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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2부 -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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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적정선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첫째, ‘위안부’를 모집하고 위안소를 운영하는 데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하고(사실의 인정) 둘째, 과거의 일들은 국제법과 국내법에 비추어 불법행위라는 사실과 그것을 자행한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책임의 인정), 마지막으로 그 책임자가 과거의 불법행위에 상응하는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손해의 배상). '과거의 불법행위책임에 상응하는 배상책임'은 '경제적 배상'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피해자 할머니들은 경제적 배상으로 '위안부' 문제의 '사실과 책임인정' 단계가 흐지부지되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손해의 배상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죄와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왔습니다. 경제적 배상이 손해배상의 전부였다면, 그리고 경제적 배상이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면 '적정선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종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책임 있는 자의 사죄와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책임 인정 단계를 건너뛴 상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민간기금 등을 통하여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이를 거부해 왔던 것입니다.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의 발언을 빌어 외무성의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12.28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라고 태도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이 이루어질 당시 ‘위안부’ 문제는 피해보상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이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겠지요. 일본이 역사적 사실과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가장 큰 방어막이 되는 것이 한일청구권협정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도 한일청구권협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2015년에 이르러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가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장애를 넘어 일본이 회피하려 애써왔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것인지가 12.28 위안부 합의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교장관들의 기자회견문만으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을 기자회견 직후에 양국 정상이 나눈 전화 회담을 통해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일간의 전화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양국 정상의 전화 회담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아베총리는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2016년 1월 18일,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리하고 있던 민변 변호인단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대로 '2015. 12. 28. 오후 5시 48분부터 15분간 진행된 한일 정상 회담의 전화 회의록 중 일부'의 정보 공개를 청구했습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이다”라고 발언했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답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2016년 1월 27일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은 양국 정상의 전화회의록은 외교문서이자 대통령기록물이라는 이유로 비공개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3월 17일 변호인단은 대통령 비서실을 상대로 양국 정상 간의 전화 회의록 비공개 결정을 취소하라는 정보공개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송 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생산된 문서는 모두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 따라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문서의 비공개여부를 따져보기도 전에 기록물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변호인단은 여러 경로로 전화 회의록을 찾을 수 있는지 문의하고, 다른 기록에 내용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려 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기록물이라는 장벽에 막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변호인단이 대통령 비서실을 상대로 제기한 정보공개청구는 2019년 2월 22일, 기각되었습니다. 12. 28. 위안부 합의가 초래한 '위안부' 문제의 벽 '위안부' 한일합의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이 합의가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해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이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국내 참의원과 중의원들 앞에서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가 아니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참석한 일본 정부 대표는, “'위안부'에 관한 연구는 조작되었으며 성노예는 잘못된 개념”이라는 발언까지 했습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증언과 사료들로 인해 차마 '위안부' 문제를 당당히 부인할 수는 없었던 일본 정부가 12.28 합의 이후에는 어떠한 제어도 받지 않고 회피하고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아 버릴 수 있는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였습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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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3부 -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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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2016년 3월 27일, 피해자 할머니들은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해 외교부 장관을 피청구인으로 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했습니다. 