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검색

  • 독자에게 듣는다. 2021년 웹진 〈결〉 어땠나요?
    2021년 좌담 독자에게 듣는다. 2021년 웹진 〈결〉 어땠나요?

    다사다난했던 2021년. 벌써 2년째 계속되고 있는 COVID-19로 인해 모두의 일상은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웹진 <결>은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각도에서 알리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러한 노력이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가 닿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시절인 만큼 서면을 통해 독자 의견을 받았지만, 덕분에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독자의 의견까지 폭넓게 청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짧은 글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음을 고백하며, 소중한 의견을 나눠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참여 독자(가나다순) 권지명(충북대학교 사회학 전공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펠로우 참여) 김현정(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행동(CARE) 대표)  정용숙(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생각’에 ‘잠기’며, ‘웃음’을 ‘터뜨린다’. 말에는 언중(言衆)의 인식이 담겨있는데, 일례로 ‘생각’이라는 명사에 ‘잠기다’라는 서술어를 쓰는 이유는 생각에 몰입한 상태와 물에 잠긴 상태 사이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엔 또 어떤 참신한 서술어를 연결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술어는 ‘뻗다’이다. ‘마인드맵’ 덕분에 생각이 나무와 같이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알다시피, 마인드맵의 필수 조건은 ‘연상(聯想)’이다. 처음 ‘결’을 보았던 날부터, ‘결’은 쭉 내게 생각을 잇고, 뻗기 위한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누군가 ‘결’의 특이점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나는 각주를 떠올릴 것이다. 각주에 짤막하게 적힌 사건과 책, 영상을 찾아보며 생각은 가지를 뻗었고 이는 분명 일반 기사를 통해 얻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답을 내리고 떠난 다른 글들과 달리, ‘결’의 글이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더 알고 싶다면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각주를 무시하지 못한 독자들은,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아이들처럼 호기심을 따라갔고, 덕분에 ‘위안부’문제를 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결’의 콘텐츠 중 가장 좋았던 기획은 2021 기림의 날 특집으로 나온 <박필근을 만나다>이다. ‘위안부’ 전체가 아닌 한 명의 이야기를, ‘위안부’ 피해 이후의 삶을 소개하는 기획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위안부’를 교과서에서 꺼냈기 때문이다. 교과서나 책을 통해 ‘위안부’를 접하다 보면 ‘위안부’를 “일제강점기 시절,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로 기억하기 쉽다. ‘위안부’를 교과서로 기억하던 독자는 포토스토리, 논평,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으로 쓰인 박필근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안부’ 문제를 현실로 끌고 올 수 있다. 포토스토리에 담긴 박필근 님의 주름에서, 눈물 나는 밤에 우황청심환을 드신다는 에세이 속 진술에서 ‘위안부’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해자 개개인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떻게 사건을 극복하고, 왜 오늘날에도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려워하는지(생애사를 듣는 과정에서 박필근 님이 “그 말 모하니더(못합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인터뷰가 중단되는 상황이 잦았다고 한다) 등은 모두 현재의 문제와 연결된다. 독자는 <박필근을 만나다>를 통해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피해자가 겪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며, 정형적인 피해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뭉뚱그려졌던 ‘위안부’ 피해자 각각의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화투를 치며 행복을 찾는 박필근 님의 삶을 통해 누구는 위안을 얻고 또 다른 누구는 피해자의 정형성을 깬다. <박필근을 만나다>를 가장 좋았던 기획으로 뽑은 이유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독자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획을 보고 소감을 남기거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소통의 장을 열어놓았다면 더욱 깊이 있는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행위가 ‘위안부’ 문제를 보다 ‘나’의 이야기로 끌어당기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결’을 읽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학생이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 연구원이 아닐까 싶다. ‘결’이 ‘소개’란의 바람대로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위안부’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독자에게 소통의 기회를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음모론이나 2차 가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다시 피해자가 상처받고 거짓 정보가 퍼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플랫폼을 통해 의견을 모아 일부를 소개하는 등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고, 이를 통해 아무개들의 경험이 공유된다면 기존의 독자는 단순히 콘텐츠를 향유하는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참여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결’은 다리로서 나의 곁에 존재해왔다. 다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독자는 그 위에서 사색을 이어갈 것이다. 다리는 공간의 경계를 지우는 속성이 있다. 시간과 사람, 사건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끊임없이 현재로, 내게로 ‘위안부’를 끌어오는 ‘결’에 감사를 전한다. 앞으로 ‘결’의 논의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독자는 풍성한 논의 위에서 촘촘히 자신만의 결을 짜낼 것이다. 덕분에 오늘, 나는 ‘결’ 위에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결을 이야기할 미래를 그린다. 권지명 충북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환경에 관심이 깊다. 전공 수업과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에서 펠로우 활동을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3년 전, 8월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라는 전문기관이 처음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만들어졌을 때, 멀리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들으며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피해 생존자 분들이 명예회복과 법적 해결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오신 근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 산하에 아직 그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은 매년 갱신해야 하는 1년짜리 프로젝트로서 장기적 사업구상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나, 이제 연구소는 실력 있는 인재들을 영입해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여 반가운 마음이 크다. 