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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한성원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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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머리칼에 붉은 얼굴의 노년 여성들. 어딘가 낯설면서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알록달록하면서도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성원 작가는 그림책 『할머니, 우리 할머니』(소동, 2020)를 통해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을 표현해냈다. 책을 예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는 그는 “예뻐서라도 책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며 “그렇게 갖게 된 관심이 ‘위안부’에 대해 정교하게 정리된 책이나 자료로 옮겨 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제목에도 작가의 염원이 담겼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위안부’피해자가 나와 다르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할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아픈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같은 이웃, 가족, 또는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내 주길 바라요.” 인터뷰 내내 한 작가는 ‘기억’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림’은 기억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작가의 손끝에선 색색깔의 여성들이 탄생했다. 그 화려한 외면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할머니들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 더 많은 분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광고나 영상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공연 작업도 하고,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전에는 주로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이번 책이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할머니, 우리 할머니』 책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분들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 2019년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생업으로 바빠 미뤄뒀는데 더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죠. 숙제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네이버 창작 프로젝트에 지원했고, 덜컥 당선되어 할머니 이야기를 3개월간 매주 연재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넘게 정기연재를 했죠. 그 결과물들을 모아 책이 나올 수 있었어요. Q. 숙제를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전부터 ‘위안부’문제를 그림으로 풀어야겠다고 다짐하셨던 건가요? 대학 졸업 때 작품 주제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게 한국 근현대사였어요. 1920년대 후반에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 시대를 그리게 됐고 그것이 시작이 됐죠. 주변에서 의뢰받아 작업할 때도 공교롭게 ‘위안부’문제와 계속 마주쳤어요. 그러면서 할머니들에 대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보게 됐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였죠. 그러다 보니 작업으로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책 작업을 하면서 겪은 변화가 있을까요? 또는 배운 점이 있다면요? 대상에 잘 다가가는 법을 배웠어요.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한 후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그를 온전히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대상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란 걸 새삼 깨닫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기반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몸소 겪으며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Q.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책을 출간하셨는데, 펀딩을 거친 이유가 있나요? 감사하게도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펀딩 도서로 선정을 해주셨어요. 저희도 한 번 더 홍보를 할 수 있는 기회라 놓치지 않았죠. 이밖에도 경기도 우수출판콘텐츠, 번역지원 사업, 멀티미디어전자책 제작지원 사업 등에도 선정돼 진행 및 준비 중에 있어요. 이번 작업에 참 많은 분이 함께해주셨어요. 출판사, 편집자, 동료 작가, 활동가분들을 통해 많은 걸 배웠고 함께하는 작업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Q. 아주 강렬한 색깔로 할머니들을 그리셨어요. 이러한 표현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할머니를 예쁘게 그리고 싶었어요. 첫 출발이 김복동 할머니의 옆모습이었죠. 곱고 단아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그렸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그런 모습으로 담을 수 없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도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너무 슬퍼졌고요. 그래서 이렇게는 이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기 연재를 하는 첫 번째 날 빨간 얼굴로 확 바꿨어요. 그 표현법이 할머니들의 강인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했고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로도 그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Q. 책에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통해 그분들의 목소리가 담기게 됐고, 또 그분들을 담기 위해 어떤 취재 과정을 거치셨는지요. 활동가분들이나 다른 작가 분들에 비해 제가 깊이 있게 접근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위안부’ 문제를 접해온 기간을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것 같아요. 대학 졸업전 때 근현대사를 그리며 아픈 역사를 바라보게 됐고, 그 뒤에는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보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접한 것들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재 할머니들은 많이 연로하셔서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기억’을 위한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할머니들께 어려운 요청을 드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부 기록을 비롯해 30년간 활동해 오신 분들의 기록, 정의기억연대, 수요시위, 이외에 많은 책들을 통해 배우고 공부하며 기록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데 동행해준 분들과 함께 내용을 구성했어요. 2차 피해가 되지 않을 내용을 선별해 담았지요. 