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30여 년,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 군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했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최근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I, II -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이하 선집) 시리즈를 발간했다.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중국의 당안관은 일본군 전범의 진술서 842건을 120권으로 엮은 자료집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 자필진술서』를 발간했는데, 선집은 그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중국 당안관이 발간한 일본 전범의 진술서는 총 6만 3,000쪽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이 공개되자 언론에 보도되고 학계의 관심과 연구로 이어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구소에서는 그중 사단장, 정보장교 등으로 전쟁의 명령자급에 있던 이들의 진술을 선별하여 1편으로 묶었고, II편에서는 헌병, 영사관 경찰, 철로 경비병 등 전선에서 직접적으로 명령을 집행한 이들의 진술을 담았다.
중국 '전범 개조정책'이 낳은 특별한 포로 진술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푸순, 타이위안 등지에 위치한 중국 전범 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유례없는 '전범 개조정책'을 실행하였다. 연합군의 전범재판이 처벌에 치중하였다면, 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 정부는 처벌보다는 인간의 개조에 강조점을 두고 전범을 관리하였다. 항복한 적의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에 근거를 둔 이 정책은 '전범의 인격을 존중하라'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하지 마라' '일본인의 습관을 존중하라'와 같은 명령으로 구체화 되었고, 실제로 전범관리소 직원보다 양호한 식사와 인도적인 수감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일본군 전범들로부터 감화와 죄의 자각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소위 '인죄탄백(認罪坦白)' 운동으로 알려진 이 과정은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 점점 '감화'된 일본군 포로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며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심문하는 담당자가 기록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일본 전범들이 자필로 범죄행위를 세세하게 기술한 진술서가 나온 것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를 토대로 1956년 중국 정부는 특별 군사 법정을 열고 전범 재판을 진행하였고,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전범 대부분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 기소돼 금고 8년에서 20년의 형을 받았다. 사형수나 무기형은 한 명도 없었다. 석방된 포로들은 본국 귀환을 보장받았고, 1956년부터 시작된 전범의 본국으로의 귀환은 1964년 마지막 전범 3명이 복역을 마치면서 마무리됐다.
가해자가 말하는 '위안부' 동원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낱낱이 고백한 이 진술서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진술들이다. 위안소의 설치 및 운영, '위안부' 동원과정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컨대, 1편에 실린 일본군 제117 사단장 히라쿠 스즈키의 진술을 보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 과정에 일본군이 체계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중국 차오현에서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부관 호리오 소좌에게 명령하고 이것을 설치하기 위해서 중국 인민 및 조선 인민 부녀자 20명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중국과 조선 인민을 유괴하여 이른바 위안부로 삼았는데 이 부녀자의 수는 약 60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전쟁 범죄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하는 일본 우익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존재하지만,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 작성한 이 진술서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피해자의 증언이나 일본군, 일본 정부가 작성한 공문서 자료는 많이 공개되었지만 이처럼 일본군인 개인의 시점에서 작성된 가해 경험이 공개된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전범진술서의 사료로서의 의미는 적지 않다.
귀환한 일본군 전범들의 반전평화운동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전범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흥미롭게도 본국으로 복귀한 전범들은 이후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반전평화운동에 매진하며 보냈다. 이들은 '침략 전쟁은 절대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죄를 고백한 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등 그들이 행했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강연 활동도 펼쳤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 사실을 밝힌 2명의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냉대에도 꿋꿋하게 세계 평화에 대한 발언을 지속한 중귀련은 회원들이 고령으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2002년 공식 해체됐다. 그러나 그 활동의 의미를 숭고히 여긴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와 학자, 언론인, 일반 시민들은 이후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을 만들어 중귀련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범죄의 잔학성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죄의 고백 이후 반전평화를 위해 헌신한 일본군 전범들의 삶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새삼 느끼게 한다. 연구소에서 발간한 선집에는 전범 진술서 번역문과 함께 진술서의 요지, 자필진술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진술자들의 개인 이력 등을 담은 전문가의 해제, 그리고 진술서 원본 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로서 이 선집은 학계 전문가나 일선 학교의 교사, 관심 있는 일반 대중에게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여성인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연결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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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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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문서로서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자필진술서를 다시 보면 법적인 절차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죄로 자백한 것과 윤리적인 반성, 사죄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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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위태롭다고 한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 세계의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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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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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2부〉 -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 재현의 딜레마: 딩링(1904년~1986년)의 작품과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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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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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3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 용서와 화해란 누가 청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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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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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Team of Webzine <Kye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