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20년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전시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고, 이 제도에 대해 일본군 상부층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으며,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민중 법정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은 아시아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위안소 설치에 관해 국내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고, 일본군이 패전 당시 '위안부' 제도, 위안소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자료를 소각했기 때문에 그 실태는 계속 은폐되어 왔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몇몇 증거가 제출되었지만, BC급 전범 재판에서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 여성들의 피해는 다뤄지지 않았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본 정부와 군의 법적 책임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실태가 드러나고 일본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1991년 8월 14일,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공개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각국의 피해 여성이 잇따라 증언을 하였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제소한 10건 중 8건에 대해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국가무답책(国家無答責) 법리나 제소 기간, 양국 간 평화조약 등으로 인해 이미 해결되었다는 판결이 내려져 원고의 청구는 모두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자료가 모였고 '위안부' 제도가 성노예 제도이며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전쟁 범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戦)'으로 포장하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은폐·봉쇄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교육'과 '언론보도'에 개입해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자와 우익 단체는 '위안부' 지원 활동을 반대하는 로비와 공격을 계속하고 피해자에 대한 비방과 함께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암살자'들에게 분연히 맞서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며 전시 성폭력의 근절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호소해온 일본과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고 대다수가 고령이 된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남은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다가 결국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위안부' 피해자 지원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짚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NHK PD로서 다루었던 '위안부' 문제 나는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NHK에서 37년간 PD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베트남 반전운동과 일본의 전공투(全學共鬪會議, 1968~1969년에 걸쳐 일본의 각 대학에서 학부와 당파를 뛰어넘어 결성된 연합체-옮긴이)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미디어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관점에서 시민과 학생, 여성들의 운동을 보도하고 있다는 데 의문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미디어를 내부에서부터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NHK에 입사해 전쟁, 여성, 인권을 주제로 여러 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같은 전쟁을 다룬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미군의 오키나와 대공습이나 원폭 피해, 전쟁 이후 중국에 잔류한 고아들의 문제 등 일본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제작할 때는 취재 활동이 고달픈 것 외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나 주민 학살 등 일본의 가해 사실에 초점을 맞췄을 때는 방송이 되기까지 많은 방해에 부딪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을 때였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NHK에서 1991년 6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ETV 2001 시리즈》를 비롯해 8편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방송을 제작했다. 하지만 우익의 반대가 커지면서 1997년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프로그램의 기획은 전부 무산되었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난징대학살',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과 함께 NHK에서는 암묵적인 '3대 금기' 아이템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NHK의 PD로서 방송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한편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위안부' 피해자와 전 일본 군인들의 증언 등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시민단체 '비디오 학교'를 조직했고,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 성폭력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단체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여성 선배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해 왔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이자 여성 인권 활동가 마쓰이 야요리 씨로부터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활동에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시민 활동의 일환으로 1998년부터는 2000년 여성법정의 국제 실행 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제안부터 실현까지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재판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해국인 일본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마쓰이 야요리 씨가 여성들이 모여 민중법정을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아이디어는 일본 여성들, 각국의 피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이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법정은 2000년 12월에 개최되었지만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 국제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국제 실행 위원회에서는 수석 검사와 판사단을 선출하는 한편 '법정 헌장'의 초안도 마련했다. 또한 각국 검사단은 기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실행 위원회는 각국의 기소장 작성을 위한 조사와 영상 기록, 번역 등의 작업을 진행했고 일본군 관련 자료 수집과 전문가 증인 선정에 나섰다. 동영상 기록 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법정에 증거로 제출할 증언 영상을 제작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를 찾는 등 NHK에서의 근무 시간 이외의 대부분을 2000년 여성법정 준비에 바쳤다. 법정 실행 위원들은 끼니도 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혼신을 다해 2년 반 동안 법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과 2000년 여성법정 활동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일에 동시에 매달리면서 쌓인 과로 탓일까, 나는 법정 개정을 2개월 앞두고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병가를 썼고 다행히도 3개월 후에는 후유증 없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병가 기간 중 시작된 2000년 여성법정에 비디오 학교의 멤버로 참가하여 12월 8일~10일의 본 법정과 12일의 예비 판결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2000년 12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8일에 본 법정이 개정했다. 8개국의 '위안부' 피해자 64명을 비롯해 세계 30개국에서 연일 1,000여 명의 방청객이 모여들었다. 증언대에서 몸소 겪은 처참한 피해를 증언한 각국의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여성의 존엄을 짓밟고 인생 자체를 파괴했는지에 대해 호소했다. 피해자 64명의 증언은 한결같이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전장에서 강간을 저지른 사실과 위안소에 드나들었던 사실을 증언한 두 명의 전 일본군 병사에게는 방청석으로부터 감사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성법정에서는 각국의 검사단이 제출한 기소장과 방대한 양의 증거 자료, 전문가 증인에 의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의 책임론 등을 토대로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책임자 10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2일 '히로히토 천황 유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로 인해 가해진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판결 개요가 내려졌을 때 법정 전체가 큰 감동에 휩싸였다. 피해 여성들은 "정의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았다"면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법정 개최 준비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실행위원회 멤버들도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다'라는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차올라 법정을 준비하며 쌓인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2000년 여성법정 언론보도에 정치권이 개입하다 2000년 여성법정의 성공적 마무리 이후 우리는 법정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언론보도라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러 온 해외 미디어는 95개사로, 취재 신청자 수는 200여 명에 달했고 법정 소식은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48개 언론사에서 105명의 기자가 취재차 왔으나 대부분의 기사 논조가 소극적이었고 법정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요미우리 신문은 법정 소식을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히로히토 천황 유죄' 판결을 주요 기사로 다룬 곳은 아사히 신문과 홋카이도 신문 2개사뿐이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2000년 여성법정을 무참하게 날조해 보도한 'NHK 프로그램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 사건'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단계에서부터 취재해 왔던 NHK의 프로그램 《ETV 2001》에서 2001년 1월 30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통해 여성법정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 방송에서는 법정 기소장의 내용도, 판결문의 내용도 전하지 않았을뿐더러 법정에 선 피해자들의 증언은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 이 방송은 '지리멸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바우넷 재팬과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바로 NHK에 항의하며 질문지를 보냈지만,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NHK와 관련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나도 이 소송의 원고로 합류했었다. NHK를 상대로 한 소송의 도쿄 고등법원 제2심의 결심 전인 2005년 1월, NHK 소속직원의 내부고발이 있었다. 2000년 여성법정 당시《ETV 2001》 프로그램의 데스크였던 나가이 사토루가 방송 직전에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 등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 날조되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나가이 사토루의 내부고발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도쿄 고등법원은 결심 기일을 늦췄고 NHK 관계자에 대한 증인 심문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정치권이 방송에 개입한 실태가 차례차례 까발려졌다. 