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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의 본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 - 『용맹호』 권윤덕 작가 인터뷰
    2021년 인터뷰 ‘폭력’의 본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 - 『용맹호』 권윤덕 작가 인터뷰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신간 『용맹호』(사계절, 2021)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쟁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전쟁에는 온갖 폭력과 잔인함, 묵인과 공조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전군인의 몸에 그대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살생보다 생명에 가치를 두는 일상을 살아야 할 때, 그 간극에서 참전군인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의 말을 통해 그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본다.  권 작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꽃할머니』(사계절, 2010)부터 『나무 도장』(평화를품은책, 2016), 『씩스틴』(평화를품은책, 2019), 그리고 최근의 『용맹호』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전쟁과 폭력, 가해와 피해에 대한 관점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용맹호』는 『꽃할머니』를 마무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주목할 만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전쟁과 여성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가해를 함께 다뤄야 『꽃할머니』도 끝맺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10년 후 『용맹호』로 비로소 이야기의 매듭을 지었다. 그사이에 출간한 『나무 도장』과 『씩스틴』에서는 각각 제주 4.3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그림책을 통해 한국 역사 속의 ‘폭력’을 지적해온 작가가 앞으로 남겨둔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아픈 역사를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시각으로 써 내려온 권윤덕 작가를 만나 함께 나눈 대화를 전한다.   Q. 『용맹호』 출간 이후 어떤 나날을 보내고 계시나요? 강연도 나가고,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갖고 있어요. 『꽃할머니』를 끝내고 난 뒤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이 넘어서야 책이 나왔네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성해낸 걸 자축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웃음).    Q. 『꽃할머니』 작업 이후 베트남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꽃할머니』 작업을 하면서 일본군‘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했던 일본 및 세계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 자료를 읽으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돌아보게 됐고, 가해국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결과, 다음 책에서는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이야기를 해야 『꽃할머니』가 완성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꽃할머니』와 『용맹호』 사이에 그림책 『나무 도장』과 『씩스틴』을 출간하셨어요. 그 이야기들은 어떻게 다루게 된 건가요. 『나무 도장』에서는 처음으로 (권력의) 수행자이자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어요. 가해자이긴 하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어느 정도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사람이죠. 누구한테나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거든요. 『씩스틴』에서는 계엄군이 주인공이지만 그 외형을 ‘총’으로 표현했어요. ‘씩스틴’은 마지막에 광장에 남아 생명을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두 책의 출간 과정을 거치면서 가해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성격은 다르지만 ‘용맹호’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Q. 그렇다면 ‘용맹호’가 호랑이로 묘사된 것도 그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을까요?  『꽃할머니』에서는 실제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다큐멘터리처럼 진실하게 다가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었죠. 그래서 『씩스틴』에서는 실제 인물 대신 총을 주인공으로 했어요. 『용맹호』도 마찬가지예요. 주인공을 참전군인인 사람으로 설정하면 그 배경과 상황에 현실적 제약이 많아요. 그러나 호랑이로 설정하면 이야기의 폭이 훨씬 넓어지죠. 가슴이나 귀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도 사람에게 적용했다면 어색했을 거예요.  Q. ‘용맹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면요. 용맹호 씨는 자신의 과거를 몸의 고통으로 직시해 갑니다. 그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이고, 그 죄업이 자기 몸에 그대로 나타나죠. 그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착한 참전군인’이 되어서는 안 됐어요. 만약 그렇게 묘사한다면 “가해자도 피해자다”라는 식으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로서의 가해 행위, 그 잔혹함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야 가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따라서 용맹호 씨는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어야 했어요.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어요.  몸에 신체가 덧붙여지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1]의 피해자 사진을 보고 나서였어요.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학살 후 퇴각한 곳을 미국군이 들어가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거든요. 그중에 ‘가슴이 잘린 채 살아있는 여자’라고 설명을 달아놓은 사진이 있어요. 가슴이 잘린 끔찍한 고통을 직접 그릴 수는 없었기에 반대로 가슴이 생겨난 것으로 풀어냈죠.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Q. 성폭력 장면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셨다고요.  처음엔 성폭력 장면을 추상적으로 그렸어요.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 사진을 보면 여성이 쓰러져 있는 곳이 논이에요. 그래서 벼가 눕혀져 있고, ‘논라’[2]가 떨어져 있고, 슬리퍼가 나뒹구는 장면으로 그렸죠. 그런데 그 장면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니 성폭력을 표현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의미가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베트남 활동가 레호앙응언 님과 구수정 선생님(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에게 자문을 구했어요. 소개해 주신 한겨레신문 기사(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도 읽었고요.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이 실린 기사였죠. 놀라운 건 당시 막사에서 성폭행을 당한 분들이 많다는 거였어요. 팜티언이라는 분의 증언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할머니는 꾸이년의 고보이 평야에서 체포되어 뚜이프억현 프억선의 한국군 기지로 끌려갔다. 기지에는 일렬로 나란히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참호 속에 한국군이 1인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속에 끌고 온 여성들을 집어넣었다. (출처: 한겨레, 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04.24.)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꽃할머니』에 썼던 내용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전쟁 상황에서 여성이 겪는 피해의 구조가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걸 알았죠. 막사를 사건 배경으로 그릴까도 생각해봤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마을 수색을 나간 군인들이 여성들을 숲이나 뒷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는 상황이 훨씬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기사 내용 중 레티히에우 할머니의 사례를 참고했어요. 그의 증언에 한국군이 성폭행 후 옷을 벗겨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졌죠. 뭉텅뭉텅 잘려 나간 검은색 옷으로 당시 상황을 표현했어요.  Q. 