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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논평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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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의 날 특집] 김학순을 추억하다 <논평> 소현숙 -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에세이> 1. 이희자 - 김학순 할머니와 나 2. 나카가와 히사코 - 할머니들의 리더같은 존재, 김학순 3. 야스다 치세 - 우리들이 죽고나면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4. 노부카와 미츠코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기림의 날에 기억하는 김학순과 그녀의 증언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소.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종군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오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김학순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임을 폭로했다. 아직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 울렁하다”는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만천하에 알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그때의 아픈 기억을 얘기할 때면 스스로 진정하느라 한참씩 말을 멈추곤 하던 김학순. 그러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나서 그동안 파렴치하게 발뺌해 온 일본 정부와 이 문제를 수수방관해 온 한국 정부를 준엄히 비판한 김학순. 그녀의 이 용기 있는 증언으로 그때까지 뜬소문에 불과했던 일본군‘위안부’는 비로소 실체를 가진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일본의 사실인정과 공식사죄를 주장한 김학순. 그녀는 누구인가? 증언에 따르면,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짐을 싸 만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활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두 살 된 어린 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에도 의탁할 수 없었던 학순의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학순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의붓아버지와의 동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학순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겉돌았고 어머니와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기생집의 수양딸로 팔려간 김학순은 평양의 기생 권번에서 2년 정도 춤과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다. 권번을 졸업하고 17세가 된 김학순은 기생 영업을 위해 1941년 양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도착한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 군인들에 의해 군용트럭에 강제로 실려 위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밤새워 달려 도착한 철벽진이라는 곳에서 그녀는 일본군 중위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몇 차례 도망쳐도 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모진 구타를 당해야 했다. 4개월 남짓 지났을까 군인들이 전투 나간 어느 날 빈틈을 타고 불쑥 찾아온 조선인 은전장수 덕분에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위안소를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김학순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이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며 중국을 떠돌다 1946년 6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귀국 직후 콜레라에 어린 딸을 잃었고, 곧이어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 김학순은 남의 집 식모살이며 날품팔이 등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반세기가 다되도록 침묵하던 그녀는 어떻게 용감하게 나서서 증언을 하게 된 것일까? 그녀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해 놓고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잡아떼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 속에 머물렀을 수도, 그리하여 ‘위안부’문제는 역사 저편의 먼지 속에 감춰지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녀의 증언 이전에도 ‘처녀공출’이니 ‘정신대’니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해방직후 미군정 하에서 한국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 명사들이 그 대응책으로 일본군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안소’가 필요하다고 버젓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성의 성을 언제든지 남성의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 나아가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은 오히려 몸이 더럽혀진 죄인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는 개인적 수치일 뿐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듣는 ‘귀’가 생기기까지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성장한 여성운동의 줄기찬 노력이 있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온 한국 여성운동 세력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가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게임을 준비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을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아직도 기생관광으로 성적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라는 울분 속에서 교회여성단체는 기생관광을 ‘현대판 정신대’라고 규정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성 침탈의 역사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신은 ‘정신대’를 모면했지만, “또래의 많은 처녀들이 일제에 끌려갔던” 그 기억으로부터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윤정옥 등은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발족하였고,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로써 드디어 한국 사회는 피해자들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이 문제를 풀 결정적 고리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시 일본 총리에게 전시 강제연행자의 명부를 만드는 데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위안소는 민간업자의 단순한 상행위이며 군 위안부는 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대응하면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전면 부인했다.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의 피해자였음을 폭로하고 최초로 대중 앞에 나섰던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반세기 만에 피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한국의 대중들 앞에서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진실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하여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증언 이후 김학순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나서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인권운동가로서 남은 생을 이어갔다. 8월 14일 김학순의 용기 있는 증언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증언 이후 같은 ‘위안부’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200명 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증언의 연쇄는 해외로까지 이어졌다.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아시아 피해 국가들에서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폭로가 잇달아 나왔다. 이로써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김학순의 증언에 탄력을 받은 진상규명운동은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과 중국,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의 연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또, 피해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군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김학순의 생생한 증언과 잇따른 움직임 속에서 더 이상 발뺌이 어려워진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군과 관헌의 관여와 동원에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전반적인 책임은 민간업자에게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할 뿐, 법적 책임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거부해 왔다. 그나마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고노담화조차 부정하며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다. ‘김학순들’의 처절한 증언을 듣고서도 아베 정권과 일본의 우익들은 피해자들의 말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전시회에서 소녀상이 철거되자, ‘내가 소녀상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은 지 30년, 그녀의 용기에 의해 피해자의 말에 공감하는 열린 ‘귀’들이 계속해서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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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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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2부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2015년 12.28 한일 합의의 배경과 쟁점 Q. 