물론 저의 노력이나 공부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피해자분들을 기억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입문서로 여겨주시면 좋겠어요. Q. 그간 많은 자료를 찾아보셨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도움이 됐던 자료가 있나요. 도움을 받은 자료가 정말 많아요. 하나를 꼽기가 참 어렵지만 『25년간의 수요일』(윤미향, 사이행성)을 자주 언급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할머니들께서 어떻게 살아내고 또 노력해왔는지 알게 됐어요. 또 할머니들의 인권 회복 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고요. 이외에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안세홍, 서해문집),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김세진, 보리) 등과 같은 책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Q. 책은 크게 1부 ‘증언’, 2부 ‘기억’, 3부 ‘동행’으로 구성돼있죠. 그 안의 소제목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셨나요. 이 책이 그래픽노블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텍스트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소제목을 통해 할머니들의 스토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Q. 2부 ‘기억’-‘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편에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여행 간 할머니를 상상하며 그리신 그림이 나옵니다. 배경으로 왜 뉴욕을 택하셨는지 궁금해요. 그 그림은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한 거예요. 실제로 타임스퀘어에 가보니 굉장히 멋있더라고요. 이런 세계적인 관광지에 할머니들이 여행을 오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렇게 많은 전광판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내보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뉴욕에 간 우리 할머니’ 그림은 여러 가지로 제 마음과 기록의 방향성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작업이라 책 표지로도 사용하게 됐습니다. Q. 할머니를 기록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하셨죠. 연출 방식이나 글쓰기에 있어 특히 조심스럽게 생각한 지점이 있었나요. ‘우리 어머니라면 이런 모습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이런 건 싫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게 기준이 된 것 같아요. 이 책은 상처를 겪고 굳건히 살아낸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이에요. 너무 큰 상처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2차, 3차 상처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상처에 집중하기보다는 할머니들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Q. 책 작업을 하며 무언가를 ‘깨닫게’ 된 순간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안산의 광덕고등학교 동아리 ‘웹툰그리기반’ 학생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작업을 소개하면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죠. 근데 어느 날 학생들로부터 메시지가 온 거예요. “선생님, 우리가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전자파 차단 스티커를 제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가능하다고 했죠. 학교에 갔더니 다른 동아리 학생들까지 와있어 교실이 꽉 찼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설명을 했고, 그 후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스티커를 제작했습니다. 완성본을 급식실 앞에 붙여놓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투표도 진행하더라고요. 득표수가 가장 많은 걸로 스티커를 제작해 축제 기간에 무료 배포도 했고요. 아이들은 슬퍼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어떤 주저함도 없었어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은연중에 배웠어요. 그래서 ‘위안부’운동이 왜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를 또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Q.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작가님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나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이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에 나섰듯이 말이에요. 어느 커뮤니티에서 제 작업을 보고 ‘할머니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따님이셨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걸 보고 찡했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라요. Q.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한 고민도 책에 녹여내 주셨어요. 이에 대한 논의를 끌어내고 또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좋은 답을 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답인 것 같아요.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 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피해자 입장을 고려한 적합한 용어를 찾는 게 가능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용어를 사용했을 거예요. 근데 그러지 못했기에 아픈 역사를 배우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해요.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와 관심은 삶을 보다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림은 예술 그 자체이기도 하고 때론 기록으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작가님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까요. 작가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는 사람이고, 그림은 고맙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잘 그리는 것보다 뭘 그려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담겨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Q. 이어가는 작업으로 할머니들과 30여 년을 함께해온 활동가분들에 대해 그려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향 또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갈 계획이신가요. 활동가분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고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실제 삶과 시민들의 인식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살펴보고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책 작업을 하는 2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활동해온 분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겠어요. 저로서는 짐작도 못 할 세월이죠.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그 존재와 활동의 의미를 재조명해보고 싶습니다.