2007년에 도쿄 고등법원은 피고 NHK가 정치인의 의도를 헤아려 방송을 조작했다며 원고에게 200만 엔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2008년, 대법원은 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원고 패소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NHK는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방송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검증 프로그램도 제작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과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묻으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미디어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난, 일본 패전 이후의 방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자율 규제와 자숙, '촌탁(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으로,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뜻의 일본어 표현, 편집자 주) 문화'가 만연한 작금의 일본 미디어의 쇠락을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언론뿐 아니라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사람들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날조된 가짜 프로그램에 의해 2000년 여성법정이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받거나 오해를 받을 우려도 있었다. 나는 《ETV2001》방송을 본 후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을 한시라도 빨리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병가를 마치고 막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고된 업무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방을 빌리고, 편집기를 구입하여 비디오 학교의 동료들과 합숙하며 2000년 여성법정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들어갔다. 2개월 후 《침묵의 역사를 찢고 –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6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했고 2000년 여성법정 보고 집회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판도 제작해 국내외 시청자를 늘려왔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계몽 활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도쿄에서 여성법정이 개최된 이듬해인 2001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2시간에 걸쳐 낭독된 최종 판결문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지도자 10명에 대한 유죄와 일본 정부의 국가 책임이 명기되었다. 이 판결문은 곧바로 일본 정부와 궁내청으로 전달되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전시 성폭력 근절을 향한 투쟁과 평화의 실현 2000년 여성법정이 국제 사회와 국제법에 끼친 영향은 컸고,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나 국제형사재판소(ICC)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여성법정 이후 전시 성폭력 책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민중 법정의 시도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2010년 3월에는 과테말라와 미얀마에서 민중 법정이 열렸고, 구 유고슬라비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도 지속적으로 가해자 처벌 방안을 모색했다. 콩고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지원해 온 의사 드니 무퀘게, 이라크에서 IS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당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나디아 무라드가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실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책임자 처벌의 움직임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 여성법정은 세계 각국에서 전시 성폭력의 피해와 가해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이를 공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이라는 새로운 바람 역시 불러일으켰다. "망각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이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민중의 무기다". 이러한 말처럼 전시 성폭력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시 성폭력 피해와 가해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세워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하 WAM)'은 그 같은 성과 중 하나였다.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하는 동안 실행위원회 구성원들은 "언젠가 일본에 '위안부'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라는 의견을 모았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자료관 개설은 '꿈 같은 이야기'였으나, 엄청난 속도로 여성법정 이후 5년 만인 2005년에 WAM을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법정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마쓰이 야요리 씨 덕분이었다. 마쓰이 씨는 2002년 여름에 담관암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 자료를 '위안부' 자료관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해 12월에 별세했다. 마쓰이 씨의 유지를 받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자료관 건설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각지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을 시찰하면서 어떠한 박물관을 만들 것인지 의논하고, 자금을 모으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나는 건설 위원장을 맡아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WAM은 2000년 여성법정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위안부' 제도 관련 자료를 수집, 공개, 보존하는 장소로서 2005년 8월에 도쿄에 개관했다. 그리고 매년 아시아 국가별로 개최하는 '위안부' 특별전을 거듭하면서 아시아 전역에 걸친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 일본군 측의 공문서,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 등을 대부분 수집할 수 있었다. 약 5년 전부터는 아카이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정리하고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WAM과 같은 '위안부' 자료관은 한국 각지와 필리핀, 중국, 대만에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2000년 여성법정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위안부' 피해생존자도, 가해 증언을 할 수 있는 전 일본군 병사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피해자가 원하는 사실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 개인에 대한 배상 등을 실현하도록 요구하고, 동시에 이러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기록과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할 책무가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인과 미디어의 발언은 엄중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또한 장기간 집권한 아베 정권 하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의 내셔널리즘이 대립하는 정치 문제로 다뤄진 것도 큰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 피해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두거나, 폭언과 거짓 정보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자체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민족, 여성, 계급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일본 사회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선 몇 세기동안 성매매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패전 이후 공창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성매매 산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성매매가 빈번히 발생하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다. '위안부'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의식과 성행동을 돌아보지 않은 일본 남성과 그러한 남성들을 허용해온 일본 여성들 속에서 지속된 일본의 성 풍토 자체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던져진 과제는 크고 무겁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미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지 반 세기가 지나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사망하였고, 그 유지를 이은 다음 세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와 연대하면서 '기억의 암살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를 부정하는 '기억의 암살자'들과의 투쟁은 곧, 전쟁으로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파시즘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매스미디어와의 투쟁이기도 하다.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평화를 실현하고, 전시 성폭력의 근절을 위해 노력하는 지속적인 투쟁이 오늘날의 일본을 변화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2020년 에세이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의 변경 지시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담이 있고 난 뒤 시사회에 참여한 노지마 국장이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내용이야!"라고 발언한 것이었다. 그 후 요시오카 부장과 마쓰오, 이토, 노지마 국장이 협의에 들어갔다. 나가타 CP는 국장실 앞에 마련된 소파에서 대기하고 나는 후반 작업을 하러 돌아갔다. 협의 중 노지마 국장이 몇 명의 정치인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주장에 관해 설명한 내용을 요시오카 부장의 대본에 '아베, 아라이, 후루야'라고 흘려 적혀 있던 메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요시오카 부장이 "도저히 못 해 먹겠으니 그렇게 말할 거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성을 내고 말았다. 요시오카 부장이 '못 해 먹겠다!'며 성을 해버리니 노지마 담당 국장이 변경 내용을 직접 나가타 CP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NHK도 발뺌할 수 없는 사실로 이는 추후 '방송 윤리 및 프로그램 향상 기구(Broadcasting Ethics & Program Improvement Organization, 이하 BPO)'에서도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국회 담당 국장이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바꾸라'며 직접 현장의 프로듀서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시 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책임에 대해선 애매하게 처리하라',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인터뷰 분량을 늘려라', '법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더 늘려라', '판결 부분은 코멘트 처리하라' 등이었다. 