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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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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소녀상과 함께 함께 만난 사람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작가 김세진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75개의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2018년엔 책으로 엮어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보리, 2018)를 출판했어요. Q. 처음 소녀상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기 전에 ‘소녀상 농성 대학생 공동행동’에서 소녀상 지킴이를 했어요. 어느 날 어떤 분이 저에게 ‘전국의 소녀상이 몇 개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저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다른 지역에는 어느 곳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 조사해봤어요. 그런데 소녀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더라고요. 그림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제대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전국을 다니며 소녀상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어요. 소녀상의 의미를 알리자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단지 어디에 어떤 소녀상이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Q. 전국의 소녀상을 그리러 다니면서 겪었던 일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청주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스케치는 겨우 끝났고 채색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거예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죠. 카페 안에서 그림을 마저 그리고 있는데, 카페 사장님이 제 그림에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는 작업에 관해 설명해 드렸죠.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저더러 오늘 잠은 어디에서 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지금 저렇게 비가 많이 오니까 찜질방을 가야겠죠?” 말하니까 그러면 자신이 카페 열쇠를 줄 테니 여기서 자고 가라는 거예요. 여기서 씻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만큼 그리다가 자고 가라고요. 실제로 제게 가게 열쇠를 맡기고 퇴근하셨어요. 그게 엄청나게 감동이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열쇠를 맡긴다는 게 대단한 거잖아요. 남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갔는데, 그곳 사장님도 저더러 뭘 그리냐고 물어보시더니, 또 어디서 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마 노숙을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니, 열쇠를 줄 테니 가게 소파에서 자라는 거예요. (웃음) Q. 작가님의 작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까 환대를 해주셨던 거겠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주 많은 분을 만나셨을 것 같아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분들하고 계속 연락이 닿고 있어요. 자기 지역에서 함께 전시회를 열자고 문의도 들어오고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 또 있어요. 저는 막연하게 전국 각 곳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간에 네트워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없더라고요. 네트워크가 없으니 소녀상 건립에 대한 노하우 역시 공유되고 있지 않은 거예요.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똑같이 겪고 있었죠. 본의 아니게 제가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된 곳도 있어요. 각 지역의 추진위끼리 연결을 해주기도 하고, 소녀상을 건립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알려드리기도 했어요.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면서 느낀 보람 중에 하나죠. Q.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소녀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가끔 스스로 물어봐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요. 글쎄요. 일단은 시작했고, 사람들이 의미가 있다고 말을 해주니까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소녀상을 그림으로써 소녀상은 먼 곳이 아닌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소녀상은 어디에나 있거든요. 우리 동네에도 있고, 옆 동네에도 있어요. 수요시위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소녀상은 가까운 곳에 언제나 늘 있어요. 누군가 제 작업을 보고 ‘어, 우리 동네에도 소녀상이 있었네?’ 하는 반응을 보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그걸 알리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75개의 유일무이한 소녀상들을 마주하다 Q. 소녀상 이미지에 관한 비판 중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를 소녀로 고정한다는 비판이 있어요.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녀상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이겠죠. 우리가 소녀상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의 소녀상은 두 작가님이 만든 작품이니까요. 저는 소녀상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은 현대미술로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두 작가님은 소녀라는 이미지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피해자들을 기리고 싶었던 거예요. 실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다수가 피해 당시 어린 소녀였던 것도 사실이고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고, 인권운동가라는 의견이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모든 ‘위안부’ 피해자가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고요, 그중 몇 분이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한 것 역시 피해 이후의 일이죠.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대 형성과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소녀상은 현대미술 작품 중 하나고요.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소녀상을 보면 무섭대요. 소녀상이 마치 계속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대요. 소녀상을 볼 때 내면에 있는 자신의 시각이 비추어져서 그런 거겠죠. 그런데 우리는 소녀상을 보면서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죠. 재밌는 건 소녀상의 표정은 언제나 무표정이라는 거예요. 무표정한 표정에 감정을 씌우는 건 소녀상을 보는 우리 자신이죠. 이게 현대미술의 역할이고요. Q. 소녀의 이미지가 계속 복제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요. 김세진 작가님은 직접 다양한 곳의 소녀상을 보셨잖아요. 실제로는 어떤가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김학순 할머니를 모델로 한 소녀상도 있어요. 말하자면 소녀상이 아니라 할머니상이죠. 또 소녀가 아닌 젊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소녀상도 있어요. 많은 작가님이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물론, 가장 많은 것은 두 작가의 소녀상이죠. 지역에서 소녀상 건립을 추진할 때 여러 작품이 후보로 올라오는데요, 대다수의 지역에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작품이 투표를 통해 선정되곤 해요. 아무래도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소녀상의 이미지는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에요. 