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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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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빨간 기와집』이라고 답한다. 『빨간 기와집』은 조선에서 오키나와 도카시키(渡嘉敷)섬의 위안소로 연행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 남겨진 배봉기 씨의 반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봉기 씨를 처음 찾아간 것은 1977년 12월 5일, 6살 때부터 남동생과 둘이서 살았던 기억에서부터 시작되는 배봉기 씨의 처절한 인생사를 약 6년간 잔뜩 움츠러든 마음으로 취재했다. 그동안 배봉기 씨를 만나러 오키나와에 갈 때마다 다마코 씨도 찾아갔었다. 다마코 씨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같은 일본인이라고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나보다35살 위였지만 다마코 씨의 타고난 성격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일까. 다마코 씨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하루는 소매를 휘둘러 팔에 감더니 나한테 “고모쿠메시(五目飯, 생선이나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지은 밥-역자) 만들어 줘”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다마코 씨가 소매를 휘두르던 몸짓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다마코 씨가 남자들에게 성을 팔 때 반복했던 몸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의 이야기는 필자의 저서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 (1993년, 치쿠마쇼보(筑摩書房),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 수록된 「사이판에서 귀환한 다마코 씨」에 실려 있다. 글 속의 다마코 씨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위안부’가 되었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것처럼 처참한 전시와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낸 여성이다. 1908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다마코 씨 다마코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국어와 수신(修身, 2차 대전 당시 학과목 중의 하나로 지금의 도덕에 해당함 -역자)은 재미있었지만, 산수를 못 해서 학교를 땡땡이치고 산에서 놀곤 했다고 한다. 다마코 씨에게는 여동생과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여윈 다마코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일하던 방적 공장에서 누에고치에 섞여 있는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다마코 씨는 17~18살 즈음이 되던 무렵에는 군항에 있던 요코스카의 유곽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항공기지에 있었던 마을, 나가이 가후(永井荷風)의 소설『보쿠토키탄(墨東綺譚)』에 나오는 다마노이 (玉の井), 가메이도(亀戸) 등의 유곽을 전전하다가 마리아나 제도에 속한 티니안 섬으로 건너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령이었던 마리아나, 파라오, 카로린, 마셜 등 괌을 제외한 섬들은 일본의 통치령이 되었다. 티니안 섬은 마리아나 제도 중 면적이 약 98㎢의 작은 섬이다. 1930년, 국책회사인 남양흥발(南洋興発, 난요코하쓰)주식회사의 제당 공장이 티니안 섬에 설립되었다. 당시 티니안 섬의 일본인 인구 약 16,000명 중 약 90%가 남양흥발 관계자였다. 1942년에는 남양군도(南洋群島)에 거주하는 일본인 전체 수는 약 72,000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 약 46,000명이 남양흥발의 관계자였으며 오키나와현 출신자가 특히 많았다. 1944년, ‘남양흥발은 마리아나 지구에서 전력 증강과 병참 식료품 확보를 위해 회사의 모든 기능을 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군민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마코 씨는 티니안 섬에 도착한 후 오키나와현 출신의 우치마(內間) 씨가 경영하는 유곽인 ‘마쓰시마로(松島楼)’에 고용되었다. 오사카에서 온 노부코(ノブ子)도 다마코 씨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둘이 마쓰시마로에 고용된 사실은 다마코 씨 말에 의하면 『아사히신문』과 『요로즈신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전 난요코하쓰 티니안 제당소의 직원인 아베 오키스케(阿部興資) 씨로부터 제공받아 필자의 저서 38, 39쪽에 실린 티니안 지도에는 『난요아사히(南洋朝日)』, 『신코일보사(振興日報社)』, 『라디오신문사』가 게재되었다. 『요로즈신문』은 이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다마코씨가 갔던 다른 섬의 신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지도에서 마쓰시마로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기루(창기를 두고 영업하는 집), 바, 소바집, 스시집 등의 이름이 적힌 티니안 동쪽 끝 환락가의 다이요(太陽)거리를 따라 늘어선 ‘다마시로(玉城) 온천’ ‘바 구로네코(黒猫)’ 사이에 마쓰시마로가 있다. 이 환락가에는 오키나와 출신이 많았다. 딱 한 곳, 조선 출신의 업자가 운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센카로(鮮花楼)’가 마쓰시마로 근처에 있었다. 마쓰시마로에는 다마코 씨와 노부코가 고용되기 이전부터 일하던 5명의 여성이 있었다. 5명의 여성 중 이미 빚을 청산한 모모코(モモコ)와 도시코(トシコ)는 신입인 두 사람에게 손님들이 몰리는 것을 질투하여 텃세를 부렸다. 17, 18살부터 유곽에서 생활한 다마코 씨는 텃세가 아니꼽다고 느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모모코와 도시코를 피해 식사를 나중에 하려고 했던 어느 날, “같이 못 먹겠으면 계속 먹지 말지 그래?” 이런 말이 다마코 씨에게 날아왔다. “빚이 없다고 잘난 척하지 마. 네가 돈 냈어? 주인이 돈 내고 우리를 고용한 건데 왜 네가 난리야?” 다마코 씨가 응수했다. 노부코는 유곽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연장자들 간의 기 싸움을 보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 일이 있은 후 근처의 과자 가게가 알선업도 겸한다는 말을 듣고 마쓰시마로를 나와 버렸다. 노부코도 다마코 씨에게 의지했었기에 노부코도 함께 데리고 나왔다. 과자 가게에서 다마코 씨와 함께 생활하던 노부코가 자취를 감춘 것은 새로운 업주가 운영하는 기루로 옮기기 전날이었다. “여자가 바다에 빠졌어.” 이런 얘기가 과자 가게에도 들려왔다. 바다에 빠진 노부코는 마침 해변에 있던 뱃사람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다마코 씨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빚은 걱정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도록 해.” 그렇게 격려했다. 하지만 이틀 후, 노부코는 죽고 말았다. 다마코는 과자 가게를 나와 다시 마쓰시마로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쓰시마로에서 기존에 일하던 여성들과 신입이 손님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티니안은 작은 섬이어서 손님 수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다마코가 티니안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손님들이 ‘본토에서 온 여자’라면서 신기해했지만, 점차 다마코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 다마코는 손님이 적은 티니안에서는 빚을 청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트럭섬’(추크 제도, Chuuk Islands)의 ‘미하라시’라는 가게로 둥지를 옮겼다. 티니안에서 트럭섬으로, 다시 라바울의 위안소로 당시 트럭섬에 살던 일본인은 3,665명이고 그중 3,215명이 오키나와 출신이었고 이중 1,989명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오키나와 현사(県史) 7이민』(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1974년)수록 「남방 각 지역에 있는 오키나와 현민의 수산 관계 통계」). “트럭섬은 말이야, 군인은 안 와. 가쓰오부시를 만드는 공장 인부, 경찰, 오키나와 사람들이 많았지.” 다마코 씨가 위안소에 가게 된 것은 트럭섬에서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경찰이 지명했기 때문이다. “이건 위문이라서,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지명을 받아서 가는 거니까. 경찰이 6개월 일하고 오라고 하더라고.” 동업자들은 다마코 씨 일행을 만세삼창으로 배웅했다. 배에는 티니안과 사이판의 각 기루에서 모집된 약 50명의 여성이 타고 있었다. 마쓰시마로에서 지명을 받은 다른 3명의 여성과 업주도 함께 배에 올랐다.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는 여자 지배인이 맡게 되었다. 