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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들의 법정 1부 -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019년 논평 그녀들의 법정 1부 -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12.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1부. 단 800자의 기자합의문이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2부. 합의 이후, 양국 정상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3부. 12.28 합의는 헌법소원청구 대상이 아니다?   ‘12. 28. 한일합의’ 이후, 그녀들의 법정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2018)가 보여주듯이, '위안부'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전개해 왔습니다. 12.28 한일합의 이후에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인 소송만 해도 5건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당사자가 된 소송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한 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 두 건, 그리고 소송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이 관련된 소송으로 두 건의 정보공개청구소송이 있습니다. 1991년 12월 6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이래 피해자 할머니들은 여러 건의 소송을 일본법원에 제기해 왔지만,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본법원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피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모든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판단하였죠. 피해자 할머니들이 지금 한국의 법정에 서게 되기까지 겪은 일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글에서는 2015년 12월 28일 이른바 ‘12.28 한일합의’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송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과거의 법정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제기한 소송의 변호인단 중 한 사람으로, 법정에서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리하여 원고의 자리에 서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분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지요. 따라서 이 글은 피해자 할머니 입장에서의 부당함과 소송을 제기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에서의 절차와 정치한 법리 등 좀 더 상세한 법률적 정보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부족한 글이 될 겁니다. 또,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는 점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800자의 ‘위안부 합의’ 기자회견문, 이것으로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 해결을 담을 수 있는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12.28 한일합의 이후 가장 먼저 제기한 소송은 정보공개청구소송입니다. 한일합의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1월 18일 대통령비서실에 정보공개청구를 했고, 2016년 2월 1일에는 외교부에도 정보공개청구를 했습니다. 대통령비서실과 외교부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하여 각각 1월 27과 2월 15일에 모두 비공개 결정을 내렸고, 이 비공개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정보를, 왜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을까요? 한일합의는 양국 외교장관이 국내외 기자를 불러 모아 기자회견을 하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는데요, 양국 외교장관이 번갈아 발표한 합의 내용은 통역까지 포함하여 약 15분 분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자회견문이 그대로 ‘위안부 합의’라는 타이틀로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자회견문은 약 350자, 일본의 것은 약 450자 정도로 합하면 약 800자 정도였는데요. 그 800자가 30년 가까이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들이 싸워 온 이 문제에 대한 ‘위안부 합의’라는 것이었죠. 그것 말고는 어떠한 합의문이나 문서도 발표되지 않았고, 실제로 발표문 이상의 그 어떤 내용도 문서로 추가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문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회견으로 지금까지의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고 따라서 우리 정부는 앞으로 일본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 합의가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자회견문만으로 부족했던, 명확히 밝혀야 하는 내용을 묻다 저희 법률가들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인지, ‘법적 책임’의 기본요소인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요구한 것은 일본에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 즉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식민통치 체제를 이용하여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성노예 생활 강요라는 불법행위를 하였으므로 그 불법행위로 인한 할머니들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것입니다. 이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첫 단추가 바로 일본이 ‘식민통치 체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에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요. 하지만 기자회견문만으로는 일본이 ‘사실 인정’을 하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 일본이 인정해 왔던 사실보다도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위안부’ 합의라고 하는 저 기자회견문의 내용을 분명히 밝혀야만 했습니다.   외교부 회의록 공개 요청,   합의 과정에서 ‘강제연행’을 어떻게 다루었나 시간순으로는 대통령비서실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것이 먼저이지만, 외교부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외교부에 공개를 요구한 정보는 어떤 과정에서 합의문에 ‘강제연행’이 아니라 ‘군의 관여’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하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을 뿐, 위안소로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끌어오고, 끌려온 ‘위안부’를 상대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두려운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강제모집과 성노예 강요 등의 책임을 모두 민간에 떠넘기거나 아예 그건 모두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 할머니들은 일본에게 ‘군의 관여’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강제적으로 위안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부 장관이 합의문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강제연행’ 표현 및 그 사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공개를 요구했습니다. 양국이 ‘군의 관여’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그 의미에 관해 협의한 문서와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했는지 여부를 협의한 문서 등을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법원은 국가 간의 합의나 조약의 내용이 불분명할 경우 회의록 등을 통해서 그 내용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한 적이 이미 있었거든요. 그러나 외교부는 비공개 협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일 간의 협의 내용은 ‘외교문서’이므로 공개대상정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서는 ‘외교 관계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비공개 정보로 정하고 있으니 그 규정을 비공개 사유로 든 것이죠. 