『용맹호』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심각하고 무거운 반면 그림과 색감이 참 아름다워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꽃할머니』 작업 초반에는 무섭고 끔찍한 그림들로 스케치를 했었는데 심달연 할머니에게 못 보여주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누구를 위해 이 책을 만들고 있는 건지 다시 한번 돌아봤어요. 심달연 할머니가 이 책을 보고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고, 당신이 살아온 삶이 소중하다는 걸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꽃으로 대신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직접적인 폭력을 그리는 대신 은유와 비유, 상징을 빌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 거예요. 아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꽃할머니』 때 알게 됐어요. 이후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게 됐고요. 특히 『용맹호』에서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을 대비시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Q. 혹시 베트남 독자들과의 만남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베트남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피해자분들이 한국에 오시면 책을 보여드리고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베트남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 학교에 다니는 베트남 출신 어린이는 이 책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요. 베트남에 번역 출간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또 참전군인 중에는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의 얘기도 듣고 싶어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Q. 가해자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일인 만큼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아정 독립연구가가 ‘가해자성’에 대해 쓴 글이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했던, 혹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잘못들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인정하려 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해자성’의 핵심”[3]이라고 했죠. 우리 사회가 용맹호 씨를 용서할 수 없더라도 그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몰아내면  용맹호 씨는 폭력을 만들어 낸 단단한 구조 속에 숨어버리고, 끝내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참회할 기회를 줄 수 있는 시민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용맹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시민들이 쓰러진 용맹호 씨를 위해 달려오고 119를 불러주잖아요. 그 장면을 통해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Q. 『용맹호』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용맹호’가 어떤 가해를 저질렀고 또 그로 인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폭력의 재현에 있어 작가님이 생각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지요.  저는 폭력을 재현해놓은 걸 보면 누군가 모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 장면에서 가학적인 면을 즐기거나 본인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까 봐 폭력을 그대로 그릴 수 없더라고요. 더욱이 어린이가 보는 그림책에서는 더 조심하게 됩니다. 그럼 폭력을 그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폭력을 이야기할까, 매번 어려워요. 그래서 상징과 은유의 방법을 빌어와 이야기합니다. 현상과 함께 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함께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꽃할머니』, 『나무 도장』, 『씩스틴』, 『용맹호』 등 한국 근현대사 속 ‘폭력’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작업을 계속해오고 계세요.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지, 또 작가님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폭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은 오랜 기간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잘 무너지지 않아요. 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은 폭력의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지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시 성폭력 속에서 여성 인권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아직 많은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어린이의 시선도 폭력의 단단한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평화로운 사회, 즉 누구든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폭력의 구조부터 점차 허물어 가야 해요.  Q. 예비 독자분들이 『용맹호』를 보고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용맹호 씨는 자신이 저지른 가해 사실을 몸의 변화를 통해 고통스럽게 겪어갑니다. 독자가 그것에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가해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될 수 있거든요.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심지를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용맹호 씨는 피해를 품은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어요.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은 ‘전쟁과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서 일본군‘위안부’와 함께 이야기될 필요가 있고요. 또 베트남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우리의 잘못을 물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앞으로 그림책을 통해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으신지요. 『용맹호』를 끝내고 나서 아픈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고 재미있는 걸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 아픈 이야기는 바로 세월호 이야기인데요. 큰 틀에서 구성은 짜놨지만 세세한 증언을 모두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 멈췄어요. 그림을 그릴 때 피해자의 고통에 몰입하다 보니 『꽃할머니』나 『용맹호』 작업 중에 몸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조금 쉬어가야 하나 보다 싶어요. 『꽃할머니』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5년 정도를 해왔으니 변화를 줄 때도 되었고요.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벼워지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용맹호』에서 자연을 그릴 때 많이 위로가 됐는데, 앞으로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Q. 작가님에게 그림은 또 다른 ‘언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하얀 화판 앞에 앉아서 선을 하나 그으면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떤 상황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감정이 끌어올려지기도 하죠. 그게 선으로 색으로 여백으로, 제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과 함께 화면에 그려져요. 그리고 한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찾아가죠.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기도 하지만 즐거움 또한 있어요. 다른 어떤 일보다 재미있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이죠.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권윤덕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장소: 권윤덕 작가 자택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편집자 주) 1968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의 주민 70여 명(69~79명 추정)을 학살했다는 의혹의 사건 ^ (편집자 주) nón lá. 야자나무 잎사귀로 만든 원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 ^ 심아정,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참전군인A와 ‘함께 말한다’는 것」,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년, 62쪽

