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로 그치지 말고, 현재의 내 문제로 바라봐 주세요 -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활동가 백선행 인터뷰

백선행(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부설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 팀장.

  • 게시일2019.11.18
  • 최종수정일2023.09.21
대구 경상감영길,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있다. 192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의 형태의 외관, 문 옆에는 “NO 아베” 네 글자가 작지만 선명하게 걸려있다. “내가 죽어도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유언과 유산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완성된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이다. 대구·경북 지역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단법인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부설 역사관으로 2015년 개관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다양한 전시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만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라는 형태가 되면 고민은 더 깊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도 문옥주와 심달연과 김순악의 제각기 달랐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와 전 세계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현실인 이 문제를 계속해서 ‘전시’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서늘한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희움역사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백선행 팀장을 만났다. 희움역사관이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의 삶과 고민까지 이야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백선행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팀장

 

대학생 자원활동가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책임지는 상근활동가가 되기까지 


Q. 안녕하세요. 먼저 웹진<결> 독자 여러분께 짧은 소개 부탁드려요.

네, 저는 희움일본군‘위안부’ 역사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백선행입니다. 


Q. 대학생 때부터 시민모임에서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계기는 정말 사소한데요, 한·중·일 청년이 모여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어요. 중국어 전공이거든요. 근데 가서 보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와 함께 하는 평화 인권 캠프였어요. 2007년에 시민모임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중국 청년은 한 명도 없는 게 반전이었죠. (웃음)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관심은 있었던 것 같아요. 17살 때 도서관에 갔다가 『천황의 군대와 성노예』(미네기시 겐타로, 박옥순 옮김, 당대, 2001)라는 책을 봤어요. 제목이 자극적이잖아요. 그걸 읽고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또렷이 나요. 학교에서‘위안부’ 문제를 배우긴 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이것이 제도적,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전쟁범죄라는 생각을 처음 했죠. 그러고 나서 잊고 살다가 캠프로 시민모임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자원 활동을 쭉 하고, 아르바이트 시작하면서 후원도 시작하고, 졸업하고 다른 일 조금 하다가 다시 일을 찾을 때 여기서 활동 제안을 해주셔서 상근을 시작했어요. 


Q. 자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또래 자원활동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어요. 할머니들 재가방문도 함께 하고, 행사나 집회도 같이하면서 친밀해지는 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의 존재가 처음부터 와닿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재가방문도 열심히 즐겁게 다녔지만, 생존자를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시민모임에서 하는 조직사업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Q. 상근활동가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고민은 많았어요. 이쪽을 커리어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인연이 닿아서 시작하게 됐는데,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제 몸에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2015년 7월 말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 역사관 개관 직전이라 닥치는 대로 업무를 하게 됐죠. 전시를 만들고 홍보하고 교육하면서 역사관의 모든 활동이 내 일이구나,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쭉 역사관 업무를 맡고 있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Q. 지금 기획전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어요. 저희는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존자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고, 이 부분이 차별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났던 생존자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2년에 한 번씩 진행할 계획으로 2016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1 옥주씨,>전을 했는데, 2019년이 되어서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을 열게 됐어요. 

왜 김순악인가, 많이들 물어보세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 근현대를 조망하는 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알아 온 대구 경북 할매들 중에서 김순악이라는 사람의 삶이 일본군‘위안부’, 여순 항쟁, 기지촌, 한국전쟁, 베트남전까지 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적이 없더라고요.

전체 기획은 올해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에서 했던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 총괄하신 문호경 님이 맡아 주셨는데, 저희는 김순악의 그 파란만장하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하지 않은 일생을 전하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일대기 『일본군 ‘위안부’ 김순악 :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김선님, 일일사, 2008)도 발간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글자를 모르잖아요. 그래서 김순악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자,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고 기획했어요. 설령 그게 관람객에게는 가닥이 안 잡히고 난해하게 느껴지더라도요. 


Q. 전시장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벽에 꽃무늬도 있고요. 

시민모임이 찾아갔던 김순악의 방이에요.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알코올 중독 같은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이웃 주민에게 발견돼 영구임대 아파트로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처음 입주했을 때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누우셨대요. 이런 네모반듯하고 따뜻한 방을 생전 처음 가져봤다면서. 그 방 그대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그 벽지와 김순악이 남긴 물건들, 남긴 말이 있고 멀리서 김순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죠. 


Q. 전시는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번째 <우째 살았는가 싶으고> 파트는 김순악이 그의 방에서 저희 활동가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에요. 그래서 피해 당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가 가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던 당신의 심정,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들부터 시작돼요.

두 번째 섹션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는 해방 이후 복잡하고 험난했던 귀향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코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사람과 만나서 말씀하시는 걸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분은 굳이 또 재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 전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순악할매 어떻게 지내세요> 섹션은 김순악이 시민모임을 만난 이후, 시민모임의 활동가, 회원들이 할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김순악의 공적 활동들을 엮었어요. 