외교문서가 공개되면 그로 인해 일본과의 신뢰 관계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국제관행에도 어긋난다고도 주장하였습니다. 외교부는 특히 외교에 관한 사항은 고도로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다른 정보보다도 더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한편으로는 협의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 의사를 반영했으며 할머니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시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3심에서는, 외교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가 함부로 침해되지 않기를 이 정보공개청구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1심에서는 외교문서라 해도 일률적으로 모두 비공개정보라고 할 수는 없고 외교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개로 인해 국익을 현저히 해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판단해서 공개하라고 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외교부의 주장대로 이 정보는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라고 판단하여 비공개를 정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외교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있습니다. 항소심은 ‘공개가 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현저히 해하여진다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았죠. 대법원이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를 공개한다고 해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외교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법적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되니까요. 한일합의 이후 일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군의 관여라는 것은 위안소의 설치에 관한 것뿐, ‘강제연행은 없었다’, ‘강제연행했다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이다’라고 연이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사안은 ‘성노예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문제일 뿐’이라며 성노예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서글픈 상황 속에서 ‘위안부’ 관련 소송들이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낼지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대통령비서실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소송과 헌법소원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류광옥

  • 김학순을 추억하다 3 -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3 -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들이 죽고 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김학순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항상 말씀하시던 이 말은 내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피해자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신 지금, 이 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 혹은 UN 인권기구 등에서 ''위안부'가 성노예는 아니었다.',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지금도 전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처음 일본에 오셨을 때, 당시 탔던 일본항공의 학 마크가 일장기로 보여 무서웠다고 한다.  2003년, 도쿄도교육위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학교 행사에서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교사는 처벌했다. 의무화 이후 첫 졸업식 때, 처분이 두려워 주저하는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나는 차마 기미가요를 부를 수 없었다. 도쿄에서의 할머니들의 숙소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있는 와세다호시엔(早稲田奉仕園)​이었다. 나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숙소 및 재판소에서 할머니들을 도왔다. 한국어를 몰라 김학순 할머니가 '물 주세요' 하시면 우유를 갖다 드리는 등의 실수가 잦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토마토는 좋아하셨던 것이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큰 방에 모여 함께 잠을 잤던 할머니들이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일 때도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했다. 침착한 성격과 더불어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고 나섰다는 점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강순애 할머니는 “학순 언니, 학순 언니” 하며 김학순 할머니를 잘 따르셨고, 김학순 할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황금주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기르던 거북이를 이어받아 길렀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신을 만나러 온 많은 지원 봉사자를 누구나 똑같이 대해주셨다. 김학순 할머니께 '기념으로 사인해 주세요' 하고 소장을 내밀면, 할머니는 표지 뒷면에 당신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써주셨다. 친한 일본인 지원 봉사자들과 선물을 주고받던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김학순 할머니는 모든 봉사자와 담담하게 교제하셨고, 그 자리에 있던 봉사자 전원에게 장롱에 다는 장식용 노리개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가져와 식사하실 때 반찬으로 드시던 김치 중 김학순 할머니가 가져오셨던 도라지 김치는 처음 먹어본 맛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994년, 전후 50년을 앞두고 국회 앞에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2주간의 단식투쟁을 했을 때, 김학순 할머니는 새하얀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장구를 치셨다. 강순애 할머니의 꽹과리 연주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시고, 독주를 하기도 하셨다. 그 자리에 도착한 자원봉사자들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자원 봉사자들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김학순 할머니가 혹독한 단식투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강한 의지로 이겨냈다. 1997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동료들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할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왔었다. 병세는 상당히 악화되어 할머니는 호흡 장치를 하신 채로 주무시고 계셨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뵐 수 있어 조금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식투쟁이 몸에 무리를 준 듯하다. 단식투쟁까지 한 결과가 아시아여성기금 뿐이고, 여성기금을 받느냐 마느냐로 할머니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이 할머니의 죽음을 앞당긴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는 망향의 동산에 있다. 연고가 없는 할머니를 위해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의 공동대표이자 유족인 이희자 씨가 할머니 생전에 묘자리를 마련하는데 힘을 써주셨다. 덕분에 이희자 씨 부친의 묘 앞에 김학순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의 묫자리를 나란히 마련할 수 있었다. 이희자 씨는 김학순 할머니의 기일마다 추도식을 열었다. 5주기에는 일본인 봉사자들과 함께 건강했던 황금주 할머니도 참석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황금주 할머니도 김학순 할머니의 옆에 잠들어 계신다. 이희자 씨는 지금도 두 할머니의 기일에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묘 앞에는, 할머니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무궁화꽃이 올려져 있다.  

