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위안부’ 다마코 씨 이야기 (2)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 게시일2021.06.21
  • 최종수정일2024.08.28

사이판의 공습을 겪다

사이판에 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4년 6월 11일이다. 이날, 일본군의 항공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항공모함 15척을 포함한 775척의 미군 함정이 마리아나 제도를 둘러쌌다. 일본군은 13일에 함포 사격을 받았고, 15일부터는 미해병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사이판에는 43,682명의 일본 육·해군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미국의 공격에 패퇴를 거듭했다.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 장관인 나구모 추이치(南雲忠一) 중장을 비롯한 군 참모들은 7월 6일에 자결하였고 이후 조직적인 저항은 종식되었다. 당시 일본군 전사자는 41,244명에 달했다. 1943년 시점에서 사이판의 민간인 거주자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되며 피란민은 극히 일부였다. 1944년의 인구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몰자는 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다마코 씨는 하녀인 기누코, 어린 게이샤와 함께 메이세이루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다마코 씨는 망설임 끝에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산속으로 도망쳐 헤맸다. 섬을 쪼갤듯이 작렬하는 포탄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총탄 소리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연 수로 안에 있었다. 사이판에는 천연 수로가 무척이나 많았다. 

저녁이 되고 공습이 잦아들자 전사자의 시신을 옮기고 있는 일본군들이 나타났다. 수로 앞에서 그 작업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병사가 다마코 씨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지내는 거야?”

“여기 수로 안에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니 병사가 커다란 깡통에 밥과 고기를 넣어서 다마코 씨에게 가져다주었다.

“수로에서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했지. 모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데 아 정말, 돼지와 다를 바 없었어. 배를 채우긴 했지만, 더러워서 울컥했다니까.”

미군이 상륙하고 날이 갈수록 식량도 물도 떨어져 벼랑 끝에 내몰린 민간인들은 집단 자결을 하거나 뛰어내려 자살하고 또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사이판 북단 곶의 절벽에서 민간인이 차례차례 몸을 던지고 있다는 정보는 다마코 씨의 귀에도 들어왔다.

“공습이 무서웠지. 미국도 무서웠고. 수로 밖에서는 자꾸 나오라고 하고. 밖에서는 총탄 소리가 ‘탕, 탕’ 들리니까 이제 죽겠구나 싶었어.”

다마코 씨와 다른 민간인들은 모래밭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친 임시수용소에 연행되었다. 조금 상황이 진정되자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군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다마코 씨는 세탁장에 가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이틀 만에 못 하겠다면서 제초작업으로 바꿔달라고 노무 담당에게 부탁했다.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세탁장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더니 제초작업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제초 작업반에 들어가니 미군병사들이 젊은 여성들을 졸졸 따라다녀 용변도 볼 수 없었다. 손 씻는 세면대 앞에는 미군병에 의한 성폭력,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MP(Ⅿiritary Police, 헌병의 약칭)들이 서 있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성들은 서로를 둘러싸 가림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용변을 보았다.

미군병사들의 요청을 받은 작업반장이 여성들을 관리했다. 수용소 안에는 은밀한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미군병사들은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할 만한 물품을 대가로 주었고 영어가 통하는 작업반장은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미군병과 여성들을 알선해 리베이트를 받았다. 공습 전에는 평범한 주부였어도 극심한 전쟁의 화를 입고 가족을 잃자 넋이 나간 상태에서 미군병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캠프의 반장을 맡던 여성이 다마코 씨를 불렀다. 아이를 캠프에서 돌볼 것이라고 했다. 부모를 여읜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다마코 씨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캠프에서 돌본다고 하니 뭐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반장을 따라나섰다. 유아부터 중학생 정도까지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반장은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면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판단해 독신자였던 다마코 씨에게 아이들을 떠맡기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다마코 씨는 남자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큰 아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번 둘러본 후에 다시 한번 한 명 한 명 보고 7살짜리 아이를 데려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해 묻자 모른다고 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 낸 과자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는 오랜 기간 단 것이라곤 구경도 못했던지 엄청 좋아했다.

다음 날, 군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물이 길어져 있었다. 작은 빈 깡통으로 몇 번이나 길어온 물이었다. 아직 7살인데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토로 돌아가는 배가 오면 아줌마랑 같이 갈래? 너 오키나와 출신이지. 그냥 사이판에 남을래?”

그 아이는 다마코 씨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취사장은 캠프 내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인원수와 이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뿔뿔이 헤어진 가족을 찾으러 모두가 취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마코 씨와 지내던 아이의 아버지도 어느 날 취사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왔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마코 씨는 자주 그 아이와 아버지가 있는 캠프로 찾아갔다.

“당신, 홀몸이라면 내 도지가 되지 않을래?” 

'도지'는 오키나와의 방언으로 아내를 의미한다.

“그 사람과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아이를 아끼니 나를 배려해 주었던 거겠지.”

본래 다마코 씨는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후 오키나와 출신 남성의 교제 요청을 받아 함께 살 것을 약속하고 오키나와로 향하는 인양선에 올랐다. 남양흥발의 소작농으로 사이판에 와 있던 농부였다.

배는 인누미 수용소에 도착했다. 미사토손(현 오키나와 시) 남서쪽 언덕에 있는 미군 캠프 부지에 1946년 8월부터 1년간 인누미 수용소라고 불리는, 해외 인양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마코 씨는 그곳에 들어갔다. 식사는 미군이 지급해주었으나, 수용시설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두막집이었다. 이후 다마코 씨는 몇 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했다.

