년대 위안부피해자법과 그에 따른 지원은 정부가 민족의 자존심과 도덕적 우위, 한일 관계를 둘러싸고 내린 타협책이자 (그래서 다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보다 신속하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상정한 출발점이었다. 2. 위안부피해자법의 내용과 그 변화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이 법의 정식 약칭은 위안부피해자법이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은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제명과 조항에 ‘피해자’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일부 개정된 「일제하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6771호)에서부터이다.[14]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가 ‘피해자’ 용어를 일상화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후술할 노무현 정권의 대일 과거사 청산 작업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 개정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명명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관련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현재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명칭(특히 가족주의적 호칭)과 관련해 열띤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명명하는 작업이 갖는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 주지하듯 일본군‘위안부’, 정신대, 종군위안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각 호칭은 주로 사용된 시기, 맥락이 다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위안부피해자법 제정 당시에도 위안부라는 명칭이 적절한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당사자의 자존심(또는 ‘프라이버시’ 침해)과 인권 문제가 있으니 성적 피해 여성과 같은 표현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무부가 당시 실제로 사용된 용어로서 그 역사성을 살리는 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5] 전술했듯 1993년 위안부피해자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한 자” 중 “생존자로 법 적용대상자로 결정·등록된 자”를 대상으로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됐다. 지원 내용으로는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의 지급”이 있었고, “임대주택의 우선임대”도 명시됐다. 이후 위안부피해자법은 여러 번 개정되었으나 중요한 변화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2002년 개정 법안에서는 “국가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는 어구는 삭제되고 피해자를 보호·지원해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할 뿐 아니라 “기념사업을 수행”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이바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어 2005년 개정 법안(법률 제7637호)에서는 기념사업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것임을 명시하게 되었고,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념사업 등의 사업내용도 획정되고 다양해졌다. 지원 내용 역시 점차 확장되었다. 이처럼 피해자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억/기념 조치의 제도화, 피해 회복을 인권이라는 중대한 가치와 연관 짓는 법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사회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할, 공적 역사/기억의 일부로 삼게 된 것이다.[16] 이러한 2000년대 법 개정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의 국제인권레짐의 정착과 과거사 청산작업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고통의 치유 및 해소가 사회 재통합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해 과거사청산 메커니즘을 이행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17] 피해자 보호·지원에서 나아가 이들의 명예회복, 진상규명, 기념사업, 역사교육을 법에 명시하게 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요구해온 바가 그 법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2005년 개정 법안이 제2조의2(국가의 의무)를 추가해 “진상규명”과 “역사교육”에 대한 적극적 노력, 그리고 피해자 “발굴”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 강구를 국가의 의무로 명시한 데 이어 2017년 개정 법안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15207호)은 “피해자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피해자 등의 의견 청취, 국민에 “정책의 주요내용”의 “적극 공개”를 규정했다. 이러한 2010년대 후반의 법 개정은 2015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국민과 같이 호흡하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없었음을 문제화한 문재인 정권에서 이뤄졌다.