헌법소원이란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경우에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자신의 기본권을 구제하여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저희 변호인단은, 양국 정부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았고,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는지의 여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에 헌법에 명시된 절차적 참여권과 알 권리를 침해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피해 당사자들이 앞으로 개인적인 손해배상청구를 할 경우, 일본 정부가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에, 사실상 할머니들의 손해 배상 청구권 행사를 막아버린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위헌의 소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변호인단은 12.28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재산권, 알 권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했다는 점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습니다. 헌법소원청구에 대해 외교부는, “12.28 ‘위안부’ 합의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조약에 해당하지 않고 합의의 내용 또한 ‘위안부’ 문제라는 외교적 현안에 대한 정부 간의 해결일 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거나 손해배상을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즉 외교부의 입장은, ‘12.28 합의는 공권력의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헌법 소원 대상은 아니라는 점인데요. 현재 우리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은 ‘공권력의 행사’만을 헌법소원청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에 공개변론 신청, 쟁점을 분명히 해야 그러나 변호인단에서는 헌법소원의 대상인 공권력의 행사 유무가 ‘조약’이라는 합의의 형식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2. 28. 위안부 합의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양국 정부였고, 양국 정부의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가 힘들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여전히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고 함에도,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설령 외교부의 주장대로 12. 28. 위안부 합의가 외교상의 합의로 피해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을 외교적으로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여전히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외교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외교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은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해 피해 사실을 알리고 피해 구제에 나설 것을 요청하는 외교적 노력뿐만 아니라 피해자들과 가해국간의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외교적 교섭을 통해 해결하도록 애쓰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를 ‘외교적 보호권’이라 부르는데요, 이미 지난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가 훼손된 것을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 회복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바가 있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부작위)가 우리 헌법정신에 위반된 것으로 판단(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했는데, 지금 ‘위안부’ 문제의 현황이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합의가 손해배상청구권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외교부의 답변은 형식적 논리로서, 피해자들이 처한 현재의 모순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책 또한 되지 못한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의견입니다. 지난 연말에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각하 결정을 하였습니다. 12.28. '위안부' 합의는 '조약'이 아니고, 법적 구속력이 없는 '약속'에 불과하니,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격권과 재산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죠. 결론만 놓고 보면 헌법재판소가 외교부의 주장을 받아들인 듯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12.28. 합의는 '위안부' 문제 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이나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의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과 우리나라 정부 또한 앞으로 할머니들의 피해구제를 위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12.28.합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 준 것이죠. 물론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요. 저희 변호인단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12.28.합의로 인해 발생한 불필요한 논쟁을 종결하고, 우리 사회가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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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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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자연스레 들어선 인권 변호사의 길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 독자를 위해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1973년에 변호사가 되었고, 인권 의식이 높았던 고(故) 카시와기 히로시(柏木博) 변호사 밑으로 들어가 많은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다른 분야에는 그리 의욕이 생기지 않았는데, 동기 변호사에게 스몬병 소송을 소개받고는 대규모의 약물 피해자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로 정신병원에서의 자의적 구금이나 학대 사건에 몰두했죠. 인권 변호사가 된 것은 받아온 교육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릿쿄대학이라는 미션스쿨 부속 중학교에 입학해서 쭉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대학은 이학부 물리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동기들은 주로 원자력 산업으로 진출했는데, 저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깨닫고 그 분야를 떠나면서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어버렸어요. 이후 인공지능 공학을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는데, 영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차선책으로 심리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가 밤에 영어 공부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쳐버렸죠. 그래서 취업 문제도 있고, 법학부 출신인 아버지께서 권하기도 해서 결국 법학부에 편입했습니다. 이후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발령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을 치렀습니다. 합격한 것은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984년 8월에 제네바의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처음으로 참가했습니다. 