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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우익적이거나 양심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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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 참여한 마치다 타카시 창원대 교수의 제언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연구 활동에도 참여한 일본인 마치다 타카시 교수는 자신에게 '양심적'이라는 한국인들의 감사에 때로 '공포'를 느낀다. 그 호의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 '혐한 우익'과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경직된 한국사회의 이분법이 자신이 놓인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활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이자 전쟁에 참여한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을 대면하는 성찰의 문제, 가해의 책임에 관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라고 토로하는 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해후의 장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기를 소망한다. 웹진 <결>은 다양한 개인 정체성 위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 공유에 대해 숙고를 이어가고 있는 마치다 타카시 교수의 울림 있는 목소리를 전한다. 민속학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일본어를 강의하는 원어민 교수인 나는 1972년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서 태어났다.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 사회가 뜨거웠던 1991년, 당시 나는 도쿄의 한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이듬해 3학년 때 관부재판이 시작됐고, 1993년 4학년 때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이(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발표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다. 잘 알려진 '고노담화'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1993년 8월 15일,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가 전몰자 추도식전(戰歿者追悼式典)에서 최초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마침내 일본이 전후 책임을 다할 때가 되었다고 흥분했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인 1996년 '자국의 과거사를 미화하려는 단체' 혹은 '보수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로 평가받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출범하고 그 명단에 유명한 작가와 학자, 정치인들의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던 사실도 떠오른다. 아버지가 겪은 전쟁, 전후 아들이 받은 반전평화수업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 였던 것 같다. 사실 과거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속에 자리한 최초의 발화자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다. 1920년생인 아버지는 1941년 육군 보병으로 비상소집돼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 자바 등지에 주둔했고 현재 파푸아뉴기니인 뉴브리튼섬 라바울(Rabaul)에서 패전을 맞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라바울로 향하는 수송선이 격침됐을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먹는 등 급박했던 생존과 사투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었고, 그 끝은 대개 "옛날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싸운 강력한 나라였는데 지금의 일본은 한심하다.", "천황의 나라는 지지 않는다고 믿고 싸웠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기 당했다." 같은 향수와 피해자 의식이 혼재된 회고였다. 아버지와 학교, 두 전쟁의 기억 사이에 끼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가장 먼저 여름방학 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인 8월 9일 등교해 받았던 평화교육이 떠오른다. 복도에는 원폭 피해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공습 등 전쟁 피해를 다룬 영화를 보는 '반전수업'이 진행됐다. 수업은 피해와 가해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고,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기에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모험담과 거리가 멀었기에 하루는 학교에서 배운 반전적인 내용을 직접 묻기도 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아들에게 '비판'받은 아버지는 귀찮아 하셨다. 짐작해 보건대 그의 입장에서는 "전쟁터도 굶주림도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안다고!"였던 것 같다. 가해 사실과 대면한 단카이 세대 젊은 교사들의 태도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교원조합에 소속된 '단카이 세대' 교사들에게, 특히 사회과 수업에서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수업을 받았다. 이들은 교과서 내용을 넘어 제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잔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일본에서 '자학사관'으로 비판받게 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 젊은 교사들은 교장, 교감 등 관리직과 불화해 자주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거나 사라졌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게 이 교사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전교집회에서 당시 교칙이었던 남학생 두발 규제(반삭발)에 반발하며 "군국주의 유물이니 철폐하라"라고 연설해 전교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교장이 언론자유 남용이라며 호되게 꾸짖었지만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진보적인 분위기 속에서 단카이 세대 교사도, 그들에게 충실한 중학생이었던 나도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는 글로 적힌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 등 인접 국가와 일본 사이 국가 간 피해·가해 사실은 언론 속의 문제일 뿐 일상생활과는 별개였다.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근현대사 지식이 늘었고, 한국인 유학생 친구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는 뉴아카 붐 영향으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등을 읽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사상가들은 대체로 진보적(liberal)인 성향이었기에 '과거의 가해 사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1990년대 일본에서 책을 좀 읽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정치적 자세였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매년 지도교수를 따라 한국 농촌조사를 나갔다. 이때 종종 마을 노인들께 식민지 시기와 전쟁에 대한 책망 어린 말을 들었다. 당시 한국어 실력이 부족했기에 노인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자 노력했다. 그래야 조사를 계속할 수 있기도 했지만 가해 국가에서 태어난 인간의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피해 할머니 앞에 정직한 인간으로 서는 일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2000년 9월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갔다. 일본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내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박두리(1924~2006) 씨는 "일본 사람은 반갑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박 할머니는 "일본 사람이 많이 오는데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잖아"라고도 했다. 아직 초보적인 한국어 수준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눔의 집〉 직원은 기분 상해하지 말라며 달랬는데 기분이 나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과자 선물을 든 채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가해자'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피해자 편에 서는 '양심적 일본인'을 연기할 재주도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나눔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식탁에 앉자 주방 쪽에서 박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와서 내게 던지듯 건네며 "먹어"라고 했다. "할머니, 저 밥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더 먹어"라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반갑지 않은 일본인이지만 동시에 잘 먹게 생긴 청년이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분 앞에서 표면적인 속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왔다고 내게 도움이 될 것도 없고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밥은 먹고 가라'는 단호한 몸의 언어, 이 작은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게 일본군'위안부' 문제란 이분 앞에서 일본인에 남성이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정직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러하다. 