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한성원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8월 2일 월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3-22 1층 테르 프로미즈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사 게재일: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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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 - 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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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은 202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박필근’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경북지역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알려지는 그는, 일본군에 의해 16세 당시 강제로 끌려가 공장에서 위안소로 옮겨져 2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포항의 작은 집에서 포항여성회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박필근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을 만들어 그의 삶을 알리기도 했었죠. 이렇게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를 넘어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박필근과 또다른 많은 박필근들. 그 모든 소중한 이름을 우리가 계속해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NOTE 1 박필근뎐 캄캄한 방 몸 하나 겨우 눕는 방 창문 하나 없이 비명소리 벽지가 된 방 나도 캄캄해져 벽 틈 사이로 들어오던 그 빛 고향하늘 달빛처럼 환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보고 싶은 우리 엄마 2019년 5월. 포항 KBS라디오 이용일 PD님과 포항여성회 회장이자 KBS라디오 작가였던 김은주 님이 한터울 공간으로 찾아오셨다. 두 분은 포항여성회에서 펴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필근 할머니의 삶을 국악으로 들려주고 싶어 했다. 구술생애사를 읽는 내내 판소리가 들렸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단원들에게 할머니와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할머니의 구술증언에 당시의 일본군 자료, 뉴스 기사, 증언 등을 보태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뜻을 같이 한 포항의 젊은 국악인들이 박필근 할머니의 기억을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이 시작됐다. 나비야 살아서 날개를 꺾인 나비야 퍼덕거리고 날개를 치면 나비야, 방문 앞에 줄을 선 전쟁귀들 날개를 꺾는구나 나비야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는 슬픈 나비야 일본은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러 놓고 그 추악한 짓이 인정되면 오점이 될까 봐 온갖 거짓말로 덮어왔다. 우리는 7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뽑아드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많은 할머니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이런 짓을 당했다’ 겨우 말하게 한 일이 못내 부끄럽다. 그런 우리에게 ‘박필근이라는 거울’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이 판소리를 창작한다. 일본으로 하여금 추한 역사를 속죄하게 하고 우리도 상처를 일찍 보듬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늦은 일기쓰기,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은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라는 선언이다. 창작의도를 정리하고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와 다른 할머니들의 활동과 증언들을 찾아보며 다들 많이 울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할머니의 절망이, 고통이 느껴져 작창을 하던 소리꾼의 소리도 자주 끊어졌다. ‘고통을 덜어내는 힘’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힘’을 내야 하는 공연이라 모두들 힘겨워했다. 기존의 판소리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듯 ‘박필근뎐’도 단원들의 ‘더늠’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박필근’이 될 더 많은 예술가들이 마음을 보탤 것이다. #NOTE 2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에 함께한 대학생 소리꾼 김채은은 “진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포항에 살아계시는 할머니 이야기라니 믿기지 않아요”라며 처음 접한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에이, 나쁜 놈들!”을 연발했다. 어느 날 자신이 맡은 어린 박필근 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김금숙 작가의 책 『풀』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나 “이런 역사를 여태까지 몰랐다는 게 부끄럽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느냐”고 했다. 그 후, 연습 때 소리가 달라진 걸 느꼈다. 우리가 ‘박필근뎐’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바랐던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피해자들을 자신의 할머니처럼 가깝게 느끼며 공감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박필근뎐’ 공연을 마친 다음 해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공모했다. ‘젊은 포항의 소리꾼에게 포항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주고 작창과 소리 지도를 해줄 스승을 만나게 하고, 소리꾼으로 하여금 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원리를 체득하게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만의 판소리를 수련하여 지역을 넘어서는 큰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든다’는 컨셉으로 지원해 선정되었다.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이자 국악방송TV <국악아니?>의 진행자이기도 한 김봉영 선생님이 연출과 작창 및 연기 지도를 맡아주기로 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김봉영 연출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작품을 만드는 일은 비슷하고, 삶의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창작이며, 축적된 선택들은 인생이라는 작품이 된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삶의 갈등을 줄여가는 일일 것이다. 소리꾼의 내면적 성장이 주가 되고 작품은 그냥 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정했다. 판소리를 창작하는 전 과정을 공유하는 것도 큰 자산이 되도록 대본, 기획, 제작에 소리꾼, 고수 등 모든 스탭이 함께하는 ‘공동창작’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주제, 스토리, 노래 가사, 작창의 방법과 연기지도까지 모두 공유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는 회의 후 가진 술자리에서 번뜩 튀어나왔다. ‘먹고사니즘’,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으로 이어지는 가사는 취기 오른 이들의 ‘알코올 더늠’이다. 진로, 진로 진로라니 술 이름 한번 고약하다. 