    야스다 치세 (保田千世)

  • 김학순을 추억하다 2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2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  )했을 때, 많은 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이 할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썼다. '군위안부'의 존재는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책 『종군위안부』나 시로타 스즈코씨의 호소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 조선인 피해자들의 모습은 미지의 것이었다. 1970년대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에서도 감독 야마타니 테츠오(山谷哲夫)가 서울에서 피해자들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시로타 스즈코 씨를 알게 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TBS 라디오에서, 시로타 스즈코 씨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팔라우를 떠날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비는 팔라우의 산속에 숨어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런 몸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울던 여성들의 눈물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그녀는, 존재가 잊혀지고 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녀의 바람은 방송 이후에 실현되어, 치바 현 카니타 부인의 마을에 '아아, 종군위안부'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이 잊혀진 여성들 대부분이 한국, 조선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비참한 경험들이나 위안소의 실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과 그녀를 뒤따라 증언한 할머니들 덕분이었다. 일본에서도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투쟁에 공감하여 재판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 노조 여성부 일부 회원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쓰는 모임을 결성하여 재판을 지원하고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재판의 원고인 김학순 및 다른 할머니들과는 숙소 생활을 도와드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던 숙소에서 식사 시간이면 할머니들은 큰 주전자에 찌개를 끓이셨고, 마지막에 황금주 할머니가 간을 보면 완성.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는 할머니들의 리더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는 열성적인 팬도 있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였던 나는 우연히 쇼와 천황이 사용하는 타올을 미쓰비시 백화점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들의 숙소로 가는 도중 이케부쿠로의 미쓰비시 백화점에 들러 그 수건을 몇 장 사서 선물로 들고 갔다. 할머니들께 천황이 쓰는 수건이라고 설명해 드리자, 김학순 할머니가 천천히 일어서시더니 '히로히토 녀석! 천황이 다 뭐냐!' 하고 소리치며 하얀 수건 포장을 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도 각자의 수건을 밟으며, 함께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나는 김학순 할머니의 의외로 장난스러운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할머니들의 뜨거운 투지에 압도되어버렸다.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에는 학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고, 참가자들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을이라 태풍도 오고 춥기도 해서 고령의 할머니들께는 혹독한 싸움이었다. 나는 할머니들을 격려하러 오는 국회의원들이 사비를 털어 할머니들을 가까운 호텔에 모시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강순녀 할머니가 굿을 한 이후, 갑자기 김학순 할머니가 '저도 하겠습니다' 하면서 장구채를 손에 쥐었다. 노오랗게 빛나는 은행잎 아래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씩, 미소를 짓고나서 천천히 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꽃과 같은 웃음이라는 말은 바로 할머니의 미소를 가리키는 듯 주변이 갑자기 밝아졌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머니의 장구 소리에 끌려들어 갔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와, 하고 경탄했고, 나 역시 '훈련받은 프로는 다르구나' 하고 감동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연주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전후 보상 운동에 참가한 나에게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나는 재판을 위한 증거 확보를 위해 김학순 할머니를 도운 적도 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연행된 '칵카현 철벽진(カッカ県ゼッペキ鎭)' 을 중국 지명집에서 찾아보았지만, 중국은 시 아래에 현이 있고, 그 아래에 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중국 지리에는 문외한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히 "'후오루(獲鹿)'를 '칵카현(カッカ県)'이라고 불렀겠지" 하고 말했지만, 그 현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진은 없었고, 허베이성 석가장의 주변에서 트럭으로 갔을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그 외에 허베이성에는 트럭으로 갈 만한 거리에 '허젠현(河間)'이라는 곳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비슷한 이름의 진은 없었다. '훠자현(獲嘉)'은 있어도 허난성에서 너무 멀었다. 