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성폭력(1) - 마르디옘, 스하나 씨 이야기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 게시일2021.05.18
  • 최종수정일2021.05.27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안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했을 때고, 두 번째는 위안소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이야기한 오늘입니다.

내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1997)라는 책의 머리말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피해자와 대화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할 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진심을 다해 답했다.

“당신이 위안부가 된 것은 결코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에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녀는 ‘일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란 말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말해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전쟁 지역과 점령지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위안소 이외에서도 다양한 성폭력을 자행했다. 인도네시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단기간에 승전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군정을 펼친 것은 1942년 3월부터이다. 마쓰우라 타카노리(松浦敬紀, 일본의 교육자-역자)가 엮은 『영원한 해군』(문화방송개발센터, 1978)에 수록된 「23살에 3천 명의 총지휘관」에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 총리(임기 1982년~1987년)가 주계 장교(군의 행정·회계를 담당하는 장교)로서 인도네시아에 부임하여 위안소를 설치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3살에 3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맡았다. 머지않아 원주민 여성을 덮치는 자와 노름에 빠지는 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나는 고심하여 위안소를 설치해준 적도 있다.”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운영을 감독한 것은 주계부(회계부)다. 1993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부 장관이 ‘일본 군정 하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 실태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 상담 등의 지원 활동을 하는 법률구조단(LBH, Lembaga Bantuan Hukum)은 이 성명을 환영하며 1993년 9월까지 피해자 등록 작업을 실시하였고 17,245명의 ‘로무샤(강제 징용 노동자)’와 420명의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 등록을 마쳤다. 이 중 특히 열정적으로 나선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등록된 일본군성폭력 피해자는 약 300명에 달했다.

 

1995년 8월, 헤이호(Heiho, 兵補) 협회에서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를 받았고 22,234명의 피해자가 등록되었다. 헤이호 협회는 일본 정부가 지급하지 않은 임금 청구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회원은 전(前) 헤이호와 그 유족까지 7만 2천명이며 인도네시아 각지에 134개 지부를 두고 있다. 나는 법률구조단과 헤이호 협회가 조사를 진행한 직후인 1995년~1996년에 두 조직의 도움을 받아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마르디옘 씨 이야기

 

마르디옘 씨는 법률구조단 욕야카르타 지부에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사실을 신고해 등록된 사람이고, 이후 반자르마신 교외의 뜰라왕(Telawang) 위안소에 함께 연행되었던 여성들을 설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마르디옘 씨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도 그가 10살 때 타계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 번은 음악단 공연에 출연한 적도 있다.

일본군이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반자르마신을 침공한 직후인 1942년 2월에서 5월까지 반자르마신의 초대 시장을 지낸 쇼겐지 칸고(正源寺寛吾)가 인솔하는 무리가 욕야카르타 인근에서 48명의 어린 여성을 모집했다. 당시 막 13살이 된 마르디옘도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가수인 렌지 씨로부터 ‘보르네오에 가서 함께 연기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수라바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수라바야에서 2주간 기다렸다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한 끝에 반자르마신에 도착했다.

함께 출발한 48명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머지 24명은 뜰라왕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높은 담장이 둘러진 요자형(凹字型) 건물의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방에 한 명씩 들여보냈으며 각자에겐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마르디옘의 방은 11번째 방이었고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모모예였다. 마르디옘이 끌려간 곳은 일본군의 규정에 따라 일본인 치카다(チカダ)가 인도네시아인 남성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위안소였다.

그녀는 위안소에 들어간 첫날부터 6명의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날의 선혈과 얼얼한 아픔, 몸에 빠끔히 뚫린 구멍은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았다.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군인의 ‘위안’을 강요당한 것이다.

끌려간 여성들은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는 군인을, 그 이후부터 밤 12시까지는 군속 대우 관리나 전화국 직원 등을 상대했고 위안소 이용 요금은 군인은 1시간에 2엔 50전, 군속은 3엔 50전, 숙박은 12엔 50전이었다. 이용 접수를 받는 벽에는 방 번호와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은 패가 일렬로 걸려 있었고 이용자는 그것을 보며 자신이 이용할 방을 지정했다. 요금과 맞바꾼 표와 위생 콘돔을 건네받은 이용자가 방에 들어가면 여성들은 이용자로부터 표를 받았다. 여성들은 하루가 끝나면 표의 장수를 위안소 관리인에게 확인받았다. 하지만 마르디옘은 치카다로부터 보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에 식사는 2번이었고 첫 반년 정도는 제대로 된 식사가 주어졌지만, 점점 부실해졌으며 양도 적어졌다.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자주 때렸다. 오후 5시가 되면 위안소의 이용자가 군인에서 사복 이용자로 바뀐다. 마르디옘은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싶었지만, 손님이 불렀다. 바로 가지 못하면 치카다에게 얻어맞았다.

토요일에는 군의관이 찾아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했고 매일 아침 8시에는 위생병이 검사를 했다. 정오부터 밤 12시까지 몸을 혹사당하고 뒷정리를 한 후에 취침한다. 이용객의 숙박이 있을 때는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마르디옘은 간혹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검사에 지각하는 날에도 치카다에게 구타를 당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24명 중 5명이 병에 걸려 위안소를 나가게 되었다. 마르디옘이 14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말랐던 마르디옘의 몸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치카다가 눈치채고 검진을 받게 했다. 임신 5개월이었다. 낙태약을 일주일간 복용했으나 효과가 없어 중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약도 수술 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인 여성 의사가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태아를 긁어 떼어냈다. 머리꼭지까지 달하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수술로 떼어낸 태아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남자 아이였다. 마르디옘 씨는 그 아이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마루디야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땅에 묻었다.

