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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1부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1부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외쳤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3여년 간의 국내외 상황은 한일 정부 간의 양자 합의라는 틀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과연 얼마나 적절한 접근이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2011년 헌법재판소 부작위 위헌 결정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가장 많은 수의 ‘위안부’ 생존자가 등록된 한국정부는 이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성폭력과 같은 중대한 인권문제에 피해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할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은 석연찮은 비밀협상으로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둘러 문제를 종결하는 데에 역점을 둔 합의를 해버렸다.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위안부’ 문제 해결의 협상에서 여성인권과 성폭력, 그리고 피해국 정부의 역할은 과연 어느 정도 고려되었을까? 한일합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스스로 생존자이며 평화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존자들도 몇 분 되지 않는 2019년 봄,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합의의 역풍으로 인해 오히려 지금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참여자가 늘어나고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도 ‘위안부’ 문제에 더 공감하고 있다. 이제 남은 우리들에게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책임의 인정과 같은 가해자의 반성을 통한 “해결”의 틀을 넘어 이 문제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필자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와 한일관계라는 국가 및 국익 중심의 인식적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이라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해 왔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최대 피해국인 한국을 넘어, 일본이 전쟁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인도네시아 주재의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 빈번했던 민족분쟁에서 전쟁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성폭력을 범죄화하는 국제여성인권규범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20세기에 발생한 국가에 의한 여성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었고,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집단적 기억을 통해 재발을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인류의 공동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성격을 가지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여기서는 아래에서 논하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초국가적이고 글로벌한 성격을 검토한다.   1.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국가의 공통의 전쟁피해이다. 먼저 ‘위안부’ 문제의 피해상황을 보자. ‘위안부’ 문제는 한국(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광범위하고 공통된 전쟁피해이다.   위안소 분포지도에서 보듯 그간 연구에 의해 밝혀진 위안소만해도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수백개가 넘는다. 일본, 조선, 대만의 ‘위안부’는 주로 군의 관여하에 강제 모집되고 운영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현지여성들을 모집하거나 납치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거나, 현지여성을 납치나 폭력으로 제압하여 가두고 강간하였다. 이렇게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위안소의 ‘위안부’ 또는 전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해를 숨기고 살아오다가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그 일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아시아 미해결의 아시아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2.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여성인권규범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의 증언으로 가시화된 이후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곧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어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세계여성인권규범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0년에 한국여성들이 처음으로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정식 제기했을 때 일본 정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책임을 부인하였다. 그러자 지원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엔 인권기구에 문제제기를 하기로 하였다. 1992년에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일본 시민단체도 같은 해 2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그리고 5월에는 현대형 노예제 실무회의에서 강제연행 노동자 문제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당시 인권소위원회의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 특별보고관 테오도르 반 보벤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2월에는 국제인권기구의 전문가들이 동경에서 한국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당시 유엔에 한국 측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던 일본인 변호사에 따르면 일본 관련 다른 어떠한 인권 문제들도 그만한 주목을 받은 예가 없었을 만큼 ‘위안부’ 문제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한다. 여성 폭력문제를 다루던 글로벌 여성인권 네트워크의 반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1993년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여성인권규범의 발전에 큰 분기점이었는데 ‘위안부’ 생존자들은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직접 증언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는 탈냉전 이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인권 문제에 기존의 인권 레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기 위해 개최된 만큼, 이 회의에서 세계여성단체들은 기존 인권 레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를 내걸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그해 12월에는 유엔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 선언(Declaration of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을 비롯한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에 북한, 필리핀의 NGO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아시아여성포럼을 열었다. 또한 샬롯 번치 등이 개최한 ´여성인권국제법정´에 김복동이 참여하여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증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들로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에 전쟁 중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엔나 선언 및 행동 강령 38번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분쟁 하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인권 침해는 국제인권법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며 여기에는 살인, 조직적인 강간, 성노예, 강제 임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popuptitle="비엔나 세계인권회의" data-url="/taxonomy/term/409">비엔나 세계인권회의의 최종 결의사항에는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반영해 유엔 인권위원회(UNCHR)에 여성에 대한 폭력실태를 조사하는 특별보고관 제도(Special Rapporteur on Violence against Women)를 신설할 것이 포함되었다. 