이때 노지마 국장은 나가타 CP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에 대해 "비즈니스 때문에 '위안부'를 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겠어?"라고 질문했다. 나가타 CP가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며 항변하자 노지마 국장은 "어차피 망가뜨릴 거라면 확실하게 망가뜨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변경 지시에 따라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 편은 최초 기획의도와 달리 무참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회상해 보면, 이 개편 지시를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기진맥진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기본적으로 방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프로그램을 방송에 내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말도 안 되게 변질된 프로그램으로 바뀌고 말겠지만 2000년 여성법정이,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이 방송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자위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방송 당일, 3분 커트를 지시 방송 당일인 1월 30일, 아침부터 내레이션과 더빙 작업 등이 있었다. 더빙 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요시오카 부장이 마쓰오 방송 총 국장의 전화 호출을 받았다. '또 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던 와중에 요시오카 부장이 전화로 나가타 CP에게 "지금부터 하는 말을 메모해라.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을 커트해라."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 내용은 중국의 완아이화 씨의 증언, 동티모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 가해 병사(전 일본군 병사) 증언 등 3분을 커트하라는 지시였다. 우리가 전날의 부당한 편집 변경 지시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여전히 프로그램 속에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송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이 귀중한 증언들마저 없애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지시에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때 나는 나가타 CP에게 두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위안부' 피해자들과 가해 병사들의 증언을 커트한다면 프로그램 본연의 취지를 잃게 된다', 둘째, '그런 일을 한다면 NHK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나가타 CP에게 "마쓰오 방송 총 국장님에게 지시를 거둬 달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런 내용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요."라고 부탁했다. 나가타 CP는 "맞아, 뭔가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어."라고 대답하며 방송 총 국장실로 향했다. 나는 동시에 일본방송노동조합의 방송 계열 위원장을 맡고 있던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상황이니 조합에서도 방송 총 국장에게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힘 좀 써줘!"라고 부탁했다. 그 후 스튜디오로 돌아온 요시오카 부장에게 "이런 짓을 하면 세상을 향해 '프로그램이 조작되었다'고 공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큰 문제가 될 거예요, 절대로 안 됩니다."고 말했다. 요시오카 부장은 "나도 알아, 하지만 마쓰오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고. '더이상 너희들과 논의할 사항이 아니야'라며 대화하기를 거부했어."라고 답했다. 그 후 나가타 CP도 돌아와 "마쓰오 국장님과 얘기해 봤는데 안 될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나가타 CP에게서 그 때 방송 총 국장실에서 있었던 일화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국장실에는 마쓰오, 이토, 노지마 국장이 있었다. 나가타 CP는 "어째서 가장 중요한 '위안부' 증언과 가해 병사의 증언을 이제 와서 커트하라는 겁니까, 제발 부탁이니 재고해 주십시오. 이대로 진행하면 NHK가 큰일을 당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마쓰오 국장은 "그렇게는 안 돼. 내가 프로그램과 뉴스 책임자야.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은 방송에 내보낼 수 없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나가타 CP가 그래도 물고 늘어지자 노지마 국장이 "네가 정말 열심히 하고 성실한 것은 잘 알았어. 하지만 이미 모두 결정된 사항이야."라며 조용히, 그리고 더 이상의 대꾸는 받지 않겠다는 듯한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고 한다.   편집권과 내부적 자유 마쓰오 방송 총 국장이 프로그램 내용의 변경 지시를 업무 명령으로 내릴 수 있었던 근거는 '편집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NHK는 '편집권은 회장에게 있지만, 그 편집권을 방송 총 국장과 나누어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권한은 또다시 프로그램 제작 국장과 보도 국장, 각 부의 부장과 현장의 총괄 프로듀서가 나누어 가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질적으로 미군의 점령 하에 있던 당시 일본신문협회가 '편집권은 경영자에게 있다'고 선언한 이래 일본에서는 그 견해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경영과 편집의 분리'나 '경영에 의한 영향은 당연히 있지만, 구체적인 편집권은 현장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주류이다.  NHK는 방송 총 국장을 방송 책임자로 두지만, 실제 여러 프로그램의 최종 결정권은 현장의 총괄 프로듀서가 가지고 있다. 총괄 프로듀서가 OK 사인을 하면 방송으로 내보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내가 편집권을 가지고 있으니 나의 업무 지시에 따르라"는 방송 총 국장의 발언은 현장에서 보기에 얼토당토 않은 소리였지만, '경영자와 방송 총 국장이 편집권을 나누어 가진다'는 NHK의 입장 때문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정보가 없어서 아직 사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바로 움직일 수 없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이때 내부적 자유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지 않는, 양심에 반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행태를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이때 나에게는 데스크로서 '작업을 거부하여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다'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우리가 작업을 거부한다면 미완성인 프로그램은 방송에 내보낼 수 없으므로 방송에 펑크가 난다.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는 4회로 편성된 시리즈 프로그램인데, 만약 내가 2회차 편집 작업을 거부한다면 예정된 방송 시각에 전혀 관련없는 방송이 재방송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 분명히 나는 방송 현장에서 쫓겨나 어딘가로 좌천될 것이 분명했다. 대본 등에 문제가 없는지 미리 검토하는 고사실이나 자료실, 방송문화 연구소 등 NHK에는 좌천 후보지가 매우 많다. 실제로 나는 나중에 연구소로 좌천을 당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내가 좌천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최종 단계에서 프로그램 제작을 함께한 3명의 디렉터에게도 악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프로그램에 관여한 모든 스태프에게도 영향이 갈 수 있었고, 이러한 점들을 결정에 고려해야만 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사건의 이면에 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때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상부의 3분 커트 지시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프로그램을 방송의 예비 테이프를 제작하는 ECS 작업으로 3분간의 영상을 커트했다. 사실 더빙 작업과 음향 처리가 끝난 프로그램을 커트하면 음성은 더이상 손을 댈 수 없다. 영상은 커트로 인해 잘려 나가니 알 수 없지만, 소리는 도중에 자를 경우 정리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연결되는 부분과의 음이 맞지 않아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 퀄리티를 생각할 때 완성된 프로그램의 영상을 커트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결국 43분 분량으로 완성된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 편을 억지로 40분 분량으로 편집하여 방송했다. 통상 44분인 프로그램을 그날만 40분으로 방송하는 것은 방송사고이며, 이는 '이 프로그램은 조작되었습니다'라고 외부에 공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결과, 프로그램 제작에 협력해 주었던 2000년 여성법정의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바우넷 재팬이 NHK와 NEP, DJ에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내부 고발의 경위 게다가 스튜디오에 출연한 여성 연구자가 '방송과 인권 등 권리에 관한 위원회(Broadcast and Human Rights/Other Related Rights Committee, 이하 BRC)'에 "중요 코멘트 부분이 전부 삭제된 데다가 맥락 없이 편집되어 연구자로서의 신뢰성을 훼손당했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BRC는 '(NHK는) 민원인의 인격권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아 방송 윤리를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4년 3월에는 도쿄 지방 법원에서 바우넷 재팬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DJ에게만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NHK 관계자(요시오카 부장, 나가타 CP 외)는 모두 침묵하였고, 정치인에 의한 압력 문제는 재판의 쟁점이 되지 않았다. 원고인 바우넷 재팬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해 추궁할 수 없던 가운데 1심의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나는 방송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노지마 국장과 마쓰오 국장이 시사회 직전에 어떤 정치인과 면담을 하고 어떠한 대화를 나눴는지에 관해 당시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언젠가는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교에서 중국 근현대사, 중일관계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역사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이 이렇게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는데도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직후 이러한 속마음을 숨기고 NHK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사실은 점점 명확해졌지만, 그 사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는 여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또한 내가 참여했었던 NHK 스페셜 대형 프로젝트(《사대 문명 (四大文明) 》, 《일본인 머나먼 여행(日本人はるかな旅)》, 《문명의 길(文明の道)》 등)의 업무를 매듭짓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좀처럼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없었다. 그리고 재판은 10년 정도 이어질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재판의 최종 단계에서 내가 경험한 사실과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증언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2004년 말, 도쿄 고등 법원 재판에서 곧 결심 공판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법원은 문서로만 심의를 하므로 내가 증언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공익 제보자 보호법이라는 법률이 통과되어 NHK에도 준법감시 추진실에 내부 제보 창구가 마련되었다.  나는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2004년 12월 NHK 내부 제보 창구에 이 문제를 고발했다. 나의 내부 고발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자 도쿄 고등 법원의 결심이 연기됐고 나를 비롯한 나가타, 노지마, 마쓰오, 이토가 도쿄 고등법원에서 증언하게 되었다.   