박근혜 정부 때 맺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12.28 합의)는 당시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았습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했다는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2.28 합의는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게 된 걸까요? 조양현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 이명박 정부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노다 정부, 민주당 집권의 마지막 정부였어요. 비교적 리버럴한 정부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생각보다 더 완고했어요.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2012년은 특사파견, 사사에 안(案), 3점 세트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올 때인데, 그게 봄에 다 파탄이 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해 여름에 독도를 가지요.* 그러다 보니까 한일관계는 경색되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이 납니다. *편집자 주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독도 방문: 2012년 8월 10일, 광복절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독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내보였으며, 당시 한-일 관계 악화의 계기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중요한 현안이라는 입장을 취했어요. 그래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정상회담도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요. 아베 그리고 박근혜 정부 둘 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과거사에 대해 양보하지 않으려는 구도가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2014년 5월에 헤이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오바마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아베 총리가 미대사관 공관에서 만납니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오바마, 아베의 삼자회동이 핵안보정상회의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도가 되었죠. 그러면서 우리가 그 당시 요구했던 외교부 국장급 회의도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국장급 회의를 10여 회 하고 결과적으로 2015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의 12월 28일, 서울에서 양국의 외교장관이 합의를 발표하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12.28 한일 합의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완전히 해결되었는가. 일본이 우리가 요구했던 법적 책임, 사과, 배상 내지는 보상을 이행했다면 법적으로 해결이 되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정치적인 해결이었고, 정권이 이룬 합의일 뿐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두 번째,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의사로 합의한 것인가. 이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를 했다는 것은 마치 50년 전 국교정상화 교섭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방불케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양국이 조금씩 양보한 애매한 결과가 나온 거죠. 한국의 승리도, 일본의 승리도 아니기 때문에, 양쪽 모두 편의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합의가 된 거죠. 세 번째는 구속력이 있느냐 입니다. 협정이 아닌 합의문을 발표했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다음 정부에서 정치적 입장 승계를 거부할 수 있는 특성을 가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기정 2012년도 노다 정부 말기에 나왔던 사사에 안(案)이 있었죠. 일본의 내각 총리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편지로 사과를 하고,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사과, 그리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인도적 조치의 자금 지원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의 입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가의 법적 책임에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사사에 안(案)+α’를 내놓았지만, 일본 정부는 역으로 ‘사사에 안-α’를 주장했어요. 결국 당시에는 유예되었고, 정권 교체가 되면서 일본 안에서도 동력을 잃으며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사사에 안(案)이 기초가 된 12.28 합의에서는 ‘도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지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이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나이브하게 보자면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요구해온 3점 세트, 즉 ‘책임 인정, 사죄, 예산상의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을 실질적인 배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정부의 책임인정과 이에 따른 예산 조치’가 이루어진 부분에서는 예전보다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사사에 안(案)은 일본의 민주당이었던 노다 정부가 가져온 제안이었지만, 2015년의 12.28 합의는 역사수정주의를 공공연하게 천명했던 아베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합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즉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가 포함되고, 소녀상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더 이상 국제무대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비난, 비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져서 합의가 결국 엎어진 거죠.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Q. 말씀하신 대로 12.28 합의는 국내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시민단체 측에서 이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세 분이 생각하시기에 이 합의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남기정 양국의 외교장관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국민과 국가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우리의 평가와 관계 없이 UN에서는 일단 합의를 환영하는 멘트가 나왔고요.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당시 정부도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합의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합의의 재해석 등을 통해 제3의 해법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양국 정부간 ‘위안부’ 협상에 절차적, 내용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며, 피해자 중심 해결 원칙 아래 후속조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며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시현 여기에 관해선 할 말이 많아요. 글도 많이 있고요. 그동안 안 했던 이야기를 조금 하면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권리 주장 요구가 양국 정부에 의해서 어떻게 다뤄져왔냐는 거예요. 이게 이 문제의 역사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이 패전하자 해외의 전쟁터에서 군인, 군속, 노무자, 또 ‘위안부’ 피해자들이 귀환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선인연맹을 설립해서 귀환 활동과 생활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 단체들이 권익옹호활동을 한다는 게 실효적이진 않았을 거예요.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인연맹 등 귀환자 단체들이 미군정 당국과 교섭을 한 흔적이 있고, 임금 등 미수금 문제, 가혹행위 등의 부분에 대해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분들이 귀환해서도 미군정 당국, 그리고 이승만 정부를 상대로 계속 권리주장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1949년 이후에 정부가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되었고, 1951년 대일평화조약 체결 후 정식으로 시작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회담을 거쳐 1965년 협정 타결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피해자들은 사실 ‘노무자’이고, 프롤레타리아예요.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이었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배제되는 과정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그들의 권리가 억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입증을 해야겠죠.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서도 이런 긴 흐름 속에서 해방 이후 일본, 또는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일 과거사 피해자 문제를 다뤄왔는지가 연결되는데요. 1965년 당시 우리는 독재 정부하에 있었습니다.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이 격심했으나 결국 관철되었어요. 그런데 남은 문제들 중에서 유골 문제가 1965년 이후에 한일 사이에서 협의가 돼요. 