오죽하면 지역 작가님이 만든 소녀상을 제치고 예의상 후보로 올려놓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이 선정되는 일도 있었겠어요. 심지어 두 작가님의 소녀상이 진짜 소녀상이고, 나머지는 가짜 소녀상이라는 말을 하는 분도 계세요. 두 작가님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계세요. 소녀상의 이미지가 본인들의 작품으로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본인들 외에 다른 작가가 만든 소녀상 중에도 좋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도 하시고요. Q. 혹시 김서경, 김운성 작가님의 소녀상 외에 인상 깊게 보았던 소녀상이 있나요? 부천 소녀상 같은 경우에는 뒷모습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요.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돌아가서 앞모습을 보면 얼굴이 있는 자리에 동판 거울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어요. 제가 본 동상의 뒷모습은 다름 아닌 나의 뒷모습이었던 거예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굉장히 멋진 작품이죠. 그리고 이화여대 입구 대현문화공원에 있는 소녀상은 파란색 나비 날개를 가지고 있어요. 전국의 대학생들이 참여한 이 소녀상의 파란 나비 날개는 환생·희망·자유·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대요. 중구 프란체스코 회관 앞에는 전국 고등학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해서 만든 소녀상이 있어요. 고등학생들이 참여해서 그런지 왠지 학생의 느낌이 있어요. 부산 소녀상의 경우에는 굉장히 당당한 표정을 띠고 있고요. 화정 소녀상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각 지역의 소녀상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어요. 상주는 곶감이 유명하잖아요? 상주 평화의 소녀상 뒤에는 조그맣게 곶감이 조각되어 있어요. 깨알 같죠. 소녀상이 왜 이리 한결같냐고 비판하기 전에 다양한 모습의 소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소녀상은 문제 해결을 바라는 시민의 염원이다 Q. 처음에는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셔서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작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소녀상의 의미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슬펐어요. 이전에 다른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정도였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날 또 다른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했고요. 하루에 두 분이 돌아가신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날 느꼈던 감정이 이전과는 달랐어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확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전혀 안 보여요. 이제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을 준비해야 해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을 향한 움직임이 우리 다음 세대에도 또 그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녀상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언젠가는 늙고, 우리 아래 세대도 지금의 우리 나이가 되고 또 할머니의 나이가 되는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현재 우리와 함께 있는 소녀상은 누군가 철거하고 부수지 않는 한 미래에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소녀상을 매개로 진실과 정의를 향한 의지가 계속 이어질 수 있어요. 물론 정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존재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현재의 진실은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미래의 진실은 우리가 이 문제를 여전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걸 소녀상이 알려주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소녀상을 과하게 신성시하거나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죠. 본질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니까요. Q. 관리 문제에 있어 소녀상을 현충 시설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현충 시설까지는 아니지만, 공공조형물 지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니까요. 하나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데에는 매우 많은 시민의 염원과 노력이 필요해요. 소녀상이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염원이 있다는 거고, 지자체는 시민들의 염원을 이어받아 소녀상을 지속해서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그러나 건립과 관리의 책임을 모두 지자체에 떠넘겨 버리면 소녀상이 무분별하게 난립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소녀상은 여러 시민이 함께 참여해서 민주적인 절차로 추진될 때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거잖아요. 시민 참여 없이 지자체 혼자 덩그러니 세워버리거나, 지역 정치인들의 훈장이 돼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는 거죠. 시민들의 염원이 반영되지 않은 소녀상은 결국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겠죠. 이런 문제들을 막기 위해 소녀상 건립은 반드시 시민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하고, 관리 감독은 지자체가 하되, 관리 운영을 잘 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별거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들 Q. 최근에는 소녀상을 만든 작가님들을 인터뷰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네. 전국의 소녀상 건립을 추진한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어요. 실제로 제작을 했던 작가님들을 만나 소녀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에요. 현재는 실험하는 정도이지만, 조만간 본격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공공예술에 참여한 예술가는 쉽게 잊히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매우 큰 ‘위안부’ 피해자 추모비가 있는데요, 거기에 여성가족부 장관 이름은 크게 있지만, 작가 이름은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했지만,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알리고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어요. Q. 다른 방식으로 소녀상을 기록하는 일을 하시는 거네요. 소녀상을 그리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하실 계획이세요? 해야죠. 소녀상은 지금도 계속 건립되고 있으니까요. 점점 할 일이 늘어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출판사 쪽에서 4~50개 정도의 소녀상을 더 그려서 개정판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그리고 준비 중인 전시도 있고요. Q. 혹시 김세진 작가님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예술 작업을 하려고 하거나 혹은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저는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내일 어떤 커피를 마시면 좋을지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눈앞에 소녀상이 있었기에 소녀상을 그린 것뿐이에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냥 눈앞에 있는 간단한 것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대단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요. 저희같이 별거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거죠. 