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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2023년 논평 가닿지 못한, 그러나 확보해야 할 전쟁 경험의 말‘들’: 베트남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1심 승소 이후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다시,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의미를 소환하며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생존자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0년 4월 21일이었다. 3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의 지난한 변론을 거쳐,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 2월 7일,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의 ‘불법 행위’가 있었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재판부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전에 지났다는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2015년부터 현지답사와 공부 모임을 시작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의 몇몇 변호사들은 2017년에 관련 소송을 위한 TF를 꾸렸고, 그 과정에서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모델로 한,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는 못해도, 가해국의 구성원들이 꾸린 법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이 ‘가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과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민평화법정에는 퐁니와 하미 두 마을에서 ‘응우엔티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피해 생존자가 각각 증언대에 올랐다.  그 후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퐁니 마을 응우엔티탄의 원고 대리인단이 되어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여느 운동들처럼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 또한 사법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적 차원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잘 싸워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운동을 안온한 자리로, 응원의 자리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활동의 연속체적 성격을 가지고 변호사, 활동가, 연구자, 평화단체가 모여 ‘베트남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를 꾸렸고, 지금까지도 정보공개 청구, 청원서 제출, 국가배상소송,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진정, 특별법 발의, 판결문 번역 그리고 각종 공론장 기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민네트워크는 대표도, 직인도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서 20여 년간 국경을 넘나들며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며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번 1심 승소라는 판결을 확보하기까지, 대리인단의 변호사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정 ‘바깥’의 말들   법정 증언을 위해 피해 생존자 응우엔티탄과 목격자 응우엔쩌이 두 사람이 한국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진화위 위원장 면담을 비롯하여 여섯 시간 반이나 진행된 국가배상청구소송 증인 심문과 원고 심문, 국회 토론회, 80여 명이 모인 좌담회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응우엔티탄은 법정에서 한국 정부에 간곡한 ‘호소’가 아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쟁 관련 전시 내용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정이 큰 기쁨이자 숙원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거리만큼의 ‘곁’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들어야 할 말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피해 생존자의 말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비슷하게 들린다. 그것은 던지는 질문과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한결같았기 때문이고, 법정을 꾸리면서 사건 그 자체에 주로 집중해 왔기 때문에 들어야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에서의 당사자 발언만큼은 이런 의미에서 새롭다. 피해자 증언과 법정 구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참전군인 증언까지도 확보된 지금의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 사이에 고여 있을 수많은 말들은 제대로 길어 올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베트남시민법정 이후 2023년 실제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론장을 기획하며 ‘말의 자리’를 만들어왔다. 그 ‘말’은 피해 생존자나 목격자의 말,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 변호사의 말, 활동가와 연구자의 말,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에 태어난 이들의 말,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들의 말, 온 존재를 다해 비명을 지르는 땅과 바다와 강과 숲 그리고 비인간 동물의 말의 자리였다.  피해자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들리게 하는 활동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더 첨예한 논쟁이 필요하고, 이것이 당사자성에 ‘갇히지 않는’ 혹은 당사자성을 ‘확장해 가는’ 운동이 되기 위한 고민 또한 더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운동이 피해 생존자의 경험이나 말만을 ‘앞세운’ 운동이 되지 않을 때, 피해 생존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운동이 되지 않을 때, 다양한 말과 관계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려고 할 때,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가 그때-그곳을 겪어낸 존재들과 이어지는 운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난 ‘위안부’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혹은 유족을 베트남 현지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같은 해 4월에 개최가 예정되어 있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 확보를 위해 퐁니와 하미 두 마을을 방문하고, 사건 발생 장소를 돌아보았다. 마을을 방문하기 전날, 다낭의 모처에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하루 종일 증언을 들었는데, 먼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낯선 이들을 익숙하지 않은 도심의 공간에서 마주하고, 50년도 더 지난 피해 당시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리며 법정의 증언으로 ‘채택’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말을 해야 하는 화자들의 부담과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피해 생존자들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무엇보다 화자가 위축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이는 청자의 긴장감마저 녹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얘기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말하는 손주들이 떠들며 뛰어다녔다.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이 준비된 거실에 둘러앉아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육하원칙에 따라 질문을 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갑자기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법정에서는 쓸모없는 말이겠지만, 피해 생존자들은 비극을 겪고 난 후 비참한 시간만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을로 하나둘씩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누군가는 남의집살이를 하고, 누군가는 국수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뒷마당에서 닭과 돼지를 키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을 할 때와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낸’ 이야기를 할 때, 화자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재판을 위해 청자가 꼭 들어야 할 말들은 화자가 하고 싶은 말들과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 말들의 어긋남 속에서 법정 바깥으로 밀려난 경험들을 놓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 피해 생존자에게 들은 말을 청자들에게 미처 전하기도 전에 통역사가 울어버린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화자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함께 울어버린 순간, 피해 생존자가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노라며 곰방대를 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당당하게 학살 이후의 삶을 말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안는 화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순간…. 