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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2020년 에세이 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하〉

    2011년,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앞선 2008년에 윤정옥이 일본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오키나와 현지에 '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46곳 이상의 '위안소'가 존재한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를 목격하고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전해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추모비로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들 오키나와에는 이시가키섬, 도카시키섬, 요미탄촌, 미야코섬에 각각 민간에서 세운 '위안부' 추모비가 있다. 오키나와에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 그 증언을 들은 활동가,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추모비를 건립했다. 오키나와전 중에 이시가키섬의 많은 주민들이 말라리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이시가키섬의 향토사 연구자 오타 시즈오는 이시가키섬의 오키나와전 실태를 수 년간 조사하며 주민들의 증언을 그림과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던 중 그는 기록만으로는 추모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하라라는 지역에서 '바바하루'라는 가명으로 불린 '위안부'의 죽음이 그랬다. 전후 일본군은 이 섬을 찾아와 전우들의 유골을 수습해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바바하루로 불렸던 이는 인적이 드문 후미진 밭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오타 시즈오는 조사를 통해 바바하루가 죽었을 장소를 특정해 그 곳에 나무로 된 추모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1998년에 '유혼의 비(留魂之碑)'라 명명된 이 추모비 앞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이 때마다 민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들어와 증언을 요구하는 불청객들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현재 위령제는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다. 배봉기가 동원되어 '위안부'로 생활하기도 했던 도카시키 섬에는 1997년 한국의 영화감독 박수남이 주도하여 세운 '아리랑 비'가 있다. 박수남은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인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를 제작했다. 윤정옥의 취재기와 박수남의 영화 등을 통해 배봉기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기자들과 연구자들, 조사자들이 오키나와의 민가에 방문해 함부로 사진을 찍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집단자결'[1]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한 이 섬은 방문객들에게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주민들은 일상이 침범당하는 상황에 예민해졌고, 사생활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단기간 방문해 모든 것을 찍고 알아가려는 태도는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기 쉽다. 따라서 기자, 연구자, 조사자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내밀한 영역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경계심을 외부인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전시폭력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영역을 보호하려는 이중의 노력을 해왔다. 주민들의 경계의 눈초리는 배봉기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편 침묵을 강요당한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인‧군속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은 해방 후 오키나와를 방문해 추모비를 직접 세웠다. 오키나와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결성한 '태평양동지회'는 1986년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오키나와 이야기』(2016년, 역사비평사)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 교수와의 피해자 증언 모임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1999년, 경상북도 영양군에 '태평양 전쟁・오키나와전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이하 '한의 비)'가 세워졌다. 2006년에는 같은 추모비가 오키나와 요미탄에 세워졌다. 요미탄은 미군의 상륙 거점이었으며 오키나와전 중에 '집단자결'의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한의 비' 디자인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2]가 맡았다. 요미탄의 '한의 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 별도의 제작자없이 주민들의 기억 만으로 추모비가 세워진 사례도 있다. 2008년 미야코섬에 세워진 '아리랑 비'와 '여성들에게'(한국어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이름의 추모비이다. 우연히도 필자의 조사가 이 추모비들의 건립에 작은 계기를 만들었다. 끝으로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하는 미야코섬 사람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던 당시에 상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곳이 미야코섬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야코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고, 이에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은 지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 오키나와전 연구자로서 오키나와 나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떨어진 미야코섬에 처음 방문했다. 이 곳은 오키나와전 당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주둔하여 섬 전체를 일본 항공시설로 만든 '항공기지의 섬'이기도 했다. 필자는 항공기지 주변 마을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가 있던 노바루 부락의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 옆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농부를 만났다. "그 돌이 무엇인가요?" 그저 지나가듯 물었을 뿐이다. 슬리퍼에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농부는 바위 옆에서 자라나고 있던 작은 꽃들에게 물을 주며 대답했다. "이 곳은 조선인 여성들이 빨래하러 가다 잠깐 쉬던 곳이라오." 그 농부의 이름은 요나하 히로토시였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며 질문한 내게, 자신이 겪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야코섬에서 가장 큰 '위안소'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소년시절 섬에서 나는 고추를 따다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몰래 가져다주곤 했다는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기지도, '위안소'도, 아무것도 없는 넓은 허허벌판에 커다란 현무암을 놓아 그녀들을 추모하고 있노라 했다. 예전에는 현무암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성들이 잠깐씩 쉬다가 '위안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나하 히로토시는 이 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필자는 그가 허허벌판에 노인 혼자서는 운반하기 힘들었을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홀로 '위안부'들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했을까? 필자는 이 조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나하에서 생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키나와 평화투어를 하고 있던 윤정옥을 만났고 요나하 히로토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윤정옥이 생존하는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를 가장 처음 조사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윤정옥은 오키나와 방문 초기에 도카시키섬에서 유령이 되어 떠돈다는 '위안부', 하루에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워했다. 하루에가 떠올라서였을까? 윤정옥 역시 미야코섬에 추모비가 건립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한편, 필자의 미야코섬 현지 조사는 의도치 않게 지역 내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필자의 조사 현장을 본 미야코 시의원 한 명이 시의회에서 '종군위안부'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종군위안부'는 피해자도 꺼려하는 용어라며 반대했다. 가열되는 논쟁 속에서 사회를 보던 당시 시장이 "우리집 옆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중립을 지켜야 되는 시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종군위안부' 지도 제작 논의 사실 자체가 시의회 회의록에서 삭제됐다. 이 소식을 들은 미야코섬 여성운동가들은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조사자인 필자를 초청해 강의를 열었다. 초청 강의에는 그동안 필자에게 증언을 해 준 많은 주민이 모였다. 필자의 간단한 조사 내용 발표가 끝난 뒤 여성운동가들이 미야코섬 시의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손을 들고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부른 뒤 울먹이듯 말했다.  "이 노래는 그때 그 여성들이 부르던 거에요. 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하죠? " 아리랑에 대한 응답처럼 '위안부'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사쿠다 겐토쿠(1927년생) 씨는 필자가 미야코섬을 방문할 때 마다 옛 '위안소' 터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했다.