유엔 경험이 있던 선배 변호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단법인 자유인권협회(JCLU)를 거쳐 국제인권연맹(ILHR) 대표로 참가할 수 있었죠. 인권변호사가 되고 한동안은 정신의료 관련 인권 활동에 몰두했는데, 1987년 정신보건법이 성립되어 시행되는 것을 보고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활동하면서 거의 ‘번아웃’ 상태가 되었거든요. 영국에서는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대학원(LLM 코스)에서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본 내의 인권 보장을 위해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알게 된 ‘위안부’ 문제 Q. 1992년에 유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셨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개인통보제도 관련 협약 비준 등 인권 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일본에 도입하려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와 관련된 유엔 인권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법을 도입해 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1992년 2월 17일, 비정부기구인 국제교육개발(IED)을 대표하여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s)”라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유엔에 조정을 요청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노예 금지 위반 뿐만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강제근로협약 위반에 관한 조사를 요구한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는 어떻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되셨나요? 고(故)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 의원과 협력 관계가 있었는데, 1990년 경부터 모토오카 의원이 ‘위안부’ 문제에 힘을 쏟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관계 문헌을 많이 읽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조언을 해드리거나 모토오카 의원의 국회 질문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렬했던 반향, 반발이 더 큰 동기가 되다 Q. 유엔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당시의 반응은 어땠나요? 1992년 인권위원회(CHR)에서의 ‘성노예’ 발언은 제가 그때까지 유엔에서 했던 발언 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 정부가 먼저 환영의 발언을 해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 정부의 세자키 카쓰미(瀬崎克己) 대사가 이제까지 없었던 신중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발언 전 회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며 정보를 구하더군요. “제가 합니다”라고 답하니 굉장히 놀라워 했습니다. 발언자가 한국 측에서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모양입니다. 제 발언에 대한 당시의 응답은 최근의 일본 정부와는 완전히 달리, 성실했습니다. 세 번째로, 발언 직후 가장 유력한 유엔 NGO 중 하나인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스태프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여성지위위원회나 인권소위원회의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 쪽에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웠던 반응은 마이니치 신문을 제외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이 보인 감정적인 반발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인 특파원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렇게 극단적이고 심한 반응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도 이상해서 요즘의 넷 우익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법률가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는 “나도 자격을 갖춘 변호사”라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연구해서 법적 논쟁을 해보자고! 어느 쪽이 법적으로 옳은지 유엔이 판단해 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이후 제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고, 유엔 활동을 일회성의 발언으로 끝낼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1994년 마침내 ICJ 보고서가 나왔을 때에는 ‘나도 법률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1992년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얼마 후, 모토오카 의원을 통해 재일조선인 단체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고, WCC(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한국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부터도 지원 요청을 받았습니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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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인터뷰 일본의 양심, 도쓰카 에쓰로 국제 변호사 인터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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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회견을 통한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이후,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CHR, 현 인권이사회)에서 ‘성노예(Sex slave)’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 한 명의 일본인 변호사가 있었다. 자국 기자들로부터 가장 큰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보호 소위원회에서 전시 노예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국제 공론의 장에 올라왔다. 1942년 출생, 한국 나이로 올해 78세의 노법률가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일 양국과 세계를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는 등 국제 인권과 평화를 위한 법률 활동에 힘쓰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지난 8월 기림의 날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 양심 도쓰카 에쓰로 변호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제 해결에 다가가기 위해, 냉정하게 매진한 법률 연구 Q. 유엔에서 문제를 제기하실 때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성노예’라는 용어가 어떤 면에서 중요한가요? 유엔에서는 ‘국내법 위반’이나 ‘피해자가 걱정된다’ 등의 이유로는 발언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유엔 헌장이나 세계인권선언 등의 국제법 위반을 주장해야 합니다. 저는 할머니들의 체험담을 듣고 ‘내가 피해자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노예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성노예’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겁니다. 