조직 방어에 분주한 NHK 내가 내부 고발한 사실이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지자, NHK는 조직 방어를 위해 아베 관방부장관과 나카가와 의원 등의 정치인들을 지키려고 했다. NHK는 이를 위해 뉴스를 이용했다. NHK 뉴스는 오랜 전통과 경험을 거쳐 어떠한 사실도 객관적으로 보도한다는 방침을 확립해 왔다. 예를 들어 NHK에 관한 뉴스라 하더라도 "~한 내용을 NHK가 발표했습니다."라든지, "NHK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는 것이 NHK 뉴스의 화법이다. 2005년 1월 19일 NHK는 내가 내부 고발한 내용에 대해 준법감시 추진실이 조사했다며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내용을 보도한 그날 밤의 NHK 뉴스는 평소의 화법과 달랐다. 내가 주장한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NHK의 준법감시 추진실이 조사한 결과 그러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담당 데스크의 주장은 허위 주장입니다."라고 보도됐다. 객관적 보도라는 방침을 위해 'NHK가 이렇게 발표했습니다.'라는 화법을 써야 하는데도, '담당 데스크의 주장은 허위였다'고 보도한 것이다. 어떤 미디어 연구자는 이 보도에 대해 'NHK 뉴스가 사망한 날'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NHK 임원들은 조직 방어를 위해 아베 관방부장관과 나카가와 의원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보도국에 이러한 뉴스를 발신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그런 뉴스가 나오고 말았는지 제대로 검증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 당시 NHK 뉴스는 "NHK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사실이 아닌 것을 NHK의 일개 CP가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것이 되는군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마쓰오 국장이 "그러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발설한 저널리스트는 내가 용납할 수 없다."고 발언한 내용까지 내보냈다. NHK의 CP라는 말단 관리직에 지나지 않는 내게 NHK가 뉴스를 사용하여 공격하고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그때 내가 BPO에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방송되어 나의 인격권이 침해당했다'는 민원을 제기했더라면 재판과는 별개의 싸움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방송 문화 연구소로 인사이동 내부 고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방송 현장에서 계속 일을 했다. 하지만 이듬해 관리직 정기 인사이동에서 방송 문화 연구소로 이동이 결정되었다. 에비사와씨가 사임한 후 회장이 된 하시모토라는 기술직 출신의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나의 인사이동에 대해 "나가이는 중국 전문가이니 중국 미디어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연구소로 이동시켰습니다. 적재적소의 인사이동입니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때 방송 문화 연구소에는 외신부 기자 출신의 중국 미디어 전문가가 이미 있었다. 나는 보복성 인사이동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내게 있어 연구소는 좋아하는 조사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괜찮은 좌천지였고, 이곳에서 2년 정도를 보냈다. 하지만 국차장급 위치에 있으면서 도쿄 고등 법원에서 진실을 말한 나가타 씨에 대한 보복성 인사이동은 가혹했다. NHK에서 국차장급이라 하면 국장이나 이사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으며 퇴직 후에는 NHK 관련 회사의 임원 자리가 보장되는 주요 간부로, '조직 방어를 첫 번째 행동 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재판에서 절대로 조직에 불리한 사실을 증언해서는 안 된다'라는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나가타 씨는 도쿄 고등 법원에서 진실을 증언했다. NHK 임원진이 보기에 '국차장급이나 되는 사람이 법원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가타 씨는 NHK 자료실로 좌천되었다. NHK에는 좌천 후보지가 여러 곳 있다. 자료실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계시는 직원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위성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가타 씨에게 자료실은 혹독한 곳이었다. 하지만 나가타 씨와 나는 "예견했던 결말이니 서로 힘내자"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연구소로 이동한 후 교양 프로그램부 선배가 연구소의 새로운 소장으로 취임하고, 직전까지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편성 관계자가 차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차장은 솔직한 성격의 인물로 "나가이 씨, 미안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줘."라는 말을 했다. NHK 임원진은 동료 간의 정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나를 제어하려고 했고 이는 나에게 매우 슬픈 일이었으나 나 역시 각오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내부 고발이 나 나름의 책임을 지는 방법이었지만, 프로그램 조작을 허용한 결과 2000년 여성법정에서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주최한 NPO 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것은 되돌릴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사실이다. 도쿄 고등 법원의 결정과 BPO의 결정 2007년 1월, 도쿄 고등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국회의원의 발언을) 필요 이상으로 무겁게 받아들였고, 그 의도를 헤아려 가능한 한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시사회에 참여하였으며 그 결과 원하는 형태로 만들고자 본 건의 프로그램에 대해 직접 지시하고 수정을 반복해 편집 수정이 이루어진 점이 인정된다."며 NHK 등에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미나미 도시후미 재판장은 NHK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NHK는 헌법을 통해 존중받고 보장된 편집의 권한을 남용 또는 일탈하여 변경을 꾀하였으며 자주성, 독립성을 내용으로 하는 편집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2008년 6월의 대법원 판결에서는 사실관계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다루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방송하는지는) 방송 사업자의 자립적 판단에 맡겨져 있다', '(취재 협력자의) 기대와 신뢰는 원칙적으로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NHK의 편집의 자유가 우위에 있다고 인정했다. 대법원은 그 시대의 권력에 빌붙는 판결만 내리는 경향이 있으며 당시에는 재판원 제도 도입을 앞두고 NHK에 여러 가지로 협력을 받아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따라서 애초에 대법원은 NHK에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측했었다. 재판이 끝나고 이 사건에 대해 BPO가 심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4월, BPO의 방송 윤리 검증 위원회가 결정을 내렸다. "프로그램 방송 전에 있었던 NHK의 프로그램 제작 부문의 간부 관리직과 정부 고위 관직 및 여당의 유력 정치인 간의 면담과 이를 전후로 한 편집 수정 지시 및 국회 담당 국장이 제작 현장 책임자에게 편집 수정을 지시한 점과 같은 일련의 행동은 공영방송인 NHK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주성 및 자립성을 위협하고 NHK에 기대와 신뢰를 보내는 시청자들에게 중대한 의심을 품게 만드는 행위였다고 판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다음 BPO는 NHK에 ① 방송 및 제작 부문과 국회 대책 부문의 분리, ② 내부적 자유에 대한 논의 ③ 시청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BPO의 요구 중 가장 중요한 점은 'NHK가 프로그램 조작 사건을 스스로 검증하여 시청자에게 공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NHK는 지금까지도 이 요구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NHK 프로그램 개찬 사건과 그 이후 NHK의 대응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NHK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와 기대를 배신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나가이 사토루(長井 暁)

  •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020년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2부 - 2000년 여성법정이 시민운동에 끼친 영향  1. [논평]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은 지구 반대편 여성들의 이야기 2. [논평] 1965년 인도네시아 집단 학살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3. [논평] 50년만의 판결,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프롤로그 '국제법의 인민화'라는 흐름 민간 주도의 법정은 대부분 소멸시효나 면책규정 등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실정법에서는 권력에 의거하여 법의 효력을 가늠하지만, 실정법으로 해소 불가능한 앙금을 다루는 '인민법정'에서는 그 효력과 권위의 토대를 '인민(people)'의 층위에 두고 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은 법적 실효성을 갖는 국제법정을 일본 정부의 협조 하에 개최하는 것이 더 이상 곤란해진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강구된 방법으로, 가해국 일본정부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인민법정[1]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의 판사였던 크리스틴 친킨(Christine Chinkin)에 따르면, "법은 정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국가가 정의를 보장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시민사회가 '개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법정은 이러한 전제에 기반한다. 또한 인민법정은 형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법적인 판결의 가치와 도덕적인 강제성에 의한 권고는 할 수 있다.[2] 따라서 인민법정의 권위는 인민에 의거하며, 법정의 판결과 그에 부수하는 권고의 집행 여부는 법정의 유래인 인민, 즉 '국경을 넘은 인민'의 힘에 달려 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해 온 일본의 법원은 '국제법을 인민화'[3]하는 당시의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 여성법정은 일본 사법부의 구태의연한 국가주의적 태도에 대항하는 국경을 초월한 인민들의 도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선주민에 대한 경멸과 인종주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과테말라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 1944년부터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와 아르벤스(Jacobo Arbenz Guzmán)와 같은 과테말라의 혁신적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19세기 이래로 계속되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수탈구조를 개선하고자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1951년에 당선된 아르벤스는 유나이티드 푸르트(United Fruits Company) 보유지를 비롯해 착취구조의 근원들을 다수 국유화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1954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의 군사적 개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4] 결국 1960년에 미국과 결탁한 정부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특히 반공주의 독재자 리오스 몬트(José Efrain Rios Montt)는 1982년~1983년 사이에 게릴라와 전투를 치르면서 민간인을 강제로 포섭한 자경단(Patrulla de Autodefensa Civil, PAC)과 군대를 동원하여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1999년에 발표된 '역사적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CEH)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6년까지의 내전 기간 동안 과테말라에서는 약 5만 명의 실종자를 포함해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전쟁고아가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5] 과테말라에서 '여성인민법정'을 발의한 요란다 아기라르(Yolanda Aguilar)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자로서 2000년 여성법정 기간 중 넷째 날에 열린 국제 공청회 <현대 분쟁 하의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요란다는 1960년대와 70년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며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일찍 눈을 떴고,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여성 공장 노동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군부 집권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후, 어머니는 무장혁명조직 FAR(las Fuerzas Armadas Rebeldes)의 활동을 시작했고, 요란다도 13세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염병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15세 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되어 구타와 윤간을 비롯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요란다는 그후 3개월 동안 시력을 잃었는데, 구타로 인한 염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와 몸이 아무것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1980년에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었고, 곧장 쿠바로 떠나 2년을 살았다. 