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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논평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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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30여 년,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 군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했을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최근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I, II -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이하 선집) 시리즈를 발간했다. 2015년부터 2017년 사이 중국의 당안관은 일본군 전범의 진술서 842건을 120권으로 엮은 자료집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전범 자필진술서』를 발간했는데, 선집은 그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중국 당안관이 발간한 일본 전범의 진술서는 총 6만 3,000쪽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이 공개되자 언론에 보도되고 학계의 관심과 연구로 이어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구소에서는 그중 사단장, 정보장교 등으로 전쟁의 명령자급에 있던 이들의 진술을 선별하여 1편으로 묶었고, II편에서는 헌병, 영사관 경찰, 철로 경비병 등 전선에서 직접적으로 명령을 집행한 이들의 진술을 담았다. 중국 '전범 개조정책'이 낳은 특별한 포로 진술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은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푸순, 타이위안 등지에 위치한 중국 전범 수용소에 수감하였다.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유례없는 '전범 개조정책'을 실행하였다. 연합군의 전범재판이 처벌에 치중하였다면, 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 정부는 처벌보다는 인간의 개조에 강조점을 두고 전범을 관리하였다. 항복한 적의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에 근거를 둔 이 정책은 '전범의 인격을 존중하라'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하지 마라' '일본인의 습관을 존중하라'와 같은 명령으로 구체화 되었고, 실제로 전범관리소 직원보다 양호한 식사와 인도적인 수감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일본군 전범들로부터 감화와 죄의 자각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소위 '인죄탄백(認罪坦白)' 운동으로 알려진 이 과정은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 점점 '감화'된 일본군 포로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며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심문하는 담당자가 기록을 남기는 것과 달리 일본 전범들이 자필로 범죄행위를 세세하게 기술한 진술서가 나온 것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이를 토대로 1956년 중국 정부는 특별 군사 법정을 열고 전범 재판을 진행하였고,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전범 대부분은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 기소돼 금고 8년에서 20년의 형을 받았다. 사형수나 무기형은 한 명도 없었다. 석방된 포로들은 본국 귀환을 보장받았고, 1956년부터 시작된 전범의 본국으로의 귀환은 1964년 마지막 전범 3명이 복역을 마치면서 마무리됐다. 가해자가 말하는 '위안부' 동원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낱낱이 고백한 이 진술서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진술들이다. 위안소의 설치 및 운영, '위안부' 동원과정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컨대, 1편에 실린 일본군 제117 사단장 히라쿠 스즈키의 진술을 보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 과정에 일본군이 체계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중국 차오현에서 위안소를 설치할 것을 부관 호리오 소좌에게 명령하고 이것을 설치하기 위해서 중국 인민 및 조선 인민 부녀자 20명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중국과 조선 인민을 유괴하여 이른바 위안부로 삼았는데 이 부녀자의 수는 약 60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전쟁 범죄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하는 일본 우익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존재하지만,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 작성한 이 진술서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피해자의 증언이나 일본군, 일본 정부가 작성한 공문서 자료는 많이 공개되었지만 이처럼 일본군인 개인의 시점에서 작성된 가해 경험이 공개된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전범진술서의 사료로서의 의미는 적지 않다. 귀환한 일본군 전범들의 반전평화운동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전범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흥미롭게도 본국으로 복귀한 전범들은 이후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반전평화운동에 매진하며 보냈다. 이들은 '침략 전쟁은 절대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중국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죄를 고백한 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등 그들이 행했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강연 활동도 펼쳤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 사실을 밝힌 2명의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냉대에도 꿋꿋하게 세계 평화에 대한 발언을 지속한 중귀련은 회원들이 고령으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2002년 공식 해체됐다. 그러나 그 활동의 의미를 숭고히 여긴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와 학자, 언론인, 일반 시민들은 이후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을 만들어 중귀련의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범죄의 잔학성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죄의 고백 이후 반전평화를 위해 헌신한 일본군 전범들의 삶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새삼 느끼게 한다. 연구소에서 발간한 선집에는 전범 진술서 번역문과 함께 진술서의 요지, 자필진술서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진술자들의 개인 이력 등을 담은 전문가의 해제, 그리고 진술서 원본 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로서 이 선집은 학계 전문가나 일선 학교의 교사, 관심 있는 일반 대중에게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여성인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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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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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1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장원아: 이번에 세미나팀이 읽은 책은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책이 나온 배경과 맥락이 궁금했어요. 🧶 김수용: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붙잡거나 소련에서 인계 받은 일본군 포로, 만주국 관료 등을 전범관리소에 수용하고 '인죄탄백(認罪坦白.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군 포로들이 자신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죠. 이 기록이 전범 재판에서 기소를 위한 증거자료, 즉 자필진술서로 정리돼요. 오늘 읽는 선집에는 그중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던 일본군 전범 6명이 작성한 진술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자필진술서 중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것들을 선별해 번역한 것이 이 자료집입니다. 사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가 주목 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중국이 전범 재판을 하고 오랜 세월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필진술서를 공개했죠. 2015년과 2017년에 출간된 『중앙당안관 소장 중국 침략 일본 전범의 자필진술서 선편(中央欓案館藏 日本侵華戰犯筆供選編)』(이하 『선편』)이 그거예요. 중국 당국이 일본이 '위안소'를 운영했던 증거가 중국에 있다면서 관련 내용을 발표한 거죠.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장원아: 『선편』은 842명 진술서를 120권으로 발간했는데, 자필진술서는 계속 자신의 범죄행위를 쭉 열거하는 방식으로 써져 있잖아요. 이 책에는 그중 6명의 진술서가 실려 있고요. 저는 읽으면서 120권 모두 이런 내용의 반복이라면 얼마나 기괴한 군상의 나열인가 싶었어요. 🧶 심아정: 예전에 김수용 선생님과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와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전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김효순의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일본인 전범을 개조한 푸순의 기적』(서해문집, 2020)과 김원이 쓴 『기구한 인연: 무순전범 관리소장 김원의 회고록』(한울, 1995)을 읽고 나서도 문제의식이 생겼는데, 막상 자필진술서를 꼼꼼하게 읽고 나니까 장원아 선생님 말씀대로 '기괴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성찰이나 가해자성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약간 소름 끼쳤어요. 일본 군인들 스스로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팩트'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요. 이 자료는 전범 재판을 앞두고 쓰인 자필진술서잖아요. 저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가해 병사 2명이 증언할 때 무참한 강간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너무 속상했거든요. 피해자들과 한 자리에서 가해 증언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증언하던 가해 병사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읽은 진술서에 겹쳐져 보여요. 🧶 조시현: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은 가해자인 일본군이 피해자인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요. 