결국 유감스럽게도 지명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의 위안소를 탈출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마지막으로 프랑스 조계의 정안사로에 정착하여 전당포를 열었고, 이후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할머니는 훙커우 공원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고 한다. 훙커우 공원은 윤봉길이 상해파견군 총사령관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두 명을 암살한 곳이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구 주석의 연설로 그곳은 광복과 독립의 열기로 가득 차, 그 자리에 있던 김학순 할머니 부부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할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백범일지』(『白凡逸志』, 1973)를 가져가니, 할머니는 일본어로 된 그 책을 손에 꼭 쥐고 계셨다.  한편 우리가 지원하고 있던 재판도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에 의해 크게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 재판의 주임변호사가 국민기금을 추진하여 변호사로서 입장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 되었고, 한국 단체를 지원하고 있던 일본 단체도 국민기금 추진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우리 모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회원 사이에 의견이 어긋나 해산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패배감에 서울에 연 2회 정도 할머니들을 뵈러 가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와 만날 기회도 없어졌다. 1997년 어느 날, 김학순 할머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변기자 씨를 만나, 할머니가 서울의 이화여자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말하길, 자신은 조선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입국할 수 없으니 만약 서울에 간다면 병문안을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11월에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김학순 할머니를 찾아갔다. 벽에는 아이들이 보낸 편지들이 붙어있었고, 할머니는 매우 건강해 보여서 안심했다.  그러나 12월이 되자 변기자 씨로부터 김학순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친구와 둘이서 서울의 병원에 갔다. 마침 크리스마스 전이어서, 병실의 문에는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일본에서 왔다고 하자, 간병인이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우리는 그렇게 세게 흔들어도 괜찮을까 걱정했다. 눈을 뜬 할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했다. 간병인이 사정을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기뻐해 주셨다.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할머니께 물어봤으면 좋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할머니의 몹시 쇠약해진 모습에 놀라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나왔다. 오래 사시지는 못할 것 같다는 우울한 기분으로 희미한 빛 속을 걸었다. 그리고 16일에 부고를 들었다. 우리는 김학순 할머니를 추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예전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국회 앞에 모였다. 그중에는 물론 변기자 씨도 있었다. 할머니의 사진이나 꽃, 슬로건을 걸었고, 국회의원 츠지모토 기요미(辻本清美)가 지나가자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약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없었다면(부산의 이귀분 할머니는 자기가 먼저 부산 방송국에 갔었는데 상대해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셨지만!) 일본군 여성 인권침해는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채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가, 그리고 그를 뒤따른 할머니들의 용기가 올해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노벨상을 탄 것이다![1]    각주 ^ 본 에세이는 2018넌 12월에 작성되었다.2018년 노벨평화상은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내전 성폭력 피해자 치료에 앞장선 의사 드니 무퀘게가 수상했다.   