여성이 적은 기루는 비교적 여성이 많은 기루와 융통하여 여성의 전차금을 청산하고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배에 탄 후 병사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했고 선원도, 선장조차도 “배가 가는 곳으로 가겠지.”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군의 명령으로 행선지를 비밀에 부치고 있던 것이다. “라바울은 정말 끔찍했지. 죽던지, 살던지,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배에서도 절대 내릴 수 없었어. 탕타탕, 타탕 하니까 짐도 내릴 수 없었어. 총알에 맞을 것 같아서.” 그곳이 라바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공습이 끝난 후 간신히 배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커다란 상점을 발견해 피난했을 때였다. 상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를 찾아 불을 밝힌 후 거적을 깔고 모기장과 모포를 끄집어내어 잠자리를 만들었다. 식사는 군에서 지급한 소금으로 만든 주먹밥이 전부였다. 일본군이 라바울을 점령한 것은 1942년 1월이다. 2월에는 이미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가장 많을 때는 육군과 해군을 모두 합쳐 17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육군과 해군의 위안소가 총 40곳이나 있었으며 약 2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장교용 요정도 네 곳이나 있었다. 50명의 여성은 육군, 해군, 장교용 등 몇 군데의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곳은 육군의 위안소였다. “장교만 드나드는 클럽 같은 곳은 상급 여자들만 보냈어. 하지만 그런 곳에 가면 빚은 못 갚아. 돈을 못 버는걸. 장교 수가 적거든. 우리는 평범한 병사들을 상대했었는데 아침 9시경부터 배급을 받는 것처럼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그래서 밥 먹을 시간도 없으니까 주방 직원이 주먹밥을 만들어서 갖다 주고 우린 각자 방에서 먹었어. 배는 고프니까 주먹밥을 3개 4개씩 두고 반찬도 덮밥 안에 잔뜩 넣어 달라고 부탁했지. 병사가 문을 두들기잖아? 뭐 괜찮아. 밥 먹는 와중에도 상관 않고 문을 열었어. 매일 한가할 틈도 없었는 걸, 끝나는 건 5시고 밤이 되면 쉴 수 있긴 했지. 피곤하진 않았어. 100명, 200명 별것 아냐. 응, 진짜라니까. 잔뜩 굶주린 병사들인걸, 금방 끝 나.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 하겠다고 맘 먹으면 금방이야. 끝나고 나면 바로 내쫓는데도 말이지, 내쫓으면 바로 그 다음 차례야. 한 사람한테만 붙어있으면 돈이 안 되는걸.” 민간 기루에서는 대금의 배분이 업주가 6할, 여성이 4할로 계산되었지만, 위안소에서는 5할 대 5할씩 배분되었다. 하지만, 막대한 전차금을 떠안고 있는 여성들은 받은 돈을 모두 전차금을 갚는 데 썼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병사들이 따로 쥐여준 팁뿐이었다. 기모노와 화장품, 침구 등을 구입하는 각종 경비도 모두 빚으로 계산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위안소의 요금은 장교가 2엔 50전, 하사관은 1엔 50전, 일반 병사는 1엔이었다. 이용료에 따라 계산대에서 구입하는 패는 적색, 황색, 흰색으로 나뉘었다. “난 윗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 변덕스러워서 싫어. 막무가내에 말도 많더라고. 난 일반 병사가 좋아.” 병사들은 휴일만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용 시간도 5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하사관은 하루 간격이었고 장교는 날짜와 시간에 제한이 없었다. 병사들이 쉬는 휴일에는 위안소 앞에 하얀 패를 가진 병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를 샀는데 5시가 되어도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허탕치는 병사들도 있었다. 라바울의 위안소 생활을 마친 다마코 씨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괌의 장교용 클럽으로 끌려갔다. 괌에서 장교를 상대한 것은 2개월에 불과했다. 요금이 비싸도 숫자가 적은 장교를 상대해서는 큰돈을 벌 수 없었기에 3번째로 마쓰시마로에 돌아갔다가 사이판으로 건너갔다. 남양군도 중에서도 사이판은 일찌감치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도 많아 1942년에는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구수가 44,867명에 달했다. 가장 번화한 가라판 시에는 남곽, 북곽이라고 불리는 유곽이 있었다. 1933년에 작성된 ‘사이판 섬 가라판 시내지도 부록 유명상점 안내’에는 회사, 무역회사, 신문사, 상점 등 136곳이 게재되어 있다. 그 중 15곳이 ‘여관 겸 요리’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그 대부분이 일반적인 여관이 아니고 창기를 두고 있었다. 창기를 두지 않는 여관은 ‘일식여관, 창기 없음, 일반 여관’과 같이 기루가 아님을 명시했다. 사이판에서는 일본군이 주둔하면 유곽 기루에 군 전용이라는 패가 걸리고 해당 기루는 군이 관리했다. 다마코 씨가 일하게 된 메이세이로(明星楼)의 업주인 우치마(內間)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 업주와 형제였다. 하지만 고용한 여성들이 금방 그만두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부부간 말다툼이 끊이질 않아 우치마는 결국 이혼했다. 우치마는 팔라우에 가서 세 명의 여성을 고용하였고 다마코 씨가 있던 티니안에도 들렀다. 우치마는 빚도 없고 젊지도 않은 다마코 씨를 고용하기를 꺼렸다. 빚이 없는 여성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당한 여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마코 씨와 또 한 명의 여성을 데리고 사이판으로 돌아갔다. 요코하마 출신인 다마코 씨를 제외한 여성들은 모두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메이세이로에서 이전부터 하녀로 일하던 기누코(キヌコ)도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다마코 씨는 민간 기루보다 위안소가 더 낫다고 여겼다. 기루는 현관에 여성들의 기명을 적은 패를 벌이가 높은 순으로 걸었다. 다마코 씨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항상 벌이를 두고 경쟁하고 벌이 순으로 패가 걸리는 것이 싫었다. 위안소에서도 출입구에 명패가 걸려 있었지만, 벌이가 높은 순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안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안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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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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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공습을 겪다 사이판에 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4년 6월 11일이다. 이날, 일본군의 항공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항공모함 15척을 포함한 775척의 미군 함정이 마리아나 제도를 둘러쌌다. 일본군은 13일에 함포 사격을 받았고, 15일부터는 미해병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사이판에는 43,682명의 일본 육·해군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미국의 공격에 패퇴를 거듭했다.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 장관인 나구모 추이치(南雲忠一) 중장을 비롯한 군 참모들은 7월 6일에 자결하였고 이후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다.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41,244명에 달했다. 1943년 시점에서 사이판의 민간인 거주자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되며 피란민은 극히 일부였다. 1944년의 인구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몰자는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다마코 씨는 하녀인 기누코, 어린 게이샤와 함께 메이세이루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다마코 씨는 망설임 끝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산속으로 도망쳐 헤맸다. 섬을 쪼갤듯이 작렬하는 포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총탄 소리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연 수로 안에 있었다. 사이판에는 천연 수로가 무척이나 많았다. 저녁이 되고 공습이 잦아들자 전사자의 시신을 옮기고 있는 일본군들이 나타났다. 