딱 한 번 아버지에게 물었던 위안소 이야기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았지.(...)"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초청한 대학축제 '증언을 듣는 모임'에서 사회를 맡게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행사였음에도 행사장이 꽉 찰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 행사를 통해 'VAWW-NET JAPAN(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과 이어졌고, 그 인연으로 같은 해 12월 도쿄 구단회관(九段會館)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활동에 관여하다가 귀향했을 때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위안소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불쌍하게. 더러운 곳이었어. 군인들이 잔뜩 줄을 섰어. 지금 들어있는 놈이 나오기도 전에 다음 놈이 팬티를 벗을 정도로. 그런 곳이었어. 저런 데 나는 가지 않았어. 조선 남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군대에서 막노동을 했지.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면서 그놈들은 미군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데, 나도 많이 얻어맞았어. 어쩔 수 없지. 전쟁 중에는 그놈들도 내게 맞았으니까."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것이었고, 나는 몸이 약해진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부담을 느꼈다. 2001년 여름, 한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20년 이상 이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에 와서도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를 자주 접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 있을 때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 더 부담을 느끼게 됐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그 운동은 '반일'이 아니라 과거 자국사에 대한 성찰의 문제였고, 피해자·생존자와 관계성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이 전부였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에서 생활하는 나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주변에서 이뤄지는 '반일'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정치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늘 한국 사회에서 기대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될 자신이 없었던 내게 2022년 창원대학교 동료가 관부재판에 관한 전시 기획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며 참여를 제안했다. 일본어 자료가 많은데 읽을 사람이 마땅히 없어 도와달라는 그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문제에 관계되는 한 정치성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그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정직할 수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프로젝트 참여였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외면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진행된 지원 활동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인 이유와 다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얼마나 정직한지, 내가 쓰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트럭 앞에 내게 보이지 않는 휠체어가 없는지 불안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혐한 우익'과 '양심적 일본인' 사이에서 공포를 느끼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는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이 있으니 역사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장면은 수없이 재연되었다. 내가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세대나 인생 내력과 관계없이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 문제 앞에서는 '가해자' 자리에 앉게 된다. '양심적 일본인'은 그 구조의 거울과도 같다. 2022년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프로젝트와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취재 기자는 내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고, 나는 순수하게 손사래를 쳤다. 부정하는 나의 태도를 기자는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분명 '호의적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이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기자가 설정한 '선악'과 '민족' 내러티브에 배치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양심적'이라고 표현하는 한국인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일본인 개개인의 '양심'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때로 공포심까지 느끼는 것은 마치 일본에는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혐한 우익'과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양심적 일본인' 두 종류밖에 없는 듯한 몰이해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을 비판할 시 곧바로 '우익'으로 라벨링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종류는 모두 나의 속성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 사는 한국인이 그런 것처럼 일본인도 흑과 백 두 종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농담(濃淡)을 가진 회색의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가해자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애초 정치적 보수·진보나 역사의 피해·가해로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도 일본군 병사였던 사람의 아들이자 한국 사회에 사는 소수자이며, 지도교수를 신경 쓰는 제자이면서 학생들을 신경 쓰이게 하는 교사다. '양심적 일본인'이라는 라벨링은 그러한 개인의 다의적이고 개별적인 인격을 한국 사회의 공식화된 기억의 내러티브 속에 맥락화하고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전후 책임 성찰 그리고 가족사와 마주하는 일본인의 기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인의 관심이 다층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는 이유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어떤 사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각자 고유한 문제의식과 배경이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전후 책임'에 대한 성찰은 나의 피와 살에 대한 성찰이 아닐 수가 없고, '나'의 신체적 역사성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전후 보상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을 때 그들은 우선 '내 아버지(할아버지)'의 기억과 마주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가족사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전쟁 실상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 그 죄를 씻는데 가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1990년대 전후 책임 문제에 관여해 나갔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해후의 장, 소통의 기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심적이거나 우익이거나 하는 이분법적 인식, 그리고 그것을 선/악으로 단순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서로의 역사를 바라볼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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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나치 독일 여성 수용소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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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산 '모범국'마저 외면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 수용소이자 최대 여성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 강제노동을 비롯해 인체 실험 등 잔혹한 범죄가 자행되었고,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한 이곳에서 나치는 다른 수용소들의 남성 수인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수용소 매춘소'에 동원할 여성 수인들을 차출하였다. 