전범 스스로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던 주제잖아요? 자필진술서를 '문학적 글쓰기'라고 한다면 일종의 독백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군'위안부'와 병사의 접촉(encounter) 측면에서 가해자 입장인 병사가 '위안부'를 직접적인 수신인으로 상정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필진술서라는 형식을 통해 '위안부'와 관련된 일을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진술서를 읽는 주체는 중국 당국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수신인이 부재하는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편으로 병사들의 진술서를 놓고 가해자의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나란히 놓으면 일종의 대화 효과가 발생하는 것 같고요. 물론 전범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현재로서는 생존한 피해자, 가해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군과 일본군'위안부'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물론 생존해 있다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자리에 있게 하는 조건을 만들기도 어렵죠. 2000년 법정에서 '가해자 증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 일본군 병사 두 명이 피해자 입장에 선 이들을 만났는데, 그때를 제외하고 서로 대면한 경우는 거의 없었죠.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이 모두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을 때 자필진술서를 통한 병사들의 발화가 '말을 거는 행위'이자 '대화의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런 측면에 주목해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겠지요. 🧶 심아정: 저는 자필진술서가 '가해자성'과 관련해 분석의 토대가 되는 문건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이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돼요. 중국에서의 전시 상황을 더 자세히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 김수용: 전범들이 본격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시기가 주로 '삼광작전(三光作戰. 일본군이 행한 조직적인 전쟁 범죄를 중국에서 일컫는 말)' 이후라는 점과 포로로 포획된 지역이 동북지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동북지역에서 소련의 포로가 된 후 5년 정도 억류되어 있다가 1950년에 중국으로 이송되죠. 이들은 주로 산둥성을 비롯해 화베이에서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공산군과 게릴라전을 치렀던 사람들인 거지요. 🧶 심아정: 병사들의 태도도 눈에 띕니다. 원문을 전부 번역한 진술서에서 다른 가해 경험은 소상히 이야기하는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진술은 꺼리는 듯해요.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병사들이 그저 한마디씩만 언급하고 넘어가는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양적으로 적다기보다는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있어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왜일까'에 대해 자꾸 짚어보게 돼요. 그런데 일본 전범들이 인죄를 할 때 상정하고 있는 '중국 인민'에 여성의 자리는 있었을까요? 상세한 범죄 고백, 회피하는 듯한 '위안부' 진술 사이 🧶 장원아: 심아정 선생님의 질문과 관련해 저는 이 사람들이 '강간하면 안 된다'라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간은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니까요. 강간하면 안 되고 죽이면 안 되고 때리면 안 되고… 이렇게 '불법'으로 지목된 행위인 강간의 피해 대상으로서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성의 자리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여성의 자리가 생겨난 거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료를 읽을 때 법정에 제출하기 위한 용도의 진술서라는 점을 고려해야 될 것 같아요. 🧶 심아정: 죄를 열심히 기억해내서 말 몇 마리, 보리 몇 단까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다 함께 머리를 모아 궁리해서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가해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곧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진술서를 통해 알게 됐어요. 이 자료를 보기 전에 읽은 2차 자료들, 그러니까 김효순의 책이나 김원의 회고록 등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날것으로 된 진술서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굉장히 느낌이 달랐어요. 🧶 김수용: 심아정 선생님은 진술서를 읽고 여성의 자리에 대해 고민하는데요, 부끄럽게도 저는 그런 문제를 잘 포착하지는 못했어요. 반면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술서를 작성한 시점이 1950년대 초반이잖아요. 당시에 과연 이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의식이나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고민, 반성이 있었는지 물을 수 있을까라는 부분이요. 🧶 심아정: 1950년대에 여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그들에게 없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꺼림칙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범 개개인한테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관해 물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우리는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 조시현: 저 또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침묵, 부작위를 파헤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침묵의 원인은 아마도 구조와 관련 있을 텐데, 현재의 논의 수준에서는 가부장제 때문이야라고 하고 말아버리는 것 같아요. 🧶 김수용: 『침화일군폭행총록(侵华日军暴行总录)』이라는 자료가 있어요. 산둥성을 침략한 일본군의 범죄 내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 조사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에 '부녀자를 납치, 감금해서 20일간 능욕한 후 살해' 했다거나 신체의 어느 부분을 훼손했는지 등 상세한 서술이 나와요. 마을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 같은데,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어요. 대개 마을에서 성폭행을 한 다음에 '위안소'로 끌고 가서 '위안부'를 시키는 수순이었잖아요.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성폭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없다는 게 특이해요. 이 대목을 읽고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기록에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제외되었을 가능성과 당시에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요. 🧶 심아정: 전장에서 일본 군인들은 여성 강간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군인 수기를 보면 대개가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기죠. 전범 진술서에서도 전범의 65%가 강간 경험을 밝히고 있어요. 물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강간'과 당시 감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을 거예요. 현시점에서는 우리의 언어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아요. 🧶 김수용: 전범들은 자필진술서를 쓰기 전에 선행 학습을 했다고 해요. 『자본론』, 『공산주의사』, 『제국주의 이론』 같은 책들을 공부하고 나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거죠. 생애를 돌아보고 침략 전쟁에 이용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됐는지 학습한 다음에 자필진술서를 서술했고, 죄에 대한 인지 과정은 한참 뒤에 이뤄져요. 진술서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 느낌이 드는 이유 🧶 장수희: 죄행이 너무 자세히 적혀 있어 업무 일지를 옆에 두고 보면서 썼나 싶을 정도였어요. 🧶 김수용: 전범 중에 한 사람이 기억력이 엄청 좋았나 봐요. 그 사람이 '언제는 뭘 했고, 언제는 뭘 했고…'라는 식으로 일지처럼 사실 위주로 서술해서 제출했더니 “네가 뭘 잘못했는지, 그 일이 왜 잘못인지를 써”라면서 진술서를 반려했대요.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반나절만에 '내가 언제 누구를 어디서 죽였고', '어느 집을 불태웠고'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나 봐요. 그것도 반려를 당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지금 전쟁 일지, 업무 일지를 쓰라는 게 아니다. 지금 너의 글에는 네가 그런 행위를 했을 때 피해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빠져 있다'라고 했대요. 이 글은 선생님들 지적처럼 진술서, 요컨대 법적인 문서잖아요. 진술서라는 형식 때문에 사실에 대한 기술이 두드러진 것 같아요. 그런데 전범 증언을 읽다보면 어떤 병사가 자필진술서를 쓰면서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필진술서와 확실한 차이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은 자필진술서는 기술이 엄청 건조하잖아요. 법적 문서의 성격이 강한 자필진술서는 형식상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자필진술서를 작성하기까지 병사들이 매일 밤마다 토론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글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인죄 후에는 참관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발전상을 견학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전쟁을 치른 지역을 방문해 피해자나 그 유족과 대면하는 과정도 진행되었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전범들이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실체를 목격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참관 학습을 '인죄의 여행'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 장은애: 이 진술서에서 뭔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게 수용된 전범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진술서가 작성된 과정을 알아야 된다고 하신 말씀과도 맥이 닿아 있는데, 진술서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전범들이 진술서를 작성하고 사상 교화 과정을 거친 후에 교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자신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 마을에 찾아갔다고 해요. 