연구소가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과 활동이 있겠으나 외부인들이 그것을 피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웹진 ‘결’은 연구소의 활동 성과를 보여주고, 국내외에서 필요로 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생각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이기 때문에 ‘결’이 훌륭한 웹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자 적어본다.  구성 : 웹진이기 때문에 온라인 잡지의 구성을 띠고 있고, 그 안에 좋은 글들이 많이 있으나, 연구소의 취지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각종 연구사업의 결과를 집대성한 허브 역할이 강화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30년간 이어져 온 명예회복과 법적 해결 운동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일본정부의 역사 부정과 수정주의가 판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어떤 군 문서나 사료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증언을 문서, 비디오, 오디오, 시각자료 등으로 잘 정리하여 각 언어로 제공하는 것은 연구소와 ‘결’의 시대적 사명이라 생각한다.  정치적, 사회적 논란으로서만 ‘위안부’ 문제를 접하는 대중이 이 사이트에 들어왔을 때 간결하게 정리된 언어로 독자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소개 글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영어판 <결>과 같이 ‘연구소 소개’, ‘웹진 결 소개’ 메뉴를 상단 메뉴로 디자인 수정을 하면 좋을 것 같다. ​ 제공 언어 : 우선 한글과 영어 두가지 버전으로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작 가해자 일본과 일본 국민들은 엄청난 역사수정주의와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을 일본어판으로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분류 : 현재 인터뷰, 에세이, 논평, 좌담, 자료해제, 전체보기로 나누어져 있는 분류 방식은 좋으나, 각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는 글들의 제목들이 모두 나열되어 있는 페이지가 없어 아쉽다. 각 카테고리에 어떤 글들이 있는지를 보려면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검색을 하거나 키워드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당 카테고리에 들어 있는 글들을 모두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면 훨씬 효과적으로 ‘결’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와 교육에 있어 연구소와 ‘결’의 맹활약을 기대한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행동 CARE 대표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결>의 독자이지만, 창간과 제작에 참여한 초기 편집위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기억의 일부가 웹진 <결> 좌담 코너에 ‘편집회의’로 남았네요. 재작년 초의 일이었을 뿐인데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는 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교육홍보팀장으로 웹진 <결> 창간과 초기 발간을 담당했던 소현숙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가 고심했던 것은 학술적 엄밀성과 대중적 친화성을 함께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위안부’문제는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주제입니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범죄 ‘과거청산’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소환되는 주제이죠. 그런 만큼 학계와 예술·문화계의 많은 분이 노력해온 결과가 쌓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위안부’문제를 여전히 모른다 생각하고 그래서 알려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온도 차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걸 좁히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즉 ‘위안부’ 지식의 공공화가 웹진 <결>에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전문 연구 결과를 전하는 <자료해제>, <좌담>, <논평>, 그리고 이 주제에 관여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에세이>와 <인터뷰> 모두 다섯 개의 코너가 기획된 배경입니다. 웹진 <결>은 학생이나 일반인이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궁금한 게 생겼을 때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지식창고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매 호 차곡차곡 쌓이는 글을 기술적으로 연결해 독자들이 웹진 <결>의 바다에서 파도타기 하듯 연관 지식을 탐색할 수 있도록 설계한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서, 저를 포함해 전문 연구자가 쓰는 글은 아무리 쉽게 쓴다고 해도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글을 쉽게 쓰는 문제가 아니라, 지식 자체를 완전히 다른 목적과 독자에 맞게 구성하는 일이었고, 별도의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인 저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가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특히 나눔의 집 김대월 실장 인터뷰(2019년 10월 8일자)나, 원래 연재 글로 기획한 <할머니의 방>을 흥미롭게 봤죠.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활동가의 세계와 김대월 실장님의 표현을 빌린 “퇴근 후” 할머니들의 일상이 손에 잡히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허윤 선생님의 글 「지구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 영화 <나는 부정한다> 다시보기」(2021년 11월 22일자)도 유익했습니다. 피해자들이 한 분도 안 남게 되는 날이 오면 ‘증언’과 ‘기억’도 사라질 거라는 많은 이들의 걱정에 훌륭한 답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료해제>는 독자에게 가장 인기 없는 코너이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기획으로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웹진 <결>의 운영 주체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소속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입니다. 이 기관들은 여성가족부의 지원과 감독을 받고 있지요. 박물관과 기념관의 나라인 독일에서는 그것을 유지하는 일을 해당 주 정부가 맡아서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입니다. 돈을 준다는 이유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박물관과 전시관이 정부 지원으로 운영됩니다. 나랏돈이 들어가는 만큼 국가가 원하는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돈은 ‘나랏돈’이 아니라 ‘공공자금’이므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가 원하는 방향을 따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죠. 그럼 ‘공공의 이익’은 누가 정하느냐, ‘위안부’문제에 관한 ‘공공의 이익’은 뭐냐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이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시민’인 우리가 의논하고 합의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웹진 <결>이 이런 논의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정용숙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조교수

    웹진 <결> 편집팀

  • 수많은 “성찰”의 연속에서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후기
    2022년 에세이 수많은 “성찰”의 연속에서 -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후기

