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작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빨간 기와집』이라고 답한다. 『빨간 기와집』은 조선에서 오키나와 도카시키(渡嘉敷)섬의 위안소로 연행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에 남겨진 배봉기 씨의 반생애에 대한 기록이다. 봉기 씨를 처음 찾아간 것은 1977년 12월 5일, 6살 때부터 남동생과 둘이서 살았던 기억에서부터 시작되는 배봉기 씨의 처절한 인생사를 약 6년간 잔뜩 움츠러든 마음으로 취재했다.
그동안 배봉기 씨를 만나러 오키나와에 갈 때마다 다마코 씨도 찾아갔었다.
다마코 씨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같은 일본인이라고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나보다35살 위였지만 다마코 씨의 타고난 성격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일까.
다마코 씨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하루는 소매를 휘둘러 팔에 감더니 나한테 “고모쿠메시(五目飯, 생선이나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섞어 지은 밥-역자) 만들어 줘”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다마코 씨가 소매를 휘두르던 몸짓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다마코 씨가 남자들에게 성을 팔 때 반복했던 몸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의 이야기는 필자의 저서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 (1993년, 치쿠마쇼보(筑摩書房), 한국어 번역본 없음)에 수록된 「사이판에서 귀환한 다마코 씨」에 실려 있다. 글 속의 다마코 씨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위안부’가 되었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것처럼 처참한 전시와 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낸 여성이다.
1908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다마코 씨
다마코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국어와 수신(修身, 2차 대전 당시 학과목 중의 하나로 지금의 도덕에 해당함 -역자)은 재미있었지만, 산수를 못 해서 학교를 땡땡이치고 산에서 놀곤 했다고 한다. 다마코 씨에게는 여동생과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여윈 다마코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일하던 방적 공장에서 누에고치에 섞여 있는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다마코 씨는 17~18살 즈음이 되던 무렵에는 군항에 있던 요코스카의 유곽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항공기지에 있었던 마을, 나가이 가후(永井荷風)의 소설『보쿠토키탄(墨東綺譚)』에 나오는 다마노이 (玉の井), 가메이도(亀戸) 등의 유곽을 전전하다가 마리아나 제도에 속한 티니안 섬으로 건너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령이었던 마리아나, 파라오, 카로린, 마셜 등 괌을 제외한 섬들은 일본의 통치령이 되었다. 티니안 섬은 마리아나 제도 중 면적이 약 98㎢의 작은 섬이다. 1930년, 국책회사인 남양흥발(南洋興発, 난요코하쓰)주식회사의 제당 공장이 티니안 섬에 설립되었다. 당시 티니안 섬의 일본인 인구 약 16,000명 중 약 90%가 남양흥발 관계자였다. 1942년에는 남양군도(南洋群島)에 거주하는 일본인 전체 수는 약 72,000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 약 46,000명이 남양흥발의 관계자였으며 오키나와현 출신자가 특히 많았다. 1944년, ‘남양흥발은 마리아나 지구에서 전력 증강과 병참 식료품 확보를 위해 회사의 모든 기능을 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군민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마코 씨는 티니안 섬에 도착한 후 오키나와현 출신의 우치마(內間) 씨가 경영하는 유곽인 ‘마쓰시마로(松島楼)’에 고용되었다. 오사카에서 온 노부코(ノブ子)도 다마코 씨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둘이 마쓰시마로에 고용된 사실은 다마코 씨 말에 의하면 『아사히신문』과 『요로즈신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전 난요코하쓰 티니안 제당소의 직원인 아베 오키스케(阿部興資) 씨로부터 제공받아 필자의 저서 38, 39쪽에 실린 티니안 지도에는 『난요아사히(南洋朝日)』, 『신코일보사(振興日報社)』, 『라디오신문사』가 게재되었다. 『요로즈신문』은 이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다마코씨가 갔던 다른 섬의 신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지도에서 마쓰시마로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기루(창기를 두고 영업하는 집), 바, 소바집, 스시집 등의 이름이 적힌 티니안 동쪽 끝 환락가의 다이요(太陽)거리를 따라 늘어선 ‘다마시로(玉城) 온천’ ‘바 구로네코(黒猫)’ 사이에 마쓰시마로가 있다. 이 환락가에는 오키나와 출신이 많았다. 딱 한 곳, 조선 출신의 업자가 운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센카로(鮮花楼)’가 마쓰시마로 근처에 있었다.
마쓰시마로에는 다마코 씨와 노부코가 고용되기 이전부터 일하던 5명의 여성이 있었다. 5명의 여성 중 이미 빚을 청산한 모모코(モモコ)와 도시코(トシコ)는 신입인 두 사람에게 손님들이 몰리는 것을 질투하여 텃세를 부렸다. 17, 18살부터 유곽에서 생활한 다마코 씨는 텃세가 아니꼽다고 느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모모코와 도시코를 피해 식사를 나중에 하려고 했던 어느 날,
“같이 못 먹겠으면 계속 먹지 말지 그래?”