수로 앞에서 그 작업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병사가 다마코 씨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지내는 거야?” “여기 수로 안에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니 병사가 커다란 깡통에 밥과 고기를 넣어서 다마코 씨에게 가져다주었다. “수로에서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했지. 모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데 아 정말, 돼지와 다를 바 없었어. 배를 채우긴 했지만, 더러워서 울컥했다니까.” 미군이 상륙하고 날이 갈수록 식량도 물도 떨어져 벼랑 끝에 내몰린 민간인들은 집단 자결을 하거나 뛰어내려 자살하고 또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사이판 북단 곶의 절벽에서 민간인이 차례차례 몸을 던지고 있다는 정보는 다마코 씨의 귀에도 들어왔다. “공습이 무서웠지. 미국도 무서웠고. 수로 밖에서는 자꾸 나오라고 하고. 밖에서는 총탄 소리가 ‘탕, 탕’ 들리니까 이제 죽겠구나 싶었어.” 다마코 씨와 다른 민간인들은 모래밭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친 임시수용소에 연행되었다. 조금 상황이 진정되자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군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다마코 씨는 세탁장에 가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이틀 만에 못 하겠다면서 제초작업으로 바꿔달라고 노무 담당에게 부탁했다.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탁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더니 제초작업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제초 작업반에 들어가니 미군병사들이 젊은 여성들을 졸졸 따라다녀 용변도 볼 수 없었다. 손 씻는 세면대 앞에는 미군병에 의한 성폭력,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MP(Ⅿiritary Police, 헌병의 약칭)들이 서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성들은 서로를 둘러싸 가림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용변을 보았다. 미군병사들의 요청을 받은 작업반장이 여성들을 관리했다. 수용소 안에는 은밀한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미군병사들은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할 만한 물품을 대가로 주었고 영어가 통하는 작업반장은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미군병과 여성들을 알선해 리베이트를 받았다. 공습 전에는 평범한 주부였어도 극심한 전쟁의 화를 입고 가족을 잃자 넋이 나간 상태에서 미군병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캠프의 반장을 맡던 여성이 다마코 씨를 불렀다. 아이를 캠프에서 돌볼 것이라고 했다. 부모를 여읜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마코 씨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캠프에서 돌본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반장을 따라나섰다. 유아부터 중학생 정도까지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반장은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면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판단해 독신자였던 다마코 씨에게 아이들을 떠맡기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다마코 씨는 남자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큰 아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번 둘러본 후에 다시 한번 한 명 한 명 보고 7살짜리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해 묻자 모른다고 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 낸 과자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는 오랜 기간 단 것이라곤 구경도 못했던지 엄청 좋아했다. 다음 날, 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물이 길어져 있었다. 작은 빈 깡통으로 몇 번이나 길어온 물이었다. 아직 7살인데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토로 돌아가는 배가 오면 아줌마랑 같이 갈래? 너 오키나와 출신이지. 그냥 사이판에 남을래?” 그 아이는 다마코 씨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취사장은 캠프 내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이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뿔뿔이 헤어진 가족을 찾으러 모두가 취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마코 씨와 지내던 아이의 아버지도 어느 날 취사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왔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마코 씨는 자주 그 아이와 아버지가 있는 캠프로 찾아갔다. “당신, 홀몸이라면 내 도지가 되지 않을래?” '도지'는 오키나와의 방언으로 아내를 의미한다.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아이를 아끼니 나를 배려해 주었던 거겠지.” 본래 다마코 씨는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후 오키나와 출신 남성의 교제 요청을 받아 함께 살 것을 약속하고 오키나와로 향하는 인양선에 올랐다. 남양흥발의 소작농으로 사이판에 와 있던 농부였다. 배는 인누미 수용소에 도착했다. 미사토손(현 오키나와 시) 남서쪽 언덕에 있는 미군 캠프 부지에 1946년 8월부터 1년간 인누미 수용소라고 불리는, 해외 인양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마코 씨는 그곳에 들어갔다. 식사는 미군이 지급해주었으나, 수용시설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두막집이었다. 이후 다마코 씨는 몇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다. 오키나와도 전쟁의 화를 크게 입어 집 다운 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 불탔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는 사이판에서 함께 돌아온 농부의 고향으로 갔다. ‘오키나와 교쿠사이(沖縄玉砕)[1]’ 소식을 사이판에서 들은 농부는 가족이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내도 아이도 살아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다마코 씨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농부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그 남자랑 매일같이 싸웠어.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 보기 창피했지. ‘다마코, 또 싸워?’라고 묻는데, 싸우는 게 아냐. 이 자식이 날 쫓아낸대. 죽여버릴 거니까 꺼지래. 내가 어디로 가? 집도 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나 보고.” 결국, 다마코 씨는 그 오두막을 나왔다. “오키나와 사람한테 버림받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말이야. 참 가여웠지. 거지같은 차림으로 이곳저곳 걸었는걸. 그래서 또 장사를 하게 되었어. 미국 장사. 아빠(사이판에서 함께 온 농부)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어. 목을 매고 말이야. 제 성질을 못 이겼을 거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엄마(부인)랑 싸웠겠지. 목매달아서 죽었어.” 다마코 씨는 미사토손 노보리 강(登川)에 있는 농가에 방을 빌렸다. 군 작업의 반장을 맡고 있던 통역사가 미군을 다마코 씨 곁으로 데려왔다. 보수는 통역사와 반으로 나눴다. 세들어 살던 농가의 아이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배웠는지 미군을 데려왔다. 미군은 마을 아이에게 “여자 있어? 잠 잘 여자 있어?”라며 앞장 세운 것이다. 다마코 씨는 당분간 그 농가에 머물다가 그 곳을 떠났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을 그 집안 사람들이 꺼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이 미군이나 오키나와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면서 매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느 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남자를 만났고 물을 떠서 남자에게 마시게 했다 그 남자의 아내는 전쟁으로 사망했고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 수조차 없는 간이 시설이 빼곡한 곳을 전전하는 생활에 지쳐 있던 다마코 씨는 “나 좀 데려가 주지 않을래요?”하고 그 남자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자의 8살짜리 딸이 다마코 씨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토에서 온 여자라서 싫다고 면전에다 말하며 사사건건 반항했다. 