[3] 사와다 도요조(1939년생)씨는 본인을 군국주의 소년이었다고 소개하곤 했는데, 우물에 빨래하러 가는 여성들에게 돌을 던진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4] 그밖에도 다 떨어진 여성들의 옷을 꿰매어 준 사연, 몰래 여성들에게 차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눠준 사연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후 윤정옥, 나카하라 미치코, 다카자토 스즈요를 대표로 하는 '오키나와, 한국, 일본, 미야코섬 '위안부' 문제 공동조사단'이 꾸려졌고, 멤버가 확대된 만큼 증언 수집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공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130여 곳의 '위안소' 가운데 17곳이 미야코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미야코섬에는 물이 귀하여 조선인 '위안부'와 현지 주민이 함께 우물을 사용했고, 우물을 매개로 주민, 특히 여성 주민들과 '위안부' 사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초기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마치 아이돌인양 일본군이 주최하는 행사에 불러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공동조사단은 위의 증언들을 모아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최초의 증언집을 편찬했다.[5] 미야코섬 공동조사단의 활동 소식은 오키나와 본섬에까지 알려져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요나하 히로토시를 만나고 2년이 지난 2008년, 허허벌판에 놓인 현무암은 '아리랑비'가 되었다. 요나하가 가져다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기억의 돌인 아리랑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바람이 새겨졌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이 근처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츠가 우물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비참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 - 추모비, 아리랑비 요나하 히로토시  아리랑비 뒤에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세운 세 개의 추모비가 아리랑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이 비석들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령지 및 식민지 피해자들이 사용한 11개 지역의 언어[6]와 베트남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비석에 베트남어의 비문을 추가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한 가해성 역시 함께 기억해야 된다는 윤정옥의 바람이기도 했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력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 추모비, 여성들에게 미야코섬에서는 매년 9월 주민들이 주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행사이다.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가 부른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증언을 들은 한국, 일본, 오키나와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어우러져 아리랑을 부른다. 12개의 언어로 새겨진 비문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염원으로 미야코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센삐'와 '압파라기' 여성 사이에서  필자는 오키나와의 '위안소' 조사를 12년간 진행하며 많은 증언을 들었고 많은 '위안소'를 보았다. 때로는 주민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기억에 의지해 '위안소' 위치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 '위안소' 지도로, 때로는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과 장소에서 과거 '위안소'로 쓰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 '위안부'에 관한 기억들과 만났다. 군인들은 '위안부'를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로, 일본군이 '위안부'를 부를 때 '위안부'의 출신지역에 삐를 붙여 '~삐'라고 부르기도 했다 -편집자 주)라고 불렀다. 그 어감 그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이 '위안부'를 차별적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 하에서 '위안부'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버려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오키나와 주민 그 누구도 이 여성들이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야코섬 사람들은 '위안부'들을 '압파라기'(아름다운 여성)라 부르기도 했다. 군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피부가 하얀 조선의 여성들은, 태양볕에 검게 그을린 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이 여성들에게는 우물까지 빨래하러 가는 길에 잠시동안 자유가 허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코섬 주민 누구도 이 여성들이 자유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3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고립된 섬은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으며, 이 섬에서의 짧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언을 통해 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과 진중일지 등의 일본군 군사자료를 분석해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2015년, 인팍토 출판회)를 펴낸 바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집단자결' 피해자 모두 전시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일본군을 따르거나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다. '종군위안부'나 '집단자결'이라는 말은 피해자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한 불완전한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구조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여 대항언어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일본군'위안부' 연구는 그 자체가 운동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위안부 당사자가 아닌 '위안부'를 목격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동과 연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김학순의 증언과 소송은 한국은 물론 일본의 여성과 시민운동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일본의 법적 배상과 공적 책임을 묻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운동이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다. 그 정점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운동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목격자 증언의 공간화'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배봉기를 첫 '위안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배봉기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기억으로 남겨 놓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증언에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투박한 지도 안의 점들로, 그림으로, 때로는 돌과 나무로, 자신의 집, 마당, 마을에서 자행된 가해의 역사로 기록되었고, 오키나와 주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역사의 가해성 안에 위치짓는 역할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긴 세월 배봉기를 기억하고, 조선인 여성들을 기록하고 추모해 온 오키나와 주민들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는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이 아름다운 타자들은 굳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머문 공간을 기억하며, 혹시 섬 내부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민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억의 공간화는 위안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함께 '본 자'로서 자신을 위치시켜야만 드러나는, 주변화된 기억을 가시화하는 #with you 방식의 운동인 것이다. 이런 듣기 방식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듣기 방식으로 증언대 위의 모습으로 피해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거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오랜 시간 운동 및 연구를 해 왔던 이들을 손쉽게 재단하고 비판하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타자입니까?" 라고.   각주 ^ 일본군 사령부는 패전이 임박하자 집단자결이라는 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요된 집단자결로 목숨을 잃었다. 집단자결은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전시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는 용어이므로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 제작자인 긴조 미노루는 <표현의 부자유전>을 둘러싼 일본 내의 ‘위안부’ 논의 탄압에 항의하며 2019년에 '아리랑의 시 – 군위안부 상'이라는 목조 추모상을 완성하기도 했다. ^ 2007년 5월 11일, 지모리(地盛) 위안소 옛터, 2008년 1월 12일 지모리(地盛)의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2008년 1월 12일, 미야코 하나키리(花切) 위안소 옛터, 필자와의 인터뷰 ^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12개의 언어로 새긴 여성들에게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12の言葉が刻む「女たちへ」)』홍윤신 편, 난요문고, 2009년 ^ 한반도, 일본, 중국‧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괌, 티모르, 미얀마, 태국

    홍윤신

  •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1부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추천도서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1부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추천도서

