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 씨에게 전화가 걸려오다
1991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 위안소 및 ‘위안부’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네 개의 시민 단체가 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안부 110번’을 운영했다. 필자 또한 ‘종군위안부문제를생각하는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사흘 동안 점심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위안부 110번 조사 카드’는 현재 100여 장 남아 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한 장 한 장 작성한 A4크기의 카드다. 카드에는 정보 제공자의 이름과 주소, 보고 들은 때와 장소, 소속 부대(당시 직업), 위안소의 형태, ‘위안부’의 연령과 민족, 기명(妓名), 모습, 에피소드, 군의 관리(현지에서의 강간 등), 재판(기타), 접수일 등을 적는 칸이 있다.
정보 제공자 대부분은 일본군 장병 출신이었지만, ‘위안부’ 당사자의 정보 또한 두 건이 접수됐다. 한 건은 “한 번 찾아와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미야기현(宮城県)에 사는 송신도(宋神道) 씨의 정보다. 3월 말에 필자는 송 씨를 찾아갔고, 약 1년여 후인 1992년 4월 5일, 송 씨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다른 한 건은 도쿄에 거주하는 당사자 다미(가명) 씨가 직접 보내온 정보다. 필자는 우연히 다미 씨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언론에는 한국 사람 얘기만 나오던데, 국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실까 해서요.”
다미 씨는 제보 이유를 먼저 밝혔다.
그의 조사 카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다른) ‘위안부’보다 과거 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후 필자는 다미 씨가 운영하는 가게로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통화할 때의 느낌과는 달리, 민첩하게 뒷정리를 하는 모습이 발랄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마주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몸이라도 고달프면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겠지만… 옛 기억이 유령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든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점포 세 곳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다미 씨를 위협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 그리고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
부모님은 다미 씨가 여섯 살, 남동생이 네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투기꾼이라고 해야 할까, 일확천금을 꿈꾸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다미 씨와 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끔씩만 집에 왔다. 할머니는 곧 돌아가셨고, 다미 씨와 동생은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돈을 벌면 게이샤의 전차금을 갚아주고 집에 들였다며 떠들어댔고, 경기가 안 좋을 때면 집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어요. 엄마라고 부르라는 사람이 두세 명 있었는데 다 싫었어요. 분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돈도 보내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월사금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월사금 얘길 꺼내면 허리가 굽은 증조할머니는 사촌집에 돈을 빌리러 가셨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했고, 아이도 두세 명 더 낳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증조할머니는 이따금 나와 동생 편에 쌀을 들려 보내주곤 했다. 가난한 나날이었지만 별 탈 없이 지냈다.
“할머니와 살았던 5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저는 손주가 아니에요. 증손주죠.”
다미 씨는 소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농가에 애보개로 들어갔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어디로 보낸 거야!”
라며 증조할머니를 두들겨 패고, 농가로부터 받은 전차금을 쌀로 돌려주고 다미 씨를 데려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증조할머니에게 다미 씨와 동생을 떠맡긴 자기 책임은 나 몰라라 하고,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를 쳤다.
“이 할망구가 내 딸을 애보개 따위로 보내? 오기로라도 내가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에 보내겠어!”
다미 씨는 오차노미즈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오차노미즈는 전후에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 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말한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다미 씨는 또래 아이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밖에서 애를 보고 있을 때 소풍 가는 동급생의 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다미 씨는 아기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몸을 숨겼다.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일 년 늦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모리(大森)에 있는 게이샤 집에 연계(年季) 양녀로 맡겨졌다. 아이를 고용주의 호적에 올렸다가 계약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호적으로 되돌리는 고용 형태였다.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는 다미 씨를 귀여워했다.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의 한 종류)을 배우기도 하고, 게이샤가 오비(帯, 기모노의 허리 부분을 감싸는 띠)를 매는 것을 돕거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 있을 때는 행복했어요. 몸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예를 파는 사람도 있었어요. 유녀(女郎,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와는 달라요.”
유곽에서도, 샤미센, 고우타(小唄, 에도시대 속요), 춤 같은 기예를 갖춘 게이샤가 접객을 하는 화류계에서도, 처음 손님을 받는 것을 ‘미즈아게(水揚げ)’라 불렀다.
“열네 살 때 미즈아게를 했어요. 열네 살이라구요.”
바로 그 무렵, 아버지가 제재업을 시작한다면서 후나바시(船橋)의 업자와 함께 나타났다. 다미 씨는 열네 살이었다. 업자는 아버지와 함께 제재업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후나바시에 있는 다이키치로(大吉楼)라는 유곽 주인의 조카였다. 아버지는 이미 다미 씨를 다이키치로의 몸종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전차금뿐만 아니라 거액의 사업자금도 빌렸다.