다마코 씨는 계모라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아이를 혼내고 싶어도 혼낼 수 없었다. 큰맘먹고 남자에게 이야기하면 남자는 화를 내며 아이를 심하게 꾸짖었다. 아무리 꾸짖는다고 해도 아이가 다마코 씨를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애한테 뭐라 하지 마요, 아저씨. 내가 나가면 되니까.” 집을 떠날 각오로 그렇게 말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함께 술을 자주 마셨던 이시카와(가명) 집으로 다마코 씨를 데려갔다. “본토 여자가 왔는데, 나는 괜찮은데 아이가 싫어해서.”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 즈음부터였다. 나하가 모두 불타버린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인해 이시카와가 운영하던 정육점이 불타 이시카와 부부는 길가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시카와는 심신질환에 빠진 아내와 헤어져 혼자서 오두막에서 살면서 자그만 밭을 일구며 비칠비칠 불안한 걸음으로 마을에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된 후에도 세면기를 들고 마을로 나가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할 때가 있었다. 이시카와가 병으로 쓰러져 수입이 끊기기에 이르렀을 때다. 여전히 불탄 흔적이 남은 마을에 호텔 같은 건 없었고 성병 예방과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샅을 씻는 세면기는 필수품이었다. 세면기를 품에 안은 다마코 씨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야유했다. “조선 년, 조선 년, 조선 년은 삼등 국민.” 이시카와와 살았던 지역의 사람들은 다마코 씨를 ‘본토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어른들은 다마코 씨를 '조선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듣게 된 아이들도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다마코 씨의 ‘위안부’ 경험이 알려져 조선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시카와는 1962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혼자서 살게 된 다마코 씨는 이웃과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고향인 요코하마로 돌아갈 생각으로 수십 년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본토의 유곽을 전전했던 전쟁 이전의 생활. 지명되어 유곽에서 위안소로 향했던 전시 중의 삶. 생활이 빈궁하여 세면기를 끌어안고 미군을 상대로 ‘몸장사’를 하러 마을로 나간 적도 있던 전쟁 이후의 삶. 이러한 다마코 씨의 전쟁 이전, 전시 중, 전쟁 이후의 삶을 한 사람의 일본 여성이 걸어온 발자취로서 필자는 청취했다. ‘조선년’이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주 ^ ‘교쿠사이(玉砕)’는 옥과 같이 아름답게 부서져 내리는 모양으로, 전력으로 싸워 명예와 충절을 지키며 떳떳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1944년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 수호의 명목으로 오키나와에 주둔한 제32군에 ‘옥쇄’를 명령했다. 이후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오키나와 도민을 총동원하여 희생시켰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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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인터뷰 일제강점기로의 시간 여행, 상상해본 적 있나요? - 『푸른 늑대의 파수꾼』 김은진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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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청소년 문학, 판타지. 김은진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이처럼 주목할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위안부’ 문제를 말하면서도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 요소를 이용해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주인공 수인을 통해 그 시절 여학생들이 가졌던 열정과 포부를 보여주며 당시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조선의 명가수가 꿈인 소녀,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노랫가락을 맛깔나게 뽑아 앙코르 요청을 끌어내는 소녀, 뒷간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소녀. 그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덧입혀져 왔던 고정관념이 한풀 벗겨지는 순간이다. 제9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출간된 이 책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 수인은 흑백 영화 같은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를 거닐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는, 한마디로 컬러풀하기 그지없는 소녀다. ‘위안부’ 할머니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생기발랄한, 현재의 10대보다 더 10대다운 소녀로 제시한 점은 앞으로 나올 청소년 소설이 어떻게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을 살려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일 낮,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로 한층 몰입감을 더했던 그날의 대화를 전한다. Q. 웹진 <결>의 독자분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단편동화 「애꾸눈 칠칠이 아저씨의 초상」으로 등단했고,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출판사 편집자, 무대 연출 회사 PD로 일했어요. 우먼센스, 쎄씨, 여성중앙, 쉬즈, 라벨르 등 여성 잡지 프리랜서 기자와 MBC가이드, 금호건설 등 사보 필자로 글을 썼고 기업 사사(社史) 집필도 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좇기 시작한 때가 2010년이라고요. 처음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안에 물음표가 쌓이고 쌓여서였던 것 같아요. 90년대 중반에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를 본 적이 있어요. 분명 슬프고 감동적인데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는 거예요. 이게 뭘까 싶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에 미국 LA에서 5학년 한인 여학생이 수업 거부를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내용을 들여다보니, 학교에서 역사 보조교재로 사용하는 『요코 이야기』(일본계 미국인 작가의 소설) 때문이었어요. 부모님에게 들었던 역사적 사실과 책 내용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책에는 일본이 패망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 남성들이 일본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이요. 프랑스에서 여성 교수가 일본 우익재단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는 한겨레 기사도 제게 궁금증을 남겼어요. 전쟁 범죄 사실을 왜곡하는 사사카와재단(笹川財團)이 관련된 학술대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며 50여 명의 교수들이 성명을 냈는데, 일본재단이 당시 여성 박사 한 명을 표적 삼아 거액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건 거예요. 비슷한 맥락의 기사들을 접하며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인식하게 됐어요. 전쟁 피해국의 시민으로서 어떻게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2010년에 취재를 시작했죠. Q. 책은 비교적 밝은 톤을 유지해요. 그러한 성격을 취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초고를 쓸 때 ‘왜 굳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해?’라는 반응이 꽤 있었어요. 일제강점기는 고통스럽고 뒤돌아보기 싫은 시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는 거죠. 근데 역사를 외면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쓰긴 써야 할 텐데 ‘어떻게’ 써야 할까가 고민이었죠. 그래서 장르를 통해 읽는 재미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Q.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요? 