오키나와도 전쟁의 화를 크게 입어 집 다운 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대부분 불탔기 때문이다. 다마코 씨는 사이판에서 함께 돌아온 농부의 고향으로 갔다. ‘오키나와 교쿠사이(沖縄玉砕)[1]’ 소식을 사이판에서 들은 농부는 가족이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내도 아이도 살아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다마코 씨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농부의 아내 그리고 그의 자식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그 남자랑 매일같이 싸웠어.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 보기 창피했지. ‘다마코, 또 싸워?’라고 묻는데, 싸우는 게 아냐. 이 자식이 날 쫓아낸대. 죽여버릴 거니까 꺼지래. 내가 어디로 가? 집도 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나 보고.”

결국, 다마코 씨는 그 오두막을 나왔다.

10년 전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 ⓒ가와타 후미코


“오키나와 사람한테 버림받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말이야. 참 가여웠지. 거지같은 차림으로 이곳저곳 걸었는걸. 그래서 또 장사를 하게 되었어. 미국 장사. 아빠(사이판에서 함께 온 농부)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어. 목을 매고 말이야. 제 성질을 못 이겼을 거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엄마(부인)랑 싸웠겠지. 목매달아서 죽었어.”

다마코 씨는 미사토손 노보리 강(登川)에 있는 농가에 방을 빌렸다. 군 작업의 반장을 맡고 있던 통역사가 미군을 다마코 씨 곁으로 데려왔다. 보수는 통역사와 반으로 나눴다. 세들어 살던 농가의 아이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배웠는지 미군을 데려왔다. 미군은 마을 아이에게 “여자 있어? 잠 잘 여자 있어?”라며 앞장 세운 것이다. 다마코 씨는 당분간 그 농가에 머물다가 그 곳을 떠났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을 그 집안 사람들이 꺼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이 미군이나 오키나와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면서 매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느 날,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남자를 만났고 물을 떠서 남자에게 마시게 했다 그 남자의 아내는 전쟁으로 사망했고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편안하게 잠들 수조차 없는 간이 시설이 빼곡한 곳을 전전하는 생활에 지쳐 있던 다마코 씨는 “나 좀 데려가 주지 않을래요?”하고 그 남자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자의 8살짜리 딸이 다마코 씨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토에서 온 여자라서 싫다고 면전에다 말하며 사사건건 반항했다. 다마코 씨는 계모라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아이를 혼내고 싶어도 혼낼 수 없었다. 큰맘먹고 남자에게 이야기하면 남자는 화를 내며 아이를 심하게 꾸짖었다. 아무리 꾸짖는다고 해도 아이가 다마코 씨를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애한테 뭐라 하지 마요, 아저씨. 내가 나가면 되니까.”

집을 떠날 각오로 그렇게 말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함께 술을 자주 마셨던 이시카와(가명) 집으로 다마코 씨를 데려갔다.  
    
“본토 여자가 왔는데, 나는 괜찮은데 아이가 싫어해서.”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 즈음부터였다.

나하가 모두 불타버린 1944년 10월 10일, 이른바 10・10 공습으로 인해 이시카와가 운영하던 정육점이 불타 이시카와 부부는 길가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이시카와는 심신질환에 빠진 아내와 헤어져 혼자서 오두막에서 살면서 자그만 밭을 일구며 비칠비칠 불안한 걸음으로 마을에 물건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다마코 씨는 이시카와와 함께 살게 된 후에도 세면기를 들고 마을로 나가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할 때가 있었다. 이시카와가 병으로 쓰러져 수입이 끊기기에 이르렀을 때다. 여전히 불탄 흔적이 남은 마을에 호텔 같은 건 없었고 성병 예방과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샅을 씻는 세면기는 필수품이었다. 세면기를 품에 안은 다마코 씨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야유했다. 

“조선 년, 조선 년, 조선 년은 삼등 국민.”

이시카와와 살았던 지역의 사람들은 다마코 씨를 ‘본토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어른들은 다마코 씨를 '조선인'이라고 여겼고 이를 듣게 된 아이들도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다마코 씨의 ‘위안부’ 경험이 알려져 조선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이시카와는 1962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혼자서 살게 된 다마코 씨는 이웃과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고향인 요코하마로 돌아갈 생각으로 수십 년 만에 본가에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본토의 유곽을 전전했던 전쟁 이전의 생활.

지명되어 유곽에서 위안소로 향했던 전시 중의 삶.

생활이 빈궁하여 세면기를 끌어안고 미군을 상대로 ‘몸장사’를 하러 마을로 나간 적도 있던 전쟁 이후의 삶.

이러한 다마코 씨의 전쟁 이전, 전시 중, 전쟁 이후의 삶을 한 사람의 일본 여성이 걸어온 발자취로서 필자는 청취했다. ‘조선년’이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주

  1. ^ ‘교쿠사이(玉砕)’는 옥과 같이 아름답게 부서져 내리는 모양으로, 전력으로 싸워 명예와 충절을 지키며 떳떳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1944년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 수호의 명목으로 오키나와에 주둔한 제32군에 ‘옥쇄’를 명령했다. 이후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오키나와 도민을 총동원하여 희생시켰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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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는 1943년 일본 이바라키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작가로 활동. 1977년 말,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의 증언자 배봉기를 만난다. 배봉기의 인터뷰를 토대로 오키나와(沖縄)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 위안소로 끌려간 조선 여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저서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여성이야기(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가 대표작이다. 이 외에도 『바로 어제의 여자들(つい昨日の女たち)』, 『류큐코의 여자들(琉球弧の女たち)』,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皇軍慰安所の女たち)』, 『전쟁과 성(戦争と性)』, 『인도네시아의 '위안부'(インドネシアの「慰安婦」)』,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イアンフとよばれた戦場の少女)』,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うた)』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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