    COVID-19와 온라인 개최 덕분에 얻은 특혜  지난 10월 중순, 아시아연구 가을학기 대학수업의 일환으로 학부생들 20여명과 함께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 컨퍼런스”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COVID-19로 국제 컨퍼런스가 온라인으로 개최된 덕분에 학부생들과 함께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최근 연구와 토론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영상으로 개최된 덕분에 컨퍼런스가 끝난 지금도 생각날 때 마다 유튜브 영상으로 내용을 확인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컨퍼런스에 함께 참가한 학생들은 K-POP을 즐기고 열광하는 학생들이다. 코로나 이전 까지만 해도 석 달에 한번, 심지어는 한달에 한번씩 서울을 오가며 팬 미팅에 참가하는 이들도 있다. 주말에 친구들과 혹은 엄마와 함께 여행삼아 한국을 오가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일관계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세대 프레임”이 일종의 설득력을 가질 만큼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했다. 한편 이들은 대학에 와서야 ‘“위안부’”문제를 알게 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구동성으로 다들 공교육을 통해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아쉬움의 감정은 회의 둘째 날 세션4의 “전쟁의 성별성과 평화의 문제”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학생들 나름의 반응이었다. 즉, 당시 “위안부”로 끌려간 같은 또래 여학생이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나와 결부시켜 보면 어떨까?라는 히라이 미쓰코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들은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고 치가 떨린다고 했다. “관부재판”을 지원한 일본시민들  실은 학생들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봄학기 대학수업에서 막 출판된 “관부재판”이란 신간도서(花房俊雄・花房恵美子,『関釜裁判が めざしたもの: 韓国の おばあさんさちに寄り添って』,白澤社/現代書館、2021年)를 함께 읽으면서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5월에 번역서로 출판되었다.[1] 이 책의 저자 하나후사 도시오씨와 하나후사 에미코씨는 “전후 책임을 묻는다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하는 모임)”을 조직하여, 관부재판의 원고를 돕고 입법 활동을 펼친 일본인 부부이다. 이 책은 관부재판을 지원하면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고, 어떻게 소송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98년 판결 이후 일본 사회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28년간의 활동과 원고들과의 교류를 담은 기록이다. “지원하는 모임”은 2013년에 해산했다. 책에서는 이들이 그동안 할머니들과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 할머니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진정한 화해와 바람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활동과 원고로 참여한 할머니들의 증언 내용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바람직한 “지원”과 성찰 역사적 사실과 증언에 대한 참고자료와 함께 이 책을 과제도서로 정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위안부’와 ‘정신대 피해자’와 함께 지내온 28년간을 돌이키며 “지원운동을 하면서 느낀 의문과 고통”을 함께 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람직한 ‘지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독자 스스로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저자인 하나후사씨 부부가 할머니들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위하는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한 멤버들의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면면들이 마지막 장에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다. 일본의 보통 시민들이 재판을 지원하고 할머니들의 삶을 내면화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시민 활동은 차세대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고 인식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책의 행간을 통해 “나의 문제”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이 “성찰”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한 단어와 만났다. 그 단어는 바로 '마이크로어그레션 (microaggression)'이다. 일본어로 잘 옮겨지지 않아 카타카나로 번역서가 출판되어 있다. '아주 작은(micro)'과 '공격(aggression)'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해석하면 미세하지만 공격적인 차별을 일컫는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차별의 대상은 인종, 젠더, 신체 등으로 겹겹이 얽히고설켜 있으며, 이러한 차별은 경계 사이 마이너리티에 대한 머조리티(majority)의 몰이해가 근원이다. 한국어로는 “먼지차별”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전시 성폭력 피해가 역사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났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제국의 국가 책임은 물론 “텐노우세이(천황제)”에 대한 제도적 폭력을 쟁점화하고, 진정한 사죄를 받기 위한 목소리를 낮추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자로서의 삶을 “나의 문제”로 생각할 때,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지했던 나”, “행동하지 않는 나”,  “방관하는 나”, 이런 내가 할머니들을 먼지 차별 속으로 몰아가는 구조적 폭력의 가담자이지는 않았을까? 그 어딘가에서 아픈 경험을 털어 놓지 못한 채 숨죽이고 계실 그리고 돌아가신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리며 이런 성찰을 해 본다.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시작으로 “질문”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컨퍼런스 프로그램을 통해 제기된 여러 물음에 대한 사색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의식의 밑바닥을 맴돌고 있다. “너무 몸이 아파서 죽고 싶다. 그렇지만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고운 옷도 입어 보고 싶다.” 고인이 되신 피해자 할머님의 역설적인 말씀이 소개되면서 던져진 폐회사 물음과 맺음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과연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과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시작점.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사람(human being). 부단한 성찰과 실천을 통해 나 자신이 수많은 관계 개선을 만들어나가는 시작이고 싶다 .  함께 읽기 <2021 여성인권과 평화 국제컨퍼런스> 폐회사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정유진)  

    권향숙

  • ‘시체 구덩이’의 응시와 ‘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
    2022년 논평 ‘시체 구덩이’의 응시와 ‘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