그때 중국 정부 측에서 일본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여자(전쟁 당시 7살)에게 마을 안내를 하도록 시켜요. 그랬더니 여자가 '내가 저 사람들한테 마을 안내를 해야 하느냐,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다'라고 호소했다고 해요. 이 대목을 읽고 고민이나 성찰이 부재한 상태로 기계적 진술을 하게 만든 다른 쪽의 힘, 그러니까 중국 쪽의 '듣는 귀'에 대해서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어요. 진술서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묵음 처리'된 원인에 대해 생각할 때 진술이 일본군 전범과 중국 사이의 양자 구도 속에서 생산된 거라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구도, 공산주의 체제 하 중국의 변화 그리고 이러한 국내외적 변화와 맞물린 중국의 정치적 선택들까지 폭넓게 고려할 필요가 있어요. 텍스트 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진술서에서 드러나는 한계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전범 개인에게 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거죠. 🧶 김수용: 자필진술서에서는 다른 전쟁 범죄에 비해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이 적은데, 1997년 중귀련에서 발행한 소식지는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관련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요. 자필진술서가 1950년대 초에 작성된 것이라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았다면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와 증언 이후, 전범들의 인식이나 증언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닌지 궁금해요. 🧶 심아정: 그런데 좀 꺼림직스러운 부분은 위안소나 '위안부' 관련 진술 비중이 적은 것보다 어쩐지 무언가 켕겨 그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이 2000년 법정 때 증언한 두 가해 병사를 언급하면서 법정이 열리기 전에 중귀련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다른 설문에는 답신율이 굉장히 높았던 반면, 일본군'위안부' 관련 답신율은 15%밖에 안 됐다고 지적했어요. 그때 왜 그랬을까, 저도 궁금했던 기억이 나요. 🧶 김수용: 전범들이 진술서를 쓸 때도 말 한 마리 죽인 거, 보리 불태운 거까지 말하면서 강간이나 성폭행 관련 얘기는 가장 뒤늦게 나와요. 전쟁 상황이라도 성폭행이나 강간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그들에게도 있었는지 끝까지 숨겨요. 나머지 죄는 명령 때문이라는 변명이 통하는데 전시 성폭력 문제는 그러기 어렵거든요. 꺼리는 거겠죠. 꺼려졌을 거예요. 심지어 중귀련에서도 일본군'위안부' 얘기는 많이 나오지 않아요. 🧶 조시현: 선행 논문이나 자료집을 보면 전범들은 강간과 위안소에서의 행위를 범죄로 자백하고 있어요. 흔히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말을 썼지만, 이를 강간이라고 인식하고 범죄라고 진술한 거죠. 저는 이게 굉장히 흥미로운데, 그런 인식이 일부에서 나타난 건지 전반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위안소에 간 행위를 강간 행위로 파악하는 케이스가 있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용어 사용에서 발견되는 특이점과 번역 문제 🧶 조시현: 언어(용어) 문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자료집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싣고 있어요. 번역문과 원문의 용어 차이를 살펴보는 건 번역하는 한국의 입장, 전범 재판을 한 중국의 입장, 일본인 전범의 입장을 교차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돼요. 교화 과정에서 전범들은 여러 언어를 학습했어요. 가령, 만주국의 괴뢰적 성격을 강조하는 '위(僞) 만주국'이라는 표현을 비롯해 '항일', '애국', '인민' 같은 용어들 말이에요. 전범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항일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용어들을 수용, 차용해서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전범들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자신의 입이나 손으로 기입(register)하게 된 거죠. 그때 자신과 타자간의 충돌이나 심리적 갈등이 발생했고, 나아가 이것이 반성의 계기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필진술서는 두 개의 시선과 인식이 교차되는 현장이었을 수도 있는 거죠. 또 연합군의 포로 심문 문서랑 비교해 봐도 자필진술서는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포로 심문서는 포로가 한 말을 다른 누군가가 기록한 것이잖아요. 그 포로 심문서를 읽을 때는 화자의 '퍼스널리티'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어요. 반면에 자신의 살인 행위를 덤덤하게 기술한 '자필' 진술서를 읽을 때는 어떤 사람인지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중국에서 작성된 자필진술서와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의 차이는 극명한 것 같아요. 🧶 김수용: 그렇긴 한데, 전범이 기술한 범죄 목록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조시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퍼스널리티를 파악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계속해서 향응을 받았다고 서술한 진술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무슨 뇌물을 이렇게 많이 받았어?'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드러나는 측면이 있죠.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확실히 자필진술서는 연합군 포로 심문 문서와 달라요. 자필진술서의 경우 서술자가 중국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크잖아요? 중국 인민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중국이 일본을 물리친 것을 '정의로운 반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인 피의자 조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낯선 장면이에요. 🧶 조시현: 자료집을 번역할 때 굉장히 수고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핵심 단어들이 원문의 뉘앙스 차이를 감안하며 번역됐는지 궁금했어요. 매번 일본군'위안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원자료에 사용된 용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여성들을 '위안소'로 데리고 가서 노역을 시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어를 확인해보니 노예의 노(奴)자를 쓰고 있어요. 노역(奴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통해 어떤 일본군의 경우에는 피해당한 여성을 '노예'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거죠. 그야말로 '성노예'라는 표현을 선취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해제와 번역과 더불어 원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원문까지 수록되어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인죄(認罪)와 탄백(坦白)의 법적 의미 🧶 조시현: 중국에서 전범은 '탄백'과 '인죄'의 과정을 거쳤어요. 이 두 개념은 곧 있을 전범 재판에 대한, 즉 법적 절차를 전제하고 나온 것이죠. 법적인 측면에서 인죄는 죄가 있음, 곧 유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영미식이죠.(기소에 대한 인정 여부 절차. 이른바 arraignment 절차)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 피고의 유죄 인정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아요. 형을 계산하는 양형 때 고려하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영미권에서는 죄를 인정하면 그 인정을 바탕으로 재판 처리를 해요.(유죄협상제. plea bargaining) 그 인죄 개념을 중국 공산당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또한 형사재판의 경우 자백만으로는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보편적 원칙이에요. 그러니까 중국이 어떻게 판결을 내렸는지는 전범 재판 기록을 대조해 봐야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추가 증거가 필요한 경우는 어떤 때이고, 또 특정 범행을 인정할 때 필요한 입증 증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특히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의 경우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을 문제였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굳이' 얘기한 셈인데 왜 했을까, 증거가 있었던 걸까, 혹시 보강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등 수사관의 입장에서 추론을 확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필진술서는 수사, 기소, 처벌, 재판을 포함한 법적 절차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충분히 질문해봐야 해요. 다음으로 이 문서의 특징 중 하나가 개인의 생각이나 감상, 양심의 가책 등과 관련된 표현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형법상 범죄행위의 주체 이외에 무슨 주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전범들의 주체성에 관해 얘기하려면 다른 맥락들을 시야에 둘 필요가 있어 보여요. 구체적으로 중귀련 활동과 진술서를 교차해 볼 필요도 있고요. 관련해서 자필진술서와 전쟁 수기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진술서의 성격 내지 형식은 작성자 본인의 인적 사항과 범죄행위가 기술된 수사 문서잖아요. 이처럼 진술서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료에 다시 접근하면, 가해자측 증언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어떤 증거를 얻기 위한 하나의 루트로서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보강 증거일 경우가 많기는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일본군의 인식을 드러내는 여러 표현들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유용성이 있는 것 같아요. 또 이 자료를 제대로 독해하려면 진술의 형식이나 체계 같은 것을 알고 가야할 것 같아요. 법적 문서로서의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자료를 다시 보면, 법적인 절차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죄로 자백한 것과 윤리적인 반성과 사죄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요.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회개하고 반성하고 사죄하고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고 해서, 즉 '인죄, 탄백'이 바로 법적 의미의 사죄는 아닌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방식의 사죄 말고도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귀환 이후 중귀련의 활동은 분명 사죄의 과정인 것 같아요. 