이건 뭐냐, 협정으로 다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는 거죠. 일본 입장에서는 청구권협정 바깥, 즉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정책의 기본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80년대 후반 노태우 방일을 계기로 원폭피해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약간의 지원이 있었는데, 역시 근거는 인도적인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기금 역시 법적 해결이 아니라 청구권 협정과 무관한 인도적 차원이라고 저는 바라보는데,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특히 도덕적 책임론을 강변합니다. 법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다 끝났지만 우리는 그 외에 추가적으로 국민기금을 통해 도덕적인 책임을 다 했다는 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이자 선전 내용이기도 한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합의를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법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안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법적 성격도 묻지 않았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법적인 책임을 아주 탈색시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2015년 12.28 합의는 공식적인 합의문이 없는 가운데 양국 외교장관들의 발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양국정상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그 내용을 추인하는 형식이었죠. 전부 다 구두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구두합의인 셈입니다. 물론 정부 간, 또는 국가 간에 구두합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국제조약으로 바라볼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합의, 즉 조약이라는 것은 국제법상의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합의가 되자마자 논란이 제기되었고, 정치권에서는 국회비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합의가 법적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이기 때문에 법적인 구속력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합의에 대한 국제반응 역시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초기 반기문 사무총장과 미국 정부의 환영 멘트를 포함한 국제반응과는 달리, 이후 합의의 문제점이 UN의 각종 인권보장기구에서 제기됩니다. 피해자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합의가 부족하다는 지적들이 나왔죠. 개정하라는 권고도 있고요. 남기정 저는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해요. 그러나 우리 운동단체가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인용하는 UN 산하 인권기구들에서의 문제제기나 권고도,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합의’의 개정을 권고하는 등 일단 합의가 성립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개정을 하라는 것이지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돼요. 합의가 피해자 인권과 충돌한다는 문제제기를 인정하지만, 합의 그 자체는 있다고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인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시현 구속력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조약이 아니면 국가를 구속하지 않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조약이라고 하더라도 뭐 바꿀 수 있는 거예요. 한번 맺은 조약은 영원불멸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의 과도한 발언들이 보도가 되고 있는데, 조약은 바뀝니다. 역사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고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식 조약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핵심적인 것은 청구권 협정과의 관계예요. 이것이 조약이 되어버리면 청구권 협정을 수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는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과 모순이 되는 거예요. 청구권협정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조약의 형태로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정부로서는 ‘한일 합의가 조약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조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본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법적 효력은 없는 것이 되고요. 만약에 법적 효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장관 간의 합의, 즉 정부 간의 합의인지 또 대통령과 내각총리대신 사이의 합의, 국가 원수 간의 합의인지도 불분명해요. 이것을 국가 간의 합의가 아니고 정부 간의 합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시 박근혜정부, 아베 정부에게는 구속력이 있을 수 있겠죠. 정치적인 합의의 성격이라는 것은 합의한 정부의 운명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위안부’에 대한 정책은 역대 정부에 따라 쭉 바뀌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책을 형성할 수 있고, 이를 수정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약속과 정의라고 할까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가치가 있는 반면, 정의의 차원에서는 바른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체계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한국에 붙이는 ‘약속한 것을 바꾸는 나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낙인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의 절차적인 부적절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국민 정서, 피해자들의 이해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담합이었다는 거죠. 탄핵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국민의 관심은 정의가 과연 실현되는가이고, 이는 문재인 정부에게 대단히 큰 부담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계승을 위한 정치적 비용이 상당히 컸고, 결국은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요. 현실적인 대안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계승하지는 못하겠다고 발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대안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 할지요. 한국은 일본에 적극적이고 성의 있는 대응을 주문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합의를 깬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서 뒤로 빠지고 있죠. 12.28 합의 후 키시다 대신은 돌아가자마자 언론에 대놓고 “일본이 잃는 것은 10억 엔 외에는 없다”고 했어요. 우리 국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하고 아베 수상은 국회에서 한국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겐 합의를 지키라고 하면서 일본 쪽에서는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던 거죠. 그런 맥락에서 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의 대응은 무엇이었는지가 아쉬웠던 부분이거든요. 합의에서 이 부분은 절차적인 부족함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고치자, 이런 구체적인 대안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재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는데, 이에 대한 정부 입장은 무엇인지 애매하고요. 그렇게 봤을 때 그 당시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부분보다는 정부의 대안에 대해 우리가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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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좌담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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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3부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Q. 2018년 1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명예·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2015년 합의가 양국 간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감안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절차에 돌입했지만, 12.28 합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합의를 둘러싼 한일 간의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요. 조시현 문재인 정부가 12.28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일합의의 존재는 인정하되, 이것이 효력이 없도록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는 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채, 합의의 결과물을 해체하는 것에 불과했어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요. 조양현 가장 이상적인 안을 실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시는 동안 수준을 조정해서 해결하자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차상으로나 일본의 무성의함 등으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하는 건데, 이 부분이 아쉽거든요. 