    훼손된 몸의 (비)재현 얼마 전 제27회 제네바국제영화제에서 가상현실(VR)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소요산>(김진아, 2021)은 이른바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성병 치료를 명분으로 강제 수용했던 장소를 배경으로 이 작품을 만든 김진아 감독은 전작 <동두천>(2017)을 통해서 1992년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살해당한 여성 윤금이 씨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영화의 촬영과 형식이 가상현실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과 다루고 있는 주제가 미군 ‘위안부’ 문제라는 점뿐 아니라 바로 그 두 공통점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감독의 고민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1992년 동두천에서 주한미군에 의해 벌어진 윤금이 씨 살인사건은 피해 기억의 재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악명이 높은 사례를 만들어 놓은 사건이기도 하다. 피의자 마클의 신병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이 부각되면서 SOFA의 개정과 주한미군 범죄 근절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중의 주목을 원한 운동단체들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을 그대로 일반에 공개했던 것이다. 훼손된 시신과 참혹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이 이미지는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하며 운동의 확산에 기여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와 같은 재현이 갖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운동 내부에서 큰 논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 때 이 운동을 접했던 김진아 감독은 그와 같은 “폭력의 재현은 보는 사람에게도 그 피사체에게도 굉장한 폭력”[1]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피해자(의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고” 이 사건을 재현하는 문제를 25년 가까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2] 그 오랜 고민 끝에 만든 <동두천>은 1992년의 사진과는 달리 폭력의 피해를 손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360° 가상현실 카메라로 촬영된 동두천 거리에서 관객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보아야 할지 쉽사리 판단 내리지 못한다. 셔터가 내려간 클럽 뒤편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군가의 하이힐 소리가 들리고, 그 발소리를 따라 혹은 스치듯 마주치고 지나간 어느 여성이 사라진 쪽을 따라 들어가면 비좁은 단칸방에 도달한다.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을 듯한 그 좁은 방바닥에는 널브러진 옷가지 사이로 흥건한 피가 고여 있다. 김진아 감독은 이 작품에서 자신이 취한 전략을 “몸의 부재(absence of the body)”라고, 다시 말해 가상현실로 관객이 도달한 사건의 현장에 “사체는 없지만 대신 살해의 흔적이 남아”있도록 하는 ‘보여주지 않음’의 전략이라고 말한다.[3] 시체구덩이 사진(death pit photograph)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 공개가 제기하는 재현 윤리의 문제와 이에 대한 <동두천>의 대답은 김진아 감독의 표현처럼 “후기식민지 사회에 사는 여성”[4]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후기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피해는 어떻게 재현되며 여기에는 어떤 응시가 작동하는가의 문제, 그 응시가 궁극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하는 명분으로 피해자의 훼손된 신체를 담은 사진을 보여주고자 한 이들은 그 사진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믿었)으며 또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의 문제. 비슷한 재현의 문제는 그 이후에도 반복되었는데, 2002년 주한미군이 모는 장갑차에 두 명의 중학생이 치어 숨진 사건 당시에는 SOFA 개정 운동과 함께 두 피해자의 훼손된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고 현장 사진이 시위 장소에서 피켓이나 리플릿에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되어 2018년 일반에 공개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구덩이에 쌓여있는 사진과 영상기록물은 그처럼 훼손된 신체의 사진적 재현이 인터넷2.0이라는 플랫폼을 만남으로써 제국주의 피해에 대한 문제적 응시가 어떻게 우리 일상에 편재하는 것으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연구팀에 의해 디지털로 배포된 영상은 언론사의 채널들을 통해 즉각적으로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노출되었고, 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개개인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사진 1] 참조. 문제가 되는 사진 이미지를 흐리게 처리하였다).  