현지에서 마주했던 ‘통역 불가능한 순간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청자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를 고민케 했다.    또 하나의 학살지 하미 마을 이야기 – 진실을 회피하는 자는 누구인가 또다시 현지를 찾아가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것은 2023년 2월이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엔티탄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1심 승소 판결 소식이 베트남 사회에 전해진 직후였고, 하미 마을의 위령제가 열리는 때였다. 승소에 대한 커다란 기쁨 속에서도 또 다른 학살지 하미 마을의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화위에 제출한 진정은 조사 개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에,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며 당사자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퐁니 마을과는 달리 법정에 제출할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에 실제 법정을 꾸리지 못하고 진화위 진정을 냈던 하미 학살. 그러나 하미 마을 사람들은 퐁니 마을의 승소 소식을 전해 듣고, 사법적 해결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평화법정, 청와대에 낸 청원, 실제 소송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만’ 있지 않았다. 시민평화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갖는 시도였고,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게 된 계기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러 지면과 보도를 통해 퐁니의 응우엔티탄과 하미의 응우엔티탄으로 대표성이 각인된 피해 생존자 이외에도, 하미의 응우엔티본 등 새로운 화자들이 등장해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응우옌티본을 포함한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진화위에 하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진화위는 2023년 5월 25일,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절차를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2라-12544).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까지 진화위가 조사하는 것은 법률이 정한 조사대상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 발생한 사건’이니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는 진화위의 기괴한 의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범죄를 방조하겠다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태만’에 다름 아니다. 진정 신청인 중 한 명인 응우엔티탄은 진정을 접수하고도 일 년 넘게 ‘침묵’을 이어온 진화위에 보낸 서신에서 ‘조사할 용기’를 내 달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 정부에게 베트남전쟁 때 자행된 학살의 조사 개시는 ‘용기’까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재판과 진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온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과 김남주(법무법인 도담)는 “진화위 관련 법률에는 외국인을 조사범위에서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인권침해가 일어난 지역이 ‘외국’이라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제하는 조항도 없다”며 “진화위가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유를 근거로 들어 부당하게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결국 피해 생존자들은 시민네트워크의 조력으로 지난 7월 19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1872).    1심 승소 판결 이후, 판결문 번역과 ‘민’들의 공론장  1심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한동안 피해 당사자들은 한국어로 쓰인 판결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인정되었는지,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 용기를 낸 증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네트워크에서 판결문 번역을 위한 모금을 했고, 693명의 응답으로 번역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판결문은 베트남어,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 국제기구에 전달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1심 승소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갈렸다. 승소 판결 열흘 후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장병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된 것은 전혀 없다”며 “국방부는 거기(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고, 3월에 한국 정부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의 판단은 국가적 차원에서 말 그대로 대대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출된 항소이유서는 자그마치 126쪽에 달한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 이후로 20년이 넘도록 ‘유감’이나 ‘마음의 빚’과 같은 권력자들의 애매하고 비겁한 표현 이외에 한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죄는 없었다.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열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적(功績)이 없는 죽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정부가 항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매우 유감”이라며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승소 판결 이후, 시민네트워크의 기획으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라는 공론장이 열렸다. 홍보를 위해 처음에 만든 웹자보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판결문, ‘시민’들의 언어로 읽고 말하다’였다. 논의를 거쳐 최종안에서 ‘시민’을 ‘민’으로 수정했는데, 전쟁 자체가 국가주의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고, 국민으로 동원된 피해/가해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민’으로 테두리 쳤을 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을 더 이상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쟁을 경험한 존재들을 국가나 국경에 가두거나 인간으로만 범주화해서 논의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생겨났다.     사실, 누군가 겪은 피해 경험을 판결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가해 경험 또한 그러하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증언’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못하는 경험들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판결의 법적 내용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의 언어 너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동의 언어를 벼려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어떤 동시대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응우엔티탄의 승소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에서의 가해 경험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며 공유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용기를 낸 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만이 아니다. 