일본의 협력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우리 스스로 도덕적인 이념을 가지고 우리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김영삼 정부 때의 방식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 물론, 문제는 많이 있지만, 방침을 그렇게 보여주면 ‘아, 이게 정부의 입장이구나’ 하고 와닿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그림이 좀 애매해요. 12.28 합의를 부정한다면 대안은 무엇이냐는 비판이 나오는 거죠. 조시현 대안 부분과 관련해서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주는 함의, 영향 정도는 국제 인권의 메커니즘에서 다뤄지고 있는데요. 국제인권기준에 따르면 피해자의 권리에 관한 기준이 잘 정립되어 있고, 또 과거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특별보고관이나 기구들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피해자들이 권리를 갖는데, 진실에 대한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배상을 받을 권리, 재발방지에 관한 권리,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문제야말로, 문제 발생 처음부터 UN에서 논의돼왔고 그 이후 전 세계 인권상황에 보편타당하게 적용이 가능한 기준으로 확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UN의 기준에 따라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설득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기정 논의를 좀 확장하자면, 제3의 방법으로 합의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합의가 나오긴 했지만, 미완성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도 사실 합의 안에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의 권리를 말씀하셨는데, 합의에 보면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라는 말이 나와요. 그것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이 나오고요. 그래서 저는 문건을 우리가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일본에 계속 요구해야 합니다. 10억 엔밖에 잃은 것이 없다는 식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냐고 계속 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발언은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나 상처치유를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 계속 합의의 완성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합의를 의미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합의를 제대로 된 합의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까 조시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이 지점이 청구권 협정을 깨는 지점이거든요. 저는 이 지점을 이용해서 청구권 협정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가 전적으로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깨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되거든요. 합의는 이 작업에 지렛대로 삼을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내용을 합의에 포함한 것은 박근혜 정부의 공로가 아니고요, 그동안 원칙을 견지하며 줄곧 운동을 해왔던 피해자 할머니들과 운동단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쓸데없는 것들을 뒤에 붙인 게 잘못된 것이지, 앞에 부분은 우리 시민운동 단체가 여태까지 만들어낸 부분이기 때문에 이걸 우리는 확인하고 이후 운동의 발판으로 삼자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조양현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언론은 ‘위안부’ 합의에 부족한 부분,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한국 내부에) 문제 제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신중한 톤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이념성향을 떠나서 국익 대 국익 싸움이라는 외교적 접근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이 문제를 (내부적인) 정치 쟁점으로 삼으면서 일본이 느끼는 압력이 약해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이어지길 조시현 ‘따고 배짱, 딴 놈이 배짱을 부린다’라는 말이 있어요. 일본은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불가능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해결이라는 것은 운동 차원에서 해결을 위한 행동의 요구이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결은 ‘과정’입니다. 100년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불가능한 것을 해결했다고 한 합의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일본 정부는 피해자를 대변하는 (한국) 정부의 입에서 ‘끝났다’ 라는 말을 끌어냈기 때문에 이 유리한 입장을 쉽게 포기하고 싶어 하진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합니다. 함부로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평생 국가가 구속당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요. 아베 정부에서는 한국을 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악담을 퍼붓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좀 더 적극적인 변론을 펼쳐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응하지 않으니 그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식으로 외교를 유연하게 가져갈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동시에 국제 기준, 원칙에 입각하면서 끈기 있게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합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두 나라가 공동의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문제의 인식이 일치해야 하는데 지금 과연 그런가. 한국, 일본 꿍꿍이가 다른데, 청구권 협정 자체도 그랬고요. 각자 입맛에 맞게 해석해 왔고 국민을 호도해온 측면이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12.28 ‘위안부’ 합의도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한일 간의 인식 차이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한 양국 간의 책임 있는 대화가 시급히 재개되어야 합니다. 남기정 저도 큰 틀에서는 동의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죠.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지만 실수할 때가 있어요. 지도자를 제대로 못 뽑을 때가 있죠. 그런데 민주주의를 이 정도로 성숙하게 만든 국가라면 시스템으로 지탱할 수 있고, 지도자와 정부가 실수할 때 국민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이 정부에서, 과거의 잘못된 합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연히 ‘해결’이 안 되죠. 운동이 있는 한, 새로운 문제 제기는 늘 있고,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문제가 여전히 미결인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려는 정치가 있는 한 해결의 수위는 조금씩이라도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여 해결의 수위를 확인하고 유지하게 되지만, 그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부족한 내용이 되고, 그래서 다시 운동이 전개되고, 정치가 이를 수용해 문제의 해결을 끌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합의를 통해 해결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짚어주는 건 필요하다고 봐요. 합의 내용에서 ‘위안부’ 문제란 당시 ‘일본군의 관여 하’에 발생한 일이라는 규정이 나와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군의 관여 이상의 많은 문제를 담고 있거든요. 가령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과거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한 것이 확실해진다면 이 합의의 전제는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령 ‘위안부’ 문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데 혹시라도 연합국의 관여가 확인된다면, 이 또한 합의의 전제를 흔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해결의 수위도 또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구하고 진실을 규명해내서 ‘위안부’ 문제가 더 큰 틀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아간 해법이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과 연구가 필요한 겁니다. 조양현 방금 이야기를 받아서 의견을 나누어 본다면 대단히 아플 겁니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외교부가 담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든요. 정부 각 부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성격이 다양하니까요. 또 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 판단도 있는 것이고, NGO단체, 피해자, 국민 정서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서 외교부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일 외교 앞에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가 무겁게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이슈가 쉽게 진전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거죠. 한국 외교에서 대일외교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각 주체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인데, 만약 제가 외교부 장관이어도 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12.28 ‘위안부’ 합의가 국민 정서를 대변하지 않았다면,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앞으로의 대일정책, 일본 인식의 차원에서 확실한 입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 때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이야기가 인용되고 그럽니다만, 그때 상황과 지금이 다른 부분은, 외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했죠. 