    퍼플레이 강푸름

  • 공창이라는 말의 정치학
    2021년 논평 공창이라는 말의 정치학

    들어가며―국가와 공창제 ‘위안부’와 공창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처럼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견해 및 지식에 따라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지는 말도 드물 것이다. 일본에는 ‘위안부’제도와 공창제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나누어 보려는 견해가 있다. 즉 시기가 전시냐 평시냐, 적용된 법이 전시법이냐 시민법이냐, 규칙에 폐창규정이 있었나 없었나 등이다. 그러나 과연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이분법이 유효했을까. 식민지 조선은 평시에 시민법을 보장했을까? 조선인 창기는 폐창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을까?    우선 식민지 시기의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총독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경찰력은 증강되고 동화정책은 강화됐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창제를 ‘일제가 이 땅에 남긴 해독’으로, 즉 일제 식민지지배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폐지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 심어 놓은 공창제는 과연 무엇일까. 이는 정해진 성매매 구역 내에서 업자나 여성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철저하게 한 것이었다. 그 이전, 즉 에도막부[1] 시대에도 유곽이나 그와 비슷한 장소에서 성매매는 다양하게 존재하였으나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병 검사를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유곽에 있던 여성들은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전차금에 얽매여 성노예 상태와 같았다. 서구에서는 이런 여성들을 흑인 노예에 빗대어 ‘백노예’라고 했으나 일본 폐창운동가들은 백노예를 추업부(醜業婦)[2]라고 번역했다.    공창제는 국가가 병사나 빈민 노동자를 다스리기 위해 근대에 재편성한 것으로, 특히 군대의 병사를 겨냥한 제도였다. 일본은 유럽과 달리 자본주의보다 군사주의가 앞선 후진 제국주의였기에 근대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하기 위해 공창제를 필요로 했다. 또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방 유력자들은 앞다투어 군대를 유치하려고 했다.  일본 정부에 고용된 프랑스 법학자 보아소나드(Boissonade)는 국가가 성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 결과 공창제를 관리하는 것이 지방 관공청이나 (민간)업자라는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은 근대 초기 북해도를 개척하는 데 많은 죄수를 동원했고, 이를 위한 회유책으로 공창제가 이용되었다. 이때 성매매 업자와 창기에게 징수한 세액은 지방세의 80%에 달했다는 놀라운 보고가 남아 있다. 북해도에서 봤듯이 일본이 부국강병(富国強兵)의 나라가 되기 위해 공창제란 국가 성관리책이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을 침략하는 데도 공창제는 교묘하게 활용된 것이다. 도쿄의 유명 유곽이 부산에 상륙하다  『부산고지도』(부산광역시, 2008)를 보면 1881년에는 이미 부산 거류지에 9채의 기루(妓楼∙성매매를 할 수 있는 요리집)가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나카고메루(中米楼)의 옥호가 용두산 산마루에 보인다. 나카고메루는 도쿄 요시와라(대표적인 유곽 지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 난 성매매 업소인데 왜 가까운 규슈지방이 아니라 머나먼 도쿄에서 부산까지 가는 모험을 하게 되었을까?                     구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는 북해도 개척사 장관으로서 많은 병사를 관리해왔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변리대신(全権弁理大臣)으로 조선에 파견된 사람이며 조선 침략을 주장한 강경파이다. 구로다는 단골 손님으로 나카고메에 자주 출입했고, 나카고메 주인과 구로다 사이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나 청탁이 오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카고메 주인 아카구라 도키치(赤倉藤吉)는 3년 기한의 여권을 얻어서 여성 10명을 데리고 조선에 건너갔다. 일본 성매매업자가 낯선 부산에 상륙하기까지 일본 정부와의 은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며, 결코 개인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조선행이라는 모험을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1876년 개항 후, 부산과 원산에서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됐고, 1881년에 일본 영사관은 「예창기영업규칙」을 만들어 거류지에 있는 일본여성에게 세금 징수와 성병 검사를 하게 했다. 전쟁과 점령, 그리고 특별이란 수식어로 감추어진 공창제 그런데 1883년에 인천 개항 때엔 사정이 달랐다. 부산, 원산과 달리 외국인 거류지에 구미열강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본이 거류지에서 성매매를 공공연하게 인정한다는 것이 서구열강에 알려지면 근대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될뿐더러 장차 서구와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데도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 정부는 인천에선 성매매를 금지하게 했다.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변경에 인천 영사관에서는 맹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관리하에 성병 검사를 해야 밀매춘(몰래 성매매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 전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사관과 일본 외무성과의 논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타협안으로 예기 영업을 1892년에 인천, 1894년에 부산, 1895년에 서울에서 허가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청일전쟁, 또 하나의 조일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은 동학농민봉기를 구실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던 것이며, 이에 저항하는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제노사이드’[3]였다. 일본인이 그린 전쟁홍보 그림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약탈, 성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은 조선 여성들은 양쪽 나라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제1군 사령관을 맡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가 남긴 문서(일본군 병사(軍夫)가 민간인 가옥 방화, 재산 약탈, 성폭력을 저질른 것을 인정하고 경고함)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가 호전되리라 기대했고, 청일전쟁 전후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증가했다. 그들을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 예기영업 허가였다. 청일전쟁은 따지고 보면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으려고 일어난 전쟁이니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으려던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적극 일본을 지원했다. 이래서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전쟁을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전후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 숫자는 더 늘었으며 그에 따라 성매매도 활발해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특별요리점, 특별예기란 신조어로 교묘하게 감추어진 공창제가 등장한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놓고 공창제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위의 광고에는 공창제를 나타내는 대좌부(貸座敷)[4]란 말이 쓰여 있다. 이것은 1902년에 가즈키 겐타로(香月源太郎)가 낸 『한국안내』에 실린 광고인데, 조선여성이 접대하는 유곽의 실체를 요리점으로 눈가림했던 것이다. 광고로 부산에서는 이 무렵에 이미 일본 성매매업자들이 조선여성을 싼 값으로 착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성폭력과 성병문제[5]  러일전쟁 때의 『전역통계戦役統計』 「육군군인의 형법 기타 일반법령위반처분 죄명내역」의 「강간∙미수(未遂)∙방조(幇助)」와 「기타 신체에 대한 죄」를 보면 검찰처분은 50건, 군법회의 처단은 31건으로 되어있다. 이런 숫자 뒤에 더 많은 성범죄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한국주차부대(韓国駐箚部隊)도 화류병(성병) 단속에 관한 지시를 러일전쟁 때 내리고 있다. 