국제법에서 노예제가 일찍이 금지되었던 것은 법률가로서는 상식인데요, 많은 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까지 감수하며 노예제와 싸웠던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1926년 국제연맹이 노예금지협약을 채택했을 때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 제국은 비준을 약속했지만, 전쟁으로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금지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국제관습법이었다는 것은 세계적인 상식입니다. 일본 외에 그 사실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메이지 초기, 당시 일본 정부가 노예무역 금지를 이유로 페루 선박에 실려 가던 중국인 쿨리를 구출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이제 와서 노예제 금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유엔 국제인권위원회, 인권소위원회, 국제사법재판소, 유엔 아카데믹 임팩트(UNAI), 특별보고관도 결국 같은 판단을 내렸죠. Q.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활동하시면서, 가장 주목하거나 집중하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연구에 가장 집중했습니다.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법을 가르치셨던 로잘린 히긴스(Rosalyn Higgins) 선생님은 여성 최초로 국제법률가협회(ICJ,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소장이 되셨는데요, 제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법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를 만났군요!’ 하시고는 도서관에 가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조언은 이제까지 받았던 가르침 중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실제로 도서관에 가서 연구에 몰두했는데요.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것은 1) 범죄성(1936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판결 문서의 발견) 2) 젠더 문제(성 문제와 생활의 문제는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1]) 3) 화해의 본질(사실을 인정하고 성실한 사죄를 할 수 있다면 중대한 범죄도 용서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일본은 친구를 얻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국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Q.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 필리핀, 대만 등에서도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학순 씨는 국민기금의 대표와 만날 때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유엔에서 함께 활동한 황금주 씨와 강덕경 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 훌륭한 여성 활동가 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일본의 남성 신문기자 대부분은 반면교사였지만, 개중에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도 있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의 이토 요시아키(伊藤芳明)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 씨는 아사히 신문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제게 질타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런던정경대(LSE) 대학원에서 만났던 박원순(2019년 기준, 현 서울시장) 씨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공부한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를 생각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Q.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주장은 오류라는 의견서를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제출했습니다. ‘2015년 한일 합의에서 양국 간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확인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은 정부 간의 합의에 지나지 않으며 피해자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총리가 성의 있는 사죄는 커녕 ‘성노예’ 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밀 협의를 요청했다는 것인데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한일 합의는 무효(대세적 의무의 위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타 쓰토무(羽田孜) 총리가 할머니와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2]를 떠올려보면, 어떤 사죄가 할머니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겁니다. Q. ‘위안부’ 문제가 양국 간의 합의를 통해 종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 혹은 국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제가 여러 번 화해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만, 일본의 주류 정치인들은 모두 거부해 버렸습니다. 화해할 기회가 있었지만 도망친 겁니다. 한국 측과 타이밍이 어긋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인들, 특히 정치인들은 일본의 가해 사실을 알기 위해 더욱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제가 무지했다는 사실, 남성 중심 사회에 푹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위안부’ 문제를 통해 배우고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Q. 최근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계십니까?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관한 논의는 일본에서 금기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인식의 부족이나 역사 왜곡을 낳았고, 일본과 한국의 화해를 가로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변호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법률가들 역시 정보가 부족해 역사 인식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난 7년 간의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과 북한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한국·북한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동시에 스스로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도 매우 어렵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각주 ^ 도쓰카 에쓰로, 『ILO와 젠더(ILOとジェンダー:性差別のない社会へ)』, 日本評論社, 2006. 참조 ^ 山下英愛「金学順―半世紀の沈黙を破る」『ひとびとの精神史〈第8巻〉バブル崩壊―1990年代』2016年、岩波書店、19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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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자료해제 일본군'위안부' 관련 명부(名簿) 종류와 연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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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에 수록된 이들은 누구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과제로 국내에서 논의된 시점은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1988년)부터입니다.