[18] 2015 위안부 합의가 고위급 외교 인사들의 비밀협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에 따른 변화> 제명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제·개정 시기 1993년 제정, 시행 2002년 일부개정, 2003년 시행 2005년 일부개정, 2006년 시행 2017년 일부개정, 2018년 시행 정의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성적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 좌동 좌동 대상 일군위안부 중 생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활안전지원대상자 등), 국민 좌동 좌동 담당 부처 보건사회부 여성부 여성가족부 좌동 목적 국가가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기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증진에 기여함 좌동 지원 내용 생활보호, 의료보호,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임대주택 우선임대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 지급, 간병인 지원, 장제비 지원, 임대주택 우선임대, 국적회복 등의 지원, 법률상담 등의 지원 사업 내용 X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홍보 및 학예활동, 피해자의 명예회복 위한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등 국내외활동, 위령사업 국가의 의무 X X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인권증진을 위하여 진상규명·올바른 역사교육 등에 대한 적극적 노력,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인권 증진 및 이와 관련한 진상 규명, 올바른 역사교육 등을 위한 국내외적 적극 노력과 필요한 조직과 예산 확보, 피해자의 적극적 발굴과 안정적 생활유지 위해 필요한 조치 강구, 피해자 권리·의무 관련 정책 수립시 피해자(그 대리인 포함) 의견 청취 및 정책 주요 내용 국민에 적극 공개 3. 위안부피해자법의 제·개정의 사회적 의미 첫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최초 법이 제정될 때처럼 “인도주의정신에 입각하여” 보호·지원을 하는 데서 나아가 “복지증진” 등 복합적인 목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도주의적 대응은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해 기본적인 인간적 삶의 수준을 영위하는 데 어려운 이들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19] 국가의 지원이 30년 동안 이어진 현재,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바가 인도주의적 대응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동의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법적 책임에 의거한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해왔고, 국가가 외교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이해관계를 대리해주길 정부에 요구해왔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는 누락되었으나 개인의 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선언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다는 단언, 그리고 한국 정부의 수세적인 태도의 배경이 되었다. (남성으로 재현되곤 하는) 징용·징병 피해자의 청구권에 대해 체결한 협정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청구권 역시 변제됐다고 여겨지게 된 점은 전쟁 피해 여성들이 마주하게 된 모순적 상황, 즉, 체계적으로 참여가 박탈된 계약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종속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그러나 2005년 개정법의 의안이 발의되었을 당시 국가의 의무 조항에 포함되어 있던 “배상(에 대한 적극적 노력)”은 법 목적이 생활 안정과 복지증진에 있다는 사유로 삭제되었다.[20] 또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따라 개인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는지에 관한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기에 제3조의 해석상의 분쟁 해결조치를 취할 의무를 다하라는, 즉,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배보상 문제를 우선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21]에도 불구하고, 졸속으로 이뤄진 2015 위안부 합의는 또다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피해자 지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둘째로, 위안부피해자법이 ‘피해자’로 그 대상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술했듯 1990년대 한국 정부의 방침이나 현실주의적 국가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피해자는 잔여적 복지 지원으로 고통이 해소되어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반면, 2000년대와 그 이후 과거사청산 흐름에서의 법 개정에서 ‘피해자’는 적절하고, 실효적이고, 신속한 방식으로 마땅히 피해가 구제되어야 하는 인권 주체이자, 또 그러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는 정치적 주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법의 ‘피해자’라는 호명 자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와 피해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사회에 환기하는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일부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피해 생존자들의 고통 경감, 즉, 개개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조치로 문제의 해결방식과 목적을 한정하는 것은 2015 위안부 합의 이후 강력한 흐름이 되어왔다. 전술했듯 국가의 의무 조항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반영되었으나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피해자의 입장은 무엇인지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열린 문제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이라는 정의의 ‘내용’을 정하는 데 있어 우리가 계속해서 ‘피해자’ 기표를 통해 ‘당사자’를 설정할지, 법과 외교를 통한 ‘방법’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와 같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글쓴이는 양국 정부 간의 대화가 동북아안보체제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여성의 경험과 젠더 관점을 바탕으로 평화구축 메커니즘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각주 ^ 정부 의안. 의안번호 140239. 1993.5.7. 동아일보, “挺身隊(정신대) 보상 日(일)에 요구않겠다”, 1993.03.13.