1994년에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가 그 첫 번째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녀는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여성폭력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최초의 유엔기구의 보고서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글로벌 인권 문제로 이슈화되었다. 1995년에는 베이징에서 제4차 유엔 세계여성회의가 열려 여성폭력 문제의 근절이 주요 과제로 논의되었으며 ‘위안부’ 문제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졌다. 1990년대 초는 특히 보스니아 전쟁 및 르완다 내전과 같은 민족분쟁에서 집단 강간 및 강간소와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두 전쟁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를 재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은 전쟁을 위해 계획된 수단임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계획된 성폭력은 ‘인도(人道)에 반하는 범죄’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국제상설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1998년 로마조약에서 강간, 성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과 불임, 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정의하고 국제법사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1990년대는 여성인권과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국제규범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많은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1996년에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에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채택된 맥두걸 보고서, ILO 보고서, 인권고등판무관 연례보고서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위안부’는 성노예(sex slave)로, 위안소는 강간소(rape center)로 개념화되었다. 특히 맥두걸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의 문제를 다루고 범죄 책임자 처벌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에 기반하여 지금까지 많은 국제인권기구들이 일본 정부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수많은 권고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신기영

  •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2부
    2019년 논평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2부

    ‘위안부’ 문제를 새롭게 사유한다 ‘위안부’ 문제의 초국가성과 기억의 글로컬화   3.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연대회의」를 비롯한 국제적 시민연대가 주체가 되어 해결을 요구해왔다. ‘위안부’ 문제의 피해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걸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여성·시민단체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 국가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부상했을 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의 시민들이었다. 특히 일본 시민들은 한국 및 아시아 각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초기부터 가장 진지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알 수 없던 1990년대 초부터 아시아 각국의 피해상황에 대한 조사,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수많은 생존자 증언회 개최를 비롯하여, 특히 각국의 생존자들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시작하자 재판 지원을 위해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각국단체들과 생존자들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여성들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재일조선인 생존자를 지원하고 한일단체의 가교 역할도 하였다.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은 생존자에 대한 정보공유와 공동의 활동을 위해 「아시아연대회의」라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공동행동을 취해 왔다. 1992년 서울에서 제1차 회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성과는 2000년의 도쿄여성법정의 개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책임 인정과 생존자 구제에 대한 요구가 계속적으로 묵살되자 시민들의 손으로 민중법정을 연 것이었다. 이 도쿄여성법정에는 1990년대 초 구 유고 및 르완다 내전을 재판한 국제전범법정에서 활약했던 국제법과 전시 성폭력 전문가 및 재판관들이 참여하여 3일간에 걸친 재판을 진행했다. 아시아 국가와 네덜란드 등 9개국에서 64명의 피해자가 원고로 참여하여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책임자들을 기소하였다.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이 겪은 다양한 피해 상황이 상세히 드러났고, 여성법정은 이러한 증언들을 사실로 인정하여 국제법에 따라 기소된 책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가해자 처벌만이 정의를 회복하는 수단은 아니지만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재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대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루면서 형성된 국제규범이었다. 사실 인정, 사죄, 배상, 진상규명, 역사교육, 추도사업, 책임자 처벌과 같이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및 아시아의 지원단체들이 제시한 해결 조건은 그와 같은 인권규범의 축적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이후에도 일본 정부에 해결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특히 2014년 5월 31일에서 6월3일까지 동경에서 열린 제12차 회의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후퇴를 막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생존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가는 와중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이 이미 일본 정부가 인정한 고노담화마저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는 데 대한 대처를 강구한 것이다.   연대회의 참석자들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사죄는 누가 어떻게 가해행위를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식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이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국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표명하고 그러한 사죄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수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과 책임인정 및 해결책을 요구하였다. 1) 사실과 책임을 인정. -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이 군 시설로 위안소를 입안, 설치하고 관리, 통제했다는 점 -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성노예’가 되었고, 위안소 등에서 강제적인 상황에 놓였었다는 점 -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식민지, 점령지, 일본 여성들의 피해는 각각 다른 양태이며, 그 피해가 막대했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 -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점 2) 위의 인정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 -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사죄: 사죄의 증거로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 - 진상규명: 일본 정부의 보유자료를 전면공개하고 일본 국내외에서의 새로운 자료조사, 국내외의 피해자와 관계자의 증언조사를 실시할 것. - 재발방지 조치: 의무교육 과정의 교과서 기술을 포함한 학교교육, 사회교육, 추모사업 실시. 