그 관계를 잘 다지면서 대북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거사는 그 일환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체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절되어 있어요. 과거사는 과거사 분야에서만 보고, 북한 문제는 북한 문제에서만 보고, 미국과 중국 문제도 그 안에서만 보고 있고요. 이게 모두 연결되어있는데도요. 이런 문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앞으로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야 한다고 봅니다. 이웃 국가잖아요. 그리고 당장 안보와 경제를 이야기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아쉬워요. 일본도 아쉽고, 우리도 아쉬워요. 특수 관계라고 하는 부분에는 변화가 없거든요.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사에 대해 과도기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판단이 있어야 외교 실무단이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너무 센 비판일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되면 한 발 더 못 나간다고 생각해요. 남기정 한일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양자 관계죠.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일 관계라는 것을 상상하고 구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안보 문제만 가지고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이 생겼다는 거죠. 이른바 한미일 안보 삼각형의 하위 동맹으로서 한일 관계를 이야기하고 개선한다, 또는 회복한다는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이후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개시되었고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상 그것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서 목표로 설정할 것은 한일 관계 개선이 아닌 한일 관계 재건축인데, 이른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이어진 남북 관계에 일본을 넣어서 남북일이라는 평화 삼각형을 만들고, 이를 지탱할 밑변으로서 한일 관계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 트랙일 땐 앞에 역사 문제가 딱 가로막으니까 뒤에 있는 열차가 못 가지 않습니까. 역사 트랙과 미래 트랙은 둘이 같이 가야 합니다. 과거처럼 역사를 팔아서 안보를 사는 한일 관계가 아니고, 평화를 만들고 평화 위에 역사를 싣는 외교를 구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 관계를 정전상태에서 평화로 이끌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한일 사이에서 역사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한일 관계 재구축을 동기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Q.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해서 우리 정부에게 아쉬운 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사실 더 갑갑한 것은 일본 정부잖아요. 현재 아베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의 노선을 밟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 내에는 아베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요, 일본 안에서 대안적 흐름이 펼쳐질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남기정 저는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정밀해졌으면 좋겠어요. 현재 일본을 움직이는 세력으로 평화주의 세력과 이른바 전통적 국가주의(자)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평화주의에서 전통적 국가주의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밑에는 자유주의적인 질서를 원하는 사람들과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 있어요. 사실은 이들의 길항 작용을 통해 일본의 주류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은 헌법개정을 통해 권력정치의 세계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 싶어 하지만, 평화헌법 때문에 앞으로 못 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치 지형에서는 여전히 리버럴, 또는 제가 말하는 제도적 자유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일정한 힘을 유지하고 있어요.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력을 배경으로 일방주의적인 외교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도와 레짐 같은 걸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는 건데, 이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규칙이나 약속을 중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후에 일본이 처한 국제적 지위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위안부’ 문제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위안부’ 그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축과 ‘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할 것이가 하는 축, 이렇게 두 개의 축을 가지고 매트릭스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우리에게는 (1)‘위안부’ 문제는 존재하고,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시민그룹과, (2)‘위안부’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의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그룹, 이 두 그룹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이 두 그룹도 일본 안에서는 규모가 작습니다. 진짜 일본을 움직여 나가는 그룹은 (3)‘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국이 하라고도 하고, 한국이 완강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 한미일 안보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단 합의를 해주자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아베나 이 주변 사람들인 거죠. 속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때문에 계속 딴소리를 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4)‘위안부’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의를 발휘해서 합의를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게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합의가 있으니까 좀 지켰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합의를 파기한다고 하면 이 제도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이에 반발해서, 오히려 아베를 편들어 주는 결과가 됩니다. 저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쉽고, 이러한 일본의 지형을 고려한 외교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양현 일본사회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퇴행적이다는 진단은 맞는 것 같아요. 아베의 장기집권이 지속되면서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굉장히 침식되고 있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 정부의 프레임에 대항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가치’ 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의 ‘가치동맹’을 바탕으로 중국을 비난해왔거든요. 중국은 전체적인 사회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라면서요.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가치는 자유, 인권, 평화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거죠. 프레임 전쟁에서 우리가 유리한 구도로 가려면,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동맹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기정 조금 보완하자면, 저는 일본에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봐요. 평화주의적인 발전 측면에서 전후 일본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평화헌법도 있고, 1998년도 공동선언도 있고요. 그래서 ‘평화적인 측면에서 일본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문제를 같이 풀자고 제안할 수도 있죠. 조양현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아베 정부의 프레임은 굉장히 이중적이에요. 북한에는 인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얼마나 이중적인 이야기예요. 일관된 논리로 인권 이야기를 하려면,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죠. 그런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자기가 쓰고 싶은 가치 체계를 바꾸고 있어요.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을 때 대단히 취약한 구도거든요. 한국과 일본이 가치 체계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일본이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요? 동남아입니까? 인도입니까? 아니잖아요. 결국은 일본이 한국만큼 가치체계를 가깝게 공유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를 거론하면서 민주주의, 인권, 평화, 경제 부분에서 아베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조시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할수록 일본은 우경화하고 있어요. 