사방이 벽뿐인데 진로, 진로. 취업률 바닥인데 진로, 진로. 꿈도 없는데 진로라니. 술 술 넘어가는 게 술이라던데 그놈 참 안 넘어가는구나. 아무리 쳐다봐도 못난 년 너도 한잔. 지질이 운도 없는 년 너도 한잔. 한잔 두잔 석잔 주거니 받거니 진로가 금방 거덜 났네. 텅 비어버린 진로. 빈병 같은 청춘. 한라산 같은 꿈. 진로, 진로 진로라니! 그놈 이름 참 고약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보다 났네. 노력해서 최종면접까지 왔는데, 다시 처음처럼 이라니! 지긋 지긋한 먹고사니즘. 열심히 살아도 신용불량. 꿈과 빚은 패키지 상품. 언제쯤 좋은 데이? 이술 저술 다 마시고 고르고 골라 참소주 그마저 짠소주. 쥐포처럼 잘근 잘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망할 놈의 세상이야. ‘악의 평범성’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연습하다가 “저 밖에 있는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지낼까”라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다들 한없이 작아지던 경험도 가사가 되었다. 배고파서 먹을 거 찾는 게 잘못이냐? 아파트, 대형마트 지어 사람만 잘 사는 세상 만들었으니 삶터를 뺏긴 동물들이 배고픈 건 당연지사. 음식물 쓰레기로 연명하고 물도 구하기 어려운 도심 아픈 몸으로 고작 3-4년을 산다. (중략) 눈빛이 싫다고 돌 던지는 사람은 놔두고 돌 맞아 다리 저는 놈을 보고 절름발이라 놀리면 동물들 입장에선 얼마나 아프겠느냐.(중략) 상처를 주는 것이 나쁜 일이지 상처를 받는 게 나쁜 게 아니다! 대본 작업을 위해 박필근 할머니뿐 아니라 여러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던 중에 말년에 치매로 아기 인형을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하셨다는 이수단 할머니의 사진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친구들과 나물 캐던 ‘수단이’에서 일본 군인들이 부르던 ‘히도미’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중국인 ‘리평원’으로 생을 마치신 이수단 할머니의 삶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감히 상상하며 가사로 만들기도 했다. 이 못난 늙은이도 이름 세 개로 험한 시대를 살았는데 한 개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예쁜 다미가 못 살까 그냥 돈 몇 푼 벌어주는 직업은 꿈이 아니다 꿈을 잃지 말거라 꿈마저 잃으면 죽은 사람이야 그렇게 만들어진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낯선 할머니와 만난 소녀 ‘다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다름에 대한 폭력성’을 성찰하고 다양한 생명들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지만 지금도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 동식물들, 심지어 지구마저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확인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길고양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라.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너무나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 전쟁’을 겪었기에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신 할머니들.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려면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폭력을 줄이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가 길고양이를 아끼는 ‘위안부’ 할머니와 소리꾼을 꿈꾸는 한 소녀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가진 어떤 것에도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며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살자는 노래.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을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창작 판소리 <박필근뎐> 소개 대본: 김은주 / 연출: 김도연 / 소리: 곽미정, 김채은 2019년 경북의 유일한 ‘위안부’ 피해생존자이신 박필근 할머니의 구술생애사를 바탕으로 포항 KBS 라디오에서 ‘판소리 다큐멘터리 박필근뎐’이 제작됐고 이를 기반으로 2020년에는 포항여성회에서 지역의 예술가들과 손을 잡고 ‘창작판소리 박필근뎐’을 비대면 영상으로 제작했다. 2021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민간단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포항에서 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공연으로 중앙아트홀에서 공연 예정이다. <솔직히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소개 대본: 이원만 / 연출: 김봉영 / 소리: 김채은 2020년 포항문화재단에서 지역의 문화예술지원사업 중 공공프로젝트 글로컬아티스트 육성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쇼케이스로 발표했다.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는 ‘위안부’피해자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을 통해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 다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공감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을 창작판소리로 표현한 작품이다. 기사 게재일: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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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여행에세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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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 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 경상감영공원 → 대구근대역사관 → 경찰역사박물관 → 북성로→ 서문시장 → 계산성당 →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시인 이상화의 고택 #대구 근대골목에서 만나는 ‘희움’ 대구시 중구의 <대구 근대골목투어> 5개 코스 중 1코스에는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하 역사관)이 포함되어 있다. ‘대구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관광의 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고, 2013년에는 ‘지역문화브랜드대상’을 수상, 2014년에는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등에 선정되었으며 최근 2019년도에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는 등 많은 방문객과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역사관은 1997년부터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복지지원사업과 문제해결활동을 전개했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중심으로 시민들의 온정과 뜻이 모여 세워진 뜻깊은 장소이다.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그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15년에 개관되었다. 