즉 「병원(兵員)의 단속을 엄격하게 안 하면 화류병 병독이 군대 안에 퍼지게 되고, 병력의 감소와 소모를 가져올 우려가 적지 않아서 각 간부들은 한층 단속을 강화하여 화류병 환자의 증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안동현(중국 단동)에 시찰하러 간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만주군 총참모장)는 군대가 유곽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축소 명령을 내렸다는 일본 외무성 경찰사의 기록이 있다. 이미지 출처: 『남만주의 상업(南満洲ニ於ケル商業)』 (킨코도서적(金港堂書籍), 1907) 고다마가 축소하라던 안동현 유곽은 일본 병참사령부가 1904년 연말에 개설한 유곽인데 이 때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시기다. 사령부는 경찰상, 위생상 단속을 하는데 효율적이며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병에 걸린 여성은 군대가 마련한 진료소에서 바로 입원시켜서 치료를 받게 했다. 위안소를 발명한 일본 군대  군의관 후지타 츠구아키(藤田嗣章)의 회고록[6]을 보면 「철령(鉄嶺)의 병참부는 시험적으로 지역을 정하여 헌병의 단속, 감시하에서 사창(私娼)을 공인하고 매일 오전에 군의관이 성병검사를 실시했다. 합격한 여자들에게는 건강증을 발급하고 싼 값으로 병사에게 접객(接客)할 수 있게 했다. 나무 울타리가 둘러싸인 시설 입구에 헌병이 지키고 출입하는 인원을 한 사람씩 점검했다. 여성의 방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돼 있었다.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마치 극장 앞의 관객을 보는 것과 같았다. 군의관들이 고안한 이 시설은 성교만 하니 시간 낭비도 없었다. 경찰 감독 하에서 여자들이 건강증을 휴대하는 방법도 간이하면서 안전하므로 (전쟁 시의) 시세에 맞는 제도였다」고 군의관은 ’위안소 개설’을 회상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사진과 같이 회상기 내용은 위안소 앞에 몰려드는 병사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군의관들은 이 경험을 30년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되살렸다. 같은 회상기에 나카무라 로쿠야(中村緑野)[7]는 법고문(法庫門)[8]에서의 경험을 후지타처럼 기록하고 있다. 「군정서(軍政署)는 드디어 임시매소부제(臨時売笑婦制)를 허가하게 되어서 상인을 시켜서 비교적 신원이 확실한 만주의 작부를 데리고 와서 유흥을 개업하게 했다. (중략) 막상 이것이 공개되니 여성의 인원수에 한계가 있어서 많은 병졸의 수요에 응하기 어려웠다. 특히 한꺼번에 몰려드는 병사를 정리하기 위해 먼저 그 지역의 건물 내부에 벽으로 막은 여러 방을 나누어 방방마다 따로 출입하게 만들었다. (중략) 여러 부대에 홍보하고 일정을 정하여 인원을 제한, 유흥비는 계급마다 차이를 둔 티켓으로 지불하게 했다. 막상 개업을 하니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연일 밀려와서 성황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은 가소롭다고 할까 전장터가 아니면 차마 못 볼 이상한 것이었다.」 유흥시설을 만든 건 군의관 자신인데 이 문장에서는 몰려드는 병사에 대한 경멸이 느껴진다. 여기서 위안소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으나 1930년대 이후에 일본군이 개설한 위안소의 원형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군의관에 따라 사창이라 하기도 하고 매소부라고도 했으나 아래 그림은 공창이라고 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우키요에(浮世絵) 화가가 군인이 찍은 사진을 모사해서 『풍속화보風俗画報』에 게재한 것인데 처마 밑에 「법고문의 공창」이라는 글이 보인다. 위안소 시설로 쓰인 건물은 관제묘(関帝廟), 즉 중국인들에게는 민간신앙의 장소이다. 이런 데서 중국 여성이 일본 병사를 성접대하게 한 광경을 중국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러일전쟁에 동원된 어느 병사가 봉천(奉天)에서 자기 고향에 보낸 편지 속에 「(이런 시설에)들어가는데 상등은 3엔, 중등은 2엔, 하등은 1엔인데 우리 같은 계급은 들어가고 싶어도 받는 수당이 적어서 못 들어간다」[9]는 구절이 있다. 일본군은 위안소 개설의 이유를 병사의 성폭력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오히려 위안소 개설이 성폭력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 이런 시설에 모집된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위안소는 전후 점령지에 들어온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업소가 되고, 여성들의 상대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즉 위안소가 성매매를 확대시킨 셈이다.  군의관들은 같은 여성을 가리켜 사창, 매소부(매춘부), 공창이라고 불렀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에 맞게 또 다른 명칭으로, 그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을 것이다.   나가며 일본은 제국주의의 초석을 형성하기 위해 군사주의를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으며 병사를 다스리고 회유하기 위해 근대 공창제를 북해도와 조선, 만주에서 활용했다.  그러나 공창제의 주체가 일본제국이란 것이 드러나보이지 않도록 제도와 여성들의 명칭을 수시로 바꾸고 나중에는 업자나 여성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글을 아는 일본여성들마저 끊임없이 바뀌는 명칭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위안부’ 제도가 1930년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창설되고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역사는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 만주, 중국의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군대가 점령한 후 군정서(軍政署)에서 민정서(民政署)로 바뀌고 위안소는 일반 유흥소나 성매매업소로 남게 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전쟁, 그리고 위안소가 그 주변의 다양한 성매매를 낳은 모태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본제국은 매춘(買春), 즉, 성을 산 것이 아니라 매춘(売春), 즉, 성을 판 것이다.   각주 ^ (편집자 주)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 다이쇼군에 올라 에도에 개설한 중앙 집권적 무가 정권 ^ (편집자 주) 더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 ^ (편집자 주) Genocide.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 ^ 1872년 예창기해방령 공포 이후 업자는 장소(座敷=다타미 방)만 빌려주는 형식으로 성매매제도의 책임을 창기에게 떠넘겼다. ^ 차경애, 「러일전쟁 당시의 전쟁견문록을 통해서 본 전쟁지역 민중의 삶」, 『中國近現代史硏究』제48집, 2010년. ^ 「戦役の回顧と戦後の経営」(전역의 회고와 전후의 경영) 陸軍軍医団編, 『日露戦役戦陣余話』  ^ 「병참근무의 추억(兵站勤務の思ひ出)」( 陸軍軍医団 編,『日露戦役戦陣余話』, 陸軍軍医団、1934年)/ 육군군의단편 / 일러전역전진여화 / 육군군의단 ^ (편집자 주) 만주의 철령 북서쪽에 있는 도시 ^ 大江志乃夫『兵士たちの日露戦争―500通の軍事郵便から』/ 오오에시오노 / 병사들의 일러전쟁 - 500통의 군사우편으로부터

    송연옥

  • 죄책감을 넘어선 응답의 윤리 – 영화 〈언노운 걸〉 다시보기
    2021년 논평 죄책감을 넘어선 응답의 윤리 – 영화 〈언노운 걸〉 다시보기

    영화 <언노운 걸>(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7)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 아델 에넬 출연 / 106분 얼굴을 마주하기 얼굴을 마주하고 응답한다는 것은 무얼까? 너무 당연해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지 의아할 수 있는 이 질문은 ‘비대면’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금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실시간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를 마주할 때, 앱을 이용해 배달을 시킬 때, 매장에서 키오스크로 무언가를 주문할 때, 소셜 미디어에서 직접 대면해본 적은 없지만 그의 타임라인을 구독해 온라인 정체성은 알고 있는 이가 ‘힘들다’고 슬쩍 흘릴 때, 현관문의 모니터나 CCTV로 누군가의 얼굴을 대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마주하고 응답하는가? 모니터의 얼굴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현대사회는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더 즉각적이고 상시적으로 만나고 연결되어 있지만 ‘응답’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의 ‘응답’은 도나 해러웨이[1]가 ‘책임(responsibility)’은 곧 ‘응답가능성(response-ability)’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만나는 방식이 다양하고 복잡해질수록 응답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외면할 방법도 많아진다. 그럴 때 복잡한 여러 과정의 단계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목소리가 작거나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나 약자일 가능성이 많다.   죄책감의 통증과 죽음의 공모 현대 유럽 사회에서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물의 뒤를, 흔들리는 핸드헬드[2] 카메라로 바싹 붙어 쫓아왔던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전작들이 하층민이거나 사회적 약자였던 것과 달리 <언노운 걸>의 주인공 제니(아델 에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 의사이고 여러모로 흠 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의사로서 직업적 전문성을 인정받아 좋은 경력이 될 연구소에 채용되어 곧 이직할 예정이고, 병환으로 은퇴한 노의사를 대신해 임시로 3개월 일한 동네 병원에선 그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에 노래를 지어 불러주는 어린 환자가 있을 정도로 환자들에게 헌신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벨기에는 주치의 제도를 갖고 있다. 