별거 아닌 사람들이 땅바닥에 뿌려져 있는 조각을 주워서 퍼즐을 맞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부터 시작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Credit 인터뷰 : 금혜지 글/편집 : 현승인 그림 : 김세진 일시 : 2020년 5월 23일 토요일 장소 : 서울시 은평구 불광역 청춘 스터디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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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에세이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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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과거사 문제를 의제화하는 사회예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소녀상으로 인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만 각인되고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시간이 사라지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은 평화의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함께 소환된다. 소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웹진 <결>은 소녀상을 직접 관찰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누구보다 많은 소녀상을 자세히 관찰한 김세진 작가와의 인터뷰, 그리고 2016년 '효녀연합'으로 활동했던 어효은 작가가 하나의 소녀상을 2주간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적은 에세이를 준비했다. 두 개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소녀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소녀상을 마주하다] 1. [인터뷰] 김세진 - 전국의 소녀상을 만나다 2. [에세이] 어효은 - 2주간의 소녀상 관찰기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약 2주간 소녀상을 관찰하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을까?' 에세이 기고 제안을 받았을 당시 해보고 싶은 마음과 무겁고 걱정되는 마음이 함께 올라왔다. 사랑, 감정, 경험, 관계, 일 등 다양한 소재로 에세이를 써왔지만 모두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 글이었다. 소녀상을 바라보며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렸고 가슴도 아팠지만 그건 나의 삶이 아니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소녀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시도해본다는 생각 속에 생계 활동의 일환을 이유로 작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나는 이 작업을 몇 번이고 포기할 뻔했다. 몇 년 전 동료와 함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에서 일본대사관 맞은편 소녀상을 지키며 함께 싸웠다. 오랜 기간 연극을 해 온 나는 무작정 퍼포먼스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거리 공연을 했다. 많은 사람에게 상황을 알리고 싶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되어 울분에 차 소리치고 분노했다. 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아픔에 마주하며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시간은 흘러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의 삶을 살았다.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다시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소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십리광장의 평화의 소녀상 약 2주간의 기간을 두고 소녀상을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소녀상은 서울 왕십리역에 있는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이다. 왕십리역은 여러 호선이 겹치는 역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소녀를 스쳐 간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14~16세 때 모습을 재현해 만들었다.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의 인권과 명예 회복뿐 아니라 미래세대인 청소년이 아픈 과거를 잊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지역 내 초·중·고교 학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뜻을 함께한 학부모들이 모여 성동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건립 모금 바자회, 소녀상 배지 제작 등을 통해 두 달 만에 학생, 구민 등 1,000여 명으로부터 6,000만 원에 가까운 기금을 모금했고 그해 6월 10일 왕십리광장에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광장에는 네 개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인도 맞은편에는 뜯긴 듯한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왼 어깨 위에 새가 앉아있다.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있다. 오른편에는 비둘기를 한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소녀가 서 있다. 금방이라도 함께 날아오를 듯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와 비둘기를 들어 올린 소녀 사이에 측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소녀가 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길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뒷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동상은 소녀가 아닌 할머니의 모습이다. 광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김학순 할머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국내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왕십리광장에 있는 김학순 할머니 동상 옆에는 할머니의 사진과 글이 함께 세워져 있다. 잊어서 미안해요 성동구에 4년째 살고 있는 나는 왕십리광장을 수십 번도 넘게 지나쳤다. 소녀상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에 감사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네 개의 평화의 소녀상이 한 곳에서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 모두들 한 번쯤은 쳐다보고 지나치게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소녀상 지킴이를 하고 있는 청소년은 소녀에게 겨울엔 모자와 목도리를, 크리스마스엔 예쁜 머리띠를 해준다.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여느 소녀같이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어여쁜 꽃 마스크를 쓰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첫날은 동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소녀의 두 눈을 응시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잊어서 미안해요.' 속으로 말을 건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곁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평생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제대로 된 사과와 치유를 받지 못한 채 살아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김학순 할머니 동상을 보면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작년 1월,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다. 과거의 상처는 끈질기게 일상을 가로막고 나를 절벽 아래로 끌어내렸다. 누구도 만날 수 없었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길 원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린 시절 마음에 생겨버린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살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은 더 두려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하며 내면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아팠던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많이도 울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상처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사건들. 