      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한울, 1993) 시리즈는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권까지 포함하여 총 7권이 발간되었다. 이외에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카와 마치코 저, 김정성 옮김, 아름다운 사람들, 2005)와 같이 한 사람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출간된 증언집도 있지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중에서도 제1권이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이 중에서 2019년 기준, 증언집에 실라자 않았더라도 공개 증언이 확인되는 피해자는 총 183명이다[1]. 183명의 증언 중에 1993년 2월 초판이 발간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19명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김학순을 필두로 김순덕, 황금주, 이용수, 문옥주, 강덕경 등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이 이름들은 이제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책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더 많았고, 책에는 이름이 가명으로 실려있던 피해자가 이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앞장선 경우도 있다. 꽤 오래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증언 내용에 집중하느라 본문과 함께 실린 피해자들의 옆모습 사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삼스레 옆모습 사진이 주는 쓸쓸함이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집중된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진상규명이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체험담은 …(중략)…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문서자료의 발굴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책 해설내용처럼, 당시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이들의 생애사로 접근하기 보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집>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집의 단점을 보완하여 피해자 각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 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여성과인권, 2004)이다. 단점이 있음에도 굳이, 지금 증언집 1권을 추천하는 이유는 조국이 해방된 지 50여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김학순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서 90년대의 우리 사회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지, 또 피해자들이 절박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보았으면 해서이다. 각자 원점에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30여 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 일본군 군대위안부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이규태 옮김, 도서출판 소화, 1998.  추천 편집위원 : 윤명숙(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연구팀장)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우리 사회에 수많은 긍정적 파장을 일으켰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김학순이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에 오기 직전 NHK와 진행한 인터뷰를 듣고 감동하여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시미 요시아키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징모에 직접 관여한 사실을 보여주는 공문서를 발굴한 연구자이다. 요시미 요시아키가 발굴한 자료 6점은 아사히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보도 다음 날인 1992년 1월 12일, 일본 정부(총리 미야자와 키이치(宮澤喜一))는 군이 "관여"했음을 공식 인정하는 가토담화를 발표했다.   1995년 4월에 초판이 발간된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 앞서 1992년에 『종군위안부 자료집(従軍慰安婦資料集)』이 먼저 발간되었다. 자료집에는 해제에 갈음하여 「종군위안부와 일본국가」라는 글이 들어 있다. 내용은 총 10장 구성으로 1장 군위안소의 개설, 2장 종군'위안부'의 징집과 도항, 3장 육군 중앙의 군기 유지‧성병 대책, 4장 중국의 '위안부'‧위안소, 5장 필리핀의 '위안부'‧위안소, 6장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위안부'‧위안소, 7장 인도네시아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8장 버마(현 미얀마)의 '위안부'‧위안소, 9장 남서태평양 지역의 '위안부'‧위안소, 10장 일본의 '위안부'‧위안소로 되어 있다. 글은 자료의 구성에 맞추어 이에 대한 해설을 겸하고 있다. 다만 『종군위안부 자료집』의 글이 일반 대중이 읽기에 쉽지 않은 전문서라면,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대중서라고 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 자료집』과 『종군위안부』의 집필 사이에는 3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에는 자료집에서 다루지 못한 그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1995년 8월에 출간된 『공동연구 일본군위안부(共同研究 日本軍慰安婦)』(오오쓰키 서점(大月書店))는 요시미를 비롯한 7명의 저자가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 '위안부 부회'에서 1년 정도 세미나를 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이때의 연구 결과가 『종군위안부』에 반영되어 있다.  『종군위안부』는 한국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이규태 번역)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출판되었다. 일본군 위안소‧'위안부' 문제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지는 입문 단계에서 읽으면 좋은 기초 서적이다.   3. 일본군 성노예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 정진성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추천 편집위원 : 김소라(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 착취된 지 50여 년이나 흐른 뒤인 1980년대 후반이었다. 여성운동의 성장으로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귀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생겨난 가운데 많은 피해자, 활동가,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말해왔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 활동가들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이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연구자들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발굴‧해석하며 일본 정부에 대응하고자 노력했기에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운동의 역사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4년 출간 후 12년만인 2016년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군 성노예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과 그 해결을 위한 운동』은 이 같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은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동원한 과정과 사회 구조적 배경, 피해자 증언, '위안부'를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의 의미 등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내외 시민사회가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소개한다. 특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UN 인권소위원회 위원과 UN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문제의 연구와 해결에 참여해온 저자의 경험 속에서 1980년대부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르는 '위안부' 운동이 폭넓게 다루어진다. 한국에서 시작되어 북한, 재외 동포, 일본, 아시아 피해국의 시민과 사회단체가 함께하며 형성된 국제연대, 이 과정에서 여성 인권과 평화구축의 문제로 확장된 의제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운동이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것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갖는 의미를 질문하고,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4. 성노예와 병사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2003. 추천 편집위원 : 김선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장)  『성노예와 병사만들기』는 중일전쟁기부터 태평양전쟁 기간까지의 위안소 제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여성학자인 저자 안연선은 이 책을 통해 위안소 제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만난 13명의 '위안부'피해자와 일반 사병, 장교, 군의관 등 옛 일본군 출신 생존자들의 구술을 통해 국가 차원, 젠더와 섹슈얼리티 차원에서 나타난 식민주의 권력의 맥락에서 '위안부' 제도를 명료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특정한 맥락 아래에서 가해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해 여성인 '위안부'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생산하였는지, 식민지 국가권력과 전쟁 폭력에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위안부' 제도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재)생산하는데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사유한다면 '위안부' 문제와 위안소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각주 ^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2019년 6월 전시

    웹진 <결> 편집팀

  •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2부 - 웹진 〈결〉 편집위원 추천도서
    2020년 에세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 2부 - 웹진 〈결〉 편집위원 추천도서