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한겨레, “종군위안부 물적 보상 한국 불요구방침 호의”, 1993.03.15. ^ 한겨레, “정부 구호조처 배경·의미 ‘종군위안부 피해’ 인도적 배려”, 1993.03.30. ^ 이 글의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도한 활동(1998~1990.11.16.)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11.16. 결성, 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을 가리킨다. ^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내각총리대신 가이후 도시키 귀하”, 1990.10.17.; 한교여연 외 38개 여성단체, “공개서한: 노태우 대통령 귀하”, 1990.10.17.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1호」, 1993.5.10., 76쪽. ^ 한국교회여성연합회(1992), 『정신대문제 자료집: 종군위안부 발자취를 따라서』, 96쪽. ^ 매일경제, “謝罪(사죄) 뜻 표명…誠意(성의) 보였다”, 1993.08.05. ^ ‘중대한(gross) 인권침해’란 국제법 규범을 위반하는, 피해자 숫자가 대규모이고 피해가 막대하며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의미한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1990년대 부상한 국제 전시 성폭력 이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에 근거해 그 불법성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재정의하고 법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 정대협,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3월 13일 자 지시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3.3.14. ^ 이효재·윤정옥·성봉희(정대협),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금증액”, 청원번호 150040, 1996.09.19. ^ 김수아(2000),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담론 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2014),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아카데미. ^ 이미경 의원 등 29인, 의안 번호 1393, 2001.12.31. 발의.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제161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 제5호」, 1993.5.17.; 매일경제, “군대위안부法案(법안) 명칭논란”, 1993.04.30. ^ 2017년 개정법부터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제11조의2). ^ 대통령비서실편집부(2006), 『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집 제3권』, 대통령비서실, 306쪽. 2005년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전면공개와 ‘한일협정문서공개를위한민관공동위원회’ 구성과 후속 대책 발표, 그에 따른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법 제정과 변화한 대일기조방침의 표명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 한일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합의검토태스크포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검토 결과 보고서」, 2017.12.27, 30-31쪽.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심적 접근’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 여성의 존엄과 명예의 회복, 상처 치유에 있고, 피해 구제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며, 정부는 피해자의 의사와 입장을 수렴해 외교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조시현(2012),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인도주의 문제인가?: 한·일 정부의 최근 입장에 대하여」, 『민주주의 법학』 49, 165-193쪽. ^ 여성위원회 심사보고서, 2005.6, 14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소송(2006헌마788, 201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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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오늘날 일본의 성 착취와 여성혐오에 맞선 콜라보(Colabo)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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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와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8년 전, 아유미는 절망 끝에 콜라보(Colabo)에 전화를 걸었다. 아유미는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쫓겨나 할머니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삼촌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했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아동복지센터 직원에게 삼촌에게 당한 일을 털어놓았지만 직원은 아유미를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센터는 아유미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부모의 말을 믿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아유미는 돈 한 푼 없이 도시를 배회했고, 성 착취의 쉬운 표적이 됐다. 도쿄의 밤 산업만이 소녀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지친 아유미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친구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했지만, 그중 한 명에게 속아 학교 교사들을 위한 난교 파티에서 매춘을 해야 했다. “처음 유메노 씨와 통화할 때 너무 힘들어서 큰 소리로 울었어요.” 아유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1] 아유미는 빈곤, 성적 착취, 노숙,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부재라는 깊은 심연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소녀들 중 한 명이다. 