이 자료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죄는 일회성이어서는 안 된다, 계속돼야 하는 행위이자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진정성이 드러나고, 그게 진짜 화해로 가는 길이니까요. 사실 법학 용어에는 '용서'라는 개념이 없어요. 기소를 안하고 풀어주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형을 면제해서 석방을 한다든지 하죠. 다 용서와 무관한 일이에요. 용서는 보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료를 읽고 사죄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고민해보고, 중귀련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주목하는 것이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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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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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2부>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시리즈가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이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강제성'과 '자기 의지', 미국의 책임 등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리적으로 논파해 나간다. 하지만 그 사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면서 운동의 본질을 흐려 어느새 '위안부' 문제를 가벼운 국제정치적 '논란거리'로 만드는 지점도 읽힌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주전장'의 참여자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Miki Dezaki)가 감독한 영화 <주전장(主戰場)>(2019, 원제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은 기존의 '위안부' 영화와 달리 피해자의 삶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담론 지형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주체들, 곧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활동해 온 시민단체부터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변호사, 정치인, 역사 부정론자들, 그리고 부정론자들의 스피커가 되고 있는 백인-미국-남성 인플루언서들까지 다양한 주체의 주장을 상호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위안부' 문제의 주요 쟁점을 논파해 나간다. <주전장>은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설치(2013), 일본 국회의 고노담화 재검토 논의(2014),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등 국제적으로 '위안부' 논의가 뜨거웠던 2010년대 중반 일련의 사건을 비추면서 소위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위안부' 담론을 둘러싼 갈등과 그 참여 주체들의 진영을 해부한다. 강제성과 노예제도 성립의 핵심,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선 <주전장>의 장점은 역사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검증하는 논의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의외로 부정론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일본 정부를 면책하는 주된 논리는 '협의'의 강제성이 없었으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는 인권 변호사 토츠카 에츠로, 국제법 교수 아베 코키의 법적 견해를 통해 적절하게 반박한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인용해 본다. 아베 씨는 '강제'라는 단어에 대해서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라는 단어를 법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속아 넘어가는 것도 자신 본연의 의지는 아닌 겁니다. -토츠카 에츠로의 발언 (<주전장>, 00:47:30~00:48:00) 노예제라는 것은 사람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하죠. 이런 상태를 '전적인 지배'라고 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여성들이 '전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면 '노예제'가 성립됩니다. 이때 그녀들이 고액의 보수를 취하고 있었건 아니건 이는 노예제의 성립 여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큰 돈을 받았을 때는 노예가 아니고 돈을 안 받았을 때는 노예다'라는 것은 국제법상에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학자들이 밝힌 자료나 역사적 서술에 기술되어 있듯이 돈을 받거나 만찬을 즐기거나 외출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본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자유 의지를 현저하게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 '전적인 지배' 제도 하에서 허가를 받아야지만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사실을 미루어 본다면 그것은 '노예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베 코키의 발언(강조-인용자. <주전장> 01:08:37~01:10:01) 일반적으로 '강제 연행', '성노예'라고 하면 군인이 총을 앞세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 연행하거나 쇠사슬에 묶여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왜곡된 관념은 '위안부' 피해자가 '속아 넘어간 것이니', 또 '돈을 받았으니' 강제 연행이나 성노예는 아니라는 주장이 널리 통용되는데 일조한다. 그러나 법적 강제성이나 노예제도의 핵심은 '자유 의지에 반해' 혹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행위를 강제 당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wam'의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의 말처럼 “자유를 빼앗긴 채 지속해서 강간당했는데 1억 엔을 준다고 해서, 그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왜 성노예라고 하면 안 되는지” 오히려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또 다른 행위자 '미국' <주전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영화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에게 '시카고 대디'라 불리며, 미국 사회에서 역사 부정론자들의 스피커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유튜버 토니 머라노.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문제에 우리나라를 연관시키려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망신스럽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 간에 의견만 분분하게 할 뿐이죠.”라고 말한다. 토니 머라노가 '헤이트 스피커(Hate Speaker)'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논리는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한 미국인들에게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한일 간 분쟁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 중에는 '위안부' 문제가 미국 내 아시아계 민족 사이의 불화를 일으킨다고 여기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주전장>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결코 외부자적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겹쳐 놓으면서, 미국이 정의 구현이라는 가치보다 '한-미-일' 우방을 통해 얻어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약에 압력을 가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종전 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공산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군비에 압력을 가했으며, 이를 위해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되어 있던 키시 노부스케를 석방하여 총리가 되도록 지원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전장>은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오늘날 일본의 부정론자들을 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전장 없는 '주전장', 희미해지는 운동의 본질 이처럼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중요한 쟁점들을 객관적 사료와 신뢰할 만한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논리적으로 돌파해 나간다. 그러나 영화 <주전장>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재미'는 단지 새로운 지식과 복잡한 담론 지형을 이해하게 되는 인식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을 통해 부정론자들의 자가당착과 무지성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가령, 일본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스기타 미오는 고노담화의 근거는 자칭 '위안부'라 주장하는 이들의 증언밖에 없으며, 그 조차도 일관성이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글렌데일 시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기 위해 어느 일본계 미국인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한다. 