      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윤명숙 지음, 최정원 옮김, 이학사, 2015. 추천 편집위원 : 류광옥(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2015년 출간된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위안소 제도를 입안한 일본군의 매뉴얼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위안소를 운영하고 감독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입안하게 된 이유,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거나 운영에 관여한 실태, 그리고 위안소로 '위안부'를 이송하는데 관여한 사항 등을 집요하게 실증해낸다. 이 책의 진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 2부에서는 일본군이 입안하고 운영한 위안소에 동원된 조선인 군'위안부'에 관해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조선인 군'위안부'를 만든 식민지 시기 조선의 경제‧사회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은 전쟁 책임이다. 그러나 이 위안소에 조선인 군'위안부'가 징집된 이유는 조선이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 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식민지 책임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구별은 명확하다. 그러나 식민지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기 조선의 상황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 선명하게 그리고 무겁게 실감하게 되었다. 조선인'위안부' 희생자를 만든 것은 전쟁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식민지라는 무거운 돌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여사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피해자의 증언이 주는 충격은 대단하다. 피해자의 증언은 우리의 감정을 쉽게 움직인다. 그러나 피해자의 증언이 말에 그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지나칠 정도로 견지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는 증언이 감정으로 휘발되지 않고 피해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증언에 무거운 추를 달아주고 있다.     6. 빨간 기와집 가와타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 추천 편집위원 : 임경화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     이 책은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타 후미코가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을 다년간 취재하고 그녀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다. 그 피해 여성은 바로 1975년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임을 증언한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막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오키나와 전투에 '위안부'로 동원되어 도카시키 섬에서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다. 이 책의 제목인 '빨간 기와집'은 주민들과의 소통이 통제된 섬마을 어귀의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봉기가 머물던 빨간 기와집은 미군의 집중공격에 노출되어 6명의 동료 중 3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2명은 가까스로 탈출한다. 남겨진 봉기와 또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은 전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를 방랑한다. 이 책은 식민지 시대에 충남 신례원에서 머슴의 자식이라는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봉기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에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오키나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 그녀와 함께 오키나와의 섬으로 끌려왔던 여자들이 그 후의 운명을 찾아가는 이야기, 한국행을 거부하는 봉기를 대신해서 한국을 찾은 가와타 후미코가 봉기의 언니 봉선을 만나는 이야기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와타를 통해 각자의 소식을 전해 들은 봉기와 봉선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차라리 (소식을) 안 듣는 게 나았다고 하는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들의 이산과 방랑은 고국이 짊어진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의 무참함을 빈곤 계급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 '위안부'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던 여자들의 숙명이었을 것이라고 가와타는 말한다.     7.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후지메 유키 지음, 김경자, 윤경원 옮김, 삼인, 2004. 추천 편집위원 :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이 책은 근대국가 일본이 민족과 계급을 교직(交織)하여 성과 생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근대국가의 (여)성관리 양상을 비교사 속에 두고 논하고 있어, 공창제나 일본군'위안부' 제도를 일본 사회의 특수성 안에 가두지 않는 현명함도 잃지 않고 있다. 근대 이후 성의 역사를 국가(민족), 젠더, 계급을 교차시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8.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니시노 루미코, 오노자와 아카네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2021.  추천 편집위원 :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매춘부였으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전(前) 일본인'위안부'는 정조 이데올로기의 낙인이 찍힌 채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인'위안부'도 피해자임이 인정되었지만, 그 후 수차례 제출된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에는 피해 보상의 대상에서 일본인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틀에서 아시아의 피해에 관심을 두는 역사 인식의 획기적인 전환의 이면에, 일본인'위안부' 문제는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배제되어 왔다는 문제가 버티고 있다.  애초에 전전(戰前)의 일본 사회에서 창기, 예기, 작부 등은 인신매매로 팔려와 대부분 폐업의 자유도 없이 매춘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었다. 인신매매는 당시의 국제조약이나 일본 형법에서도 금지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내버려 뒀을 뿐 아니라, 전시 '위안부' 모집에 이러한 관습을 이용한 것이다.  공창제에 대의명분을 제공했던 정조 이데올로기에서 전제된 여성차별과 계급차별은 강간 방지를 위해서 '위안소'가 필요했다는 주장과 같은 정당화 구조를 가진다. 거기에 민족차별까지 얽혀 여성들 사이의 분리를 조장한다. 이제 여성들의 피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 계급차별과 민족차별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면서 각각의 차별을 견인하고 강화하는지를 보아야 할 때다. 이는 식민지적 차이를 지우려는 시도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본인'위안부' 모집과정을 공창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당시 '위안부' 징집으로 일본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자기 집이 위안소로 사용된 이들과 '위안부' 모집업자를 인터뷰한 내용, 일본인'위안부'의 전후의 삶, 그리고 일본군 위안소와 전후 점령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 시설의 연속성을 선명하게 밝혀낸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가 무엇인지, 지금-여기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의 관련 속에서 다시금 정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9.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 김귀옥 지음, 선인, 2019. 추천 편집위원 : 여순주(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이 책의 저자인 김귀옥 교수는 지난 2002년 공식 발표한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2019년 단행본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로 펴냈다. 1996년 처음 속초에서 월남인 김씨를 인터뷰하다 한국군 위안대 문제를 알게 된 때로부터 23년 만이다. 저자는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위안부'와 미군'위안부'의 궤적과 함께 연결해서 쓰고 있다. 한국 언론 속의 군'위안부'의 의미를 고찰해서 '위안부'는 외국군을 포함한 군인을 상대하는 여성으로 사용해온 것으로 정리했다(103쪽). 저자의 발표 후 한국군'위안부' 문제의 문서증거인 한국 육군이 펴낸 『후방전사』는 국회도서관에서 이용 불가로 분류되어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학계 반응도 사실은 인정하지만 뭔가 불편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119쪽). 진보학계의 거목인 리영희 교수조차 1988년에 낸 회고록에서 관련 사실을 기록했지만, 저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회고록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저자는 한국군'위안부'를 만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엇갈림의 연속이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주로 인민군 부역자와 포로, 북한 출신들로 보인다. 또 김희오 회고록에 의하면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왔다. 북파공작원 최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에서 여성 4명을 끌고 왔다. 그중 한 명은 미 전투기의 공습으로 죽고, 남은 3명이 '위안부'로 넘겨졌다. 3명 중 한 명인 문 씨는 이아무 하사관에게 겁탈당한 후 아이를 낳고 살았다고 한다. 양도에서도 성진 부근의 여성 2명을 납치해와서 성노리개로 만들었다(123~124쪽). 저자는 문 씨와 전화통화를 몇 번 하면서 '위안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나 문씨는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언짢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저자는 2004년경 소문으로 한국전쟁 때부터 '위안부'였고 50~60년대 기지촌 생활도 했던 할머니를 만났지만 "고통에 찬 얼굴을 본 순간 어떤 사람에게 신뢰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에 찬 인생담을 듣고 싶다고 말하는 게 너무 염치가 없어서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57쪽)."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 제도는 전시 정부인 육군본부에 의해 기획 및 설치되고 관리·운영되어 초법적으로 존재했다"(145쪽). 군이 직영한 군인 전용 '위안소'였다(144쪽). 