소녀들의 옷과 휴대용 통신 기기는 지난 수십 년간 변화를 거듭했지만, 곤경에 처한 소녀와 여성을 착취하는 성 산업은 변함없이 건재할 뿐 아니라 그 모집 방식이 더욱 교묘해지고 성 서비스는 더욱 다양해졌다. 성 착취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은 비단 업계 관계자와 소비자만은 아니다. 일본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방대한 공간과 자유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성 서비스는 고도로 상업화되었고, 소녀들의 가치를 성적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소녀들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기본적인 자기 존엄성마저 훼손되고 있다. 이것이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이다. 성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콜라보는 아유미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2011년에 설립된 콜라보는 성 착취와 성폭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소녀와 젊은 여성들을 위한 또래 조직으로 활동해 왔다. 2023년 2월, 필자는 웹진 〈결〉의 편집부로부터 콜라보에 관한 글을 기고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이에 흔쾌히 응했다. 콜라보에 대한 괴롭힘과 훼방이 날로 심해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콜라보와 설립자인 니토 유메노(Nitō Yumeno)에 대한 공격은 소름 끼치게도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최근 몇 년간의 반발을 떠올리게끔 했다. 필자는 먼 곳에 있는 콜라보의 작은 지지자이자 니토의 출판물을 읽는 독자에 불과하지만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여성혐오의 가공할 위력은 콜라보에 대한 추악한 부정주의와 왜곡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이 익숙한 데자뷔는 필자에게 잠 못 이룰 분노를 안겨 주었다. 콜라보의 사명은 단순명료하다. “우리는 모든 소녀들이 의식주를 누리고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회, 어려움에 놓인 소녀들이 착취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2] 니토와 콜라보의 도움으로 삶을 회복한 소녀들을 포함한 콜라보의 직원들은 이러한 소녀들이 처한 상황에 귀 기울이고,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또한 변호사에게 법적 도움을 구하며, 산부인과에 동행하고, 소녀들을 대신해 시의 관료 및 학교 관리자와 협의에 나서기도 한다. 대다수 공공 프로젝트와 달리 콜라보의 돌봄 활동에는 정해진 종료 시점이 없으며, 측정 가능한 결과에만 의존해 성과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공공 쉼터나 관공서에서 일반적으로 준수하는 엄격한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입소문으로 콜라보를 찾아온 많은 소녀들은 그 신속한 대응에 놀라워한다. 콜라보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소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 같은 분위기”나 “생존을 위한 팀” 등-를 제공하며, 무조건적이되 구속하지 않는 자매애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콜라보의 설립자인 니토는 이 소녀들의 큰언니이자 선구적 활동가이다. 그 역시 고교 시절 부모의 학대, 학교와의 단절, 성 착취, 자살 충동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경험이 있다. 니토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소녀들의 곤경을 더 큰 사회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농업 교사 겸 난민 활동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변화의 촉매제가 되었던 또 다른 사건으로 니토는 필리핀 여행을 자주 언급한다. 여행 기간 니토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10대 매춘부들을 찾아다니는 일본 남성들을 목격했다. 그는 2011년 지진 이후 미야기현뿐만 아니라 도쿄도에서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의 콜라보로 이어졌다.[3] 니토는 공개 강연과 저작을 통해 성 산업에 동원된 소녀들의 암울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4] 그는 소녀들을 노리는 모집책들이 어떤 수법을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이들이 왜 이런 남성들을 믿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매니저는 매우 친절했고 제 말을 잘 들어주었어요.” “모집책이 (성 서비스를 제공할 여자를 보내 달라는) 다음 콜이 오기 전에 단체 대기실에서 쉴 수 있다고 했어요.” 콜라보는 이러한 모집책들이 그래 왔듯, 길거리에서 소녀들에게 말을 걸며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소녀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탄생한 야간 버스 카페는 음식, 옷, 생필품이 갖추어져 있고, 성 착취 대상을 노리는 남성들에게서 안전한 임시 피난처가 되어 준다. 소녀들은 이곳에서 콜라보의 직원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니토는 콜라보를 ‘또래’ 단체로 운영하기 위해 세부적인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콜라보 직원들은 연대하려는 소녀들과 옷차림과 말투를 비슷하게 맞춘다. 보통 식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첫 상담에서 소녀들은 직원들이 “아동복지센터의 직원과는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니토의 유튜브 영상과 트위터 게시물에는 “きもい(징그럽다),” “うざい(짜증난다)” 등의 은어가 자주 사용되며, 이는 소녀들의 본능과 표현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콜라보의 직원들은 몰이해한 학교 교사들과 달리 소녀들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조언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콜라보는 소녀들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데, 다수의 소녀들에게는 단지 태어났단 사실만으로 축하를 받는 일조차 처음 겪는 일이다. 니토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콜라보의 활동은 ‘소녀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조차 ‘지원’의 한 방식으로 간주되는 현실이 답답하다.”