영화는 증언의 가치를 폄훼했던 그의 발언을 다시 보여주며, 스기타 미오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국가는 사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극우 내셔널리스트의 핵심 인물인 카세 히데야키는 스스로를 역사가로 소개하면서도 “저는 타인이 쓴 책은 안 읽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영화는 이들을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존재들로 그려낸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장면은 모종의 쾌감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 해도 여러 번 나타나듯, 극우 내셔널리스트들과 역사 부정론자들이 반인륜적인 발언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파시즘적 혐오 발언을 했던 이들의 '무식한' 실체가 까발려질 때 그간의 불쾌함과 모욕감이 해소되며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물론 이 통쾌함에는 일본 내셔널리스트에 맞서는 한국의 내셔널리즘도 얼마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통쾌함으로 설욕되고, 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맞서는 동안, 다시 말해 정치적 언어가 증식하고 국가주의적 파토스가 에너지를 얻는 동안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망각되기 쉽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는 냉소적 어조가 부정론자를 향한 것임에도 이 영화를 통해 얻어지는 쾌감 속에서 어느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정치적 '논란거리'의 하나로 가벼워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주전장'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라는 담론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담론 투쟁의 국제적 무대인 '미국'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최종적 메시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및 연대 시민단체가 30여 년 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재발 방지에 있다기보다 현재 '위안부' 담론의 '주전장'은 어디이며, 이곳의 전세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는 현실 정치의 부침 속에서 전개되는 '위안부' 운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는 여자들이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고, 인신을 속박 당하여, 거대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를 입은, 실제 사건의 장소인 전장이 누락된다. 사건의 장소인 실제 전장이 망각될 때, '위안부' 운동의 최종 목적은 역사 부정론자들과의 대결로 도착되기 쉽다.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을 기억하기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와 같은 전장의 누락과 본질의 도착이 영화 <주전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찌감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목소리를 내어 왔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201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되돌아보는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1] 비슷한 논법이 부정론자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고 밝힌 어느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위안부' 문제는 원래 있던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아니라 문제라고 간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작용에 의해 사회문제로 출현했다. 이 문제는 담론에 의해 구축된 것이지 전시 중에 위안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위안부' 문제란 구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가 문제시되어 일본 정부가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문제이다.”[2] 이러한 인식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위안부'는 불행하고 불쌍하며,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사람들”[3]로 인식되었으므로 “1990년 이전에 위안부 문제란 없었다”[4]고 주장하는 역사 부정론자들과 얼마나 다를까. 진영을 막론하고 공히 이들에게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적·정치적 대결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모든 것'에 정작 일본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사건'은 소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쟁화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종종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을 잊게 한다.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라는 수사 속에서 역설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 실제 전쟁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놓인 돌뿌리일 뿐이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안부' 운동의 본질적 목적이다. 그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군사적 도구로 만드는 전시 성폭력을 단죄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주전장'이 한낱 돌뿌리와의 싸움일 리는 없다. 각주 ^ 우에노 치즈코, 이선이 역,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다시 쓰며」(개정증보판 서문),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4, p. 13. 이헌미는 이 명제가 "위안부 운동과 담론을 둘러싼 역사적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을 명쾌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하며, "역사의 가속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억의 단기 소실점을 넘어서, 일본군'위안부'의 현재사에서 망각되고 누락된 지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헌미, 「한일 위안부 외교의 역사와 쟁점」, 역사연구 42, 2021, p. 98, 102.) ^ 木下直子, 「慰安婦」門題の言說空間, 勉誠出版, 2017, pp. 1∼2. ^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p. 346. ^ 위의 글,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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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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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2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 김수용 :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받고 일본으로 귀환한 전범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이하 중귀련)를 만들어 평화운동과 전쟁 반대 운동을 해요. 그렇기에 '인죄'와 '탄백'은 전범 재판을 받은 시기뿐 아니라 일본 귀환 이후 이어지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증언, 평화운동을 시야에 넣어서 논의해야 합니다. 중국 전범 재판에서 관대한 처벌을 한다는 원칙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도 양형을 결정하는 과정은 치열했다고 해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현장 의견과 관대해야 한다는 중앙 의견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생각대로 결정된 것 같아요. 사형과 무기 징역이 없는 관대한 처벌로요. 🧶 조시현 :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던 시점의 증언과 이후 2000년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던 중귀련의 두 분에 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들의 자필진술서가 남아 있다면 2000년 법정 당시의 증언과 대조해 보고도 싶고요. 교화 목적으로 작성된 자필진술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쓴 전범이 가해자로서 '당사자성'을 획득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 것 같아요. 진술서를 쓴 전범의 귀국 후 활동이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보려면 개개인의 삶의 궤적을 알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래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진술서를 쓴 900여 명이 전부 중귀련 회원이 되었나요? '중귀련' 결성 경위와 활동 내용 🧶 김수용 : 다는 아니에요. 찬조 회원까지 합해서 1996년 2월 1일을 기준으로 중귀련 회원은 1258명이었어요. 귀환 1년 후에 중귀련 설립을 위해 전체 회원 명부를 작성했다고 해요.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 안에서 조직을 만들어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전평화, 중일우호를 위한 활동을 하자는 내용에 동의했어요. 그래서 암묵적으로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명단을 작성했지만 활동 방향에 대한 이견(경제적 차원/정치적 차원)으로 실제 조직률은 50~55%를 넘지 않았고, 회비 납부율은 40~50% 정도였다고 해요. 🧶 심아정 : 중귀련 소식지 계간 『중귀련』은 1997년도부터 발간됐죠? 1997년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창간호가 발간된 건데, 무려 7천 부나 팔렸대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중귀련이 자위대 해외 파병 반대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군'위안부' 관련 증언을 시작한 건 1992년부터라고 해요. 확실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이후인 거죠. 중귀련 조직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증언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성폭력 문제에 관해 가해자가 공개된 장소에 직접 나서서 증언하는 문화는 없었어요. 2000년 전범 여성국제법정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도 2000년 법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당시 후지이 다케시 선생은 중귀련 사람들의 탄백, 죄를 고백하는 말들이 상정하는 대상이 '중국 인민'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해요. 자필진술서에 돼지 콜레라로 묻어버린 돼지나 장티푸스에 걸린 어린 아이를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묻어버렸다는 것까지 전부 얘기하잖아요. 그렇게 일일이 나열하며 이야기했다고 정말로 그런 존재들을 인죄의 대상으로 생각했을까… 이들의 인죄는 추상적인 중국 인민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전후에도 여전히 '일중우호',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그 부분이 중귀련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이죠. 그러니까 너무 중국과 일체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이후에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귀련 내부에서 해석이 갈렸지요.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중국의 뜻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옳다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조직이 분열됐다가 전범관리소 직원들의 설득과 두 단체의 노력으로 다시 결합한 일도 있었어요. 본국 귀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았으면 '정말 미안한 거 맞나?' 