창작 초기에 동화와 청소년 문학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죠. 그 재미와 감동, 예술성을 저도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소설로 풀어내면서 힘들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을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피해자분들의 증언집도 여러 권 봤는데 상상이 잘 안 되더라고요. 좀 헤매다 옛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게 됐고, 1920년부터 1940년 폐간 전까지의 기사들을 일일이 타이핑하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의 언어, 풍물, 공간들이 조금씩 그려지더라고요. 그 시대의 소녀들에 대한 기사도 꽤 있어서 참고가 많이 됐어요. 수인이가 수예로 상 타는 내용이 책에 나오잖아요. 실제로 그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있던 이야기예요. ‘오엽주 미용실’, ‘시간 기념일’, ‘양조장 탈취 사건’도 기사에서 발견했고요. 그렇게 1년 이상 밤낮으로 기사를 봤어요. 나중엔 그 시대를 살아본 착각이 일 정도였는데, 그런 기분이 들고 나서야 글이 써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책의 배경이 되는 곳들을 혼자서 탐색하기도 했어요. 집필 전부터 여러 지역으로 답사 다니는 걸 좋아했고, 그중에는 경기대 건축과 안창모 교수님이 진행하는 서울 답사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거기서 들은 풍월을 기반 삼아 서울역부터 남대문, 시청, 광화문, 경복궁, 서촌, 인왕산까지 많이도 걸어 다녔네요. [1] Q.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문학적 재미를 함께 고려해야 했잖아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한 게 있나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라는 범죄의 토대가 되는 그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앎’을 단단한 기반으로 삼은 뒤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가수를 꿈꾸는 당찬 여학생으로 묘사된 주인공 ‘현수인’ 캐릭터는 길원옥 할머니를 모티브 삼아 만드셨다고요. 평양 출신이고 기생학교에 다니셨던 게 모티브가 됐어요. 2010년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전화를 드렸더니 충정로 쉼터에 있는 할머니를 연결해주셨어요. 대화를 나누다 할머니가 ‘가막소에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에피소드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평양 출신에 이런저런 이유로 경성으로 오게 되는 소녀’라는 큰 설정을 잡을 수 있었죠. 당시 기생학교는 노래 잘하고 흥 많고 진취적인 소녀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재능 있는 엔터테이너가 되는 거죠.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생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생겼잖아요.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길게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소설을 통해 기생에 대한 편견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또 증언집을 보면 할머니들 중에 ‘동네에서 노래 한 자락 했다’는 분들이 꽤 계세요. 발랄하고 흥 많고 똑똑한 캐릭터를 통해 피해자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과 요즘 청소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수인’이 시간 여행을 함으로써 직접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도 좋았을 텐데, 시간 여행의 주체를 중학생 ‘햇귀’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이기 때문이에요. 일본군 강제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이게 결국 폭력이잖아요. 그러다 청소년 폭력이 눈에 들어왔죠. 1990년대 중반, 서초구에서 고등학교 남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아버지를 인터뷰해 기사를 썼고, 너무 마음이 아픈 동시에 제게 어떤 물음표가 남았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흘러 2011년 대구 중학생 자살 소식을 듣고 생각했어요. 왜 학생들의 자살은 끊이지 않고 청소년 폭력은 더 심해지는 걸까. 혹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든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역할을 문학으로써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책에 녹이고 싶었어요. Q. 덕분에 수인의 미래는 바뀌지만 하루코가 비극을 맞아요. 안타까운 결말입니다. 하루코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를 벗어나 알을 깨고 나간 거예요. 죽음을 택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죠. 자신이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하루코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돌이켜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무고한 이가 치르게 된 희생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룬 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고통스럽고 또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경계선을 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학교에 강연을 나갈 때면 학생들에게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문학을 여러분 중 누군가 써주길 바란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곤 해요. Q. 국내에선 ‘청소년 문학’ 하면 ‘학생들이 읽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현재 청소년 소설의 위상과 역할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세요? 청소년 소설을 검색해보면 학부모들이 감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청소년 문학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는 평도 있고요. 청소년 문학의 재미를 아는 분들이 늘어나면 저변이 확대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단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림책, 동화책 하면 어린이만 보는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글을 안다면 모든 연령이 읽을 수 있잖아요.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르에 붙어 있는 연령도 독서 시작 연령을 말하는 것이지, 끝 연령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Q. 일본군‘위안부’ 하면 국가적으로 얽힌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길 바라시는지요. 국제사회에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감정싸움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많은데, 이건 명백히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행한 범죄에 관한 이야기예요. 처벌받지 않은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국제사회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을 항상 기억하면 좋겠어요. Q. 현재 진행 또는 계획 중인 작업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려요.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또 하나는 장르물인데, 단편으로 썼던 걸 장편으로 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자료조사를 하며 쓰다 보니 시간이 걸리고 있는데, 이른 시일 내에 소식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Credit 인터뷰어: 강푸름 인터뷰이: 김은진 작가 사진: 오늘의 나 기획/진행: 퍼플레이컴퍼니 일시: 2021년 6월 17일 목요일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403-13 카페 콜린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주 ^ 본문 중 ‘일본군 강제 위안부’라고 표기된 부분은, 일본군‘위안부’를 지창하는 작가 개인의 고유한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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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일본인 ‘위안부’ 다미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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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 씨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1991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 위안소 및 ‘위안부’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네 개의 시민 단체가 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안부 110번’을 운영했다. 