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 게시일2024.06.24
  • 최종수정일2024.08.13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2부>

 

일러스트 ⓒ이사각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김수용 :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받고 일본으로 귀환한 전범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이하 중귀련)를 만들어 평화운동과 전쟁 반대 운동을 해요. 그렇기에 '인죄'와 '탄백'은 전범 재판을 받은 시기뿐 아니라 일본 귀환 이후 이어지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증언, 평화운동을 시야에 넣어서 논의해야 합니다. 중국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한다는 원칙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도 양형을 결정하는 과정은 치열했다고 해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현장 의견과 관대해야 한다는 중앙 의견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생각대로 결정된 것 같아요. 사형과 무기 징역이 없는 관대한 처벌로요. 

🧶 조시현 :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던 시점의 증언과 이후 2000년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던 중귀련의 두 분에 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들의 자필진술서가 남아 있다면 2000년 법정 당시의 증언과 대조해 보고도 싶고요. 교화 목적으로 작성된 자필진술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쓴 전범이 가해자로서 '당사자성'을 획득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 것 같아요. 진술서를 쓴 전범의 귀국 후 활동이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보려면 개개인의 삶의 궤적을 알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래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진술서를 쓴 900여 명이 전부 중귀련 회원이 되었나요?

 

'중귀련' 결성 경위와 활동 내용 

🧶 김수용 : 다는 아니에요. 찬조 회원까지 합해서 1996년 2월 1일을 기준으로 중귀련 회원은 1258명이었어요. 귀환 1년 후에 중귀련 설립을 위해 전체 회원 명부를 작성했다고 해요.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 안에서 조직을 만들어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전평화, 중일우호를 위한 활동을 하자는 내용에 동의했어요. 그래서 암묵적으로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명단을 작성했지만 활동 방향에 대한 이견(경제적 차원/정치적 차원)으로 실제 조직률은 50~55%를 넘지 않았고, 회비 납부율은 40~50% 정도였다고 해요.

🧶 심아정 : 중귀련 소식지 계간 『중귀련』은 1997년도부터 발간됐죠? 1997년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창간호가 발간된 건데, 무려 7천 부나 팔렸대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중귀련이 자위대 해외 파병 반대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을 시작한 건 1992년부터라고 해요. 확실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이후인 거죠. 중귀련 조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증언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성폭력 문제에 관해 가해자가 공개된 장소에 직접 나서서 증언하는 문화는 없었어요. 2000년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도 2000년 법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당시 후지이 다케시 선생은 중귀련 사람들의 탄백, 죄를 고백하는 말들이 상정하는 대상이 '중국 인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해요. 자필진술서에 돼지 콜레라로 묻어버린 돼지나 장티푸스에 걸린 어린 아이를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묻어버렸다는 것까지 전부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일일이 나열하며 이야기했다고 정말로 그런 존재들을 인죄의 대상으로 생각했을까… 이들의 인죄는 추상적인 중국 인민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전후에도 여전히 '일중우호',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그 부분이 중귀련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이죠. 그러니까 너무 중국과 일체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이후에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귀련 내부에서 해석이 갈렸지요.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중국의 뜻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옳다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조직이 분열됐다가 전범관리소 직원들의 설득과 두 단체의 노력으로 다시 결합한 일도 있었어요. 본국 귀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았으면 '정말 미안한 거 맞나?' 하고 의심할 수 있을 텐데 평생 증언하고 반전운동을 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정말로 미안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중귀련 활동을 통해 과거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형벌과 사죄가 평생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장은애 : 진정성을 의심한다기보다 진술서 형식의 고백이 어떻게 반성이나 성찰의 계기로 작용했을까 라는 질문이 해소되지 않아요. 어떤 전범이 귀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인에겐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며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어 기쁘다고 이야기할 때 누가 그것을 받아주고 용서해줬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런 대목에서 역시 섬뜩해요. 아무리 진술 과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런 식의 발언은 비위가 좀 상하네요. 근데 또 중귀련 활동을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 김수용 : 이 사람들도 진술서에서 죄를 인정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해요. 법정에서도 직접 피해자들을 대면하거든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한 번 만나고, 그 전에 자기들이 죄를 지었던 지역들을 방문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증언을 추가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귀환 뒤 중귀련도 결성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사죄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일례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류롄런(劉連仁)이란 중국인이 일본이 패전한 줄 모르고 14년 동안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건이 중귀련 회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중귀련 회원 중에 제59사단이 많았어요. 일명 '토끼몰이'라고 하는, 노동자 강제동원에 관한 일을 했던 부대였는데, 자신들이 잡아다 일본으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중국인이 눈앞에 나타난 거잖아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귀련은 전시에 강제동원됐다가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속 반성해 나갔던 게 아닐까요. 저는 중귀련의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들을 변호하게 되네요.

 

[사진 1] 중국귀환자연락회가 발행한 계간지 『중귀련』 (출처: NPO・中帰連平和記念館  웹사이트)

 

 

중국의 전범 재판과 자필 진술의 진정성

🧶 장원아 : 저는 문학연구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진술서에서 진정성을 따질 수 없지 않을까 해요. 애초에 진짜 형식만 볼 수 있는 글이라 '정말 반성했는가?' 하는 건 이 자료로는 파고들 여지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수용 : 저는 중귀련 분들의 진정성을, 귀환 이후 행동과 삶을 보면서 의심하지는 않게 됐어요. 하지만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자국민에게 “이 사람들을 용서해야 돼. 이들을 우리가 인간으로 개조해서 일본에 돌려보내야 해”라고 한 거잖아요. 그건 개인이 용서할 자격을 국가가 선취한 거라고 할 수 있잖아요. 화해도 국가가 시킨 면이 있고.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리고 고민도 돼요. 중귀련 분들이 전범관리소 소장, 부소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과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단 말이에요. 일본에 전범관리소 직원들을 초대도 하고, 또 중국에 가서 다시 만나기도 해요. 끝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관리소 직원들을 스승처럼 대하거든요. 근데 들여다보면 일본 전범들이 제일 먼저 만났던 피해자가 관리소 직원들인 거예요. 관리소 직원 중에는 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관리소에서 대면하기도 해요. 