하고 의심할 수 있을 텐데 평생 증언하고 반전운동을 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정말로 미안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중귀련 활동을 통해 과거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형벌과 사죄가 평생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장은애 : 진정성을 의심한다기보다 진술서 형식의 고백이 어떻게 반성이나 성찰의 계기로 작용했을까 라는 질문이 해소되지 않아요. 어떤 전범이 귀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아주 기쁘다. 많은 재난과 고통을 입은 중국인에겐 죄송하다. 나는 사람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부터 인생의 제일보를 걷고자 한다. 나는 후반생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지금 내 마음은 유쾌함으로 충만해 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며 충분히 반성할 기회를 얻어 기쁘다고 이야기할 때 누가 그것을 받아주고 용서해줬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런 대목에서 역시 섬뜩해요. 아무리 진술 과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런 식의 발언은 비위가 좀 상하네요. 근데 또 중귀련 활동을 보면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 김수용 : 이 사람들도 진술서에서 죄를 인정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해요. 법정에서도 직접 피해자들을 대면하거든요. 그러니까 법정에서 한 번 만나고, 그 전에 자기들이 죄를 지었던 지역들을 방문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만나기도 해요.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증언을 추가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귀환 뒤 중귀련도 결성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사죄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일례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류롄런(劉連仁)이란 중국인이 일본이 패전한 줄 모르고 14년 동안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건이 중귀련 회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왜냐하면 중귀련 회원 중에 제59사단이 많았어요. 일명 '토끼몰이'라고 하는, 노동자 강제동원에 관한 일을 했던 부대였는데, 자신들이 잡아다 일본으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중국인이 눈앞에 나타난 거잖아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귀련은 전시에 강제동원됐다가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속 반성해 나갔던 게 아닐까요. 저는 중귀련의 글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들을 변호하게 되네요. 중국의 전범 재판과 자필 진술의 진정성 🧶 장원아 : 저는 문학연구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진술서에서 진정성을 따질 수 없지 않을까 해요. 애초에 진짜 형식만 볼 수 있는 글이라 '정말 반성했는가?' 하는 건 이 자료로는 파고들 여지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수용 : 저는 중귀련 분들의 진정성을, 귀환 이후 행동과 삶을 보면서 의심하지는 않게 됐어요. 하지만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자국민에게 “이 사람들을 용서해야 돼. 이들을 우리가 인간으로 개조해서 일본에 돌려보내야 해”라고 한 거잖아요. 그건 개인이 용서할 자격을 국가가 선취한 거라고 할 수 있잖아요. 화해도 국가가 시킨 면이 있고.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리고 고민도 돼요. 중귀련 분들이 전범관리소 소장, 부소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과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단 말이에요. 일본에 전범관리소 직원들을 초대도 하고, 또 중국에 가서 다시 만나기도 해요. 끝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관리소 직원들을 스승처럼 대하거든요. 근데 들여다보면 일본 전범들이 제일 먼저 만났던 피해자가 관리소 직원들인 거예요. 관리소 직원 중에는 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관리소에서 대면하기도 해요. 처음 중귀련에 대해 공부할 때는 관리소 직원과 수감된 전범들을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일본인 전범들이 가장 먼저 만난 피해자가 전범관리소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 사람들이 서로 갈등도 해요. 일본인들은 '나는 전범이 아니다.' '나는 소련에서 포로였는데 왜 전범 취급을 하느냐. 빨리 나를 풀어줘라.' 하고, 관리소 직원들은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나보다 더 좋은 밥을 먹여가면서, 정말 찢어 죽여도 모자랄 사람들을 우리가 이렇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데, 저렇게 자기들은 포로라고 막 난동 부리는 것을 봐줘야 되는가'라고 하고. 그래서 차라리 이러느니 한국전쟁 의용군으로 가겠다고 한 직원도 있었죠. 한편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쩌면 제일 먼저 화해한 피해자와 가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화해와 연대 이런 말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 안에서 이들은 화해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요. 그래서 아직도 너무 복잡한 느낌이에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기도 힘들고요. 선생님들의 말이 뭔지는 알겠어요. 이걸 보면 저도 되게 기괴해요. 그래도 이들의 과정을 아니까 '그래, 이때는 이 정도의 인식이었구나' 하면서 그 의도가 의심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너무 몰입해 있나 봐요. 🧶 심아정 : 이 자료집은 진술서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문건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재판받기 전에 진술서를 다 썼고, 그래서 1955년에는 연극 같은 걸 하면서 나름 문화생활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이 뭔가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집단 치료 심리극 같이 자기들이 시나리오를 쓰고 역할도 맡아 공연을 하는데, 연극 제목을 보면 '일본군에 의한 강간과 고문'이에요. 그러니까 강간을 죄라고 인지를 한 거죠. 근데 강간당하는 여성도 자기들이 연기해요, 농부의 아내라던가. 이런 내용이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죄책』에 나와요. 김수용 선생님 말대로 섣불리 해당 시기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전 생애를 통해서 이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귀환 이후 이들이 앞다투어 내는 수기가 있잖아요? 후지이 다케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 '가해자들의 미투'라는 표현을 썼어요. '나도 잘못했어, 나도 잘못했어' 이런 식으로 계속 병사들이 수기를 내는데, 저는 처음에는 정말 대단하다 했지만 이렇게 경합하듯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해 행위를 드러내는 방식에 도대체 누구를 향한 말이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가? 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기도 했어요. 아까 나온 얘기처럼 국가가 용서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남자들(전범과 관리소 직원들) 사이에 생긴 화해의 무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또 어디 있지?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정말 복잡했어요. 처음에는 긍정적인 인간의 변화를 촉발한 어떤 계기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데, 전범관리소 내에서 연극을 하는 상황을 읽고 나니 또 한편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러니까 연극 무대에 올라가 각각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완곡한 우회로를 전혀 쓰지 않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가해 행위에 대한 인정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진술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진술의 시간 이후에 나온 관련 자료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체제와 진술 형식, 말하기의 이면 🧶 이슬기 : 심아정 선생님이 말한 위화감이 사회주의 국가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크다 싶어요.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이고 낯설어 더 이상하고 기괴하게 다가온다는 거죠. 저는 진술서를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약간 익숙한 지점도 있었어요. 인민재판에서의 말하기 같거든요. “내가 이걸 잘못했고, 이걸 잘못했고…”라고 말해야만 인정해주는 것, 뭉뚱그려 표현하면 “네 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구나”라고 하는 게 사실은 북한이나 북베트남, 중국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이 전쟁 이후에 자본주의자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때 썼던 방식이잖아요. 그래서 이들의 말하기는, 이게 정말 진심이냐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이렇게 말하도록 했던 분위기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것은 다른 체제, 사회주의 인민재판의 성격과 연결돼 있어 지금 우리에게 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겠다 싶어요. 🧶 김수용 : 공감되는 말씀인 게 이 시기 중국에 있었던 '삼반오반운동'이라는 인민재판 형식의 반부패 운동과 그 형식이 거의 같아요. 어떤 잘못을 얘기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증인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론을 얘기하고, 그 반론을 듣고 자신의 진술을 다시 수정하는 자기비판의 형식이죠. 따라서 탄백인죄는 특별한 전범 정책이라기보다 중국이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만든 포로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일들이라서 심아정 선생님이 말씀하신 위화감은 사회주의 정치운동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해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니까요. 