역설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두 분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더욱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더 세밀한 힘의 관계를 분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시민단체와 가까워서 그런 부분들은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두 분께서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한국과 일본 내의 시민단체가 더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야겠죠. 그리고 양국 정부는 그 힘을 받아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하고요. 그래야 한일 관계가 갈등을 넘어서 진전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 두 시간 동안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기정 수고하셨습니다. 조양현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시현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자리가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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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 - 태국에도 일본군'위안소'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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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도 일본군'위안소'는 존재했다 대다수의 태국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이었으며 태국과는 관계가 없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이 때문에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동원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동맹을 맺고 전쟁 수행을 지원한 국가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태국의 전역에 위안소를 설립하고 아시아의 많은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하였다. 본 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국이 수행한 역할과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최근 관련 문서와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태국과 일본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태국은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추축국이 연합국에 승리하자, 일본의 영향력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더 확대될 것이라 확신한 태국 정부는 점차 일본 쪽으로 입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21일, 태국은 일본과 ‘침략 및 방어에 관한 우호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으로 태국과 일본은 주권과 독립문제에 관해 상호존중하고 나아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상호지원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또한, 다른 국가들과 전쟁할 경우 태국과 일본 양국은 단독으로 정전 혹은 평화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에 동의했다. 이로써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긴밀한 동맹을 맺은 나라가 된 것이다. 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었지만, 그것은 모든 태국인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지하의 반일 저항단체였던 자유태국운동(Free Thai Movement) 등은 연합국에 협조하기도 하였으며, 다수의 태국인은 일본이 전쟁에 패할 기미가 보이자 태국이 추축국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44년, 정세가 결정적으로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자,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태국의 군부독재는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새로 수립된 민간정권은 태국이 일본의 자발적인 협력국이 아니었음을 공표하고, 전범국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태국 국민들이 일본과의 동맹과 '위안부'동원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 태국은 일본과 '위대한 동맹'[1] 관계를 맺었지만, 태국 최고사령부는 일본군과 관련된 기밀문서를 작성했다. 태국의 정부 기구에서 주최한 모든 접대 모임과 연회에서 일본인들이 외국인들과 나눈 대화와 동태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때문에, 태국 최고사령부의 문서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에 주둔했던 일본군에 관한 정보가 많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은 현재 태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일곱 개 시리즈로 나뉜다. (1) 태국 최고 총 사령부의 업무, (2) 동맹국 조정부(The Department of Ally Coordination), (3) 평화운영부 (The Peace Administration Department), (4) 태국 육군 참모총장, (5) 국방부 참모총장, (6) 국방부 법률 고문, (7) 기타. 태국 최고사령부의 기밀문서는 총 472개 상자 분량이며 247,309장에 달한다. 이 최고사령부의 문서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그 전후(前後)의 태국군과 일본의 관계, 그리고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동원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는 회의록, 명령서, 태국 관리와 일본군 관계자 간의 대화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양한 영역에서 일본군의 움직임 및 행태에 관한 보고서, 태국 여성들에 가해진 폭력 사건을 기록한 문서, 그리고 태국 여성 위안부, 아시아 여성 위안부, 태국에 있는 위안소 등과 관련한 신빙성 있는 정보들이 담겨있다. 2.6.5/97번 문서를 보면 일본군이 시 프라야에 위치한 주택을 군 위안소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주택은 일본군의 감독하에 태국인에 의해 운영된 위안소였다. (1945년 11월 15일) 태국 최고 사령부 기밀문서에는 이 밖에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발생한 사건 기록이 있다. 이 사건들은 주로 종전 후 송환을 기다리고 있던 수용소의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출신 군인과 민간인에 관한 것이다. 문서에는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태국에 연합군이 주둔하는 기간 중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3.6/58번 문서에 따르면, 전후인 1946년 3월 9일에 태국 주둔 영국군 사령관이 아유타야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인 전쟁포로의 수를 확인하고자 부대를 보냈다. 이때 영국군은 조선인들을 남녀로 구분하여 이름을 기록하고자 했다. 3.7/33번 문서에 등장하는 아유타야 수용소의 민간인 명단에는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출신의 남자, 여자, 아동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1946년 4월 22~27일).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지만, 아직 이 문서들은 일본군'위안부' 관련 연구에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위안소의 증거가 되는 건물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은 태국 전역 및 이웃 국가에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주둔했다. 이에 따라 방콕, 송클라, 칸차나부리, 라차 부리, 푸켓, 나콩 시 탐마랏, 라농, 춘뽄, 매흥손, 치앙마이 등 여러 지역에 위안소가 설립되었다. 도시 지역에서부터 태국-버마 국경의 최전선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가 있었다.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에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군이 실제로 머무르거나 주둔했던 지역들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 군 부대의 수와 주둔 기간, 그리고 일본 군의 이동 및 활동과 관련된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위안소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 역시 수록되어 있다. 1.13/60번 문서는 칸차나부리 주에 있는 세 곳의 군 위안소를 포함한 일본 군 시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2.8/137번 문서에서는 위안소 한 곳이 대학 시설 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1.13/69번 문서는 랏차부리, 반퐁, 그리고 푸켓의 군 위안소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전후 오랫동안 방치되긴 했지만, 이들 문서에 기록된 주소들을 찾아가 보면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칸차나부리나 푸켓 등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증언들 물리적 증거가 되는 건물들과 함께 당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훌륭한 증인으로 남아 있다. 일본군이 수년간 주둔했던 지역의 75세 이상 주민들은 여전히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군이 머물렀던 장소, 일본군의 행태, 위안소로 사용되었던 건물 등을 기억해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일본군과 함께 이동했던 아시아 여성들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증언 대부분이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의 기록들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푸켓에 사는 한 남성은 예전에 살던 탈랑 사거리의 3층집이 위안소로 사용된 바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어릴 때 그 집에서 살았는데 2, 3층이 작은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방마다 침대와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기억은 푸켓 지역의 군 위안소를 다루고 있는 1.13/69번 문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더욱 깊이 있게 조사되어야 할 문제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와 증언들은 앞으로 더 깊이 있게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태국과 일본군의 관계를 이해하고, 전쟁 중에 이루어진 태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동원 실태를 더욱 폭넓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태국 전역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소 방콕 파톰 완 지구, 일본군’위안소’ “Tru Ri Ya” 1. 