성폭력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83년에 과테말라 북쪽의 접경지역 페탱(Petén)으로 가서 반군(反軍)과 함께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이 없는 세계를 건설하려던 동료들과의 깊은 연대 속에서 5년을 머물렀다. 5년 뒤 다시 돌아온 과테말라에는 여전히 성폭력이 만연했다. 요란다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테말라 내전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수집을 위해 만든 조직인 레미(REMHI)[6]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란다는 무력분쟁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이야기들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요란다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그녀들의 고통을, 그녀들은 나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물려받았다."[7]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의 성폭력 피해와 생존 경험을 나누다 요란다는 REMHI 보고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여성에게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고, 2000년 여성법정에서 과테말라 내전 시기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증언해 줄 것을 제안받았다. 2000년 여성법정 공청회에서 요란다는 청중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잔인함에 대해서 증언하는 대신 자신이 겪은 압도적인 폭력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서 본 힘을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 가장 끔찍한 혼란, 가장 깊은 위기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2015년의 인터뷰[8]에서 "나는 2000년 여성법정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해 기꺼이 논의하려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시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 프로젝트  요란다는 2000년 여성법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금기시되어왔던 내전 시기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는 장(場)을 만들 것을 여러 여성 단체에 호소하였고, 2002년에 '전시성폭력 피해자에서 변혁의 주체로'(이하, '피해자에서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간'과 '성노예'는 마야 선주민들의 언어로는 쉽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야요리상 홈페이지[9])   다음은 주요 증언들 중 하나이다.  "'저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군인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즐길까' 라며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거기엔 남자도 여자도 병사도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던 거예요. 포로들은 굶주리고 잠도 못 잔 상태여서 휘청거렸는데, 그 상태에서 강간을 강요한 겁니다." (중요증언 027 가해자 1982년)[10] 내전 시기에 여성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야 했다. 살상을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중에도 그녀들은 군인들에게 밥을 해서 나르고, 춤 추고, 강간당하고 행진을 강요당했다.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 12월 29일에 게릴라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과 정부군 사이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에 기반한 재판이 요청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과테말라에서는 평화협정 때 국가권력이 만든 「국민화해법」에 의해 내전 중 발생한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어 있었고, 성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이유로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에서는 2007년부터 국제사회에 피해의 실태를 호소하여 내전 중에 전투수단의 하나로서 성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2010년에는 드디어 국가에 대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를 목표로 하는 민간 주최의 법정을 개최하게 된다.    2010년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 성폭력에 대한 면책을 해제하다  2010년 3월 4일부터 이틀간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00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이하 '여성인민법정')이 개최되었다. 각국이 국제 인도법과 국제 인권법에 따라 무력 분쟁 기간과 그 이후의 불/비처벌을 종식할 것을 권고하고, 특히 여성과 여아가 성폭력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행된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전쟁 종식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에 주목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20'[11]이 통과된 지 2년 만이었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피해 여성들이 원고로서 앉아있었고, '명예판사'로는 과테말라에서 치안부대에 의해 구류된 여성들을 강간한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낸 마야족 여성 후아나 멘데스, 후지모리 정권하 페루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구라데스 카나레스, 우간다 전시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티디 아팀, 2000년 여성법정의 참가자였던 아라카와 시호코(荒川志保子)가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모두 법률가가 아니라 성폭력에 맞서 싸운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12] 여성인민법정이 2000년 여성법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원고들의 익명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증언자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상의 증언석에는 증언자의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가림막을 설치했다. 원고들 중에는 가족들 모르게 법정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첫 날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둘째 날에는 9명의 전문가 증언이 있었는데, 원고가 익명이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들에 대한 증거 수집을 하지는 않았고, 내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명예판사들이 읽어 내려간 최종판결문에는 내전 시기 과테말라 형법 및 국제법에 의거할 때 중요한 위반행위가 자행되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 및 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행위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선고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최종판결은 면책과 그로 인한 불처벌이 계속됨으로 인해 성폭력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 해제, 국제형사재판소 설치조약의 비준,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공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실행, 재발방지를 위한 정책입안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을 권고하였다.[13]   2016년 전직 군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 세푸르 자르코 재판 '피해자에서 주체로' 프로젝트는 '침묵을 부수는 여성들'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이는 여성 변호사 조직인 세 단체, '과테말라 전국여성연합(UNAMG)', '사회심리행동과 공동체연구 그룹(ECAP)', '세계를 바꾸는 여성들(MTM)'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과테말라 동부 세푸르 자르코(Sepur Zarco) 지역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여성 15명이 지역 여성 단체와 유엔(UN WOMEN)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최고 법원에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2회의 청문회를 거쳐 2016년 3월 2일, 드디어 법원은 강간, 살인, 노예로 인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전직 군인 2명을 기소하고, 여성 생존자들과 지역사회에 18개의 보상조치를 부여했다. 과테말라 국내 법원이 국내법과 국제 형사법을 이용하여 분쟁 중 성노예 혐의를 고려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이들은 내전이 가장 격렬했던 1982년, 군에 의해 남편들이 '강제 실종'되고 집이 불태워진 후 수 년에 걸쳐 마을에 남아있던 군의 주둔지에서 성노예가 되었다. 주둔지는 1988년에 폐쇄되었고 피고는 당시 군인과 자경단원 등을 비롯한 직접적인 가해자와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었다. 재판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한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싸움의 역사적인 성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하고 전시 성폭력의 정의를 확립한 것이었다. 법원은 국가가 마을과 그 주변 마을에 집단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과 농촌 지역 사회가 종종 부정당하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처음으로 지역에 고등학교와 보건 클리닉을 세우고, 살해당한 여성의 남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것 또한 이 조치에 포함되었다.[15]   에필로그 다시, 불/비처벌의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묻다 그러나 세푸르 자르코 재판 이후로도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살해, 즉 페미사이드(Femicide)는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과테말라 정부는 법원이 명령한 집단 배상 조치의 대부분을 실행하지 않았다. 세푸르 자르코의 사례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범죄에서부터 최근의 인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증명했다.