🧶 조시현 : 중국의 전범 재판에서 탄백과 인죄라는 명목으로 자아비판을 하는 것은 진술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민 또는 당국에 투항, 즉 몸을 맡긴다는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죽어 마땅하니 재판의 처분이나 조치에 순응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범 재판 구상에서 핵심적인 기둥이겠구나 싶고, 이게 관대한 처분과 연동되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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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좌담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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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 <3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개최 20주년인 2020년,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국제법 관련 자료를 함께 읽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공부하는 모임인 '국제법×일본군'위안부'세미나팀'이 출발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러 보고서와 판결문, 의견서, 포로 심문서 등을 읽으며 무력 충돌 하 젠더 기반 폭력, 국제 전범 재판에서 보이는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불처벌 문제, 범죄 행위로서 식민 지배와 이에 대한 불처벌 문제 등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며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세미나팀이 최근 함께 읽고 토론한 자료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일본군 전범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Ⅱ: 중국 침략 일본군 전범 자필진술서 선집』(2023. 이하 선집)이다. 웹진 <결>은 이를 좌담으로 정리,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문제'라는 주제로 소개한다. 시리즈는 전범 자필진술서의 등장 배경과 사료적 가치, 겹겹의 함의 등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는 토론으로 3회에 걸쳐 구성했다. <1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1) 전범 자필진술서 속 범죄 고백과 '위안부'의 자리를 찾아서 <2부>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2) '중국귀환자연락회' 활동이 던지는 질문들 <3부> 가해자의 진술을 통해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3) 국제법적 맥락에서 보는 전범 재판과 전쟁 책임 국제법의 맥락에서 중국의 전범 재판 읽기 🧶 심아정 : 국제법의 맥락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전범 재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읽기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진 방식일텐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전범 재판 사례는 전쟁 범죄나 용서와 화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시현 : 국제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단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포로를 귀환시켜줘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국제사회에서 1949년 출범한 '신중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국가들이 많았고, 연합국의 정식 일원도 아니었고, 또 일본과 정식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본군 포로들이 억류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한 압박이 있었는데, 당시 서구에서 얘기했던 국제법이나 인도주의를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보면 군인들 대상 교육에 국제인권법, 인도주의법의 핵심이 다 담겨 있었고, 오히려 더 나아간 부분도 있어요. 그중 하나가 강간을 금지하는 것을 중시했던 점이에요. 아까 여성의 자리가 어디에 있냐고 말씀하셨지만 공산군들은 강간을 주목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흔히 서양에서는 제1차 대전부터 강간이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지만 저는 대명률이나 당나라 법률에서와 같이 동아시아에서는 전근대 시대에 이미 강간을 중요 범죄로 취급하고 법률로 처벌해왔던 전통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런 전통은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간 방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강간=나쁜 행위'라는 규범 인식은 이미 있었고, 병사들한테도 다 주지가 된 사실이잖아요. 그런 법의식과 자기 행동과의 엄청난 괴리가 있는데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죄의 인지 과정에서 과연 그런 괴리가 바뀌어 나갔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면은 이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다음으로 김수용 선생님이 제기한 전범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인데요. 저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있고 그 다음에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인민(people)이라고 얘기해 볼 수 있을 텐데, 인민이 만든 게 나라니까 국민 주권적인 관점에 따르면 재판소에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국가가 만든 재판소에. 문제는 '공산 정권'이 갖고 있는 사법 체제에서 재판을 받은 거잖아요. 아직 국교가 회복되지 않는 단계에서. 어쨌든 일본이 봤을 때 중국은 국가로 승인 받지 못한 거죠. 국가가 아닌 사람들이 일본군을 전범으로 재판했고, 그 전범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요. 당시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을 전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환은 중국이라는 국가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고 자국민이니까 당연히 인도적으로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범 재판은 꼭 국가재판소만 하는 거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중국 인민 일부가 적어도 국가로서 인정을… 그들이 세운 정부와 법원이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 법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재판을 했잖아요. 그것은 결국 인민들에 의한 처벌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정당화 근거를 찾는다면 그렇게 얘기해 볼 수 있겠죠. 중국도 전범 재판을 했다는 것은 국제법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해서 실천에 옮긴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텐데, 전범을 교육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국제법 법전 어디에도 전범 교육에 관한 내용은 없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교화형이라는 기본적인 형벌 사상을 갖고 있죠. 그걸 전범한테 투영하니 이런 작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국제법에서는 전쟁 포로를 붙잡아다가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세뇌 교육을 해도 된다는 말은 없어요. 이건 오히려 심한 경우 전쟁법 위반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죠. 그러니까 중국 정부는 국제법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위반 혐의라고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국제법을 조금 더 발전시킨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범자의 범죄행위를 처벌해야한다는 게 전쟁 범죄 처벌 사상인데 사람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 그야말로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엄청나게 새로운 철학인 거예요. 전쟁 범죄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사죄의 의미나 용서 등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 있죠. 🧶 김수용 : 중귀련 회원 대부분이 소련에서 5년간 있다가 중국으로 넘겨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소련에서는 노동을 통한 교화였어요. 독일군 포로, 러시아 혁명에 반대했던 반혁명자, 일본군 포로들도 그 교화의 대상이었는데, 강제노동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해요. 열악한 환경이나 추위에 의한 사망도 많았고요. 그래서 소련에서 시련을 겪다가 귀환한 사람들의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의 대표적인 '피해서사' 중 하나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이송된 일본인 전범들은 시베리아 억류자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6년간은 교육, 교화를 받은 거죠. 그런 이유로 중국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람들과 시베리아 억류 경험만 있는 사람들의 귀환 이후 행보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말하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죠. 특징적인 것은 이들이 시베리아 경험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일소중립선언을 위반한 소련의 잘못이고, 피해자라고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중귀련 사람들은 일본이 '관동군특종연습' 같은 준비를 하며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했기에 일소중립선언 위반이 소련의 일방적인 잘못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따라서 자신들을 완전한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고 해요. 피해자 서사와 결이 다른 그 부분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의 개조와 사죄 🧶 이슬기 : 사회주의 인간상에서는 집단을 중시하고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봤는데, 그 까닭을 인간이 어떤 구조에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본다고 가정한다면 전범들의 행위를 개인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라 파악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즉 개개인의 죄로 접근하지 않고, 각각의 전범은 일본이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 개개인이 저지른 죄를 밝힘으로써 일본이라는 전범 국가가 저지른 죄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이들 전범에게 사상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전범들을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 거잖아요. 