이제는 괜찮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납덩이 같은 감정들.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분들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게 뭉쳐있을까. 소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아픈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소녀에게 투사되었다. '보고 싶지 않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어', '그냥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왜',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고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안은 채 거리를 두고 소녀를 찾아갔다. 새로운 형태를 발견하고 기록했다. 동상에 꽃이 놓여있거나 동상의 발뒤꿈치가 들려있는 모습을 본 것 등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깊게 느껴지려고 하면 차단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소녀상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선 사람들도 있었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늦은 밤 소녀를 찾았다. 그날따라 기운이 없어서 차가운 돌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동상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에서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소녀의 아픔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한 것이었다. 순간 울컥하고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구나. 함께 공감해주고 따듯하게 안아주길 바랐구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랐구나. 마음에 쌓인 울분을 참을 대로 참아 결국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구나.' 자신의 깊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목소리를 내는 행동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 나는 지금도 용기가 없다. 고작 여섯 살 정도였던 아이의 성기를 더러운 손으로 만지던 아빠의 지인, 어린아이가 울자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던 삼촌,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코피가 날 정도로 뺨을 때리던 남교사, 그 밖에 일일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차가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이지 않게 묻어두려 해도 한 번 깊이 파인 상처는 남아있는 것이었다. 덮을수록 곪아서 결국엔 터지고 마는. 상처를 다시 꺼내어 투쟁하는 삶이란 마치 매일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내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소녀는 친구였다 소녀상을 관찰하던 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마치 관찰카메라 프로그램 피디가 된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한 행인이 멈춰 서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려간 소녀의 마스크를 다시 묶어주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묻자 쑥스러워하며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관심 어린 손길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 한 장면은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걸어오다가 소녀상을 향해 나비처럼 날듯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아이는 밝게 웃으며 맑은 목소리로 “안녕~”하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픔을 투사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외면하고 안쓰러워할 존재도 아니었다. 순수한 아이에게 소녀는 친구였다. 마음에 새겨진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존재를 기억하고 사랑하면 좋겠다. 누군가는 공감하며 아파하고 누군가는 묵묵하게 곁에 있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투쟁하고 누군가는 아이같이 반갑게 인사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동하면 좋겠다. 포기할 뻔했던 집필을 마치며 그 자리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소녀에게 고맙다. 소녀상 나는 본다. 그날의 기억을. 나는 본다. 상대의 두 눈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한 마음으로. 나는 본다.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뜨거운 눈물을 두 눈 가득 담고서 나는 본다. Credit 글/사진 : 어효은 편집 : 현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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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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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김목인 할머니의 산책 Q. <할머니의 산책>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요? 안녕하세요,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입니다. 어느 날 길을 잃어버린 할머니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할머니의 따님이 오실 때까지 잠시 할머니 곁에 있게 되었어요. 따님을 기다리는 동안 분위기가 어색해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봤는데,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왠지 이 할머니로부터 곡 작업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시간을 뺏을까 걱정하시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묘하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상황과 겹쳐 보였어요. <할머니의 산책>은 그렇게 출발하게 된 노래입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싱어송라이터는 보통 자신의 이야기, 혹은 관심사 안에서 촉발된 이야기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해주세요>와 같이 특정 주제를 다루는 컴필레이션 앨범의 곡 작업을 할 때는 평소 하던 방식과 달라서 어려움이 있어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시작을 하긴 했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 당사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까 더 어려웠어요. 솔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느 지점에 서서 노래를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렇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더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예전 같았으면 뉴스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나왔을 때 그저 사회의 복잡한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라고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고 나면 주변에서 부담스러운 작업을 하는 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것처럼 많은 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잖아요. 저처럼 음악을 통해서 참여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작업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주거나 참여한 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거예요. 언젠가 공연을 통해 <할머니의 산책>을 들려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집에 오는 길 안개비가 내리던 날 우산도 없이 산책을 나온 할머니 이곳 주소가 어떻게 되오? 