아이러니는 정부와 재계가 협력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 보상을 추진해 '과거 청산 모범국'으로 칭송받는 독일이 성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은 애초부터 피해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고, 지금도 법적 피해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연구 작업 일환으로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기념관'을 다녀온 정용숙 교수의 방문 후기를 싣는다. 지난 2월, 독일 연구 출장 계획을 이야기하던 자리에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방문 후기를 의뢰받고 선뜻 승낙했다. 라벤스브뤼크는 개인적 목적으로 이전에도 두어 번 방문했기에 비교적 잘 알고, 체류 예정지인 베를린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 아무 때고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다만, 내가 쓸 방문 후기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점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주로 독일의 '위안부'와 관련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라벤스브뤼크'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압박 때 자주 소환되는 독일의 한계 동아시아 사회가 넘어서지 못한 과거를 대표하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서 한국인들은 곧잘 독일을 소환한다. '과거 청산 모범국' 독일의 사례를 들어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이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것은 2000~2007년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립한 <기억 책임 미래 재단 >을 통해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일이 계기였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의 대책이 많이 늦었던 데다 내용적으로도 역사 정의의 실현보다는 정치적 해법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피해 인정 절차가 엄격해 거부당하거나 배제된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고, 지급액도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상황은 더 심했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가 운영한 '매춘소'에 동원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법적 피해자 지위 인정과 배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위안부' 시스템을 운영한 국가였다. 독일 군대와 친위대는 자국 영토에 있는 강제 노동자를 비롯해 점령지 내 자국 군대, 나아가 강제 수용소의 남성 수감자를 위해서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위안소'라는 명칭은 일본군의 독자적인 명명으로, 독일에서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일반 용어인 '보르델(Bordell)'이라 불렀다. 이 가운데 강제수용소 위안소는 비교적 자세히 연구된 분야인데, 친위대는 수용소 내 남성 수인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친위대가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여기에 필요한 여성들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인들 중에서 차출했다. [사진 1] 라벤스브뤼크에는 나치의 성 강제노동에 희생된 여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2] 다만 이것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역사의 일부다. 수용소 수감자 80% 이상이 여성 정치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39년 4월, 베를린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휴양지 퓌르스텐베르크 인근의 작은 마을 라벤스브뤼크에 새로운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독일을 포함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여성들을 격리한 국제적 수용소이자 최대의 여성 수용소로 성장했다. 전체 수감자의 80% 이상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반나치 레지스탕스 등 정치범이었다. 히틀러 암살 작전인 '발키리'의 주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인이 게슈타포에 체포 돼 이송된 곳이 라벤스브뤼크였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던 그는 수감 상태에서 막내를 출산했다. 전후 프랑스 초대 대통령을 지낸 드골의 조카 제네비에브 드골-안토니오즈도 레지스탕스로 체포 돼 라벤스브뤼크로 이송되었고, 그 경험을 반세기 후에 회고록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라벤스브뤼크에 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1년 소규모의 남성 수용소가 추가됐고, 1942년에는 인접한 우커마크에 청소년 수용소가 들어섰다. [사진 3]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30개국 출신의 여성과 어린이 12만 명, 남성 2만 명, 청소년 1,200명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수감자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폴란드인으로 약 4만8,500명이었고, 이어 소련(2만8,000명), 독일과 오스트리아(2만4,000명), 프랑스(8,000명) 순이었다. 유대인은 약 2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사진 4] 강제노동부터 의학 실험,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애초 정치범 수용소였던 라벤스브뤼크는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 군수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강제노동 수용소로 기능했다. 대표적인 군수업체가 인근에 공장을 둔 지멘스였다. 1854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전기회사 지멘스는 베를린 인근 수용소들이 공급하는 강제노동의 주요 수요자였다. 그러다 1942년부터 라벤스브뤼크에도 군수품 공장을 짓고 전화기, 라디오, 계측기를 생산했다. [사진 5] 이때문에 지멘스에는 전범기업이라는 오명이 뒤따르고, 1941년부터 1956년까지 지멘스 대표를 지낸 헤르만 폰 지멘스는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소에 일시 수용돼 증인으로 심문도 받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반인도적인 인체 실험이 이뤄졌고, 가스실을 가동해 '절멸 수용소' 역할까지 했다. 1941년부터는 처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6]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초에는 화장장 옆 오두막에 임시 가스실이 설치되었다. [사진 7] 그 해 1월 말부터 4월까지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약 5~6천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라벤스브뤼크에서 가스실, 교수형, 굶주림, 질병, 의학 실험, 중노동 등 다양한 이유로 사망한 여성 수감자 수가 최소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성도 소수 있었다. 수인들이 행군한 길을 따라 걷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기차로 약 1시간을 가서 퓌르스텐베르크-하펠역에 내려 라벤스브뤼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선 버스를 이용하는 것. 그러나 나는 기차역에서 라벤스브뤼크까지 약 2km를 직접 걷는 쪽을 택한다. 버스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차로 이송된 수인들이 역에 도착해 수용소까지 행군한 그 길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나치 범죄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지난다. [사진 8] 그 길을 걷다 보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기념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창문과 발코니가 달린 이층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잿빛 수용소 분위기와 뚜렷이 대비되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곳은 여성 수인들을 감시하는 여성 경비원들의 숙소로, 일부는 자녀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원형이 잘 보존된 8개의 건물은 내부 개조를 거쳐 2002년부터 국제청소년교육센터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90여 개의 침대를 갖춘 기숙사 3개 동과 세미나 동, 식당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이 매년 주최하는 여름대학에 참가했을 때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발코니에서 푸른 숲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이어도 몸의 각도를 틀면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경비원 구역과 구분되는 건너편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감자들의 막사와 가스실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진 9] 고문과 살해 등 악명 높았던 여성 감시관 직업의 출발지 수용소 여성 경비원들은 '여성 감시관', 독일어로 '아우프제어린(Aufseherin)'이라고 불렸다. 20세에서 40세 사이 젊은 여성 중에서 모집된 그들은 잔인하고 가학적인 구타, 고문과 살해로 악명이 높았다. 라벤스브뤼크는 특히 여성 감시관 훈련소라는, '특이한' 직업의 출발지 역할을 한 수용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베르겐벨젠 등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간 여성 감시관 규모는 약 3,500명.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전범 재판에 회부된 여성 감시관은 77명에 불과했고,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여성 감시관들은 대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변변한 직업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계급 여성들이었다. 