이른바 ‘시체구덩이 사진(death pit photograph)’으로 불리는 이러한 유형의 피해기록들은 서구 사회의 홀로코스트 피해 기억 재현에 있어서도 박물관과 여러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주 활용됐으며, 가해자 집단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훼손된 신체들이 사물처럼 쌓여있는 사진적 기록들은 이미지 자체의 충격적인 도상적 표현과는 무관하게 실상 그 피해를 낳은 폭력과 피해당사자가 당한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진사학자 야니나 스트럭은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과거의 파편(fragment)이기 때문에 그 파편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진적 이미지가 과거의 진실을 반영한다는 순진한 믿음은 오히려 그 이미지를 현재에 공개하고 전시하는 이들에 의해 언제든지 이미지의 서사가 새롭게 가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비판한다.[5] 중국 윈난성에서 30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당한 사건은 연구팀이 영상자료와 함께 공개한 미군 작전일지 문서자료에서 확인되지만, 공개된 시체 구덩이 영상자료가 이 문서자료 속 사건의 결과를 찍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영상 공개는 오히려 이 영상자료에 대한 NARA 메타데이터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일본 극우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불필요한 논란을 낳았다. 즉, 이 사건에서도 영상자료는 그 자체만으로는 과거의 파편일 뿐, ‘위안부’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증거 역할을 하거나 그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후기식민지 여성과 시체 구덩이의 응시 미디어학자 바비 질라이저는 한발 더 나아가 잔혹한 피해의 사진적 재현이 잔혹 이미지를 도상적으로 친숙하게 만듦으로써 “잔혹행위의 정상상태화(normalization)”를 초래할 수 있음을, 따라서 현재에도 존재하거나 언제든 발생 가능한 고통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6]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도, 일본군‘위안부’ 추정 피해자들의 시신이 쌓인 구덩이를 찍은 영상도 그들이 그와 같은 폭력에 노출되기까지 삶의 구조적,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해줄 수 없고, 단지 발생한 폭력을 도상적으로 스펙터클화하여 관람자들이 관음적으로 소비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적인 비판에 그칠 것이 아니라 김진아 감독이 말한 “후기식민지 사회에 사는 여성”의 문제라는 측면에서도 이러한 전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의 시체 구덩이와 달리 후기식민지 한국에서 바라보는 2차대전 당시의 시체 구덩이는 잔혹함의 구덩이일 뿐 아니라 어떤 실패의 상징이기도 하다. 식민 상태에 있었기에 존재할 수 없었던, 그래서 피해자들을 구출할 수 없었던 민족국가의 실패, 그리고 민족국가의 수립 이후에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7]한 가부장의 실패. 사진학자 존 택은 다큐멘터리적인 사진적 이미지가 관람하는 자와 관람되는 자(피사체) 사이를 특정한 지배와 종속의 온정주의적 관계로 봉인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적 증거’라는 밋밋한 레토릭보다는 ‘경험에 관한 감정에 호소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작동하기 때문이라 말한다.[8] 파괴되기 쉬운, 구출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여성, 그리고 그러한 구출의 참혹한 실패라는 감정의 드라마가 동두천 셋방과 중국 윈난성 마을의 시체 구덩이 이미지를 향한 응시로 완성되는 것이다. <동두천>에서 사람이 없는 빈 단칸방을 VR로 보여준 김진아 감독의 ‘보여주지 않음’의 전략은 달리 말하면 빈 구덩이만 보여주는 전략, 아니 그보다는 그 빈 구덩이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실패한 ‘구출’의 대상으로 타자화, 사물화된 시체 더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구덩이 밖에서 구출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누군가로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는 재현, 그 구덩이 속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재현. 이것은 어쩌면 일본군‘위안부’ 피해 기억의 재현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각주 ^ 씨네21, 2021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PIFAN Daily, “‘소요산’ ‘동두천’ 김진아 감독, VR을 통해 여성 재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2021.7.14.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동두천’, ‘소요산’의 김진아 감독 인터뷰”, 2021.7.17. https://medium.com/ixi-media/case-study-동두천-소요산-의-김진아-감독-인터뷰-af0277d1a246 (2021.12.17. 검색완료)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위의 글.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ixi media, 위의 글. ^ Janina Struk, Photographing the Holocaust: Interpretations of the Evidence, New York: Routledge, 2004, pp.212-213. ^ Barbie Zelizer, Remembering to Forget: Holocaust Memory through the Camera’s Ey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p.212. ^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 사건 당시 슬로건. ^ John Tagg, The Burden of Representation: Essays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pp.8-12.