가해 집단에 속한 참전군인 R의 증언 너머,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병사들의 수많은 말과 마음들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피해의 경험들도 있다. 41쪽의 승소 판결문을 함께 읽는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낯선 법의 언어 속으로 뛰어들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법정 투쟁만이 아닌 방식의 담론과 운동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가까스로 확보한 가해경험과 가해구조에 대한 논의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 자리나 위치의 효과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가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회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거기에는 연루와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책임을 진답시고 죽어버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지만,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회성의 결여를 뜻한다. ‘가해자’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1]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 방청하던 법정을 나오자마자 증인 심문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 준 참전군인 R에게 소식을 전했다. 시민평화법정 때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만나 온 시간들이 떠올라,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홉 번의 변론기일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날은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했던 2021년 11월 16일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최초로, 참전군인이, 가해 관련 증언을 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했던 바로 그 참전군인 R이다. R은 묻는 말에 대답해야 했고, 재판에 필요한 말을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전쟁 경험이 온전히 말해지는 장(場)이 될 수 없었다.  R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때 증언을 하고 나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 자신의 경험에 뒤늦게, 그러나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병사들이 전쟁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서 언어화하지 못한 채 긴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가해 집단에 속한 병사의 말은 전우회에서 말하는 무용담과도, 법정에서의 증언과도, 보훈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하는 말과도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것은 어쩌면 청자에게 ‘새로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장(場)을 요청하는 말들이 아닐까. 참전군인의 전쟁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도 있다.  병사들의 증언은 어떤 청자들을 요청하고 있을까.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참전군인의 증언이 있던 날,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성미산학교 은결은 판결을 앞둔 시점에 열린 공론장 〈법정에서 못다한 이야기〉에서 “‘감정’을 통해 재구성되는 전쟁”을 말했다. 은결은 아카이브평화기억과 성미산학교 포스트중등학생들이 1년간 해온 참전군인 구술작업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는 우선 ‘감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을 겪은 이들의 감정은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에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도 감정은 배제됩니다. 감정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며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특히 법정에서는 이 감정의 언어들이 삭제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참전군인들은 저에게 감정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밤엔 코코아를 마시며 위안을 얻었다’ 같은 것들. (…) 전쟁과 관련한 감정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저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은 원래 흔들리고 엉키며 복합적이니까요. 그렇기에 감정을 통해 재구성하는 전쟁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감정으로 구성하는 전쟁은 이익과 손해, 피해와 가해, 규정되는 것만을 판단의 근거, 기준으로 삼으며 구성하는 전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고 훨씬 다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안전한 자는 없기에 우리는 전쟁의 영향을 받는 많은 이의 삶을 살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이나 강제로 동원된 소수민족과 비인간존재들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외교’ 문제로만 다뤄져서도 안 된다. 한명 한명의 목숨, 애도받지 못한 죽음, 살아남은 자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한 하미마을의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국군대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으로서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이자,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빨갱이인지 양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4.3의 폭력, “베트공인지 민간인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베트남전쟁의 폭력, “폭도인지 시민인지 구별이 안 돼서” 죽였다는 5.18의 폭력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국민화’를 거절하는 마음 - ‘민(民)’의 확장을 제안하며 민간인 학살에 국한해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젠더, 생태, 강제 이주, 공동체 소멸, 자살 병사, 장애의 양산, 재생산권, 참전군인, 남성성, 디아스포라, 소수민족과 비인간동물의 전쟁 동원, 에코사이드(생태학살), 파월노동자, 전범기업 등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공론의 장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을 언급할 때, ‘민간인’은 베트남 ‘국민’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놓쳐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미군에 의해 동원되었다가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학살당한 산악지대 소수 민족들의 죽음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에서는 애도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동원한 주체와 학살한 주체 각각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제껏 ‘비국민’의 학살 피해가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었던가. ‘1심 승소’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국민’의 전쟁 경험과 학살피해였다.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 가해 경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해에 대한 자각이 없으니, 아무리 피해를 말한들 들리지 않거나 남 얘기로 들린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자에게 화자의 말은 가닿을 길이 없다. 1심 재판을 참관하면서, 한국의 미디어와 여론이 피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만하고 무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가해 병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의 자리’와 ‘가해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각주 ^ 후지이 다케시가 2021년 4월 15일, 공론장 〈피해를 품은 가해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말하다〉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추천의 말

    심아정

  •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3부〉
    2023년 좌담 밝은 미래: 20대의 감각과 생각 〈3부〉