필자 또한 ‘종군위안부문제를생각하는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사흘 동안 점심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위안부 110번 조사 카드’는 현재 100여 장 남아 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한 장 한 장 작성한 A4크기의 카드다. 카드에는 정보 제공자의 이름과 주소, 보고 들은 때와 장소, 소속 부대(당시 직업), 위안소의 형태, ‘위안부’의 연령과 민족, 기명(妓名), 모습, 에피소드, 군의 관리(현지에서의 강간 등), 재판(기타), 접수일 등을 적는 칸이 있다. 정보 제공자 대부분은 일본군 장병 출신이었지만, ‘위안부’ 당사자의 정보 또한 두 건이 접수됐다. 한 건은 “한 번 찾아와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미야기현(宮城県)에 사는 송신도(宋神道) 씨의 정보다. 3월 말에 필자는 송 씨를 찾아갔고, 약 1년여 후인 1992년 4월 5일, 송 씨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다른 한 건은 도쿄에 거주하는 당사자 다미(가명) 씨가 직접 보내온 정보다. 필자는 우연히 다미 씨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언론에는 한국 사람 얘기만 나오던데, 국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실까 해서요.” 다미 씨는 제보 이유를 먼저 밝혔다. 그의 조사 카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다른) ‘위안부’보다 과거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후 필자는 다미 씨가 운영하는 가게로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통화할 때의 느낌과는 달리, 민첩하게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발랄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마주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몸이라도 고달프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겠지만… 옛 기억이 유령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든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점포 세 곳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다미 씨를 위협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 그리고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 부모님은 다미 씨가 여섯 살, 남동생이 네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투기꾼이라고 해야 할까, 일확천금을 꿈꾸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다미 씨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끔씩만 집에 왔다. 할머니는 곧 돌아가셨고, 다미 씨와 동생은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돈을 벌면 게이샤의 전차금을 갚아주고 집에 들였다며 떠들어댔고, 경기가 안 좋을 때면 집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어요. 엄마라고 부르라는 사람이 두세 명 있었는데 다 싫었어요. 분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돈도 보내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월사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월사금 얘길 꺼내면 허리가 굽은 증조할머니는 사촌집에 돈을 빌리러 가셨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했고, 아이도 두세 명 더 낳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증조할머니는 이따금 나와 동생 편에 쌀을 들려 보내주곤 했다. 가난한 나날이었지만 별 탈 없이 지냈다. “할머니와 살았던 5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저는 손주가 아니에요. 증손주죠.” 다미 씨는 소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농가에 애보개로 들어갔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어디로 보낸 거야!” 라며 증조할머니를 두들겨 패고, 농가로부터 받은 전차금을 쌀로 돌려주고 다미 씨를 데려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증조할머니에게 다미 씨와 동생을 떠맡긴 자기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를 쳤다.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애보개 따위로 보내? 오기로라도 내가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보내겠어!” 다미 씨는 오차노미즈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오차노미즈는 전후에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 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말한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다미 씨는 또래 아이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밖에서 애를 보고 있을 때 소풍 가는 동급생의 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다미 씨는 아기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몸을 숨겼다.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일 년 늦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모리(大森)에 있는 게이샤 집에 연계(年季) 양녀로 맡겨졌다. 아이를 고용주의 호적에 올렸다가 계약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호적으로 되돌리는 고용 형태였다.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는 다미 씨를 귀여워했다.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의 한 종류)을 배우기도 하고, 게이샤가 오비(帯, 기모노의 허리 부분을 감싸는 띠)를 매는 것을 돕거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 있을 때는 행복했어요. 몸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예를 파는 사람도 있었어요. 유녀(女郎,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와는 달라요.” 유곽에서도, 샤미센, 고우타(小唄, 에도시대 속요), 춤 같은 기예를 갖춘 게이샤가 접객을 하는 화류계에서도, 처음 손님을 받는 것을 ‘미즈아게(水揚げ)’라 불렀다. “열네 살 때 미즈아게를 했어요. 열네 살이라구요.” 바로 그 무렵, 아버지가 제재업을 시작한다면서 후나바시(船橋)의 업자와 함께 나타났다. 다미 씨는 열네 살이었다. 업자는 아버지와 함께 제재업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후나바시에 있는 다이키치로(大吉楼)라는 유곽 주인의 조카였다. 아버지는 이미 다미 씨를 다이키치로의 몸종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전차금뿐만 아니라 거액의 사업자금도 빌렸다. “게이샤 집에서는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빚차금의 저당으로 잡혔어요. (게이샤 집보다) 유녀(女郎)가 훨씬 더 돈이 되잖아요.” 다이키치로는 격식 있는 가게였다. 다른 가게에서는 긴 속옷 차림으로 가게 앞에서 호객행위를 시켰지만, 다이키치로에서는 가부키(歌舞伎) 등에서 연기하는 요시와라(吉原)[1]의 오이란(花魁, 유곽에서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은 이를 일컫는 말)처럼 머리를 커다랗게 묶고, 오비를 앞에서 매고 겉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몸종끼리 싸움이 붙어서 다미 씨가 괴롭힘을 당하자 여주인이, “오이란이 될 아이와 싸우면 못 써” 라고 나무랐다. 오이란이 되기 전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차금이 적은 몸종도 있었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 다이키치로로 옮겨간 후,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한 상태였다. “여름에 찾아갔을 때 엄마가 저더러 ‘누구?’ 하는 거예요.