    나카가와 히사코 (中川寿子)

  • 김학순을 추억하다 4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4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씨가"나는 일본군의'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나는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아, 역시" 하고 탄식했다. 약 이십 년 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이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전쟁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전장에서 여자나 아이들을 발견하면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필요 없어지면 연못이나 하천에 내버린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학순 씨의 증언이 있고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던 1994년 5월 4일, 일본의 나가노 시케토 법무대신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는 고노담화를 뒤엎는 발언을 했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5명과 그 가족들이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나는 일본을 찾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김학순 씨가 1994년 10월 초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인은 입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한 입으로 사죄하면서도 다른 입으로는 '위안부는 돈을 벌러 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나라다"  "일본이 경제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와보니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원내 집회 당시, 의원회관 앞에 버티고 앉은 작은 몸집의 김학순 씨는 의연했고, 그 모습에서는 고상함마저 느껴졌다. 그 후로도 나는 학순 씨에게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알려 드리기도 했다. 1997년 1월 1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7명의 피해자에게 비공개로 아시아여성기금이 지급됐다. 국민기금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찬반이 분분했고, 나는 그 정도 결과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시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후 이용수 씨가 "김학순 씨가 화가 났으니 만나러 오라"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다. 나는 3월쯤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함께 병문안을 위해 김학순 씨 댁을 방문했다. 그러자 학순 씨는 첫 마디부터 "왜 양측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느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정말 그렇네요. 죄송합니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학순 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보세요. 문옥주가 죽고, 강덕경이 죽고, 다음은 나일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말씀 마세요. 100살, 200살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라고 답했다. 나는 카스텔라, 네슬레의 골드 블렌드, 매실장아찌를 선물로 들고 갔다. 학순 씨는"나는 커피는 안 마시지만, 매실장아찌는 좋아해"하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학순 씨, 김복선 씨, 이용수 씨 등 총 다섯 명이 학순 씨 댁에서 떠들썩하게 저녁 식사를 요리해 먹었다. 학순 씨와 복선 씨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같이 등걸잠을 잤고, 다음날 학순 씨의 배웅을 받으며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나는 돌아왔다. 이후 6월에 한국에 갔을 때, 학순 씨가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김복선 씨와 함께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학순 씨가 매실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해서 가다랑어포 맛, 차조기 맛 등의 매실장아찌를 가져갔다. 학순 씨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걸 하고 있으면 편하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간 매실장아찌를 몇 개나 드셨을까…….  8월에 한국에 갔을 때 김복선 씨와 다시 한번 병문안을 하러 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교회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병세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한국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12월 16일, 학순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항공권을 구해 한국으로 갔다. 당일에는 김복선 씨 집으로 갔고, 다음날 김복선 씨, 문필기, 김윤심, 김은례 할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인 아산병원으로 갔다. 이미 와 계신 할머니들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려서 울고 계셨다. 할머니들께 학순 씨는 의지할 수 있는 리더, 언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할머니들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이 끝나고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집회에 들러 화장장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학순 씨가 사용하던 수첩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노부카와가 왔다'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헷갈리셨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걸까'하고 생각했다. 뼈가 되어버린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으로 향했다. 학순 씨는 생전에 미리 마련해 놓은 묘지에 묻혔다.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을 담아 삽으로 흙을 뿌렸다. 저녁을 먹고 다시 서울로 버스가 향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와 이용수 씨는 약간 번화한 거리에 내려서 저렴한 숙소를 찾아 함께 묵었다. 학순 씨와 작별한 기나긴 3일이었다. 그 후, 도쿄에서도 추모회가 열려 김순덕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순 씨의 용기와 다정함을 그리워했다. 1년 뒤에도 망향의 동산에서 1주기 행사가 열려 일본에서 온 참석자들도 학순 씨를 회상했다.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많은 자매와 함께 있어 시끌벅적하겠지요. 옆에는 황금주 씨도 계시고, 친하게 지내셨던 김복선 씨도 계시고, 강순애 씨가 계시고, 배족간 씨도 계시고, 박복순 씨도 계셔서…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날까지…. 안녕히.