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되었고(1990년), 1991년 8월 14일엔 김학순의 증언 등이 이어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의 장이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연구주제도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양한 연구주제 중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에서 여러 명의 연구자가 명부 이야기를 다룬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2019)을 출판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위의 책을 참고해 주십시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부(名簿)와 명단(名單)이란 용어입니다. 이 두 용어는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명단은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표'이고, 명부는 '어떤 일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 주소, 직업 따위를 적어 놓은 장부'를 뜻합니다. 명단이 다소 개별적이고 단순한 이름표라면 명부는 이보다 더 체계적이고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입니다. 이 글에서는 '위안부' 관련 명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건 작성자들이 '위안부' 명부라는 표현을 일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이 발굴한 명부 중에서 '위안부' 명부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문건은 제한적입니다. 현재 발굴된 명부 중에 '위안부'만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부가 작성된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명부에 기록된 모든 여성을 '위안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의 패전후 조선으로 귀환할 당시에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 명부에는 귀환자 전원의 명단이 수록되었기에, 치밀한 검토과정 없이 이를 '위안부' 관련 명부라고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작성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명부를 '위안부' 관련 명부로 보고 소개합니다. '위안부' 관련 명부들은 일련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의도와 필요가 각기 달랐기에 명부의 명칭은 작성 주체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아래 표는 이 글에서 소개할 명부를 작성 주체와 장소, 그리고 시기를 중심으로 구분해 정리한 것입니다. 시기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작성된 명부와 일본 패전 뒤에 작성된 명부의 목적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고 : 연도를 기록한 명부(명단)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패전 전후에 만들어진 명단. 전쟁 중 지역별 전세 차이가 있어 버마, 필리핀 등지 명부는 공식적인 일본 항복 이전에 만들어짐. 1. 주더란 편(朱德蘭 編), 『대만 ‘위안부’ 조사와 연구 자료집(臺灣慰安婦調査と硏究資料集)』, 타이페이 중앙 연구원 종산 인문사회과학연구원(臺北中央硏究院中山人文社會科學硏究所),1999. 56쪽(수록자료는 타이완성문헌위원회에 소장된 타이완척식주식회사자료군에서 발굴한 자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편,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최종길 논문, 284쪽). 2.『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쑤즈량·천리페이, 윤명숙 논문)과 박정애 논문(「중국 저장성(折江省) 진화(金華)의 위안소와 조선인 '위안부'」, 『페미니즘연구』, 2017.4. 3. 민족문제연구소 사본 소장. 중국 상하이 명부에서는 피해자 한 명만 확인되었다 4. 위와 동일 5. 오키나와현립 도서관 소장자료. 강정숙,「일제 말기 오키나와 다이토(大東)제도의 조선인 군 위안부들」, 『한국민족운동사연구』4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4. 6.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장자료. RG 313 Entry 1352 Box 1967 7. 일로일로 환자요양소, [성병 검사 성적의 건 통보],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 편(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編),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 3권, 69쪽 8. 연합군작성 포로명부(NARA 소장자료, 한국 국가기록원 복사본 소장.) 9. 타이의 연합군 및 타이군에 의해 작성된 수용소 명부(타이국립기록원 소장) 10. 버마 미치나 인도 레도 수용소. 정진성편, 『일본군'위안부'관계미국자료』3, 127쪽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명부해제집 1』 231, 242-3. 원자료는 NARA 소장자료, 국사편찬위원회에 복사본 소장 12. 군속의 신상정보를 기록한 인사기록이다. 이 명부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이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popuptitle="유수명부" data-url="/taxonomy/term/420">유수명부와 복원명부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2009, 31쪽, 40쪽 13. 남방조선출신자명부 : 위 책, 44쪽 명부가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격 산야(三亞)방면행 특요원 명부<그림 1>[1]는 1939년 5월 일본 정부 국책회사인 타이완척식주식회사(이하 타이완척식)가 생산한 보고서[2] 자료 중의 일부입니다. 특요원은 바로 '위안부'를 지칭합니다. 특요원 명부를 통해 이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가 대부분 대만인, 일본인, 조선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부와 함께 나온 자료에선 도항자(渡航者, 배나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이동하는 자-편집자) 명부, 인명표라는 명칭도 쓰고 있습니다. 특요원 명부가 포함되어 있는 희귀한 도항자 명부인 셈이지요. 특요원 명부와 함께 발굴된 자료는 특히 중요한데 일본 해군과 총독부, 타이완척식, 타이완척식의 자회사인 후다이(福大)공사 등이 군 위안소 건축과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일본 해군은 총독부를 거쳐 타이완척식에 중국 하이난도(海南島)의 해군 위안소 건축과 군 '위안부' 동원을 요청합니다. 타이완척식은 자회사인 후다이공사를 통해 위안소 건축 완료 후 해군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로 하고 '위안부'로 삼을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게다가 이 자료 더미 속에는 당시 동원된 여성 수십 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파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도 위안소 경영을 위한 비용은 일본군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임시군사비'에서 나왔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오키나와 다이토 제도(大東諸島) 4중대 진중일지 <그림 2>에 수록된 조선인 여성의 수는 적지만, 이 명단이 기록된 진중일지에는 다이토 제도에 배치된 '위안부'들의 이름, 다이토 제도로 오기까지의 이동 경로, 그리고 '위안부'들이 전쟁 중에 처한 상황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진중일지는 패전이 임박하자 관련 기록물 소각을 명한 일본군 상부의 지시사항까지 적힌 상태로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당시 기록물 소각 명령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4중대 중대장의 결단 덕분이죠. 