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비참했어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싶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쯤 되면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지나 봐요.”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는 다미 씨에게 말했다. “술 파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돼.” “술 파는 일을 하지 말라니. 이미 유곽에 들어갔다고는 말을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곳에 딸을 팔고도 죄책감이 없었을까요? 자기가 놀러 다니는 곳이니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좋은 단골손님을 만나면 그만이라는 듯이.” 열여섯 살, 위안소로 보내졌다 1944년 가을, 다이키치로는 군의 요청으로 지바(千葉)현 모바라(茂原)에 위안소를 개설했다. 모바라에 해군 항공기지가 완공된 것은 1943년이다. 통상 해군의 항공기지는 해당 기지를 전용하는 항공대가 있지만, 모바라항공대가 신설되지 않아 기존 항공대가 기지를 사용하고, 제로센전투기와 함재폭격기 약 80기 그리고 4,000여 명의 장병이 배치되었다. 기지 근처에 일곱 채의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다이키치로 쪽으로 네 채, 건너편에 세 채. 도쿄의 스사키(洲崎)유곽에서 가게를 접고 온 업자들이 많았다. 다이키치로는 모바라 위안소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열여섯 살이 된 다미 씨는 모바라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다른 위안소에도 또래의 소녀들이 각각 예닐곱 명씩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제 첫 경험이 위안소의 주인이었어요. 강간당한 거죠. 다들 그랬던 것 같아요.” 모바라에 오기 전에 성경험이 없었던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 주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다른 소녀들도 그랬던 것 같다. 다이키치로의 주인은 후나바시에 남았고, 주인의 조카가 모바라의 다이키치로를 관리했다. 위안소 이용자는 물론 일반 장병이 많았다. 특공병도 때때로 위안소에 왔다. 특공병에게 출격 명령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다. “죽기 전에 놀러 왔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죠. 제 또래였어요. 내일 출격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위안소의 소녀들은 출격 명령을 받은 특공병에게 깨끗한 무명천에 손가락을 베어 일장기를 그려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선물했다. “○○씨, 즐거웠어요”라는 편지를 놓고 가는 특공병, 모바라를 떠나는 날짜를 알려주는 특공병도 있었다. 그 시각에 밖에 나가 보니, 전투기에서 흰 머플러를 흔들며 위안소 상공을 여러 번 선회하고 사라졌다. 기쿠치(菊池) 하사관은 위안소의 소녀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술에 취해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고, 아무 방이나 함부로 문을 열어 민간인을 발견하면 내쫓곤 했다. “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음을 예감하고 발악한 거구나 생각했어요.” 어느 날, 위안소에서 다미 씨를 몰래 데리고 나와 자신의 숙소인 민가에 데려간 특공병이 있었다. 짚신 두 켤레를 방 앞에 가지런히 놓아 방에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살며시 신발을 들고 창문으로 나왔다. 기찻길을 따라 손을 잡고 달려 특공병의 숙소인 민가로 향했다. “평범한 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숙소로 쓰는 민가의 아주머니는, 땋은 머리의 다미씨를 보고, “오야마(유녀의 총칭)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여섯 채에서는 그런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이키치로에서는 다미 씨의 행동을 주인의 조카가 눈치 채고도 매상이 제일 높아서 눈감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가 다른 여섯 채에 비해 관리가 엄하지 않다고 느꼈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같은 처지인 건너편 위안소의 소녀와 친해져 그쪽에 놀러갔을 때 깜짝 놀랐다. 다이키치로는 욕실과 별도로 손님을 상대한 뒤에 씻는 곳이 있었는데, 건너편 위안소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욕실의 남은 물로 씻는다는 말을 듣고 불결해서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이키치로에서는 자신의 전차금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면 장부를 보여주었다. 싫은 손님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었다. 그러나 좋은 손님만 가려 받아서는 빚이 줄지 않는다. 전황이 나빠지면서 전사(戰死) 소식이 위안소에도 전해졌다. 위안소에서는 날마다 늘어나는 영정에 소녀들이 향을 피웠다. “많이 죽었어요. 임시로 연인이 되었죠… 빼곡히 늘어선 사진에 향이라도 피우려고.” 모바라 상공에 연합군 전투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다 보였어요. 그루먼(연합군 전투기)이 사람을 쫓아왔어요.” 위안소 요금이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일곱 채의 위안소에서는 높은 요금을 받을 수 있는 민간인도 몰래 들이고 있었다. 다미 씨의 손님이었던 민간인이 “이 전쟁은 질 거야. 푸른 눈의 군인이 이곳에도 많이 몰려올 거야”라고 예언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그 남자는 다미 씨의 전차금을 지불하고 다미 씨를 집으로 데려갔다.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필사적으로 일했던 다미 씨의 전차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별거하던 아내가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2]이 끝난 뒤 군의 임무에서 벗어났는데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안소에서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계속 머무는 손님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다미 씨는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패전 이후의 생활 다미 씨는 패전 직후, 라면가게와 이발소에서 잠깐 일했으나, 다시 고탄다(五反田)의 화류계로 들어갔다. “유녀는 두 번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게이샤는 화류계로 돌아간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게이샤가 적었다.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손님의 상당수는 전장에 파병되었고, 사치금지령도 발령되었으며, 전시에 요정과 게이샤 집도 개점 휴업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게이샤를 키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다미 씨는 인기가 많았다. 화류계에서는 요정에서 예기를 데려갈 때 조합의 권번을 통해 연락을 하는데, 기다리다 못한 요정에서는 지배인이 직접 다미 씨를 데리러 왔다. 게이샤들은 대부분 게이샤 집에서 살았다. 신참 게이샤는 맨 처음에 ‘오히로메(お披露目)’라는 첫 선을 보인다. 이때 의상비 등으로 목돈이 필요하다. 다미 씨는 대다수의 게이샤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벌이를 게이샤와 게이샤 집이 반씩 나누는 것을 조건으로 게이샤 집에 들어갔다. 요정이 중개하는 투숙객의 주문에 응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파는 물건, 사는 물건이라는 태도가 있었죠. 그럴 때는 밤새 방을 나와 복도에 서 있었어요. 빨리 잠들어 줬으면 하면서요.” 다미 씨의 동생이 늑막염을 앓은 것은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값비싼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맞았다.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동생이 “오늘은 아직 주사를 안 맞았어”라고 했다. 그 날의 주사 값을 내기 전이었다. 다미 씨는 “주사 값이 하루 늦었다고 주사를 놔주지 않는다는 말인가요?”라고 의사에게 거친 어조로 물었다. 의료보호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날 간호사가 알려 주어 처음 알게 되었다. 다미 씨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동생은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다미 씨는 규슈(九州)에서 부모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집의 아들과 사귀게 되어 도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투병중인 동생을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규슈로 향했다. 