좋은 임금과 무료 숙식 그리고 멋진 제복이 보장되는 감시관은 분명 괜찮은 직업이었을 것이다. 10대 시절 나치 청소년단체에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다면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적과 싸우고 조국에 봉사하는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1995년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바로 이 나치 여성 감시관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인물 '한나'는 공장 노동자였다가 여성 감시관이 된 인물이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남모르는 장애와 그 결과인 무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여성 감시관이 되었고 평생 속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을 나는 나치 범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전후 세대 독일인들이 앞 세대의 죄와 씨름하는 이야기로 읽었고, 죄와 사랑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궁여지책으로 감시관이 되었다는 설정은 논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후 서독에서 나치의 전직 여성 감시관들은 '무력한 조력자'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당시 수용소 감시관이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결코 아니었다. '그 일'의 끔찍한 실체를 깨닫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는 여성 감시관 숙소 외에도 수용소장과 친위대 장교 관사, 본부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다. 수인 막사와 사령부 건물, 경비원 숙소 등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했던 소장 관사는[사진 10] 전쟁이 끝나고 1977년까지 소련군의 장교용 관사와 사무실로 사용됐다. 이곳을 비롯해 호수 주변의 기념관 시설 등 일부를 제외한 수용소 전체 부지는 1994년까지도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진 11] 이중 삼중으로 배제된 성 강제노동 피해자들 수용소 본부 공간을 개조해 2013년 개관한 건물 2층에는 친위대의 수용소 성 강제노동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는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 역사와 기념>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12] 지금까지 파악된 수용소 성 강제노동 피해자는 모두 210명, 그 중 이름이 확인된 이는 174명이다. 절반 이상이 독일인 여성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러시아인, 동유럽인, 네덜란드인 등이었다. 절대 다수인 85%가 '사회부적응'을 이유로 끌려온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여기에는 부랑자, 극빈자, 성매매 여성, 레즈비언 등이 속했고 검은 역삼각형 표지를 착용하도록 했다. [사진 13] 반면 남성 동성애자는 검은색이 아닌 분홍 역삼각형 표지로 구분했고 '사회부적응'에도 속하지 않았다. 상설 전시는 수용소의 역사와 함께 기념관을 설립하는 과정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라벤스브뤼크는 소련군 관할을 거쳐 구동독 지역에 속했다. 소련군은 수용소 부지와 건물들을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에 사용했는데, 생존 희생자들은 수용소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8년 9월에 첫 추모식이 열렸고, 화장장 주변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수습, 매장한 묘지가 조성되었다. 1959년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구동독 정부에 의해 국립 기념관이 되었다. 이때 건축가들은 화장장과 감옥 등 옛 수용소 건물 일부와 4m 높이의 수용소 담장 일부를 기념관에 포함시켰다. 훗날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수용소 담장의 서쪽 구역 밖에는 다시금 묘지가 조성되었다. 빌 라메르트(Will Lammert)의 청동 조각 '짐을 진 여인들(Die Tragende)'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곡의 벽'과 그 앞에 자리한 '짐을 진 여인들'은 기념관 디자인의 핵심으로 1950~1960년대 동독 기억 문화의 시각적 측면을 보여준다. [사진 14] 구동독 초기에 설립된 라벤스브뤼크 국립 기념관은 독일 재통일 후인 1993년 라벤스브뤼크 기념관(Ravensbrück Memorial)으로 재단장해 오늘에 이른다. 독일 연방 정부와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의 지원을 받는 브란덴부르크 기념재단(Stiftung Brandenburgische Gedenkstätten)이 관리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출신국명이 부착된 '통곡의 벽'과 '짐을 진 여인들'은 구동독 시기 기억문화의 유물로 지금도 여전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소녀상과 라벤스브뤼크의 기억 문화 2019년 초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 철거 소동이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코리아페어반트'에서 2017년 기념관에 선물한 작은 소녀상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일본대사관 측에서 항의와 함께 집요하게 철거를 요구했다. 작은 소녀상은 기념관 상설 전시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념관 측은 해당 소녀상을 치우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당시 인자 에셰바흐(Insa Eschebach) 관장은 "이 조그만 모형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2월 초 기념관을 찾은 날은 우연히도 새로운 특별전 개관일이었다. 전시 주제는 <나치 시대의 동성애>였다. 소규모인 전시 패널에는 라벤스브뤼크 수감자였던 중국인 여성 나딘 황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5] 중국 외교관의 딸이었던 나딘은 1944년 레지스탕스 혐의로 라벤스브뤼크에 끌려왔다가 벨기에 레지스탕스인 오페라 가수 넬리 무셋-보스를 알게 된다. 수용소에서 만나 평생의 반려자가 된 두 여성은 한동안 헤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생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부가 아닌 사촌이나 친구로 가장해 여생을 함께했다. 이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넬리와 나딘>은 2022년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선보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생존자들은 이후 각국에서 라벤스브뤼크 생존자 단체를 꾸려 활동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저마다의 기억 문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서유럽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라벤스브뤼크 희생자 국제 연대는 구동독 시기부터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의 기억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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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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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 깊이 읽기 <1부> 우리 일상과 접촉면이 넓은 미디어, 그만큼 상호 영향의 진폭이 크고 깊다. 미디어 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시 새롭게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시작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연다. 개봉 후 328만 명이 볼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울림을 주는 좋은 영화'라는 평까지 받은 「아이 캔 스피크」는 '생존자'인 동시에 '목격자'로 증언하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서발턴의 말하기, 피해자를 제외한 가해국 간 사죄와 사면이라는 불편한 퍼포먼스 등 '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자극한다. <1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서발턴'의 말하기 <2부> 전장 없는 '주전장'과 정쟁화된 '위안부' 문제 김현석 감독이 연출해 2017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2007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던 주인공 '옥분(나문희 분)'이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해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시장 상가에서 수선집을 하는 옥분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편, 불법 사항을 신고하는 '도깨비 할매'. 아무리 동네를 위한 일이라도 그녀가 넣은 민원만 8,000여 건에 이르다 보니 구청 직원들에겐 '블랙리스트'요, 한 번이라도 신고를 당해 본 상인에겐 껄끄러운 이웃이다. 한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이 넣은 수많은 민원을 처리하는 구청 공무원이다. 영화 전반부는 공동체의 문제를 법(민원)으로 해결하려는 옥분과 권력의 편에서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구청 공무원 민재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어'로 증언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그러나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지고,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된 친구 '정심(손숙 분)' 대신 미 의회 증언에 나서게 되자 민재는 누구보다 든든한 옥분의 서포터가 된다. 옥분은 민재와 함께 '영어로'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옥분이 국가에 '피해자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일본군의 전쟁 범죄 증언에 앞서 '자기 증명'부터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의 도움으로 급하게 피해자 등록을 마친 옥분은 '위안부' 피해 당시 정심과 찍은 사진을 들고 미 의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국가의 보증(='위안부' 피해자 등록)도 물적 증거(=사진)도 아니다. 