제니는 동네 병원의 주치의로서 주로 소소한 병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들, 노환이나 당뇨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병원까지 오는 것도 힘든 사람들, 노동현장에서 다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살뜰히 돌보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제니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게 된다. 병원 진료 시간이 끝난 늦은 저녁 벨소리가 울리지만 제니는 문을 열어주려는 인턴 줄리앙(올리비에 보노)을 제지하고 환자를 거부한다. 그리고 다음 날 벨을 눌렀던 이가 아프리카계 십대 소녀였으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경찰에게 듣고 알게 된다. 병원 CCTV에 찍힌 소녀의 얼굴을 대면한 제니의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한순간의 무관심과 고집스러운 냉담으로 소녀의 죽음에 동조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로 선택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소녀의 이름을 밝혀내고 가족을 찾아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고자 한다.  그러나 제니는 동네 사람들과 경찰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자신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찾아가고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는 동시에 의사로서 죄책감에 기인한 통증을 진단한다. 소녀가 죽은 날 그가 자기 아버지와 있던 것을 목격한 소년 브라이언(루카 미넬라)은 지속적으로 복통과 구토를 느낀다. 제니는 브라이언을 진단하던 중 죽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맥박이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을 보고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브라이언의 아버지(제레미 레니에)는 요추통증이 극심해지자 한밤중에 제니를 부른다. 소녀의 언니는 제니의 탐문에도 동생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남자친구가 두려워 모른 척하다 나중에 죄책감을 호소하며 제니에게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다. 그밖에 소녀에게 돈을 주고 자기 아버지와 섹스를 하게 한 캠핑카 주인, 십대 소녀의 성을 산 노인, 범죄를 숨기려 탐문을 그만두라고 위협하는 동네 범죄조직, 마약수사 때문에 소녀의 죽음에 무관심한 경찰들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 제니의 탐문을 방해한다. 소녀의 죽음도 그렇지만, 소녀가 죽은 후 그녀의 이름을 밝히는 데도 촘촘한 방해가 있다. 여기서 죄책감과 무관심은 더 이상 개인적 심리나 상태가 아니다. 소녀의 죽음과 그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데에는 공동체와 시스템의 공모가 있다. 빈곤과 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성매매를 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지켜준 소년, 10대 소녀를 인신매매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범죄자들, 피해자 여성의 죽음에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경찰들 그리고 한순간의 냉담함으로 환자를 거부한 의사 제니까지. 소녀의 죽음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은 하나의 원인에 있지 않다. 그들의 ‘한순간’, 그들 각자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모여서 소녀의 죽음을 야기하고 그녀를 익명의 상태로 만든다. 제니는 소녀가 그저 부조리와 미스터리로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냉담하고 폭력적인 순간들을 엮어내 ‘펠리시 콤바’라는 소녀의 이름과 서사를 찾아준다.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다”: 응답의 윤리 소녀를 위협해 추락하게 만든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제니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어차피 소녀의 죽음을 되돌릴 수도 없고 자신만 모든 것을 잃을 거라며 진실을 묻어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제니는 “죽어도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 거라며 소녀가 “지금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다”고 답한다. 제니는 뒤늦게라도 그녀의 벨소리에 응답하기를 ‘선택’하고 ‘실천’한다. 제니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사적이고 심리적인 죄책감을 넘어서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 그 어느 벨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담아서. 제니는 전도유망한 연구소를 포기하고 수가도 높지 않고 일만 많은 동네 병원에 남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아예 거처를 병원으로 옮겨 한밤중에도 벨소리가 울리면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진찰할 뿐 아니라 죄책감에 못 이겨 털어놓는 고백을 끈질기게 듣는다. 내실에도 모니터를 설치해 모든 방에서 현관문 밖을 볼 수 있게 한다. 병원 현관문 벨소리뿐 아니라 다른 환자를 진료하거나 탐문을 나설 때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그는 모두 응답하려 한다. 제니는 병원 문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앞서 판단하지 않고 모두에게 문을 열어 놓기로 한다. 그의 이런 선택과 의지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내었음에도 외면 받는 또 다른 소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제니의 희생적 헌신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적 선택이 과연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도움의 모든 목소리를 듣겠다고 나선 제니가 오만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각자 영역에서의 영향과 책임감은 무시해왔던 관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한순간의 무책임한 외면과 판단이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 아닌가?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에 응답하고 끝내 무엇이라도 해보려 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구원인 것처럼 영화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제니와 줄리앙의 관계를 통해 유능함과 전문성은 응답하는 능력과 별개라는 사실을 피력한다. 효율적으로 응답하려던 제니의 선택은 소녀의 벨소리를 무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턴인 줄리앙은 달랐다. 대기실에 있던 환자의 경련에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패닉이 된 줄리앙은 의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다. 제니는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선 환자의 고통 앞에서도 침착함과 냉담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충고한다. 줄리앙은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버린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고향까지 찾아간 제니에게 줄리앙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겪었기에 자신과 같은 이들을 돕고자 의사가 되려 했지만 타자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패닉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감정적인’ 줄리앙은 경련에는 대응할 수 없었지만 소녀의 벨소리에는 응답하려 했다. 제니는 줄리앙의 ‘취약함’이 문제라고 보며 그를 교육시키고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효율성과 유능함은 때때로 도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든다. 타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한 번밖에 울리지 않은 소녀의 벨소리처럼 선명하지 않을 수 있으며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기 위해선 ‘취약함’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주 ^ (편집자 주)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 비평가. 저서로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등이 있다. ^ (편집자 주) handheld. 카메라 혹은 조명 장치 등을 손으로 드는 것. 특히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지 않고 들거나 어깨에 메는 것을 의미한다.