수술 이후 마르디옘 씨에게는 3개월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습으로 인하여 병원에서 위안소로 돌아왔다. 치카다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마르디옘 씨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때리고, 차고, 의식이 없어질 때까지 폭력을 가했다. 이는 ‘위안부’는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제재였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자 치카다는 마르디옘을 방으로 불러 몸을 만지고 강간했다. 그날부터 모모예로써의 임무가 재개되었다.

“11번 방 모모예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계속해서 그때의 끔찍했던 일들이 쳇바퀴처럼 맴돌아요.”

독실한 이슬람교 신도인 마르디옘 씨는 ‘기억의 쳇바퀴’를 ‘악마의 윤회’라고도 표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4살 때 마취 없이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던 고통 이상으로 내 아이를 죽이고 만 죄의 무거움에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파요.”

그런 마르디옘 씨가 남편의 유족 연금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수급자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일본의 매춘부!”

욕설을 퍼부은 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마르디옘 씨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일 것이다.

 

 

스하나 씨 이야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한 후 일본군은 반둥 치마히에 있던 광대한 규모의 네덜란드 군 기지를 사용했다. 치마히 심팡 거리에는 ‘8개의 집’이라고 불리는 장교용 주택이 있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때의 고급 양식 주택 8채 전부를 위안소로 사용했다. 15살이었던 스하나 씨는 그 중 4번째 집에 일 년 반 동안 갇혔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은 자바섬이다. 일본군은 자바섬에 남방군의 총 병참 기지를 두고 인적, 물적 자원의 보급 기지로 삼았다. 반둥에는 제16군의 야전 보급을 위한 보급 창고가 있었고 이곳에서 남방군 전체 군수품의 조달, 제조, 보급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남방군 야전 조병창(造兵廠, 무기, 병기를 만드는 곳-편집자 주)도 있었는데 남방군 전역에서 쓰이는 병기를 수리 및 제조했다. 치마히의 화물 창고는 군수품과 병기를 남방군 전역으로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하나 씨의 부모님은 치마히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노천 상인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시장에 나가고 집 앞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일본 병사 몇 명이 스하나 씨의 팔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자동차에 태웠다. 병사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불안했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곳은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심팡 거리의 번듯한 건물이었다. 스하나 씨가 들어간 방에는 이미 어린 여성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여성이 요리사, 두 명의 남성이 그 밖의 잡무를 맡았고 매주 토요일에 군인이 와서 이 세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헌병도 순찰하러 왔다.

스하나 씨가 끌려간 위안소에는 방이 세 개 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가 3개씩 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호명하면 여성들은 그 방에 들어가야 했다. 커튼조차도 치지 않은 3개의 침대에서 어린 여성들은 일본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 스하나 씨는 다른 이들이 자신과 똑같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스하나 씨는 끝까지 병사들에게 저항했다. 그때마다 매를 맞았다.

스하나 씨는 어느 날 세 명의 장교에게 교대로 호출되어 마중을 나온 차를 타고 장교 숙소로 향했다. 위안소에서 머무르던 스하나 씨는 일본군 주둔지에서 벗어나 강을 따라 있는 가리담 거리에 있던 네덜란드 군 장교용 주택으로 옮겨졌다. ‘8개의 집’과 비교하면 한 채당 대지 면적은 좁았지만, 주택 수는 훨씬 많았다.

그 곳에는 콘돔도 절대 쓰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는 이케다라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스하나 씨가 주저하면 얼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때렸다.

이케다가 스하나 씨의 자궁에 상처를 입힌 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 출혈도 시작되었다. 비정상적인 양의 출혈이 있었는데도 잠깐 쉴 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쓸모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중국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출혈이 있은 뒤로부터 꽤 많은 시일이 지난 후였다. 일 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스하나 씨가 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스하나 씨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녀의 숙모가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을 듣고 스하나 씨를 찾으러 일본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헌병대에도 갔다. 아버지가 군인에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을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상인 몇 명이 목격했다. 몇 번이나 내팽개쳐져도 아버지는 군인에게 매달렸다. 군인은 군용 칼집에서 칼을 꺼내 도망치려는 아버지의 등을 베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는 “딸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며 땅 위로 쓰러졌다. 아버지의 시신은 근처 사람들이 집까지 옮겨 주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데다가 남편까지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감당치 못할 큰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결국 극도로 쇠약해져 병으로 죽고 말았다.

부모님의 죽음, 특히 자신을 찾으러 온 아버지가 ‘8개의 집’ 근처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스하나 씨는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궁 출혈이 계속 이어졌다. 숙모가 차마 감당하지 못하자 숙부가 스하나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상처가 곪아 개복 수술로 자궁을 적출했다. 수술비는 부모님이 남긴 집을 팔아 마련했다. 정신착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됐으나 정신질환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자궁에 고름이 생겨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스하나 씨는 말했다.

스하나 씨와 같은 위안소에 있었던 에미 씨, 에마 씨, 오모 씨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네 명 모두 일본군이 철수한 후 줄곧 독신으로 생활해 왔다. 결혼 이야기가 있다가도 ‘일본의 여자’였다는 낙인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혼담은 깨졌다. 에미 씨의 경우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위안소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니 집은 불타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협박을 당해 에미 씨는 강제로 위안소로 끌려간 건데 ‘일본의 여자’가 되었다며 일본에 협력한 집안으로 내몰려 반일파 인도네시아인들이 불태운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연결되는 글

글쓴이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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