일본군'위안소' <Tru Ri Ya> - 방콕, 파톰 완 지구 Military brothel “Tru Ri Ya”, Wirelesss Road, Pathum Wan District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6.5/23과 2.6.5/97에서는 “Tru Ri Ya”라고 불리우던 일본군’위안소’가 현재 스위스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콕 파톰 완 지구, House No. 730 2. Phaya Thai Road House. No. 730 - 방콕, 파톰 완 지구 House No. 730, Phaya Thai Road, a Military Brothel located inside the Chulalongkorn University campus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8/137과 2.6.5/97에서는 일본군’위안소’였던 house No. 703이 현재 방콕의 출라롱콘 대학교 캠퍼스 내에 자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콕 방 락 지구 , Trocadero 호텔 3. Trocadero 호텔 - 방콕, 방 락 지구 Trocadero, Surawong Road, Bang Rak District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2.7/234와 지역 주민들은 일본군이 이용했던 Trocadero 호텔이 방 락 거리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호텔 1층에 있었던 나이트클럽에는 아시아 여성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소, 칸차나부리 주, 무앙 칸차나부리 4. 일본군 위안소 - 칸차나부리 주, 무앙 칸차나부리 n.45 Pak Phraek Road, Ban Nuea, Muang Kachanaburi, Kachanaburi 태국 최고사령부 문서 1.13/60에 따르면 이 집은 일본군’위안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이 집은 재건축되었는데, 현재의 주인과 친척들은 이 집이 예전에 군 사무소와 숙박시설로 이용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라농 주 크라 부리 일본군 주둔지 5. 일본군 주둔지 - 라농 주, 크라 부리 Jampanes Military Unit, Kra Isthmuss, Kra Buri, Ranong 라농 주의 지역 주민들은 라농 주 크라 부리에 위치했던 일본군 주둔지에 아시아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태국 최고사령부문서 1.12/261과 2.5.2/9 문서에서도 철도를 깔기 위한 일본군이 이 위치에 주둔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푸켓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 일본해군클럽 6. 일본해군클럽 - 푸켓,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 A Japanese Navy Club. Krabi Road, Muang Phuket, Phuket 태국 최고사령부문서 2.5/7에는 무앙 푸켓 크라비 로드에 있는 three-story 호텔이 일본해군클럽으로 이용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현재 소유자와 그의 가족은 약 1949년 즈음 이 건물의 2층과 3층이 침대가 있는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Hall'이라 불리우는 일본군'위안소'로 이용되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사진제공 : 팟폰 푸통(Patporn Phoothong) 사진과 지도 자료는 2017년 서울시와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보고서를 토대로 재정리하였습니다. 각주 ^ 편집자 주 : 당시 군부정권의 독재자였던 피분송크람은 “영국은 태국의 영토를 탈취해간 나라인 반면, 일본은 영토를 되찾아주는 나라이므로 태국의 진정한 ‘위대한 친구’”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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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료해제 포로 심문보고서,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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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미국보고서 자료해제 1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 조사보고서 제120호 2부.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 3부. 미 전시정보국(OWI) 49번 보고서 4부. 동남아시아 번역통역부(SEATIC) 심문회보 제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전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이동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자료집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 연합군은 다양한 부대에서 일본군 포로심문 보고서를 남겼다. 영국군이 주도하던 동남아시아 총사령부(SEAC) 산하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 미국의 전시정보국(OWI) 등과 함께 맥아더가 사령관으로 있던 남서태평양 총사령부 산하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등이 대표적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문서 중 포로 심문보고서는 노획문서와 함께 ‘위안부’ 관련 연합군 기록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은 군사 정보 획득을 위해 일본군 포로에 대해 자세한 심문기록을 남겼다. 주로 군사 관련 내용이었으나 병사들의 삶 전체를 심문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병영 생활 정보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는 군사적 중요도는 크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병영 생활과 관련해 종종 나타나는 문제였다. 특히 연합군이 심리전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흔적이 엿보인다. 앞서 소개한 120번 조사보고서와 마찬가지로, 포로 심문보고서 역시 일본군 병사들의 병영 생활 전체를 조감하면서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고 보인다.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일본에서 1997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 만든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전 5권) 에도 일부 포함되었고 정진성 편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자료』(전 3권, 선인, 2018)에 2건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심문보고서는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일본군 전쟁범죄 ‘위안부’ 자료집』(1~3)에 실려 있다. 특히 이 자료집은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되는 일부분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심문보고서 전체를 완역했기에 다른 자료집들과 차별화된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 연합군 번역통역부가 생산한 포로 심문보고서는 총 783건이었으며 이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모두 45건이다. 즉 783건 중 45건에서 위안소와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비율로 보면 약 5.7%에 해당한다. 45건에 나온 일본군 병사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해보면, 직업에 있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각각 절반이고 교육에서는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고루 분포해 있다. 이는 일본의 사회적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문 보고서는 1942년 12월 31일부터 1945년 5월 21일까지 3년 5개월여에 걸쳐 기록됐다. 위안소와 ‘위안부’가 언급된 지역은 다양하다. 뉴기니 인근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이 19번, 마닐라, 다바오, 타클로반 등 필리핀이 7번, 벨라완, 암본, 마랑, 아마하이 등이 포함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5번, 상하이 광저우 등의 중국이 4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각각 1번씩 언급되었다. 지역명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12번이다. 남서 태평양 사령부 관할 지역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심문보고서임에도 버마와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체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여러 지역의 위안소를 경험한 병사들이 많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면 거의 예외 없이 위안소가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라바울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포로 대부분이 남방 전선에 투입된 병력이었다는 것과 라바울이 남방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라바울은 사실 남방 최전선에 해당하는 지역의 일본군 중심지였다. 위치상으로 뉴기니 바로 옆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은 일본군이 뉴기니와 호주 침공을 위해 10만의 병력을 집결시킨 전략 거점이었다. 그런데도 라바울은 일본 패전 시까지 연합군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바울의 위안소가 병사들에게 자주 목격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연합군번역통역부는 1943년 7월과 11월 사이 심문보고서 형식(Interrogation Report Proforma)을 체계화했다. 심문보고서의 전체 형식은 먼저 포로의 성명, 번호, 계급, 소속 부대, 생포 장소와 시점, 신장과 체중, 연령, 주소 및 직업 등의 기초 정보를 기술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본문은 대체로 1. 서언, 2. 이력, 3. 생포, 4. 부대 또는 전력, 5. 식별, 6, 인물, 7. 취역 함정, 8. 적의 장비, 9. 적의 방식(enemy method), 10. 통신, 11. 방어, 12. 적의 보급, 13. 사기와 선전, 14. 적의 의도, 15. 