우리 딸이 데리러 온다는데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네 뉴스에는 93세로 떠난 한 많았던 인생이 남긴 긴 이야기들 하나의 아픔이 영원해지고 하나의 인생이 결국 지나가도록 열리지 않는 입들에 대해 가만히 서서 곰곰이 생각할 때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딸 "아니 바쁜데 이래도 되오?" "아니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주소를 아는 우리 집 앞에 서서 주소가 없었던 이들을 생각하네 백정현, 김율희 무정세월 Q. 간단한 자기소개와 노래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소리꾼 김율희라고 합니다. 전통 창작 국악팀 ‘바라지’, 그리고 레게밴드 ‘소울소스 meets 김율희’에서 판소리 보컬로 활동하고 있어요. 백정현 : 백정현이라고 합니다. 작곡과 프로듀싱을 하고 건반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Beck&Fontenot 이라는 이름의 팀으로 활동하고 있고, 싱잉볼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6년간은 제주도에서 요가를 하며 지냈어요. 지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무정세월>은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연습실에서 즉흥으로 맞춰봤던 곡이에요. 서로 어떻게 해달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 합이 나왔죠. 김율희 : 노래 가사 중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 내 청춘이 아차 한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는 단가 <사철가>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제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만약 ‘내가 그때의 할머니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고 더듬고 아파하며 쓴 부분이에요.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김율희 :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가진 상태이기는 했어요. 하지만 당사자의 슬픔에는 전부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감히 이렇게 접근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소리꾼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웃길 수도, 울릴 수도 있잖아요. ‘소리꾼 김율희’로서 이 주제를 어떻게 노래에 담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서 시작하기 전까지도 확신이 없었어요. 백정현 : 맞아요. 우리가 진짜 이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상태에서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있었죠.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 아예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Q. <이야기해주세요> 앨범에 참여하고 느낀 점을 말씀해주세요. 김율희 : 저는 이전보다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마음과 관심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판소리를 해오면서 전통 소리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작업한 일이 드물었죠. 이번 작업을 통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명확해진 것 같아요. 할머니들께서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더는 아프지 않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더 이상 그분들을 상처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백정현 : 앨범 제목이 <이야기해주세요>인 것이 참 좋아요. 어렵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이 음악을 만든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할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치유해주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걸 같이 느껴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헤아려보는 기회들이 계속되면 좋겠어요.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면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전부 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회의 어딘가가 아픈 상태라면 모두가 힘을 합쳐 여길 어루만지고 치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달이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해가 또 넘어가네 이내 청춘이 아차 한 번 늙어지니 다시 청춘이 어려워라 한받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Q. 독특한 곡 제목과 곡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저는 한받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립음악가입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서울 중구 만리동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제가 참여한 곡 <우린 리우데자네이루 언덕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봤어>는 제목과 스타일 모두 독특한 곡이죠. 예전에 실험적인 거리극을 다원 예술 퍼포먼스로 연출한 적이 있어요. 이 거리극에 <이야기해주세요> 기획팀 송은지 님이 출연진으로 함께 했거든요. 은지 님이 거리극에 사용한 배경음악을 모티브로 <이야기해주세요> 수록곡을 작업해보자고 제안하셔서 그 음악을 편곡한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음악에서 계속 반복되는 멜로디는 철거 예정인 지역의 지도에 있는 선들을 음계로 표현한 것이에요. 재개발로 철거민들이 쫓겨난 동네들을 선율로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이걸 듣고 송은지 님이 다시 멜로디 라인을 만들었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부르면서 새로운 곡이 되었죠. 노래에 가사가 없기 때문에, 제목에서 하나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목은 리우데자네이루에 갔던 꿈 속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어요. 휘황찬란한 풍경과 빈민들의 뒷골목이 공존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언덕에서 바다와 하늘을 바라봤던 꿈이요. 그 꿈 속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그리워하던 아이들의 감정을 떠올렸어요. 상실을 음악에 담아낼 때 정말 우울하고 처절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풀어내고 싶었어요. 아이들의 멜로디와 스캣 선율처럼 가사 이외의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Q.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곡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 다른 음악가들보다는 간접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 원곡의 모티브인데,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수요시위에서 공연하기 위한 곡 작업이었다면 분명히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만들었을 거예요. 시위 현장에서는 연대의 퍼포먼스로 ‘야마가타 트윅스터’ 스타일의 음악을 했을 거예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나요? <이야기해주세요> 곡 작업을 하면서 제가 남자로서 누려왔던 일상적인 권위에 대해 반성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곡은 저의 기존 작업과는 다른, 이질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만든 곡입니다. 음악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는 점이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요. 