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 관람 후기
맑고 투명한 보랏빛 어스름이 포근히 내려앉는 시간,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저 멀리 막 조명을 켠 N타워가 보이는 여기는 서울 남산국악당, 올해 2회를 맞은 '2024 남산소리극축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은은한 조명이 켜지자 초록 잔디와 부드럽게 선을 이루는 한옥 처마가 더욱 돋보이는데, 개방감 있는 야외마당은 소리극축제를 함께 즐기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무대였다.
5월 8일부터 18일 사이에 열린 올해 남산소리극축제가 기획한 테마는 '여성 서사'.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제목 아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극 4편과 창작판소리 2편, 총 6편의 소리극과 창작판소리로 선보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 투사들의 의리와 애환을 그린 시대극 '이화소리'를 시작으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남장을 하고 대장군에 오른 여성영웅을 그린 '정수정전', 제주도 설화와 귀여운 동물 요소를 버무려 일상 속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어린이 음악극 '청비와 쓰담 특공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속 힘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배달의 신이 된 여자-배달순'과 함께 3.1운동의 불꽃인 유관순의 일대기 '유관순 열사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의 생애를 담은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가 그 작품들이다. 이 중 오늘 내가 만날 무대는 '우리소리 모색'의 대표이자 소리꾼인 정세연 대표가 작창과 각색, 소리까지 맡은 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
마당은 소리로 먼저 열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밝고 경쾌한 자락의 소리와 함께 우아한 흰색 한복을 입고 소리꾼이 등장했다. 첫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 노래가 인사였던 것. 소리꾼은 노래를 마치고 정성스레 관객을 맞았다. 감사와 함께 마음을 담아 준비했으니 잘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에 이어 공연이 어떤 작품인지 소개했다. 이어 판소리에 빠질 수 없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 추임새 연습도 잠깐 했다.
그런데 살짝 고백하자면 추임새를 따라하는 내 마음은 많이 시끄럽고 무거웠다.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이기에 답답하고 갑갑한 제자리 걸음과 그 안에서 매번 느끼는 무력감과 부채감, 나날이 더해지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접어두기 힘들었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만을 준비해왔던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만나기에 다른 적절한 얼굴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임새를 따라하다 발견했다.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증언자에서 운동가로 걸음을 쉬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삶을 담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 주고 받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는 더 없이 어울리는 추임새일 수 있는 거였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이었다.
구성지고 풍성한 소리, 공연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드디어 시작된 공연, 소리꾼은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었다. 대략 30분, 길지 않은 공연은 창작 레퍼토리와 익숙한 레퍼토리의 변주를 고루 품고 있었고, 덕분에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부터 오는 반가움과 새롭고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신선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구비구비 고저장단으로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를 풀어가는 정세연 소리꾼의 소리는 때론 구슬펐고 때론 아름다웠다. 해금 연주자와 고수는 때로 밀고 때로 당기며 애처로움과 긴장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다른 배역으로 무대로 호출돼 극을 풍성하게 엮었다. 그때마다 무대 위 세계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었다. 두 명의 코러스 공연자들과의 부드러운 호흡도 깔끔했다.
'평화의 소녀상'과 의자에서 모티프를 따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끌고 밀고 기대고 앉는 등 소리꾼이 공연 내내 다양하게 활용한 의자는 '위안부' 시절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공간으로, 숨죽이며 탈출을 상상하는 순간으로, 막막하고 무거운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됐고, 마지막에는 할머니가 평화롭게 앉을 수 있는 자리로 함께 했다.
비교적 간결한 이야기 구조와 다양한 장면으로 연출된 무대, 소품의 활용 등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는 국악을 어렵고 낯설어 하는 관객이 듣기에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공연이었다.
'인권운동가'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적어 아쉬워
하지만 아쉬움도 털어놓아야겠다. 무엇보다 김학순歌라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학순의 탄생 순간과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 기생 권번에 수양딸로 팔려간 이야기 뒤에 납치돼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다시 가혹하고 신산했던 이후의 삶이 극의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발뺌과 왜곡에 분노한 할머니가 폭발하듯 터트린 증언. 하지만 곧 할머니의 목소리는 240명의 피해 할머니에 대한 호명으로 바뀌었고,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와 인권운동가가 되어 다시는 이 땅에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오늘도 증언을 하고 계신다'는 설명으로 넘어가더니,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짧은 발화 이후에 딸들에게 드넓은 벌판을 훨훨 날기를 주문하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막을 내렸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마무리라 박수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일본의 사죄를 위해 항변하고, 여성인권 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 투지 넘쳤던 그녀의 삶을 그려 나간다.” 고 하지 않았나! '그 증언' 이후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이들과 얼마나 많은 언어로 사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외치셨던가!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마음을 용기 있게 전하고 다니신 '평화와 인권 활동가' 김학순 할머니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정작 그 서사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무거운 주제이고, 민감한 이야기라 매 걸음이 조심스러웠을 창작자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 이 작품을 쓰셨겠다 싶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자리를 자꾸만 만들고 싶어 오늘과 같은 작품을 쓰고 만들고 다듬고 노래했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의미, 다른 세대와 이 기억을 나누고 새로이 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또 공연의 길이가 짧아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에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악당 같은 무대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역사와 교육의 현장에서 김학순歌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신, 국악당의 다정했던 환대
아울러 꼭 남기고 싶은 관람 후기가 있다. 남산국악당 측의 다정하고 성숙한 환대이다. 국악당 측은 저녁시간 차가워진 밤공기에 관객들이 불편할까 무릎 담요를 준비해 필요한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금지가 없는 것도 좋았다. 플래시만 주의하면 공연 내내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공연장 내 음료 반입도 허용됐다. 이런 환대는 이틀 전 다른 극장을 찾았다가 앞자리 관객이 안내원에게 주의받던 장면과 대조적이었다. 앞자리 관객이 잠시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곧바로 안내원이 달려와 뒷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 '바른 자세'로 앉아 달라 '부탁'하는 거였다. 물론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관객들이 감각과 상상을 무대 위 다른 세계로 이입할 준비를 하는 시간을 방해한 건 정작 안내원이었다. 실제로 요즘의 관극 문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극이 시작한 지 꽤 지나 있었다. 그런데 국악당에서는 달랐다. 휴대폰을 꺼 달라는 안내도, 자리를 옮기지 말라는 안내도 없었다. 안내가 없었어도 공연 중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고, 누구도 음료를 쏟지 않았다. 그 안내 없음이 새삼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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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 글쓴이 이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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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서 사회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미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원작과 한국어판 공연 비교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자전적 서사를 활용하여 극을 창작하는 여성 예술인 사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적 언술로서의 연극, 변혁 운동으로서의 연극에 관심이 많고, 극장 밖 여러 공간에서의 연극 활동을 상상하고, 기획하고, 연구하고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