청중의 주목을 이끌어 낸 것은 옥분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 즉 흉터였다. 옥분이 '살아있는 증거'로서 자기 신체를 드러내 보이자 장내는 숙연해진다. 마침내 옥분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말하기 시작한다. 옥분: 일본군들이 내 몸에 새겨놓은 칼자국과 낙서요. 내 몸엔 이런 흉터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이 한없이 되살아납니다. 증거가 없다구요? 내가 바로 증거예요. 여기 계시는 미첼이 증거고, 살아있는 생존자들 모두가 증겁니다.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을 때 내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소, 열세 살. 나는 죽지 못해 살았소.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I'm standing here today for those young girls. Their childhood was stolen away by the crimes of the Japanese army. We must remember those girls and the pain that they lived through. Japan committed crimes against humanity. But there has been no sincere apology for the 'Comfort Women' issue. (중략) We are not asking for too much, just for you to acknowledge your wrong doings. We are giving you the chance to ask for our forgiveness, while we are still alive. “I am sorry.” Is that so hard? (자막: 나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소녀들이 겪었던 고통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용서 받을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강조-인용자, 「아이 캔 스피크」 1:43:43~1:47:46) 증언의 두 겹, '생존자'로서 말하기와 '목격자'로서 말하기 옥분의 증언은 둘로 구분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한 번은 한국어로, 또 한 번은 영어로 발화된다. 그런데 여기엔 단순히 언어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로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 곧 '생존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어로 발화된 증언에서는 일본군의 범죄에 의해 유년을 빼앗긴 소녀들을 '대신'하고 있음을 밝히며 시작한다. 더하여 영어 증언에서는 옥분의 목소리에 병상의 정심이 오버랩되어 옥분이 정심을 '대신해'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옥분은 위안소 범죄를 겪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로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대신한 '목격자'로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라틴어에서 '증인'에 해당하는 말이 두 개 있음을 지적했다. 첫 번째는 'testis'로 영어의 'testimony(증언)'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이는 두 당사자 간 재판이나 소송에서 제삼자의 위치에 있는 '목격자'를 가리킨다. 두 번째 말은 'superstes'로 어떤 일을 끝까지 겪어낸 사람, 어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 즉 '생존자(survivor)'를 의미한다. 관련해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 불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말한다. 본디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중립성의 결여로 인해 재판을 위한 사실 입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거니와, 무엇보다 절멸 수용소의 폭력에 대해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자는 그곳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는 '온전한 증언자'가 되지 못한다.[1] 한편, 증인에 대한 아감벤의 고찰은 젠더-권력의 차원에서 한 번 더 해석될 필요가 있다. 라틴어 testis는 '목격자' 외에 '고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2] 법적 용어로서 증언(testimony) 또한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남성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증언 선서를 할 때 고환에 손을 얹었다고 한다. '증언'은 객관적 사법 장치라 여겨지지만, 어원적으로 보건대 거기엔 이미 '남성' '시민'이라는 젠더-권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의 자리에서 '위안부' 생존자는 이중의 곤경에 처한다. 절멸 수용소에서 폭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거나 살아 왔더라도 온전히 말할 수 없게 된 자들이라 한 프리모 레비의 지적처럼, 살아남은 자로서 진정한 증인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윤리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한편, '증언'이라는 말 자체에 기입된 젠더-권력을 염두에 두면 하위 주체인 '위안부' 생존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난관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옥분은 의회라는 미국의 국가 장치에서 증언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옥분의 증언이 '지배자'의 언어로, 즉 반공블럭 형성을 위해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전후 해결을 어렵게 한 미국의 개입을 은폐하는 한에서, 동시에 냉전 체제가 만든 '한국-미국-일본' 동맹이 허용하는 한에서 가능함을 의미한다. 옥분은 신체에 새겨진 상처로서, 즉 '생존자'로서 자기를 증명했지만 곧이어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할 것을 자처하였다. 이때 자기 증명을 위한 생존자로서 말하기는 피식민의 역사를 간직한 모국어를 통해 발화되지만, 목격자로서의 증언은 제국의 언어인 영어로 발화된다. 옥분은 '목격자(testis)'로서 자신을 위치 짓고, '지배 체제의 언어(=영어)'를 구사함으로써 '증언(testimony)'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내내 그려진 '위안부' 생존자의 영어 배우기는 '서발턴(subaltern)'의 지배 언어 배우기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는 중층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옥분은 지배 체제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지배 체제에 종속되거나 타협하게 된다. 서발턴 말하기의 전략·타협·종속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내 정치의 역학 관계 안에서 부침을 겪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민재가 옥분의 피해자 등록을 서두르기 위해 구청장을 설득한 논리는 '위안부'문제 범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구청장의 정치적 이익이었다. '위안부' 운동이 현실 정치와 관계 맺는 한, 정치 진영과 담론 자장 안에서 길항하고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서발턴은 타협과 협상을 통해 말하기 장소를 확보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서발턴의 말하기는 언제든 지배 담론에 의해 포획되고 굴절될 위험에 노출된다. 문제는 이처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역학 관계들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소거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옥분이 하원 의회에 입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그녀의 양쪽에 늘어선 두 진영-정의를 연호하는 시민단체와 욱일기를 든 사람들-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분법적 적대관계는 옥분의 언어 구사 양상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한국어와 영어는 증언의 언어이지만, 일본어는 적국의 언어로 정확하게 나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미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을 제기한 실존 인물 '마이클 혼다' 의원이 영화에서는 '마이클 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론화한 마이클 혼다 의원에게서 '혼다'라는 일본계 정체성을 지움으로써 '위안부'문제를 '한국-일본' 양국의 적대적 관계로 단순화한다. 이 구도에서 불완전한 전후 처리를 주도한 미국의 행위성은 누락되고, 오히려 '심판관'의 위치를 또다시 부여받게 된다. 가장 문제적인 '타협'은 옥분이 '법적 배상'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분은 일본 정부에 '단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생존자들이 살아있을 때 'I am sorry' 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는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 단체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법적 배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은 강제성이 없고, 보상 규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물론 결의안은 '위안부' 제도가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당시 일본 관헌의 '직접 개입'을 부정하던 아베 내각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의안은 또 “일본 황군이 '위안부 여성'으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것에 대해 명백하고도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며, 역사적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후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미국 의회의 입장 표명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은 피해자들이 일관되게 요구한 '법적 배상'을 누락한 한계 또한 분명하게 지닌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국제 관계와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법률적 차원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여성인권의 추구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유리"[3]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과연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윤리적 차원이 법적 배상 없이 달성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제스처는 순전히 사법적인 것이지 윤리(학)적인 것이 아니”[4][5]다. 