필자에게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미 씨는 예복 차림의 수많은 참석자들을 보며 “죄다 저쪽 친척들뿐”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한동안 시댁에서 살았는데 ‘며느리’로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쿄로 돌아왔다. “돈 때문에 지옥을 경험해서 아끼고 또 아껴요. 저 보고 구두쇠 클럽 회장이래요.”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은 쓰는 게 아니야. 저축한 돈에서 나온 이자를 써야지”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악착같이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슬퍼요.” 오랜 세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운영해 온 다미 씨는 그동안 많은 여성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객들도 있었다. 전쟁 후 게이샤로 있을 때, 우연히 모바라의 위안소에 함께 있던 친구를 만나, 줄곧 친하게 지내왔다. 다미 씨가 게이샤였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다. “모바라에서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그녀만 알아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어요.” 다미 씨는 위안소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아, 싫어 싫어. 몸서리 나”라며 이야기를 피했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상해지는 거야” “잊자, 잊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줘.” 친구는 자신이 번 돈이 “부모 형제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만족한다”고 말한다. 게이샤는 자기도 몸을 파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몸을 파는 일을 경멸했다. 화류계나 위안소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여성들뿐만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장병들, 유곽에서 놀던 남성들조차 성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면 죽고 싶잖아요. 매일 강간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도록 힘들었어요, 하루하루가. 어린애가 힘든 일을, 그런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요.” 다미 씨가 화류계에서 미즈아게를 하는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그도 화류계의 풍습에 따랐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모바라의 위안소에서 약 8개월을 지냈을 때 다미 씨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각주 ^ 편집자주) 일본 에도 시대 때 조성된 거대 유곽촌을 일컫는 말. 교토의 시마바라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지역으로 ‘유곽촌’의 대명사 혹은 번화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 편집자주)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천황의 종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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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에세이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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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생 박필근. 그에게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텃밭을 가꾸고 화투를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는 순간에도 그의 주변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2021 기림의 날 특집]을 준비하며 박필근의 다양한 일상 풍경을 모아보았다. 경북 포항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와 연이 깊은 포항여성회로부터 사진을 제공받아 그 삶을 들여다봤다. 삶의 고단함을 버텨낸 온화하고도 강인한 얼굴과 단단한 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 박필근. 모쪼록 그의 건강한 웃음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남은 생에 따사로운 햇볕과 선선한 바람이 늘 함께 하기를. [2021 기림의 날 특집] 박필근을 만나다 1. [논평] 박필근을 기억하다 2. [포토스토리] 사진으로 만나는 박필근 3. [에세이] 소중한 우리 할머니, 박필근 - ‘시간과 기억을 잇다’ 4. 우리 모두가 ‘박필근’이다-창작판소리 ‘박필근뎐’과 솔직히 말해서 판소리 ‘나비가 그랬어’ 창작노트 포항여성회에서 할머니 생신잔치를 열어드렸다. 포항여성회 활동가들과 동네 주민들 10여 명이 할머니 댁에 모였다. 할머니는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계신다. 포항여성회 송애경 전 회장은 ‘모처럼 장구가락에 신명 났던 할머니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날’로 기억하고 있다. 2015년 포항 평화의 소녀상 설치와 함께 제막식이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포항평화나비 청소년 지킴이단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할머니. 소녀상의 손을 쥐고 있는 할머니의 작은 손에 눈길이 간다. 할머니에게 유모차는 필수다. 유모차를 끌고 마실도 다니고, 경로당에서 친구를 만나 이야기도 나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의 친구들도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시거나 요양원으로 가셔서 “만날 사람이 없다”며 많이 아쉬워하신다. 할머니 예전 사셨던 흙집 평상 위로 요강도 보이고, 볕에 곱게 말린 대추도 널려있다. 이렇게 부엌 문 앞엔 할머니의 알뜰함이 곳곳에 묻어 있다. 할머니는 60년 된 흙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가난하게 사셨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이었지만 할머니에겐 더없이 고마운 곳이었다. 2019년 할머니에게 새집이 생긴 날, 할머니 댁을 찾은 손님들이 흙집에 모여있다. 아쉽게 이 집은 2021년에 헐렸고 그 자리는 할머니의 텃밭이 되어 토마토와 고구마가 잘 자라고 있다. 포항평화나비 청소년지킴이단과 함께 소박한 생신잔치를 한 날, 포항평화나비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을 그윽하게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따뜻하다. 찾아오는 이가 없어도 늘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할머니.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아 타지에 있는 아들의 걱정을 사기도 하신다. 오늘도 할머니는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여름 볕에 잘 자란 옥수수가 가지런히 널려있는 모습이 정겹다. 할머니는 심심할 때, 밤에 잠이 안 올 때 혼자 화투를 치신다. 간혹 손님들이 와서 화투패를 나누어 칠 때면 더없이 좋아하신다. 사진 속 오늘은 새 신발도 생기고, 화투를 같이 쳐줄 이도 있는 날이니 할머니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할머니 얼굴에 언제나 이만큼의 밝음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마당 한 켠, 아들이 만들어준 비닐하우스에는 쑥갓과 열무, 상추가 한가득이다. 여름 내내 도랑물 주고 정성껏 키운 상추는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녹아내릴 정도로 연하디 연하다. 이 귀한 것을 먼 길 온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시는 할머니. “더 가져가소, 가가 농갈라 묵으세이~”(더 가져가세요. 가서 나눠들 드세요.) 결국 무성했던 상추밭은 초토화가 되지만 더 줄 것이 없는지를 찾는 할머니의 손은 바쁘기만 하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지런한 손 덕으로 먹고살았다는 박필근 할머니. “할매요! 할매 손이 보통 손이 아이시더~~ 할매 손 한번만 찍어 보시더!” “아이고 손은 말라꼬~” 하시면서 보기 좋게 손을 펼쳐 놓으셨다. 할머니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손,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손. 할머니의 이 위대한 손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할머니 댁을 다녀오는 길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배웅이 함께 한다. 떠나는 이들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잘 가세이~ 또 오세이~”라고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신다. 할머니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늘 뭉클하다. 사진제공: 포항여성회 편집: <결>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