    제2차 세계대전기 일본군‘위안소’ 성노예 제도가 전쟁범죄로 공론화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생존자 증언과 법정 투쟁, 한일 외교 공방을 거쳐 역사 대중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20대 대학생들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와 닿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서울 소재 대학생 6명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지킴이, SNS 해시태그로 운동하는 세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이 영화와 소설로 ‘할머니’를 만난 사람들, 나비 배지와 추모 팔찌를 사고 모금과 기부를 하는 기념 산업의 자연스러운 소비자.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미래 주역으로 종종 호명되는 ‘청년’은 집합적 주체로 존재하는가? 그들을 만나보자.  -좌담 일시: 2023년 8월 16일  -사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학술기획팀 이헌미, 황진경, 정나라 -대담: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정리: 퍼플레이컴퍼니    Q. 정부 등록 피해자가 이제 아홉 분 생존해 계십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혜주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사과와 보상, 미래에 대한 약속이 이뤄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피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적 차원의 합의가 필요해요. 또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본이자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연 국가적인 대응이 미흡한 상황이잖아요.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한국 내에서 알아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아요. 피해자분들이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해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이 문제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대현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죠. 지금 한일 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라 어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생존자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일부러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민정 피해자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더 왕성하게 논의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우리 세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자분들과 대화하며 보다 가깝고 생생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는데 저버리게 되는 거잖아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완전한 해결이란 없다는 인식이 먼저 합의되어야 합니다. 일본이 사과와 보상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의견 나눔의 장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도경 피해자가 인정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남은 과제는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에요. 개인으로서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하고요.  심현희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비롯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문제를 통해 여성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Q.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내에서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등 다양한 여성운동을 비롯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 청년들이 계속해서 페미니즘과 ‘위안부’ 이슈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대학에서 어떤 배움의 장들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심현희 현대의 여성운동과 ‘위안부’ 문제는 성평등과 인권을 주제로 다루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대학에서는 관련 교육과 논의의 장을 제공해 학생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강대현 어느 순간부터 대학에서 사회 운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학생과 청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더 많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김도경 제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페미니즘이 금기시되고 일부는 부정적으로 보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배움의 장이 많아져야 합니다. 김민정 논의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페미니즘의 올바른 개념과 정의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강의가 확충되어야 합니다. 백래시 현상을 접할 때마다 암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과도기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사회적으로 진일보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텨내려고 합니다.  이혜주 낙태죄 폐지 등 페미니즘 논의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백래시로 인해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했고, 우리나라도 낙태죄 폐지 관련 법안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잖아요. 페미니스트라면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학교 여성학 강의에서 김현경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우울하고 불안한 이 시간이 절대적일 것 같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만 결국 백래시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고, 대학에 여성학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남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봤던 사안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거든요. 모든 학문에 여성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희연 한 남자 교수가 학생을 추행해서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공론화된 적이 있어요. 그 후 그 교수의 연구실에 비판의 메모지가 가득 붙었고요. 미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작년부터 백래시가 심해졌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그런지 올해 초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많이 생겼어요. 저도 새로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같이 책을 읽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나에게 00이다”라는 문장을 완성시킨다면 괄호 안에 어떤 단어를 넣으시겠어요? 이혜주 ‘붉은색’이라고 넣어보고 싶어요. 빨간색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운동이나 혁명에 흔히 사용되는 만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색이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 문제가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김희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저의 ‘평생의 연구 과제’입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대하고 싶어요. 역사학도로서 가져가야 할 큰 숙제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도경 ‘숙제’인 것 같아요. 때로는 하기 싫고 미루고 싶지만 숙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잖아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돼 좌절감도 들지만, 그럼에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심현희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사명’입니다. 역사적으로 희생된 피해자분들의 고통과 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연대하겠습니다.  강대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가진 본질과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객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민정 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기억’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늘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인류사에도 중대하게 기억될, 특수하면서도 만연한 여성 대상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이 전 지구상에서 근절될 때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잊혀서는 안 되며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되는 기억이어야만 합니다.  

    강대현, 김도경, 김민정, 김희연, 심현희, 이혜주, 웹진 <결> 편집팀