즉 '위안부'문제를 법률적 층위가 아니라 윤리적 층위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법적 책임을 '사면'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옥분의 실제 모델인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가 '결의안 통과에 관한 성명서'에서 다시금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formal apologies and legal reparation)”을 촉구한 것은 매우 적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윤리가 사법적 책임을 상쇄하는 기묘한 굴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는 공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 전반부 내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법에 호소했던 옥분이 정작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지 않는다. 영화의 더 결정적인 문제는 피해자의 핵심 요구를 누락하였음에도 그 호소에 미국이, 그리고 전세계가 '공식 인정'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옥분은 지배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미-일 우방이라는 국제 관계를 해치지 않는, '사법'이 아닌 '윤리'의 영역 안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영화는 이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전달한 것처럼 재현해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증언을 마친 옥순은 마침내 위인들의 동상으로 둘러싸인 의회 건물에서 미국 의원들에게 사과와 경의를 받는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의 복권이라는 보편 가치가 '미국 정신'에 둘러싸여 실현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마는 것이다. 가해자를 사면하는 '보편 윤리'를 넘어 2007년 4월 말, 미국을 방문한 일본 아베 총리는 대통령 부시에게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를 표명한 바 있다. 이 사과는 일본과 미국 양쪽 언론 모두의 비판을 받았는데, 당시 계류 중이던 '위안부' 결의안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사과 대상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를 '수락'한다는 미국 대통령의 답변이었다. 피해자를 제외한 채 '미-일' 양국 수반이 사죄와 수락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실 정치의 모순적인 장면은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증언을 마친 후 옥분은 청중에게 인사를 받고, 더하여 자신을 의심했던 이들로부터도 사과를 받는다. 그러나 한 아시아계 인사는 끝까지 옥분을 모독하고, 이에 옥분은 일본어로 일갈한다. 옥분의 응수로 인해 그 아시아계 인사는 일본인으로 특정된다. 앞서 아베와 부시의 '사과와 수락'이 피해자를 제외한 채 이루어졌다면,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 장면은 가해자를 제외한 채 피해자의 명예회복으로 나아가려는 듯하다. 두 장면을 함부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이들은 공히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미국화'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해자는 피해자 대신 미국에 사과를 하며, 피해자는 가해자 대신 미국에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미국은 '가해-피해' 갈등 구도 바깥의 '심판관'으로서 혹은 '보편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책임이 있는 하나의 주체이지, 결코 이 문제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양국이 연출한 영화/정치적 퍼포먼스는 정반대 편에서 미국을 특권화하며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사면한다. 뿐만 아니라 '보편 윤리'라는 허울을 통해 일본의 사법적 책임을 더 이상 촉구하지 못하는/않는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한계가 「아이 캔 스피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에서 공론화되는 '위안부'문제를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미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세계화'하는 현재의 담론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일 것이다. 각주 ^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p. 22, 51. ^ Robert K. Barnhart Ed., The Barnhart Dictionary of Etymology, H.W. New York: Wilson Co., 1988, p. 1129. ^ 조양현,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대외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6, 2008, 한일군사문화학회, p. 73. ^ 아감벤, 앞의 책, p. 30. ^ 아감벤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 동안 아이히만의 변론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논법, 곧 '아이히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사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도덕적 책임 감수는 사실상 법률적 유죄를 상쇄하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아감벤은 “유죄나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때로 필요한 일일 수 있지만) 윤리(학)의 영토를 떠나 법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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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인터뷰 '위안부 역사관'은 역사 부정 세력 극복하는 장기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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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 사기, 날조, 조작. 일본군'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담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23년 9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이 개최한 국제토론회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역사 부정 현상'에 맞설 수 있는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국제토론회 전 과정을 이끈 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에게 토론회의 주요 내용을 들었다. “중등학교 역사 선생님 그룹과 친해요. 제대로 가르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교사들인데,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돼 함께 해온 시간이 꽤 쌓였어요. '위안부' 수업 지도안을 만들어 활용하고, 저희 단체 청소년교육프로그램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분들이 놀라운 얘기를 해요. 일제 강점기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위안부'나 강제동원을 주제로 자료 조사 과제를 내곤 하는데, 완전히 왜곡된 사실을 발표하는 학생이 많다는 거예요. 역사 부정 세력들이 유포해온 오염된 정보가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심각합니다.” 왜곡 정보 발표하는 학생들, 역사 부정 대응 국제토론회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4년, 햇수로 20년 넘게 현장의 여성인권활동가로 활동해온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산창원진해 시민모임(이하 마창진시민모임) 대표의 얼굴 가득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교사들의 '고발'처럼 '위안부'의 피해 자체를 거짓이나 조작으로 몰고가는 잘못된 정보가 일상에 넘쳐나는데 반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의 대응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사태로 교류는 줄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시민사회계에 대한 의혹과 갈등이 불거지고 '마녀사냥식' 언론 보도가 쏟아지다보니 '위안부' 해결 운동이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와 그 해결 운동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으로 바뀌고 있고요. 수요맞불집회는 멈출 기미가 없고, 토론회 며칠 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일 극우 인사들이 '위안부는 사기극'이라며 심포지엄까지 열었잖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고민이 구체화된 자리가 지난해 9월 20일 마창진시민모임이 개최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부정 현상에 대한 대응방안 모색' 국제토론회였다. 