한국군 위안소는 군이 직영한 형태였으므로 한국군의 책임은 일본군보다 더 무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 운영에는 많은 군인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제도를 기획하고 만든 장석윤 휼병감, 북파공작원 등 피해 여성들의 동원에 관여한 군인들, 『후방전사』를 작성한 군인, 여기에 실린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를 위해 기초 자료를 만든 군인들은 물론이고 주 2회 성병 검사를 수행한 군의관들도 있었다. 제일 다수를 점하는 것은 통계표에 1952년 한 해에만 20만 4천 회가 넘는 것으로 기록된 피위안자들, 즉 한국 군인들이다. 식민주의, 전쟁,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0.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추천 편집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공식적 기록과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해 기억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재현이라는 비공식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증언의 시대가 열린 지 30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는 '부정의 실증주의'라 할 수 있는 부정론의 국제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산다. 이 현실에 대해 저자는 기억과 증언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그 현실적 함의와 비판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폴란드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임지현은 그동안 유럽의 지성사를 경유하고 한국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을 둘러싼 내적 성찰의 지평을 열어왔다. 자신을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로 정체화하는 그의 관심은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에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분단국가 한국의 민주화운동, 나아가 20세기에 전 세계가 겪었던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로까지 확장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다루는 고통의 폭은 근대 문명이 인간에 가한 폭력이 얼마나 전 지구적으로 얽혀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억의 회색지대를 묻는 아슬아슬하고도 첨예한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기억과 증언을 둘러싼 혼란을 생각하는 데도 매우 시사적이다. 특정 역사적 사건에 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이 책은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와 공범자, 경계와 기억, 양심과 죄책감 등의 중첩되는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는 윤리의 차원을 환기시킨다. * 위의 책들 중 일부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자료센터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개관이 연기됨에 따라 현재는 자료센터를 이용하실 수 없으며, 향후 자료센터를 개관하는대로 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이브814 바로가기

    웹진 <결> 편집팀

  •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020년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20주년에 부쳐   "본 재판정은 이 판결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 제도하에 희생당한 여성들을 기리려고 한다. 본 재판정은 살아남아 산산이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공포와 수치를 이기고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생존자들의 강건함과 위엄을 인지한다.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여성들은 이름 없는 영웅이다." - 2001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 최종판결문 중에서 이 글은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이름 없는 영웅들, 그들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의 식민지 또는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아시아 각국에서 시작된 피해자의 증언과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인권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나도록 가해국인 일본 정부는 해결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2020년 올해는 '피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이라는 슬로건으로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초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불거진 시점에서, 20년 전 아시아 모두의 시민운동이 되었던 2000년 여성법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늘의 별이 된 피해자들, 지금도 여성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피해생존자들, 이들과 연대하며 폭력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전 세계에서 노력하는 지지그룹들의 변함없는 전진을 위해 2000년 여성법정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시간 2000년 12월 2000년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활동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였다. 동시에 세계 각국에서 내전과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국가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이 국제적 문제로 등장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주목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세기의 어두운 과거와 직면하고 새로운 21세기를 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특별한 시간으로 다가온 2000년, 아시아 각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생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2000년 여성법정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우선 전 세계인의 분노를 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피해생존자들의 소망은 정당하고 그 소망에 응답할 의무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고와 르완다에서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 책임의 시효가 국제법적으로 이미 지났다 하더라도 민간법정을 통한 책임자처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립하고자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2000년 여성법정은 민간법정의 형식을 차용한 세계시민을 향한 피해자들의 외침이고 운동이요, 세계언론을 향한 메시지였다.  2000년 여성법정은 비록 법적 강제력이 없는 민간법정이었지만, 인권 법정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첫째, 세계의 어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피해국은 증거를 통해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둘째 그에 따른 가해자들의 형사책임을 묻는 형사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셋째 이를 판단하는 판사단은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법학자와 연구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2000년 여성법정의 내용과 형식 모두 실제 법정에 맞게 만들어가야 했다. 이런 결의를 바탕으로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2000년 여성법정을 준비했다.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 2000년 여성법정은 가해국인 일본, 피해국인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의 피해생존자와 시민단체들, 그리고 미국, 영국, 코스타리카 등 9개국 국제자문위원들이 실행위원회가 되어 주최하고, 피해생존자 64명과 한국 참가자 200여 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간법정이었다. 1998년부터 3년간 준비하면서 공동대표 단체인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의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필리핀 아센트(ASCENT)가 중심이 되어 1998년부터 3년간 법정 개최를 준비하면서 9개 법정참가국의 국제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각국 검사단을 포함해 국제검사단을 구성했다. 여기에 참여한 핵심인력만 40여 명이 넘었다. 국제실행위원회와 검사단에 더해 유고 전범재판과 르완다 전범재판에서 활동해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판사단과 고문단, 전문가 증인단까지 배치된 매머드급 구성이었다. 실무자들은 법정 개최에 앞서 서울과 도쿄, 마닐라, 타이페이, 뉴욕 등을 순회하면서 8차에 걸친 국제실행위원회, 3차에 걸친 국제검사단 회의, 국제법률자문단 회의, 판사단 회의 등을 열었다.  정대협이 사무국을 맡은 한국위원회는 50여 명 규모로 조직되어 2년 동안 11차례의 모임을 열었고, 2000년 여성법정의 크고 작은 안건들을 처리하는 최고결정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정대협의 실무인력은 총괄책임자인 필자와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스태프 3명이 전부였다. 일에 비해 부족한 인력을 감당하기 위해 공동대표와 실행위원, 연구자들로 구성된 한국 검사단은 각자 맡은 일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신적으로 일했던 실행위원들과 전문가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충실히 임무를 다했다. 자원활동가들 역시 큰 힘이 되었는데, 특히 기독교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모인 자원활동가들이 2000년 여성법정의 재정 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 동시통역, 문화제 진행, 영상 및 사진 촬영 등 전문적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6개 지역에서의 문화제와 전국 11개 대학들과의 대학생 모의법정 개최, 전국적으로 200여 명에 달하는 참가단 모집 등으로 인해 1인 10역을 맡아 업무를 진행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족한 재정이나 부족한 인력을 탓하지 않고, 남의 일이라고 미루지 않으며 2000년 여성법정을 완수하기 위해 한마음이 되었다. 죽더라도 2000년 여성법정은 끝내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부담은 매우 컸고, 모두가 일종의 사명감으로 뭉쳐있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2000년 여성법정은 한국과 아시아 시민 모두의 운동이 되었다. 만 3년 동안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도 순탄치도 않았다. 