역사관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건물로서 당시의 시대성을 자연스럽게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문제의 발생과 건물의 건립이 동시대라는 점에서 정서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역사관 건축 리모델링 중 도배 속지로 사용된 1927년 신문이 발견됐고 다른 시대를 나타내는 여러 흔적들이 나오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지어진 일본식 상가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당시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뒷마당 쪽 부속 건물들은 원형과 관계없다는 판단 아래 철거하고 재증축하여 전시 공간을 확보했다. 대구 중심가에 위치한 역사관 주변은 400여년 영남의 정신적, 지리적 중심지이며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최초로 이식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5만 명 이상 거주 했으며 현재까지 일본식 상가, 주택 등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역사적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어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역사관이 위치한 곳은 과거 일본인의 생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서문로에 자리하여 대구, 경북 등 지역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과 흔적이 함께 하는 곳이다. 특히 고(故) 문옥주 님의 생전 활동영역과 굉장히 가깝고, 이용수 님의 생가 및 어린 시절의 공간과도 멀지 않으며 당시 많은 피해자가 끌려가신 대구역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또한 역사관 주위는 조선시대부터 대구지역의 최대 중심가였던 곳으로 인근에 서문약령시장, 서문시장,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역사관 인근에 있는 경상감영은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1930년대 식산은행건물은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이며 맞은편 중부경찰서에는 경찰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모두 도보로 이동가능한 아주 가까운 거리이며 대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대사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구 역사관은 과거 행정구역인 대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구읍성의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대구읍성은 일본과 기이한 인연이 있다. 이 성벽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들어졌는데, 1905년경부터 일본인의 거주 및 확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 친일파 조선인 박중양과 일본인에 의해 불법 해체됐다. 이를 둘러싼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및 남성로는 과거 대구의 희미한 경계이자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거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00년대 초 대구 서성로와 남성로에는 지역 유지들이, 동성로와 북성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때문에 역사관 인근의 북성로에는 특히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근대 지역경제의 중심이 된 곳으로, 한국 전쟁 후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대신동에 있던 공구상회들이 이 곳으로 옮겨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물자를 상인들이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구골목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장인과 공인의 흔적이 남아있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도 여기에 있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에 현대의 젊은 감성을 접목시킨 다양한 문화공간, 카페 등이 생기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역사관의 서쪽에는 과거 교역의 중심인 서문시장과 3.1운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선교사 주택,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성모당이 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성로 일대는 현재의 지역명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상업거래와 많은 시민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새로운 세대로 이어져 나갈 ‘역사’를 희망하며 그리고 이곳은 최근 들어 많은 젊은 작가들과 예술가가 찾아와 도시재생을 꿈꾸는 곳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물론 전국 각지의 여행객들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대구근대골목’을 방문하겠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이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통해 아주 잠시라도 ‘위안부’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과거가 과거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끊임없이 이야기되며, 다음 세대에 의해 새로운 역사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소개] 지상 2층의 일본식 건물로 1층에는 매표소, 희움스토어(굿즈 및 도서 판매), 상설전시관이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현재(2021년 9월 14일 기준) <익숙한 기억, 낯선 기록>이라는 이름의 사료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공문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 등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사료를 잘 보여준다. 또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와 서강대학교 ‘영원한 증언팀’에서 기획·제작한 <영원한 증언> 체험 베타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관람객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와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역사관은 2021년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시사업(여성가족부 주관)에 선정되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전시를 기획 중이며 올해 개최할 예정이다. ‘위안부’피해자의 증언 및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고 다양한 전시방법(VR 및 미디어)을 통해 시민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역사관은 앞으로도 전쟁과 여성인권,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을 위해 사실적 증거와 자료를 발굴·연구하여 객관적으로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역사적 맥락이 우리 개개인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관람객이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 중이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목표 기억, 일제 침략기와 성노예라는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삶을 기억 약속, 피해자들의 상처와 기억을 우리의 역사로 안고,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 기록, 명예와 인권을 되찾기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과 함께한 사람들의 운동의 기록 희망, 평화와 인권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희망 기사 