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 게시일2024.07.09
  • 최종수정일2024.08.06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3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국제법의 맥락에서 중국의 전범 재판 읽기

🧶 심아정 : 국제법의 맥락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전범 재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읽기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진 방식일텐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전범 재판 사례는 전쟁 범죄나 용서와 화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시현 : 국제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단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포로를 귀환시켜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국제사회에서 1949년 출범한 '신중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국가들이 많았고, 연합국의 정식 일원도 아니었고, 또 일본과 정식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본군 포로들이 억류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한 압박이 있었는데, 당시 서구에서 얘기했던 국제법이나 인도주의를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보면 군인들 대상 교육에 국제인권법, 인도주의법의 핵심이 다 담겨 있었고, 오히려 더 나아간 부분도 있어요.

그중 하나가 강간을 금지하는 것을 중시했던 점이에요. 아까 여성의 자리가 어디에 있냐고 말씀하셨지만 공산군들은 강간을 주목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흔히 서양에서는 제1차 대전부터 강간이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지만 저는 대명률이나 당나라 법률에서와 같이 동아시아에서는 전근대 시대에 이미 강간을 중요 범죄로 취급하고 법률로 처벌해왔던 전통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런 전통은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간 방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강간=나쁜 행위'라는 규범 인식은 이미 있었고, 병사들한테도 다 주지가 된 사실이잖아요. 그런 법의식과 자기 행동과의 엄청난 괴리가 있는데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죄의 인지 과정에서 과연 그런 괴리가 바뀌어 나갔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면은 이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음으로 김수용 선생님이 제기한 전범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요. 저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있고 그 다음에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인민(people)이라고 얘기해 볼 수 있을 텐데, 인민이 만든 게 나라니까 국민 주권적인 관점에 따르면 재판소에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국가가 만든 재판소에. 문제는 '공산 정권'이 갖고 있는 사법 체제에서 재판을 받은 거잖아요. 아직 국교가 회복되지 않는 단계에서. 어쨌든 일본이 봤을 때 중국은 국가로 승인 받지 못한 거죠. 국가가 아닌 사람들이 일본군을 전범으로 재판했고, 그 전범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요. 당시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을 전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환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고 자국민이니까 당연히 인도적으로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범 재판은 꼭 국가재판소만 하는 거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중국 인민 일부가 적어도 국가로서 인정을… 그들이 세운 정부와 법원이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 법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재판을 했잖아요. 그것은 결국 인민들에 의한 처벌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정당화 근거를 찾는다면 그렇게 얘기해 볼 수 있겠죠.

중국도 전범 재판을 했다는 것은 국제법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해서 실천에 옮긴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텐데, 전범을 교육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국제법 법전 어디에도 전범 교육에 관한 내용은 없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교화형이라는 기본적인 형벌 사상을 갖고 있죠. 그걸 전범한테 투영하니 이런 작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국제법에서는 전쟁 포로를 붙잡아다가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세뇌 교육을 해도 된다는 말은 없어요. 이건 오히려 심한 경우 전쟁법 위반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죠. 그러니까 중국 정부는 국제법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반 혐의라고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국제법을 조금 더 발전시킨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범자의 범죄행위를 처벌해야한다는 게 전쟁 범죄 처벌 사상인데 사람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 그야말로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엄청나게 새로운 철학인 거예요. 전쟁 범죄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사죄의 의미나 용서 등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 있죠.

🧶 김수용 : 중귀련 회원 대부분이 소련에서 5년간 있다가 중국으로 넘겨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소련에서는 노동을 통한 교화였어요. 독일군 포로, 러시아 혁명에 반대했던 반혁명자, 일본군 포로들도 그 교화의 대상이었는데, 강제노동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해요. 열악한 환경이나 추위에 의한 사망도 많았고요. 그래서 소련에서 시련을 겪다가 귀환한 사람들의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의 대표적인 '피해서사' 중 하나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이송된 일본인 전범들은 시베리아 억류자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6년간은 교육, 교화를 받은 거죠.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들과 시베리아 억류 경험만 있는 사람들의 귀환 이후 행보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말하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죠.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시베리아 경험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일소중립선언을 위반한 소련의 잘못이고,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관동군특종연습' 같은 준비를 하며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했기에 일소중립선언 위반이 소련의 일방적인 잘못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따라서 자신들을 완전한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고 해요. 피해자 서사와 결이 다른 그 부분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의 개조와 사죄

🧶 이슬기 : 사회주의 인간상에서는 집단을 중시하고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까닭을 인간이 어떤 구조에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본다고 가정한다면 전범들의 행위를 개인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라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즉 개개인의 죄로 접근하지 않고, 각각의 전범은 일본이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 개개인이 저지른 죄를 밝힘으로써 일본이라는 전범 국가가 저지른 죄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이들 전범에게 사상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전범들을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거잖아요.