  •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 이금주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2023년 논평 물러설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 이금주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물으며 오랫동안 소송투쟁을 벌여왔다.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도 지난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길에 이금주라는 한 여성이 있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으로 광주천인소송 등 다양한 강제동원 관련 소송을 이끌었던 이금주. 그녀의 일생을 담은 책 『어디에도 없는 나라』[1]를 통해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운 한 여성의 불굴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명분과 신념이 확고해도 계속 지기만 할 때, 우리는 지친다.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분과 비탄의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멋있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거듭되는 패배를 겪으면서 자포자기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정의와 원칙의 기준이 모호해질 때마다 명분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된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이하 이금주로 표기)의 평전을 읽으며 명분 있는 패배를 끝내 명분 있는 승리로 이끌어낸 한 여성의 투지에 큰 용기를 얻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금주가 69세부터 102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1920년에 태어나 2021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 이금주는 69세 되던 해인 1988년에 태평양전쟁희생자 전국유족회를 발족하고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게 된다. 1942년에 이금주의 남편은 일본 해군 군속으로 남태평양 타라와섬에 강제 동원되었고, 이듬해인 1943년에 사망했다. 해방 후 교사로 근무하며 성당에서 프란체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금주는 69세부터 운동가의 삶을 걸었다. 그는 마치 싸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유족회를 빈틈없이 운영했다. 교사 시절, 그리고 성당의 행정 업무를 맡아보던 시절부터 이금주는 “기록의 달인”이었다. 일기는 물론이고, 이사회 내용 및 지출명세서 등을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모두 받아 적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축적되자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93년에 1,273명의 원고가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고인단은 일본 사법부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원고가 천 명이 넘는다고 해서 ‘광주천인소송’[2]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고 수가 천 명이 넘는 만큼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하지만 이금주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리 1,100명의 재판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올 2월 17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기까지 꼭 11개월 걸렸습니다. 그동안 무지에서 나오는 모략과 질투, 명예 훼손 등은 어처구니가 없고 구역질이 났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목적지만을 바로 보고 백절불굴의 의지와 강한 결심으로써 다른 지부에서 안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금주는 회원 가입 신청, 소장 작성, 위임장 작성, 소득증명 서류 작성 등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재판이 지연되는 상황을 회원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1994년 3월에 첫 공판이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5년에 이금주는 또다시 회원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보니까 안 줄 것 같다’, ‘언제 끝날 것인가, 너무 지루하다’, ‘속았다. 포기하자’ 등등입니다. 우리 대답은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하자’는 것입니다. 줄 것 같으면 왜 우리가 싸울 것입니까? 이 재판이 지방재판소에서 끝나면 고등재판소로 가고, 고등재판소에서 끝나면 일본최고재판소까지 가서 투쟁한다고 하시오. 일본 변호단은 우리 1,100명이 인지대도 내지 않고 무료 재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 원고 피해자들이 재판 걸어놓고 물러서거나 포기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시키시오.” 이금주는 처음부터 이 싸움이 얼마나 험난할지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안 줄 것 같으니까 계속 투쟁한다”는 말 속에 이금주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싸움은 한판 승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금주의 말은 옳았다.  도쿄지방재판소는 1998년에 광주천인소송을 기각했고, 1999년에는 BC급 포로감시원 소송[3]을 기각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금주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을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아사히(朝日)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일본 여론에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 사법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1999년에 일본 도쿄고등재판소는 광주천인소송 항소에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금주는 2000년에 일본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광주천인소송 상고는 각하되었다.    연이은 패소에도 이금주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곱 건의 소송을 치르며 열일곱 번 기각당했다. 긴 세월 이금주와 피해자들이 겪은 좌절과 패배의 고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금주는 소송을 처음 제기하면서 동지들에게 외쳤던 “계속 투쟁하자”는 그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운동가였다. 2012년 피해자들이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때도 피해자들을 도우며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목적지만을” 보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최종 승소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이금주는 99세였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의 작가는 “열일곱 번 문을 두드려 열일곱 번 기각당하는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할 수 있었을까?”라는 말로 이금주의 투쟁을 승리의 역사로 기록했다.  더불어 이금주가 “온기 없는 냉방에서 새벽부터 온종일 붙잡고 씨름해 작성한 각종 기록물”의 가치를 역설했다. 광주유족회를 운영하며 이금주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직접 작성한 노트들과 발품을 팔아 모은 관련 자료들이 현재 보존 장소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평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진다. 이금주가 남긴 역사적 자료들이 더 이상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즉각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각주 ^ 송경자 지음, (사) 일제강제동원시민 모임 엮음, 선인, 2023 ^ 1992년 2월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제 당시 노무자·군무원으로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과 근로정신대 및 징병 희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대규모 집단소송.  ^ 일제 말기 동남아시아에 강제 동원되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전후 행해진 연합국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그 전범 피해자와 유족들이 1995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대신하여 전범으로 처벌받은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미지급한 임금의 지급 등을 요구하였다.   

    장영은