게재일: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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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0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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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안세홍(비영리 단체 ‘겹겹프로젝트’ 대표)은 25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14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진에는 그들의 가슴 속 깊은 한이 담겼지요. ‘이것은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메시지’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작품이자 또 하나의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사진 속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안세홍 작가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에서 전합니다. [포토에세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조선인 피해자들 (1) 이수단 이야기 – 중국에 남겨진 70년 세월 (2) 배삼엽 이야기 – 홀로 눈물 흘린 한 많은 세월 (3) 백넙데기 이야기 – 쓴 웃음에서 전해진 역경의 세월 (4) 박우득 이야기 – 평생을 위안소에 갇힌 삶 (5) 박차순 이야기 – 아리랑이 유일한 ‘고향’이었던 삶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1] 박차순 1922년 전라도에서 태어남. 1942년 18세에 후난성, 난징, 우한에 4년간 동원됨.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피해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있는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살을 에는 듯한 환경에서 한 해를 넘기는 것이 그들에겐 남들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1년부터 중국 회이룽장성(黒龍江省) 오지에서 내륙 깊숙한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생존자들을 만나 왔다. 사진가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박차순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2월이다. 그는 우한에서 차로 두 시간을 더 들어간 샤오간(孝感)시 외곽에 살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찾지 못해 그의 양딸과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추운 날씨를 피하고자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를 쓴 채, 가늘게 들어오는 햇볕에 왜소한 몸을 더 움츠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한국에서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말로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무기력한 눈인사로 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지역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베이징(北京)어는 물론이고, 우한 말로도 통하지 않아 그의 양딸을 통해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생활은 그에게서 고향에 대한 기억과 조선말을 빼앗아버렸다. 기억나는 조선말이 무어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한국 지명뿐이었다. 뒤섞인 가사로 간간이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 아리랑만이 그에게 유일한 고향이었다. 인생의 얄궂음이 이런 건가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는 것이 전부였고, 이후로 더는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엄마의 곁을 떠나 전주 부근의 외할머니와 백부(둘 이상의 아버지의 형 가운데 맏이가 되는 형)의 손을 오가며 키워졌다. 사춘기의 나이에는 식당과 술을 파는 가게에서 일했고, 적은 임금 탓에 주인에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의 위안소로 팔려 가게 되었다. 18살에 중국 후난성(湖南省),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의 우창(武昌)으로 갔다. 그가 간 위안소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장제스(蔣介石) 동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린 채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평상시에는 계급이 비교적 높은 군인이, 일요일에는 일반 병사 20여 명이 몰려왔다. 일본인 관리자가 모든 물품을 배급하고, 외출도 같이 해야만 할 정도로 생활이 엄격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서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일본 조계지[2]로 집결시켰다.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여성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다시 잡혀와 일본군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서웠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위안부’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해 결국은 남기로 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도망쳐 나와 샤오간 시골 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 우한 지역의 피해자들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현지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박차순은 도망을 도와준 사람과 결혼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위안부’ 시절의 아픔이었을까, 자신의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갓난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그리고 1970년쯤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겹겹이 쌓여가는 힘 그가 사는 방은 창고를 개조해 햇빛 한줄기 들지 않아 습하고 냉기 가득한 시멘트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방안에는 난방 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 겨울 이불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따듯한 물주머니를 어루만지는 손등에 깊게 패인 주름, 도드라지게 노출된 핏줄과 검버섯이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난을 말해주고 있었다. 겹겹프로젝트[3] 활동을 하면서 피해자를 위해 써달라는 후원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전달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직접 만지기 어려웠고, 후원금은 엄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그들의 생활환경과 건강을 챙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2013년 11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박차순의 집을 수리하고자 25명의 시민과 68명의 후원인이 나섰다. 그가 따듯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겹겹 회원들은 전기장판, 양모 이불, 겨울 생활용품 그리고 단열을 위한 건축자재를 비행기로, 버스로, 기차로 샤오간까지 손수 운반했다. 그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냉기와 습도를 차단해 단열효과를 높이고,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벽은 이중으로 단열을 하고, 천장은 10cm 두께의 샌드위치 패널로 마무리했다. 