Q. 전시 해설을 직접 하고 계시죠.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단체 관람객이 가장 많고, 최근에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르신 팀들도 오고 계세요. 10인 이상 단체는 누구나 해설을 신청하실 수 있는데요, 해설을 듣고 관람하는 분들이랑 그냥 보시는 분들이랑 확실히 반응은 조금 달라요. 아무래도 저희가 전문 학예 팀이 갖춰지지 않아서 객관성이나 전문성 같은 것들은 신경 쓰여요. 그래도 이곳의 전시는 해결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할머니를 직접 만나 왔고 문제를 늘 고민하는 활동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남다른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시 포스터

그저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그나마 속이 조금 시원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감도 함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展> 전시 소개 문구 중 

 


부족하더라도,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Q. 기획전시는 계속 새롭게 준비하실 계획인가요?

지금 두 가지 시리즈를 가져가고 있어요. 하나는 대구 경북 생존자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서 그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시리즈, 또 하나는 2017년 동티모르로 시작한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이에요. 교대로 하고 있는데요, 둘 다 이야기하고픈 것은 인식의 확장이에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로 많이 인식되고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 각국에 피해자가 있고, 양상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해결 운동은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아시아> 시리즈에서 하고 싶어요. <당신> 시리즈에서는 생존자 한 분 한 분이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저희가 만나왔던 ‘당신들’을 추모하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삶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서 겪었던 문제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Q. 1층에서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함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역시 외부에서 아트 디렉터와 큐레이터 팀을 모셔서 기획했고, 개관을 세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고민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시민모임의 소장자료를 통해 전시가 만들어지는데, 객관적으로 일본군‘위안부’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가진 역사, 생존자를 만나면서 남긴 고유한 기록도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저희 소장자료 중 “돌격 1번[1]” 을 전시할지 말지,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결국 전시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고,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 전시품이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품 자체로 분명히 의미가 있더라도 충분히 잘 해석해서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전시하지 않는 것도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 방향에 대한 평가는 나뉠 수 있을 거예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피해 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보여달라는 피드백도 계속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게 가장 진정성 있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이야기라는 걸 전시를 준비하고 관람객을 만나면서 저희도 깨닫게 됐거든요. 

준비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되게 아쉬울 때도 있어요. 자료가 부족할 때도 많고 디자인이 아쉬울 때도 있고요.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고 있습니다. 준비할 때 고민은 많지만, 막상 펼쳐 놓으면 전시를 채워주시는 건 관람객이더라고요. 예상 못 한 반응도 많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는 경우도 있고요. 몇 번의 전시 후에 ‘결국 모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건 관람객 여러분이구나, 자신감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해 봐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관람객


Q. 이곳에서 전시를 관람한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다시 찾아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관람하시지만, 적극적으로 해결 운동에 참여하시는 팀들도 꽤 있어요. 준비를 많이 하는 팀들은 사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귀향>(조정래, 2016), <허스토리>(민규동, 2018)나 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 2010) 등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여기 오셔서 관람하면서 해설 듣고, 외부 강연까지 요청하셔서 듣고, 그리고 희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해 가셔서 다시 판매하거나, 아예 직접 물품을 제작해서 판매 수익을 모아 여기에 기부금 전달식까지 하러 오세요. 청소년들이 해결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는 과정에 저희는 교육 공간으로 끼워져 있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예전에는 문제 해결 운동이 단체 주도였다면, 최근에는 양상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시민이 주체가 되었고, 지금은 더 나아가서 청소년이 스스로 계획해서 실천해요. 그 가운데서 이제 저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Q. 유독 마음에 남았던 사례가 있나요? 

사실 여러 팀이 기억나서, 한 팀만 언급하기 어렵네요. 전교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플리마켓을 열어서 스스로 기부금을 모으고 저희한테 와서 그동안의 활동을 다 설명해 주더라고요. 동전으로 한가득이었는데 다 세어서 기부금 영수증을 드렸었죠. 고등학생들이 기금을 모아오는 경우는 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어서 놀랐어요.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6학년이 다섯 개 반인데 다 같이 오겠다고 신청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어느 반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수업을 하고 『꽃할머니』 책을 같이 읽었는데,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희움역사관 견학을 하러 가고 싶다고 제안을 해서 허락을 받았대요. 그 소식을 다른 반 학생이 듣고 서로서로 ‘우리도 가자’ 해서 결국 학년 전체가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현장에서는 좀 힘들긴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새삼 깨달아요. 