베렛떼 뿌다부바 베렛빠바 데렛데 라라랄랄라 라랄랄랄라 랄랄라 음- 나난나나나 나난난나나 나나나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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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인터뷰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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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뉴스들이 넘쳐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상황에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한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말과 글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냈을까. <이야기해주세요> 세 번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을 만나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1부 - 김목인, 백정현, 김율희, 한받 2부 - 이정아, 최고은, 황푸하, 김해원 이정아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 Q. 참여곡 <Three Hundred Thousand Flowers>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이정아입니다. <그리고 싶은 것>(권효, 2013)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중·일 작가들이 각자 생각하는 ‘평화’의 이미지를 그려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라는 동화책을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는데요, 그 영화와 책을 바탕으로 노래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할머님께서 유난히 꽃을 좋아하셔서 책이나 앨범 사이에 꽃을 꽂아 놓으시고 압화(꽃누르미) 작업을 하시더라고요. 곡 제목은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굉장히 많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에둘러 표현해도 고통스럽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되도록 쉬운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로 표현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곡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다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나물 캐러 갔다가 끌려가신 분도 계시잖아요. 제가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장 보러 나갔다가 끌려갈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런 사실을 일상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나였을 수도 있고, 너였을 수도 있는, 모두의 일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Q. 곡을 만들면서 느낀 점과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접근 자체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작업을 위해 공부하면서 힘들기도 했죠. 특히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정말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어서 끝까지 다 못 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도 비슷한 주제의 작업이 있다면 참여하려고 해요. 필요한 일 같아서요. */ It was an ordinary dayAnd the sun was shining On the meadow and the hills And on the trees But as rain fell on the ground A dark dark shadow was coming around And rootlessly they torn the flowers Oh as cruel as they could be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They were just starting to bloom At the edge of sixteen 35 whole years Then the shadow disappeared But the flowers oh our flowers Were left bleeding and abused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say it isn't true? How can someone do these things And just go by as if they're through? But they couldn't take away The scent of the flowers Spreading through And through here in our hearts It was never your fault Please don't be afraid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And you'll never fade away Cause you're in our hearts 최고은 악순환 Q. <악순환>은 어떻게 시작된 곡인가요? 저는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라고 합니다. <이야기해주세요> 3집에 <악순환>이라는 곡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노래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에 수록된 「악순환」이라는 시와 제목이 같아요. 이 시는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라는 구절로 시작하거든요. 이게 <이야기해주세요> 작업과 맞아떨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시의 구절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한이 많은 남도의 판소리를 배웠는데, 의도한 정서를 담으려니 자연스레 국악적인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악순환>은 그런 한국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올해는 제가 데뷔한 지 10년이 되는 해예요. 10년 전에는 노래를 만들면 생각과 표현 사이에 괴리가 컸어요. 음악을 할수록 그 간극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쁨이 있어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을 때 <악순환>을 작업하게 됐죠. 2019년 겨울에 한 달 반 정도 유럽 투어 공연을 했어요. 30여 번의 공연에서 매번 <악순환>을 불렀습니다. 관객들이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한’을 느꼈는지, 공연 때마다 <악순환>에서는 박수 소리가 길게 나왔어요. 곡에 대한 상반된 피드백도 재미있었어요. 기획팀 서상혁 님은 처음 이 곡을 듣고 내재된 ‘흥’을 느끼셨대요. 반대로 송은지 님은 공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소감은 어땠나요?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굉장히 반갑고 좋았어요. 음악으로 소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만들어진다는 게 기뻤거든요. 그래서 곡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주제를 담으려다 보니 스스로 검열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이야기해주세요> 시리즈를 응원하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했는데, 그러려면 ‘사람들이 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최소한 저에게는 좀 더 소신을 지키는 방향으로 작업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많은 뮤지션이 정말 좋은 음악들로 참여했는데, 기획팀이 부디 지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웃음)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가 계속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게 공포였다 시간이 가도 시간이 온다 어제가 가도 어제로 온다 나는 나를 사용하면서 하루하루 생산한다 일 년을 생산한다 인생을 생산한다 황푸하, 김해원 나의 고향 Q. <나의 고향>이라는 곡에 담긴 메시지를 소개해주세요. 김해원 : 안녕하세요, 김해원이라고 합니다. ‘김사월X김해원’이라는 포크 팀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지금은 솔로 활동과 영화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을 황푸하 씨와 함께 만들었어요. 저는 편곡과 프로그래밍, 믹싱 등을 맡았습니다. 황푸하 : 저도 포크 음악을 하는 황푸하라고 합니다. <나의 고향>에서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해주세요> 앨범 안에서 이 곡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기도 했고요. 다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은유적으로 나무들이 우리에게 계속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가사를 썼습니다. 