[5] 이 소녀들에게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에 깊이 공감한다. 2016년, 소녀들은 일본군에게 착취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전시회인 ‘우리는 매매되었다(We Were Bought)’를 개최했다. 명품 가방을 원해서 중년 남성을 이용했다는 식의 흔히 퍼져있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소녀들은 고통받고 있다. 소녀들은 전시회를 통해 노숙, 학대, 따돌림, 성폭력은 물론 경찰, 교사, 아동복지센터의 방관, 손목 자해[6]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출판물을 살펴보면 소녀들은 사회적 담론을 내면화한 결과 “살아남기 위해 즐기는 척해야 했다,” “SM 섹스 플레이의 여왕이 되는 걸 목표로 삼기도 했다” 등의 증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위안부’ 여성들과 콜라보 자매들이 보여준 용기는 소녀들이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 학대와 성 착취라는 더 넓은 역사적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니토 유메노는 소녀들의 대변자로서 트위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녀들에게 스토커, 포주, 부모를 피할 수 있도록 소셜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소녀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한 니토는 온라인 여성혐오 공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니토가 주목한 문제 중 하나는 온천 휴양지 마을의 마케팅 전략이다.[7] 명백히 성적 대상화된 10대 초반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침대에서 깜짝 방문을 기다리고 있어요” 같은 노골적인 대사를 내뱉는 식이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인 성 상품화에 대한 니토의 강력한 비판은 안타깝게도 이를 무해한 환상과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으로 여기는 이들의 분노를 샀다. “급진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받고 있다”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남성들 중 일부는 지난 수년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니토와 콜라보에 대한 스토킹과 협박을 일삼아 왔다. 2022년 여름,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괴롭힘이 시작됐다. 이러한 괴롭힘을 주도한 히마소라 아카네(Himasora Akane)[8]라는 트위터 계정 소유자는 콜라보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과 웹사이트에 게재된 사진 및 데이터를 심각하게 왜곡해 지속적으로 계정에 올렸다. 예를 들어, 콜라보는 소녀들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월 생활비를 계산하고 있는 사진을 올리고, 141,000엔에서 163,000엔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히마소라는 소녀들이 해당 금액을 사회 복지 보조금으로 수령해 왔다는 인상을 주도록 자료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보조금을 불법으로 취득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또한 콜라보의 전체 연례 보고서와 도쿄도 위탁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비교하면서, 보고서 형식이 달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수치 차이를 공적 자금 남용의 증거로 지적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얼핏 보기에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일종의 운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콜라보 법률팀의 집계에 따르면, 히마소라 아카네는 2022년 7월 12일부터 11월 28일까지 불과 몇 개월간 콜라보를 공격할 목적으로 총 900건의 트윗(최소 17만 건 이상 리트윗)과 27건의 웹 포털(note.com) 게시물, 30건의 유튜브 동영상(조회수 1,198,181회)을 유포했다. 이 매체들을 통해 그는 콜라보가 소녀들의 사회 복지 보조금을 가로채고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처럼 부리며 공짜 노동력으로 사용하고 있고, 세금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끊임없이 날조했다. 2022년 11월, 그는 도쿄도에 콜라보 프로젝트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고, 그 결과 발표된 제3자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콜라보는 공적 자금을 횡령하기는커녕, 자체 자금까지 동원해 위탁 프로젝트를 완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감사 과정에서는 필수 제출 대상이 아니었던 추가 자료까지 검토되었지만, 히마소라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콜라보와 니토에게 저지른 짓은 명예훼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콜라보 법무팀[9]은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으로 콜라보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필요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끔찍한 결과는 트위터와 유튜브에서 여성혐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히마소라의 주장은 쉽사리 반박 가능할 정도로 허술했지만,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게시물을 열심히 퍼 나르며 ‘좋아요’와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타 케이코(Ōta Keiko) 변호사[10]는 말한다. “왜곡이 심할수록 관심과 ‘좋아요’를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유포됩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성혐오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히마소라는 계정을 통해 “당신(니토)이 모에에(萌え絵: 어린 소녀를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애니메이션 작화)를 태우는 짓을 중단하면 나도 멈추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괴롭힘이 온천 홍보 캐릭터에 대한 니토의 비판을 상대로 한 보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련의 혐오 운동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가담자들이 ‘페미니스트’로 간주하는 대상에 대한 반발을 실체화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콜라보의 실제 활동이 어떠했는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러한 운동은 날로 힘을 얻었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2023년 초, 선출직 관료를 포함한 다른 가해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여들어 콜라보를 소리쳐 비방하면서 이를 촬영하기 시작했다.