처음 중귀련에 대해 공부할 때는 관리소 직원과 수감된 전범들을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일본인 전범들이 가장 먼저 만난 피해자가 전범관리소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 사람들이 서로 갈등도 해요. 일본인들은 '나는 전범이 아니다.' '나는 소련에서 포로였는데 왜 전범 취급을 하느냐. 빨리 나를 풀어줘라.' 하고, 관리소 직원들은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나보다 더 좋은 밥을 먹여가면서, 정말 찢어 죽여도 모자랄 사람들을 우리가 이렇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데, 저렇게 자기들은 포로라고 막 난동 부리는 것을 봐줘야 되는가'라고 하고. 그래서 차라리 이러느니 한국전쟁 의용군으로 가겠다고 한 직원도 있었죠. 한편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쩌면 제일 먼저 화해한 피해자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화해와 연대 이런 말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 안에서 이들은 화해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요. 그래서 아직도 너무 복잡한 느낌이에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기도 힘들고요. 선생님들의 말이 뭔지는 알겠어요. 이걸 보면 저도 되게 기괴해요. 그래도 이들의 과정을 아니까 '그래, 이때는 이 정도의 인식이었구나' 하면서 그 의도가 의심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너무 몰입해 있나 봐요.

🧶 심아정 : 이 자료집은 진술서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문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재판받기 전에 진술서를 다 썼고, 그래서 1955년에는 연극 같은 걸 하면서 나름 문화생활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이 뭔가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집단 치료 심리극 같이 자기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역할도 맡아 공연을 하는데, 연극 제목을 보면 '일본군에 의한 강간과 고문'이에요. 그러니까 강간을 죄라고 인지를 한 거죠. 근데 강간당하는 여성도 자기들이 연기해요, 농부의 아내라던가. 이런 내용이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죄책』에 나와요. 

김수용 선생님 말대로 섣불리 해당 시기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전 생애를 통해서 이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귀환 이후 이들이 앞다투어 내는 수기가 있잖아요? 후지이 다케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 '가해자들의 미투'라는 표현을 썼어요. '나도 잘못했어, 나도 잘못했어' 이런 식으로 계속 병사들이 수기를 내는데, 저는 처음에는 정말 대단하다 했지만 이렇게 경합하듯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해 행위를 드러내는 방식에 도대체 누구를 향한 말이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가? 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기도 했어요. 아까 나온 얘기처럼 국가가 용서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남자들(전범과 관리소 직원들) 사이에 생긴 화해의 무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또 어디 있지?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정말 복잡했어요. 처음에는 긍정적인 인간의 변화를 촉발한 어떤 계기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데, 전범관리소 내에서 연극을 하는 상황을 읽고 나니 또 한편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러니까 연극 무대에 올라가 각각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완곡한 우회로를 전혀 쓰지 않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가해 행위에 대한 인정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진술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진술의 시간 이후에 나온 관련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진2] 푸순 전범관리소의 도서실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있는 전범들(출처: Cri online 웹사이트)

 

 

체제와 진술 형식, 말하기의 이면

🧶 이슬기 : 심아정 선생님이 말한 위화감이 사회주의 국가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크다 싶어요.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이고 낯설어 더 이상하고 기괴하게 다가온다는 거죠. 저는 진술서를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약간 익숙한 지점도 있었어요. 인민재판에서의 말하기 같거든요. “내가 이걸 잘못했고, 이걸 잘못했고…”라고 말해야만 인정해주는 것, 뭉뚱그려 표현하면 “네 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구나”라고 하는 게 사실은 북한이나 북베트남, 중국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이 전쟁 이후에 자본주의자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때 썼던 방식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의 말하기는, 이게 정말 진심이냐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이렇게 말하도록 했던 분위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것은 다른 체제, 사회주의 인민재판의 성격과 연결돼 있어 지금 우리에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요. 

🧶 김수용 : 공감되는 말씀인 게 이 시기 중국에 있었던 '삼반오반운동'이라는 인민재판 형식의 반부패 운동과 그 형식이 거의 같아요. 어떤 잘못을 얘기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증인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얘기하고, 그 반론을 듣고 자신의 진술을 다시 수정하는 자기비판의 형식이죠. 따라서 탄백인죄는 특별한 전범 정책이라기보다 중국이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만든 포로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일들이라서 심아정 선생님이 말씀하신 위화감은 사회주의 정치운동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니까요.

🧶 조시현 : 중국의 전범 재판에서 탄백과 인죄라는 명목으로 자아비판을 하는 것은 진술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민 또는 당국에 투항, 즉 몸을 맡긴다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죽어 마땅하니 재판의 처분이나 조치에 순응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범 재판 구상에서 핵심적인 기둥이겠구나 싶고, 이게 관대한 처분과 연동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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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국제법 × 위안부 세미나 팀

김수용(성균관대학교) /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 이슬기(서울대학교) / 장수희(동아대학교) / 장원아(역사문제연구소) / 장은애(국민대학교) / 조시현(전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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