일본군이 이와 같은 기록물을 폐기하지 않았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진중일지와 유사한 명부들을 발굴해 '위안부' 피해 실태를 비롯한 더 많은 사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일본군은 '위안부' 명부를 작성하였을까 위에서 언급한 도항자 명부, 진중일지 외에도 여성들이 위안소 소재지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 일본군이 작성하거나 위안소 업자가 작성해 일본군에게 제출한 '위안부' 명부들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군정감부가 낸 「군정 규정집」 제3호[3](1943.11.11.)에는 '지방장관은 위안시설 및 여관영업자 명부와 가업부(稼業婦, '위안부'를 지칭-필자) 명부를 비치하고 이동이 있을 때마다 정리할 것', '가업부는 취업과 폐업 시에도 관할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위안부' 명부의 작성과 관리를 중시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군 기밀 보안 등의 이유로 전쟁터에서 일본군 관련 시설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본군이 여성들을 전쟁터에 동원한 목적은 군인의 성병 예방과 성욕 해결 등이었으므로 '위안부'로 동원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 검사를 하고 관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파나이섬 성병 검사 결과를 보고한 성병 검사 성적(검미성적)에 관한 건 통보(1942.6) <그림 3>라는 공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파나이섬의 환자요양소나 군정 의료기관에서는 지역 내 위안소 여성 수십 명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마다 성병 유무를 진단하여 그 결과를 한 명 한 명 정리해 상부 기관에 보고했습니다. 성병 검사 상태 보고가 목적이므로 이름, (나이), 병 상태 정도만 적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지역 관할 군 혹은 군정에서는 이를 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문은 파나이섬에서만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림3>은 발굴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본 측이 원본의 이름 부분을 검게 지워 지금으로서는 조선인 여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부의 발굴을 통해 이 지역 외에도 각지에서 성병 검사와 관련한 명부들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명부 분석을 통해 영웅으로 둔갑한 위안소 업자를 밝혀내다 중국에서 발굴된 저장성의 진화계림회 명부는 일본군에게 점령된 중국 진화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회가 만든 명부입니다. 이 명부는 1945년 1월에 진화현의 한 관리가 쟝이밍(將一嗚) 지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패전 이전의 기록이어서 당시 저장성 지역 상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화계림회 명부와 관련하여 제가 언급하고 싶은 지점은 '위안부'보다 위안소 업자들의 직종 변경이나 장소이동이 상당히 잦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귀환하는 조선인 남성들의 경력을 다룬 명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인력이용 방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위안소 업자였던 남성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사례입니다. 중국 상하이 한국부녀공제회 회장이었던 공돈은 '위안부' 들을 구제한 영웅으로 신문에 등장합니다(「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여성들이 상해 동포들에게 구제」, 『서울신문』, 1946.5.12.). 하지만 그는 1942년에는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였음이 명부(1942, 『재지반도인인명록』[4])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앞으로의 명부 연구가 만들어낼 가능성 필리핀·축제도(Chuuk Islands, 통칭 트럭섬)·일본 오키나와·버마·타이의 연합군이 작성한 명부 중 필리핀 포로수용소 명부<그림4>는 비교적 자세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 신상만이 아니라 수용소 간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에 비해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축제도 명부, 일본 오키나와 명부는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버마, 타이 명부에는 이름만 있을 뿐 주소도 없고, 이름도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적인 명부를 도대체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구명줄이 있습니다. 바로 이미 발간된 피해자들의 증언집입니다. 한국정신대연구회(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지역단체 등에서 만든 증언집만 10권 이상입니다. 북측에서 만든 증언집도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집의 내용에 기초하여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과거 점에 불과하던 명부 속 피해자들의 존재가 선과 면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존재로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강화해야 단순하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다면성을 이해하고 해결 방향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명부를 주로 한국인 생존자를 찾고, 당시 일본군의 책임을 묻는 용도에 국한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자료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명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국내외에 발굴되어 있기 때문이죠.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을 토대로 ▲명부를 작성한 일본군, ▲연합군, ▲명부 작성에 관여한 현지인의 다양한 역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민족별 대응 방식의 차이, ▲위안소 내 힘의 관계, ▲젠더 문제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명부 연구에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책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2019)에서 좀더 자세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조선인 여성들의 정보가 기록된 유수(留守)명부와 복원명부에 대해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Credit 편집 : 현승인, 변지은 교정/교열 : 금혜지 감수 : 윤명숙, 김소라 일러스트 : 백정미 각주 ^ 타이완에서 하이난도(海南島)으로 건너간 여성명단 중 일부.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78쪽(최종길, 도항자 인명표)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덧칠된 기록에서 찾은 이름들』, 2019, 75~76쪽. 타이완척식의 사업과장이 총독부 임시 남지조사국 이사장에게 보낸 1939년 5월 9일자 보고서는 “해군무관실이 귀국(타이완총독부-인용자)을 통해 조회한 건에 관하여 별지대로 수배를 마치”고 “2. 특요원(싼야 방면행) ㈎ 10인 1조(5월 23일 金令丸로 출항 예정) ㈏15인 1조(현재 수배 중)”를 하이난도로 도항시킬 예정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타이완척식의 자료에는 '위안부' 관련 명부가 4개 존재한다. ^ 마라이군정감(馬來軍政監部), 군정규정집(軍政規定集) 3호: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國民基金), 『 정부조사(政府調査)「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관계자료집성(關係資料集成)3』, 龍溪書舍, 1997, 25쪽. ^ 백천수남(白川秀男) 편, 『재지반도인명록(在支半島人名錄)』, 백천야행(白川洋行), 1941, 1942. 황선익, 「해방 후 중국 上海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집단수용과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54, 2016.5, 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