손실 또는 사상자, 16. 화학전, 17. 지형(지역), 18. 의무, 19. 연합군, 20. 특별 첩보, 21. 일반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서언에서는 포로의 태도나 지능 등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내려졌고 이력은 입대 후 생포되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으며 이하 대부분은 군사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본 자료집과 직접 관련되는 위안소,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은 특별 첩보, 사기와 선전 등의 항목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사기와 선전’ 항목 중에서도 전투 복무의 상황(Conditions in Fighting Services)이라는 소항목에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내용이 나타난다. 이상을 통해 보건대 연합군에게 위안소와 ‘위안부’는 애초 특이한 정보로 인식되었다가 점차 선전전의 소재로 의미가 있다고 파악되었던 듯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보고서의 배포선이다. 보고서의 배포선은 애초 9곳이었는데, 1944년 9월 무렵에는 무려 39개까지 증가하였다. 이 단계에서 배포선은 남태평양 전구를 넘어 중국·버마·인도 전구는 물론 미 전쟁 부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들어서는 배포선이 총 88개소 273부로 확대된다. 남서 태평양 총사령부 참모부서에서부터 거의 모든 단위부대, 심지어는 연대급 전투부대에도 배포되었고 영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연합군 정보부대와 미 전략첩보국까지 배포망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배포선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소와 ‘위안부’ 문제가 연합군 내에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통제했다는 증거 군사적 부분을 제외하고 포로 심문보고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위안소 및 ‘위안부’ 관련. 둘째, 전쟁범죄와 관련될 수 있는 잔혹 행위. 셋째, 일본군의 군대 생활 및 의식이 그것이다. 첫째와 관련된 보고서 내용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로 총 24개이다. 둘째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일본과 중국인이나 현지인 ‘위안부’를 언급하는 보고서이다. 총 11개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위안소의 존재를 진술하는 보고서인데 총 10개가 된다. 45개의 제한된 보고서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가 제일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보고서 진술 내용은 상당히 소략하다. 대체로 특정 지역의 위안소 설치 여부, ‘위안부’ 인원과 국적, 요금 등이 언급되는 정도이다. 위안소의 소유와 운영에 대해서는 포로들의 진술이 엇갈리지만, 군의 통제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일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즉, 사설이건 군 직영이건 중요한 것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도 위안소가 군의 직접적 통제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바울에는 이미 1942년부터 위안소가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 병사의 심문 보고서는 1943년 1월 라바울에는 두 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합쳐 1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1943년 2월에 생산된 제45호 포로심문보고서는 필리핀 지역의 위안소 중 일부는 군 내부에 설치되었음을 알려준다. 위안소는 일부 일본군 병사들에게조차 추잡한 것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다. 1943년 4월 14일 자 포로심문보고서 제54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 도쿄 제대 출신의 해군 경리장교 이나가키 리이치(Inagaki, Riichi)는 육군과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매우 추잡한 것이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he asserted that the subject was an ugly one, abhorrent to him.”) 일본의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도쿄 제대 출신의 장교가 보기에도 일본군의 위안소는 용납되기 곤란한 것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성격의 포로 심문보고서도 있다.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들의 제676호 심문보고서가 그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동맹 관계였기에 상징적 의미로 독일 잠수함이 바타비아의 일본 해군기지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 잠수함이 미군 공격으로 싱가포르 근해에서 침몰당했고 승조원들은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를 남기게 된다. 독일군 장교들은 동맹 관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소였다. 독일군들은 자신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고 일본군 장교만 출입하는 위안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네덜란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추축국 동맹 관계에 있었음에도 위안소는 오직 일본군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안소의 의미와 관련해 상당한 시사를 준다고 보인다. 이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본군의 독점적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적 병영 생활과 인종주의 연합군번역통역부의 포로 심문보고서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일본군의 군대 생활과 의식 및 전시기 일본의 내부상황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일본제국의 군대라고 한다면, 일본군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포로들은 전반적으로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와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상당한 정도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제59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심문 과정에서 천황이 언급될 때마다 바로 기립해 차렷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제63호 보고서의 주인공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전쟁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었고 제60호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을 도와주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심문보고서는 또한 일본군의 병영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계급과 함께 연공서열로 구축된 일본군의 내부 규율이 매우 가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규율화는 폭력의 만연과 밀접히 관련된다. 제664호의 포로는 입대 첫해를 선임병들에게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따귀를 맞으며 생활한 것으로 기억했다. 군대 내부의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추축국 동맹 간의 균열이었다. 앞서 언급한 독일군 잠수함 승조원 심문보고서는 일본군과 독일군 관계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 두 국가는 동맹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심각한 갈등관계였다고 보인다. 독일군 포로의 진술은 일관되게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일본군 포로들 역시 독일에 대한 태도를 묻는 말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독일의 원조를 묻는 말에 모든 일본군 포로들은 한결같이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했고 히틀러와 천황의 비교에 대해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동맹 속의 적대감은 특히 인종주의와 깊이 관련된다. 심문관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군 대부분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다. 즉 바타비아의 독일군 포로들이 보기에 일본군은 백인종 대 황인종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고 일본군 사병들은 독일군이 일본군 지휘부를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 포로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일의 인종적 우수성과 일본의 열등함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인종주의 구도는 다른 한편으로 황인종 내부의 차별과 억압을 내장한 것이었다. 제30호 심문보고서의 포로는 중국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인종주의의 피해 대상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근대 서구와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아시아의 또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상쇄하고자 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하겠지만 인종주의와 관련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일본군 위안소의 요금 제도는 인종별로 차등화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유럽 여성들은 특별히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고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 등의 순서가 보통이었다. 인종주의에 오염된 일본군의 실태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인종 간 전쟁을 위해 동원된 ‘황인종’이자 일본 제국 내부의 최하위 사회적 약자인 식민지 여성들이었다. 일본군은 사회적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복수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듯이 ‘위안부’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나와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