    김한상

  •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2 - ‘세렌디피티 인 대구’
    2022년 에세이 이용수 선생님 방문기 2 - ‘세렌디피티 인 대구’

    원투텐? 원투원! “아.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렛 그랜마 리 카운트 텐.” “할머니, 하나부터 열까지 세보시래요.” “하나, 둘, 셋…” 10월 25일 아침. 이용수 선생님 댁 거실은 마이크 테스트가 한창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취재진이 선생님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했다.  카메라, 마이크 기술 테스트. 연출자와 카메라맨이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틈에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민 선생님은 뒤에 있는 프로듀서의 팔을 톡톡 두드린다.  “<아이 캔 스피크> 봤어요?”  “노.. 이즈 잇 다큐멘터리?” 느닷없는 선생님의 말 걸기에 선생님 허리에 마이크를 채우던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인다. “노, 잇츠 무비.” 통역사가 선생님 대신 답한다. 미 하원에서 ‘위안부’문제 관련 결의안(HR121)을 통과시킨 이야기가 담긴 이용수 님에 관한 영화라고.    “와우~! 한 번 봐야겠어요.” 프로듀서의 대답을 받아낸다. 탁월한 방송 코디네이터의 감각.   원투텐? 하나부터 열까지 갈 것도 없이 ‘원투원’으로 치고 나오신다.  당신을 취재하러 왔다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엄한 곳으로 에둘러 가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를 콕 짚으신다. 어떤 코디네이터도 능가하는 감각적인, 진격의 코디네이트.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수야 선생님은 본인의 침실 문을 스윽 열어 주신다. 화사한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침대 머리맡에 펼쳐진 병풍 속에는 서예를 즐기고, 한가로이 나물을 캐고, 바람결에 연을 날리는 어린 수야(용수의 ‘수’. 어린 시절 가족들이 부르던 아명)가 있다. “하도 원통해서 내가 처녀 적에 이랬다고 이걸 맞췄어.” 프로듀서는 연 날리는 모습이 제일 좋다고 했다.  다들 그림에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 선생님은 방의 형광등을 탁! 켜신다.  ‘조명빨’도 놓치지 않는 방송 전문가의 면모.    비비안나 다음엔 화장대 거울에 달린 십자가 목걸이로 이동하신다. 이 묵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현직 교황 프란시스의 선물이다.  교황님께 직접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 진귀함에 모두가 놀랄 즈음, 십자가에 입 맞추시고 고개를 들어 “비비안나” 세례명 투척. “오, 뷰티풀.”  프로듀서의 감탄사는 어쩌면 예견된 수순일 뿐.  이것이 끝인 줄 알면 쑤야 선생님을 띄엄띄엄 안 것이다. 초록색 파우치 안에 고이 접힌 하얀 미사포를 살포시 꺼내신다. 카메라도 없이 속출하는 방송‘분량’들. 프로듀서는 이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여쭙는다. “찍어야지. 기도하는 것도 찍어야지.” 그러라고 준비해 두신 것 아니겠는가. 단박에 촬영 하이라이트와 ‘분량’까지 코디네이트 완료! 곱은 거 이번엔 야외촬영이다. 촬영진을 태운 승합차는 시내 한복집 앞에 멈춰 섰다.  ‘금오실크’. 선생님이 자주 가시는 한복집이다. 댁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코리안 드레스 뷰티풀-”을 외치는 또 한 명의 진격의 캐릭터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수 선생님과 한복집 사장님은 방송을 위한 촬영 스케치에는 간단히 임하셨다. “곱은 거(=고운 것) 함 입히볼까?”  “응.”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국서 온 프로듀서에게 대뜸 한복을 입어보라고 종용하신다.  “노노노노. 쿄오와 다분 이소가시이까라.” 일본어를 잘하는 영국 여성 프로듀서는 당황하여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오늘은 바쁘다고 완곡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소가시꾸 나이. 다이조부.”   흔들림 없는 ‘그랜마 리‘의 단호한 “다이조부”(=괜찮다)로 게임 오버.  한사코 겉옷만 걸쳐보겠다던 프로듀서는 ’치마저고리‘부터 입어야 된다는 그랜마 리의 성화에 결국 탈의실로 끌려간다.   “빨리 나오세요~~!”   “아니야. 천천히~~!”  탈의실 앞에서 목을 빼고 조르는 그랜마 리와 ‘천천히~’를 외치는 사장님의 우당탕탕 주문들은 통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촥! 촥!”  양쪽으로 커튼이 걷히고 프로듀서가 나타났다. “와~ 이뻐 이뻐…!”  가게 안은 물개박수와 탄성으로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진분홍 치마와 은박이 수놓인 흰 저고리,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한복이 프로듀서와 썩 잘 어울린다.  자신들의 연출작에 뿌듯해진 두 총괄 연출가들은 “사진 좀 찍어두자”며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오마이갓 다음 행운의(?) 코리안 드레스 모델은 카메라맨. 