이런 말이 다마코 씨에게 날아왔다.
“빚이 없다고 잘난 척하지 마. 네가 돈 냈어? 주인이 돈 내고 우리를 고용한 건데 왜 네가 난리야?”
다마코 씨가 응수했다.
노부코는 유곽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연장자들 간의 기 싸움을 보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 일이 있은 후 근처의 과자 가게가 알선업도 겸한다는 말을 듣고 마쓰시마로를 나와 버렸다. 노부코도 다마코 씨에게 의지했었기에 노부코도 함께 데리고 나왔다. 과자 가게에서 다마코 씨와 함께 생활하던 노부코가 자취를 감춘 것은 새로운 업주가 운영하는 기루로 옮기기 전날이었다.
“여자가 바다에 빠졌어.”
이런 얘기가 과자 가게에도 들려왔다.
바다에 빠진 노부코는 마침 해변에 있던 뱃사람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다마코 씨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빚은 걱정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도록 해.”
그렇게 격려했다. 하지만 이틀 후, 노부코는 죽고 말았다.
다마코는 과자 가게를 나와 다시 마쓰시마로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쓰시마로에서 기존에 일하던 여성들과 신입이 손님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티니안은 작은 섬이어서 손님 수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다마코가 티니안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손님들이 ‘본토에서 온 여자’라면서 신기해했지만, 점차 다마코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 다마코는 손님이 적은 티니안에서는 빚을 청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트럭섬’(추크 제도, Chuuk Islands)의 ‘미하라시’라는 가게로 둥지를 옮겼다.
티니안에서 트럭섬으로, 다시 라바울의 위안소로
당시 트럭섬에 살던 일본인은 3,665명이고 그중 3,215명이 오키나와 출신이었고 이중 1,989명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오키나와 현사(県史) 7이민』(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1974년)수록 「남방 각 지역에 있는 오키나와 현민의 수산 관계 통계」).
“트럭섬은 말이야, 군인은 안 와. 가쓰오부시를 만드는 공장 인부, 경찰, 오키나와 사람들이 많았지.”
다마코 씨가 위안소에 가게 된 것은 트럭섬에서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경찰이 지명했기 때문이다.
“이건 위문이라서,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지명을 받아서 가는 거니까. 경찰이 6개월 일하고 오라고 하더라고.”
동업자들은 다마코 씨 일행을 만세삼창으로 배웅했다. 배에는 티니안과 사이판의 각 기루에서 모집된 약 50명의 여성이 타고 있었다. 마쓰시마로에서 지명을 받은 다른 3명의 여성과 업주도 함께 배에 올랐다. 티니안의 마쓰시마로는 여자 지배인이 맡게 되었다. 여성이 적은 기루는 비교적 여성이 많은 기루와 융통하여 여성의 전차금을 청산하고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배에 탄 후 병사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했고 선원도, 선장조차도 “배가 가는 곳으로 가겠지.”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군의 명령으로 행선지를 비밀에 부치고 있던 것이다.
“라바울은 정말 끔찍했지. 죽던지, 살던지,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배에서도 절대 내릴 수 없었어. 탕타탕, 타탕 하니까 짐도 내릴 수 없었어. 총알에 맞을 것 같아서.”
그곳이 라바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공습이 끝난 후 간신히 배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커다란 상점을 발견해 피난했을 때였다. 상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를 찾아 불을 밝힌 후 거적을 깔고 모기장과 모포를 끄집어내어 잠자리를 만들었다. 식사는 군에서 지급한 소금으로 만든 주먹밥이 전부였다.
일본군이 라바울을 점령한 것은 1942년 1월이다. 2월에는 이미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가장 많을 때는 육군과 해군을 모두 합쳐 17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육군과 해군의 위안소가 총 40곳이나 있었으며 약 2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장교용 요정도 네 곳이나 있었다. 50명의 여성은 육군, 해군, 장교용 등 몇 군데의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곳은 육군의 위안소였다.