    노부카와 미쓰코 (信川美津子)

  • 김학순을 추억하다 1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019년 에세이 김학순을 추억하다 1 - 김학순 할머니와 나

    [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김학순 할머니와 나  김학순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지 22년째, 또다시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새벽, 74세 나이에 한 많은 삶을 영원히 마감하셨다. 이승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마 한 맺힌 억울함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떠나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일본 정부의 사죄가 지금도 그대로인데 저승에서나마 마음 편하게 계시겠는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변해도 아주 나쁘게 변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보다 더 많이 우경화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2015년 12월 28일 그 사건이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발표가 나온 것을 보셨다면 할머니는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일본 정부는 우리들이 다 죽기 바라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분노에 찬 모습, 그 쟁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때리 듯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많은 젊은이들과 시민에게 일본군'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알려주며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호소를 쉼 없이 하셨을 것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김학순 할머니가 생각나면 나는 천안 망향의 동산을 찾곤 한다. 거기에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잠들어 계시는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김학순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나 죽어도 무덤 찾아 줄 핏줄 하나 없어 쓸쓸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때 우리 강제동원 유족들은 약속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떠나시면 저희가 딸 대신 아들 대신 매년 찾아뵙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며 우리 유족들은 해마다 12월 16일 망향의 동산을 찾는다. 가끔 일본 시민들도 함께 김학순 할머니 묘소를 참배하며 눈물로 사죄의 절을 올리기도 한다. 올해는 더욱 김학순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여전히 일본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최고위층의 정치인들이 식민지배로 저지른 범죄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우리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현실이 자꾸만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8월 14일 방송을 통해서였다. 이날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 일본군'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할머니가 평생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 이모와 같은 연배셨던 할머니. 나는 내 어머니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들고 깨달았지만 내 어머니 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정신대'로 끌려갈까봐 우리 고모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나 고모도, 우리 이모도 그 때 처녀들은 누구나 다 겪을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991년 내가 몸담고 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준비중이던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사건)에 합류하셨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만났다. 처음 만난 김학순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집에도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할 수 있으면 언제나 혼자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이 만들어낸 모습인 것 같았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의 관료라는 작자들이 '위안부'는 없었다며 여러 차례 망언을 해댔다. 뉴스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김학순 할머니는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싶어 분노했다. 결국 그녀는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활동에 김학순 할머니는 적극 나섰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에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뒤이어 일본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나섰다. 그해 6월 김학순 할머니의 행동에 용기를 얻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점령한 곳에는 여지없이 위안소가 세워졌기에,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피해자 포함) 등 각지에 퍼져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일본 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학계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시민들은 지원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과 진상규명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 정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93년 7월 일본정부는 정부대표파견단을 한국에 보내 5일 동안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했다. 또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강제징병·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경주에 내려가 회담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이날 김학순 할머니도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사과만 반복할 뿐, 제대로 책임질 생각도 제대로 보상할 생각도 없는 일본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였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가 법적으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라는 민간단체를 통해 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는 '조건부 사과' 원칙을 밝혔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분노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일본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국가의 자존심이나 명분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조건을 다는 모습이 또다시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 법정에 소송을 낸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민간인에게 기금을 모아 보상을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구걸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식이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국민기금 측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를 또 하나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기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6월 김학순 할머니는 도쿄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일본정부 측과의 대질신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했다. 이 자리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였던 내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 일본정부"라고 비판했다. 할머니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라고 강조했다. 할머니는 법원 출석 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증언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피해자·유족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다.  그 후에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한 소송에 참여하고, 각종 집회에 나가 증언하고,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을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참석을 하곤 하셨다. 증언을 하고 나면 보통 사례비로 2~30만원을 받으셨는데, 할머니는 5만원씩 봉투에 담아 주변의 '위안부' 할머니에게 나눠주기도 하셨다. 누가 돈이라도 조금 드리고 가면 혼자 쓰지 않고 할머니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셨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가 자주 만난 할머니는 황금주, 김상희, 강순애 할머니 등이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강덕경 할머니였다. 강덕경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오시길 바랐는데, 김학순 할머니는 가고 싶어 하시면서도 서울의 지인들이나 동대문교회의 지인들, 신앙 문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지 못하신 또 다른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공동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하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7년 2월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때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다녀오신 것이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많이 우셨고, 많이 괴로워 하셨다. 장례식장까지 다녀오신 후 할머니도 지병이 악화되어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과 목동병원을 오가는 중환자 신세가 되셨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싸웠다. 할머니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난생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만큼 두렵고 힘든 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그 길을 걸어 나갔다. 할머니의 옆에서 난 많은 것을 배웠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를 알았다.  30년을 싸웠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2015년 12월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적당히 덮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기만적인 합의였다. '일본 정부가 갖은 망언과 망발로 사실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과연 한일 양국의 '12.28합의'를 보고 어떤 심정이 어떠셨을까.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왔지만 어느 순간 또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견고한 세상에 냈던 조그만 파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다. 진실의 힘은 강하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꿀 우리의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이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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