순순히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타국에서의 촬영 첫 날. 취재진의 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연출가 앞에서   카메라맨은 온 몸을 두른 우주복 같은 촬영 장비를 하나씩 해체하는 중이다.   남자 한복은 처음 보는 것이라 기대된다며 프로듀서도 이 ‘장꾸’(장난꾸러기) 대열에 합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생각만해도 우섭다 “하이고 우섭다. 생각만 해도 우섭다.” 카메라맨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선생님은 연신 “재밌다”를 연발하신다.  카메라맨이 키가 큰데 과연 옷이 맞을지 궁금하다고 프로듀서도 거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이윽고 바지저고리에 도포까지 성장(盛裝)을 한 카메라맨이 등장했다. “모자! 머리 머리, 빨리 빨리.” 패션의 완성은 갓이다. 사장님의 주문에 직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갓과 옷 여밈 장신구들을 챙겨 내온다. “까르륵 꺄르륵” “어메이징~”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질 듯한 명랑한 소용돌이. “우째 그게 또 맞는 게 있노.” 다들 반신반의했던 의혹은 걷히고, 키 큰 카메라맨에게 맞춤한 듯 딱 떨어지는 핏. 갓을 쓴 그의 모습이 어엿하다. “양반, 양반” 어느 틈에 그의 옆에 선 선생님은 양반의 복장이라며 기념 촬영 중간 중간에 적절한 해설을 더하신다.      메즈라시이 프로듀서가 방금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메즈라시이…” “에-엔니”   선생님은 사진을 가리키며 ‘드문, 희귀한(메즈라시이)’ ‘영원한(에엔니)’이라고 반복하신다. “아. 소우데스네. 포레버-” 프로듀서가 화답한다. 번갯불에 회오리바람 같은 ‘뷰티풀 코리안 드레스’ 런웨이는 성공적이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 두 연출가의 피날레 촬영이 이어진다.  앙드레김 패션쇼의 마지막 포즈, 이마가 닿을 듯 말듯 우아한 이 몸짓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 순간 주인공은 나야 나’. 트렌드세터 다음 행선지는 고즈넉한 한옥 마을에 자리 잡은 힙 플레이스, 카페 아눅이다. 단골 쑤(야)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출타 중이던 사장님이 돌아오셨다.  갓 구운 베이커리를 손수 내오신다.  선생님은 이 집의 양송이 크림 스프를 특히 좋아하신다. 오늘도 사장님은 선생님을 위해 양송이 크림 스프를 각별히 포장해 내어 주신다. 사장님은 처음엔 이용수 선생님이 ‘의외로’ 이곳을 자주 찾아주셔서 놀랐다고 한다.  트렌드세터(Trendsetter)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의외’이다.    선생님은 이 곳에서 힙스터들과 어울리며 요즘 감성을 즐기신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 카페 아눅 바리스타님의 타투였다. 왼쪽 팔뚝 전체에 커피나무를 새겨 넣은 바리스타님의 문신을 본 일행들은 ‘대단하다’며 몰려들었다.   조선 사람이기도 한 쑤야 선생님은 ‘좋다’ ‘신기하다’는 말 대신 연신 바리스타님의 팔뚝을 쓰담 쓰담 하신다. 2021년 대한민국을 사는 조선 힙스터의 유연한 리액션. 셀러브리티 인 대구 “그랜마 리 이즈 셀러브리티 인 대구.” (리 할머니는 대구의 셀럽이구나.)  선생님을 뵌 지 반나절도 안 되어 프로듀서가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셀럽의 필수코스는 포토타임이다.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 요청을 수락하신 선생님은 시크하게 엄지와 검지를 포개 스몰하트를 날려주신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메라맨이 슬그머니 자기 손가락을 겹쳐 본다.  그의 심장도 추출 성공.  한 주먹도 필요 없고, 손가락 두 개로 심장을 꺼내 흔들며 깔깔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문득 ‘대구의 힘’이 떠올랐다.    ‘喜움’   일본인들의 ‘혼마찌‘[1]였던 종로 한 복판에 희움이 살아 있는 것도,  그 희움에서 고(故) 김순악 선생님이 “난 너거캉 지금 얘기하는 게 막 재미가 나서 죽겠다”고 하셨던 것도, 이용수 선생님이 오늘 마실을 다니시며 골백번 “재밌어”를 연발하시는 것도  다 깊은 내력이 있음을 알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끌려간 출발점인 고향을 다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구의 생존자들은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웃고 떠들고 잠을 청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희움 역사관’ 등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곳에는 희움을 ‘喜움’이라 부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응달진 날에도 뜻밖의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 일, 형태가 없었던 즐거움을 두 손으로 주조하는 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흔쾌히 ‘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주 ^ (편집자 주) 本町. 일본인 집성촌