온종일 공사를 지켜보며 초조해하던 그는 초저녁 잠을 청하다 공사가 걱정되는지 늦은 밤 깨어 방으로 왔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방문과 공사, 달라진 방의 모습과 새로운 가구로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이 그저 순진하게만 보였다. 같이 간 회원 한 명이 그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어요?”라고 묻자 그는 더듬거리며 “엄마!” 그리고 “갖…고…싶…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고향의 기억은 없었지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017년 11월 박차순의 양딸에게 그의 안부를 묻던 중 그가 한 달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회원 네 명과 함께 방문했다. 겹겹 회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며칠 만에 한복을 만들고, 그가 기억할만한 고향 음식인 수수부꾸미, 주박[4]울외[5]장아찌, 단술 등을 만들어 그에게 전해달라며 한 보따리 보내왔다. 박차순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우리를 반가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밍니엔 뿌자이(明年不在)”라며 내년에는 자신이 없으니 오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듬해 1월 18일 그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장례식에 갈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사진 설명] 겹겹 회원들이 외벽의 곰팡이를 제거하고 흰 페인트로 칠하고, 따듯한 겨울나기를 위해 창고를 개조해 만든 방 전체를 단열하고 도배로 마무리했다. 그동안 박차순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처음으로 발 마사지를 받고 외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 설명] 박차순이 어릴 적 살았던 전주에서 채취한 흙을 전해주고, 틀니 제작을 위해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지속된 허리통증과 심한 복통을 호소해 급히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서는 적절한 치료가 없었지만, 박차순은 나흘 만에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퇴원을 했다. 각주 ^ 박차순이 “(나는) 내년에는 죽고 없다”는 뜻으로 한 말. ^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 ‘겹겹 프로젝트’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증언과 고통을 기록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140여 피해자를 만나 기록과 지원을 하는 활동으로, 안세홍 작가가 그 대표를 맡고 있다. (겹겹 프로젝트 홈페이지(https://juju-project.net/)에서 부분 인용) ^ 술지게미(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 ^ 참외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기사 게재일: 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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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논평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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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7) 드라마 / 미국, 영국 / 레이첼 와이즈 출연 / 110분 ‘지구는 둥글다’, ‘엘비스는 죽었다’를 어떻게 증명할까? 영화 <나는 부정한다>(믹 잭슨, 2016)는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엘비스는 살아있다는 것처럼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싸운 기록이다. 우리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영화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역사학자 사이의 명예훼손 재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윤리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1994년 미국의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는 히틀러 연구자인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다. 립스타트가 자신의 책 <홀로코스트 부정하기>(Denying the Holocaust, Penguin Books, 1993)에서 데이빗 어빙을 역사 부정주의자라고 칭하며 그의 명예를 훼손했고, 이후로 여러 출판사에서 책의 출판을 거절당하는 등 생계를 곤란하게 했다는 이유다. 어빙이 사실 입증의 책임이 피고에게 있는 영국에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립스타트는 이제 법정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부정주의자들의 말하기 <나는 부정한다>에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의 주장은 익숙하다. 그는 생존자들의 기억이나 사료 등에서 작은 오류를 찾아, ‘이게 틀린 걸 보니 저 사람이 증언한 것은 다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사소한 왜곡을 통해서 전체 그림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부정론자들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이미 만난 바 있다. 그들은 ‘정신대’라는 용어를 문제 삼고, “군표나 돈을 받았으니 성매매다. 국가는 책임이 없다”와 같은 주장을 한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표적>(니시지마 신지, 2021)은 일본군‘위안부’의 생존을 일본에 최초로 보도한 전(前) 아사히 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의 법정 소송을 통해 부정론자들과의 재판을 기록한다. 일본의 ‘위안부’ 부정론자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는 우에무라의 기사가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사쿠라이는 우에무라의 기사에 실린 김학순 님의 증언을 거론하며 ‘정신대’는 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위안부’가 아닌데, ‘정신대’라고 하고 있다면서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 한다. 심지어 일본군‘위안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범죄이기 때문에 일본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꼬투리 잡기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일본군‘위안부’나 유대인 학살을 지시했다는 문서를 제시하라는 요구다. <나는 부정한다>의 첫 장면도 여기서 출발한다. 어빙은 대학에서 열리는 립스타트의 북토크에 찾아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의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1000달러를 주겠다며 돈다발을 흔든다. 청중은 수군거리고 경비원은 그에게 나가라고 요구한다.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사실이 아니라는 방식의 문제 제기는 마치 홀로코스트 부정도 하나의 역사 해석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스스로를 공식 역사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재야 학자로 포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식 역사는 주류의 시선만을 반영하여 새롭고 급진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독학으로 공부한 비주류의 이야기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아카데미의 학자들도 모르는 것이 있다, 혹은 평범한 사람이 더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방식의 수사학은 꽤 성공을 거둔다. 