잘못된 역사인식에 근거한 공인의 발언금지 및 공인의 발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공식적으로 반박할 것 등.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가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했던 번복할 수 없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죄는 2015년 한일합의에서 ‘위안부’ 문제의 합의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역이용되고 말았다.   4. ‘위안부’ 문제는 국제기구의 권고 및 다국적 의회의 결의안을 통해 국제적인 승인을 확대하였다. 일본은 다양한 국제인권조약의 체약국이다. 예를 들면, 1985년에 여성차별철폐조약에 가입하여 체약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체약국의 의무인 조약이행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왔다. 여성차별철폐조약 이외에도 인종차별철폐조약, 자유권규약, 사회권규약, 고문금지조약, 아동권리조약, 장애인권리조약, 강제실종자조약을 비준했다. ‘위안부’ 문제가 대두한 이래, 여성단체들은 이들 인권조약위원회에 ‘위안부’ 문제를 개진했다. 조약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심사보고서에서 거의 모두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권고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 중에서도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및 한국의 단체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활동한 위원회로, 1994년 1월의 2,3차 통합심사 소견에서 가장 먼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국제인권조약위원회들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조치를 촉구하는 권고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 직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영구적인 해결을 선언한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국제인권기구들은 이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다만, 1990년대의 탈냉전기에 유엔 기구와 인권규범에 대해 기대했던 역할은 사실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기구는 특히 일본과 같은 선진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강제력과 규범적 정당성이 없어 아직도 일본 정부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인권기구의 지속적인 권고로 인해 2000년대 후반에는 캐나다, 미국 및 유럽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사회의 인식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5. ‘위안부’ 문제는 기림비 건립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자발적 지역운동으로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많은 생존자가 돌아가심에 따라 “해결”에서 “기억”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현 일본 정부는 생존자에 대한 해결에는 소극적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활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소녀상 철거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국면이 오히려 시민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역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세를 교육하고 기억하는 일이 중대인권침해의 재발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기림비와 박물관은 기억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최초의 기림비인 평화비(일명 소녀상)는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제작되어 서울주재 일본대사관의 맞은 편에 설치되었다. 이 소녀상은 「수요집회」라는 상징적인 시민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의 제약성을 무한정으로 확대하였다. 평화비는 이를 보는 개인들 각자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어 지역주민들이 건립한 새로운 기림비가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 크기도 형태도 다양하여 그 지역이나 설립자에 따라 지역화된 기림비가 건립되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나비형태나 다양한 모습의 여성은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이 로컬화(지역화)된 형태이다. 처음 서울에 평화비가 건립되었을 때만 해도 소녀상이 ‘위안부’ 문제를 특정 이미지로 고정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이나 “‘위안부’ 문제” 그 자체가 지역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시민들은 각자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그 의미를 재사유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는 주체, 기억하는 방식, 그 기억의 내용은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다.   6.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 #미투시대에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확대하였다. 2017년 말부터 미투운동(MeToo·성폭력 고발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 한번 새롭게 사유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강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성폭력의 사회적 구조를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쟁 후에도 수십 년간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생존자들이 침묵시켰던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수많은 일상적 성폭력을 재생산하면서 아직도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미투에서 드러난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피해자 비난, 그리고 여성의 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젠더 권력 구조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지원해 온 이들이 ‘위안부’ 생존자들이야말로 최초의 미투운동가라고 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투의 상징적 존재인 이토 시오리(프리랜서 저널리스트)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녀 자신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힘들게 진행하면서도 전세계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기록하여 성폭력의 실태와 구제방안, 그리고 생존자들의 용기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삶과 투쟁은 이토와 같이 미투를 외친 21세기의 생존자들에게도 용기와 위안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이제 생존자들의 피해와 해결로 축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종결을 선언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여성인권의 세계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처음부터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그들을 지원한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세계화되었다. 이제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들을 수십 년간 지원해 온 시민들은 기억과 교육을 위해 또 다른 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유네스코 인류기억 유산 제정을 위한 국제연대의 노력이나 한국에서 뒤늦게 발족한 정부지원의 연구소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세계 시민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창조적이고 로컬화된 기억과 교육활동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그러한 자발적인 지역활동의 세계적인 확산에 의해 앞으로도 유지되고 계승될 것이다.  