    조혜영

  • ‘할머니’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 - 서혁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인터뷰
    2021년 인터뷰 ‘할머니’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 - 서혁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인터뷰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서 뻗어져 나온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하 역사관)과 브랜드 희움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위안부’문제 해결과 피해자 관련 기록에 힘쓰고 있다. 또한 굿즈를 제작해 ‘위안부’문제 인식을 대중화하고, 쇼핑이 기부로 이어지는 일명 ‘착한 소비’에 대한 높은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현재 세 개 조직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는 서혁수 대표를 지난 12월 3일, 대구의 희움 역사관에서 만났다. 11월부터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전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展>(12월 31일 종료)뿐만 아니라 겸임 대표로서 맡은 바를 해내야 하는 만큼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빠 보였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서 대표는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든다. (…) 앞으로 계속 가다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지 않을까”라며 웃어보였다. 2019년 10월부터 대표를 맡아 2년 여간 활동해온 소회는 어떠한지, 현재 ‘위안부’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지, 또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Q. 현재 여러 곳에서 대표를 맡고 계시는데 각 단체 및 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모태가 되는 건 시민모임입니다. 1997년 12월에 결성된 시민모임을 바탕으로 2015년에 역사관이 건립됐어요. 역사관이 들어서기 이전인 2012년에 브랜드 희움을 런칭했고요.  Q. 시민모임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희가 세 가지 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려요.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무료진찰권이 제공됐다는 것이죠. 1995년 8월부터 곽병원의 곽동협 원장님께서 생존자들을 무상으로 진찰해주셨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생이 바탕이 됐고, 또 하나는 대구여성회에서 ‘위안부’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생존자들을 조사하고 증언 녹취 작업을 했어요.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생존자 실태 파악도 진행했고요. 그런 활동이 맞물리면서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를 챙기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됐죠. 그러면서 시민모임 사무소가 개설됐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면서 그분들의 유품을 모으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역사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생겼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다 고려대의 사회적 공헌 동아리 인액터스(Enactus)와 함께 ‘위안부’ 관련 굿즈를 제작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의식 팔찌’를 만들게 됐습니다. 못다 핀 희망을 꽃피우자는 의미로 블루밍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에 더해 김순악 님의 기부금 5000여만 원이 마중물이 돼서 역사관을 건립하게 됐어요.  Q. 역사관은 정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건가요?  역사관은 입장료, 희움 판매금액, 회원 정기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외에는 외부 지원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관람객이 한 해에 1만 명 정도 되는데 코로나 이후 1000명으로 대폭 줄었어요. 이전에는 단체에서도 많이들 오셔서 굿즈에도 관심 가져주시고 전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주셨는데 지금은 그런 교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어 아쉽습니다.  Q. 시민모임, 역사관, 브랜드 희움이 하는 일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생존자 지원, 사업 추진, 후원회원과의 교류 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역사관은 피해자 관련 중요 증언과 자료들을 많은 분에게 알릴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고요. 브랜드 희움에서는 굿즈 개발을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유사한 굿즈가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보니 새롭게 바꿔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굿즈 제작에 나선 것은 희움이 최초이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굿즈뿐만 아니라 할머니 관련 출판 사업도 함께하고 있고, 모든 이익은 피해자를 위한 사업에 환원한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나 기획, 제작 등이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트렌드가 워낙 빨리 바뀌다 보니 어려운 지점이 있죠. 컨셉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쉽지 않아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 운동에 동참해야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하셨던 때는 언제였나요?  A. 젊은 시절 제 주위에 ‘위안부’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덕분에 할머니들을 만나게 됐고 개인적으로 몇 분하고는 친하게 지냈죠. 그러면서 그분들 옆에서 챙겨드리고 도와드리는 일을 했어요.  Q. 시민모임 측과는 예전부터 인연을 쌓아 오셨던 건가요?  A. 네. 행사에도 참여하고 한 번씩 글도 썼습니다.  Q. 이번 대표직은 언제부터 맡게 되셨는지요.  A. 2019년 10월부터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개인 사업을 따로 하고 있고 ‘위안부’ 관련 업무는 비상근으로 하고 있어요.   Q. 대표 겸임을 하느라 힘에 부치실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요.  A. 이번에 처음으로 고민을 해봤는데요,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00년대 초에 시민모임 5년사를 발행할 때 모리카와[1] 씨가 투고한 글 중 일부분이에요. “문옥주 할머니에게 이끌려 시작된 이 조사를 앞으로도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대로 계속해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처럼 저도 지금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이끌어주시는 느낌이 들어요. 할머니가 곁에서 지켜보며 무언가 고갈될 때마다 하나씩 내려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그걸 너무나 믿는 게 책을 하나 내니까 또 어디서 새로운 증언이 나오더라고요. 이것이 다음의 연구거리다, 하고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이걸 하다 보면 또 새로운 길이 나오겠죠.  Q. 현재 역사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진행하고 있죠. 대표님이 총괄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지요.  A. ‘할머니의 방’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했습니다. 그분들의 희노애락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또 개인 사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좋을까 걱정을 했죠. ‘얼굴의 계단’에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잘 담겨 나와서 흡족했고요. 모든 게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실현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문옥주 할머니와 관련해서는 강독회를 진행했는데 그분의 구술을 새롭게 읽어내는 과정이 보람 있었어요. 증언들을 일일이 뜯어보며 읽다 보니 저희가 적임자더라고요. 사투리 같은 표현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Q. 강독회가 그렇게 시작된 모임이군요.  A. 네. 올해 3월부터 모임을 가져왔고 『문옥주 지오그라피』라는 책도 냈습니다. 지오그라피라는 게 할머니가 다녔던 지역을 담아낸 의미도 있지만 그분은 어느 땅을 가든 이치를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곳을 가든 최선을 다해 살아내셨다는 생각이 드는 일화들이 참 많거든요. 신문 한 장에서 시작해 자료집을 엮게 됐는데,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어요. 전문가들 의견도 더하고요. 이게 완전한 버전은 아니지만 이것으로부터 시작해 앞으로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엮어보려고 합니다. 문옥주 증언집이 지금 미국에서 번역되고 있거든요. 그럼 그 책을 보고 나중에 외국에서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Q. 모임에는 어떤 분들이 참여하셨나요? A. 지역의 향토 사학자, 일본 문학 전공자, 권번 판소리 전문가, 구술 전문가 등 많은 분들이 계세요.  Q. 지금도 꾸준히 모임을 갖고 계시나요?  A. 네. 7차까지 모임 진행한 후 시즌2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1차로 펴낸 자료를 토대로 후속 연구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죠. 아직도 모을 자료가 많습니다. 모리카와 씨가 모은 자료도 일본에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함께 합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아직 못했어요. 모리카와 씨가 2019년에 돌아가신 이후 코로나 때문에 일본에 있는 자료도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황입니다.  현재 지오그라피에는 한국 관련 내용만 있지만 중국, 일본, 미얀마 길이 함께 이어져야 해요. 할머니가 어렴풋이 말한 장소를 저희가 다 알아냈는데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 때문에 더욱이 갈 수 없고, 중국도 코로나 이후 상황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죠.  Q. 시민모임의 활동은 주민 운동적 성격도 일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점 또는 난제라고 꼽을 만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지요.  A. 이제는 주민 운동의 차원은 벗어난 것 같아요. 회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해있고 희움 굿즈도 전국에서 구매하시거든요. 이런 단체와 역사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주시는 분들이 전국적으로 많아진 것 같아요.  Q. 서울 중심적 구조 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기반으로 지역 운동을 주변화하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러한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지역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진 않지만 생존자들이 계셨던 곳과 그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다 지방이에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중앙 단위에 관심이 쏠리다 보면 아무래도 소외되는 게 많아요. 