지금도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들으려 하지 않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소통의 부재와 답답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해원 : 저희가 함께 작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업했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아주 모호하기도 했습니다. 황푸하 : ‘고향’이라는 키워드 안에는 잃어버린 곳을 다시 꿈꾸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처음 곡을 구상할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재난의 피해자들이 고향을 잃어버린 장면을 떠올렸어요. 김해원 : 황푸하 씨가 처음 가사를 보여주셨을 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사건을 겪기 전에 살던 공간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봤어요. 어릴 적 배웠던 동요나 근대에 만들어진 신민요 안에 담겨있는 향수의 정서 같은 걸 계속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Q. <이야기해주세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김해원 :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이 주제에 대한 일종의 음악적인 연구 결과라고 생각해요.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증도 필요하고, 해당 주제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해야 하죠. 저도 그 어려운 과정을 겪었죠. 황푸하 : 예전에 <세월호 미수습자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 ‘집에 가자’> 앨범에서 사회 이슈를 음악을 통해 저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고 음악 작업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이런 작업을 통해 책임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아요. 김해원 :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고 있는데, 사실 제 자신이 아닌 주변과 사회 구성원의 이야기를 소재로 음악 작업하는 것을 어려워했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계속 음악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또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어요. 김해원 : 처음에는 앨범을 정말 많은 분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일종의 작은 연구를 했다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황푸하 :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뉴스가 쏟아지고 여론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음악은 정치적인 논쟁이나 여론몰이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서 끌어낸 근본적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앨범을 들으시면서 음악에서 언어보다 더 깊이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우리 동네 골목길 나무들의 이야기 그동안 살아오며 많은 걸 봐왔었다 바람이 유독 많은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리운 나의 고향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내가 겪은 일들을 수없이 말했었어 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었어 빗방울 떨어지는 날 더 크게 말하잖아 누군가가 살았었다 꽃이 피는 언덕의 봄 무심하게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 아래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리운 나의 고향 Credit 기획/진행/인터뷰/글 : 현승인 편집 : 금혜지 사진 : 팝콘(popcon) 일시 :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장소 : 서울시 마포구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본 인터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방지 예방수칙, 행동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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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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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들여다보기] 1부 -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 종류의 연구의 의미 2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상- 3부 -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에서 발견한 조선인 여성들 -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들여다보기 어느 나라건 군대는 체계적으로 운영됩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일본군의 군대 관리에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군속(군무원의 옛말)의 숫자와 이들의 상태(사망과 부상 여부, 귀국 일시 등)를 기록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야 병력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인에게 월급이나 상벌을 주며, 군인·군속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경우 가족에게 사망 통보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기록 중 하나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입니다.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군인·군속으로 동원되어 집을 떠나 전쟁터로 향한 이들의 명부입니다. 이때 '유수(留守)'는 일본어로 '부재중' 혹은 '집의 주인이나 가족이 외출한 사이에 그 집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인들도 일본의 군인·군속으로 동원됨에 따라 이러한 명부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외에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부를 만들었는데, 이 글에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함께 살펴볼 복원명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복원(復員)명부'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반대로 병역을 마치고 제대하여 귀향하는 이들을 기록한 명부입니다. 그렇기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는 특정 인물이 전쟁 당시 군인·군속 신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지요. 이 글에서는 일본군이 작성한 명부자료 중 인도네시아 남방 제5·9·10육군병원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그리고 남방 제9육군병원의 복원명부에서 찾은 조선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살펴보기 본격적으로 명부의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살펴볼까요? 아래 그림들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사본입니다. <그림 1>은 남방군 제7방면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표지이고, <그림 2>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라는 조선인 여성의 기록이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그림 3>은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안원남선의 부분, <그림 4>는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김복동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는 후방에 남아 있는 명부를 만들고 이를 일선으로 파견된 부대에 전달하면, 일선의 각 부대가 현지에 편입되거나 소속 부대가 변경된 군인·군속의 이름을 추가·삭제 등을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작성 규정을 만들어 육군에 적용한 시기는 전쟁 말기인 1944년 11월 30일부터입니다.[1] 하지만 이 시기에 <그림 2>, <그림3>, <그림4>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든 육군병원들이 소속된 남방군 제7방면군은 이미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였던 당시 전황상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아래의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들은 현지 부대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만드느라 바빴다는 남방 제5육군병원 군인의 회고담이 있기도 합니다.