    신기영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2019년 인터뷰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안해룡, 이토 타카시 인터뷰  남과 북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 만나는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가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여성가족부 지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최로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에서 열렸다. 사진전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에서는 북측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리경생(1917~2004)을 비롯하여 김대일(1916~2005), 곽금녀(1924~2007) 등 14명과 김복동(1926~2019), 황금주(1922~2013), 윤두리(1928~2009) 등 남측 피해자 10명의 사진과 증언이 전시되었다. 일본의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伊藤孝司)가 북측을, 다큐멘타리 감독 안해룡이 남측 피해 생존자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학순이 기자회견에서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증언한 이래 남과 북의 ‘위안부’ 피해자를 기록한 사진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북측 피해자 사진이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최초이다. 아래의 인터뷰는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와 관련하여 전시 전 안해룡 감독과 이토 타카시 작가가 이메일로 나눈 서면 인터뷰로, 이토 타카시 작가가 어떻게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있다.   안해룡 조선인의 강제동원이나 군인, 군속,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서는 어떻게 취재하기 시작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저는 처음에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처음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본인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다가 조선인도 피폭을 당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몇 번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갔었지만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문제는 반드시 취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원폭피해자를 처음에 취재했고, 한국에 가서도 원폭피해자를 만났습니다. 이 취재 때문에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안해룡 그러면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후에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원폭피해자를 취재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힘든 고통을 겪은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을 취재하고, 이후 이런 인연으로 강제동원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에도 자주 가게 되었지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1991년 10월에 처음으로 실명으로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실명으로 증언한 김학순 씨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91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안해룡 북한까지 방문해서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을 가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군인 군속,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취재했고, 한국 이외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돌며 일본에 의한 전쟁 피해자들을 취재했습니다. 그런 곳도 취재를 해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계속해서 전부 다 취재했어요. 유일하게 가지 못했던 곳이 북한이었어요. 1991년에 신청을 해서 이듬해인 1992년에 강제연행 등을 조사하는 그룹이 북한에 간다고 해서, 거기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갔어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해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명 정도를 만났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밖에는 취재를 할 수가 없어서 저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취재를 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단독으로 간 것이 1998년이에요.   안해룡 두 번째 방북을 해서는 어떤 취재를 하셨나요? 이토 다카시 평양과 원산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그리고 강제동원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군인 군속으로 전선에 끌려간 사람들, 종교탄압을 받은 불교도, 기독교들을 취재했어요. 안해룡 취재 때 가장 인상에 남은 사람이나 장소는 어딘가요? 이토 다카시 그때 가장 많이 만난 것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인데요. 그녀들도 해방 후에 일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몇 십 년 만에 만난 일본인인 저에 대해서 자신의 원한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을 심하게 추궁했는데요. 남성인 저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듣다 보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취재를 했지만 굉장히 괴로운 취재였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 관계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피해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나던 북한 정부기관 관계들이 통역을 해주었는데요. 가끔 여성이 통역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할머니들의 비참한 경험을 듣고 저에게 통역을 해주면서도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저에게 전해졌어요. 통역자 본인의 감정도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피해자 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 여성들도 그것에 대해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안해룡 북한의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한국의 피해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북한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 지역이 한국과 북한의 피해자들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북한의 피해자들은 만주나 중국 대륙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국의 피해자들은 대만이나 미얀마 등 남쪽으로 끌려간 경우가 많지요. 안해룡 북한에서 만났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가운데 인상이 남는 분이 계신가요? 이토 다카시 1998년에 만난 정옥순 할머니입니다. 처음에 만난 그녀는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어요. 굉장히 멋쟁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머리에 있는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어요. 일본군이 그녀의 몸 전체에 문신을 새겼어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들켜서 군인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 거예요. 가슴과 배, 그리고 입 안까지 아이가 낙서를 한 것 같은, 무얼 새겼는지 알 수 없는 문신이었어요.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혹독한 경험을 내게 남김 없이 털어놓았어요. 들으면서 말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일본인인 저를 향해서 자신의 원한을 풀듯이 이야기를 했고, 중간에 일어서서 저에게 다가왔어요. 저로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제 눈앞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의 고통이 정말 절실히 전해져왔습니다. 정말 괴로운 취재였어요. 그녀들이 얼마나 참혹한 경험을 했는지 정말 가슴속에 새겨졌다고 할까요? 그런 취재가 되었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피해를 당했지만, 이 가운데 할머니들이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아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매우 비인도적이고 잔인했다는 것이 그녀들이 받은 피해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몇 분을 만나셨나요? 이토 다카시 1992년에 처음으로 4분의 할머니들을 만났고 그 후 모두 14명의 할머니들을 만났어요. 안해룡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할머니들이 있나요? 이토 다카시 2017년에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만날 수 없을까 요청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났던 14명 중 13명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고, 나머지 한 분도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안해룡 여러 차례 한국과 북한에 가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해오셨는데, 오랜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토 다카시 한국이나 북한의 피해 할머니들이 처음에 저를 대할 때 굉장히 경계를 했어요. 