기획부터 섭외, 실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른 이 대표는 토론회에서 접한 역사 부정 행태가 '세계적'이고 매우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어 놀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방해로 '망명 신청자' 상태인 소녀상 “일본의 집요한 방해는 상상 이상이에요. 기시다 총리, 나고야 시장 등 일본 고위 관료들의 항의부터 지역 영사관이나 대사의 직접적인 로비, 여기에 대학 교수와 학자들, 각국 현지에 나가 있는 일본 기업과 시민단체까지 개입해 다각도로 압력을 행사해요. 국경을 초월해 전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인권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한 독일 베를린 미테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초기에도 일본의 항의로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가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등 재독 시민단체와 지역사회, 전문가들이 반발하고 철거 명령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는 등 강한 대응으로 존치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오는 9월 다시 철거 압박이 예상돼요. 줌(zoom)을 통해 독일 상황을 전해주신 한정화 베를린코리아협의회 대표이사는 소녀상이 체류 허가가 발급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관용되는 '망명 신청자' 상태라 표현하며 서글퍼하셨어요.” 일본 내 역사 부정 분위기는 1991년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을 아사히 신문에 특종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한 우익의 공격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주간금요일' 발행인인 우에무라 씨는 아베 신조 정권 시절인 2014년 1월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 날조라는 공격을 받았고, 이후 딸을 해치겠다는 협박까지 받는 등 곤욕을 치러왔다. 글렌데일시 소녀상 영구 설치, 필라델피아엔 새 소녀상 토론회에서는 인권과 존엄성을 믿으며 연대해온 글로벌 시민들이 값진 결실을 맺고 있는 사례도 소개됐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쪽에 위치한 글렌데일시. 2012년 '미국 연방회의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날을 기념해 7월 30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한 글렌데일시는 2013년에는 글레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도 세웠다. 이듬해 철수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글렌데일시가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대응해 소녀상을 영구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글렌데일 소녀상은 여러 차례 훼손을 당했으나 2020년 12월 보수작업을 마쳤고, '소녀상 지킴이' 시민 모임도 만들어져 잘 보호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는 8년여 노력 끝에 새로운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평화플라자위원회가 주축이 돼 추진한 소녀상 건립 계획은 2021년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로부터 승인받은 데 이어 2022년에는 두 차례 타운홀 공청회를 거쳐 확정됐다. 이어 2023년 7월에는 필라델피아 예술위원회가 기림비 문구까지 정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남부 도시인 텍사스 달라스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 알리기 활동을 펴고 있는 박신민 '잊혀지지 않는 나비들' 대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달라스에서 박 대표는 2015년부터 일상적으로 '귀향', '주전장' 등의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소녀상을 재현하거나 나비팔찌 등을 만들어 나누는가 하면 2019년부터는 '세계 위안부 기념일' 행사도 이끌고 있다. 기록과 기억, 교육이 어우러지는 '위안부 역사관' 이후 토론회는 자연스레 대안 찾기로 연결됐고, 이경희 대표가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은 공감의 폭이 가장 컸던 주제였다. “경상국립대 김명희 교수님도 기조 강연에서 강조하셨는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담론이 일본 정부와 우파의 외교 전략을 통해 전세계로 확장되는 양상이잖아요. 그래서 피해자들의 피해와 상처를 오롯이 기록하는 일, 인권과 역사적 교훈을 계속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문제 해결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답답한 건 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는 현실이에요.”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가 위안부 역사관을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추진해온 배경이다. 물론 이 대표는 지난 4~5년 동안 누구보다 격렬한 부침의 중심에 있었기에 역사관 건립사업이 녹록치 않은 목표임을 잘 안다. 애초 경남도 차원에서 추진 계획이 마련됐다가 타당성 조사가 다시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미뤄지더니 조사 결과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현재 역사관 건립 계획은 좌초된 상태. 그런데 이 대표는 의외의 대상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일본 참가자들이 보낸 연대의 목소리였다. “2005년 일본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로 개관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이하 WAM)'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는 일본의 유일한 박물관이에요.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이 토론회에 참석해 특별 전시를 비롯해 위안소 지도 등의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꾸준히 업로드하고, 1990년대 중·고등학교 역사 및 사회과학 수업에서 사용된 500여 종의 교과서를 대상으로 한 연구 등을 공개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온 WAM의 경험을 전했습니다. 일제 치하 '위안부'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는 공동의 목표를 언급한 와타나베 사무국장은 또 고개를 드는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주의에 대해 정보 공유와 연대를 통해 맞설 때라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마창진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왔어요. 우에무라 전 기자께서도 모금운동을 해주겠다고 하시고요. '위안부' 해결 운동이 더 어려운 지역사회에 정말 기운 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안부' 역사 교육 조례 제정도 과제 국제토론회 이후 마창진시민모임과 경남 지역 시민사회계는 곤경에 처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의 미래를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고 현실적인 추진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가 비중 있게 고민하는 대안으로는 체계적인 일본군'위안부' 역사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성평등 사회와 안전한 근로 환경 조성을 위해 연 1회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공교육 영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자치단체 차원의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또 지역의 시민단체가 감당하기엔 적잖이 버거운 행사지만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던 '국제청소년캠프'를 재개하는 일도 과제 중 하나이다. 필리핀,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온 청소년들과 경남 지역의 교사와 학생이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어우러진 캠프는 코로나사태로 오도가도 못한 2021년과 2022년에 온라인 캠페인으로만 진행돼 아쉬움이 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요즘도 언제 다시 캠프를 여느냐 문의를 해온다. 요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 경남 지역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기록화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는 이 대표는 현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소리 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피해 할머니 대부분이 돌아가신 '포스트 할머니 시대', 역사 주체로서 우리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피해의 연장선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위안부' 문제를 발화하는 것, 후속 세대가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기반이라도 만들어놓는 게 저의 소명입니다.” Credit 인터뷰어: 손정미 인터뷰이: 이경희 마창진시민모임 대표 글/정리: 손정미 사진 : 팝콘(popcon) 인터뷰 일시: 2024년 5월 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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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에세이 김학순 할머니,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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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 관람 후기 1991년 8월 14일 공개적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삶이 창작판소리로 되살아났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서사를 테마로 한 2024 남산소리극축제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 무대에 오른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이다. 