Q. 시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서 전시해설 할 때 항상 ‘희망‘을 얘기해요. 아직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공감과 분노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해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은 희망이라고요. 성폭력 문제에서 희망을 얘기하면 되게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것처럼 묘사된 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해보면 전쟁과 성폭력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잖아요.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증언자고, 인권 운동가고, 어떤 분들은 예술가가 되셨고요. 해결 운동도 당사자가 힘있게 앞서서 견인해왔기 때문에 시민들도 함께 해 온 거고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큰 희망이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동참해 달라고 이야기해요. 여기 이름도 ‘희움‘, ‘희망을 모아 피움‘이잖아요. 제발 분노로 그치지 말아 달라고요. 연민이나 동정, 분노도 타자화잖아요. 같이 주체로 행동해 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이미 주체가 된 분들도 많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민족의 딸들이 당한 고난과 수치‘로 묘사되는 것에 매우 큰 의문을 품고 있어요. 이걸 현재화하려면 결국 여성 인권, 여성 폭력에 대한 문제로 확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사관이 관람객에게 이 문제를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자기화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래서 이곳의 재현 방식도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분노에 갇히지 말고, 너무 비관에 젖지 않게,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밝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이런 합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관람객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Q. 외국인 관람객도 계신가요? 

몇 달 전부터 통계를 내 보고 있는데 7~8% 정도로 계속 오고 계세요. 절반 정도는 영어를 사용하시고,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해요. 일본어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해결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해 오던 분들이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지금 외국어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 그걸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적극적인 분들은 검색해 가면서 보고 질문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는 아주 아쉬운 부분이죠.


Q. 외국인 관람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문화권, 언어권별로 인식의 토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사실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오신 분들은 한국 분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를 쓰시는 분들은 문제 인식의 기반이 분명히 달라요. 일본 분들은 스스로 가해 역사라고 인정하거나, 긴가민가하지만 보면서 물어보시는 편이고 다른 언어권 분들은 인식이 명백하게 인권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손성숙 선생님도 인터뷰에서 미국 교육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딱 그게 느껴져요. 또 중국 내륙에서 온 관람객과 대만에서 온 관람객의 결이 달라요. 중국에서 온 분들은 확실히 이 문제를 민족주의, 국가 관계에서 바라보시다가 중일 관계로 연결하면서 화를 내시기도 해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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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2 김순악> 전 단체관람 신청하기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
이후를 고민하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사실 어떤 시민사회 이슈보다도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이슈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게 정말 대단한 것 같고, 무엇보다 생존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견인해 오셨기 때문에 이 운동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점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온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제 저희가 당사자를 만나는 마지막 세대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후에 ‘포스트 당사자’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활동가이고 연구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시콜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록의 역할이 뭔지, 사람들이 뭘 기대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Q. 활동가로 일하는 게 몸에 맞는 느낌이라고 하셨지만 고민도 많으시네요. 

생존자가 없을 때에도 이 운동이 이전만큼 주목받을 수 있을까, 지금만큼의 물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죠.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지, 그 재현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금만큼 많을지… 지금이 ‘위안부’ 운동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커요. 또 현실적으로 활동가들은 항상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데, 역량 강화의 기회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도 있고요. 


Q. 앞으로 어떤 활동가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사실 긴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 현장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매일 느껴요.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실 수도 있고… 다만 기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까,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달리다가 소진될 때 같이 공감하고 고민하는 활동가들, 연구소처럼 이 분야에 매진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면 보람을 느끼면서 또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힘을 내게 돼요. 


지금 나의 문제로,
순악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Q. 저희 웹진 <결>에 기대하시는 점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도 궁금합니다. 

처음 <결>을 봤을 때 “너무 읽을 맛 난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기존 매체나 미디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심지어 세련되게 써주셔서. 쭉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넓은 분야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결>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든 없으신 분이든,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어요. 100년 전에 나랑 상관없었던 여성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 바라보면 우리 책임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는 기념 사업과 할머님들에 대한 지원 사업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법적인 해결을 위해서도 더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 남겨주세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 - 두번째 이야기 김순악> 전시는 2020년까지 이어져요. 오셔서 순악 씨를 만나주세요. 

제가 활동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우습지만 순악 씨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처음 갔던 평화 인권 캠프에서 처음 만난 ‘위안부’ 생존자가 김순악이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 했던 곳도 지금 김순악 할머니를 모신 영천 은해사고요. 저희처럼 순악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순악 씨 좀 만나러 와주세요.

 

각주

  1. ^ 도쓰게키이치반(突擊一番). 당시 ‘삿쿠’라고 불렸다. 일본제국 군인에게 군수품으로 지급된 군용 콘돔으로 위안소에서 사용되었다. 
글쓴이 백선행

2007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자원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상근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위안부' 문제의 기록과 재현을 고민하고 있다. 활동가가 만나온 생존자와 시민들의 이야기를 엮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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