“게이샤 집에서는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빚차금의 저당으로 잡혔어요. (게이샤 집보다) 유녀(女郎)가 훨씬 더 돈이 되잖아요.”
다이키치로는 격식 있는 가게였다. 다른 가게에서는 긴 속옷 차림으로 가게 앞에서 호객행위를 시켰지만, 다이키치로에서는 가부키(歌舞伎) 등에서 연기하는 요시와라(吉原)[1]의 오이란(花魁, 유곽에서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은 이를 일컫는 말)처럼 머리를 커다랗게 묶고, 오비를 앞에서 매고 겉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몸종끼리 싸움이 붙어서 다미 씨가 괴롭힘을 당하자 여주인이,
“오이란이 될 아이와 싸우면 못 써”
라고 나무랐다. 오이란이 되기 전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차금이 적은 몸종도 있었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 다이키치로로 옮겨간 후,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을 한 상태였다.
“여름에 찾아갔을 때 엄마가 저더러 ‘누구?’ 하는 거예요.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비참했어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싶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쯤 되면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지나 봐요.”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는 다미 씨에게 말했다.
“술 파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돼.”
“술 파는 일을 하지 말라니. 이미 유곽에 들어갔다고는 말을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곳에 딸을 팔고도 죄책감이 없었을까요? 자기가 놀러 다니는 곳이니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좋은 단골손님을 만나면 그만이라는 듯이.”
열여섯 살, 위안소로 보내졌다
1944년 가을, 다이키치로는 군의 요청으로 지바(千葉)현 모바라(茂原)에 위안소를 개설했다. 모바라에 해군 항공기지가 완공된 것은 1943년이다. 통상 해군의 항공기지는 해당 기지를 전용하는 항공대가 있지만, 모바라항공대가 신설되지 않아 기존 항공대가 기지를 사용하고, 제로센전투기와 함재폭격기 약 80기 그리고 4,000여 명의 장병이 배치되었다. 기지 근처에 일곱 채의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다이키치로 쪽으로 네 채, 건너편에 세 채. 도쿄의 스사키(洲崎)유곽에서 가게를 접고 온 업자들이 많았다. 다이키치로는 모바라 위안소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열여섯 살이 된 다미 씨는 모바라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다른 위안소에도 또래의 소녀들이 각각 예닐곱 명씩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제 첫 경험이 위안소의 주인이었어요. 강간당한 거죠. 다들 그랬던 것 같아요.”
모바라에 오기 전에 성경험이 없었던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 주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다른 소녀들도 그랬던 것 같다. 다이키치로의 주인은 후나바시에 남았고, 주인의 조카가 모바라의 다이키치로를 관리했다. 위안소 이용자는 물론 일반 장병이 많았다. 특공병도 때때로 위안소에 왔다. 특공병에게 출격 명령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다.
“죽기 전에 놀러 왔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죠. 제 또래였어요. 내일 출격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위안소의 소녀들은 출격 명령을 받은 특공병에게 깨끗한 무명천에 손가락을 베어 일장기를 그려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선물했다.
“○○씨, 즐거웠어요”라는 편지를 놓고 가는 특공병, 모바라를 떠나는 날짜를 알려주는 특공병도 있었다. 그 시각에 밖에 나가 보니, 전투기에서 흰 머플러를 흔들며 위안소 상공을 여러 번 선회하고 사라졌다.
기쿠치(菊池) 하사관은 위안소의 소녀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술에 취해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왔고, 아무 방이나 함부로 문을 열어 민간인을 발견하면 내쫓곤 했다.
“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음을 예감하고 발악한 거구나 생각했어요.”
어느 날, 위안소에서 다미 씨를 몰래 데리고 나와 자신의 숙소인 민가에 데려간 특공병이 있었다. 짚신 두 켤레를 방 앞에 가지런히 놓아 방에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살며시 신발을 들고 창문으로 나왔다. 기찻길을 따라 손을 잡고 달려 특공병의 숙소인 민가로 향했다.
“평범한 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숙소로 쓰는 민가의 아주머니는, 땋은 머리의 다미씨를 보고, “오야마(유녀의 총칭)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여섯 채에서는 그런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이키치로에서는 다미 씨의 행동을 주인의 조카가 눈치 채고도 매상이 제일 높아서 눈감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미 씨는 다이키치로가 다른 여섯 채에 비해 관리가 엄하지 않다고 느꼈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같은 처지인 건너편 위안소의 소녀와 친해져 그쪽에 놀러갔을 때 깜짝 놀랐다. 다이키치로는 욕실과 별도로 손님을 상대한 뒤에 씻는 곳이 있었는데, 건너편 위안소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욕실의 남은 물로 씻는다는 말을 듣고 불결해서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이키치로에서는 자신의 전차금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면 장부를 보여주었다. 싫은 손님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었다. 그러나 좋은 손님만 가려 받아서는 빚이 줄지 않는다.