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20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는데, 피해자의 83%가 마야 족이었고, 기록된 626건의 학살 또한 대부분 마야 공동체에서 발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 시기 전시 성폭력은 억압받는 마야 선주민과 정부군 병사의 가해라는 구도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때문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과테말라의 상황, 미국과 쿠데타 세력의 공모, 과테말라의 미사용 토지를 보유한 해외 기업의 문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인종주의 등이 착종하는 지점을 살피며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2000년 여성법정과 이를 계승하여 10년 뒤에 열린 과테말라 여성인민법정은 미완의 과제로서 식민지 책임과 (식민)기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비처벌의 문제를 공통으로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9년, 과테말라에서 10~14세 여성들의 임신이 큰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가정 출신인 동시에 성폭행 피해자였다. 폭력의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성폭력은 선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지인 탓에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16] 이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선주민 소녀들 사이에서 생겨난 호신술 열풍이다. 2015년 이후 태권도 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호신술이 선주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과테말라 태권도 대회의 우승자 미리암 쿠쿨 샘(17)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학교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힘이 더 세다며 항상 우리를 괴롭혔어요. 이제 남자들의 괴롭힘은 두렵지 않아요. 태권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해줬어요."[17]   10대 선주민 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COVID-19 기간 중에 더욱 악화되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은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증가하는 가정폭력에 직면하고 있으며, 학대자와 계속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이다. 그 결과 10대 임신과 모자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부족한 농촌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10대 여성들은 스스로의 문화 활동을 이끄는 Las Niñas Lideran(Girls Lead) 라는 조직을 만들어 자살율을 줄이고, 교육 접근성을 높이며 의료 서비스를 늘릴 것, 폭력 생존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했다.[18] 우리가 이들의 홈페이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슬로건은 이렇다.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가 매일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과테말라의 여성들은 지금도 일상화된 성폭력에 맞서기 위한 여러 시도들의 한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으나 배상받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했던 노력을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에 비유해서 말한다.  "우리는 옥수수 씨를 뿌렸어요. 우리가 먹을 순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 씨를 말이죠."       각주 ^ 한때 금칙어였던 '인민(people)'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이 단어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인민' 개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년, pp.185~189). 이렇듯 '인민'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국민' 혹은 '시민' 개념은 필연적으로 비국민, 난민 등의 '배제된 존재들'을 양산하고, '민중'은 한국에서 있었던 특정한 시기의 민주화운동을 상기시키기에 people의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people의 번역어로 '인민'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People's Tribunal 또한 '인민법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센터 엮음, 강혜정 옮김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년, pp.300~301. ^ 한일 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한일협정을 근거로 줄곧 법적 판단을 미루어 왔는데, 거꾸로 그런 종류의 국제법이나 국가 간 조약 등을 피고 혹은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민화된 국제법'이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인민화된 국제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법정 혹은 새로운 법적 형식의 발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심아정, 「'권력 없는 정의'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인민법정'-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의 사례를 중심으로」『일본연구』 제30집, 고려대일본연구소, 2018년, 48쪽 ^ 노용석, 「20만 명 숨진 과테말라 내전, 과거사 청산의 기록들」, 『오마이뉴스』 (기사입력일: 2018년 3월24일, 기사검색일: 2020년 11월14일). ^ 박구병, 「과테말라의 내전 종식 이후: 평화협정 이행의 험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vol.31, No4, 2018년, 21쪽. ^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 일명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1998년 4월 26일, REMHI 프로젝트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한 지 이틀 만에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후안 제라디 주교는 집 밖에서 암살되었다. REMHI는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 기간 동안 저질러진 잔혹행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이끌었던 전례 없는 시도로, 대교구는 1995 년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요란다의 생애는 주로 아래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2015년 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Katia Orantes가 진행한 비디오 인터뷰. Stephen O'Brien이 수집한 구두증언에 대해서는 Stories from Guatemala(Oral testimony illuminating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storiesfromguatemala.com/ (기사입력일: 2020년5월15일 최종검색일: 2020년10월20일) ^  https://www.wfphr.org/yayori/award/y_2009.html(기사검색일 2020/11/02).야요리상은 전쟁과 성차별이 없는 21세기를 위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는 활동가,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를 선정해 수여하는 여성인권활동장려상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개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를 기념하여 이름 붙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야요리상'과 '야요리저널리스트상'을 수여해왔으며 2014년에 종료되었다. ^ 관련 증언들은 마쓰이 야요리상 홈페이지의 '야요리상' 수상 기념 스피치 투어 자료집(2009년 12월)을 참고할 것. http://www.jca.apc.org/recom/sonrisa/200911yayori-siryo.pdf (기사검색일: 2020/11/02). ^  UN SCR 1820의 원문은 유엔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un.org/ruleoflaw/blog/document/security-council-resolution-1820-2008-on-women-and-peace-and-security/ ^ 柴田修子 「戦時性暴力の被害者から変革の主体へ⎯中米グアテマラにおける民衆法廷の仕組み」 『立命館元号文化研究(23巻)2号』, 2011年, pp.75-76. ^ 최종판결문은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HRC)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https://www.ghrc-usa.org/Resources/2010/tribunal_de_conciencia.htm#pronunciamiento ^ 「2012年11月14日 「沈黙を破ってーーグアテマラ戦時下性暴力スピーキングツアー2012」 アナ・アリシア・ラミセス・ポップさん」 , 同志社大学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研究科, 「女性・戦争・人権」学会 홈페이지 https://www.war-women-rights.com (기사검색일:2020/11/02). ^ Sepur Zarco case: The Guatemalan women who rose for justice in a war-torn nation: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18/10/feature-sepur-zarco-case (기사입력일:2018/10/19, 기사검색일: 2020/11/02). ^ 손영식, 「여기는 남미: 과테말라 10~14살 임신 급증, 대부분 성폭행 피해자」, 『서울신문』(기사입력일: 2019/03/06, 기사검색일: 2020/11/03) ^ 변선구, 「과테말라 원주민 소녀들의 태권도 발차기, “성폭력 두렵지 않아요”」, 『중앙일보』(기사입력일: 2019/11/29, 기사검색일: 2020/11/03) ^ UN WOMEN 홈페이지 https://www.unwomen.org/en/news/stories/2020/11/i-am-generation-equality-ixchel-lucas  

    심아정

  •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1) - 마르디옘, 스하나 씨 이야기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1) - 마르디옘, 스하나 씨 이야기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안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했을 때고, 두 번째는 위안소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이야기한 오늘입니다. 내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1997)라는 책의 머리말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피해자와 대화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진심을 다해 답했다. “당신이 위안부가 된 것은 결코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녀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란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말해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전쟁 지역과 점령지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위안소 이외에서도 다양한 성폭력을 자행했다. 인도네시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단기간에 승전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군정을 펼친 것은 1942년 3월부터이다. 마쓰우라 타카노리(松浦敬紀, 일본의 교육자-역자)가 엮은 『영원한 해군』(문화방송개발센터, 1978)에 수록된 「23살에 3천 명의 총지휘관」에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임기 1982년~1987년)가 주계 장교(군의 행정·회계를 담당하는 장교)로서 인도네시아에 부임하여 위안소를 설치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3살에 3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맡았다. 머지않아 원주민 여성을 덮치는 자와 노름에 빠지는 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나는 고심하여 위안소를 설치해준 적도 있다.”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운영을 감독한 것은 주계부(회계부)다. 1993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부 장관이 ‘일본 군정 하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 실태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 상담 등의 지원 활동을 하는 법률구조단(LBH, Lembaga Bantuan Hukum)은 이 성명을 환영하며 1993년 9월까지 피해자 등록 작업을 실시하였고 17,245명의 ‘로무샤(강제 징용 노동자)’와 420명의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 등록을 마쳤다. 이 중 특히 열정적으로 나선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등록된 일본군성폭력 피해자는 약 300명에 달했다.   1995년 8월, 헤이호(Heiho, 兵補) 협회에서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받았고 22,234명의 피해자가 등록되었다. 