  •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2023년 논평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BTS 원폭티셔츠’ 논란과 전개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방송국 TV 아사히(テレビ朝日)는 생방송 전날 밤 BTS의 출연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BTS의 멤버 지민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미지와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란히 실린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이례적인 출연 취소의 배후에는 재특회[1]를 중심으로 한 넷우익이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BTS와 나치의 동질성까지 주장하며 BTS를 미국의 강성 유대인 단체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BTS 국내 팬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원폭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티셔츠 착용에 일본인의 원폭 피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방송의 취소 이유가 단지 티셔츠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외 팬덤을 겨냥한) 설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일본 넷우익의 고발로 글로벌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개입하기 시작하자 BTS는 자칫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일본 넷우익이 BTS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를 파헤치면서,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 자리에 놓고 침략 전쟁 주체로서의 과거를 외면해 온 일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점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에 관한 정보들이 팬덤 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교육되면서, 티셔츠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기억의 복원과 소통: 아시아 팬들의 전쟁 기억과 증언  팬덤 내 담론의 초점이 바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 의해 점령된 아시아 국가 출신 팬들은 가족으로부터 들어 온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증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사이판을 비롯한 태평양 섬들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가장 잔악한 짓은 미국이 이겼을 때 항복을 거부하고 사이판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식인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사이판 여성들 중에도 강제로 위안부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X(구 트위터) “나는 필리핀인이고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배웠다. 여성뿐만 아니라 위안부 역할을 하는 게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년간 점령했지만 그 기간 동안 약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X(구 트위터) BTS 팬덤이라는 초국적 공동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피해국이었던 아시아권 국가의 팬들이 집단적으로 증언에 나서게 된 상황은, 개인들이 기억을 언어화함으로써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서 도외시 되어 온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실천적 효과를 낳았다.    기록으로 연대하는 기억정치의 장: 백서 프로젝트  기획사의 입장문 발표로 티셔츠 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전 세계 5개 대륙의 20여 명의 BTS 팬들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원폭 티셔츠 사건에 대한 105페이지 분량의 백서를 작성했다.[2] 이 백서는 사건이 불거진 배경과 한일 간의 역사·정치적 맥락을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나아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논란에 대한 반응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한국, 일본, 그 밖의 글로벌 팬덤의 내부 반응을 보여주면서, 사건에 대한 국가별 언론 보도를 검증했다.    BTS 팬덤에 의해 발간된 이 백서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팬덤이 백서의 발간을 통해 국가 간 역사 기억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 팬덤은 BTS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만 하지 않았으며, 글로벌 스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면서 이와 연루된 모든 주체들의 세계 시민으로서의 문화적 민감성을 되돌아볼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백서를 간행하면서 국가 간 역사 및 문화 교육의 불균형과 그 해소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컨대 아시아인들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반면,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중에 벌인 잔학행위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할 때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번 티셔츠 논란을 통해 팬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티셔츠 논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보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팬덤의 역사 인식과 수행적 실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활동은 적극적인 역사 인식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전쟁 피해에 대한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팬덤이 특히 충격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목록을 서로 공유하고 이에 대한 감상평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국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대한 기부로 이어져, 약 300여 명의 해외 팬들이 ‘나눔의 집’에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위안부 이슈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보며 알게 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됐다. 다큐를 보면서 한국 여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도 위안부 동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X(구 트위터) “나는 54세이고 이번 BTS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의 세계사 시간에도 일본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 세계에 ‘들려야’ 할 필요가 있다.”(X(구 트위터)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밑거름 삼아 뻗어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망은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에게 자행된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BTS 팬덤에게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팬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으로 상품화되는 현대의 젠더 구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며 해당 문제에 공감하였다.  오늘날, 팬덤 문화는 전지구화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팬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문화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뿐 아니라 팬덤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풀뿌리 담론의 활발한 생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BTS 원폭 티셔츠 논란은 팬덤 내에서 자칫 한일 양국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치환될 수 있었으나, 글로벌 여론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과 전쟁 중 여성폭력에 대한 공감대가 초국적 팬덤 내부에 형성됨으로써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팬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가 기억 정치를 수행한 실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각주 ^ 재특회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반외국인 정책, 특히 혐한 기조를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이다. 초대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대표적 넷우익 인사로 2016년 일본제일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 White Paper Project 혹은 백서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해당 문건은 영어와 한국어로 기술되었으며 다음의 URL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https://whitepaperproject.com/ko.html

    이지행