전황이 나빠지면서 전사(戰死) 소식이 위안소에도 전해졌다. 위안소에서는 날마다 늘어나는 영정에 소녀들이 향을 피웠다.
“많이 죽었어요. 임시로 연인이 되었죠… 빼곡히 늘어선 사진에 향이라도 피우려고.”
모바라 상공에 연합군 전투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다 보였어요. 그루먼(연합군 전투기)이 사람을 쫓아왔어요.”
위안소 요금이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일곱 채의 위안소에서는 높은 요금을 받을 수 있는 민간인도 몰래 들이고 있었다. 다미 씨의 손님이었던 민간인이 “이 전쟁은 질 거야. 푸른 눈의 군인이 이곳에도 많이 몰려올 거야”라고 예언했다. 아내와 별거 중이던 그 남자는 다미 씨의 전차금을 지불하고 다미 씨를 집으로 데려갔다.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필사적으로 일했던 다미 씨의 전차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별거하던 아내가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2]이 끝난 뒤 군의 임무에서 벗어났는데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안소에서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계속 머무는 손님들의 속옷을 세탁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다미 씨는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패전 이후의 생활
다미 씨는 패전 직후, 라면가게와 이발소에서 잠깐 일했으나, 다시 고탄다(五反田)의 화류계로 들어갔다.
“유녀는 두 번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게이샤는 화류계로 돌아간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게이샤가 적었다. 화류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손님의 상당수는 전장에 파병되었고, 사치금지령도 발령되었으며, 전시에 요정과 게이샤 집도 개점 휴업에 가까운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게이샤를 키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샤미센을 연주할 수 있는 다미 씨는 인기가 많았다. 화류계에서는 요정에서 예기를 데려갈 때 조합의 권번을 통해 연락을 하는데, 기다리다 못한 요정에서는 지배인이 직접 다미 씨를 데리러 왔다.
게이샤들은 대부분 게이샤 집에서 살았다. 신참 게이샤는 맨 처음에 ‘오히로메(お披露目)’라는 첫 선을 보인다. 이때 의상비 등으로 목돈이 필요하다. 다미 씨는 대다수의 게이샤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벌이를 게이샤와 게이샤 집이 반씩 나누는 것을 조건으로 게이샤 집에 들어갔다.
요정이 중개하는 투숙객의 주문에 응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파는 물건, 사는 물건이라는 태도가 있었죠. 그럴 때는 밤새 방을 나와 복도에 서 있었어요. 빨리 잠들어 줬으면 하면서요.”
다미 씨의 동생이 늑막염을 앓은 것은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값비싼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맞았다. 어느 날 병원에 갔는데, 동생이 “오늘은 아직 주사를 안 맞았어”라고 했다. 그 날의 주사 값을 내기 전이었다. 다미 씨는 “주사 값이 하루 늦었다고 주사를 놔주지 않는다는 말인가요?”라고 의사에게 거친 어조로 물었다. 의료보호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날 간호사가 알려 주어 처음 알게 되었다. 다미 씨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동생은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다미 씨는 규슈(九州)에서 부모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집의 아들과 사귀게 되어 도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투병중인 동생을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규슈로 향했다.
필자에게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미 씨는 예복 차림의 수많은 참석자들을 보며 “죄다 저쪽 친척들뿐”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한동안 시댁에서 살았는데 ‘며느리’로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도쿄로 돌아왔다.
“돈 때문에 지옥을 경험해서 아끼고 또 아껴요. 저 보고 구두쇠 클럽 회장이래요.”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은 쓰는 게 아니야. 저축한 돈에서 나온 이자를 써야지”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악착같이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슬퍼요.”
오랜 세월,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운영해 온 다미 씨는 그동안 많은 여성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객들도 있었다.
전쟁 후 게이샤로 있을 때, 우연히 모바라의 위안소에 함께 있던 친구를 만나, 줄곧 친하게 지내왔다. 다미 씨가 게이샤였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다.
“모바라에서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그녀만 알아요.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어요.”
다미 씨는 위안소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아, 싫어 싫어. 몸서리 나”라며 이야기를 피했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상해지는 거야”
“잊자, 잊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줘.”
친구는 자신이 번 돈이 “부모 형제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만족한다”고 말한다.
게이샤는 자기도 몸을 파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몸을 파는 일을 경멸했다. 화류계나 위안소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여성들뿐만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장병들, 유곽에서 놀던 남성들조차 성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면 죽고 싶잖아요. 매일 강간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도록 힘들었어요, 하루하루가. 어린애가 힘든 일을, 그런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요.”
다미 씨가 화류계에서 미즈아게를 하는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그도 화류계의 풍습에 따랐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모바라의 위안소에서 약 8개월을 지냈을 때 다미 씨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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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