헤이호 협회는 일본 정부가 지급하지 않은 임금 청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회원은 전(前) 헤이호와 그 유족까지 7만 2천명이며 인도네시아 각지에 134개 지부를 두고 있다. 나는 법률구조단과 헤이호 협회가 조사를 진행한 직후인 1995년~1996년에 두 조직의 도움을 받아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마르디옘 씨 이야기   마르디옘 씨는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을 신고해 등록된 사람이고, 이후 반자르마신 교외의 뜰라왕(Telawang) 위안소에 함께 연행되었던 여성들을 설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마르디옘 씨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그가 10살 때 타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 번은 음악단 공연에 출연한 적도 있다. 일본군이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반자르마신을 침공한 직후인 1942년 2월에서 5월까지 반자르마신의 초대 시장을 지낸 쇼겐지 칸고(正源寺寛吾)가 인솔하는 무리가 욕야카르타 인근에서 48명의 어린 여성을 모집했다. 당시 막 13살이 된 마르디옘도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가수인 렌지 씨로부터 ‘보르네오에 가서 함께 연기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수라바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수라바야에서 2주간 기다렸다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한 끝에 반자르마신에 도착했다. 함께 출발한 48명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머지 24명은 뜰라왕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높은 담장이 둘러진 요자형(凹字型) 건물의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방에 한 명씩 들여보냈으며 각자에겐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마르디옘의 방은 11번째 방이었고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모모예였다. 마르디옘이 끌려간 곳은 일본군의 규정에 따라 일본인 치카다(チカダ)가 인도네시아인 남성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위안소였다. 그녀는 위안소에 들어간 첫날부터 6명의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날의 선혈과 얼얼한 아픔, 몸에 빠끔히 뚫린 구멍은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았다.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군인의 ‘위안’을 강요당한 것이다. 끌려간 여성들은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는 군인을, 그 이후부터 밤 12시까지는 군속 대우 관리나 전화국 직원 등을 상대했고 위안소 이용 요금은 군인은 1시간에 2엔 50전, 군속은 3엔 50전, 숙박은 12엔 50전이었다. 이용 접수를 받는 벽에는 방 번호와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은 패가 일렬로 걸려 있었고 이용자는 그것을 보며 자신이 이용할 방을 지정했다. 요금과 맞바꾼 표와 위생 콘돔을 건네받은 이용자가 방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이용자로부터 표를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가 끝나면 표의 장수를 위안소 관리인에게 확인받았다. 하지만 마르디옘은 치카다로부터 보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에 식사는 2번이었고 첫 반년 정도는 제대로 된 식사가 주어졌지만, 점점 부실해졌으며 양도 적어졌다.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자주 때렸다. 오후 5시가 되면 위안소의 이용자가 군인에서 사복 이용자로 바뀐다. 마르디옘은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싶었지만, 손님이 불렀다. 바로 가지 못하면 치카다에게 얻어맞았다. 토요일에는 군의관이 찾아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했고 매일 아침 8시에는 위생병이 검사를 했다. 정오부터 밤 12시까지 몸을 혹사당하고 뒷정리를 한 후에 취침한다. 이용객의 숙박이 있을 때는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마르디옘은 간혹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검사에 지각하는 날에도 치카다에게 구타를 당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24명 중 5명이 병에 걸려 위안소를 나가게 되었다. 마르디옘이 14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말랐던 마르디옘의 몸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치카다가 눈치채고 검진을 받게 했다. 임신 5개월이었다. 낙태약을 일주일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어 중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약도 수술 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인 여성 의사가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태아를 긁어 떼어냈다. 머리꼭지까지 달하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수술로 떼어낸 태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남자 아이였다. 마르디옘 씨는 그 아이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마루디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땅에 묻었다. 수술 이후 마르디옘 씨에게는 3개월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습으로 인하여 병원에서 위안소로 돌아왔다. 치카다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마르디옘 씨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때리고, 차고, 의식이 없어질 때까지 폭력을 가했다. 이는 ‘위안부’는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제재였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자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방으로 불러 몸을 만지고 강간했다. 그날부터 모모예로써의 임무가 재개되었다. “11번 방 모모예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계속해서 그때의 끔찍했던 일들이 쳇바퀴처럼 맴돌아요.” 독실한 이슬람교 신도인 마르디옘 씨는 ‘기억의 쳇바퀴’를 ‘악마의 윤회’라고도 표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4살 때 마취 없이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던 고통 이상으로 내 아이를 죽이고 만 죄의 무거움에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파요.” 그런 마르디옘 씨가 남편의 유족 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수급자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일본의 매춘부!” 욕설을 퍼부은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마르디옘 씨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일 것이다.     스하나 씨 이야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한 후 일본군은 반둥 치마히에 있던 광대한 규모의 네덜란드 군 기지를 사용했다. 치마히 심팡 거리에는 ‘8개의 집’이라고 불리는 장교용 주택이 있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때의 고급 양식 주택 8채 전부를 위안소로 사용했다. 15살이었던 스하나 씨는 그 중 4번째 집에 일 년 반 동안 갇혔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은 자바섬이다. 일본군은 자바섬에 남방군의 총 병참 기지를 두고 인적, 물적 자원의 보급 기지로 삼았다. 반둥에는 제16군의 야전 보급을 위한 보급 창고가 있었고 이곳에서 남방군 전체 군수품의 조달, 제조, 보급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남방군 야전 조병창(造兵廠, 무기, 병기를 만드는 곳-편집자 주)도 있었는데 남방군 전역에서 쓰이는 병기를 수리 및 제조했다. 치마히의 화물 창고는 군수품과 병기를 남방군 전역으로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하나 씨의 부모님은 치마히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노천 상인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시장에 나가고 집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병사 몇 명이 스하나 씨의 팔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자동차에 태웠다. 병사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불안했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곳은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심팡 거리의 번듯한 건물이었다. 스하나 씨가 들어간 방에는 이미 어린 여성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여성이 요리사, 두 명의 남성이 그 밖의 잡무를 맡았고 매주 토요일에 군인이 와서 이 세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헌병도 순찰하러 왔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위안소에는 방이 세 개 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가 3개씩 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호명하면 여성들은 그 방에 들어가야 했다. 커튼조차도 치지 않은 3개의 침대에서 어린 여성들은 일본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 스하나 씨는 다른 이들이 자신과 똑같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끝까지 병사들에게 저항했다. 그때마다 매를 맞았다. 스하나 씨는 어느 날 세 명의 장교에게 교대로 호출되어 마중을 나온 차를 타고 장교 숙소로 향했다. 위안소에서 머무르던 스하나 씨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벗어나 강을 따라 있는 가리담 거리에 있던 네덜란드 군 장교용 주택으로 옮겨졌다. ‘8개의 집’과 비교하면 한 채당 대지 면적은 좁았지만, 주택 수는 훨씬 많았다. 그 곳에는 콘돔도 절대 쓰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는 이케다라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스하나 씨가 주저하면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때렸다. 이케다가 스하나 씨의 자궁에 상처를 입힌 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 출혈도 시작되었다. 비정상적인 양의 출혈이 있었는데도 잠깐 쉴 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쓸모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중국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출혈이 있은 뒤로부터 꽤 많은 시일이 지난 후였다. 일 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스하나 씨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스하나 씨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녀의 숙모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스하나 씨를 찾으러 일본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헌병대에도 갔다. 아버지가 군인에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을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상인 몇 명이 목격했다. 몇 번이나 내팽개쳐져도 아버지는 군인에게 매달렸다. 군인은 군용 칼집에서 칼을 꺼내 도망치려는 아버지의 등을 베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는 “딸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며 땅 위로 쓰러졌다. 아버지의 시신은 근처 사람들이 집까지 옮겨 주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데다가 남편까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감당치 못할 큰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결국 극도로 쇠약해져 병으로 죽고 말았다. 부모님의 죽음, 특히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가 ‘8개의 집’ 근처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스하나 씨는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궁 출혈이 계속 이어졌다. 숙모가 차마 감당하지 못하자 숙부가 스하나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상처가 곪아 개복 수술로 자궁을 적출했다. 수술비는 부모님이 남긴 집을 팔아 마련했다. 정신착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됐으나 정신질환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자궁에 고름이 생겨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스하나 씨는 말했다. 스하나 씨와 같은 위안소에 있었던 에미 씨, 에마 씨, 오모 씨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네 명 모두 일본군이 철수한 후 줄곧 독신으로 생활해 왔다. 결혼 이야기가 있다가도 ‘일본의 여자’였다는 낙인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혼담은 깨졌다. 에미 씨의 경우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위안소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니 집은 불타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협박을 당해 에미 씨는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건데 ‘일본의 여자’가 되었다며 일본에 협력한 집안으로 내몰려 반일파 인도네시아인들이 불태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2) - 위다닌시, 드리스 씨 이야기