이는 일본인 남자가 인터뷰를 하러 왔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물건을 던진 할머니도 있었고, 저에게 역으로 질문한 할머니도 있었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면서,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인터뷰를 당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요. 몇 번이나 만나서 얘기를 하는 가운데 신뢰관계가 생겨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어요. 저도 그녀들과 진심으로 마주 대하고 인간끼리 정면으로 부딪쳐서 서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이 있지만 사람 사이에서 정말 마음을 서로 나눈 것 같았어요. 이분들이 잇달아 돌아가시고 있는 것이 괴롭습니다.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를 만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토 다카시 역시 그녀들, 할머니들이 당한 피해는 너무나 심각했어요. 예를 들어 전후 해방 후에 육체적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한 경우에도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경우도 있어서 계속 과거의 경험을 숨겨왔다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실제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 말도 안 되는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해룡 북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토 다카시 일본과 북한 사이에는 국교가 단절되어서 국교정상화 회담을 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북일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예요. 저는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신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저질러진 매우 중대한 일본의 범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이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이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는 한, 이 피해를 당한 사람, 가족,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계속 비판할 것이고, 이는 다음 세대까지 계승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명확하게 청산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일본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해룡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취재를 이렇게까지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토 다카시 일본 내에서도 저처럼 이렇게 일본의 과거의 가해를 계속 기록하는 것이 지극히 보기 드문 존재가 되었어요. 일본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의 피폭자와 처음 만난 뒤 계속 이 문제를 취재를 해왔는데요. 그 만남이 없었다면 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하나의 운명과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일본 내에서 저 혼자일지라도 일본의 가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확실하게 기록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어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도 있구요. 이렇게 취재한 것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아서 한국이나 북한, 아시아에서 피해를 당한 나라의 사람들과 제가 취재한 내용이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번역 안해룡   행사개요 제목   사진전 <남과 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일시   2019년 3월 6일(수)~3월 11일(월) 장소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제2전시장 주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관   아시아프레스  

    안해룡, 이토 타카시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한국의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주로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웹진 <결>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중적 논의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재미있는 대담을 기획했다.   첫 번째 대담자인 정영환 교수는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난 '조선적 재일동포 3세'로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음과 동시에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이다. 현재 메이지학원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재일동포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대표 저작인 2016년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정영환, 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2016)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해 논란을 빚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이, 2013)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대담자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 한국 국적의 신분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보다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교수를 모신 대담은 시간적,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DAY 1> 정영환, 박노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웹진 <결>입니다. 두 분을 모시고 온라인 대담을 진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 대담 위키는 두 대담자가 물리적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온라인 상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 용이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온라인 대담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되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주제의 위키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한 번씩 본 위키에 접속해서, 새로 개설된 주제의 위키에 각자의 의견을 직접 적어주시면 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글은 기간 내에 언제든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첫째 날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제기와 여론 확산은 한국(남한)의 ‘위안부’ 피해자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한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 사이에서도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한국 외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Q1.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대한민국(남한)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주로 남한 피해자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Q2. 더불어 대한민국(남한)에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선 어떤 논의와 과정이 필요할까요? Q3.  앞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할까요?   박노자 A1.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의 틀 안에서 처음에는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는 '우리' - 즉 남성 본위의 국가/국민 공동체 - 의 여성들에 대한 일제의 유린이라는 방식으로 많이 이해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통 '대한민국' 국경으로 확정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거니까 다양한 거주지, 국적, 민족에 속하는 다른 피해자들이 잘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박근혜 씨의 시절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문제'로 프레이밍해서, 일본 국가와의 '타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기초부터 잘못된 접근이죠. 물론 '한일관계'와 유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양한 피해자에 대한 전시 성폭력의 문제, 즉 인권 문제이자 젠더 문제, 그리고 식민지적 폭력의 문제입니다.   A2. 남한에도 북한에도 '위안부' 성노예 제도의 피해자 분들이 거주하십니다. 이북에서 거주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본적이 남한인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사실상 광의의 '이산가족' 범위에 속하시기도 하죠. '위안부' 문제가 논의될 때에 남이든 북이든 해외든 어디에 거주하시든 모든 피해자들이 이 논의에 포함돼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선구적으로 언급하고 활동해온 총련 등 해외 동포 단체들의 노력도 남한에서도 분단의 벽을 넘어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A3.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던 피해가 특히 컸다는 사실도 당연히 있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위안소'란 다양한 지역, 민족, 국가 출신의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한 전시 성폭력, 성노예화 국가 범죄입니다. 이 차원에서 본다면 '한-일 프리즘'으로만 봐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의 일차적 본질은 일본 국가와 군대의 젠더적 폭력 행위지만, 동시에는 계급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빈농, 빈민의 딸들이야말로 일군의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곤 했습니다. 