한계이자 극복해야 될 점이죠.  Q. 한국에서의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과 사회적 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타깝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생존자분들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분들을 위해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결여돼있죠. 피해자 지원이나 ‘위안부’ 관련 사업에 대한 청사진이 준비돼있지 않은 부분, 문제 해결에 있어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부분들이 가장 안타까워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생존자들이 줄어들고 있거든요. 작년 3월에도 장례를 치르면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창 코로나로 심각했을 때 쓸쓸하게 보내드렸거든요. 너무 안타까워요. 하루 빨리 문제 해결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겠다는 조바심이 납니다.  Q. ‘위안부’문제 해결운동 30년이라는 측면에서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점이 있을까요.  A. 오랜 시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이뤘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목표를 가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서 무엇을 해낼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시급한 문제인 것 같아요.  Q. 혹시 현재 다른 지역 단체와의 협업이나 교류가 진행되고 있나요? A. 최근에 조금씩 진행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정착된 느낌은 아니에요.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내 단체뿐 아니라 해외 단체들과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필요하고요. 다른 피해국가의 단체, 학자 그룹, 역사관 등 교류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Q.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각각에서 가장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A. 민간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해드리고, 정부에서는 그들의 바람이 담긴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그동안 저희가 일본 정부에 계속 요구해온 게 7가지 원칙(일본 정부의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모, 책임자 처벌이 포함된 법적 책임)인데 이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정부에서든 단체에서든 이 원칙을 실현시킬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내세우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계속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거죠.  Q. 생존자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 방향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직면해야 할 현실인데 지금까지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현재 생존자 분들이 살아계심에도 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안 계신다고 생각했을 땐 더 어려울 것 같거든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Q. 대표 겸임을 하신 지 1년이 됐습니다. 그간 활동을 해오시며 행복과 보람을 느끼셨던 적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A. 지난 몇 개월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손에 잡힌 성과는 없는 듯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위안부’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시민모임의 역할을 생각하고 추진해나가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바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겠습니다.  Q. 앞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활동이나 계획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직함이 많은 만큼 그 역할을 다 해야겠죠. 시민모임은 ‘위안부’문제 해결, 회원과의 교류, 생존자 지원, 추모 사업 등에 힘쓸 테고요. 역사관에서는 새로운 전시를 계속 준비할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역사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게 계획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희움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서 어려움을 뚫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이용수 할머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는 데 일조하는 게 바람입니다.    각주 ^ (편집자 주)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 대구 출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옥주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대기를 1996년에 책 『문옥주, 미얀마(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文玉珠 ビルマ戰線楯師團の慰安婦だった私)으로 써냈다. 이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2005)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발간됐다.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서혁수 대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브랜드 희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장소: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퍼플레이 강푸름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2022년 논평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가

    이 글의 제목과 내용은 다음 졸고에서 추린 부분이 많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논의가 장미대선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활발했던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가 몇 분 남았는가가 각별한 관심사였다. 2017년 7월 23일 김군자 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신문은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는 헤드라인으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폐기와 재협상을 촉구하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1] 그 후로도 여러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기정사실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외에 다른 전쟁 또한 유발될 것 같은 신냉전의 세계정세 속에서였다. 2022년 5월 2일 또 한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운동가이셨던 김양주 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가 올라왔다. 김양주 님의 부고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과정은 지역과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위안부’ 문제가 더 활성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연결망들을 드러내는 것 같다.[2] 그 기사는 2022년 5월 2일 정부 등록자 240명 중 11명이 생존해 있음을 아울러 보도했다.[3] 기사는 1면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2017년에는 정부 등록자가 239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록자가 1명 늘어 240명이 되었지만 피해 생존자는 이제 11명이다. 부고와 함께 셈해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숫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중 살아있는 이들의 숫자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란 1993년 6월 11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과 함께 피해자 신고, 심의, 결정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자를 뜻한다.[4] 이것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셀 수 있게 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피해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정작 피해 생존자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진행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해왔던 생존자들에게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최근 이용수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 ‘할머니들 다 죽기를 바라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할머니들 소원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5]    그런데 애초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는 셀 수 있는 존재였던가?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서 모집, 동원되었는지 그 전모를 증명할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국내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며, 발굴 및 공개된 증거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기에 그 주장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따위의 증거 부족, 증거 부재야말로 ‘위안부’는 셀 수 없는, 애초에 그 삶과 죽음이 셀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적 웅변 아닌가. 20만 명을 상회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그 추정치가 일본군, 일본군 부대의 숫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6] 일본군‘위안부’에 비해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의 추정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통계 가운데 최저치를 적용하면 육군특별지원병 16,830명, 학도지원병 3,893명, 육군징병 166,257명, 해군(지원병 포함) 22,299명 등 군인 동원 총수는 209,279명이라고 한다.[7]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세세히 셈해질 수 있었는가? 다카시 후지타니는 “조선인의 전시동원으로 인해 이들은 직접적으로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이 되었다. 