    김리라

  •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것
    2022년 논평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것

    1. ‘여성됨’의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이제 어지간히 분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여성혐오 세력, 안티페미니스트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고,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이를 제재하기는커녕 혐오 세력의 눈치만 보는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문제”라는 말은 재천명되어야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 글을 통해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 시대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는 의미를 점검하고자 한다.  여성인권(women’s human rights)이라는 가치가 국제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근래의 일이다. 국제사회는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사회권과 자유권으로 이원화되어 체제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인권을 보편적 이념으로 제시하고자 했고, 이때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이슈와 함께 여성인권이라는 범주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는 1993년 비엔나에서 열린 제2차 유엔세계인권회의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여성회의에서 ‘여성인권’이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여성인권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은 아마도 “여권은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일 것이다.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당시 미국의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인권은 여권이고 여권은 인권이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는 전시 성폭력, 지참금 살인, 여아살해 등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사례를 예로 들어 ‘여성으로서의 권리’가 보편적 인권과 별도로 논의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인권=여성인권’임에도 여성인권이라는 동어반복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됨’ 그 자체로 경험하게 되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폭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가 대표적이다. 성폭력, 성매매, 아내구타는 여성 개인에 대한 폭력을 넘어 여성 집단을 예속화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 여성과 여성 억압적 제도 사이에는 여성 스스로가 동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문화적, 절차적 개입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됨’은 성역할 규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극단에 전시 ‘위안소’ 제도가 있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문제로 사유한다는 것은 (‘남성됨’과 극단으로 상반되는) ‘여성됨’에 대한 구조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을 견지한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증언이 있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1년이다. 이러한 증언은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정치적 수준의 민주화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운동 단체가 성장하고 활동이 가시화되었던 시대적 배경 속에 자리한다. 특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사건이 교도소 내 단식투쟁을 동반한 피해자의 적극적인 공론화를 통해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성폭력에 대한 민중의 비판적 문제의식이 만들어질 수 있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쳐서야 “남편도 자식도 모두 죽고 없는 지금 눌러온 한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다”는 김학순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었다.[1] 냉전 종식 이후에야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될 수 있었듯이, 한국에서도 1990년대가 되어서야 김학순의 증언이 청취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었다.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드러난 김학순 이전의 ‘위안부’ 피해자가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을 ‘최초’로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혜인은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사회는 이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2] 어쩌면 당시 청취자들은 이들의 호소를 인식할 만한 인권의 프레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학순의 증언은 ‘여성됨’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여성인권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청취된 최초의 피해 증언이었다.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국제사회적 프레임 역시 제3세계를 비롯한 전 세계 여성 개인들의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을 청취하면서 만들어졌다. 동시대라는 지평에 놓여있긴 해도 엄밀히 따지면 시기적으로 김학순의 증언은 비엔나 인권회의를 앞선다. 특히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르완다와 보스니아의 내전 당시 발생한 전시 강간, 무력 분쟁에서의 성폭력 피해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로 대두되었다.[3] 그밖에 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글로벌 페미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도전을 통해 여성인권의 보편성은 끝없이 의심되고 도전받으며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인권의 보편성과 상대성이라는 쟁점, 인권의 담지자로서의 여성 개인과 집단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여성인권이라는 쟁점은 이처럼 서로를 견인하며 종합되었다. 자유권, 사회권 외의 연대권으로 분류되곤 하는 3세대 인권이라는 말이 대표하듯이 인권 패러다임은 항상 진화 중이다. 그렇다면 여성인권 이슈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떤 방향으로 견인해야 할까?   2. 여성해방의 문제 일찍이 “서구의 시선 아래” 제3세계 여성들의 현실을 단일한 방식으로 분석하곤 하는 유럽중심 여성주의를 비판했던 찬드라 모한티는 전 세계 여성들이 반자본주의 실천에 개입해야 한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4] 많은 전문가들 역시 “인권이 전문적 권리체계로만 치달으면 거시적 사회변동과 분리된 미시적 개입 테크닉으로 왜소화”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5] 진화의 과정 중에 있는 여성인권의 문제의식 역시 협소한 권리 증진의 실험실과 재판장을 넘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과 연동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이 쓴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꿈지모 옮김, 동연, 2013)라는 책에 함께 생각해볼 만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 책의 부제는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다. 베이징 여성회의 몇 달 전 힐러리는 그라민 은행의 여성 전용 소액대출(microcredit) 사업을 통한 여성들의 자립 성공 사례를 확인하고자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방글라데시의 농촌마을에서 여성들과 회견을 가진 힐러리는 농촌여성들로부터 “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암소가 없다고 답한 힐러리에게 여성들은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자신의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라며 동정했다고 한다.[6] 이러한 사례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단순히 원조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에 적극 참여하며 자급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훈훈한 일화다. 하지만 암소를 소유한 방글라데시 여성과 암소가 없는 힐러리라는 대결은 어쩐지 범박하다. 각각 사회권과 자유권을 상징하는 듯한 모양새이다. 우리는 이 경제체제가 둘을 대결시키고 취하는 이득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높은 이자 수익을 통해 달성한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누구로부터의 수익이며 어디로 재투자 되었는가? 채무자 여성의 수를 늘리는 발전 전략이 왜 가난한 여성들의 해방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힐러리가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언급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 억압적 문화에서만 기인한 문제인가? 결국 힐러리와 방글라데시 여성의 대결은 자유권과 자유권의 경합에 머물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는 당시에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피해자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가 일본에서 피폭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 온 사연을 듣고서 자신의 과거도 털어놓게 되었다.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중략)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7]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의 틀로 사유한다고 했을 때 이 장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명의 식민 지배의 피해자는 왜 가난한 여성 노인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일까? 폭력의 제도화와 여성 배제의 경로 문제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명예대표를 지낸 이효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정대협 활동 초기 생존자 지원 활동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했다.[8] 위로행사, 생존자 복지활동,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생활대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의 활동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무시하고 배제했던 이들을 경제적으로 보살피는 활동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지급받았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경제 성장이 촉진되었으나, 국제사회적 여성인권에 대한 명분도 제기되지 않았던 시기 이 돈이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으로 지급될 리 만무하다. 이후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복지비용 명목으로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계비와 임대주택 입주권이 지급되고 의료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이슈는 여성인권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김학순의 증언은 경제 발전과정과 사회 구성에서 배제된 경로와 위치성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들의 불인정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통해 현시한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 이후, 혹은 ‘미투’ 이후 피해자에 대한 따돌림, 해고, 승진 누락, 좌천의 많은 사례를 목격했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여성들의 사회적 승리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누가 피해를 증언하며 피해자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간 여성인권 개념을 통해 피억압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국내, 국제사회에 자신의 피해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제 여성인권 개념을 통한 사회적 재편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인권 의 가치를 고려한 배상 문제는 사회의 재분배 전략과 함께 가야 한다. 피해자의 말을 청취하고자 하는 여성주의의 윤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성장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인지하고 배제된 자들 중심의 사회적 재편을 모색하는 정치학의 같은 말일지 모른다.     각주 ^ 조현욱, “나는 정신대” 처음 밝힌 김학순할머니, 중앙일보, 1991.8.15. ^ 한혜인, 우리가 잊은 할머니들...국내 첫 커밍아웃 이남님, 타이에서 가족 찾은 노수복, 한겨레, 2015.8.7.  ^ 베티 리어든,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황미요조 옮김, 나무연필, 2020, 223쪽. ^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없는 페미니즘』, 문현아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5. ^ 조효제, 비엔나 인권체제 25년, 한겨레, 2018.6.5. ^ 마리아 미즈,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꿈지모 옮김, 동연출판사, 2013.  ^ 이희자, 김학순을 추억하다 1: 김학순 할머니와 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https://kyeol.kr/ko/node/179 ^ 이효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9, 218-223쪽. 

    김주희

페이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