“장교만 드나드는 클럽 같은 곳은 상급 여자들만 보냈어. 하지만 그런 곳에 가면 빚은 못 갚아. 돈을 못 버는걸. 장교 수가 적거든. 우리는 평범한 병사들을 상대했었는데 아침 9시경부터 배급을 받는 것처럼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그래서 밥 먹을 시간도 없으니까 주방 직원이 주먹밥을 만들어서 갖다 주고 우린 각자 방에서 먹었어. 배는 고프니까 주먹밥을 3개 4개씩 두고 반찬도 덮밥 안에 잔뜩 넣어 달라고 부탁했지. 병사가 문을 두들기잖아? 뭐 괜찮아. 밥 먹는 와중에도 상관 않고 문을 열었어. 매일 한가할 틈도 없었는 걸, 끝나는 건 5시고 밤이 되면 쉴 수 있긴 했지. 피곤하진 않았어. 100명, 200명 별것 아냐. 응, 진짜라니까. 잔뜩 굶주린 병사들인걸, 금방 끝 나.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 하겠다고 맘 먹으면 금방이야. 끝나고 나면 바로 내쫓는데도 말이지, 내쫓으면 바로 그 다음 차례야. 한 사람한테만 붙어있으면 돈이 안 되는걸.”
민간 기루에서는 대금의 배분이 업주가 6할, 여성이 4할로 계산되었지만, 위안소에서는 5할 대 5할씩 배분되었다. 하지만, 막대한 전차금을 떠안고 있는 여성들은 받은 돈을 모두 전차금을 갚는 데 썼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병사들이 따로 쥐여준 팁뿐이었다. 기모노와 화장품, 침구 등을 구입하는 각종 경비도 모두 빚으로 계산되었다.
다마코 씨가 배치된 위안소의 요금은 장교가 2엔 50전, 하사관은 1엔 50전, 일반 병사는 1엔이었다. 이용료에 따라 계산대에서 구입하는 패는 적색, 황색, 흰색으로 나뉘었다.
“난 윗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 변덕스러워서 싫어. 막무가내에 말도 많더라고. 난 일반 병사가 좋아.”
병사들은 휴일만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용 시간도 5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하사관은 하루 간격이었고 장교는 날짜와 시간에 제한이 없었다. 병사들이 쉬는 휴일에는 위안소 앞에 하얀 패를 가진 병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를 샀는데 5시가 되어도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허탕치는 병사들도 있었다.
라바울의 위안소 생활을 마친 다마코 씨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괌의 장교용 클럽으로 끌려갔다. 괌에서 장교를 상대한 것은 2개월에 불과했다. 요금이 비싸도 숫자가 적은 장교를 상대해서는 큰돈을 벌 수 없었기에 3번째로 마쓰시마로에 돌아갔다가 사이판으로 건너갔다.
남양군도 중에서도 사이판은 일찌감치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도 많아 1942년에는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구수가 44,867명에 달했다. 가장 번화한 가라판 시에는 남곽, 북곽이라고 불리는 유곽이 있었다.
1933년에 작성된 ‘사이판 섬 가라판 시내지도 부록 유명상점 안내’에는 회사, 무역회사, 신문사, 상점 등 136곳이 게재되어 있다. 그 중 15곳이 ‘여관 겸 요리’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그 대부분이 일반적인 여관이 아니고 창기를 두고 있었다. 창기를 두지 않는 여관은 ‘일식여관, 창기 없음, 일반 여관’과 같이 기루가 아님을 명시했다.
사이판에서는 일본군이 주둔하면 유곽 기루에 군 전용이라는 패가 걸리고 해당 기루는 군이 관리했다. 다마코 씨가 일하게 된 메이세이로(明星楼)의 업주인 우치마(內間)는 티니안의 마쓰시마로 업주와 형제였다. 하지만 고용한 여성들이 금방 그만두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부부간 말다툼이 끊이질 않아 우치마는 결국 이혼했다. 우치마는 팔라우에 가서 세 명의 여성을 고용하였고 다마코 씨가 있던 티니안에도 들렀다. 우치마는 빚도 없고 젊지도 않은 다마코 씨를 고용하기를 꺼렸다. 빚이 없는 여성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당한 여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마코 씨와 또 한 명의 여성을 데리고 사이판으로 돌아갔다. 요코하마 출신인 다마코 씨를 제외한 여성들은 모두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메이세이로에서 이전부터 하녀로 일하던 기누코(キヌコ)도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다마코 씨는 민간 기루보다 위안소가 더 낫다고 여겼다. 기루는 현관에 여성들의 기명을 적은 패를 벌이가 높은 순으로 걸었다. 다마코 씨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항상 벌이를 두고 경쟁하고 벌이 순으로 패가 걸리는 것이 싫었다. 위안소에서도 출입구에 명패가 걸려 있었지만, 벌이가 높은 순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안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안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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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다마코 씨는 하녀인 기누코, 어린 게이샤와 함께 메이세이루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다마코 씨는 망설임 끝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산속으로 도망쳐 헤맸다. 섬을 쪼갤듯이 작렬하는 포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총탄 소리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연 수로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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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안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능욕을 당했을 때고, 두 번째는 위안소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당신에게 이야기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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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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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