즉 조선인들은 생명관리권력(bio-politics)과 통치성의 레짐 안으로 편입하게”[8]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그들의 죽음까지 셈할 수 없었다는 데서 문제가 있으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는 생명, 건강, 생식,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있는 인구 구성원 자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비단 조선인 ‘위안부’에 국한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셀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셀 수 없는 자들을 셀 수 있는, 가시적이고 기지적(旣知的)인 존재로의 범주화는 피해 생존자 김학순(1922-1997)의 커밍아웃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과 거기에 조응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신고 및 등록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고 및 등록은 피해자/생존자를 셀 수 있는 범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고와 등록 절차에는 커밍아웃이라는 과정이 수반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등록은 커밍아웃으로서의 증언, 증언으로서의 커밍아웃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운동을 안정화, 규범화하는 데 기여하였다.[9] 증언의 집적인 일본군‘위안부’ 증언집은 신고와 등록의 절차를 밟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 주어진 대상자 등록이란 최종적으로는 심의와 결정, 통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진술이 심의 결과 부정되어 등록되지 못한 분들은 과연 없었을까? 해봄직한 상상 아닌가?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이나 목격자 등 제3자의 증언)가 있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대상자 등록 신청은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 것일까? 결정을 통보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생존자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성과로서의 이 법의 제정과 시행 과정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제정과 시행 또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출현과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한국 정부의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해 있는 상황은 이제 한계 지점에 이른 것 같다. 지금까지 효과를 발휘했던 범주화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중층적이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증언한 피해 생존자 배봉기(1914-1991)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미군이 통치하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자 1975년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군‘위안부’로 오키나와에 오게 되었음을 증언함으로써 ‘특별 재류’ 자격을 얻게 된다.[10] 임경화는 “이로써 배봉기는 30년 만에 국가에 등록되었다”[11]라고 썼다. 배봉기의 삶은 보이지 않게 살았던, 즉 셈해질 필요가 없었던 존재로서의 일본군‘위안부’의 비인구적 성격을 삶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한 성격은 한편으로 침묵됨으로써 생겨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김현경은 “귀환하지 않은/못한 일본군‘위안부’”인 배봉기의 삶과 죽음은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라는 힘이 주조했으며 미국, 일본, 남한 간의 위계질서의 착종 속에서 일분군‘위안부’ 문제를 비가시화하고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논증하였다.[12] 미국 신탁 통치하 오키나와 조선인을 불가시화화하는 법적 구조의 포위망 속에서, 또 일본군‘위안부’로서의 삶과 전쟁 경험, 전후의 고통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없었기 때문에 배봉기의 삶은 가시화될 수 없었다. 1975년 공적 증언에 의해 배봉기의 삶이 알려졌으나, 냉전의 남북 체제 대결 구도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그즈음 조총련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청중은 없었다. 나아가 그의 유골의 소유권을 두고 민단과 조총련은 배봉기를 대신하여 말하고자 함으로써 배봉기의 목소리를 지우고 말았으며, 남한에서는 당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이슈화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계 안에 있지 않은 ‘위안부’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그의 주검과 귀향을 둘러싼 논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13]   국가의 경계 안에 있는 ‘위안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이 비가시화와 침묵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인가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국내 반페미니즘 정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고해진 신냉전에의 편승 기류가 심상치 않다.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시, 도별 지원 대상자의 수를 써넣은 간단한 도표는 언젠가 축소되어 마지막 한 명조차 유명을 달리해 사라질 날을 초조하게 또는 공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나마 등록자가 240명이었음을 그 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헌미는 240명과 20만 명 사이에서 ‘가라앉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이헌미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말을 언급했지만, 나는 도미야마 다에코(1921-2021)의 그림 <바다의 기억> 시리즈가 떠올랐다.[15] 남태평양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있는 ‘위안부’들과 해골들, 일본군, 총과 사물들, 샤먼과 원주민들, 물고기와 새, 나무들. 그 존재들을 셈할 수 있는가? 배봉기와 김학순, 그리고 결코 계량화될 수 없는 증언들이 열어젖힌, 전쟁 속에서의 살아남음과 목격한 죽음들, 강간과 모욕과 멸시와 가난, 체념과 침묵, 그리고 원망과 의지의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처음인 것처럼 반복해야 하는 자맥질일 것이다. 도미야마 다에코 작가의 ‘바다의 기억’ 연작 중 <남태평양 해저에서> 이미지는 다음 기사를 참조 >> 한겨레, 일본 100살 거장의 ‘기억’…야만 들추고 약자 보듬다, 노형석 기자, 2021.03.24.   각주 ^ 『경향신문』, 「이제 37송이, 시간이 없다」, 2017.7.23.  ^ 다음을 참조. 정갑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주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7 게시일: 2022.06.10 최종수정일: 2022.06.14   ^ 『한겨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양주 할머니 별세…생존자 11명」, 2022.5.2 ^ 등록 절차와 관련된 법은 2002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개정된다. 2018년 법률명 등이 바뀌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2020년 일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률 제정은 정대협 운동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20년사』, 한울, 2014, 59-62쪽. ^ 『한겨레』, 「주일대사 내정자 만난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죽기 전에”」(김규현 기자), 2022.6.21  ^ 강정숙,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10, 75-80쪽 참조. 특히 표2-2 군‘위안부’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 79쪽 참조. ^ 대일항쟁기간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24쪽. 다음에서 재인용.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이트 https://www.fomo.or.kr/kor/contents/40 ^ 다카시 후지타니, 박선경 역, 「죽일 권리, 살릴 권리: 2차 대전 동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아세아연구』 제51권 2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2008, 23쪽.  ^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별지 제1호서식) (개정 2018.6.5.)>인 <대상자 등록신청서>에는 신청인(피해자)의 신원과 함께 ‘일제하 당시 생활했던 상황’에 대한 란이 마련되어 있다. ‘강제동원 연도(년, 월)’, ‘강제동원 장소’, ‘귀환 연도(년, 월)’, ‘귀환 장소’, ‘강제동원 상황’, ‘현지 생활’, ‘귀환 상황’, ‘현재 생활’에 대한 진술을 해야 한다. 신청인 제출서류로는 다음 세 가지가 제시된다. 1. 재외 국민등록부 등본 1부(국외 거주자만 해당합니다) 2. 보호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보호자가 대신 신청하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3. 그 밖에 신청사항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본인 진술서, 사진, 목격자 등 제3자 증언 등)  ^ 임경화, 「마이너리티의 역사기록운동과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부’」, 『대동문화연구』112,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20, 493~495쪽.  ^ 위의 글, 494쪽.  ^ 특히 “포스트식민 냉전체제”라는 용어와 서발턴의 침묵을 지속시키는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는 데 있어 활용된 방법적 개념과 관련한 대목을 볼 것. 김현경, 「냉전과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의 잊혀진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한국여성학』제37권 2호, 한국여성학회, 2021, 208~214쪽.  ^ 위의 글, 216~229쪽 참조. ^ 이헌미, 「당신의 이름은」, 『결』(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http://www.kyeol.kr/ko/node/456 게시일: 2022.06.07 최종수정일: 2022.06.08  ^ 5.18 광주의 화가로 더 잘 알려진 도미야마 다에코는 윤정옥, 이효재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세대였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문제를 ‘위안부’를 주제로 한 <바다의 기억> 시리즈를 1986년 완성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나베 유코, 「월경하는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의 인생과 작품 세계: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지점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제21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1, 94-101쪽 참조.

    이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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