  •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024년 에세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1부> 우리 일상과 접촉면이 넓은 미디어, 그만큼 상호 영향의 진폭이 크고 깊다.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시 새롭게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시작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연다. 개봉 후 328만 명이 볼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울림을 주는 좋은 영화'라는 평까지 받은 「아이 캔 스피크」는 '생존자'인 동시에 '목격자'로 증언하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서발턴의 말하기, 피해자를 제외한 가해국 간 사죄와 사면이라는 불편한 퍼포먼스 등 '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자극한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김현석 감독이 연출해 2017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던 주인공 '옥분(나문희 분)'이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해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시장 상가에서 수선집을 하는 옥분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편, 불법 사항을 신고하는 '도깨비 할매'. 아무리 동네를 위한 일이라도 그녀가 넣은 민원만 8,000여 건에 이르다 보니 구청 직원들에겐 '블랙리스트'요, 한 번이라도 신고를 당해 본 상인에겐 껄끄러운 이웃이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이 넣은 수많은 민원을 처리하는 구청 공무원이다. 영화 전반부는 공동체의 문제를 법(민원)으로 해결하려는 옥분과 권력의 편에서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구청 공무원 민재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어'로 증언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그러나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지고,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된 친구 '정심(손숙 분)' 대신 미 의회 증언에 나서게 되자 민재는 누구보다 든든한 옥분의 서포터가 된다. 옥분은 민재와 함께 '영어로'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옥분이 국가에 '피해자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일본군의 전쟁 범죄 증언에 앞서 '자기 증명'부터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의 도움으로 급하게 피해자 등록을 마친 옥분은 '위안부' 피해 당시 정심과 찍은 사진을 들고 미 의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국가의 보증(='위안부' 피해자 등록)도 물적 증거(=사진)도 아니다. 청중의 주목을 이끌어 낸 것은 옥분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 즉 흉터였다. 옥분이 '살아있는 증거'로서 자기 신체를 드러내 보이자 장내는 숙연해진다. 마침내 옥분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말하기 시작한다. 옥분: 일본군들이 내 몸에 새겨놓은 칼자국과 낙서요. 내 몸엔 이런 흉터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이 한없이 되살아납니다. 증거가 없다구요? 내가 바로 증거예요. 여기 계시는 미첼이 증거고, 살아있는 생존자들 모두가 증겁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을 때 내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소, 열세 살. 나는 죽지 못해 살았소.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I'm standing here today for those young girls. Their childhood was stolen away by the crimes of the Japanese army. We must remember those girls and the pain that they lived through. Japan committed crimes against humanity. But there has been no sincere apology for the 'Comfort Women' issue. (중략) We are not asking for too much, just for you to acknowledge your wrong doings. We are giving you the chance to ask for our forgiveness, while we are still alive. “I am sorry.” Is that so hard? (자막: 나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소녀들이 겪었던 고통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용서 받을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강조-인용자, 「아이 캔 스피크」 1:43:43~1:47:46)   증언의 두 겹, '생존자'로서 말하기와 '목격자'로서 말하기 옥분의 증언은 둘로 구분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한 번은 한국어로, 또 한 번은 영어로 발화된다. 그런데 여기엔 단순히 언어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로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 곧 '생존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어로 발화된 증언에서는 일본군의 범죄에 의해 유년을 빼앗긴 소녀들을 '대신'하고 있음을 밝히며 시작한다. 더하여 영어 증언에서는 옥분의 목소리에 병상의 정심이 오버랩되어 옥분이 정심을 '대신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옥분은 위안소 범죄를 겪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로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대신한 '목격자'로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라틴어에서 '증인'에 해당하는 말이 두 개 있음을 지적했다. 첫 번째는 'testis'로 영어의 'testimony(증언)'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이는 두 당사자 간 재판이나 소송에서 제삼자의 위치에 있는 '목격자'를 가리킨다. 두 번째 말은 'superstes'로 어떤 일을 끝까지 겪어낸 사람, 어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 즉 '생존자(survivor)'를 의미한다. 관련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말한다. 본디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중립성의 결여로 인해 재판을 위한 사실 입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거니와, 무엇보다 절멸 수용소의 폭력에 대해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자는 그곳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는 '온전한 증언자'가 되지 못한다.[1] 한편, 증인에 대한 아감벤의 고찰은 젠더-권력의 차원에서 한 번 더 해석될 필요가 있다. 라틴어 testis는 '목격자' 외에 '고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2] 법적 용어로서 증언(testimony) 또한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남성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증언 선서를 할 때 고환에 손을 얹었다고 한다. '증언'은 객관적 사법 장치라 여겨지지만, 어원적으로 보건대 거기엔 이미 '남성' '시민'이라는 젠더-권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의 자리에서 '위안부' 생존자는 이중의 곤경에 처한다. 절멸 수용소에서 폭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거나 살아 왔더라도 온전히 말할 수 없게 된 자들이라 한 프리모 레비의 지적처럼, 살아남은 자로서 진정한 증인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윤리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한편, '증언'이라는 말 자체에 기입된 젠더-권력을 염두에 두면 하위 주체인 '위안부' 생존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난관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옥분은 의회라는 미국의 국가 장치에서 증언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옥분의 증언이 '지배자'의 언어로, 즉 반공블럭 형성을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전후 해결을 어렵게 한 미국의 개입을 은폐하는 한에서, 동시에 냉전 체제가 만든 '한국-미국-일본' 동맹이 허용하는 한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옥분은 신체에 새겨진 상처로서, 즉 '생존자'로서 자기를 증명했지만 곧이어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할 것을 자처하였다. 이때 자기 증명을 위한 생존자로서 말하기는 피식민의 역사를 간직한 모국어를 통해 발화되지만, 목격자로서의 증언은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발화된다. 옥분은 '목격자(testis)'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지배 체제의 언어(=영어)'를 구사함으로써 '증언(testimony)'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내 그려진 '위안부' 생존자의 영어 배우기는 '서발턴(subaltern)'의 지배 언어 배우기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는 중층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옥분은 지배 체제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지배 체제에 종속되거나 타협하게 된다.    서발턴 말하기의 전략·타협·종속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의 역학 관계 안에서 부침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민재가 옥분의 피해자 등록을 서두르기 위해 구청장을 설득한 논리는 '위안부'문제 범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구청장의 정치적 이익이었다. '위안부' 운동이 현실 정치와 관계 맺는 한, 정치 진영과 담론 자장 안에서 길항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서발턴은 타협과 협상을 통해 말하기 장소를 확보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서발턴의 말하기는 언제든 지배 담론에 의해 포획되고 굴절될 위험에 노출된다.  