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2) - 위다닌시, 드리스 씨 이야기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 게시일2021.05.18
  • 최종수정일2022.11.28

위다닌시 씨 이야기

위다닌시 씨의 초상화 ⓒ백정미

 

자바섬 서부의 수카부미는 네덜란드식민지시대 때부터 유명한 고급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수카부미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와룽키야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의 집에서 도보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네덜란드인이 살았던 낡은 집이 있었다. 와룽키야라 마을로 온 일본군은 그 집을 군영으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을 매우 무서워했다. 멀리서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면 샛길로 피했다. 샛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길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고개숙여 인사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얽히게 되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 군정 하에서 조직된 도나리구미(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말단의 지역조직) 등에게 스파이 용의자 등으로 밀고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일본군이 군영으로 삼은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에서 어린 여성들이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무 농원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집을 비워 저녁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위다닌시 씨는 대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일본군 몇 명이 찾아와 있었다.

“간호부로 일하지 않을래?”

어눌한 인도네시아어로 한 군인이 말했다. 당시 위다닌시 씨는 15살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사 일을 돕고 있었다. 위다닌시 씨는 돈을 벌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본 군인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 제안은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위다닌시 씨는 무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몇 명의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트럭이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간 곳은 네덜란드인이 살던 낡은 건물이었다. 위다닌시 씨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죽 장화를 신은 군인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강간했다. 그 군인은 위다닌시 씨가 집에서 끌려왔을 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의 이름이 다나베(タナベ)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다나베의 뒤를 이어 위다닌시 씨를 강간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다닌시 씨가 묵은 방은 하얀 회반죽 벽에 아래쪽은 목재로 마감한 세련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6명의 어린 여성들만 있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그 낡은 건물을 찾아오는 일본군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 식사는 당번병이 가져왔다. 위다닌시 씨는 거기에 온 병사가 요금을 지불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직접 금전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들은 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계속해서 강간을 당했다. 병사들이 방에 들어오면 위다닌시 씨는 “꺼져”라고 욕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맞았다. 병사에게 저항하여 식사를 받지 못한 날이 이어졌다. 칼을 빼 들고 “찔러 죽여버린다”고 위협하는 병사도 있었다. 목덜미에 군용 칼끝을 갖다 대고 폭력적인 체위를 강요하는 군인도 있었다. 자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 이상으로 강간을 당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4개월 후 일본군 부대가 보고르로 이동하면서 이 여성들도 보고르로 연행되었다. 보고르에서 일본군은 이전에 네덜란드군이 쓰던 시설에 주둔했고, 군 부대 규모는 와룽키야라 마을보다 훨씬 컸다. 근처의 위안소에 와룽키야라 마을에서 온 위다닌시 씨 일행이 포함되어 ‘위안부’의 숫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일 년 후 20명 중 4명이 반둥으로 이동되었다. 위다닌시 씨도 반둥으로 이동되어 반둥의 위안소에서 또다시 일 년을 보냈다. 와룽키야라 마을에 있던 부대와는 보고르, 반둥에서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부대의 병사는 식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위다닌시 씨는 위안소의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위다닌시 씨는 당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한 언니가 반둥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언니네 가게까지 7㎞를 걸어가 그곳에서 일하며 지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다. 인도네시아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국가로서 나아가기 시작한 때다. 위다닌시 씨는 일본군에게 당했던 일을 부모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모님은 자취를 감춘 딸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딸 찾는 건 포기해. 찾으려고 하면 죽여버린다.”

부모님은 일본군에게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딸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머릿속에 떠오르는 딸의 불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위협을 당했고 비탄이라는 감각조차 잃은 채 피폐해져 갔다. 아버지는 어디에도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를 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딸에게 퍼부었다. 일본군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는 딸의 불운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위다닌시 씨가 일본군에게서 받은 피해는 일본군의 잔학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울해하는 나날이 늘어갔고 건강이 나빠져 일 년 후 돌아가셨다.

위다닌시 씨는 그 후 반둥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18년 전에 죽었다. 남편에게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굴욕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을 봉인하고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누워있을 때면 봉인해 두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봇물 터지듯 선명하게 밀려들어 왔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불쾌한 감정, 혐오심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라 아픈 몸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리스 씨 이야기

드리스 씨와 에디 씨

 

드리스 스만포 씨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군의 하사관이었다. 드리스 씨는 네덜란드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드리스 씨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집 정원 앞에서 말에 올라탄 일본인 군인이 드리스 씨를 가만히 주시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딸을 데려가겠다”라고 부모님에게 통보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부모님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직감한 드리스 씨는 군인을 따라갔다.

수카부미 부눈 거리에 있는 커다란 집에 도착한 드리스 씨는 자신을 끌고 온 가나가와(カナガワ)중위로부터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드리스 씨와 같이 장교 등이 혼자서만 끼고 살던 여성들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친타’라고 불렀다. 가나가와 중위는 드리스 씨가 다른 일본 병사들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으며 외출을 금지했다. 가나가와 중위 곁에는 시중을 드는 당번병인 마치다(マチダ)가 있었다. 가나가와는 평일에는 업무로 집을 비웠고 마치다만 집에 남아 드리스 씨를 감시했다. 드리스 씨는 어머니가 보고싶었지만 마치다의 감시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부모님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끌려올 것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날 드리스 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가나가와 중위는 점차 발길을 끊었다. 당시 드리스 씨는 임신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태내의 생명을 지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젊을 때의 중절은 나중에 몸에 안 좋다며 드리스 씨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4개월 무렵이 되자 가나가와 중위는 전혀 집에 오지 않았기에 드리스 씨는 마치다에게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1945년 7월 17일,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출산했다. 남자 아이였다. 처음 신생아의 얼굴을 봤을 때를 회상하며 드리스 씨는,

“슬펐어요.”

이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아들, 에디 씨가 10살이 되었을 때 드리스 씨는 아이가 있는 남성과 결혼했다. 에디 씨는 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도 예뻐해 준다고 느꼈다. 드리스 씨와 남편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드리스 씨와 인터뷰를 했을 때 이미 드리스 씨의 남편은 돌아가셨고, 드리스 씨는 남편이 데려온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보다 그 아들이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 씨는 가나가와 중위가 혹시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리스 씨는 굳은 표정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랜 세월 가나가와 중위와 얽힌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지역, 점령지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①군이 통솔하여 설치한 위안소, ②소수의 장병과 소부대가 멋대로 만든 ‘강간소’(강간소는 중국에서 사용한 용어로서 이 원고에서는 위다닌시 씨가 처음 끌려갔던 네덜란드인의 낡은 집이 해당된다), ③친타와 같이 한 명의 군인(장교)에게 속한 여성의 사례, ④주둔지 근처의 민가로 침입 후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는 경우, ⑤군사 작전 때 한 명 또는 여러 군인들에 의한 성폭력, ⑥항일 세력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성폭력, ⑦집단 학살 때의 성폭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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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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