이 범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일본 국가와 군대에 있으며, 반인륜 범죄인 만큼 공소시효가 원칙상 없는 거죠.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공소장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연합국(특히 미국)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책임 유기에 대해서도 한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당국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정영환 A1. 이 문제를 검토할 때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위한 시민운동과 일반 여론이나 언론, 정치권의 동향은 구별해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시작한 시민운동은 비교적 일찍이 '남한'이란 틀을 넘어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중국, 동남아, 유럽,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피해자나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이루어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이렇게 볼 때 애초부터 남한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국경을 넘은 여성들의 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고, 북측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1990년대에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의 도달점이 2000년의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1980년대 이래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치열하면서도 창조적인 투쟁이 있었고, 특히 이 운동이 탈분단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지역적,공간적으로 남한의 틀을 넘어 일본군의 성폭력 피해를 받은 각 지역의 당사자나 지원자, 활동가들과의 인연을 맺고 경험을 교환하며 함께 일본군의 책임을 추궁할 뿐 아니라,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나 콩고 내전의 전시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이루고 있어, 시간적인 제한을 넘어서 보편적인 전시성폭력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의 큰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런 해결운동이 이룩한 국가적인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성과가 남한의 대중적인 매체나 정치권에서 재현될 때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시각으로 전환되어버리는 데 있겠지요. 저는 일본에 거주하고 남한에서 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알기는 어려운데, TV나 신문, 잡지에서 다루어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질문하신 대로 '남한 피해자 중심'적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발생한 원인으로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의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역사적인 단계를 구분해서 검토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948년이래의 반공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직접 작용한 결과뿐만이 아니라-물론 반공주의를 제외하고 한국의 '분단적 시각'의 문제를 파악하지는 못합니다만--1987년의 민주화이후의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제한성과 문제점—1987년체제가 갖는 '분단적 시각'—을 도마 위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Q2와 관련이 있기에 차후에 재론하겠습니다.   A2. '탈분단적 시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을 정리/공유하면서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웹진 <결> 편집팀 측에서는 '분단적 시각'을 북측이나 재외동포의 존재를 외면하여 한국의 피해자 중심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정의를 한다고 저로서는 받아들였습니다. 이 개념을 전제로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앞서 남한과 일본의 관계에 제한된 인식의 틀이 형성된 배경에는 내셔널리즘이 작동하였을 뿐만 아니라—저는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제2차세계대전 후의 전후세계질서,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의 심대한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의 전쟁/식민지지배 책임문제를 연합군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형사적인 책임(동경재판)도 민사적인 책임(배상청구권)도 남북은 부정당했습니다. 1948년의 분단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일강화에 틀에서 배제되었고 한국은 또한 강화회의에 참가를 못 한 채 미국 패권하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한일회담을 시작하게 됩니다(1948년, 1952년 체제). 그래서 식민지 배상문제는 애초에 '청구권문제'로 환골탈태되어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재산의 반환'이란 틀에서만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이 결과 한일기본조약과 각 협정이 맺어지게 됩니다. 즉 1965년체제의 형성입니다. 1965년 체제는 두 가지의 논의를 '봉인'한 체제였습니다. 첫째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피해논의의 '봉인', 둘째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봉인'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일본이란 쐐기를 식민지기 피해자와 정부, 그리고 남북 간에 박았던 체제이지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여전히 '분단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배경에는 이렇게 전후체제가 만들어낸 다층적으로 얽힌 체제—1948, 1952, 1965년 체제가 남한에서 식민지의 피해문제를 바라보는데 인식의 틀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문제는 남한의 대내적인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문제이면서도 위계적인 국제관계로서의 전후체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1965년 체제에 대한 재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1948년 체제는 공고합니다. 2018년 10월 30일의 신일철주금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획기적인 손해배상 판결(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1965년 체제에 대한 귀한 토전이었던 반면에 원고중에는 전시 말기에 청진의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식민지지배하의 피해에 보상에 관한 쟁점은, 이건 대한민국 헌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논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후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탈분단적 시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 필요한 논의로서 한 가지 올리자면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와 여성주의적 시각의 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재일조선인사 연구로부터 시작했는데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둘러싼 논의에 개입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특히 일본에서의 주류 여성주의 시각에서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탈민족주의/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한국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녀상 비판과 『제국의 위안부』 옹호에 합류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반식민주의는 민족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오해될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가져오는 억압은 피지배자를 민족적으로 배제함과 동시에 개급, 젠더적인 차원에서의 분단을 이용하여 증복시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런 근대세계가 낳은 부의 측면을 근면하게 습득하여 그 폭력성이 전면적으로 틀어난 된 제도가 일본군성노예제도였던 만큼 저희들의 시각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식민주의에 대한 검토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성인권의 보편성이란 가치는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결부할 때 처음으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A3.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 처럼 그간의 해결운동은 이미 '탈분단적 시각'에 입각하여 많은 실천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강조를 하게 됩니다만, 이미 운동은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실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일동포들도 그렇습니다. 그 실천에 배우면서 '외교적'차원에 해소되지 않는 당사자와 활동가, 연구자의 경험과 연구를 축적하며 역사화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법정에서 배우면서 일본군의 만행과 책임을 더욱 체계적으로 밝히고 남북의 교류를 통해 이북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의 증언수집과 경험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또한 세계의 식민주의하의 전시성폭력의 진상규명을 위해 실천하는 활동가나 연구자를 맺는 거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DAY 2> 에서 계속됩니다. 