공동대표 단체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문가들을 모으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일반 시민을 결집시키며, 법정을 홍보하고, 법정 개최에 필요한 재정을 만드는 일을 했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활동가들은 그 책임감이 커서 모든 과정을 한 발자국 앞서서 세심하게 살피고, 다른 나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인적이고 물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기구 활동을 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파악해두고, 세계 각지의 전문가들과 선이 닿아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침묵을 깬 이름 없는 영웅, 아시아 피해생존자들의 연대 2000년 12월 7일 도쿄의 겨울은 스산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에 위치한 구단회관 대회의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천여 명의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법정 개최 하루 전날 도착한 한국 대표단 일행 중 ‘위안부’ 피해생존자 21명도 각자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복을 정성스레 갖춰입고 행사장에 입장했다. 남과 북, 중국과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등에서 피해생존자들 6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흥분 반, 긴장 반으로 자리한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무대의 조명이 켜지면서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들의 인사말이 있었다.  뒤를 이어 2000년 여성법정의 로고를 새긴 깃발이 단상에 올라왔다. 태양과 꽃과 촛불과 눈이 그려져 있는 네 가지의 상징물은 2000년 여성법정의 목적을 잘 보여주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온 10년의 시간, 여성 인권을 위해 매진해온 전 세계의 여성을 상징하는 꽃, 2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아시아 각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꺼뜨리지 않은 촛불, 역사의 정의를 밝히고자 또렷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눈. 네 가지 상징이 어우러진 2000년 여성법정 깃발이 퇴장하자 단상의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지고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사진이 하나 둘 등장했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서 흰색 한복을 입은 강혜숙 교수의 살풀이 춤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 50년이 넘도록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사라져간 피해자들이 자신의 영정 사진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사진 사이를 돌며 추는 춤은 돌아가신 분들의 원혼을 불러모으는 치유의 춤사위였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후 현장에 있던 피해생존자들은 제각기 꽃을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 먼저 가신 분들의 사진 앞에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길게 이어졌다. 64여 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 지난 50여 년의 세월만큼이야 길었겠는가? 개막식이 끝나자 4박 5일 동안 남과 북, 중국과 필리핀, 대만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기소가 이어졌고, 35명의 피해생존자들이 증언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은 경우는 영상으로 증언을 대신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법정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중국 기소 당시 피해생존자 량리화는 증언을 하다 당시 고통이 되살아났는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치더니 쓰러졌다. 장내가 술렁거렸고 앰뷸런스가 출동해 생존자를 들것에 싣고 나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2000년 12월 12일 판결은 약식 판결로 대신되었고, 1년 후인 2001년 12월 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최종판결이 이루어졌다. 가브리엘 맥도날드 판사 등 4명의 판사단이 250페이지에 걸친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판사단은 판결에서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하는 강간과 성노예에 관한 죄를 적용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고 강간을 당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면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비롯해 기소된 8인 모두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히로히토 유죄 판결!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피해생존자들은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면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판사단은 최종판결에 참석한 각국 피해생존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판결문을 안겨주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책임자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판사단에 의한 책임자처벌 판결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서린 한을 조금이라도 녹게 하는 시간이었다. 2000년 여성법정에 참석한 피해생존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른 피해자들을 보고 피해자들만의 공감대로 교류하면서 서로 진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참여한 지지그룹들로부터 진심어린 환대를 받으면서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진정한 형제애와 자매애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오늘, 이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16명이 생존해있다. 이분들의 나이는 90대가 넘었다. 법정 이후 20년 동안 피해자 가운데 스스로 인권운동가로 자리매김한 분들이 계실 정도로 피해당사자의 운동이 발전하였다. 평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으로 귀감이 된 고 김복동 할머니와 90이 넘은 연세에도 일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여성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더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는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들은 한 발자국씩 앞을 향해 나가고 있다. 누군가의 지원을 받는 피해자로 남아있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여성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앞장서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 공동기소와 최종판결 2000년 여성법정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국가에 의한 법적 강제력에서 오지 않았다. 국제검사단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원하는 세계시민의 요구에 의해서 법정의 권위가 부여된다고 말했다. 판사단과 국제검사단은 각국 검사단에게 엄격하게 자료와 증거를 요청했다. 이들은 이미 유고전범재판 등에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여성법정이 역사적인 법정이 되기를 기대했다. 한국위원회는 2000년 여성법정의 성격을 인권 법정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아시아에 맞는 법정의 형식을 고민하는 동시에, 역사적인 법정이 될 2000년 여성법정에서 남북 공동검사단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기소할 것을 북에 제안했다. 남과 북이 직접 소통할 창구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일본에서 소통을 맡아서 양쪽을 오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은 정대협이, 북한은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사무국 역할을 했는데, 북한은 국제실행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남과 북의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해국 일본 정부와 일본군을 기소하기 위한 공동기소문을 작성했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인 남과 북은 2000년 여성법정 기소장 낭독의 첫 번째 순서를 담당했다. 피해자 증언도 남북의 균형을 고려해서 북은 박영심 할머니, 남은 김복동 할머니가 나섰다. 남북검사단은 박영심 할머니가 고향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남경과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로 끌려갔던 경로를 추적해나갔다. 1944년 전쟁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은 ‘위안부’ 피해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한국 측 증인으로는 김복동 할머니 등이 나서면서 일본군의 이동 경로와 피해자들의 이동 경로를 맞춰나갔고, 국제법에 의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추궁했다. 남북공동기소장의 내용은 강제연행 과정, 위안소 내에서의 범죄, 해방 후 범죄 등의 순서로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법률 적용에 대한 논고로 마무리되었다. 남북 공동검사단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목을 들어 히로히토 천황과 도죠 히데끼 등 8인을 기소하였다.  남북검사단은 공동기소를 위해 2000년 여성법정 개막 3일 전 도쿄에서 만났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기소 내용을 맞춰보고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는데, 남과 북이 기본적으로 접근 방향이 달라 서로 난감해했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과연 공동기소가 가능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어진 기소 시간 3시간에 맞춰 발표 내용과 역할을 분담했다. 북은 북일수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강조한 반면, 한국은 피해자 증거에 근거해 기소 내용과 형식을 강조하였다. 남북 공동기소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남북이 하나가 된 가장 강력한 연대였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강제동원 문제, 일본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에 관한 한 남북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왔고 상호 방문을 하기도 했다. 2000년 여성법정이 1993년 남측의 여성들이 북을 방문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계승하여 여성 중심의 통일운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남북 공동기소는 민중의 힘으로, 50여 년 동안 지연되었던 정의를 남북이 함께 앞당기는 기회가 되었다. 