자전적 서사에 기반해 극을 창작하는 여성과 작품, 예술인 이야기에 주목해온 연극학 연구자 이지예 씨가 이 무대에 다녀온 감상을 전해왔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어스름이 포근히 내려앉는 시간,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저 멀리 막 조명을 켠 N타워가 보이는 여기는 서울 남산국악당, 올해 2회를 맞은 '2024 남산소리극축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다. 은은한 조명이 켜지자 초록 잔디와 부드럽게 선을 이루는 한옥 처마가 더욱 돋보이는데, 개방감 있는 야외마당은 소리극축제를 함께 즐기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무대였다. 5월 8일부터 18일 사이에 열린 올해 남산소리극축제가 기획한 테마는 '여성 서사'. '여설뎐: 싸우는 여자들의 소리'라는 제목 아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소리극 4편과 창작판소리 2편, 총 6편의 소리극과 창작판소리로 선보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 투사들의 의리와 애환을 그린 시대극 '이화소리'를 시작으로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남장을 하고 대장군에 오른 여성영웅을 그린 '정수정전', 제주도 설화와 귀여운 동물 요소를 버무려 일상 속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어린이 음악극 '청비와 쓰담 특공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속 힘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배달의 신이 된 여자-배달순'과 함께 3.1운동의 불꽃인 유관순의 일대기 '유관순 열사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의 생애를 담은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가 그 작품들이다. 이 중 오늘 내가 만날 무대는 '우리소리 모색'의 대표이자 소리꾼인 정세연 대표가 작창과 각색, 소리까지 맡은 창작판소리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 마당은 소리로 먼저 열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밝고 경쾌한 자락의 소리와 함께 우아한 흰색 한복을 입고 소리꾼이 등장했다. 첫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 노래가 인사였던 것. 소리꾼은 노래를 마치고 정성스레 관객을 맞았다. 감사와 함께 마음을 담아 준비했으니 잘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에 이어 공연이 어떤 작품인지 소개했다. 이어 판소리에 빠질 수 없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 추임새 연습도 잠깐 했다. 그런데 살짝 고백하자면 추임새를 따라하는 내 마음은 많이 시끄럽고 무거웠다.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이기에 답답하고 갑갑한 제자리 걸음과 그 안에서 매번 느끼는 무력감과 부채감, 나날이 더해지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접어두기 힘들었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얼굴만을 준비해왔던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만나기에 다른 적절한 얼굴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임새를 따라하다 발견했다.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증언자에서 운동가로 걸음을 쉬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삶을 담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 주고 받는 '좋다, 잘한다, 얼씨구'는 더 없이 어울리는 추임새일 수 있는 거였다. 새로이 발견한 추임새의 효능감이었다. 구성지고 풍성한 소리, 공연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드디어 시작된 공연, 소리꾼은 국악과 양악을 넘나들었다. 대략 30분, 길지 않은 공연은 창작 레퍼토리와 익숙한 레퍼토리의 변주를 고루 품고 있었고, 덕분에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부터 오는 반가움과 새롭고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신선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구비구비 고저장단으로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를 풀어가는 정세연 소리꾼의 소리는 때론 구슬펐고 때론 아름다웠다. 해금 연주자와 고수는 때로 밀고 때로 당기며 애처로움과 긴장을 극대화하는가 하면 중간중간 다른 배역으로 무대로 호출돼 극을 풍성하게 엮었다. 그때마다 무대 위 세계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었다. 두 명의 코러스 공연자들과의 부드러운 호흡도 깔끔했다. '평화의 소녀상'과 의자에서 모티프를 따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끌고 밀고 기대고 앉는 등 소리꾼이 공연 내내 다양하게 활용한 의자는 '위안부' 시절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공간으로, 숨죽이며 탈출을 상상하는 순간으로, 막막하고 무거운 현실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됐고, 마지막에는 할머니가 평화롭게 앉을 수 있는 자리로 함께 했다. 비교적 간결한 이야기 구조와 다양한 장면으로 연출된 무대, 소품의 활용 등 '별에서 온 편지-김학순歌'는 국악을 어렵고 낯설어 하는 관객이 듣기에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공연이었다. '인권운동가'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적어 아쉬워 하지만 아쉬움도 털어놓아야겠다. 무엇보다 김학순歌라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학순의 탄생 순간과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 기생 권번에 수양딸로 팔려간 이야기 뒤에 납치돼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다시 가혹하고 신산했던 이후의 삶이 극의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음 장면은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발뺌과 왜곡에 분노한 할머니가 폭발하듯 터트린 증언. 하지만 곧 할머니의 목소리는 240명의 피해 할머니에 대한 호명으로 바뀌었고,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와 인권운동가가 되어 다시는 이 땅에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오늘도 증언을 하고 계신다'는 설명으로 넘어가더니,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짧은 발화 이후에 딸들에게 드넓은 벌판을 훨훨 날기를 주문하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막을 내렸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마무리라 박수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일본의 사죄를 위해 항변하고, 여성인권 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 투지 넘쳤던 그녀의 삶을 그려 나간다.” 고 하지 않았나! '그 증언' 이후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이들과 얼마나 많은 언어로 사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외치셨던가!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마음을 용기 있게 전하고 다니신 '평화와 인권 활동가' 김학순 할머니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정작 그 서사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무거운 주제이고, 민감한 이야기라 매 걸음이 조심스러웠을 창작자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 이 작품을 쓰셨겠다 싶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한 번 더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자리를 자꾸만 만들고 싶어 오늘과 같은 작품을 쓰고 만들고 다듬고 노래했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의미, 다른 세대와 이 기억을 나누고 새로이 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또 공연의 길이가 짧아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에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악당 같은 무대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역사와 교육의 현장에서 김학순歌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추신, 국악당의 다정했던 환대 아울러 꼭 남기고 싶은 관람 후기가 있다. 남산국악당 측의 다정하고 성숙한 환대이다. 국악당 측은 저녁시간 차가워진 밤공기에 관객들이 불편할까 무릎 담요를 준비해 필요한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금지가 없는 것도 좋았다. 플래시만 주의하면 공연 내내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공연장 내 음료 반입도 허용됐다. 이런 환대는 이틀 전 다른 극장을 찾았다가 앞자리 관객이 안내원에게 주의받던 장면과 대조적이었다. 앞자리 관객이 잠시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곧바로 안내원이 달려와 뒷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니 '바른 자세'로 앉아 달라 '부탁'하는 거였다. 물론 친절하고 공손했지만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관객들이 감각과 상상을 무대 위 다른 세계로 이입할 준비를 하는 시간을 방해한 건 정작 안내원이었다. 실제로 요즘의 관극 문화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극이 시작한 지 꽤 지나 있었다. 그런데 국악당에서는 달랐다. 휴대폰을 꺼 달라는 안내도, 자리를 옮기지 말라는 안내도 없었다. 안내가 없었어도 공연 중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고, 누구도 음료를 쏟지 않았다. 그 안내 없음이 새삼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