[2] 그럼 이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좀더 꼼꼼히 살펴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정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2000년 즈음 명지대 홍종필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홍종필 교수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명단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홍 교수는 당시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전쟁 중에 사망한 조선인들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이 명단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홍교수는 명단 속 한정수라는 인물을 이름만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유가족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홍 교수가 알려준 것 이상의 정보를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한정수라는 인물을 다시 만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제공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3]에서였습니다. 남방 제5육군병원 간호부로 기록된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방 제9육군병원,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들의 이름을 추가로 발견했어요. 여기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김복동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한정수를 비롯한 명부 속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조사를 계속했지요. <그림 2>는 자바섬 자카르타에 있던 남방 제5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 중 한정수가 기록된 부분입니다. 최상단 여백에 복원(復員, 병역해제) 여부를 확인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최상단 우측의 '21.4.24' 문구는 쇼와 21년(1946년) 4월 24일에 이 사람의 병역이 해제되었음을 뜻합니다. '21.4.24' 문구의 아래 칸에는 한정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병역이 같은 시기에 해제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한정수가 남방제5육군병원의 군속으로 편입된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편입 시기가 1945년 8월 1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한정수는 7월 30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칸의 한자를 볼 때 이는 한정수의 사망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칸에는 본적지, 주소, 유수 담당자 등이 적혀 있는데 주소 자리에 도장으로 '合祀 濟(합사 제)'라는 문구가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유골이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되어 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한정수 명부의 최하단에는 '除(제)', '死(사)'라는 글씨가 도장으로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한정수의 병역이 해제되었음과 한정수가 사망했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명부의 중앙 하단에 '供(공)', '供号(공호)'라는 도장과 함께 숫자가 적힌 것은 공탁금 번호로 추정됩니다. 공탁금은 일제시기에 동원된 민간인들에게 주어야 할 임금 등을 미지급하고 공탁한 금액을 말합니다.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전까지 공탁금을 일제징용 노무자들에게 주지 않고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명부에 찍힌 도장들은 모두 동일한 시기에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탁금 도장은 후생성에서, '합사 제' 도장은 야스쿠니신사에서 합사 작업이 끝난 시점에 찍은 도장입니다. 다른 문구들도 각 목적에 따라 명부 위에 더해진 것이겠지요.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 담긴 여러 가지 기호와 정보들은 아직도 연구 대상입니다. 명부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겠지요. 위에서 살펴본 <그림 2>와 함께 <그림 3>, <그림 4>도 살펴보죠. 남방 제9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77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22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에 있던 제9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방 제10육군병원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에는 142명의 조선인 여성이 1945년 8월 30일과 31일에 수마트라섬 북부 메단의 제10육군병원에 편입되었다고 나와 있고요[4]. 각기 다른 육군병원에서 작성한 이들 명부에 실린 여성들의 직업은 간호부, 임간(臨看, 임시간호부), 용인(傭人, 최하급의 군속)등 저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명부의 형식은 비슷합니다. 일본군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의 공통 형식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하다 저는 2015년 12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재직 당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을 조사하면서 남방 제9육군병원의 조선인 여성들이 기록된 복원명부를 발굴했습니다. 그때 찾은 복원명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명부의 여백에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에 편입된 시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선지가 조선의 어느 지역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적지, 귀국할 곳의 역 이름, 병종, 관등급, 씨명, 생년월일 등의 칸이 있습니다. 위의 복원명부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인 여성들이 남방 제9육군병원의 임간(임시간호사) 신분에서 해용(解傭, 고용계약의 해지)된 시점이 1946년 5월 24일이라는 점입니다. 1946년 5월 24일은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을 탄 날짜이기도 합니다. 팔렘방조선인회명부를 정리한 강석재의 수첩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도네시아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자바섬이나 수마트라섬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한 뒤 1946년 5월 24일, 귀국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지요. 위의 복원명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들이 배를 타고 귀향하는 시기에 맞춰 현지의 일본군 사령관이 이들을 해용 처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일본군이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하게 된 이유는 「육군유수업무부령」, 「유수업무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육군유수업무부령」(칙령 제313호)과 「유수업무규정」 자료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자료와 홈페이지(http://www.jacar.go.jp/)에서 참고할 수 있다 ^ 浜田國雄, 「一 兵卒の綴った‘ジャワの 想い出’から」 , 『南五戰史』, 199쪽. ^ 국가기록원에서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위해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에서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를 전산화하였고, 2004년 3월부터 온라인으로 이 명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이하 진상조사보고서), 2009. 12,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