이들의 자필진술서를 볼 때 위화감을 느끼는 까닭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나와 분리된 과거의 나에 대해 비판을 수행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할 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는데, 예외적으로 이번에 우리가 본 중국의 전범들의 경우 성공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중귀련 활동을 보건대 인죄가 단순한 요식 행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 귀환 후까지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어쨌든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저도 흔치 않은 성공 사례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난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원인을 생각해보면 수형 생활 이후 전범들이 중국을 떠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수형 생활의 기억을 가지고 계속 살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만약 중국에 계속 머물면서 문화대혁명을 겪고 중국인들처럼 어려움을 겪었다면 전범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아까 김수용 선생님의 발언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일본 전범의 가해자성을 생각할 때 자필진술서를 쓰던 당시가 아니라 이들의 '전생애를 통해' 중귀련의 활동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처음 진술서를 작성할 때 '말 못할 살인'이 있었다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니까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은 살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드러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명령권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전쟁과 죄책』에 언급된 사례 중 전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미 점령 하의 일본에서 미군에 의해 일본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강간 피해자들이 '나를 강간한 미군 병사를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다'라면서 원한을 토하는 것을 듣고 공포심을 느낀 명령권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포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 자기가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 그래서 이제까지는 나는 명령권자였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운운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급급해서 피해자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들은 것을 계기로 탄백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건 자신이 가진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자백도 해요. 이렇게 서술이 달라지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진술서를 읽으면서 파악했듯이 처음에는 가해 사실을 그저 병렬적으로 나열하잖아요. 가해 사실을 단순히 병렬했을 때는 피해자의 원한에 대한 상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다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들이 일본에 돌아간 뒤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계기로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 방문이에요. 그 대목에서 제게 시각적으로 남은 강렬한 장면이 있어요. 방파제 폭파를 명령한 고위급 관료가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폭파로 사망했어요. 그런데  그 고위급 관료가 폭파를 명령한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갔더니 400~500명이 대기하고 있더래요. '우리를 죽인 일본 사람들이 온다' 이러면서요. 빨간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중국인들이 멀리서 보이더래요.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죽였던, 혹은 죽이라고 명령했던 어린이나 여자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오른 적도 없었고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는데, 멀어서 얼굴 하나하나는 보이지 않지만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 몇 백 명이 와글와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포심'을 '죄책감'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죄책감의 단서가 되는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옛 침략 군대의 중위가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간  수용되어 있다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수룩한 변명인지 통렬히 느꼈습니다.”(『전쟁과 죄책』, 193쪽)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읽은 진술서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으로 성찰과 사죄와 책임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을 단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진술서 이후의 시간대 속에서 병사들이 자기의 죄를 자각했을 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자각이 뒤늦게 발현될 수도 있고 안 됐을 수도 있어요. 전쟁에 휩쓸린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혹할 수 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죽이고 말았던'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계기들이 찾아올 수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 김수용 : 저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어요. 이분들이 진술서를 쓰고 전범 재판을 받은 것이 전쟁 책임, 이를테면 법적 책임을 진 것이라면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의 행보는 전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중귀련 활동을 통해 평생에 걸쳐 전후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용서받지 못할 책임을 갚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현재로서는 그런 책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활동을 전후 책임의 선례로서 평가해보고 싶어요. 그랬을 때 우리가 원하는 책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라는 반성적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 조시현'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19세기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인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법의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 먼저 '인류애',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를 '인도'로 번역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진술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한정된 표현 속에서만 인류적인 장면이 잠깐씩 드러날 뿐이에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이 팩트 위주의 서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성찰과 반성은 없고 사실만 나열하는 진술서 형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자신의 범죄 행위로부터 오히려 소외되는 측면이 야기되는 거죠. 저는 이 부분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자필진술서가 김수용 선생님이 이야기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중귀련 사람들의 증언이나 수기 같은 다른 자료를 같이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심아정 저는 이 자료의 핵심이 '위안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김수용 선생님이 관심가지고 있는 부분들, 그리고 가해자성이라든가 인죄라든가 조금 더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장원아 : 초반에 이 자료집이  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이 이야기와 연결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위안부' 관련 부분이 왜 이렇게 적지?' 했다가 '대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찾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에 닿았어요. '위안부' 문제가 사실 딱 '위안부', 위안소만 끄집어내서 그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가,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본 진술서에 작성 시점, 1950년대의 어떤 가치관이나 국가관, 국제법 인식 같은 것들이 반영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간이 '문제'로서 서술되고 방식도 그런 시대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진술서를 읽고 해석하는 우리는 현재의 인식과 감각 속에서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으려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고 의미를 도출할 때 적어도 세 시기를 고려해야 정확한 독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즉 이 텍스트에 전쟁 시기, 전범관리소에서 진술서를 쓴 시기, 그리고 우리가 읽는 현재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각각의 시기를 구분하며 읽어야 이 자료를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하게 일본군'위안소'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만 주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식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서 문제화되고 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 심아정 : 김수용 선생님이 일전에 논문에서 언급한 '당사자성'이 떠오릅니다. 전후 세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경험자와 기억을 나눠 가지는 공동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을 수용해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당사자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일본군 포로들의 자필진술서 작성과 이후 일본에서의 중귀련 활동까지 연결해 보면, 전범들이 진술한 증언에서 시작해 그걸 공유한 사람들이 뜻을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전후 일본에서 여러 기념관을 세우고 반전평화 운동도 전개하면서 당사자성이 점차 확장되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지금 진술서를 읽는 우리가 선 위치는 '그때-그들'과 또 다르기에 일본인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당사자/비당사자', '가해자/피해자'의 자리를 이분화하지 않는 방식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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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김수용(성균관대학교) /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 이슬기(서울대학교) / 장수희(동아대학교) / 장원아(역사문제연구소) / 장은애(국민대학교) / 조시현(전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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