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BTS 팬덤의 기억 정치

이지행

  • 게시일2023.11.20
  • 최종수정일2024.04.24

‘BTS 원폭티셔츠’ 논란과 전개

지난 2018년 11월, 일본 방송국 TV 아사히(テレビ朝日)는 생방송 전날 밤 BTS의 출연을 갑작스레 취소했다. BTS의 멤버 지민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이미지와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란히 실린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이례적인 출연 취소의 배후에는 재특회[1]를 중심으로 한 넷우익이 있었다. 이들은 급기야 BTS와 나치의 동질성까지 주장하며 BTS를 미국의 강성 유대인 단체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BTS 국내 팬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원폭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티셔츠 착용에 일본인의 원폭 피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방송의 취소 이유가 단지 티셔츠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외 팬덤을 겨냥한) 설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일본 넷우익의 고발로 글로벌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개입하기 시작하자 BTS는 자칫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일본 넷우익이 BTS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를 파헤치면서,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 자리에 놓고 침략 전쟁 주체로서의 과거를 외면해 온 일본의 태도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점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에 관한 정보들이 팬덤 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교육되면서, 티셔츠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어 갔다. 
 

기억의 복원과 소통: 아시아 팬들의 전쟁 기억과 증언 

팬덤 내 담론의 초점이 바뀌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 의해 점령된 아시아 국가 출신 팬들은 가족으로부터 들어 온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증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사이판을 비롯한 태평양 섬들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가장 잔악한 짓은 미국이 이겼을 때 항복을 거부하고 사이판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식인할 것이라 거짓말을 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사이판 여성들 중에도 강제로 위안부에 끌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X(구 트위터)

“나는 필리핀인이고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배웠다. 여성뿐만 아니라 위안부 역할을 하는 게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년간 점령했지만 그 기간 동안 약 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X(구 트위터)

BTS 팬덤이라는 초국적 공동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피해국이었던 아시아권 국가의 팬들이 집단적으로 증언에 나서게 된 상황은, 개인들이 기억을 언어화함으로써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서 도외시 되어 온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하는 실천적 효과를 낳았다. 
 

기록으로 연대하는 기억정치의 장: 백서 프로젝트 

기획사의 입장문 발표로 티셔츠 논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전 세계 5개 대륙의 20여 명의 BTS 팬들은 온라인 토론을 거쳐 원폭 티셔츠 사건에 대한 105페이지 분량의 백서를 작성했다.[2] 이 백서는 사건이 불거진 배경과 한일 간의 역사·정치적 맥락을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나아가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논란에 대한 반응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한국, 일본, 그 밖의 글로벌 팬덤의 내부 반응을 보여주면서, 사건에 대한 국가별 언론 보도를 검증했다. 

백서 프로젝트 ⓒTeamWhitePaper

 

BTS 팬덤에 의해 발간된 이 백서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팬덤이 백서의 발간을 통해 국가 간 역사 기억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 팬덤은 BTS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만 하지 않았으며, 글로벌 스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면서 이와 연루된 모든 주체들의 세계 시민으로서의 문화적 민감성을 되돌아볼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백서를 간행하면서 국가 간 역사 및 문화 교육의 불균형과 그 해소의 필요성이 지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컨대 아시아인들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반면, 서구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중에 벌인 잔학행위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할 때 상호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번 티셔츠 논란을 통해 팬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티셔츠 논란에 대한 글로벌 미디어 보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팬덤의 역사 인식과 수행적 실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증언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활동은 적극적인 역사 인식을 위한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전쟁 피해에 대한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팬덤이 특히 충격을 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목록을 서로 공유하고 이에 대한 감상평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국내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대한 기부로 이어져, 약 300여 명의 해외 팬들이 ‘나눔의 집’에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위안부 이슈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보며 알게 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 됐다. 다큐를 보면서 한국 여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도 위안부 동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X(구 트위터)

“나는 54세이고 이번 BTS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됐다.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의 세계사 시간에도 일본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말은 이 세계에 ‘들려야’ 할 필요가 있다.”(X(구 트위터)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밑거름 삼아 뻗어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망은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에게 자행된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루어진 BTS 팬덤에게 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팬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으로 상품화되는 현대의 젠더 구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며 해당 문제에 공감하였다. 

오늘날, 팬덤 문화는 전지구화와 미디어 발전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팬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문화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뿐 아니라 팬덤의 관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풀뿌리 담론의 활발한 생성으로 이어지곤 한다. BTS 원폭 티셔츠 논란은 팬덤 내에서 자칫 한일 양국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치환될 수 있었으나, 글로벌 여론의 압박으로 인한 위기감과 전쟁 중 여성폭력에 대한 공감대가 초국적 팬덤 내부에 형성됨으로써 역사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팬덤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초국적 취향 공동체가 기억 정치를 수행한 실천적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저항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각주

  1. ^ 재특회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으로, 반외국인 정책, 특히 혐한 기조를 강력히 주장하는 단체이다. 초대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는 대표적 넷우익 인사로 2016년 일본제일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2. ^ White Paper Project 혹은 백서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해당 문건은 영어와 한국어로 기술되었으며 다음의 URL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https://whitepaperproject.com/ko.html
글쓴이 이지행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파국과 영화: 21세기 영화에 나타난 파국의 감정구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영화를 강의하며 동아대 젠더어펙트 연구소에서 전임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포스트휴먼, 영상문화와 현대성의 관계, 뉴미디어 시대의 대중문화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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