    2021년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2) - 위다닌시, 드리스 씨 이야기

    위다닌시 씨 이야기   자바섬 서부의 수카부미는 네덜란드식민지시대 때부터 유명한 고급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수카부미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와룽키야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의 집에서 도보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네덜란드인이 살았던 낡은 집이 있었다. 와룽키야라 마을로 온 일본군은 그 집을 군영으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을 매우 무서워했다. 멀리서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면 샛길로 피했다. 샛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길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고개숙여 인사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얽히게 되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 군정 하에서 조직된 도나리구미(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말단의 지역조직) 등에게 스파이 용의자 등으로 밀고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일본군이 군영으로 삼은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에서 어린 여성들이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무 농원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집을 비워 저녁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위다닌시 씨는 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일본군 몇 명이 찾아와 있었다. “간호부로 일하지 않을래?” 어눌한 인도네시아어로 한 군인이 말했다. 당시 위다닌시 씨는 15살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사 일을 돕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돈을 벌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본 군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 제안은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위다닌시 씨는 무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몇 명의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트럭이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간 곳은 네덜란드인이 살던 낡은 건물이었다. 위다닌시 씨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죽 장화를 신은 군인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강간했다. 그 군인은 위다닌시 씨가 집에서 끌려왔을 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의 이름이 다나베(タナベ)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다나베의 뒤를 이어 위다닌시 씨를 강간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다닌시 씨가 묵은 방은 하얀 회반죽 벽에 아래쪽은 목재로 마감한 세련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6명의 어린 여성들만 있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그 낡은 건물을 찾아오는 일본군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 식사는 당번병이 가져왔다. 위다닌시 씨는 거기에 온 병사가 요금을 지불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직접 금전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들은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계속해서 강간을 당했다. 병사들이 방에 들어오면 위다닌시 씨는 “꺼져”라고 욕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맞았다. 병사에게 저항하여 식사를 받지 못한 날이 이어졌다. 칼을 빼 들고 “찔러 죽여버린다”고 위협하는 병사도 있었다. 목덜미에 군용 칼끝을 갖다 대고 폭력적인 체위를 강요하는 군인도 있었다. 자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 이상으로 강간을 당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4개월 후 일본군 부대가 보고르로 이동하면서 이 여성들도 보고르로 연행되었다. 보고르에서 일본군은 이전에 네덜란드군이 쓰던 시설에 주둔했고, 군 부대 규모는 와룽키야라 마을보다 훨씬 컸다. 근처의 위안소에 와룽키야라 마을에서 온 위다닌시 씨 일행이 포함되어 ‘위안부’의 숫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일 년 후 20명 중 4명이 반둥으로 이동되었다. 위다닌시 씨도 반둥으로 이동되어 반둥의 위안소에서 또다시 일 년을 보냈다. 와룽키야라 마을에 있던 부대와는 보고르, 반둥에서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부대의 병사는 식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위다닌시 씨는 위안소의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위다닌시 씨는 당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한 언니가 반둥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언니네 가게까지 7㎞를 걸어가 그곳에서 일하며 지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다. 인도네시아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국가로서 나아가기 시작한 때다. 위다닌시 씨는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부모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모님은 자취를 감춘 딸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딸 찾는 건 포기해. 찾으려고 하면 죽여버린다.” 부모님은 일본군에게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딸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머릿속에 떠오르는 딸의 불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위협을 당했고 비탄이라는 감각조차 잃은 채 피폐해져 갔다. 아버지는 어디에도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를 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딸에게 퍼부었다. 일본군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는 딸의 불운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위다닌시 씨가 일본군에게서 받은 피해는 일본군의 잔학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울해하는 나날이 늘어갔고 건강이 나빠져 일 년 후 돌아가셨다. 위다닌시 씨는 그 후 반둥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18년 전에 죽었다. 남편에게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굴욕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을 봉인하고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누워있을 때면 봉인해 두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봇물 터지듯 선명하게 밀려들어 왔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불쾌한 감정, 혐오심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라 아픈 몸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리스 씨 이야기   드리스 스만포 씨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군의 하사관이었다. 드리스 씨는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드리스 씨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집 정원 앞에서 말에 올라탄 일본인 군인이 드리스 씨를 가만히 주시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딸을 데려가겠다”라고 부모님에게 통보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부모님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직감한 드리스 씨는 군인을 따라갔다. 수카부미 부눈 거리에 있는 커다란 집에 도착한 드리스 씨는 자신을 끌고 온 가나가와(カナガワ)중위로부터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드리스 씨와 같이 장교 등이 혼자서만 끼고 살던 여성들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친타’라고 불렀다. 가나가와 중위는 드리스 씨가 다른 일본 병사들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으며 외출을 금지했다. 가나가와 중위 곁에는 시중을 드는 당번병인 마치다(マチダ)가 있었다. 가나가와는 평일에는 업무로 집을 비웠고 마치다만 집에 남아 드리스 씨를 감시했다. 드리스 씨는 어머니가 보고싶었지만 마치다의 감시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부모님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끌려올 것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날 드리스 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가나가와 중위는 점차 발길을 끊었다. 당시 드리스 씨는 임신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태내의 생명을 지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젊을 때의 중절은 나중에 몸에 안 좋다며 드리스 씨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4개월 무렵이 되자 가나가와 중위는 전혀 집에 오지 않았기에 드리스 씨는 마치다에게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1945년 7월 17일,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출산했다. 남자 아이였다. 처음 신생아의 얼굴을 봤을 때를 회상하며 드리스 씨는, “슬펐어요.” 이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아들, 에디 씨가 10살이 되었을 때 드리스 씨는 아이가 있는 남성과 결혼했다. 에디 씨는 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도 예뻐해 준다고 느꼈다. 드리스 씨와 남편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드리스 씨와 인터뷰를 했을 때 이미 드리스 씨의 남편은 돌아가셨고, 드리스 씨는 남편이 데려온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보다 그 아들이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 씨는 가나가와 중위가 혹시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리스 씨는 굳은 표정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랜 세월 가나가와 중위와 얽힌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지역, 점령지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①군이 통솔하여 설치한 위안소, ②소수의 장병과 소부대가 멋대로 만든 ‘강간소’(강간소는 중국에서 사용한 용어로서 이 원고에서는 위다닌시 씨가 처음 끌려갔던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이 해당된다), ③친타와 같이 한 명의 군인(장교)에게 속한 여성의 사례, ④주둔지 근처의 민가로 침입 후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는 경우, ⑤군사 작전 때 한 명 또는 여러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⑥항일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성폭력, ⑦집단 학살 때의 성폭력 외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