문제는 이처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역학 관계들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소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옥분이 하원 의회에 입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그녀의 양쪽에 늘어선 두 진영-정의를 연호하는 시민단체와 욱일기를 든 사람들-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분법적 적대관계는 옥분의 언어 구사 양상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한국어와 영어는 증언의 언어이지만, 일본어는 적국의 언어로 정확하게 나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미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을 제기한 실존 인물 '마이클 혼다' 의원이 영화에서는 '마이클 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화한 마이클 혼다 의원에게서 '혼다'라는 일본계 정체성을 지움으로써 '위안부'문제를 '한국-일본' 양국의 적대적 관계로 단순화한다. 이 구도에서 불완전한 전후 처리를 주도한 미국의 행위성은 누락되고, 오히려 '심판관'의 위치를 또다시 부여받게 된다. 가장 문제적인 '타협'은 옥분이 '법적 배상'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분은 일본 정부에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생존자들이 살아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 단체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법적 배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은 강제성이 없고, 보상 규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물론 결의안은 '위안부' 제도가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당시 일본 관헌의 '직접 개입'을 부정하던 아베 내각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의안은 또 “일본 황군이 '위안부 여성'으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것에 대해 명백하고도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며, 역사적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후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미국 의회의 입장 표명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은 피해자들이 일관되게 요구한 '법적 배상'을 누락한 한계 또한 분명하게 지닌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국제 관계와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법률적 차원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여성인권의 추구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유리"[3]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윤리적 차원이 법적 배상 없이 달성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제스처는 순전히 사법적인 것이지 윤리(학)적인 것이 아니”[4][5]다. 즉 '위안부'문제를 법률적 층위가 아니라 윤리적 층위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법적 책임을 '사면'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옥분의 실제 모델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가 '결의안 통과에 관한 성명서'에서 다시금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formal apologies and legal reparation)”을 촉구한 것은 매우 적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윤리가 사법적 책임을 상쇄하는 기묘한 굴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는 공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부 내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법에 호소했던 옥분이 정작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지 않는다.  영화의 더 결정적인 문제는 피해자의 핵심 요구를 누락하였음에도 그 호소에 미국이, 그리고 전세계가 '공식 인정'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옥분은 지배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미-일 우방이라는 국제 관계를 해치지 않는, '사법'이 아닌 '윤리'의 영역 안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영화는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전달한 것처럼 재현해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증언을 마친 옥순은 마침내 위인들의 동상으로 둘러싸인 의회 건물에서 미국 의원들에게 사과와 경의를 받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의 복권이라는 보편 가치가 '미국 정신'에 둘러싸여 실현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마는 것이다.    가해자를 사면하는 '보편 윤리'를 넘어 2007년 4월 말, 미국을 방문한 일본 아베 총리는 대통령 부시에게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를 표명한 바 있다. 이 사과는 일본과 미국 양쪽 언론 모두의 비판을 받았는데, 당시 계류 중이던 '위안부' 결의안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사과 대상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를 '수락'한다는 미국 대통령의 답변이었다. 피해자를 제외한 채 '미-일' 양국 수반이 사죄와 수락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실 정치의 모순적인 장면은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증언을 마친 후 옥분은 청중에게 인사를 받고, 더하여 자신을 의심했던 이들로부터도 사과를 받는다. 그러나 한 아시아계 인사는 끝까지 옥분을 모독하고, 이에 옥분은 일본어로 일갈한다. 옥분의 응수로 인해 그 아시아계 인사는 일본인으로 특정된다. 앞서 아베와 부시의 '사과와 수락'이 피해자를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면,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은 가해자를 제외한 채 피해자의 명예회복으로 나아가려는 듯하다.  두 장면을 함부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은 공히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미국화'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해자는 피해자 대신 미국에 사과를 하며, 피해자는 가해자 대신 미국에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미국은 '가해-피해' 갈등 구도 바깥의 '심판관'으로서 혹은 '보편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책임이 있는 하나의 주체이지, 결코 이 문제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양국이 연출한 영화/정치적 퍼포먼스는 정반대 편에서 미국을 특권화하며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사면한다. 뿐만 아니라 '보편 윤리'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의 사법적 책임을 더 이상 촉구하지 못하는/않는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한계가 「아이 캔 스피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에서 공론화되는 '위안부'문제를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미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일 것이다.        각주 ^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p. 22, 51.  ^ Robert K. Barnhart Ed., The Barnhart Dictionary of Etymology, H.W. New York: Wilson Co., 1988, p. 1129. ^ 조양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대외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6, 2008, 한일군사문화학회, p. 73. ^ 아감벤, 앞의 책, p. 30. ^ 아감벤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 동안 아이히만의 변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논법, 곧 '아이히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사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도덕적 책임 감수는 사실상 법률적 유죄를 상쇄하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아감벤은 “유죄나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때로 필요한 일일 수 있지만) 윤리(학)의 영토를 떠나 법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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