    정영환, 박노자

  •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2019년 좌담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첫 번째 날 두 분의 답변을 들어보니 '탈분단적 시각'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남한의 '분단적 시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총련을 포함한 해외동포단체 등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연구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남한의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내에서 출판되는 혐한서적에서 '위안부'는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의 단골 소재입니다. 일본과 맥락은 다르지만, 남한 역시도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남한의 언론에서는 누군가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거나 책임을 물을 때, 주로 ''위안부'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예시로 들곤 합니다. 헤이트스피치와는 상당히 다른 결이지만, 어떤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선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운동 혹은 연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한에서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차원에서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란 요원하기만 합니다. Q1. 그렇다면,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한-일 프리즘'을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운동적 측면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수요집회나, 소녀상 프로젝트 등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대중적 캠페인이 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담기 위해선 어떤 부분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Q2. 서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입니다. 본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정영환 선생님께서 박노자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선생님께서 정영환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1.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1  2.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2 3. 정영환X박노자 온라인 대담 - 탈분단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위안부’ 문제 DAY 3   박노자 A1. 네, 정영환 선생님께서 훌륭하게 지적하신 대로 사실 굳이 운동 진영에는 이렇다 할만한 '주문'을 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초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운동가들은 이미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전시 성폭력 문제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보기에 귀중한 것은, 최근에 별세하신 김복동 할머니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과 손을 잡고 연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콩고 등지에서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 위에서 정영환 선생님께서 지작하셨듯이 - 참 귀중한 성과죠. 문제는, 정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무엇보다 매체와 교육체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치권입니다. 매체들은 예컨대 중국이나 필리핀, 아니면 파푸아뉴기니 여성들이 납치, 감금당하고 성노예화 당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자주 합니까? 아마도 다수의 한국인들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 네덜란드와 인도, 파푸아뉴기니 출신의 여성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전쟁 범죄의 국제적 성격이나 세계적 규모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돼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 정치권은 베트남 전쟁 시절의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대통령, 국회 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을 하고, 교과서에 한국 전쟁 시절의 한국군 범죄상을 정확히 기술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등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성해야 할 것인가를 나서서 행동적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정영환 A1.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나 활동을 하는 저에게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획일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일본 리버럴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혐한과 반일,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등가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위안부'문제에 대해 지속적이며 대중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고 그 자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다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유보하면서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남한에서의 대중적 캠페인이 국내용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애초에 증언을 하셨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본문제입니다. 피해자의 출신지역은 다양하고 피해의 양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모든 피해자들이 일본군, 정확히 말하면 천황의 군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성노예제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들의 치유와 경험의 공유나 다양한 문화적 재현 등, 남한의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도는 귀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는가, 이후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자신들 나라의 과거의 만행을 직시하여 기억하는가, 이것이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쟁점이 됩니다. 아울러 Q1의 전제가 된 부분에 관해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총련을 포함한 재일동포단체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주된 운동과제가 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총련 내부의 문화도 젠더 평등,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재일조선인 운동 내부의 젠더 불평등을 극복하려고 하는-주로 여성의-활동가들이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자진해서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에 입각한 실천을 시작하고 있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근 매해 4월 23일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기념하여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다양한 액션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날은 1977년에 배봉기 할머니 증언을 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가 처음으로 보도한 날입니다. 남한에 국한된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 분단과 대립이 격렬했던 시기에는 남한에서 이런 증언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공유할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단과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남한 사회가 외면해왔던 해방후의 역사를 다시 묻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 온라인 대담은 팀과 커뮤니티를 위한 민주주의 플랫폼 '빠띠'에서 이루어졌다     Q.