그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민간차원의 활동도 함께 위축되어 예전과 같은 연대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기억할 사람들, 마쓰이 야요리와 윤정옥 2000년 여성법정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윤정옥 선생과 마쓰이 야요리 선생이 아니었다면 단연코 성사될 수 없었던 법정이었다. 마쓰이 선생은 필자가 1998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 참석차 신혜수 선생과 스위스에 가 있을 때,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그해 4월에 열리는 아시아연대회의에서 2000년 여성법정 개최를 제안하겠다고 했다. 그는 긴 머리에 언제나 어깨에 가죽으로 된 큰 서류 가방을 메고 다녔고, 그 가방에는 움직이는 사무실처럼 온갖 서류가 가득 차 있었다. 마쓰이 선생은 열정이 넘치는 여성운동가이며 저널리스트이며 연구자였다. 그는 아사히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일 때 우연히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위안부’ 문제를 일본 시민사회에 소개했고, 여성폭력문제를 다루는 바우넷 재팬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쓰이 선생의 문제 인식은 언제나 선명했다. 일본인인 자신이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는 이유는 가해국 일본이 제대로 역사를 직면해야만 보편적인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일본인으로서 전쟁범죄에 관해 히로히토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일본 도쿄 한복판,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구단회관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초청하여 천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자신을 내어놓는 파격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 마쓰이 선생이 일본 우익으로부터 받을 테러의 위협은 법정 당시 구단회관을 둘러싼 고성과 차량시위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실제로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마쓰이 선생은 일본 내에서 매국노 1호로 찍혔고 우익들이 직장과 집으로 찾아와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두려움에 용기로 맞선 마쓰이 선생은 안타깝게도 2000년 여성법정을 마무리하고 200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가 암에 걸린 이유가 2000년 여성법정에 쏟아부은 열정이 그의 육체를 태웠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가 이별 여행을 떠나기 전,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자매애를 쌓은 김윤옥 대표가 정대협을 대표하여 도쿄로 찾아가 공로패를 전달했다. 이때 마쓰이 선생은 그 어느 상패보다 정대협에서 받은 공로패가 값지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그가 진정 고마워했던 것은 부끄러운 자신의 조국 일본 정부를 향한 싸움에 끝까지 함께한 정대협의 자매애였다. 나는 지금도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마쓰이 선생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인다.  일본에 마쓰이 선생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윤정옥 선생이 있었다. 윤정옥 선생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린 장본인이었다.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윤정옥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또래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본인도 학교에서 정신대로 자원하라는 강요를 받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했다고 한다. 그 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88년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위안부’ 관련 답사 보고를 하였고 1990년 정대협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윤정옥 선생은 피해자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책임감으로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2000년 여성법정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정옥 선생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당시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2000년 여성법정 이후 베트남전에서 발생한 여성 폭력으로 이어져갔다. 시간과 열정,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불태운 선배들이 없었다면 이 일을 상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참 고맙고 감사하다.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이름 없는 영웅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참여가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금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열정과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1세대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이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여성법정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국내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재능을 기부한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이 운동은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2000년 여성법정은 씨줄과 날줄이 촘촘하게 얽히듯 피해자들과 운동가들, 전문가들과 지지그룹들, 그리고 시민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법정 운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는 문제 해결을 바라는 피해자들의 소망이 정당하며, 다시는 이 같은 피해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세계적인 공감이 있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양미강

  •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2020년 에세이 NHK의 프로그램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2000년 여성법정 20주년 특집] 1부 - 20년을 되돌아보다    1. [논평] 정의를 위해 앞장선 이름 없는 영웅, '위안부' 피해자들   2. [자료해제] 기록물로 보는 2000년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3. [에세이]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으로부터 20년을 되돌아보다 4.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상) 5. [에세이] NHK의 개찬(改竄)사건에 관하여 (하)   ETV2001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2001년 1월에 방송된 NHK 방송 ETV2001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는 21세기를 맞이해 20세기에 일어난 전쟁과 무력 분쟁을 '인도(人道)에 반한 죄'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고 전쟁이 없는 미래를 구축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내용의 4회 시리즈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시리즈의 데스크를 담당했다. 당시 NHK의 자회사인 NHK 엔터프라이즈(이하 NEP)에서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와 시민단체들이 주최하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2000년 여성법정)을 취재하여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2개의 제안이 나왔다. 한편 NHK 유럽 총 지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Vichy) 정부 하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와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포로 학살 실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한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취재하자는 2개의 방송 제안을 보내왔다.  NEP와 NHK 유럽 총 지국으로부터 받은 제안을 결합해 4편짜리 시리즈를 만들 수 있겠다는 나가타 총괄 프로듀서(이하 CP)의 아이디어로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가 기획되었다.  그 중 개찬(改竄, 내용을 달리하기 위해 일부러 고침)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제2회 〈다시 묻는 전시 성폭력〉이다. 이 편은 정치인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NHK 임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내용이 조작되고 말았다. 이에 우리의 취재에 협력했던 2000년 여성법정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 여성 네트워크)이 NHK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재판으로 이어졌다. 1회차와 4회차 방송은 NHK 유럽 총 지국이 취재하고 NHK 본사의 스태프가 제작하였으며 2회차와 3회차는 NEP를 통해 방송 제작 회사 '다큐멘터리 재팬(이하 DJ)'에 제작을 재위탁했다. 따라서 실제로 개찬된 제2회를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것은 DJ였다.   NHK 본사가 작업을 맡게 되다 2000년 12월에 도쿄 구단(九段)회관에서 열린 여성법정에서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했다. 이는 법정이라는 형태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으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방송은 이러한 현장을 DJ가 취재 및 촬영하고, 편집한 VTR 영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면서 게스트들이 여성법정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으로 기획되었다. 여성법정이 열리자 NHK와 일본의 민영 방송들이 뉴스로 법정 소식을 보도하였고, 해외의 미디어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때 일본의 우익 단체가 NHK 뉴스에 "NHK가 왜 저런 편향된 시도를 뉴스로 내보내느냐"면서 항의했다. 