[11] 콜라보는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들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확보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2023년 3월, 도쿄도는 ‘안전’을 이유로 법적 보호가 보장된 장소에서조차 버스 카페 운영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도쿄도는 콜라보의 기존 프로젝트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콜라보가 겪어야 했던 이 모든 역경은 비극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왜곡과 여성혐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와 지원자들을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돈벌이꾼으로 가스라이팅하는 패턴을 목도해 왔다. 우리는 눈앞에서 그런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나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콜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버스 카페에 모였고, 이들은 가해자들을 막아서는 보호벽이 되어 주었다.[12] 또한 도쿄도의 결정에 항의하고자 모인 여성들도 있었다. 니토 유메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4월에 다른 장소에서 버스 카페를 다시 열었다. 그는 말했다.[13] “버스 카페를 운영할 수 없었던 한 달 동안 임신한 소녀들에게서 많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한 달은 많은 소녀들에게 매우 길고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콜라보는 현재 전적으로 시민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기부 관련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14] 니토의 주요 저서 목록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Tokyo: Eiji shuppan, 2013.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니토의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www.facebook.com/yumenyan https://twitter.com/colabo_yumeno 콜라보 공식 웹사이트 및 소셜 네트워크 계정 https://colabo-official.net/ https://www.facebook.com/colabo.official 각주 ^ Nitō Yumeno ed., Atarimae no nichijō o teniireru tameni: seisakushu shakai o ikiru watashitachi no tatakai(평범한 일상을 위해: 성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투쟁), Tokyo: Kage shobō, 2023, 29-30. ^ https://colabo-official.net/projects-english/ ^ Nitō Yumeno, Nanmin kōkōsei: Zetsubō shakai o ikinuku ‘watashitachi’ no riaru(난민 고교생: 절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 Tokyo: Eiji shuppan, 2013. ^ 고도화된 대규모 성 산업은 미성년 소녀들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표면적으로 ‘여고생(joshi kōsei)’을 공공연히 성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관행을 조장하며, 이를 ‘JK 비즈니스’로 명명한다. 따라서 이들은 소녀들에게 교복을 입고 ‘관광객’을 접대하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콜라보는 약 5,000명의 청소년이 이러한 ‘JK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독자 없이 노래방과 같이 고립된 공간에서 고객들은 ‘옵션’으로 성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더욱 명백한 성 산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이들 중 다수의 소녀들과 이미 성인이 된 소녀들은 성 산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 Nitō Yumeno, Joshi kōsei no urashakai: “Kankeisei no hinkon” ni ikiru shōjotachi(여고생들의 암흑세계: 인간관계의 빈곤 속에 사는 소녀들),Tokyo: Kōbunsha shinsho, 2014. ^ Nitō ed., Atarimae, 6. ^ Nitō ed., Atarimae, 80-89. ^ https://twitter.com/colabo_yumeno/status/1460060377379602434?s=20 ^ https://twitter.com/himasoraakane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2/11/221129.pdf ^ https://colabo-official.net/wp-content/uploads/2023/01/cee5ab6bd71bcd6ccd475b2 ^ https://www.facebook.com/yumenyan/posts/pfbid029WTQHe2gJmHfcxDNVF5aJe6X5omapu8fz6a2dGyib6vJjThhrmQoP4ZwsQPbKf8Kl ^ https://www.kanaloco.jp/news/social/article-966619.html ^ https://www.jcp.or.jp/akahata/aik23/2023-04-21/2023042113_01_0.html#top ^ https://colabo-official.net/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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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논평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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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