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묻다 정영환 선생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은, 일본 사회에서의 전쟁 범죄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일반인들이 식민주의와 전쟁의 사실을 과연 어디까지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젊은 일본인들의 상당수가 아예 조선과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조차도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는데,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 '앎'의 형태와 지형에 대해서 한 번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A.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답하다   박노자 선생님,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고 또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젊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관해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원래 수험의 관계상 비중이 높지 않는 근현대사는 수업에서 안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과서의 내용도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서 가해의 사실을 학교교육에서 가르쳐야한다는 기운이 한때 있기는 했는데 1997년이후 극우파의 역공의 결과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가해사실의 서술은 대폭 줄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서 주로 1, 2학년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역시 식민지배나 침략전쟁의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지식이 거의 없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서점이나 인터넷 상에는 '혐한', '혐중' 서적들이 넘쳐 청년들이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도 처음 접하는 정보가 이런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대중역사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애초부터 '혐한'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본의 가해 사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기는 한데 그런 관심을 품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통로가 너무나 좁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층을 포함한 일본 대중들의 '앎'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만, 그와 더불어 사실을 인식하는 틀이나 프레임을 매체들이 어떤 형식으로 제공하는지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TV 등의 대중매체는 기본적으로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대외관계를 해석하는 메시지를 거듭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문화, 혹은 일본인이 외국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고 있는지 일본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주로 구미권출신자)이 일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소위 일본 '스고이(대단하다)'의 대합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침략이나 가해사실을 적시하는 비판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일본을 '혐오'하는 '반일'로 표상이 됩니다. 작년 2018년 10월의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응에도 나타나듯이 일본 사회의 전쟁 범죄 문제에 관한 인식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비판에 대한 반발이 우세합니다. 대법원판결 직후 아베총리는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는데 주류 언론들은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한국이 이 약속을 어겼고, 이 판결은 한일관계의 악화를 초래한다는 분석이 TV나 신문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일' 한국 때문에 외교관계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친일/반일'프레임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주류언론의 인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그래서 '일부 매체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하게 됩니다. 즉 이 프레임 자체를 의심하고 일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제 관점에서 볼 때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게 지금 일본의 현실입니다.   Q. 정영환이 박노자에게 묻다 이번 대담에서는 주로 '분단/탈분단'이 주제가 되었는데 저는 박노자 선생님께 좀더 다른 각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한국자본주의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한 질문입니다. 남한의 주류사회의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계급적 관점의 부재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족' 담론의 틀 내에서 '위안부'문제를 재현할 때 젠더적 관점과 함께 계급적 관점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자본주의하의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성착취 구조나 성매매'문화'와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방식에는 연관성이 있을 것인데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분석을 하십니까?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A. 박노자가 정영환에게 답하다 정영환 선생님, 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자주 생각해왔습니다. 상당수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주의가 문제'라고 재단하지만, 사실 '민족주의'라는 관념은 하도 다의적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정확히 "어떤" 민족주의가 "어떻게" 문제되는지를 명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식민지라는 트라우마를 지니는 것도 '민족주의'와 이렇게저렇게 엮일 수 있는 부분인데, 식민지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식민 모국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제대로 지지 않은데다가 한국의 지배층이 오랫동안 식민지적 습성들을 그대로 간직해온 부분들이 커서, 그런 트라우마가 크다는 건 그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되는 민족주의의 종류는 바로 자국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국가주의적 태도, 소위 '국익주의'나 '대한민국주의' 같은 현상들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또 한국 자본이 침투하고 있는 지역들, 특히 동남아에 대한 불량하고 우월주의적 태도와도 불가분의 연관을 가집니다. 세계체제라는 먹이사슬에서 한국 자본들은 이미 준핵심부와 같은 위치에 올라 있습니다. 구미권 자본들이 한국의 금융권 등을 좌우하는 동시에 한국 자본들이 동남아 등지에서 저임금 노동 착취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한국 언론들이 '국익'을 위한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하고 당연시합니다. '진보언론'들마저도 미얀마 등지에서의 한국 토건 자본들의 이권 챙기기 등을 반기고 있죠. 한국 자본과 함께 각종의 섹스관광 등의 국내의 가부장적 추태들이 대량 수출되고, 한국 언론매체에서 한국인 가족의 '며느리' 역할과 한국 남성들의 성적 욕구들을 '해결'해주는 동남아 여성상이 계속 등장됩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와 같은 현수막들을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류 제국주의라고 할만한 분위기 속에서는 동남아나 파푸아뉴기니 등지의 성노예들의 비극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지죠. 쉽게 이야기하면 한국 자본이 구미권과 일본 자본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는 상황에서는 국내인들의 "제3세계"와의 연대 의식 등이 계속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단히 국내 여론 공간에서 문제 제기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DAY 3>에서 계속됩니다.

    정영환,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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