지금도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채널에서는 역사 부정론자들의 포스팅이 이어진다. 마치 새롭고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탈진실(post truth)’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이때 포스트는 진실이 퇴색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불편한 진실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진실에 도전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1] 홀로코스트나 일본군‘위안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대안적 진실’을 선택한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데이빗 어빙은 히틀러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던 것이 된다면, 히틀러가 비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를 긍정해야 한다는 ‘애국적’ 사고가 ‘위안부’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 이른다. 생존자들의 말하기 부분을 확대해서 사실을 호도하는 부정론자들의 방식은 생존자의 증언을 둘러싸고 첨예해진다. 홀로코스트와 일본군‘위안부’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빠르고 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와 <허스토리>(민규동, 2018)는 일본군‘위안부’의 증언을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설정한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나문희)은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증언을 하며 일본 관료들에게 호통을 치고, <허스토리>의 서귀순(문숙)은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숨겨왔던 비밀을 꺼내놓는다. 그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론장에 밝히는 증언 장면은 재판의 승패를 좌우하며, 피해생존자의 압도적인 현현을 재현한다. 그러나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재판정에 세우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직접 증언하겠다며 찾아왔음에도, 립스타트가 자신의 변호사에게 그들의 증언을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지 않겠다는 것일까? 립스타트 재판의 변호사 줄리어스(앤드류 스캇)는 생존자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그 때문에 재판장에서 어빙에게 공격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작은 실수에도 역사부정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1945년 이후 이 증언으로 돈을 얼마나 벌었습니까?”라는 식의 공격이 법정에서 심문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줄리어스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의 존재가 증언의 선제 조건임을 보여준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생존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배제할 수 있다. 이것이 청자의 윤리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사상사를 연구하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는 증언을 듣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전 배제(foreclosure)’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레 말해지지 않는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가 있어야만, 그 이야기들은 발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폭력적 상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말을 포함해 ‘우리’의 언어 영역 자체가 ‘사전 배제’를 추인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위험성을 슬그머니 용인하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2] 생존자들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변호단의 결정은 ‘듣지 않을’ 청자에게 증언자들의 삶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순간, 재판을 받는 것은 어빙이 아니라 생존자들이 된다. 지금 일본의 역사부정론자들이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운동의 전면에 소녀상과 나란히 선 ‘우리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대변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얼마만큼 가서 닿았을까? 소녀상을 세우고, 김학순, 김복동 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은 상황을 가정하며 쓴 소설이다. 여기에는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들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가 사라진 이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부정주의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증언은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많은 증언이 고통의 기억을 계속 되살려왔던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충분히 듣고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누구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나는 부정한다>의 초반부에서 립스타트는 줄곧 강력하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립스타트에게 홀로코스트는 의견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그런데 재판을 거치며 립스타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부정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TED 강연에서 그는 홀로코스트 부정주의자들이 거짓말을 ‘의견’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학술지를 만들고, 책을 출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과 거짓말을 섞어 대중을 호도하는 상황에 대항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청중을 설득한다.[3] 이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과 연결된다. 영화에서 변호단 신참의 애인은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냐고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목소리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제대로 듣기부터 시작해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때다. 각주 ^ 『포스트트루스-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두리반, 2019. ^ 도미야마 이치로, 「증언 ‘이후’」, 『전쟁, 여성, 폭력: 일본군 ‘위안부’를 트랜스내셔널하게 기억하기』, CGSI EPUB, 2019, 54~55쪽. ^ 데보라 립스타트, 홀로코스트 부정이라는 거짓말의 이면, TEDXSkoll, 2017(https://www.ted.com/talks/deborah_lipstadt_behind_the_lies_of_holocaust_denial?language=ko 2021.11.5. 검색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