그 때문인지 NHK의 요시오카 교양 프로그램 부장은 이 방송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일반적으로 NEP를 통해 재위탁하여 제작한 방송을 NHK 본사의 부장이 도중에 검토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 방송에서는 요시오카 부장이 2001년 1월 19일 DJ에 직접 가서 시사회를 열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과 법정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편집 수정을 요구했다. 요시오카 부장은 방송 후 우익 단체로부터 비판받을 것을 우려해 'NHK는 여성법정과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적으로 방송했다'고 반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여성법정과의 거리두기'를 위해 스튜디오 촬영을 일부 추가하거나 역사적인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 영상을 사용하여 러셀 법정을 소개하는 VTR을 제작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요시오카 부장은 24일의 2회차 시사회에서도 "법정과의 거리감이 지난 번과 다를 바 없이 너무 가깝다"며 OK 사인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NHK 본사가 DJ로부터 촬영물을 받아, 직접 편집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난리가 난 정치인들 NHK의 예산안이 가타야마 총무 대신에게 제출된 2001년 1월 25일,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라는 자민당 의원 연맹의 나카가와 쇼이치 회장이 해외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다. NHK 국회 담당 직원들이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예산안 설명회를 시작하자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우익 단체 관계자가 의원 연맹 소속의 국회의원을 찾아가 "NHK가 이런 프로그램을 방송하려고 하고 있다"며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방송을 언급했다. 그 결과, 의원 연맹인들 사이에서 "NHK가 편향된 프로그램을 방송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리가 났다. 당시 NHK에서 국회를 담당했던 노지마 국장이 말하길, 담당 직원이 당시 의원 연맹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후루야 케이지 의원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소속 의원들이 작년 12월에 열린 '2000년 여성법정'을 화제로 삼고 있다", "NHK가 이 법정을 방송에서 특집으로 구상 중에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예산 설명 때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이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이후 재판에 제출한 '진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국회의원의 말에 따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를 담당하는 국장이 방송 시사회에 참여하다 1월 26일에 NHK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등이 모여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특집 방송의 편집 방침을 확인하는 시사회를 진행했다. 국회 담당인 노지마 국장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참고로 국회를 담당하는 종합 기획실과 방송을 담당하는 방송 총국(보도국 및 방송 제작국)은 완전히 다른 조직이다. 노지마 국장은 보도국의 정치부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국회 담당 부서 소속이므로 원래는 방송 현장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이가》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어 어떠한 프로그램인지 파악하고 싶다"며 시사회에 참여했다.  또한 "방송 도중에 우쓰미 아이코라는 연구자가 법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으니 법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연구자의 인터뷰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방송 편집에 관여했다. 이때 요시오카 부장은 "이러한 방송의 설정이 불공평하고 부당한 것은 아니다. 빨간 색을 쓰니까 검은 색도 쓰자는 식의 밸런스를 맞추는 방법은 아마추어 같은 설정이라서 싫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노지마 국장은 "이런 미묘한 문제는 반대 측 입장도 나와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협의 끝에 법정에 비판적인 주장을 펼치던 니혼(日本)대학 소속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인터뷰를 추가로 촬영하게 되었다. 이 시사회를 통해 협의한 편집 방침에 방송 총 국장, 방송 제작 국장, 그리고 노지마 담당 국장이 모두 합의했다. 교양 담당 부장이 OK 사인을 하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와의 인터뷰 촬영, 스튜디오 장면 추가 수록 등의 작업을 하고 있던 1월 27일, 우익 단체인 유신 정당 심뿌(維新政党・新風) 회원들이 항의하기 위해 NHK에 찾아왔다. 그들은 "어째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방송하느냐!"면서 방송 중지를 요구했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NHK 방송 센터 정문 현관(동쪽 입구)에서 시청자 센터 담당자가 "객관적인 프로그램을 방송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이때 6대의 선전차에 올라탄 우익 단체 회원들이 서쪽 현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내데스크에서 나가타 CP에게 전화를 걸어 "나가타는 지금 당장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나가타 CP가 이를 거부하자 전투복을 입은 30명 정도의 우익단체 관계자가 방송 센터 내부에 난입했다. 하지만 NHK 방송 센터는 요새처럼 거대한 건물이어서 외부 출입자들은 교양 프로그램부로 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우익 단체 관계자들은 1층 식당 근처까지 들어왔지만,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에 NHK 경비원들이 달려와 그들을 진압했다. 그들은 "지금부터 나가타의 집에 갈 것이다"라며 협박조의 막말을 내뱉고는 돌아갔다. 나가타 CP는 자택 근처의 경찰에 전화를 걸어 가족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1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작업을 계속해, 28일 밤에 44분 분량의 프로그램 편집본이 완성되었고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았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베타캠이라는 카메라로 촬영해온 테이프를 직접 편집기로 편집한 후 그대로 방송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국이 제작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은 우선 타임 코드가 들어간 베타 테이프로 가편집하고, 그 데이터를 읽은 후 ECS(에디트 컨트롤 시스템)으로 영상 기술 스태프가 방송용 D3 테이프를 만든다. 이러한 작업이 29일 아침부터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ECS가 끝나면 기본적으로 편집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며, 테이프를 이용해서 더빙 작업(내레이션, 더빙, 음악, 효과음 등을 삽입하는 작업)이나 영상 자막을 삽입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이때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ECS 작업을 1월 29일에 하고 방송 당일인 1월 30일에 더빙과 자막 삽입 작업을 동시 병행하는 매우 타이트한 스케줄로 작업이 진행됐다. 아베 관방부장관과의 면회 1월 29일 저녁, 후반 편집 작업을 하던 중 이토 프로그램 제작 국장에게 호출되어 국장실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국장실에 들어가자 이토 국장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쓰오 방송 총 국장과 노지마 국회 담당 국장이 외근에서 돌아오니 그 때 시사회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시사회를 시작했다. 내가 내레이션을 읽고 나가타 CP가 자막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던 중 마쓰오 국장과 노지마 국장이 돌아와 "다시 처음부터 보자."며 시사회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 시사회는 요시오카 부장의 OK 사인을 받은 44분 분량의 완성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사회가 단순히 프로그램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초췌한 얼굴로 방에 들어오는 마쓰오 국장의 모습을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시사회가 끝나자 노지마 국장이 돌연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내용이야!"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노지마 국장과 마쓰오 국장은 시사회 직전에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副)장관과 면담을 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관방장관에 취임할 때까지 '일본의 미래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NHK가 공표한 자료에는 이때 마쓰오 국장이 아베 관방부장관에게 '일부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본 프로그램이 2000년 여성법정에 대해 매일 밤 4연속 시리즈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아베 관방부장관은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이나 역사 인식 문제와 외교 간의 관련성 등에 대한 지론을 말한 다음 이러한 문제를 공영방송인 NHK에서 다룬다면 공평하고 공정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마쓰오 국장은 아베 관방부장관의 지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은 채 다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으니 실제 프로그램을 봐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베 관방부장관은 이때의 면담에 대해 추후 본인의 홈페이지에 "이 모의재판의 방청을 희망하는 자는 '법정의 취지에 찬성한다'라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관계자들로부터 NHK가 주최자 측의 의도대로 (2000년 여성법정을) 보도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사실관계를 듣게 되었다. 그 결과, (2000년 여성법정에는) 재판관 역할과 검사 역할은 있어도 변호사 역할은 마련되지 않는 등 명백히 편향된 내용임을 알게 되어 나는 NHK가 특히 지켜야 하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도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나가이 사토루(長井 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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