이들의 자필진술서를 볼 때 위화감을 느끼는 까닭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나와 분리된 과거의 나에 대해 비판을 수행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고 할 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는데, 예외적으로 이번에 우리가 본 중국의 전범들의 경우 성공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중귀련 활동을 보건대 인죄가 단순한 요식 행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 귀환 후까지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어쨌든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 김수용 : 저도 흔치 않은 성공 사례라고 생각해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난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원인을 생각해보면 수형 생활 이후 전범들이 중국을 떠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수형 생활의 기억을 가지고 계속 살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만약 중국에 계속 머물면서 문화대혁명을 겪고 중국인들처럼 어려움을 겪었다면 전범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아까 김수용 선생님의 발언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일본 전범의 가해자성을 생각할 때 자필진술서를 쓰던 당시가 아니라 이들의 '전생애를 통해' 중귀련의 활동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처음 진술서를 작성할 때 '말 못할 살인'이 있었다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니까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은 살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드러날까 봐 공포에 떨었던 명령권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전쟁과 죄책』에 언급된 사례 중 전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미 점령 하의 일본에서 미군에 의해 일본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강간 피해자들이 '나를 강간한 미군 병사를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다'라면서 원한을 토하는 것을 듣고 공포심을 느낀 명령권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포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 자기가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 그래서 이제까지는 나는 명령권자였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고… 운운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급급해서 피해자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들은 것을 계기로 탄백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건 자신이 가진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자백도 해요. 이렇게 서술이 달라지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진술서를 읽으면서 파악했듯이 처음에는 가해 사실을 그저 병렬적으로 나열하잖아요. 가해 사실을 단순히 병렬했을 때는 피해자의 원한에 대한 상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다는 거예요. 그랬던 사람들이 일본에 돌아간 뒤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계기로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 방문이에요. 그 대목에서 제게 시각적으로 남은 강렬한 장면이 있어요. 방파제 폭파를 명령한 고위급 관료가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폭파로 사망했어요. 그런데 그 고위급 관료가 폭파를 명령한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갔더니 400~500명이 대기하고 있더래요. '우리를 죽인 일본 사람들이 온다' 이러면서요. 빨간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중국인들이 멀리서 보이더래요.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죽였던, 혹은 죽이라고 명령했던 어린이나 여자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오른 적도 없었고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는데, 멀어서 얼굴 하나하나는 보이지 않지만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 몇 백 명이 와글와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 '공포심'을 '죄책감'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죄책감의 단서가 되는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옛 침략 군대의 중위가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간 수용되어 있다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돌아갔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수룩한 변명인지 통렬히 느꼈습니다.”(『전쟁과 죄책』, 193쪽)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읽은 진술서만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 인죄와 탄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으로 성찰과 사죄와 책임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 이것을 단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진술서 이후의 시간대 속에서 병사들이 자기의 죄를 자각했을 지에 대해서는 그러한 자각이 뒤늦게 발현될 수도 있고 안 됐을 수도 있어요. 전쟁에 휩쓸린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혹할 수 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죽이고 말았던'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계기들이 찾아올 수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 김수용 : 저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어요. 이분들이 진술서를 쓰고 전범 재판을 받은 것이 전쟁 책임, 이를테면 법적 책임을 진 것이라면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의 행보는 전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중귀련 활동을 통해 평생에 걸쳐 전후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용서받지 못할 책임을 갚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현재로서는 그런 책임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렵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중귀련 활동을 전후 책임의 선례로서 평가해보고 싶어요. 그랬을 때 우리가 원하는 책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라는 반성적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 조시현 :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19세기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인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법의 관점에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 먼저 '인류애',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를 '인도'로 번역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진술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한정된 표현 속에서만 인류적인 장면이 잠깐씩 드러날 뿐이에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이 팩트 위주의 서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성찰과 반성은 없고 사실만 나열하는 진술서 형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자신의 범죄 행위로부터 오히려 소외되는 측면이 야기되는 거죠. 저는 이 부분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자필진술서가 김수용 선생님이 이야기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중귀련 사람들의 증언이나 수기 같은 다른 자료를 같이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심아정 : 저는 이 자료의 핵심이 '위안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오히려 김수용 선생님이 관심가지고 있는 부분들, 그리고 가해자성이라든가 인죄라든가 조금 더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장원아 : 초반에 이 자료집이 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이 이야기와 연결되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위안부' 관련 부분이 왜 이렇게 적지?' 했다가 '대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찾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에 닿았어요. '위안부' 문제가 사실 딱 '위안부', 위안소만 끄집어내서 그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가,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본 진술서에 작성 시점, 1950년대의 어떤 가치관이나 국가관, 국제법 인식 같은 것들이 반영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간이 '문제'로서 서술되고 방식도 그런 시대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 진술서를 읽고 해석하는 우리는 현재의 인식과 감각 속에서 위안소나 일본군'위안부' 제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으려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고 의미를 도출할 때 적어도 세 시기를 고려해야 정확한 독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즉 이 텍스트에 전쟁 시기, 전범관리소에서 진술서를 쓴 시기, 그리고 우리가 읽는 현재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각각의 시기를 구분하며 읽어야 이 자료를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하게 일본군'위안소'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만 주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식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겹쳐서 문제화되고 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 심아정 : 김수용 선생님이 일전에 논문에서 언급한 '당사자성'이 떠오릅니다. 전후 세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경험자와 기억을 나눠 가지는 공동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지 않은 경험을 수용해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당사자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일본군 포로들의 자필진술서 작성과 이후 일본에서의 중귀련 활동까지 연결해 보면, 전범들이 진술한 증언에서 시작해 그걸 공유한 사람들이 뜻을 이어가고, 그 과정에서 전후 일본에서 여러 기념관을 세우고 반전평화 운동도 전개하면서 당사자성이 점차 확장되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지금 진술서를 읽는 우리가 선 위치는 '그때-그들'과 또 다르기에 일본인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당사자/비당사자', '가해자/피해자'의 자리를 이분화하지 않는 방식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